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동사강목의 안정복의 일생

吾心竹--오심죽-- 2009. 2. 24. 22:46

순암 선생 연보  
 [연보(年譜)]
순암 선생 연보(順菴先生年譜)



숙종대왕(肅宗大王) 38년 임진(1712) 청 나라 강희(康熙) 51년이다.
○ 12월 25일 갑술일에 술시(戌時)이다. 선생이 제천(堤川) 호서 좌도(湖西左道)의 현(縣) 이름이다. 현의 유원(楡院)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다.
할아버지 참의공이 경성(京城)의 청파리(靑坡里)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이 해 3월에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가 붉은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침상 주위를 감싸는 꿈을 꾸고는 드디어 임신하였다. 10월에 참의공이 가속을 거느리고 제천의 유원에 있는 친척 윤훈갑(尹訓甲)의 집으로 이사 가 살았다. 공을 낳던 날 새벽에 또 붉은 반점이 있는 표범을 가슴에 품는 꿈을 꾸고는 놀라 깨어났는데, 이날 술시에 공을 낳았다.

숙종대왕(肅宗大王) 41년 을미(1715), 선생의 나이 4세.
○ 가을에 모부인을 따라 제천에서 상경(上京)하다.
건천동(乾川洞)에 있는 외가(外家)에서 살았다.

숙종대왕(肅宗大王) 42년 병신(1716), 선생의 나이 5세.
○ 겨울에 마마[痘疹]를 앓다.

숙종대왕(肅宗大王) 43년 정유(1717), 선생의 나이 6세.
○ 가을에 모부인을 따라 영광(靈光)의 월산(月山)으로 가다.
바로 외가의 농장(農庄)이 있는 곳이다. 이 때 외할머니가 그 곳으로 내려갔으므로 모부인과 함께 따라간 것이다.

숙종대왕(肅宗大王) 45년 기해(1719), 선생의 나이 8세.
○ 겨울에 홍역(紅疫)을 앓다.

숙종대왕(肅宗大王) 46년 경자(1720), 선생의 나이 9세.
○ 봄에 모부인을 따라 서울로 돌아오다.
이 때 집이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에 있었다.

경종대왕(景宗大王) 원년 신축(1721), 선생의 나이 10세.
○ 처음으로 입학(入學)하여 먼저 《소학(小學)》을 읽다.
서울과 시골로 옮겨 다니면서 살았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입학하였는데, 구두(句讀)가 분명하고 견해가 정밀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문리(文理)가 통달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원년 을사(1725), 선생의 나이 14세.
○ 7월에 참의공을 따라 울산(蔚山)의 임소(任所)로 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년 병오(1726), 선생의 나이 15세.
○ 참의공이 체차되어 돌아와 무주(茂朱) 호남 좌도의 고을 이름이다. 고을 아래에다 집을 지음에 선생이 따라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년 무신(1728), 선생의 나이 17세.
이 해 3월에 호서(湖西)의 역적(逆賊) 이인좌(李麟佐) 등이 청주(淸州)를 함락하였다.4월 22일에 이르러서 선생이 무주의 집에 있으면서 동쪽 하늘에 검은 기운이 자욱하게 끼어 있는 속으로 붉은 기운이 쭉 뻗어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문서(天文書)에서 이른 바의 전기(戰氣)인데, 주군(主軍)이 객군(客軍)을 이기는 조짐이다.”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이틀 뒤에 적장(賊將) 이웅보(李熊報) 등이 안음(安陰)과 무주의 경계 지점에 있는 초현(草峴)의 동쪽에서 싸우다 패하여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들림에 선생의 말이 참말임이 증명되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5년 기유(1729), 선생의 나이 18세.
○ 10월 무오일에 부인(夫人) 성씨(成氏) 성순(成純)의 딸이다. 에게 장가들다.

영종대왕(英宗大王) 8년 임자(1732), 선생의 나이 21세.
○ 정월 무진일에 아들 안경증(安景曾)을 낳다.

영종대왕(英宗大王) 11년 을묘(1735), 선생의 나이 24세.
○ 11월에 참의공의 상(喪)을 당하다.

영종대왕(英宗大王) 12년 병진(1736), 선생의 나이 25세.
○ 10월에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집을 짓고 살다.
다음해 봄에 온 집안이 무주에서 올라왔다.

영종대왕(英宗大王) 13년 정사(1737), 선생의 나이 26세.
○ 봄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지 재예(才藝)로 이름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에 경사(經史)와 시례(詩禮) 이외에 음양(陰陽), 성력(星曆), 의약(醫藥), 복서(卜筮) 등의 서책 및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兵書), 불가(佛家)·도가(道家)의 서책, 패승(稗乘)이나 소설(小說)의 유에 이르기까지, 글자가 만들어진 이래의 문헌(文獻)으로서 구해 볼 수 있는 것이면 두루 다 보았다. 이에 15, 6세부터 이미 박학(博學)하다고 칭해졌다. 그러다가 이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처음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끝내는 몸과 마음의 귀함을 몰랐으니, 이것은 이른바 눈썹이 눈 앞에 바짝 있는데도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면서, 드디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궁구하면서,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외웠다.
○ 5월에 《심경(心經)》을 읽다.
《심경》을 읽다가 느낌이 있어서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다음과 같다.
구절마다 모름지기 방심하지 말지니 / 句句須要不放心
평상시에 심법(心法)을 자세하게 궁구하면 / 平居細討危微法
일 당하여 바야흐로 이 마음을 징험하리 / 遇事方能驗此心
○ 치통도(治統圖)와 도통도(道統圖) 두 도(圖)를 만들다.
치통도는 역대 제왕들의 계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위로는 상고(上古) 시대부터 아래로는 황명(皇明)에서 청(淸) 나라에 이르기까지를 그렸으며, 정통(正統)도 있고 변통(變統)도 있고 무통(無統)도 있는데, 모두 포폄(褒貶)과 여탈(與奪)의 의리를 붙여 상도(上圖)와 하도(下圖)로 만들었다. 도통도는 역대 성현(聖賢)들의 계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첫머리에 주자(周子 주염계(周濂溪)를 말함)의 역도(易圖)를 내어 걸어 도의 근본을 밝혔고, 계속해서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과 염락(濂洛)의 여러 현인들 및 원(元) 나라와 명 나라의 제유(諸儒)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정통(正統)과 방통(旁統)으로 나눈 다음, 역시 상도와 하도로 만들었다. 모두 범례(凡例)가 있어서 그림의 윗면에다가 써놓았다.

영종대왕(英宗大王) 15년 기미(1739), 선생의 나이 28세.
이 해 9월에 관상을 보는 자가 선생을 보고는 말하기를, “옛 사람이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를 말함)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귀가 얼굴보다 더 희니 이름이 천하에 가득할 것이고, 입술이 이빨을 가리지 못하니 일이 없어도 비방을 들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공의 상이 이와 흡사한바, 공은 오늘날의 구양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16년 경신(1740), 선생의 나이 29세.
○ 《하학지남(下學指南)》을 찬하다.
선생은 “옛날부터 학자들의 근심은 대부분 먼 것을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는 데 있었다.”고 여겼다. 이에 몸과 마음 및 일상 생활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12시(時)에다 분배(分排)하고, 또 조목(條目)을 정하여 배열하고, 옛 성현들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 가운데 하학(下學)에 속하는 것들을 붙인 다음, 《하학지남》이라 이름하여 평소에 취용(取用)하는 자료로 삼았다.
○ 정전설(井田說)을 짓다.
《주례(周禮)》를 위주로 하였으며, 여기에 《맹자(孟子)》,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하휴(何休)의 주(註),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의 식화지(食貨志), 그리고 주자(朱子)의 학설 등을 참고하여 지었다. 이상의 두 조항은 지은 날짜를 상고할 수가 없는데, 이 해 봄과 여름 사이에 지은 것 같다.
○ 10월에 딸을 낳다. 무인년(1758)에 권일신(權日身)에게 시집갔다.

