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다시 찾은 500년 비밀
백제고도 공주에서 다량의 금동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가 어떤 곳인가. 한성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오늘날 수도 서울인 한강을 중심으로 한 위례성에서 개로왕이 잡혀 전사하는 비운을 겪고, 곧바로 수도를 옮겨 ‘웅진 백제시대’를 열었던 곳이 아닌가. 그런데 이곳에서 한성백제가 비운을 맞이하기 전의 유물인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뿐 아니라 중국제의 고급 자기를 함께 부장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지난 1971년 백제 무령왕릉 발굴조사에 참여해 베일에 가렸던 웅진 백제의 실체를 구명하는 데 획기적 자료를 학계에 제공한 바 있다. 이로써 백제사는 다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항상 의문으로 남았던 것이 있었다. 무령왕릉에 부장된 금제의 관식이나 중국제 도자기 등을 볼 때 이렇게 훌륭한 선진문화를 가졌던 백제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학계통설상 백제가 겨우 3세기에나 국가체제를 갖춘 것으로 낮춰보고 있는지 발굴조사자로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의문은 지난 86년 전북 익산군 웅포면 입점리 백제고분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 중요유물이 출토되면서 조금이나마 풀렸다.
말하자면 초기 한성백제 시대부터 한성의 중앙정부가 지방호족에게 자체적으로 통치권을 부여한 게 아니라 중앙에서 직접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이 유물이야말로 중앙정부가 내린 지방관의 통치 위세품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98년부터 서울 송파구 풍납동 백제토성 발굴이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발굴조사는 ‘잃어버린 한성백제 500년의 고리’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신전(神殿)으로 생각되는 특수한 형태의 유구를 비롯, 중국제의 도자기는 물론 백제시대 기와 등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유물과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토성벽을 잘라 축조방법과 규모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토성의 하부폭이 40m를 넘고 높이가 12m에 달하는 단면 사다리꼴 형태의 거대한 토성벽이 3.5㎞나 조성되었음을 밝혀냈던 것이다. 이로써 한성 백제시대의 선진 토목기술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풍납토성의 축조가 기원전후에 시작되어 서기 200여년 이전에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치는 커다란 고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가 강력한 국가의 힘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지표유적이었던 것이다.
이번 공주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을 비롯한 중국제 중요유물의 출토는 금강수계를 장악하고 중국과 교역하면서 한성백제의 외곽세력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집단이 공주지역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가 비운을 맞아 왕이 고구려 군사에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결딴났지만 급히 웅진으로 천도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강력한 후방세력이 공주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앞으로 발굴을 통해 같은 장소에 마련된 널무덤(土壙墓)과 돌방무덤(石室墳)·돌곽무덤(石槨墓) 등을 조사하면 공주 지역의 무덤구조 변화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전지표조사 없이 농공단지를 조성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무덤군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역사의 죄를 짓게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른다. 이번 발굴은 철저한 사전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다. 발굴단의 노고를 치하한다.
〈조유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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