[한국사 미스터리]‘한성백제 500년 역사’찾아낸 이형구
2001년 어느 날이었다. 기자가 어느 고고학자를 취재하다가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던데…”하고 묻자 그 교수는 한마디 툭 던졌다. “이형구 교수가 누구죠?”. 기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풍납토성을 ‘발견’함으로써 잃어버린 한성백제 500년 역사를 부활시킨 이형구 선문대 교수. 철저하게 무시당한 ‘한성백제의 슬픈 역사’를 닮았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국립 대만대 고고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주류학계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았다. “이형구가 누구냐?”는 말은 바로 그 따돌림의 상징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아무리 풍납토성 등 한강유역 백제유적의 중요성을 떠들고 다녔어도 그에게 돌아온 말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끈질기게 도전했다. 1,500평에 불과했던 석촌동 유적보호구역의 범위를 1만7천여평으로 늘려 놓았고 85년엔 올림픽 대교를 사이에 둔 강북~둔촌동 도로계획(풍납토성을 관통하는)도 바꿔놓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97년 새해 우여곡절 끝에 현대아파트 공사장에 들어가 ‘폼페이 발견’에 비견된다는 풍납토성의 존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그럴 리 없다”는 학자들의 무시와 경멸, 그리고 재산권을 침해받는 주민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집까지 찾아와 자행하는 갖가지 협박과 “어떤 X이 이형구냐”며 퍼붓는 욕설을 당해야 했고 때로는 멱살을 잡혔다. 심지어는 ‘이형구 화형식’까지 벌어졌으니…. 그러나 역시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건 기존학계의 무시이다. 통설이라는 건 그야말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통설을 신주 모시듯 하면 학문발전이라는 게 있을까.
이교수가 지금도 어이없어 하는 건 어떤 교수가 풍납토성 발굴 때 했다는 말이다. “(유물이 나온다 해도) 개인의 재산권이 중요하므로 보존은 불가능하다.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며 비민주적인 발상이다”라는 요지의 발언. 그런데 지금은 “풍납동 같은 중요한 유적에서…”라는 말을 한다니. 최근 풍납동 주민들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소규모 주택의 증·개축은 허용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60여곳의 증·개축 공사현장에서 단 한 곳의 예외도 없이 백제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한성백제 500년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역사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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