영종대왕(英宗大王) 17년 신유(1741), 선생의 나이 30세.
○ 6월에 할머니 홍씨(洪氏)의 상을 당하다.
○ 겨울에 《내범(內範)》을 찬하다.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여계(女戒)가 비루하고 천박한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이에 고어(古語)를 모아서 한 책으로 만들어 《소학(小學)》과 짝이 되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이 이미 《하학지남》을 찬하고는 또 이 책을 편찬하였으니, 이는 대개 주부자의 뜻을 체득하고자 한 것이다. 편목(篇目)은 대략 주자가 정한 책을 모방하였으며, 모두 6책으로 《내범》이라고 이름 붙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2년 병인(1746), 선생의 나이 35세.
○ 10월에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 이 선생의 이름은 익(瀷)이다. 에게 가서 배알하다.
성호 선생이 안산(安山) 기내(畿內)의 군(郡) 이름이다. 의 성촌(星村)에 있었는데, 선생이 덕과 의를 흠모하여 가서 배알하고는 스승으로 섬긴 것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3년 정묘(1747), 선생의 나이 36세.
○ 봄에 소남(邵南) 윤공(尹公)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경(書經)》 태서(泰誓)의 뜻을 논하다. 윤공의 이름은 동규(東奎)로, 선생과 동문(同門)이며, 지조와 행실이 독실하다고 세상에서 칭해졌다. 선생이 그와 더불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문을 논하고 도를 강마하였는데,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 9월에 성호 선생에게 가서 배알하다.
○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관례(冠禮)에 대한 문목(問目)에 대해 성호 선생이 답한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별지(別紙)에 쓰여진 것을 재삼 자세히 보니 상고하고 교정한 것이 정밀하고도 상세하여 오늘날 세상의 예수(禮數)를 맡길 곳이 있겠다.” 하였다.
○ 12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괘변(卦變)의 설에 대해 논하고, 또 한마디 가르침을 내려줌으로써 종신토록 체득하여 행하는 바탕으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답서에 이르기를,
“지금 보내 온 편지를 보니 속학(俗學)들이 맹목적으로 더듬어 찾는 데 비할 바가 전혀 아닌바, 이는 과연 우리 당(黨)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의 여생의 바람에 몹시 위로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뜻이 있는 선비는 반드시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 흔들리지 않게 하고 공경스런 마음가짐을 견지하는 데에서부터 공부하여야만 하니, 이것이 행실을 닦고 본성(本性)을 보전하는 기반인 것이다.”
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4년 무진(1748), 선생의 나이 37세.
○ 12월에 성호 선생에게 가서 배알하다.
○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초(草)하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5년 기사(1749), 선생의 나이 38세.
○ 1월에 성호 선생의 편지를 받다.
성호 선생이 처음에 선생이 방술(方術)을 잘 한다는 이름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이를 서로 전하므로, 혹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의심하여 편지를 보내 경계한 것이며, 또 이름을 고치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선생이 보낸 답서에 말하기를,
“재능을 감춘 채 숨어서 지내라는 한 구절에 대해서는 삼가 마땅히 분부대로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끝내 평정(平正)한 도리(道理)에 있어서 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을 비록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 몸은 여전히 그 사람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저에게 있는 본성을 다 발휘하여 스스로 잘 지키기만 하면 그만인 것으로, 감히 명대로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성호 선생의 답서에 이르기를,
“앞서 보낸 편지에서 운운한 것은 단지 사랑하면서도 도와 주지 못하겠기에 망령되이 헤아려 본 것으로, 그대의 재주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 그대의 말이 옳으니,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것으로 표준을 삼는다면 광명한 영역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 3월에 동몽 교관(童蒙敎官)의 마지막 의망(擬望)에 들다.
이 때 선생에 대한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퍼져 나갔으므로 이러한 정관(政官)의 의망이 있게 된 것이다.
○ 5월에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동몽 교관의 의망에 들었을 때 경학(經學)으로 현주(懸註)하였는데, 정관이 혹 선생이 부임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훈신(勳臣)의 자손이라고 현주하였다. 이 때 참판공이 살아 있었으므로 선생은 차서를 잃는 것을 혐의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그 때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동몽 교관으로 의망하면서는 경학으로 현주하여 의망하고, 참봉으로 제수하면서는 문음(門蔭)으로 현주하여 의망하였는데, 경학이 뛰어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고, 문음의 경우에는 차서를 잃는 것이어서, 두 직책에 모두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혹자는 이조(吏曹)에 글을 올려서 차서를 잃어 부임하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혐의스러운바,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서 스스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뜻밖에 오는 복은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인바, 훗날에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장차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11월에 장사랑(將仕郞) 만녕전 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됨에 나아가서 은명(恩命)에 사은하다.
○ 12월에 부임하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6년 경오(1750), 선생의 나이 39세.
○ 8월에 종사랑(從仕郞)에 제수되다. 이하 낭계(郞階)는 승진된 날짜가 대부분 상세하지 않다.
○ 10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제수되다.
○ 잡괘설(雜卦說)을 짓다. 다음해인 신미년에 또 후설(後說)을 지었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7년 신미(1751), 선생의 나이 40세.
○ 2월에 전례에 따라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영고 봉사(義盈庫奉事)에 승진됨에 서울로 들어와서 사은하다.
선생은 비록 미관말직에 있을지라도 도를 다하기에 힘쓰면서 한결같이 청렴함과 부지런함으로써 스스로를 견지하였다. 이에 다음해에 정릉 직장(靖陵直長)으로 옮겨가자, 백성들이 의영사(義盈司)의 문 밖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성호 선생이 이 사실을 듣고서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의영사 문 밖에 거사비가 섰다 하는데, 경아문(京衙門)의 낮은 관원에 대해서 이렇게 한 적이 고금에 없는 바, 여기에서 학문을 하거나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 온 힘을 다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승전(乘田)과 위리(委吏)에서도 성인의 자취를 징험할 수가 있는바그대는 더욱더 그것을 미루어 나가서 훌륭하게 하기를 바란다. 관직이 낮다고 해서 스스로 좌절하지 말 것이니,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은 운명에 달린 것으로, 자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제수되다.
○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가례(家禮)》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질문하였다.
○ 4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다.
○ 5월에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제수되다.
○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주역》에 나오는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의 뜻 및 《주역》을 읽는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 윤5월에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제수되다.
○ 7월에 성호 선생에게 가서 배알하다.
병환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문안드린 것이다.
○ 정산(貞山) 이경협(李景協)의 편지에 답하다. 이공(李公)의 이름은 병휴(秉休)이다.
이공이, 공정한 희노(喜怒)는 이발(理發)이라는 설을 가지고 소남 윤동규와 더불어 서로 쟁변(爭辨)하였는 데, 이 때에 이르러서 선생에게 물은 것이다. 선생이 답한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무릇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는데, 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천명(天命)의 올바른 쪽에서 온 것을 일러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하고,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품성 쪽을 가리켜서 말할 때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이 움직인 것이 정(情)이 되는데, 이 정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성을 근본으로 하여 발한 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하고, 형기(形氣)를 원천으로 하여 발한 것을 칠정(七情)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솔하고 있는데, 발한 것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올바른 성명(性命)에 근원하여 발한 것은 도심(道心)이고, 사사로운 형기에 근원하여 발한 것은 인심(人心)입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말하면, 사단이니 도심이니 하는 것은 그 근원이 천명의 본성에서 발하였으므로, 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성인(聖人)이나 광인(狂人)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이치는 하나이다’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칠정이니 인심이니 하는 것은 원래 기질지성에서 발하였으므로, 혹 선하기도 하고 혹 악하기도 하여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에 따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현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치는 하나이지만 현상은 다르다는 뜻을 미루어 나가면 ‘이발(理發)’이니 ‘기발(氣發)’이니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노형께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는 큰 공안(公案) 외에 성인의 공정한 희노(喜怒)를 떼어 내어서 그것을 일러 ‘이발(理發)’이라고 하셨는데, 저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혼미하여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희노가 바름을 얻은 것을 일러 ‘이발’이라고 한다면, 사단이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일러 ‘기발’이라고 할 것입니까.
성인의 희노는 발함에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이고, 군자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맞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 일반 사람의 희노는 발함에 절도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절도에 맞고 안 맞고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이 형기(形氣)에서 발하는 것임에는 차이가 없으니, 그것이 ‘기(氣)가 발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단의 경우는 어진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느낌에 따라 발하여, 사사로운 뜻으로 헤아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에서 바로 나온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理)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윤장(尹丈 윤동규(尹東奎)를 말함)께서 말한 확충(擴充)이란 말은 참으로 꼭 들어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理)는 확충할 수 있는 것이지만, 기(氣)는 확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이(理)에서 발한 것이기 때문에 확충하면 인(仁)을 다하고 의(義)를 지극히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희노의 경우는 비록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끝내 기(氣)에서 발한 것이니, 이것을 만약 확충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종대왕(英宗大王) 28년 임신(1752), 선생의 나이 41세.
○ 1월에 효현빈(孝賢嬪)을 장사 지낼 때의 차비관(差備官)으로서 효장세자
(孝章世子)의 묘소(墓所)에 가다.
○ 2월에 전례에 따라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고 정릉 직장(靖陵直長)에 제수되다.
○ 이순수(李醇叟)의 유사(遺事)를 찬하다. 이공의 이름은 맹휴(孟休)로, 성호 선생의 아들이다.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선생이 애석하게 여겨 그의 유사를 찬한 것이다.
○ 5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맹자》 7편 가운데 의심스러운 뜻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하여 질문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29년 계유(1753), 선생의 나이 42세.
○ 4월에 아산(牙山)으로 가서 장모를 직산(稷山)에 장사 지내다.
○ 여름에 《광주지(廣州志)》를 찬하다.
책은 총 2권이며, 스스로 찬한 서문(序文)이 있다.
○ 6월에 정산(貞山)의 편지에 답하다.
가인괘(家人卦)에 괘의 이름을 붙인 뜻을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가인괘의 괘 이름을 붙인 뜻에 관하여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형의 독특한 견해에 대해 참으로 흠앙하는 바입니다만, 어리석은 저로서는 옛 사람들이 단정해 놓은 의논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형의 말씀에 대해 의문이 있음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무릇 육십사괘(六十四卦)의 괘 이름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써 미루어보면 서로 간에 쓰임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손괘(損卦)·익괘(益卦), 비괘(否卦)·태괘(泰卦), 진괘(晉卦)·명이괘(明夷卦), 박괘(剝卦)·복괘(復卦)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규괘(睽卦)는 두 여인의 의향이 같지 않은 괘상(卦象)이고, 가인괘는 두 여인의 의향이 같은 괘상임은 과연 형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꼭 그와 같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복희씨(伏羲氏)가 괘를 명명할 때에는 그 괘상에 이와 같은 뜻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그에 따라서 명명한 것입니다. 가령 가인괘를 보면, 내괘(內卦)는 문명(文明)의 기상이고 외괘(外卦)는 손순(巽順)의 기상이어서 마치 사람의 가정이 화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은 치솟고 바람은 아래로 불어 마치 사람의 집안 일이 화합하는 것 같으며,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제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 응하고 있어 마치 사람의 집안 법도가 올바른 것 같습니다. 다른 여러 괘들 가운데서 오직 이 괘만이 가인(家人)의 기상이 있으며, 다른 괘들은 아무래도 이 괘처럼 딱 들어맞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괘를 가인이라고 명명한 것이며, 문왕(文王)의 사(辭)나 공자(孔子)의 전(傳)도 모두 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존형께서 이효와 오효가 제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 응하고 있는 괘들을 열거하면서, 이것들은 모두 남녀(男女)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런 여러 괘들이 그 성정(性情)과 체재(體才)가 과연 모두 가인괘처럼 절실하게 부합한다는 것입니까? 두 여인이 같은 집에 살면서 의향도 같다는 것을 가지고 괘를 명명한 의미로 삼으신다면, 다른 괘도 이와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위는 바람[風]이고 아래는 불[火]인 이 괘만을 가인이라고 명명하였단 말입니까.
그리고 인용하신 《시경(詩經)》의 가인(家人)의 뜻도 역시 의문이 있습니다. ‘지자가 시집감이여, 그 가인들을 좋게 만들겠네.[之子于歸 宜其家人]’라고 한 곳에서의 ‘지자’는 시집가는 여자를 말한 것이고, ‘가인’은 그 집안 사람들을 상하존비를 통틀어서 말한 것이며, ‘그 가인들을 좋게 만들겠다’고 한 것은 그 여인이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등의 일을 다 알뜰하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학(大學)》에 이른바 ‘자기 가인을 좋게 한 다음에야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더욱더 명백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처첩(妻妾)이라는 증거로 삼는다면 불가(不可)하지 않겠습니까.”
○ 10월에 전례에 따라 6품으로 승진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가 되다.
○ 참판공을 모시고 용산(龍山)에 우거하다.
이 때 참판공이 황달(黃疸)을 앓아 이를 치료할 계획으로 매서(妹壻)인 오석신(吳錫信)의 집에서 산 것이다.
○ 《이자수어(李子粹語)》를 편집하다.
성호 선생이 찬한 것으로, 퇴계(退溪)의 언행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음의 책 이름은 《도동록(道東錄)》이었는데, 성호 선생이 선생과 소남 윤동규에게 산정(冊定)하도록 부탁하자, 선생이 윤동규와 서로 오가면서 상의하여 편차(編次)를 개정한 다음 《이자수어》라고 이름을 붙였다. 책이 다 만들어진 뒤 성호 선생이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이자수어》가 그대들의 힘을 입어 완성되었으니, 이 역시 오래도록 병을 앓는 사람이 약재를 써서 얼마간 치료하였으나, 결국에는 맥을 집고 병을 진찰하는 것은 신의(神醫)의 손가락이라 하여 거기에 공(功)을 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큰 일을 하나 마쳤으니, 이택(麗澤)의 유익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이어 선생에게 부탁해서 서문을 짓게 하였다.
○ 12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강목(綱目)》의 필법(筆法)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논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0년 갑술(1754), 선생의 나이 43세.
○ 2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기다.
○ 4월에 참판공을 모시고서 중부동(中部洞)에 있는 외가로 옮겨 가서 살다.
○ 6월 병인일에 참판공의 상(喪)을 당하다.
절도에 지나치게 슬퍼한 탓에 평소에 앓고 있던, 피를 토하는 증세가 이 때에 이르러서 더 도져 종신토록 앓는 고질병이 되었다.
○ 8월 갑술일에 참판공을 덕곡(德谷)의 선영에 장사 지내다.
○ 12월에 참판공의 행장(行狀)을 찬하고, 성호 선생에게 지문(誌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1년 을해(1755), 선생의 나이 44세.
○ 2월에 성호 선생에게 참의공의 지문(誌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다.
○ 5월에 예서(禮書)를 읽다.
《가례(家禮)》를 위주로 하여 읽었는데, 먼저 상례(喪禮)부터 시작하였으며, 삼례(三禮)를 상고하고 《통전(通典)》 및 선유(先儒)들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였다.
○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상제(喪制)의 변제(變除)의 차례와 갈질(葛絰)의 제도에 관해 논하였다.
○ 6월에 소남 윤동규의 편지에 답하다.
학자들이 먼 데 있는 것은 힘쓰면서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소홀히 하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대학》에 이르기를, ‘지선(至善)에 그치라.’ 하고, 뒤이어 이르기를, ‘그칠 곳을 알아야만 정(定)함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칠 곳이 지선임을 안 뒤에야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하였으며, 《맹자(孟子)》에는 이르기를, ‘요순(堯舜)의 지혜로도 모든 사물을 두루 살피지 않았던 것은 먼저 힘쓸 일부터 하는 것이 급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 두 곳의 ‘먼저[先]’라는 글자를 서로 맞추어서 대조해 보아서 학자가 이에 대해 안다면 어찌 먼 곳으로만 달려나가려고 하는 습성이 생기겠습니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로 여러 유학자들이 한 말이 아주 많지만, 독실하게 행한 점을 따져보면 한(漢) 나라나 당(唐) 나라 시절의 군자들에 비해서 도리어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여 혹 사소한 이해 관계로 상도(常度)를 잃기까지 하는바, 이 때문에 양 문공(楊文公)이나 소 장공(蘇長公)의 논(論)이 주자에게 비웃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선배들 가운데에 이학(理學)으로는 《자경편(自警編)》이고, 문장(文章)으로는 《고문진보(古文眞寶)》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취향이 높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립(樹立)한 것과 성취한 점에 있어서는 후세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바가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도(道)를 밝힌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더더욱 알 수 있습니다.
장구(章句)와 사리(事理) 상에서만 왔다갔다하면서 도리어 심신(心身)과 일상(日常)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도에 지나친 걱정이 있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집사(執事)가 말씀하신 이른바 ‘진실체당(眞實體當)’ 네 글자에는 미쳐 갈 겨를이 없게 되니, 그 얼마나 탄식할 일입니까. 저 자신도 늘 이것으로 경책을 하면서도 스스로 분발할 수 없음을 병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먼저 터득하신 말씀을 해 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2년 병자(1756), 선생의 나이 45세.
○ 8월에 복제(服制)를 마치다.
○ 겨울에 동약(洞約)을 세우다.
《동약》 1권이 있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반포하였다. 그 서문을 스스로 지었는데, 서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주례(周禮)》를 읽어 보고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린 대법(大法)을 알았다. 성인은 정치를 함에 있어서 큰 강령(綱領)만을 들려고 힘썼다. 그러니 어찌 비(比), 여(閭), 족(族), 당(黨)의 일을 낱낱이 챙기면서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하겠는가.
무릇 진작시키지 않으면 일어나지 아니하고, 인도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 것이 민정(民情)이다. 그런데 진작시켜 일어나게 하고 인도하여 행하게 하는 방도는 모름지기 백성들이 눈으로 보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만 감동하여 행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깝고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서 온 천하가 하나의 가르침에 동화되게 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생양(生養)을 이룰 수가 없고, 풍속(風俗)을 같게 할 수도 없고, 정령(政令)을 행할 수도 없어서, 아무리 성왕(聖王)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베풀 수가 없는 것이다.
한(漢), 당(唐), 송(宋), 명(明)으로 내려오면서 있었던 삼로(三老), 이정(里正), 보장(保長), 방장(坊長)등의 법 역시 그 제도였다. 그러나 위에서는 도리로써 모범을 보임이 없고 아래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아, 사람마다 제 몸만 생각하고 선비들은 제각각 의논을 다르게 하였다. 이에 다스림이 비록 잠깐 동안 융성하였다 하더라도 곧바로 더럽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백성들의 풍속이 옛날만 못하여 백대(百代)토록 좋은 다스림이 없게 된 이유이다.
이 때문에 영달하지 못하여 아래에 처해 있는 군자가 간혹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여력을 미루어서 향리(鄕里)에 미쳐 가 사람들을 착하게 인도하더라도, 주제넘게 윗사람의 흉내를 낸다거나 아랫사람으로서 예법(禮法)을 논한다는 혐의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나라의 선배로서 수령직을 맡았거나 고을에서 지낸 분들도 모두 의심 없이 이를 행하였는바, 예를 들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예안(禮安)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석담(石潭)에서 행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동에서 입약(立約)하는 것 또한 참람된 일이 아니요, 실로 선배들이 널리 시행하고자 하였던 바인 것이다.
아, 우리 마을이 수십 년 이래로 풍속이 퇴폐해져 문득 호향(互鄕)과 같은 나쁜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다 또 교활한 아전과 완악한 군교(軍校)들이 나라의 권력을 등지고 횡포를 부렸는바, 그와 같은데 어떻게 백성들이 곤궁해지지 않고 풍속이 야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모욕이야 참으로 어쩔 수 없다손치더라도, 예의(禮義)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디 있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마음속에 본디 가지고 있는 바를 인하여 이를 갈고 닦으면 될 것이다.
무릇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인도함에 있어서는 먼저 민심이 따르게 해야 하는 법인데, 민심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언제나 폐해를 낳는 정사(政事)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지금 마을 안의 일들 가운데에서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말끔하게 제거하여 민심이 돌아가 의지할 바가 있게 한 다음에야 가르침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왕정(王政)을 논하면서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는 것을 학교를 일으키는 것보다 먼저 말한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이에 드디어 폐정(弊政)을 고치고 교화(敎化)를 도타이 하며, 금령(禁令)을 거듭 신칙하고 권징(勸懲)을 분명하게 밝혔는바, 이것을 그대로 지켜 시행한다면 우리 성상의 교화(敎化)에도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3년 정축(1757), 선생의 나이 46세.
○ 1월 초하룻날에 제사 지내는 예법(禮法)을 개정하고 선묘(先廟)에 고하다.
선생은 제사 지내는 예법에 있어서 사묘(祠廟)를 중하게 여기고 산소를 가벼이 여겼다. 정조(正朝),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에 산소에 성묘하는 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옛 풍속이기는 하나, 이는 예서(禮書)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도리어 산소에 성묘하는 것에 대해서는 융성하게 하면서 묘(廟) 안에서 향사(享祀)하는 것은 폐하니, 경중이 뒤바뀌어서 예를 제정한 뜻에 크게 어그러지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 예경(禮經)을 상고하고 나라의 풍속을 채집한 다음, 사시(四時)를 번갈아 들어 사(祠)와 묘(墓)의 제사로 나누었는데, 양(陽) 기운이 생겨나는 동지(冬至)와 음(陰) 기운이 생겨나는 하지(夏至)에는 사당(祠堂)에 제물(祭物)을 올리고, 풀이 자라나는 한식과 곡식이 익는 추석에는 분묘(墳墓)에 전(奠)을 올리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정월 초하루에 전을 올림을 인하여 선묘(先廟)에 고유(告由)하였다.
○ 《희현록(希賢錄)》을 완성하다.
을해년 겨울부터 초고(草稿)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상권(上卷)은 삼성전(三聖傳)으로 이윤(伊尹),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에 대한 전이고, 중권은 양현전(兩賢傳)으로 제갈 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을 말함)와 도 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을 말함)에 대한 기록이고, 하권은 희안록(希顔錄)으로 안자(顔子),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에 대한 기록으로, 그들의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말과 행실을 모아 편찬한 다음 이들을 한데 모아 《희현록》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이현전(二賢傳)에 시 한 수를 제(題)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용강의 해와 달은 봄졸음에 아득하고 / 龍岡日月迷春睡
율리의 바람 안개 시 속으로 들어오네 / 栗里風烟入短吟
천년 뒤에 두 분 맘에 내마음 붙이노라 / 千秋遙託兩人心
하였고, 또 《희현록》에 제하기를,
도연명의 활달함은 옳은 길 아니었고 / 淵明放曠終非道
제갈량의 공명 추구 정신만 피곤했지 / 諸葛功名謾瘁神
누항 사는 즐거움 무슨 일이 또 있을까 / 陋巷閉門無箇事
정씨 꽃도 주씨 풀도 봄이기는 매한가지 / 程花周草一般春
라 하였다.
○ 3월 정사일에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승하하다.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서 신민(臣民)들의 복제(服制)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임금 어머니[國母]의 복제에 대해 예문(禮文)에는 ‘소군을 위하여[爲小君]’라고 하지 않고, ‘임금의 어머니를 위하여[爲君之母]’라고 했습니다. 처(妻)는 기년복(朞年服)인즉, 본디 복이 없는 것인데, 임금을 따라서 강복(降服)한 것입니다.
서민의 경우에는 비록 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을 따르는 의리를 어떻게 따져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례의(五禮儀)》에 ‘내상(內喪)의 경우 서민은 13일 만에 상복을 벗고, 졸곡(卒哭) 전에는 홍색이나 자색의 옷을 입는 것을 금한다.’고 되어 있으니, 우리 나라의 제도에도 역시 그러한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귀천에 관계 없이 모두 다 상을 마칠 때까지 소복(素服)을 입는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이는 어느 예를 따른 것입니까? 혹시 중간에 변경한 것이 있는데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생님께서는 전 직함이 비록 위계(位階)가 없는 소관(小官)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서인(庶人)으로서 관직에 있었던 옛날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니, 형세상 명사(命士)의 반열에 같이 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사은숙배한 일은 없었다 하더라도, 또 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서인의 의리로 자처하려고 하신다면, 이는 혹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사족(士族)이라는 명색은 나름대로 하나의 풍속을 형성하고 있어 옛날의 사(士)와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주(儀註)에도 역시 이르기를, ‘생도(生徒)는 백의(白衣)와 백립(白笠)으로 상제(喪制)를 따른다.’고 하여 서인과는 구별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예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뿐, 이 이외에 다른 길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기년(期年) 뒤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복을 벗지만 주상께서는 여전히 중복(重服)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관(高官)이나 시신(侍臣)은 색깔 있는 길복(吉服)을 입고 문안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임금에 대한 상을 일러 방상(方喪)이라고 하니, 이는 아버지 상과 서로 비교해서 제정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보내 주신 편지에서 인용하신 ‘흰 갓에 검정 갓끈은 자성(子姓)의 복이다.’고 한 대목이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복(衰服)의 베올이 다소 가늘고 굵은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의심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국조(國朝)의 전례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근래에 《고려사(高麗史)》를 보았더니, 명종(明宗)이 태후(太后)의 상을 당하여 졸곡이 지난 뒤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아직 검정 띠를 띠고 있는데 경들은 분홍색 띠를 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 분홍색 띠를 띠어 길함을 나타내는 것을 온당치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같이 예교(禮敎)가 아주 밝은 시대에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고관과 시신들은 천담복(淺淡服)에 오모(烏帽), 각대(角帶) 차림으로 직무를 보는 것이 아마도 옳을 듯한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상제(喪祭)의 격식(格式)에 관하여 논하였는데,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가례(家禮)》에서는 4대(四代)를 봉사(奉祀)하는 규정을 온 천하의 공통의 예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부(大夫)는 3대만을 봉사하는 것이 고례(古禮)에 나와 있고 국전(國典)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의 선비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저것을 따르니, 이는 《가례》를 더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갑작스럽게 그 제도를 바꾸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제물(祭物)에 대한 한 조목에 있어서만은 주자(朱子)도 《가례》에서 ‘가난하면 집안의 형편에 맞추어 하라.’고 하였고, 《어류(語類)》에도 ‘집안 형편에 따라서 하면 되니, 밥 한 그릇 국 한 사발로도 정성을 다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뜻을 안다면 음식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가례》에서 말한 법식과 똑같이 하지 않더라도, 제물의 가짓수를 적당히 가감하여 그 뜻만 잃지 않게 하면 될 것입니다. 《역경(易經)》의 췌괘(萃卦)에는 ‘대생(大牲)을 쓰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고, 손괘(損卦)에서는 ‘제기(祭器) 둘이면 된다.’고 하였는바, 주자의 뜻도 역시 여기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부유하고 현달한 자들은 혹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마구 쓰면서도 조상을 받드는 일에는 박하게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혹 제물을 숫자대로 다 차릴 수가 없으면 아예 제사를 모시지도 않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다 옳지 않은 일입니다. 흉년이 들 경우 제사를 지내면서 하생(下牲)을 쓰는 것은 나라의 임금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士)나 서인(庶人)의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후세에 와서는 제사가 많아져서 기제(忌祭)가 있고, 묘제(墓祭)가 있고, 명절날에 지내는 제사도 있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시향(時享)만 지내었는바, 《국어(國語)》를 보면, 사와 서인은 시향 말고는 한 해에 제사를 기제 한 번만 모실 뿐이었으며, 제물(祭物)도 사는 변(籩) 하나에 두(豆) 하나이고, 대부는 변 둘에 두가 둘이었으니, 후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지나치게 간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대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는 백묘(百畝)의 전지(田地)를 지켜 갈 수 없어서였습니다.
중국은 토질이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한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절제하고 삼갔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나라는 땅도 좁고 산물도 빈약하여 아주 가난한 나라인데다가 또 생계 수단마저도 보잘것이 없는 처지인데, 이와 같이 함부로 써서야 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제사를 모시는 예는 마땅히 집이 가난한지 부유한지,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한 해의 경비가 많은지 적은지를 잘 살펴서 그에 따라 절제하여 3품(品)으로 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집이 부자이고 농사도 풍년이면 《가례》에서 말한 대로 변과 두를 각각 6개씩 놓되 이를 지나쳐서는 안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변과 두를 각각 4개씩 또는 2개씩 놓되 정조(鼎俎)와 병면(餠麵) 따위의 것은 경우에 따라 적당히 줄이며, 그 이하의 경우에는 변과 두를 각각 하나씩만 차려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만도 못하여 예를 차릴 수 없으면 비록 현미밥에 나물국만 놓더라도 제사를 빠뜨리지만 않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성호 선생이 편지에서 상제(喪祭)의 예에 대해 논하면서 얼마간 상정(商定)한 것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편지한 것이다.
○ 7월에 성호 선생이 순암기(順菴記)를 지어 보내다.
선생이 작은 집 하나를 짓고는 성호 선생에게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집을 지은 모양새는 ‘암(菴)’ 자의 모양을 본따 지었습니다. ‘菴’이란 글자를 보면, ‘艸’는 띠풀로 지붕을 덮은 것이고, ‘一’은 가로지른 대들보이고, ‘人’은 빙둘러 올려놓은 서까래이고, 그 아래는 기둥 하나를 가운데 세워 방 네 칸을 만든 것인데, 기둥이 둘이면 여섯 칸이 되고, 기둥이 셋이면 여덟 칸이 되어 용도가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전면에 있는 두 칸을 방으로 만들어 거처하면서 ‘순암(順菴)’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대개 글자를 취해 이름 붙인 것으로, 천하의 모든 일은 순리일 뿐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한 칸은 마루로 꾸며 일을 보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띠로 이은 지붕에 흙으로 만든 당(堂) 속에 살면서 밭 갈고, 나무하고, 베옷 입고, 거친 밥 먹고, 시 외우고, 책 읽고 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모두 다 제 본분의 일이기에 이름을 ‘분의당(分宜堂)’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칸을 막아 방으로 꾸미고는 ‘담숙실(湛肅室)’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제사 지낼 때 재계(齋戒)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뒷편으로 세 칸을 늘려서 기물(器物)을 저장하는 곳으로 만들고, 동북쪽의 한칸은 가묘(家廟)를 봉안하였습니다. 삼가 당기(堂記)와 암명(菴銘)을 받아 죽을 때까지 외우면서 생각할 자료로 삼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성호 선생이 암기(菴記)를 지어서 보내 주었다.
○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서양(西洋) 학술(學術)의 그름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근래에 서양의 책을 보았더니, 그 말은 정밀하고 확실하였으나, 역시 이단(異端)의 학문이었습니다. 우리 유자(儒者)들이 몸을 닦고 성품을 기르며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불과할 뿐으로, 털끝만큼도 죽은 뒤에 복을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해 서양의 학문은 자기 몸을 닦는 목적이 오로지 천대(天臺)의 심판을 받는 데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유학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하기를, ‘천주가 노제불아(輅齊拂兒)에게 화를 내어 그를 마귀로 변신시켜 지옥으로 보냈는데, 그 뒤로 천지 사이에 처음으로 마귀가 생겼고 처음으로 지옥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들로 볼 때 결단코 이는 이단의 학문입니다. 천주가 만약 노제불아 때문에 지옥을 만들었다면, 그 지옥은 천주(天主)의 개인 감옥에 불과한 것이고, 또 그 이전에 악한 짓을 한 자들은 지옥의 고초를 받지 않은 셈이 되니, 천주의 상과 벌을 어디에다 썼단 말입니까.
또 《기인편(畸人篇)》에는 말하기를, ‘액륵와략(額勒臥略)이 남을 대신해서 지옥의 고초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천주의 상과 벌이 그 사람 본인의 선과 악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혹 사사로운 청탁으로 경중이 정해진다면, 그것이 올바른 심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선한 일을 할 필요 없이 천주 한 개인에게만 잘 아첨하여 섬기면 될 것입니다.
또 《변학유독(辨學遺牘)》이란 것이 있는데, 바로 연지화상(蓮池和尙)이마두(利瑪竇)와 학문을 토론한 글로서, 변론이 정밀하고 확실하여 왕왕 상대의 논지를 여지없이 간파하여 굴복시켰습니다. 그로 하여금 마명(馬鳴)이나 달마(達摩)와 같은 사람들과 맞서서 각각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쟁변해 보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완성하다.
무오년(1738, 영조 13)부터 초고(草稿)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의 책 이름은 《치현보(治縣譜)》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 다시 첨가하고 삭제한 다음 《임관정요》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스스로 찬한 서문(序文)이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본디 한몸이고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은 두 가지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면서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하고, 벼슬을 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배우는 것이니,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같지 않으나 그 도는 같은 것이다. 진서산(眞西山)이 일찍이 경전(經典) 가운데서 정사에 대해 논한 내용을 편집하여 《정경(政經)》이라는 책 하나를 만들었으니, 학문의 밖에 정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사와 학문이 체(體)는 비록 같지만, 일에 응용하다 보면 시행됨이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구별한 것으로, 이것은 《심경(心經)》과 표리가 되는 책이다.
내가 젊었을 적에 이 책을 지었는데, 비록 나 자신의 분수에 벗어나는 외람된 짓을 하였다는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만든 것이다. 그 동안에는 난고(亂藁) 속에 처박아 둔 채 일찍이 이를 꺼내어서 남에게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 가운데 혹 정사를 하게 되어 나에게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책을 내어 보여 주었는바, 이는 대개 옛 사람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 준 뜻을 따른 것이다.
나는 벼슬자리에 있어 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탓에 피리를 만지면서 하늘의 해로 여기는 듯하여그 쓰임이 혹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신발을 만들어도대체적인 신발의 모양새는 갖추는 법이다.
옛날에 부염(傅琰)이 《치현보(治縣譜)》를 만들었는데, 자손들끼리만 서로 전해 보면서 남에게는 보여 주지 않아, 집안 대대로 관리로서 치적을 이루어 《남사(南史)》에 드러나게 칭해졌다. 나는 내심 이것을 비루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것은 혼자서만 잘 한다는 명예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행한 일을 배워서 하게 한다면, 남의 정사가 곧 나의 정사일 것이니, 초궁(楚弓)의 득실(得失)에 어찌 마음을 쓰겠는가.’ 하였다.
책은 모두 3편으로, 그 가운데 정어(政語)는 성인의 교훈을 적은 것이고, 정적(政蹟)은 이미 시행한 효과를 적은 것이고, 시조(時措)는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적은 것이다. 풍속(風俗)은 피차의 구별이 있고 인심(人心)은 고금의 차이가 있으며, 세도(世道)는 성쇠의 다름이 있고 법제(法制)는 치란의 나뉨이 있는 법이나, 이를 적절히 변통하여 쓰는 것은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4년 무인(1758), 선생의 나이 47세.
○ 1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부녀자들의 수식(首飾)에 대해 논하였다.
○ 3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귀신(鬼神)의 이치에 대해 논하였다.
○ 10월에 정산(貞山)에게 편지를 보내다.
《역경(易經)》과 《시경(詩經)》을 읽는 법에 대해 논하였다.
○ 11월에 《교증가례부췌(校證家禮附贅)》의 서문(序文)을 짓다.
바로 선생의 종인(宗人)인 오휴자(五休子) 안신(安㺬)이 찬한 책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5년 기묘(1759), 선생의 나이 48세.
○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완성하다.
선생은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사실에 대해서는 깜깜한 것을 탄식하여 병자년부터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4년에 걸쳐서 책을 완성하였다. 위로는 기자(箕子) 원년(元年)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강(綱)과 목(目)을 세워 기술하였는데, 모두 18권이며, 또 고이(考異)와 지리고(地理考) 두 권의 책이 있어서, 이를 합하여 총 20권이다. 스스로 찬한 서문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의 역사서도 두루 갖추어져 있으니, 기전체(紀傳體)로는 문열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있고, 편년체(編年體)로는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금남(錦南) 최보(崔溥)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이 있으며, 이를 인하여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과 임상덕(林象德)의 《여사회강(麗史會綱)》이 지어졌고, 초절(抄節)한 것으로는 권근(權近)이 지은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오운(吳澐)이 지은 《동사찬요(東史撰要)》 등의 책이 있는바, 찬란하고도 성대하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소략하여서 사실과 어긋나고, 《고려사》는 번잡하여 요긴함이 적고, 《동국통감》은 의례(義例)가 많이 어그러졌고, 《여사제강》과 《여사회강》은 필법(筆法)이 간혹 어그러졌으니,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오류를 범하고 와전된 것을 그대로 와전한 것은 모든 책이 비슷하다. 내가 이를 읽어 보고는 개탄하면서 드디어 고쳐서 바로잡을 뜻을 품게 되었다.
이에 우리 나라의 역사 및 중국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 나라의 사실을 언급한 것을 널리 취한 다음, 일체를 자양(紫陽) 주 부자(朱夫子)가 만들어 놓은 역사서의 체재를 따라 모두 모아서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방 안에 보관해 두고서 고열(考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일 뿐, 감히 찬술(撰述)로 자처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심하게 오류를 범하고 와전된 것에 대해서는 따로 부록(附錄) 2권을 만들어 책 끝에 붙였다.”
○ 정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역경》의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뜻을 논하였다.
○ 2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시경》의 뜻을 논하였다.
○ 11월에 성호 선생에게 편지를 올리다.
열국(列國)의 음운(音韻)과 고금(古今)의 역법(曆法)에 대해 논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6년 경진(1760), 선생의 나이 49세.
○ 12월에 권철신(權哲身)의 편지에 답하다.
아송(雅頌) 가운데서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물어왔으므로 선생이 조목별로 답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성현들의 말씀은 모두가 평이하고 명백하므로 굳이 굽은 길로 찾아들어가서 스스로 의문 속에 자신을 얽어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퇴계(退溪)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독서를 함에 있어서는 굳이 색다른 뜻을 캐려고 하지 말고, 그 본문(本文)을 놓고 그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만 찾으라.’고 하였다. 그 말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이치에 꼭 들어맞는 말이니, 한 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문(經文)은 두 가지 뜻이 있게 마련이니, 후세 사람들로서는 해석할 때 반드시 잘 헤아려 보아서 나와 가장 가까운 쪽을 취해야 하는 것이네. 지금 그대도 독서를 할 때 전의(傳義)와 틀린 곳이 있으면 그 틀린 부분에 대해서 경중을 헤아려서 읖조리고 자세히 음미해 보면 저절로 구별되는 바가 있을 것이네.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마음속에 걸어 두고서 도리어 선유(先儒)들의 말을 자기 뜻에다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네. 만약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자기류(自己流)의 글을 따로 짓는 것이 낫지, 어찌 괴롭게 고서(古書)를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영종대왕(英宗大王) 37년 신사(1761), 선생의 나이 50세.
○ 4월에 서재(書齋)를 건립하다.
향리(鄕里)에 사는 학문하는 후배들과 함께 의논하여 덕곡동(德谷洞) 안에 서재를 세우고는 ‘이택재(麗澤齋)’라고 이름 붙인 다음, 5월 이후부터 매달 서로 모여서 《소학(小學)》을 강독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8년 임오(1762), 선생의 나이 51세.
○ 11월에 《새설유편(僿說類編)》의 편차(編次)를 정하다.
성호 선생이 찬한 것이다. 성호 선생이 선생에게 산정(刪正)하고 분류해 주기를 부탁하였는데, 총 12권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39년 계미(1763), 선생의 나이 52세.
○ 3월에 《백선시(百選詩)》를 완성하다.
역대의 시를 각 문체별로 모두 1백 수를 모아 《백선시》라고 이름하였는데, 책은 총 7권이다. 스스로 지은 서문이 있다.
○ 《사감(史鑑)》을 완성하다.
상고 시대부터 《강목(綱目)》 이전까지를 산삭(刪削)하여 만들어서 《사감》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책은 총 8권이다.
○ 12월에 성호 선생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심상복(心喪服)을 입었다. 선생에게 학문에 대해 물은 말을 기록한 《함장록(函丈錄)》이 있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0년 갑신(1764), 선생의 나이 53세.
○ 12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스승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스승의 복제 한 조항에 대해서는 《예기》 단궁(檀弓)에서 삼년상의 조항에 포함시켰으니, 이 이외에는 달리 찾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두 선생으로부터 정(情)의 두터움과 박함에 따라 다르게 할 수 있다는 설이 나왔으며, 우리 나라에 이르러서는 율곡 이이가 기년복(朞年服), 구월복(九月服), 오월복(五月服), 삼월복(三月服)으로 구별해서 예를 정했으므로, 이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사세로 보아서는 편리한 듯해도 군(君), 사(師), 부(父)를 똑같이 섬기는 의리로 미루어 볼 때는 존자(尊者)의 복을 적당히 재량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정자 문하의 복제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유입지(劉立之)가 ‘북방 변경의 관직에 매여 있어서 복 입는 대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을 보면, 복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주자가 지은 연평 선생(延平先生)의 제문(祭文)에 ‘묘소 곁에 집을 짓고 3년을 나려 했던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여막을 짓고 3년을 나려 했던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삼년상을 모시는 뜻만은 아마도 변함이 없었던 듯합니다.
다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이미 한 식구가 아니기 때문에 전(奠)을 올리고 곡(哭)하는 것을 자기집 식구와 똑같이 하지는 못하겠지만, 슬픈 마음과 추모의 정은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혹 질대(絰帶)나 소대(素帶)를 띠어 그것으로 마음을 표하면서 모임에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음으로써, 일반 사람들과는 같을 수 없다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옛날 법에도 어긋나지 않고, 마음에도 부끄럽지 않을 듯합니다.
퇴계의 문인들 가운데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1년 동안 소대를 띠었고 3년 동안 모임에도 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옛날의 예에 맞추어 보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실로 저의 마음에는 맞는 점이 있기에, 감히 그대로 따를까 합니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1년 을유(1765), 선생의 나이 54세.
○ 4월에 이름이 없는 다섯 현인(賢人)에 대한 찬(贊)을 짓다.
다섯 현인은 바로 노(魯) 나라의 양생(兩生), 제(齊) 나라의 우인(虞人), 노 나라의 유자(儒者), 새상옹(塞上翁)이다.
○ 7월에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다.
○ 동약(洞約)을 중수(重修)하다.
○ 8월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겨졌으나, 부임하지 않다.
○ 이 달에 심하게 종기를 앓다.
왼쪽 팔뚝에 침을 맞느라 풍(風)이 들었는데, 증세가 아주 심하였다. 종기를 짼 뒤 아들 안경증(安景曾)이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었으며,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도가 있었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2년 병술(1766), 선생의 나이 55세.
○ 도정절찬(陶靖節贊)을 짓다. 날짜를 적은 기록이 없는데, 아마도 이 해 봄과 여름 사이에 지은 듯하다.
○ 6월에 육잠(六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책하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옛 사람들 가운데 덕을 이루고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강명하고 묵직한 덕에 의지하였는데, 나는 성품이 어둡고 게으르며 조급하고 얕기 때문에 전일하게 공부하지 못한 탓에, 나이가 많아지도록 성취한 것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병으로 인해 스스로 포기한 지 10여 년이 넘은데이겠는가. 안으로는 한 마음의 은미함으로부터 밖으로는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하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척연히 깨닫고는 잠(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책하는 바이다.”
하였으며, 그 잠은 다음과 같다.
너의 체는 고요하지만 / 爾體雖寂
너의 용은 느낌이 많나니 / 爾用多感
고요하면 보존하여 / 靜而存之
물처럼 담담하게 하고 / 如水之淡
동하면 살피되 / 動而察之
기미를 조심하라 / 惟幾之審
어둡기 쉽고 어지럽기 쉬우니 / 易昏易亂
언제나 조심하여 / 恒若懍懍
기욕을 단절하고 / 斷絶嗜慾
잡념을 없애라 / 掃除客念
추구하여 마지 않기를 / 推究不置
혹리가 조사하듯 하고 / 如酷吏按驗
무엇 하나 남기지 않기를 / 不留一物
빗자루로 먼지를 쓸 듯이 하라 / 若密箒掃塵
오래 하여 공부가 깊어지면 / 悠久功深
나의 본모습 되찾으리라 / 反我天眞
이상은 심잠(心箴)이다.
선을 보기를 반드시 밝게 하고 / 見善必明
악을 보기를 소경처럼 하라 / 見惡如瞽
바르지 못한 빛깔은 / 不正之色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법 / 令人心蠱
너의 눈을 거두어들여 / 收爾視
밖으로 치닫게 하지 마라 / 無外騖
이상은 목잠(目箴)이다.
선을 들을 땐 반드시 귀 귀울이고 / 聞善必聰
악을 들을 땐 귀머거리가 돼라 / 聞惡如聾
음탕한 소리는 / 淫佚之聲
나의 천성을 해치나니 / 斲我天衷
너의 귀를 단속하여서 / 斂爾聽
정신이 안에서 충만케 하라 / 神內充
이상은 이잠(耳箴)이다.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손 모으고 / 坐必端拱
서면 반드시 공손함을 유지하라 / 立必恭持
망녕되이 가리켜서 보는 사람 놀라게 말고 / 勿妄指以駭瞻
함부로 놀려 위의를 잃지 마라 / 勿輕弄以失儀
위는 수잠(手箴)이다.
법도에 맞추어 가고 멈추며 / 規行矩止
빠르고 더디기를 적절히 하라 / 疾徐合宜
무겁게 하려면 공경을 다하고 / 欲其重以致敬
움직일 땐 위험 많음 두려워하라 / 恐其動而多危
이상은 족잠(足箴)이다.
말로써 마음을 드러내니 / 言以宣心
길흉과 선악이 여기에서 드러나며 / 吉凶善惡斯見
음식으로 몸을 기르니 / 食以養體
수요와 사생이 달려 있는 바이다 / 壽夭死生所托
그러므로 성인은 / 是以聖人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했나니 / 愼言語節飮食
이상은 구잠(口箴)이다.
○ 10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왕양명(王陽明)의 치지설(致知說)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그대가 왕양명의 치지설이 아주 옳다고 하였는데, 왕양명이 선유(先儒)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바로 처음 공부할 때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이네. 주자(朱子)가 물(物)을 이(理)로 해석하자, 왕양명이 틀렸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理)가 물(物) 위에 별도로 있을 수가 없고 내 마음이 바로 이(理)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양지(良知)이니, 심(心)과 이(理)를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드디어 주자의 학설에 대해, 의(義)를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 고자(告子)와 같다고 비난하였으니, 이 어찌 전혀 맞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의 기능은 생각[思]이고, 생각은 지각[知]을 주관하네. 주자가 치지격물(致知格物)을 해석하면서 ‘마음의 지각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마음에는 앎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수 있은즉, 내 마음이 알고 있는 이치와 각 사물에 산재해 있는 이치가 합해져 하나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하필 마음이 바로 이치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마음이 아는 것을 양지(良知)라고 하는데, 무릇 사람마다 기질이 같지 않은바, 성인의 마음은 다 양지의 본연(本然)에서 나오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기질에 편승되어 한쪽으로 치우치게 흐르는 바, 마음의 앎이 대부분 인욕(人欲)에서 나오게 되네. 왕양명의 이 말은 인욕을 천리(天理)로 여긴 것이니, 그 말류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종대왕(英宗大王) 43년 정해(1767), 선생의 나이 56세.
○ 1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저는 성격이 원래 어리석고 거칠어서 성명(性命)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는 애당초 연구하지 않고, 단지 선유들이 이미 정해 놓은 학설에 입각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터득한 실효라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칠설(四七說)에 이르러서는, 어려서부터 선입견이 있어 퇴계(退溪)의 학설만을 옳은 것으로 여겨왔으며, 사문(師門)의 《사칠신편(四七新編)》을 보고 나서는 더욱 이를 믿고 따라 오묘한 뜻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옛날에 의영고(義盈庫)에 재직하고 있을 적에 이경협이 보내온 편지에, 성인(聖人)의 공정한 희로(喜怒)를 일러 이발(理發)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이 길게 이어져 백 마디에 달했습니다. 그 때는 참고할 만한 서적도 없고 해서 대충 답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대체로 ‘희로라는 글자의 뜻이나 생긴 모양으로 보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氣)에서 나온 것으로, 거기에는 성인(聖人)과 우인(愚人)의 차별이 없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그에 대한 답이 다시 없었고, 저 역시도 전의 소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뿐, 다시 의심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그 발단은 신 진사(愼進士) 이름은 후담(後聃)이다. 에게서 나온 것으로, 선생도 그 설을 따랐으므로 집사(執事)께서 쟁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동문들 사이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오늘까지 왔으니, 그 얼마나 무디고 멍청합니까. 이에 어리석은 소견을 개진하여 재택(裁擇)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대체로 성(性)이 동하면 정(情)이 되는데, 정은 원래 선한 것이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너무 치성해서 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공정한 칠정(七情)도 역시 바로 성이 동하여 정이 된 것으로, 최초에는 본래 선한 곳에서 나왔으니 사단(四端)과 다를 것이 없는바, 그것을 일러 이발(理發)이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비록 보통 사람의 정(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성명(性命)에서 나온 것이라면 역시 다를 바가 없을 듯합니다. 이와 같이 보면 말하기가 쉬워서 이해하기 어려울 곳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퇴계(退溪) 이자(李子)는 성인의 희로(喜怒)는 기(氣)가 이(理)에 순응하여 발로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공평정대해서 고치고 평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후설(後說)이 비록 퇴계의 견해에 대부분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칠정이 비록 기(氣)에 속한 것이기는 해도 이(理)가 그 속에 있으니, 발함에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하늘이 명한 성(性)인데, 이를 어떻게 기발(氣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기(氣)가 이(理)에 순응한다고 한 퇴계의 말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퇴계가 이에 대해 변석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심통성정중도(心統性情中圖)에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시켜 놓고는 말하기를,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 한쪽만 말한 것이다.’고 했고, 이평숙(李平叔)에게 답한 편지에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답하였습니다. 지금 문집(文集)에 의거하면 고봉의 후설은 병인년에 지었고, 성학도(聖學圖)는 무진년에 만들었고, 이평숙에게 보낸 편지는 기사년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늘그막의 정론(定論)이 역시 고봉의 설을 따라 그러한 것입니까?
맹자(孟子)는 사단에서 심(心)을 말하고는 또 ‘그 정에 있어서는[乃若其情]’이라고 하였고, 예운(禮運)에서는 정(情)을 말하였으며, 악기(樂記)에서는 희로(喜怒)로써 심(心)을 말하였으니, 심(心)이 정(情)을 통솔하고 있는 묘리를 알 만합니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사단과 칠정이 이름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는 것은 과연 집사(執事)의 주장과 같습니다.
집사께서 또 말하기를, ‘사단을 확충해 나가면 칠정을 절제하는 길이 그 가운데 있고, 희로를 절도에 맞게 하면 그것이 자연 확충에 도움을 주는 길이다. 성인의 희로는 자연히 절도에 맞으니 이발(理發)이라고 해도 된다.’고 하였는바, 집사께서도 지금 그 견해를 대부분 따르고 계시는데, 그것은 이치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다시 의심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우매한 저로서는 끝내 석연치 않은 데가 있습니다. 맹자가 말한 사단은 정(情)의 선한 쪽을 지적해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정을 밝힌 것이고, 또 형기(形氣)와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면 그 정(情)이라는 것이 여러 갈래여서, 넷으로 말한 데가 있고, 《중용(中庸)》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하였다. 다섯으로 말한 데가 있고, 《대대례(大戴禮)》에는 희로욕구애(喜怒欲懼哀)라 하였고, 홍범전(洪範傳)에는 희락욕노애(喜樂欲怒哀)라 하였다. 여섯으로 말한 데가 있고, 《좌전(左傳)》에는, “자태숙(子太叔)이, 백성들에게는 호오희로애락(好惡喜怒哀樂)이 있는데, 그것은 육기(六氣)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하였고, 악기(樂記)에는 애락희로경애(哀樂喜怒敬愛)의 마음이라 했고, 《장자(莊子)》에는 오욕희로애락(惡欲喜怒哀樂)이라고 하였다. 일곱으로 말한 데가 있으며, 예운(禮運)에는 “무엇을 인정(人情)이라고 하는가.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學論)에서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 했으며, 《내경(內經)》에는 희로우사비경공(喜怒憂思悲驚恐)이라 하였다. 그 밖에 글자의 뜻으로 볼 때 정(情)에 포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개 이미 이런 형기(形氣)가 있으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즈음에 느낌에 따라 동하는 것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성인은 비록 자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여러 감정이 각각 기(氣)를 따라서 발하는 면에 있어서는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법입니다. 《좌전》에 육정(六情)이 육기(六氣)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그 육기란 바로 기(氣)입니다. 지금 그 육기가 순서를 따라서 어지럽지 않은 것을 일러 이발(理發)이라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의서(醫書)에도 칠정(七情)에 각각 소속된 장기(臟器)가 있으며, 치료법도 그에 따라 맞는 약을 쓰고 있습니다. 비록 성인의 칠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형기에 속해 있는 것은 분명한바, 이 형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기발(氣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퇴계가 말한 기(氣)가 이(理)에 순응한다는 말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이발이라고 해야만 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을 가지고 말한다면 희로의 감정이 까닭없이 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쁘거나 성낼 만한 일이 있어 발하는 법입니다. 만약 기쁘거나 성낼 만한 일이어서 희로가 발하였다면, 그 희로는 당연한 희로입니다. 당연한 희로를 모두 이발(理發)이라고 한다면, 처음 나올 때는 이(理)에서 나왔다가 중간에 희로가 중도를 잃은 이후에는 기발이라고 이른단 말입니까?”
○ 정산에게 편지를 보내다.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소남(邵南)에게 보낸 편지와 내용이 같았다.
○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초(草)하기 시작하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 및 문집(文集)이나 야승(野乘) 등 여러 책에서 뽑아 편년체(編年體)로 만들었는데, 책은 총 25권이었다.
○ 8월 병인일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다.
○ 10월 정묘일에 이 부인(李夫人)을 장사 지내고, 참판공의 묘소를 천장(遷葬)하여 선영(先塋)의 서쪽에다 합장하다.
옛 산소의 광(壙)에 수환(水患)이 있어서 천장한 것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4년 무자(1768), 선생의 나이 57세.
○ 5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상(殤)에는 입후(立後)하지 않는 뜻에 대해 논하였다.
○ 11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대학(大學)》 청송장(聽訟章)에 대하여 논하였다.
○ 12월에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일찍이 공이 독서하는 것을 보니, 언제나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반드시 깊고 높은 것만 추구하려 하더군. 그러므로 책을 한 권 읽고 이치 하나를 터득하는 데 있어서도 침착하고 면밀한 공부를 더할 겨를도 없이 먼저 자기 주장부터 내세워 꼭 자신의 뜻에만 맞추려고 하고 있는데, 만약 여기서 빨리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돌려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오랜 집착 끝에 자신의 의견만 옳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 공손한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적어질 것이네. 이것은 결국 마음을 쓰는 데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진덕수업(進德修業)하는 큰 공부에도 방해가 될 것이네.
공은 매번 ‘《대학》은 고본(古本)이 좋으니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또 ‘격치장(格致章)이 그대로 있으니 보망장(補亡章)은 필요 없다.’고 하고, 또 ‘청송장(聽訟章)은 귀결처가 없는 듯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공이 스스로 터득한 견해가 아니라, 선유(先儒)들이 이미 하고 또 한 진부한 말이네.
나는 늘 ‘장구(章句)를 익숙하게 읽어 글구 하나 글자 하나에서도 주자가 의도한 근본 뜻에 대해 모두 낙착을 보고 난 뒤, 비로소 다른 학설을 보고 그들의 의논을 보면 된다.’고 생각하였네. 지금 오랜 기간을 두고 쌓아올린 공부도 없이 새롭고 낯선 견해가 가슴속에 떠오르면 경솔하게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학공부(進學工夫)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공이 말한 ‘의리의 요지’라는 것은 이러한 곳에 있지는 않을 듯하네.”

