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9:18

경향신문 

 

 [한국사 미스터리](4)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上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홍수가 쓸고간 자리에서 백제시대 제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제의 청동제 초두 등 중요 유물이 발견되어 총독부 박물관에 신고된 것이다. 일제는 즉각 이 토성을 ‘풍납리 토성’으로 불렀고 광복 후에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사적 지정 범위는 일제시대 지정된 범위 그대로였다. 즉 잔존하고 있는 토성벽만 지정하고 그 외는 지정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벽 내부는 아무런 조사 없이 급속적인 개발로 말미암아 도시로 변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지정 보호받고 있는 범위가 성벽에 지나지 않아 한마디로 속은 버리고 껍데기만 지정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백제의 경우 BC 18년 건국 이후 사비시대인 부여에서 660년 멸망할 때까지의 약 700년 역사 가운데 한성백제 약 500년은 망각한 채 겨우 200여년간 버틴 공주와 부여만을 백제로 알고 있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철통같은 기존학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일 뿐”=1964년, 필자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스승인 삼불 김원룡 선생은 서울대 고고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풍납토성을 찾아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토성의 북벽 가까운 곳에 8곳의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초기백제 토기편들이 나왔다.

선생은 이 결과를 정리하여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후 1세기부터 초기백제인 한성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1967년 발표했다. 말하자면 김원룡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백제의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고대 사학계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묵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고대 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 한강변에 풍납토성을 쌓을 만한 힘이 있었을 리 없고 한성백제가 명실공히 강력한 왕국으로 고구려·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바로 일제 강점기 때부터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랬으니 작은 시굴 구덩이에서 나온 백제유물을 인정할 리 만무였다.

그 기존학설이란 국사학의 태두 이병도 박사가 1933년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사성(蛇城)”이라고 비정(批正)한 것을 뜻한다. 이 백제본기 기록은 “AD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는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풍납리 지명은 원래 ‘배암(蛇)들이 마을’이 ‘바람들이’로 말이 바뀌었고 이 ‘바람들이’ 지명이 한자로 표기되면 풍(風)은 ‘바람’, 납(納)은 ‘들이’이기 때문에 풍납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병도 박사의 주장은 광복 후에도 어느 누구의 반대의견 없이 통용되어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이것은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며, 그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분석, 이를 옛 기록에 대입해 새롭게 해석한 노력이 곧바로 암초에 걸렸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뿌리깊이 내려져 있는 학설을 정면 부인하는 새로운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대신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로 각광을 받았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및 공원 조성지로 결정되어 1983년부터 서울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상건물터, 움집인 수혈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로 보이는 목책 흔적뿐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됐다. 그랬으니 몽촌토성이 AD 3세기 중반에서 백제가 패망한 47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존속한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성과는 백제가 한강변에서 3세기 후반(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반을 잡았다는 기존 국사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다.

잠깐 고개를 들었던 풍납토성은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던 사이 사적으로 지정된 토성벽 일부만 제외된 채 성벽의 안팎은 도시화되면서 날로 파괴되어 가고 있었고 1990년대 들어와 경제성장에 따른 주택 재개발이 풍납토성 내부에도 불어닥쳤다.

◇기적처럼 부활한 한성백제=잃어버린 한성백제의 한(恨)은 그다지도 깊었나 보다. 1996년말,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생들과 함께 토성의 정밀실측을 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다시 백제의 혼을 일으켰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방호벽을 치고 기초 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한 이교수는 공사현장 지하 벽면에 백제토기편들이 금맥이 터지듯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하 4m 이상이나 팠는 데도…. 기존 주택건물은 파봐야 2m 정도였기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백제유물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대규모 재개발이 지하 깊숙이 묻힌 백제를 깨웠으니…. 이교수는 즉각 필자에게 숨이 멎을 듯한 목소리로 “나왔어요”하고 더듬거리며 발견사실을 알렸다.

1997년 새해벽두부터 난리가 났다. 언론의 엄청난 관심 속에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대박물관·한신대박물관 등이 참여하는 공동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다. 곧 유구와 유물이 공개되었다. 조사의 성과는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과 아울러 기원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3중의 환호(環壕)유구를 비롯,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밝혀진 것이다.

필자도 발굴조사 현장을 참관하고 출토 수습된 유물들을 보면서 백제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 이후 백제유적 최대의 발견·발굴이었다. 그것은 1964년 당시 학생신분이지만 최초 발굴에 참여한 필자가 문화유산관련 분야에 종사해 오면서 손 한번 못 써보고 도시화가 되는 것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신대 박물관의 발굴에서도 역시 백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서울대 박물관이 참여한 위치에서는 백제시대와 관련되는 아무런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백제가 발견됐으나 발굴이 끝나자 아파트 건축은 이뤄졌다. 어쨌든 이 발견은 서곡에 불과했다. 필자가 민속박물관장 근무를 마치고 1998년 친정인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돌아온 뒤부터 더욱 엄청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유전·고고학자/

 

 

[한국사 미스터리](5)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下

 

1998년 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서 풍납토성 성벽 학술발굴단장이 되었다. 성벽 안쪽에서 한성백제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백제인들이 쌓은 성벽의 축조방법도 초미의 관심거리였기에 발굴이 시작된 것이었다.

