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한성토기 생산기술ㆍ유통체계 심포지엄
서울 외 지역에서 발견되는 한성백제 양식 토기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사여’된 것이 아니라 당시 지방의 독자적인 생산체제에서 제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금까지 지방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양식 토기는 중앙이 지방 세력에 하사하는 위세품으로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한성양식 토기의 확산을 영역 확장에 따른 정치적, 경제적 독점이라는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 기존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김장석 교수(전남대 인류학과)와 권오영 교수(한신대 국사학과)는 경기도박물관과 한신대 학술원이 18일 경기도박물관 대강당에서 개최한 심포지엄 ‘백제의 생산기술과 유통체계-토기와 철기를 중심으로’에서 ‘백제 한성양식 토기의 유통망 분석’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토기는 장거리 운송 시 파괴 또는 손상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정치적 위세품으로 보기 힘들다”며 “한성백제는 당시 토기 배분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필요까지는 없었고 문헌상으로도 이를 입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 하남 미사리, 청주 신봉동 등 12개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미량원소 추출 결과, “한강 이북 출토 한성양식 토기, 충청지역의 한성양식 토기 모두 미량원소의 비율이 풍납·몽촌토성의 토기와 차이가 나는 현상은 각 지방이 독자적 생산체제를 갖췄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한성백제의 중심지였던 서울 강남지역 한성양식 토기 분배 범위는 한강을 넘지 않는 선에서 최대 25킬로미터 범위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조사 유적 중 풍납·몽촌토성과 가장 근접한 하남시 미사리, 용인 수지 유적 출토 토기는 상당부분 중복될 뿐 아니라 판별분석 결과, 동일한 산지에서 제작·분배된 것으로 보인 반면, 한성양식이라 하더라도 포천 자작리나 파주 주월리 출토 토기는 루테르튬과 이테튬 등 미량원소등에서 차이가 났다.
김 교수는 “토기에 비해 이동성이 좋고 국가적 독점이 필요한 철기 생산마저 백제 영역 내 여러지역에서 생산될 가능성이 높다”라며 “한성양식 토기의 지방 확산은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아이디어 이식 ▲재지집단의 적극적 모사 ▲전문장인집단의 정치적 목적의 파견 ▲경제적 목적을 지닌 독립 장인집단 존재 및 이들의 순회 등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성백제의 영역 확대과정에 대한 연구는 이 시기 문헌자료의 성격상, 중앙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만 과도한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었다”며 “고고학적 자료의 해석에서 사여, 경제적 독점이라는 메커니즘이 과도하게 남발된 경향이 없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이날 권 교수는 ‘백제의 생산기술과 유통체계 이해를 위하여’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백제의 활발한 대외교섭 양상을 보여주는 서진(西晉)대 토기와 충청산 추정 토기류 다수가 한성 중앙에 집중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며 “열쇠, 자물쇠 등 창고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물이 풍납토성에서 발견되는 것은 물류의 집중처로서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했다.
권 교수는 “화성 기안리 유적의 철기생산유적에서 송풍관의 제작기법이나 형태, 출토 토기의 형태와 기술이 낙랑계와 유사하다”며 “군사, 정치적 이유로 이주한 낙랑계 공인집단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와전문화의 조속한 도입, 중국 도자기에 대한 경도, 횡혈식석실분과 부부장 수용 등 한성기 백제의 물질, 정신문화가 여타 국가들과 달라지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이같은 낙랑계 공인, 학인의 유입에 있었다”며 “백제 토기, 기와·철기, 유리 등 다양한 측면에서 낙랑계 기술의 영향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서울=南尙賢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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