영종대왕(英宗大王) 45년 기축(1769), 선생의 나이 58세.
○ 3월에 이기양(李基讓)의 편지에 답하다.
이기양의 설에, 《중용》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이 발하지 않은 중(中)을 사려가 이미 발한 것이라고 하면서, 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부연하여 설로 만들어서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이에 선생이 드디어 조목조목 그 설의 그름을 변석하였는데, 그 답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중용》의 첫머리 장에 나오는 ‘발하지 않았다.[未發]’는 뜻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말인바, 감히 무어라고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무릇 장구(章句)와 훈고(訓詁)하는 사이에 약간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두는 자가 한두 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의리의 큰 요체가 되는바, 이곳을 어긋나게 해석하면 장차 어긋나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는 후세의 성인인데, 이 분들을 따르지 않고 장차 그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계속 그렇게 한다면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아무런 꺼림이 없는 소인으로 될 것입니다. 고명하신 견해를 가진 당신께서 어찌 이 점을 생각지 않으시고 천만 뜻밖에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런 말을 하신단 말입니까. 공의 말과 같이 본다고 해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으며, 예전의 설대로 읽는다 해서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공은 또 기명(旣明 기명은 권철신(權哲身)의 자(字)임)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경(敬)은 선(禪) 쪽으로 흘러들기가 쉽고, 격치(格致)는 말하고 듣는 데로 흘러들기가 쉽다.’고 하시었는데, 이는 모두 정자와 주자 두 문하의 말폐(末弊)를 지적해서 말한 것입니다. 공께서 그러한 폐단을 아신다면 마땅히 정자의 경(敬)에 힘을 쏟아 마음을 집중해서 잡념을 버리되 고요한 데 치우치지 않게 하고, 주자의 격치에 공을 쏟아 수레바퀴나 새의 양 날개처럼 함께 닦아 나란히 나아가게 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빠져들지 않으면, 여기에서 지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문하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가지고 의심해서는 안 되는 부분에 의심을 한단 말입니까.
요순(堯舜)이 어진 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과 탕무(湯武)가 흉포한 자를 정벌한 것이, 후세에는 간웅(奸雄)들이 임금 자리를 빼앗는 핑계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의심해서야 되겠습니까.”
○ 정산(貞山)의 편지에 답하다.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제가 우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는데, 그 때 말씀하시기를, ‘성인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먼저 언로(言路)부터 열었다. 도를 밝히고 학문을 강론하는 일이 얼마만큼이나 중요한 일인데, 후생들의 말문을 막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학문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꼭 선배들의 말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고 하시었습니다.
이에 제가 일어나서 답하기를,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오로지 스스로 터득한 것을 가지고 먼저 자신의 주장부터 내세우게 될 경우, 사사로운 뜻이 마구 생겨나서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나이 젊은 후생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의지와 사려도 확고하지 못한 처지에서, 약간의 소견이 있을 경우 곧바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면서, 옛 분들도 몰랐던 것이라고 말하는 습성이 점차 자라난다면, 경박하고 부화(浮華)한 기상만 더해 줄 뿐, 덕을 쌓아가는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께서 웃으시면서, ‘그 말도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은 항상 재기(才氣)가 있어 말만 앞세우는 나이 젊은 사람들을 위해 그 폐단을 바로잡아 주자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스스로 터득하여서 확실한 자신의 견해가 있는 자에 대해서야 어찌 감히 똑같이 몰아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터득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별다른 뜻을 억지로 궁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선유(先儒)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면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정산이 보낸 편지에 ‘선유들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를 배척해 몰아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이렇게 답한 것이다.
○ 5월에 《성호예식(星湖禮式)》의 서문을 찬하다.
정산이 편집한 책인데, 선생에게 서문을 지어 주기를 요구하였으므로 선생이 찬한 것이다.
○ 8월에 정산에게 편지를 보내다.
내외종(內外從) 간에도 결혼(結婚)하는 중국(中國)의 풍습이 그른 것임을 논하였다.
○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가례(家禮)》가 주자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을 적은 책이 아님을 논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6년 경인(1770), 선생의 나이 59세.
○ 4월에 선부인(先夫人)의 행장(行狀)을 찬하다.
○ 5월에 대산(大山) 이경문(李景文)에게 편지를 보내다. 이공의 이름은 상정(象靖)이다.
사칠설(四七說)에 대해 논하였다.
○ 윤5월에 소남 윤동규에게 편지를 보내다.
옛 사람들의 학문의 정교함과 말학(末學)의 폐단에 대해 논하고, 또 《가례》가 주자 만년의 정론을 적은 책이 아님을 논하였다.
○ 8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사칠설(四七說)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퇴계를 존경하고 신뢰하여 사문(師門)에 귀의하여 감히 다른 의논을 펴지 않는 것으로 평소 나 자신을 인정해 왔네. 그런데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사흥(士興) 이기양(李基讓)의 자(字)이다. 이 사응(士凝) 한정운(韓鼎運)의 자이다. 에게 보낸 나의 편지를 보고 나의 말이 두 갈래 길 속에 또 두 갈래가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두 갈래라고 하는 것이 아마도 용호공(龍湖公) 소남 윤동규를 말한다. 의 ‘희로(喜怒)도 똑같이 칠정에 속한다.’고 하는 설을 가리키는 듯하네. 그러나 ‘그 속에 두 갈래 길이 또 있다.’고 한 것은, 나의 말 가운데 어느 구절을 가리켜서 말한 것인가? 이제 그렇게 된 시말을 말해 주겠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이미 형기(形氣)와 성명(性命)의 발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인데, 이것을 합하여 말하면 인심을 말할 때 도심도 그 속에 있는 것이다.’고 하였고, 퇴계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정(情)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性)에 본연(本然)과 기품(氣稟)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다.’라고 하였네.
그러나 만약 세분한다면 사단과 칠정은 본연과 기품의 구별이나 인심과 도심의 구별과는 실로 같지 않은 점이 있네. 이자(李子)가 어찌 이를 몰랐겠는가. 그러나 그 대체적인 것을 개괄적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네.
나는 퇴계의 이 말을 정론(正論)으로 삼아서 말하기를, ‘성(性)은 하나이나 본연과 기품의 차이가 있고, 심(心)은 하나이나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으며, 정(情)은 하나이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다.’고 하였던 것이네. 이를 뒤섞어서 말할 때는 다만 성(性)이다, 심(心)이다, 정(情)이다 하면 그뿐이네. 사단과 칠정이 발함에 비록 이(理)과 기(氣)의 차이가 있어서 각각 대립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똑같이 정(情)이네. 그러니 단순히 정만을 말할 적에는 사단과 칠정 모두가 정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발함이 같지 않은 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네. 정산(貞山)이 ‘공정한 희로는 이발(理發)이다.’라고 한 설은, 예운(禮運)에 있는 칠정과는 전혀 다르네. 그 뜻에 관해서는 일전에 공과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공이 그것을 잊고 이렇게 운운한 것은 아닌가?”

