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남한산성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9:15
경향신문

[한국사 미스터리](7)남한산성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 인조가 오랑캐 나라인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다. 심지어 무너진 산성의 석축벽이라도 보수할라치면 “뭐가 자랑이라고 아까운 세금을 들여 보수하느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이나 항전하던 인조가 왜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했을까 한번쯤 곰곰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비상시에 대비한 난공불락의 요새=남한산성은 경기 광주·하남·성남시 및 서울 송파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봉인 청량산은 해발 497m. 원래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이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임진왜란을 겪어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란가는 치욕을 당하자 전쟁후 조선 조정은 수도로 쳐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다시 쌓기로 했던 것이다. 인조임금은 1624년부터 2년반 동안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성내에 임금이 유사시 거처할 궁궐인 행궁(行宮)을 만들었고 선조(先祖)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 나라의 상징인 사직(社稷) 등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국가 비상시에 대비하게 했던 것이다.

산성의 규모는 총길이 11.755㎞이고 성벽의 높이는 3~7m 정도이며 본성의 내부면적은 총 64만2천여 평에 달한다. 봉암성과 한봉성 등 두 곳의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설로는 네 곳의 장대(將臺)와 4대문(大門), 다섯 곳의 옹성(甕城), 두 곳의 돈대(墩臺), 29여곳의 포루(砲壘), 16곳의 암문(暗門)이 마련돼 있다. 80여곳의 우물과 45곳의 연못이 있어 물도 풍부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행궁과 함께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유사시 명실상부한 보장처(保障處)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3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산성이 완성된 지 10여년 만인 1636년 병자호란을 겪었다. 인조는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겨 10만 침략군과 대치하여 방어전을 펼쳤지만 45일 만에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말았다. 이 항복의 사실을 기록하고 청나라의 황제를 칭송하는 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三田渡碑·서울 송파구 송파동·사적 101호)이다. 이래서 남한산성이 굴욕의 역사 현장으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절대 산성을 수축·개축하지 마라”=그러나 아무리 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던 사료가 발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로지 청나라 대군과 싸웠던 항쟁의 역사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왔다. 말하자면 인조는 어찌됐든 남한산성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가서 항복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산성에 있었던 종묘와 사직은 고스란히 보존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조인했지만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공격하다 얼마나 혼이 났으면 항복문서에 그러한 조항을 넣었을까. 실제로 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먼저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조금이라도 수축·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삼았다.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要塞)였던 것이다.

인조는 호란이 끝난 지 2년 뒤 직산(稷山)에 있던 백제시조 온조대왕의 사당(祠堂)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모셨다. 지금 남한산성 내에 있는 숭열전(崇烈殿)이 바로 그 사당이다. 일시적으로 나라가 유린당하는 치욕을 당했지만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조의 의지였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 정체성이었고 뿌리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인조임금은 그 정체성을 백제에서 찾아, 백제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바로 남한산성으로 옮겼던 것이다.

◇“몸은 항복해도 정신과 나라는 항복하지 않는다”=청나라는 항복의 조건으로 인조에게 성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남한산성 안에 들어간다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서 항쟁하던 인조는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하지만 위급할 때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몸은 비록 항복했지만 정신과 나라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항쟁과 사직 보존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패배한 치욕의 역사로만 치부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배의 역사관이고 식민사관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구나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스러운 성산(聖山)의 개념과 진산(鎭山)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옛 기록을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백제 시조 온조임금이 기원전 6년 ‘한산 아래에 성책(城柵)을 세워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을 옮겨’ 운운하는 기사가 보인다. 이때의 한산(漢山)이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가. 한강 주변의 산으로는 북한산·인왕산·낙산·남산·남한산·청계산·도봉산·수락산·아차산·이성산 등등 수없이 많다. 이들 가운데 한산은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인지 지금까지도 확연히 밝혀지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뿌리는 백제정신=그런데 최근 남한산성 내에서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가 확보되었다. 없어진 남한산성의 행궁(行宮)을 복원하기 위해 그 터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AD 2~3세기 대의 백제토기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1999년부터 한국토지박물관에서 행궁이 있던 터와 주변을 연차적으로 발굴조사해왔는데 조선시대 이전 시기에 있어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여러가지 유구와 유물이 출토 수습되었다. 우선 통일신라시대에 주장성이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신라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들이 수습됨으로써 나름의 확인이 되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보다 앞선 시기의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4차 발굴연도인 지난해에 한성백제시대 유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주로 구덩이 유구(竪穴遺構) 및 불을 피웠던 화덕터(爐址)와 함께 유물이 흩어져 있는 층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종류를 보면 완·배·호·옹·발·시루·뚜껑 등 다양했으나 모두 파편으로 수습되었다.

결국 이 유구와 유물들은 남한산성이 한성백제 도성(풍납토성으로 비정)의 최후 배후에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시사하는 단서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들어와 1907년 침략을 노린 일본군에 의해 산성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시설을 불태워 또 한번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인조임금의 예에서 보듯,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치욕스런 역사를 자랑스런 항쟁의 역사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올바로 보는 눈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건 아닌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유전·고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