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스터리](25) 3국통일의 거점, 삼년산성
◇그 뜨거웠던 470년=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이 삼년산성을 쌓을 때의 상황을 짚어본다면 그렇게 낭만을 부릴 수만은 없을 터이다. 470년(자비왕 13년), 신라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를 막으려 이 성을 쌓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이라는 건 역사(役事)가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3년 걸렸으므로 이름 붙인 것이다(三年者 自興役始終三年訖功 故名之)”했을 만큼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신라는 그것도 모자라 486년 성을 다시 수축했다. 이때는 삼국의 정치·국제상황이 마치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있던 격변의 시대였다. 원래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기병 5만명을 보내 신라를 범한 왜를 무찌를 정도로 양국간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450년(고구려 장수왕 38년·신라 눌지왕 34년) 양국의 밀월관계가 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7월 ‘실직’ 들판(삼척 부근)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장수를 하슬라(강릉) 성주인 삼직이 습격하여 죽인 것이다. 크게 노한 장수왕은 “대왕과 우호를 다진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데 이 어찌 의리있는 일인가”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했다. 이에 ‘눌지왕이 굽실거리며 사죄하자(王卑謝罪)’ 겨우 물러갔다.
이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치자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막으려는 나제동맹의 서막이었다. 458년 왕위에 오른 신라 자비왕은 고구려 침략에 대비, 470년 삼년산성을 쌓았고 잇달아 모로성(471년)과 일모성·사시성·광석성·답달성(이상 475년)을 수축했다. 이 가운데 한성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7일7야’ 공격 끝에 전사했다(475년 7월). 백제 개로왕 아들 문주의 원병요청을 받은 신라는 3,000명의 군사를 내줬으나 구원병이 한성에 다다르기도 전에 개로왕은 전사한다.
◇신라·당의 국제회담이 열린 곳=이같은 격변기에 축조된 삼년산성은 신라가 국력을 기울여 쌓은 가장 중심되는 성이었다. 산성의 중요성은 훗날 당과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660년 7월18일 백제를 멸한 태종무열왕은 9월 백제 도성인 부여의 사비성에서 삼년산성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나라 고종은 백제를 다스리기 위해 웅진도독부를 두고 도독에 당나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인 왕문도(王文度)를 임명했다.
9월28일 삼년산성에서 신라·당나라간 국제회의가 열린다. 당 고종의 조서와 선물을 가져온 왕문도와 무열왕의 회담장소였던 것이다. 왕문도가 동쪽을 향해 서서 서쪽을 향해 선 태종무열왕에게 조서를 주고, 다시 선물을 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왕문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어 시중을 들던 사람이 전달식을 대신 한 것(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삼국사기)이다. 왕문도는 왜 죽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험한 산성을 올라온 왕문도가 심장병과 같은 지병이 도져 급사한 것이 아닐까. 태종무열왕은 왜 삼년산성을 당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로 택했을까.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한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싹부터 자르기 위해 철옹성 같은 삼년산성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삼년산성은 신라가 자신하며 쌓은 요새였던 것이다.
지금도 이 성은 둘레만 해도 2.5㎞에 이르고 폭은 10m 내외로 높이는 지형에 따라 최소 10~20m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979~82년 사이에 성벽만 조금씩 복원이 진행되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서쪽벽의 웅장한 모습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 그러나 이렇게 복원된 모습은 성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원래의 석축에 사용된 석재는 점판암 계통의 석재인데 복원과정에서 화강암 계통의 새로운 돌을 쓰다보니 신구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의 수레바퀴=이 성의 정문은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서문터로 추정된다. 전투와 보급 등 두 가지 기능을 담당했던 삼년산성의 정문은 물자가 드나들 수 있는 낮은 곳이었을 것이다. 서문의 문지방 돌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다. 양쪽 바퀴 사이가 1m66이나 되는 폭넓은 수레바퀴 흔적이다. 이 흔적이 혹 태종무열왕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축조연대와 이름이 확인된 가장 오래된 석성인 이 삼년산성은 축조방법도 신비롭고 과학적이다. 차용걸 충북대 교수는 “한 층을 가로로 쌓았다면 다음 층은 세로로 쌓는 등 마치 우물 井자 모양으로 돌과 돌을 엇갈리게 쌓는 방식이었다”면서 “요즘의 석공들도 자칫 무너질까 두려워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정교한 축조방법이었다”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렇게 5세기 후반~10세기까지 한반도 주도권을 다투는 쟁탈의 요소였던 이 삼년산성에 대한 발굴은 올해부터 재개됐다. 산성의 종합적인 보존 및 정비계획에 따라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본격발굴에 돌입한 것이다. 첫 대상은 이미 1982년 부분 발굴조사 되어 존재가 확인되었던 아미지. 이번 발굴조사에서 신라시대 최초로 마련됐던 못의 규모가 어느 정도 확인됐다. 지금도 마실 수 있는 깊이 1.2m의 우물과 우물터도 발견됐다. 아울러 주변의 건물터는 물론 신라~고려시대까지의 유물이 층위를 달리해서 출토됐다.
그러나 지난 9월15일 현장설명회에 참석한 필자는 ‘눈감고 코끼리 만지는 격’임을 절감했다. 이 거대한 삼년산성의 발굴은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라는 뜻이다. 선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백동경(백동으로 만든 거울)과 기능을 알 수 없는 손잡이 달린 토기, 정교한 파라솔 문양의 편병 등 불가사의한 유물들이 나오는데 전혀 해석 불가능이다. 필자는 이 성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장기발굴이 이뤄져야 하고 전담 연구기관이 있어야 할 것임을 현장에서 느꼈다.
〈조유전/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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