영종대왕(英宗大王) 47년 신묘(1771), 선생의 나이 60세.
○ 3월에 소남 윤동규의 편지에 답하다.
소남이 편지를 보내어서 《역경(易經)》 본의(本義) 가운데 의심스러운 부분과 《고려사(高麗史)》 및 《강목(綱目)》 가운데 고려(高麗) 묘제(廟制)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물어왔으므로 선생이 변석(辨釋)하여 답한 것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8년 임진(1772), 선생의 나이 61세.
○ 1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구주(九疇)를 논했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보내온 편지에 ‘홍범구주(洪範九疇)가 낙서(洛書)에서 법을 취하였다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1에서 9까지의 수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수인데, 어찌 하늘에서 내려준 뒤에야 알았겠는가.’ 하고, 또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위서(緯書)에서 나온 것으로, 대구이일(戴九履一)의 수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였는데, 구양수(歐陽脩)가 일찍이 하도와 낙서를 일러 괴상하고 망측한 글이라고 하였다더니, 뜻밖에 지금 공이 또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였네. 만약 이것이 그렇게 괴상하고 망측하여 믿지 못할 글이었다면, 어째서 ‘하수(河水)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자 성인(聖人)이 그것을 본뜬 것이다.’고 하였겠는가.
복희씨(伏羲氏)가 하도를 본떠 팔괘(八卦)를 그렸다는 것은 《역전(易傳)》을 보면 알 수 있는바, 거기에 ‘천일(天一)부터 지십(地十)까지’라고 한 것은 지금 전해지고 있는 하도와 조금도 틀림이 없이 딱 들어맞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괴상하고 망측하여 믿지 못할 것이란 말인가.
대우(大禹)가 낙서를 본떠 홍범구주를 만들었다는 말은 비록 경전(經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대대례(大戴禮)》 명당편(明堂篇)에 이(二), 구(九), 사(四), 칠(七), 오(五), 삼(三), 육(六), 일(一), 팔(八)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네.
그리고 또 1에서 10까지의 숫자 배열도 그냥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것이 아니네. 하늘은 자(子)에서 열렸고 1은 숫자의 시작이기 때문에 1의 수를 자방(子方)인 북(北)에서부터 세는 것이고, 하늘은 3으로, 땅은 2로 곱하여 수를 맞추는 것이네. 그러므로 1을 3으로 곱하여 3이 동(東)에 위치하고, 3을 3으로 곱하여 9가 남(南)에 위치하고, 9를 3으로 곱하여 27의 7이 서(西)에 위치하고, 7을 3으로 곱하여 21의 1이 다시 북(北)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렇게 양(陽)의 수는 순리적으로 셈하여 정사방(正四方)에 위치하게 되네.
그리고 2의 수는 서남쪽에 위치하는데, 2를 2로 곱하여 4가 동남쪽에 위치하고, 4를 2로 곱하여 8이 동북쪽에 위치하고, 8을 2로 곱하여 16의 6이 서북쪽에 위치하고, 6을 2로 곱하여 12의 2가 다시 서남쪽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렇게 음(陰)의 수는 역으로 셈하여 네 귀퉁이에 위치하게 되네. 이것이 어찌 수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또 대구이일(戴九履一)로 1과 9가 합하여 10이 되고, 좌삼우칠(左三右七)로 3과 7이 합하여 10이 되며, 2와 8, 4와 6도 모두 서로 짝이 되어서 10이 되네. 이렇게 낙서는 그 수가 비록 9에서 끝나지만, 10의 수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네. 그런즉 그 합이 역시 55가 되어 하도의 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네. 그리고 또 가로로 세거나 세로로 세거나 모두 15가 되네. 이와 같은 모든 자연의 법상(法象)을 사람이 만든 것이라 하면서 괴상하고 망측하여 믿지 못할 글이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복희씨가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의 이치를 살폈고, 대우(大禹)는 치수(治水)의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에 장차 괘(卦)를 그리고 주(疇)를 펼쳐서, 만물(萬物)의 뜻을 개통하고 천하의 사업을 성취하려고 하였네. 그러던 차에 하도와 낙서가 나타나 상서(祥瑞)를 고했는데, 그 자리와 수가 분명히 근거가 될 만하였었네. 그러므로 이를 인하여 그 자리에 수를 붙여서 본떴던 것일 뿐이네.
하도와 낙서는 수의 조종(祖宗)이고, 참위서(讖緯書)는 전적으로 술수(術數)만을 주장한 책이네. 그러므로 이것을 인용하여 쓴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네. 그런데 위서(緯書)에서 인용하였다고 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역전(易傳)의 분명한 말들을 모두 버리는 것은 어째서인가?”
○ 5월에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에 제수됨에 서울로 들어가 사은(謝恩)하다. 임술일에 서연(書筵)에 들어가 참여하다.
이 때 서연에서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는데, 이 날 강한 것은 ‘자절사(子絶四)’에서부터 ‘고여차야(固如此也)’까지였다. 빈객(賓客)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계방(桂坊)이 박학(博學)하고 들은 것이 많으니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합니다.”
하니, 동궁(東宮)이 선생으로 하여금 글 뜻을 아뢰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드디어 아뢰기를,
“윗장의 ‘절사(絶四)’는 성인(聖人)의 일이고, 아랫장의 ‘사물(四勿)’은 배우는 자의 일입니다. 성인은 본디 이 네 가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서(漢書)》에서는 ‘무(毋)’ 자를 ‘무(無)’ 자로 썼는바, 그 뜻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대개 보통 사람은 사사로운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 살피지 못하여 기필(期必)하게 되고, 기필하면서 살피지 못하여 집착하고 아집(我執)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孔子)의 문인들이 모두 면하지 못하였던 바입니다. 문인들이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공자를 관찰하여 공자에게 그런 것이 있나 없나를 징험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부자(夫子)를 관찰하였지만 부자께서는 원래부터 이 네 가지가 없었습니다. 천리(天理)가 혼연하여 사욕(私欲)이 전혀 없었으므로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두루 곡진하고 합당하였으니, 이 네 가지를 말할 만한 여지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절(絶)’이라는 것은 그 사사로운 마음을 본래부터 끊어 없애어 털끝만큼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안자(顔子)는 성인인 공자보다 한 등급이 낮기 때문에 아직 순화되지 못한 찌꺼기가 다소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물(勿)’ 자의 공부를 한 다음에야 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과 현인이 나뉘어지는 것으로, 진덕수(眞德秀)가 순서에 따라서 편찬한 뜻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어 ‘정자왈경즉례(程子曰敬卽禮)’부터 ‘시즉수절사(始則須絶四)’까지를 들어서 선생에게 말하게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곡례(曲禮)에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不敬]’고 하였습니다. 예(禮)는 본디 경(敬)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경이 곧 예이다.[敬即禮]’고 한 것입니다. 경을 통해서 안에 있는 마음을 바르게 하면 사욕(私欲)이 물러가서 마음의 명령을 듣게 되므로 이미 극복해야 할 사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만약 자기 극복에 공력을 들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뜻을 성실하게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뜻이 성실해지면 그 다음의 세 가지 걱정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네 가지를 끊어서 없애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아래에 있는 웅씨(熊氏)의 성의(誠意)에 관한 설은 옳지 않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성의(誠意)의 ‘의(意)’는 선(善)과 악(惡)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고, 무의(毋意)의 ‘의(意)’는 악 한쪽만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으로,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공력을 들일 때 반드시 성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위로는 존귀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필부에 이르기까지 애당초 차이가 없습니다. 아랫장의 시(視), 청(聽), 언(言), 동(動)은 곧 그 실천 요목 가운데서 큰 것으로, 반드시 이에 대해서 항상 유념하여 잊지 않고 뜻을 붙여 성찰해서 잠시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사로운 욕심이 점차 사라지고 천리(天理)가 점차 회복되는 법입니다.”
하였다. 또 빈객 채제공이 문사(文辭)에 관해서 진계(進戒)한 것을 인하여 선생이 아뢰기를,
“대개 제왕(帝王)의 학문은 실로 문사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제왕의 문장(文章)에 힘쓰는 법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모두 문장의 도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하(邸下)께서 만약 이와 같은 문장에 마음을 두신다면 어찌 신민들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6월 을축일에 서연(書筵)에 참가하다.
‘혹문안연(或問顔淵)’부터 ‘일이관지(一以貫之)’까지 강(講)하였다. 동궁이 선생으로 하여금 글 뜻을 진달하게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장은 극기복례장(克己復禮章)입니다. 대개 심학(心學)이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분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극기복례는 모두 한 꿰미에 꿰어진 것입니다. 이 마음에 인욕이 한 푼 자라면 천리가 한 푼 줄어들고, 인욕이 한 푼 극복되면 천리가 한 푼 회복되는 것입니다.
‘복(復)’ 자에는 옛것을 회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본디 오상(五常)과 사단(四端)의 본질적인 덕이 있으나, 다만 물욕(物欲)에 가려져서 그 본질적인 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이를 제거하면 그 본질적인 덕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광명한 거울의 본체가 때가 묻어서 그 광명의 본체를 잃어버렸다가 잘 닦아주면 다시 광명한 본체가 다시 나타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였다. 또 ‘물(勿)’ 자의 뜻에 대해 아뢰기를,
“오사(五事)의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는 곧 오행(五行)의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입니다. 사(思)를 토(土)에 귀속시킨 것은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이 마치 토가 나머지 사행(四行)의 사이를 유행(流行)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말한 시, 청, 언, 동은 오사(五事)의 항목과 부합되지만, 다만 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물(勿)’ 자는 금지(禁止)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의 뜻이 시, 청, 언, 동 네 가지에 두루 유행하는 것은 사(思)가 모, 언, 시, 청의 사사(四事)에 대해 그러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글 뜻이 좋다.”
하고, 동궁이 또 인도(仁道)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글자를 만든 데는 모두 뜻이 있으니, 이것이 상형(象形)이나 회의(會意) 등 육서(六書)가 만들어진 까닭입니다. 일찍이 자서(字書)를 보니, ‘인(仁)’ 자의 ‘二’는 곧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을 본뜬 것이며, 방변의 ‘亻’은 사람을 본뜬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도(仁道)가 삼재(三才)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니, 빈객이 말하기를,
“우연히 그런 것이지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만약 글자만을 좇아서 설명한다면 실로 천착(穿鑿)의 폐단이 생기게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자설(字說)과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그러한 것들이 많습니다. 정자(程子)는 ‘중심(中心)이 충(忠)이고, 여심(如心)이 서(恕)이다.’라고 새긴 일이 있고, 주자(朱子)도 ‘심생(心生)이 성(性)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사(思)’라는 글자는 전(田) 아래에 심(心)이 있는데, 대개 밭을 가는 방법이 가로로 갈기도 하고 세로로 갈기도 하는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밭을 가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글자를 만든 뜻이
범연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평소에 안자(顔子)가 즐거워한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여도 끝내 터득하지 못하였다. 만약 그저 도(道)를 즐긴다고만 말하면 너무 느슨해서 착수할 곳이 없을 것이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도(道)라는 글자는 과연 방대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도 이미 ‘도의 넓고 넓음이여, 어디에다 손댈 것인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안자(顔子)는 한 가지 착함을 얻으면 이를 정성스럽게 가슴속에 간직하여 잃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선을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중단됨이 없게 함으로써 모든 선이 다 모여드는 데 이르게 되어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말과 행동이 모두 천리(天理)로부터 나오게 된다면, 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강이 파하고 동궁이 선생에게 명하기를,
“옥당(玉堂)과 강원(講院)에 있는 서적들을 가져가 보아도 좋다.”
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은수(恩數)였다.
○ 기사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중용천명지성(中庸天命之性)’에서부터 ‘불가이유가의(不可以有加矣)’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중용》의 첫머리 장(章)은 만세 도학(道學)의 근원으로서, 제왕(帝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머리 구절의 성(性), 도(道), 교(敎)를 가지고 말하면, ‘본성을 따른다.[率性]’는 한 구절이 가장 긴요하고도 절실한 곳입니다.
근본을 미루어서 말한다면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이 되니, 하늘의 명이 심원하여 그침이 없음에 만물이 이를 받아서 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미루어 내려와서 사물에 분산하여 있으면 ‘도를 품절해 놓은 교[脩道之敎]’가 되니, 그 큰 것으로는 예(禮), 악(樂), 형(刑), 정(政) 따위가 그것이고, 그 작은 것으로는 말을 타고 소를 부리는 여러 가지 제도와 법식이 모두 교(敎)입니다.
‘성을 따르는 도[率性之道]’로써 말하면, 성은 본체이고 도는 작용입니다. 그런데 도의 본체는 넓고도 방대하여 손댈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혹하여 학문을 하는 방법을 모르고서 공허하고 고원한 데만 힘쓸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지극히 가까운 곳을 드러내어 말하고 계구(戒懼)의 뜻으로 뒤를 이음으로써 먼저 본원을 세웠으니, 이것은 존양(存養)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저 존양만 한다면 사물을 접응하는 방법을 모르므로 한쪽에만 빠져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신독(愼獨)의 뜻을 말하여 그 기미를 증험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성찰(省察)에 관한 일입니다. 이미 존양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또 성찰하여 그 기미를 살핀 다음에라야 선(善)을 확충하고 악(惡)을 극복하여 다스리게 되는데, 그 공부로는 성정(性情)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중화(中和)를 말하였습니다. 화(和)란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절도에 맞지 않으면 불화(不和)하여 불선(不善)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에는 반드시 극치(克治)하여야만 합니다.
공부란 존양(存養)과 성찰(省察)과 극치(克治) 세 가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존양하여 성찰하고, 성찰하여 극치하며, 극치하여 다시 존양하기를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잠시도 쉼없이 하는 것이 이른바 ‘성을 따르는 도’인 것입니다.
끝 구절에서는 그 공효에 대해 말하였는데, 위의 극기장(克己章)과 한 꿰미에 꿴 것입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란 곧 위의 세 가지 공부로서, 이른바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 곳에서 말한 위육(位育)과 같은 뜻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글 뜻이 좋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목전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서연(書筵)과 소대(召對)를 날마다 여는 것은 실로 임금의 덕을 성취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강학(講學)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체득하여 실행하는 부분에는 미치지 못할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행동하는 즈음에 성찰하고 체험하는 공부가 과연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체득하여 행하기가 실로 어렵다.”
하고, 이어 선생의 세계(世系)에 대해 묻자, 선생이 대충 세덕(世德)을 열거하여 답하였다.
○ 경오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혹문희로애락지전(或問喜怒哀樂之前)’부터 ‘자불진록(玆不盡錄)’까지 강하였다. 동궁이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에 대하여 공부하는 방법을 묻자, 선생이 아뢰기를,
“성인의 마음은 천리가 혼연하여 영명(靈明)한 본성이 저절로 보존되므로 널리 수응(酬應)함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인(衆人)의 마음은 혼매함과 동요됨의 두 가지 병폐가 있어서 아득히 혼매(昏昧)하지 않으면 반드시 상대를 따라 동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맑고 청정한 채로 일에 따라 성찰하는 공부가 없고, 미발이라거나 이발이라고 말할 만한 그 무엇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인으로 그치는 이유입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 하였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혼매한 때가 없을 것이고, 조장하지 않으면 동요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그 요지는 곧 경(敬)입니다. 고요한 때에 남이 보지 않아도 조심하여 경계하고 남이 듣지 않아도 두려워해야 하니, 《예기》에서 말한 ‘귀중한 보배나 가득찬 그릇을 손에 받든 듯 공경하고 조심한다.’는 것과 《시경》에서 말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 앞에 선듯, 살얼음을 밟듯이 한다.’는 것이 경(敬)을 실천하는 절도(節度)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지나치게 마음을 쓰다 보면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조이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뜻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뜻을 붙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평범하게 보존하며 간략하게 수습한다.’고 하였는바, 이것이 가장 절실하고도 요긴한 말입니다.
저하께서도 한번 평소에 한가하실 때나 사물을 접하실 때 반드시 존양과 성찰의 공부를 하여 보소서. 처음에는 비록 생경하고 어렵더라도 오래도록 익히다 보면 저절로 맥락이 밝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남이 지적하여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의(大義)가 밝아진 뒤 스스로 터득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평범하게 보존하며 간략하게 수습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마음이란 활동하고 흘러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일 한 가지 뜻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곧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옥죄는 것으로서 두 개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욱더 절박하게 얽혀들어 존양의 공부를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아주 가볍게 착수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익혀나가되,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요체입니다. 선유들이 ‘오래되면 당연히 보게 될 것이다.’고 말한 것이 아마도 이것을 가리킨 듯합니다.”
하였다.
○ 정축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잠수복의(潛雖伏矣)’부터 이 장(章)의 끝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신독(愼獨)의 글 뜻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으슥한 곳에 혼자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우에 반드시 조심하여 경계하는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으슥하고 어두운 곳에서 하는 미세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여기지만, 옛 역사를 통해 징험해 보면, 여희(驪姬)의 한밤중의 울음과 양귀비(楊貴妃)의 칠석(七夕)의 맹세가 후세에 전해졌는바, 그 두려워할 만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기묘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우왈흉중(又曰胸中)’부터 ‘지자이언야(至者而言也)’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고 하였습니다. 유안세(劉安世)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은 뒤 이를 잊지 않고 항상 마음에 새겨서 7년이 되도록 그것을 지켰으니, 옛 사람이 공부를 함에 있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노력하면서 거짓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소학(小學)》을 보면 절효공(節孝公) 서적(徐積)이 또한 ‘머리를 반듯이 하라.’는 호안정(胡安定)의 경계를 듣고는 머리만 반듯이 할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바르게 하여야겠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감히 사특한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한 번 변화하여 도(道)에 이르는 기틀이 털끝만큼의 틈도 용납하지 아니하여 그 크나큰 기상을 막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하의 큰 용기가 아니고는 이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후세의 유자(儒者)들이 인순(因循)하고 골몰하여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용감하게 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주자가 젊었을 때 책을 한 권 만들고는 그 이름을 《곤학공문(困學恐聞)》이라고 하였는데, 그 책의 이름은 ‘자로(子路)는 들은 말을 미처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새로운 가르침을 듣게 될까 두려워하였다.’는 말에서 취한 것입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학문하기를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크게 성취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였다.
○ 경진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난계범씨(蘭溪范氏)’부터 ‘자행지야(自行之也)’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유주상(流注想)’이란 말은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부념(浮念)과 객려(客慮)입니다. 무릇 일체의 욕심에서 발하는 것은 깊은 성찰을 통해서 극복하여 제거될 수 있지만, 이 부념과 객려는 금방 있다가 금방 없어지고 금방 갔다가 금방 다시 오기 때문에 분란스러워 제거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곳입니다. 경(敬)은 온갖 사특함을 이기는 것인바, 사특함을 막아서 성(誠)을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성과 경 두 글자에 대하여 공부하는 도리를 안다면 이런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인유살심(人有殺心)’ 이하의 네 구절에 대한 물음을 받고 대답하기를,
“마음[心]이란 것은 한 몸을 주재(主宰)하는 것으로, 마음이 태연하면 백체(百體)가 그 명령에 따릅니다. 마음이 한 번 동할 경우 그것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우기가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 갑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소위수신(所謂修身)’부터 ‘불란지위(不亂之謂)’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성의장(誠意章)은 성찰(省察)의 공부(工夫)이고 정심장(正心章)은 조존(操存)의 공부라는 내용으로 대답하였으며, 또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두 가지 뜻, 잊지도 말고[勿忘]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勿助]는 것, 마음이 치우치거나 얽매이는 병통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 을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열기사(閱機事)’부터 ‘저개심(這箇心)’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성실하여 거짓이 없으면 기심(機心)을 제거하여 만사에 수응(酬應)할 수 있으나, 한번 기심에 관계되면 곧장 거짓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는바, 이것은 성인이 크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자신의 마음이 엄한 스승이다.[己心爲嚴師]’라고 한 부분을 논하면서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라. 하루에도 만 가지의 기틀이 생긴다.’는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 7월에 병으로 인해 체차되다.
○ 8월에 집으로 돌아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49년 계사(1773), 선생의 나이 62세.
○ 여름에 대신(大臣)이 계방(桂坊)에서 오랫동안 사진(仕進)시킬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선생이 뽑히다.
○ 8월에 소남 윤동규의 부음(訃音)에 곡하다. 제문(祭文)을 지은 것이 있다.
○ 12월에 익위사 위수(翊衛司衛率)에 제수되다.

