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編年 귀중한 자료 확보 한성백제 영향력 입증 성과
금동관(모) 2개와 금동신발 3켤레, 환두대도 3점, 중국제 도자기
5점, 말탈 때 발을 디디는데 사용하는 등자 2점, 허리띠 2점,
각종 토기 수십점이 나온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유적이 고
고학 및 역사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급의 백제고분 발굴이란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곳을 찾는 학자 및 인근 지역주민들의 발길이 끊이
지 않아 1000부를 찍은 팸플릿 형태의 설명자료는 모두 동이 난
상태다. 발굴이 종료되고 유물의 수습도 거의 끝나가고 있는 가
운데 유적의 시기와 성격에 대한 고찰도 이제부터 본격화할 전망
이다.
무엇보다 수촌리 유적을 놓고 한성도읍기 백제의 영향력(지배권)
이 공주 일대에까지 미친 시기와 실체에 대한 논란이 가열될 전
망이다.
이번 유적을 발굴한 충남발전연구원 부설 충남역사문화연구소의
이훈 문화재연구부장은 “무령왕릉 출토품과 버금가는 금동유물
과 백제토기, 중국제 자기 등이 함께 출토돼 백제유물 편년에 귀
중한 단서를 확보했다”는 점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고고학에서 절대편년의 자료로 쓰이는 닭머리 장식 흑유도기와
네귀달린 청자 등 중국 도자기가 4세기말에서 5세기 전반에 만들
어진 것이 분명한 만큼 함께 나온 백제토기 역시 같은 시기로 봐
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부부묘로 추정되는 1, 2호 토광목
곽묘가 4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을 시작으로 4, 5호 횡혈식석실분
도 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논산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그릇받침토기(기대·器臺)와
호등(壺뜔)과 같은 마구,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 전체 유물의
구성면으로 볼 때 유적의 연대를 지나치게 올려본 것이 아닌가하
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가령 4호 횡혈식석실분에서 나온 기대는 그동안 5세기 중·후반
대의 것으로 편년돼 왔으며 용문(龍文)이 투조돼 있는 금동신발
도 무령왕릉 출토 신발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무덤양식도 웅진도읍기 왕족묘가 집중 조성돼 있는 공주 송산리
1∼4호분의 무덤 형태인 장방형 횡혈식석실분과 연결된다는 점에
서 4호분은 공주로 천도(475년)하기 직전인 5세기 중·후반에 축
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의 김길식 연구관
은 밝혔다.
그는 “수촌리 유적은 5세기 중엽에서 천도 이전까지의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약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축조됐다면 기존의 백제 묘제와 토기, 마구 등과 같은 유물의 편
년이 대폭 상향조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백제의 지방지배 방식과 관련해 고분 피장자들의 성격을 밝
히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현재 고분 피장자들의 성격에 대해서
는 이른바 ‘위세품(威勢品)의 사여를 통한 간접적인 지방지배
방식’이라는 공식에 대입시켜 고분 피장자를 재지세력의 지배자
로 보는 고고학계의 견해와 ‘양서(梁書)’에 기록된 담로제와
관련시켜 고분 피장자를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으로 보는 역사학
계의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수촌리 유적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시기란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4호분에서 출토된 논산지역 토기와 익산 입점리 1
호분 출토품과 유사한 금동관 등을 통해 적어도 이들 지역까지
웅진천도 직전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것 등은 이번 발굴의 대표적인 성과다.
공주〓최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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