◇연인원 1백만명이 동원되어 쌓은 토성=“높이는 한 6~7m 정도나 될까. 폭은 한 10여m?”. 애초에 발굴단은 현존하는 성의 모습으로 볼 때 그 정도려니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와. 이게 뭐야”. 발굴기간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끝도 없는 판축토루와 성벽을 보호하는 강돌·깬돌이 열지어 있고 성벽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수직목과 식물유기체들. 발굴 결과 폭 40m 이상에 현존 높이 9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 추정 최대높이는 15m. 토목학자들은 성의 축조에 연인원 1백만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이라고 보았다. 발굴조사 결과 토성은 늦어도 AD 3세기 전후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왕권에 준하는 강력한 절대권력이 없이는 둘레 3.5㎞에 이르는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백제는 한성백제시대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대사 전공학자들 가운데 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으로 조심스럽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해온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잇달아 발견되는 왕성의 흔적=또 한번의 낭보가 인근 경당연립 신축부지에서 날아왔다. 한신대 박물관 발굴 결과 불과 1,000여평의 조사면적에서 한성백제 유물·유구가 터져나왔다. 집자리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전돌·와당·초대형 옹·중국제의 도자기·중국동전인 오수전·‘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 파편 등 500상자 분량이 넘었다. 말머리뼈와 대부명 토기 등은 국가 주도의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며 중국제 토기류는 활발한 대외교섭의 증거이다.

조사진행 과정에 얻어진 뜻밖의 성과에 따라 건축 당사자와 조사기관 사이에 발굴기간 및 발굴조사비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발굴이 중단됐다. 2000년 5월13일,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토지보상에 대한 원칙도 없는데다 발굴비까지 늘어나자 재건축 사업을 담당한 조합장의 지시로 노출시켜둔 백제 유구를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백제가 테러당했다’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신문보도가 여론을 들끓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이 가닥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재개발을 통한 건축행위는 봉쇄됐고 다만 지하유구가 파손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소규모 건축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산너머 산.

◇잘못된 시굴의 뼈아픈 교훈=성벽내 한성백제시대 유구와 유물의 보존원칙은 큰 틀에서 마련되었으나 성벽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표산업이 을축년 대홍수로 쓸려나간 풍납토성의 서벽 밖에 새로운 사옥건물을 짓기 위해 2001년 9월 학술기관에 시굴조사를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시굴을 맡은 모 대학박물관에서 지하 5m 아래로 개흙층을 확인했지만 이것은 해자로 볼 수 없으며 단순히 한강물의 범람방지를 위한 제방시설이나 제방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운 것이다. 도성이나 주거지와는 관련없는 시설이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개흙층 내에서는 문화재가 전무하다는 것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견대로 제방시설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성벽안에서 밝혀지고 있는 주거터 등 수많은 백제 유구와 유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또 조사기관의 주장대로 한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과 관계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백제시대 살았던 성안의 생활공간을 보호하는 시설임이 틀림없다고 보아야 합당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도성이나 사람이 사는 주거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범람을 막는 제방의 의미밖에 없다는 의견이었으니 한마디로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런 문화재가 없다”니 건축공사는 계획대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사를 강행하기 위한 터파기 공사때 문화재 유무를 확인하려 입회한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백제시대 문화층이 있음을 확인했다. 공사는 중단됐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3월까지 본격 발굴한 끝에 풍납토성 서벽과 관련된 해자추정 유구가 발견되었다. 삼표산업 부지는 당장 보존됐다.

◇모습 드러낸 해자(성을 보호하는 도랑)=지난 3월12일 열린 현장 설명회에 참석한 필자는 삼표부지, 즉 유실된 서벽의 성벽 외부에서 하상 퇴적층과 함께 오랜 동안 물이 고여 썩었던 결과로 보이는 뚜렷한 흔적이 노출돼있음을 보았다. 마치 시궁창 냄새처럼 풍기고 있는 발굴현장을 보고 직감적으로 해자 시설의 물이 오랜 동안 썩으면서 이루어진 결과로 판단했다.

지난 1999년 필자가 동벽의 일부를 해부하는 발굴조사시 주위 여건상 외부의 해자 시설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았던 해답을 찾는 순간이었다. 해자와 관련시설로 보이는 노출된 자갈층에서 백제토기편과 함께 조선시대 백자편도 수습되고 있다는 설명. 결국 이 시설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구한 기간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회의결과 아무도 ‘해자 추정 의견’에 이의가 없었고 이구동성으로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문만 있었다. 인공이든, 자연이든 이 유구는 풍납토성의 해자시설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모 대학 박물관이 최초 시굴조사때 조금만 신중했다면 건축주인 삼표산업에서 공사를 강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자시설이 없었다는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시간은 물론 조사에 따른 추가비용도 지불하게 해 이중으로 손해를 입혔다. 시굴기관의 잘못된 의견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교훈으로 남겼다.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풍납토성의 성립시기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잇단 발굴결과에 이 풍납토성이 기원 전후부터 축성이 시작되어 늦어도 2세기 경에는 완성되었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한성 백제는 초기부터 강력한 왕국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왜곡되어 왔다. 우리 기록인 삼국사기를 무시하고 중국 기록인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신봉한 것이다. 고대 삼국의 초기 기록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이 BC 1세기 때 우리나라를 정복하고 낙랑 등 4개의 식민지를 세워 지배해왔으며 AD 4세기 후반에야 겨우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세웠다는 주장. 지금의 일본 역사 교과서도 이 주장을 바꾸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학계에서는 일제의 주장을 겨우 1세기 정도 앞당겨 3세기 중·후반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한강변의 백제시대 성곽인 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교해 볼 때 풍납토성이 앞서 조성된 것은 분명해 졌다. 그리고 규모면에서나 출토된 유물과 유구의 비교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서 풍납토성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조유전·고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