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동 기단식 적석총 축조연대 앞당겨야>
김태식 기자 =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기단식 적석총이 기존 학계의 통설인 `4세기 이후'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고고학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적석총의 축조연대를 4세기 이후로 추정해왔다.
옛 조선총독부가 조사해 남긴 자료에는 석촌동 일대에 당시 돌무지 무덤이 66기인 것으로 쓰여 있으나 급격한 개발바람과 함께 거의 파괴돼 현재 복원돼 보존되고 있는 기단식 적석총은 4기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사각형 단을 만드는 수법으로 축조된 이들 적석총에 대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한국고고학사전」은 "(축조연대의 경우) 상한 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475년 공주 천도 이후 적석묘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석실분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축조시기는 1970-80년대에 이들 적석총 발굴에 참여한 임영진 현 전남대 교수가 1995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백제한성시대고분연구'에서 주창한 이래 한국고고학계가 광범위하게 지지하는 통설로 자리잡았다.
이 통설은 88올림픽공원 조성과 맞물려 80년대 초.중반 인근 몽촌토성이 대대적으로 발굴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몽촌토성 발굴자들이 하나같이 이 성곽을 백제왕성(王城)으로 추정한데다 이 곳에서 나온 출토유물들도 몽촌토성이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중.후반 이전에는 축조될 수 없음을 입증해주었기 때문이다.
왕성의 축조시기가 3세기 중.후반 이후로 추정된다면 그 왕성에서 살았을 왕들의 무덤은 당연히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축조연대에 관한 통설은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조사 결과로 인해 `도전'을 받고있다.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인 것으로 추정되면서 그 축조시기가 서기 200년 이전으로 짐작됨에 따라 풍납토성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석촌동 기단식 적석총 고분들 또한 축조 연대를 훨씬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풍납토성 발굴자인 신희권 국립문화재 연구사는 "풍납토성 발굴로 기존의 백제토기나 고분의 편년은 대폭적인 조정이 불가피해졌다"면서 "이제 몽촌토성이나 석촌동 발굴성과를 토대로 한 백제 고고학 편년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잘라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김길식 학예연구관도 "기존 석촌동 적석총 연대를 앞당겨야 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면서 "다만, 얼마나 연대를 조정해야 할 지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적석총의 축조연대에 대해 새롭게 이견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들은 서기 475년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되면서 개막된 웅진시대(475-536년) 및 사비시대(536-660년)의 백제고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기존 통설처럼 석촌동 적석총이 4세기 무렵에 등장해 5세기 중후엽인 한성시대 말기까지 성행했다면, 시기적으로 바로 연결되는 웅진 및 사비시대에서도 이런 적석총이 발견되어야 타당하지만 공주나 부여에서 기단식 적석총은 지금까지 단 한 기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김길식 연구관은 "한성시대 종말 훨씬 이전 언제인가 이미 적석총 양식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석촌동 적석총은 4세기 이후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에 등장해 한동안 유행하다가 475년 훨씬 이전에 소멸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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