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풍납토성 축조시기등 싸고 서울경기 고고학회 설전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8:58
문화일보

풍납토성 축조시기등 싸고 서울경기고고학회 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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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참석한 누구도 (풍납토성 출토) 유물의 하한연대를 자신

있게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시기가) 떨어지는

유물의 연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신희권 문화재청 학예

연구사) “왜 말 못합니까. 현재의 출토유물을 가지고서는 풍납

토성의 축조시기를 아무리 올려봐도 3세기 중후반 이상 올라갈

수없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박순발 충남대 교수)

5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박물관 2층 세미나실에서 열린 제

2회 서울경기고고학회(회장 배기동) 학술대회 종합토론에서 풍납

토성 출토 백제토기의 편년(編年) 및 토성 축조시기를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졌다.

‘한성기 백제고고학의 제문제(Ⅰ)-연대문제를 중심으로’란 주

제아래 모두 4편의 논문이 발표된 이날 학술대회는 지난 1997년

부터 2000년까지 진행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

발굴결과가 국내 고고학계에 일으킨 파장을 정리하기 위해 마련

된 자리였다.

백제 고대국가 형성 및 백제토기의 등장을 3세기 중후반(275년쯤

)으로 보아온 기존 견해에 맞서 문화재연구소는 그동안 풍납토성

이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에 걸쳐 처음 만들어진뒤 기원후 3

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완성됐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고

대국가 형성시점은 물론 백제토기의 편년까지 70여년 이상 올려

잡아왔기 때문이다.

이날 학술대회는 문화재연구소의 주장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대세

를 이뤘다. 우선 토기양식 분석을 통해 기존 백제고고학의 편년

관을 확립했던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한성백제 고고학의 연구

현황 점검’이란 첫 주제발표를 통해 “풍납토성의 축조시기가 3

세기 중후반을 상회한다는 논의는 자료의 뒷받침 없는 공허한 비

학술적 주장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자신의 논지를 뒤흔든

문화재연구소의 주장에 포문을 열었다.

아울러 지금까지 밝혀진 축조시점으로 보아 몽촌토성이 3세기 4

·4분기에 먼저 축성된 후 이어서 어느 무렵엔가 풍납토성이 만

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규모가 작은 몽촌토성이 유사시

왕의 행궁 혹은 별궁이 있는 성으로 기능이 변화됐을 것이기 때

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한성기의 왕성이 어디인지를 둘러싼 논란

도 �퓜隔�없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의 발표에 이어 한성백제 시대 중앙과 지방의 토기 편년

을 다룬 2편의 논문이 발표됐는데, 모두 박 교수의 백제토기 편

년관을 기본 전제로 깔고 논지를 전개한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문화재연구소가 방사성탄소(C껃)연대측정 결과를 가지고 풍

납토성의 축조시기를 올려보는 근거로 삼는 가운데 권오영 한신

대 교수는 자신이 발굴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유물에 대한 C

껃 연대측정 결과를 제시하며 이의 신뢰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

다.

경당유적 44호 건물지에서 나온 시료를 문화재연구소에 보내 두

차례에 걸쳐 C껃 연대측정을 한 결과 제일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기원전 170년∼기원후 70년, 연대가 늦은 것은 기원후 260∼550

년으로 나오는 등 오차폭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AMS연구실

에서 측정한 결과도 시료의 중심연대가 기원후 100년, 240년, 40

0년, 560년 등으로 다양하게 나왔다.

이를 근거로 권 교수는 “C껃 연대측정 결과를 크게 신빙하는 것

은 무모해보인다”며 “중국에서 이동해온 시간과 세전(世傳)되

는 문제는 있지만 백제유적에서 출토되는 중국 도자기 등 외래유

물을 통한 절대연대 자료의 축적이 오히려 유용할 것”이라는 견

해를 나타냈다.

이에대해 문화재연구소에서 풍납토성 발굴을 담당했던 신희권 문

화재청 학예연구사가 시료의 문제점 등을 제기했지만 토기양식을

통한 탄탄한 상대편년 체제의 확립이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 등

에 가리고 말았다. 박순발 교수는 나아가 원삼국시대를 포함한

역사시대의 경우 불안하고 실험실마다 오차가 큰 C껃 연대측정

결과에 대한 의존을 그만두자고 강조했다.

또 백제 고대국가형성을 3세기 중후반으로 보고 이때 등장하는

토기를 백제토기(한성Ⅰ기)로 규정한 박 교수 등과 다양한 기종

이 출현하는 2세기 후반 또는 2세기 말쯤인 원삼국Ⅲ기에 등장하

는 토기를 한성백제양식 토기로 새롭게 편년하고 고대국가 형성

시기를 앞당기려는 신희권 학예연구사간의 논쟁 등으로 종합토론

은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한편 이날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이남규 한신대 교수는 “이제

풍납토성 연대문제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종식시키자”며 “국

립문화재연구소 내부 연구자 의견만으로 가서는 안되며 한성백제

기 고고학 연구자들의 의견을 모두 수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최영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