영종대왕(英宗大王) 50년 갑오(1774), 선생의 나이 63세.
○ 1월에 서울로 들어가다.
산림동(山林洞)에 있는 장령(掌令) 성영(成穎)의 집에서 살았다.
○ 경오일에 나아가서 숙배(肅拜)하다.
○ 임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이 때 서연에서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수렴용지장(收斂容止章)을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용지(容止)를 수렴하는 근본은 경(敬)에 있는데, 경은 동(動)과 정(靜)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만일 외형만 수렴하고 내면을 경으로 지켜가지 않는다면 한 성제(漢成帝)가 조회(朝會)에 임할 때는 근엄하였으나 혼음(昏淫)하게 되고 만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 뿐입니다. 만일 경으로 주장을 삼는다면 모든 움직임에 다 법도가 있어서, 다닐 때는 걸음걸이가 저절로 중후해지고 볼 때는 시선이 저절로 단정해지는 등 모든 행동이 다 도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 경을 놓아버려서 잠시라도 잊어버리거나 소홀함이 있게 할 경우 걸어갈 때는 반드시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바라볼 때는 시선이 반드시 경박하고 사특할 것이며, 말할 때에는 조급하고 박절하여 안정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를 인하여 묻기를,
“연전에는 어찌해서 그리 급하게 돌아갔는가?”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에게 이상한 병이 있어서 벼슬에 종사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 때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갔었는데, 헤어진 데 대한 서운한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또다시 제수하는 명이 내려졌는데, 병세가 여전하여서 실로 나와서 숙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하(邸下)의 학문이 날로 진보한다는 말을 듣고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서 다시 한 번 맑고 훤한 모습을 우러러 뵙고자 하여 병을 무릅쓰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러나 실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벼슬에 종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지금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고 있어서 지난번의 무덥던 때와는 다르니, 자주 입번(入番)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면서, 매우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선생이 입직(入直)한 뒤에 안경빈(安敬彬)의 무리가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근래에 서연을 총총히 끝내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성수(聖壽)가 점차 높아가니 좌우에서 봉양하는 일과 처리해야 할 사무가 많을 것인바, 이는 실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들 무리는 말하는 것이 모호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으므로, 선생이 이를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날 물러나올 즈음에 선생이 아뢰기를,
“계방의 직책은 시위(侍衛)하는 것이므로 감히 직분을 뛰어넘어 주제넘게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서연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시었으니, 저의 변변치 못한 생각을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입직할 때 동료 관원들의 말을 들으니, 모두들 근래 서연을 총총히 끝낸다고 하면서 자못 의아해하는 말을 하였는데, 오늘 보니 과연 사실입니다. 신은 저하께서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감선(監膳)을 하거나 시좌(侍坐)를 하는 시간과 상치되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하니, 동궁이 나직한 목소리로 답하기를,
“성수가 날로 높아감에 자연 바쁜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제왕(帝王)이 행할 도리 가운데 효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효를 지극하게 하면 형체가 없는 데에서도 보고 소리가 없는 데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서연이 비록 중한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두 번째 가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동궁이 자못 가상하게 여기면서 받아들이는 뜻이 있었다. 선생이 물러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서연을 총총히 끝내는 이유는 내가 말한 대로이다. 그러니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으며, 이 역시 어찌 신민들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갑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수렴언어장(收斂言語章)을 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공자(孔子)의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중부괘(中孚卦)의 이효(二爻)를 해석한 말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으니 내 너와 함께 하리라.[鳴鶴在陰 其子和之 我有好爵 吾與爾縻之]’ 하였습니다. ‘부(孚)’는 믿음입니다.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상응하여 서로를 신뢰하여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동궁이 이르기를,
“내가 아직 《주역》을 읽지 않아서 주역을 잘 모른다. ‘이효와 오효가 상응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자, 선생이 내괘(內卦)와 외괘(外卦)가 상응하는 뜻에 대하여 부연 설명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공자가 전(傳)을 지으면서도 그 상(象)을 취해 말하였는바, 한갓 언행(言行)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괘의 내괘는 태(兌)인데, 태는 기쁨을 뜻합니다. 사람이 기쁘면 말을 합니다. 또 태(兌)란 글자에는 ‘구(口)’의 상(象)이 있으므로 말[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효가 움직이면 진(震)이 되는데, 진은 움직임[動]입니다. 행동은 움직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사람에게 절실한 것으로 언행(言行)보다 더한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상(象)에서 뜻을 취하여 밝힌 것입니다. 언행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임금으로 있는 자는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해서 한 마디 말도 실수함이 없고 한 가지 행동도 잘못됨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 잠깐 사이에 사방 사람들이 다 알게 되니, 그 기틀이 과연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옛 사람이 또 말하기를, ‘대청에서 말을 하면 대청에 가득하고 방에서 말을 하면 방에 가득하다.’ 하였으며, ‘말이 천하에 가득하여도 입의 잘못이 없고 행동이 천하에 가득하여도 몸의 잘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을 삼가는 것은 수신(修身)의 지극함이니, 공부가 능히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행실에는 비록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옛 사람은 효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효제(孝悌)의 덕은 신명(神明)에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참으로 먼저 그 효의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궁중(宮中)이 모두 공경하고 삼가서 화기(和氣)가 충만해져 바깥으로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명에 통하고 천지(天地)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동궁이 억장(抑章)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르기를,
“위 무공(衛武公)이 나이가 들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 편의 첫머리 장(章)에서 ‘빈틈없는 위의(威儀)는 덕(德)의 방정함이다.’고 한 것은 그 바깥을 다스린 것을 말한 것이고, 중간에 ‘따사롭고 공손한 분은 오로지 덕의 바탕이네.’라고 한 것은 그 안을 다스린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공부란 밖을 제어하고 안을 배양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 문세(文勢)와 구법(句法)이 역시 이와 같은바, 이 두 구절은 실로 이 시의 강령(綱領)입니다.
공손한 덕은 실로 큰 것이니, 외면만을 공손하게 하고 삼갈 뿐만 아니라, 그 안의 마음도 진실로 공손한 다음에야 덕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역》의 겸괘(謙卦)는 모두 길하고 흉(凶)이 없으며, 요순(堯舜)과 공자(孔子)의 덕도 모두 ‘공(恭)’ 한 글자를 칭하였으니, 그 공효가 독공(篤恭)을 통하여 천하가 평안해지게 하는 데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 을해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수렴기신장(收斂其身章)을 강하였다. 선생이 ‘오불가장(傲不可長)’ 구절을 해석하여 아뢰기를,
“오만[傲]은 대단히 큰 흉덕(凶德)입니다. 그 때문에 네 가지 가운데 맨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진(秦) 나라 이후로 임금의 도(道)는 날로 높아지고 신하의 도는 날로 낮아진 탓에 상하 간의 정의(情意)가 막혀 버렸습니다. 이에 임금으로 있는 자가 매번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병통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오만한 데에서 나온 흉덕입니다.”
하니, 동궁이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는 뜻이 있었다. 이 때 《어류(語類)》에 토(吐)를 다는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아뢰기를,
“토를 다는 한 가지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어류》는 당시의 속어(俗語)가 태반이어서 실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토를 달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 문세(文勢)를 따라 읽으면서 깊이 생각하여 완미하고 탐구하다가 보면 터득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억지로 토를 달 경우 도리어 그 의미가 얕고 짧게 될 듯합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르기를,
“한 질의 책에 반은 토를 달고 반은 달지 않아서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토를 달기로 한 것은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두 권이다. 동궁이, 선생이 찬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얻어볼 수 없는가고 물으니, 선생은 초고본(草稿本)이라서 볼 것이 못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다.
○ 4월 갑신일에 서연에 참가하다.
이기장(理氣章)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동궁이 선생에게 묻기를,
“퇴계와 율곡의 이기설(理氣說)이 각자 다른데, 그대는 누구의 설을 따르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늙고 어리석어서 성리(性理)의 근원에 대해 감히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스스로 터득한 율곡의 견해가 좋기는 하지만, 퇴계의 설은 주자의 《어류》 가운데 보광(輔廣)이 기록한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고 한 데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보광은 주자 문하의 고제(高弟)이니, 반드시 잘못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퇴계의 설은 그 내력과 연원이 있으므로 신은 일찍이 퇴계의 설을 따랐습니다.”
하였다.
○ 입직(入直)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읊은 절구(絶句) 4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다음과 같다.
게을러서 산골집에 누웠어야 알맞음에 / 疎慵端合臥巖扉
사월 들어 서울의 객 돌아만 가고 싶네 / 四月長安客欲歸
떠날까 머물까 뜻 정하기 어려운데 / 這裏去留難定意
동룡문의 나무는 휘늘어져 있구나 / 銅龍樹色望依依
○ 7월에 집으로 돌아오다.
선생이 일찍이 설서(說書) 이상준(李商駿)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는 애통함이 심하고 의지할 부모님이 돌아가셨기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계방(桂坊)의 자리에 다시 나아간 것은 참으로 저하를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여서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근래에 저하의 학문이 일취월장한다기에 다시금 맑으신 그 모습을 우러러 뵈어서 저의 하찮은 정성이나마 다하려고 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외람스레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늙어 병들고 어눌하여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못한데도 여러 차례 돌보아 주시면서 칭찬하기를 마지 않으시었는바, 실로 시골 구석의 소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다가 끝내는 위로 세자를 속이게 되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매번 박학(博學)하다고 하시었습니다. 박학(博學)과 박문(博文)이 비록 성문(聖門)에서 버린 바는 아니지만, 단지 고사(古事)를 기억하고 고례(古例)를 상고하는 것일 뿐이라면 장고(掌故)를 맡은 관리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할 것입니다. 이는 실로 군자(君子)의 원대한 사업에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학문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올라와서 열 번 서연에 나아갔는데, 글을 인해서 대충 주달하는 데 불과하였을 뿐, 이른바 성현(聖賢)의 실제 공부나 제왕의 큰 사업과 같은 원대함을 도모할 수 있는 데에 이르러서는, 재주가 노둔하여 아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역시 직분을 벗어나서 외람되이 진달할 수 없었던 탓에, 입만 다물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으니, 저 자신을 돌아봄에 부끄러워 탄식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병세가 더욱 도진데다 머무를 곳도 마땅치 않아서 몇 달 사이에 네 번이나 거처를 옮겼습니다. 외롭게 지내면서 갖가지로 고초를 겪고 있는바, 형세상 즉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도 차마 쉽사리 훌쩍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훗날 장차 한 차례 입직을 한 뒤에 즉시 돌아갈 계획입니다.”
○ 집으로 돌아온 뒤 또 편지를 보내 제왕(帝王)의 학문 및 예학(睿學)을 성취시킬 방도에 관해 논하였다.

영종대왕(英宗大王) 51년 을미(1775), 선생의 나이 64세.
○ 1월에 부인 성씨(成氏)가 졸하다.
○ 가을에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를 완성하다.
선생은 《어류》가 학자에게 있어서 긴요한 책인데도 말뜻이 중첩되고 권질이 아주 많아서 고열(考閱)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여겼다. 이에 번잡한 것을 잘라내고 요점만을 추렸는데, 책은 총 8권이며, 이름을 《어류절요(語類節要)》라고 하였다.
○ 10월에 다시 익위사 익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윤10월에 회인 현감(懷仁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나가서 사은숙배하고 바로 체차되다.
도백(道伯)이 전임관을 그대로 잉임(仍任)시킬 것을 계청하였으므로 바로 체차된 것이다.
○ 그날 특별 전교로 인해 다시 익위사 익찬에 제수됨에 사은(謝恩)하다.
약현(藥峴)에 있는 승지 유훈(柳薰)의 집에 머물렀다.
○ 이 때 상의 체후(體候)가 편치 않아서 주원(廚院)에 직숙(直宿)하였는데, 전례에 의거해 개강(開講)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여러 차례 입직하였으나 한 번도 서연에 나아가지 못했다.
○ 11월에 상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다.
11월 13일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의철(李宜哲)이 아뢴 바에 의거해 대신에게 물어서 계방(桂坊)의 좌목(座目)을 가져다 보니, 그 가운데 김이안(金履安)은 고(故) 찬선(贊善) 김원행(金元行)의 아들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며, 안정복(安鼎福), 이겸진(李謙鎭)에 대해서는 영상이 칭찬하였다. 김이안이 입직하고 있으므로 내가 막 불러서 보았다. 이 하교를 정서한 다음 세손궁(世孫宮)에 들여서 어린 아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고서 서연을 열어 소대(召對)할 때 반드시 학문을 토론하도록 하라. 이 역시 동궁을 위하여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의 계방은 이조에서 과연 잘 가려 뽑았다. 이 뒤로도 역시 각별하게 가려 뽑도록 하라.”
하였다. 14일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인견(引見)하여 입시할 때 영상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춘방과 계방의 관원은 극히 잘 가려 뽑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옳다. 계방은 어떤 사람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익찬 안정복인데 경학(經學)에 뛰어나고, 또 듣건대 그의 사람됨이 아주 단정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집안 사람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 12월 계축일에 동궁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면서 경현당(景賢堂)에서 백관들의 조참(朝參)을 받음에 시위(侍衛)로 들어가서 참여하다.
○ 정묘일에 병으로 인해 정사(呈辭)하고 집으로 돌아오다.
○ 반계(磻溪) 유 선생(柳先生)의 연보(年譜)를 찬하다. 선생의 이름은 형원(馨遠)으로, 인조(仁祖) 때의 사람이다.

영종대왕(英宗大王) 52년 병신(1776), 선생의 나이 65세.
○ 새해 초 동궁의 영지(令旨)를 보고 기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돌고돌아 정월이 다시 옴에 / 天運昭回析木津
밝은 해 떠오르니 계절은 초봄이네 / 日輪扶擁御王春
새 정책 선포함에 백성들 고무되니 / 新政渙發民皆聳
흰 머리의 늙은 신하 마음이 흐뭇하네 / 白首歡心有老臣
○ 1월에 외방에 있다는 이유로 체차되다.
○ 3월에 영종대왕(英宗大王)이 승하하다.
시골 마을 앞에 곡하는 자리를 설치하고 가인(家人), 종족(宗族), 빈객(賓客), 촌민(村民)들과 함께 모여 곡하였다. 날마다 아침에 모여 곡하면서 성복(成服)할 때까지 하였으며, 인산(因山) 때에는 족인(族人)의 외사(外舍)로 나가 며칠 동안 거처하였으며, 인하여 망곡(望哭)하였다.
○ 8월에 정산의 부음(訃音)을 듣고 곡하다.
○ 9월에 목천 현감(木川縣監)에 제수됨에 서울로 들어와 사은하다.
효교(孝橋)에 있는 권빈(權)의 집에서 머물렀다.
○ 10월에 부임하다.
고을로 내려간 처음에 먼저 백성들에게 교화(敎化)를 돈독히 하고 명분(名分)을 바로잡겠다는 뜻으로 유시(諭示)하였다. 그러면서 대명(大明)의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제정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며, 웃어른을 존경하고, 마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들을 가르치고, 각자의 생업에 안정하고, 비위(非爲)를 저지르지 말라.”는 내용의 훈민육조(訓民六條)를 가지고 조목별로 나열하여 효유(曉諭)한 다음, 매월 초하룻날 상하의 백성들이 모여서 약조(約條)를 읽게 하였다. 그리고 혹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거나, 이웃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거나, 웃어른을 범하여 능멸하거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간사한 짓을 하는 등의 여섯 조목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렬히 다스려서 엄금하겠다는 뜻도 역시 효유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권장되고 징계되는 바가 있게 하였으며, 그 뒤로 달마다 신칙(申飭)해서 실제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였다.
○ 12월에 고을에서 얼음을 저장하다.
본 고을의 옛 규례에 매번 얼음을 저장할 즈음에는 반드시 온 고을의 백성들을 동원하였는데, 시절이 마침 엄동설한을 당하여 걸핏하면 여러 날 동안을 부역하는 탓에 갖가지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 해 겨울에 관가에서 고을의 민정(民丁)들을 고용해서 술과 밥을 후하게 먹여 주면서 얼음을 떠서 저장하게 하니, 하루만에 일이 끝남에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면서 칭송하였다. 그 뒤에 이를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이어 혁파하였다.

정종대왕(正宗大王) 원년 정유(1777), 선생의 나이 66세.
○ 1월에 방역소(防役所)를 설치하다.
본 고을에는 당초에 고마(雇馬)를 설치하는 규정이 없어서 신임 수령과 전임 수령이 교대할 즈음에 매번 민결(民結)에서 수납(收納)하는 탓에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선생이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호적(戶籍) 정리를 하는 식년(式年)을 당하였으므로, 아전의 무리들로 하여금 호적을 나누어서 베끼게 하여 서사 조(書寫租) 1백여 석을 얻고, 또 별도로 조처해서 쌀 3백여 말[斗]을 얻어서, 이를 돈으로 바꾸어 수백 금을 마련하였다. 그런 다음 이를 각 동(洞)에 나누어 주어 해마다 이자를 받아들여 불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관가에서는 그 돈의 용처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으면서, 관원이 교체할 때의 쇄마가(刷馬價)와 각종 진상(進上)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금 등 일체의 백성들의 부역을 모두 이것으로 판출(辦出)하게 하였는데,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폐기하지 말고 영구히 준행하게 하였다. 또 동회의(洞會儀)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봄가을로 서로 모여 약조(約條)를 읽으면서 이를 준행하게 하였다.
○ 백성들이 목비(木碑)를 세우는 것을 금하다.
선생이 고을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니,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면서 칭송하여 온 경내에 목비(木碑)가 세워졌다. 선생이 마침 관아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를 보고는 사람들을 시켜서 그 목비를 뽑아 버리게 하였는데, 1백 리 안에 나무 조각을 깎아 만든 비가 거의 한 바리나 되었다. 어떤 비에 쓰기를,
관가에서 스스로 얼음을 뜨니 / 官自伐氷
정사의 맑기가 얼음과 같고 / 政淸如氷
관가에서 스스로 호적을 쓰니 / 官自書籍
정사를 역사책에 기록할 만하도다 / 政可載籍
라고 하였는데, 선생이 이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정사를 펴고 한 가지 명령을 냄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혜택이 있으면 비를 세워 칭송하니,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깎아 내고 쪼개 버릴 것이다. 그리고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는 것은 관장(官長)을 가지고 노는 뜻이 있는 것으로, 결단코 아름다운 풍습이 아니다.”
하고는, 이런 내용으로 효유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 동몽(童蒙) 이인갑(李仁甲)의 효행(孝行)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다.
본 고을 사람 이인갑은 나이가 18세로 탁월한 행실이 있었으므로, 사림(士林)에서 상서(上書)를 올림을 인하여 감사에게 보고해서 조정에 아뢰어 주기를 청한 것이다.
○ 고을 안에 농사를 권장하는 뜻을 두루 유시하다.
규례(規例)를 조목별로 나열하였는데, 그 한 조목은 다음과 같다.
“지금 농사지을 철을 당하여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밭에 나가 일하고 있는데, 남녀의 구별은 예로부터 아주 엄한 법이다. 그러니 아무리 들에서 일을 할 때일지라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따로 일하여, 한 곳에 뒤섞여 일하면서 희롱하고 불경(不敬)스러운 짓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 3월에 아들 안경증(安景曾)의 상을 당하다.

정종대왕(正宗大王) 2년 무술(1778), 선생의 나이 67세.
○ 2월에 말미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다.
○ 7월에 고을로 돌아가다.
2월에 집으로 돌아갈 때 이미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결정하였다. 이에 집에 있는 몇 달 사이에 일곱 차례나 감사에게 사장(辭狀)을 올렸으나, 감사가 끝내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득이해서 고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8월에 사람을 보내 황후천(黃朽淺)의 묘(墓)에 제사 지내다.
후천의 이름은 황종해(黃宗海)이며, 묘는 본 고을에 있다. 선생이 글을 지어 제사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가 어렸을 적에 가숙(家塾)의 책상자 속에서 선생의 문집(文集)을 꺼내어 읽고는 선생의 학문을 알게 되어 일찍부터 사모하고 공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외람되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이 고을에 부임하였는데, 이곳은 실로 선생께서 사셨던 곳이며, 장례를 지낸 곳도 역시 이곳입니다. 아, 산천은 옛날 그대로이고 인사(人士) 또한 예전과 같건만, 선생 같은 이가 다시 나와서 선생의 업(業)을 이어 닦는 사람이 없는 탓에, 선비들은 나아갈 방향을 잃고 인심(人心)은 날로 그르게 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제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니 못된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덕은 부족하고 재주는 형편없으며 나이는 늙고 뜻은 꺾인 탓에, 한갓 지난날을 느꺼워하고 오늘날의 시속을 탄식만 할 뿐입니다.”
○ 10월에 감사에게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에 봉급을 줄여서 금년치의 결전(結錢)을 반으로 감하다.

정종대왕(正宗大王) 3년 기해(1779), 선생의 나이 68세.
○ 2월에 봉급을 줄여서 고을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다.
2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진휼한 자가 2천여 명이었다.
○ 《대록지(大麓志)》를 찬하다.
대록(大麓)은 목천(木川) 고을의 별칭이다. 선생이 고을에 지(志)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드디어 찬한 것이다.
○ 백성들에게 향약(鄕約)을 권장하여 시행하게 하다.
이 때 내린 체문(帖文)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삼대(三代) 시대를 본받지 않는다면 구차스러울 뿐이다. 삼대의 백성이라고 하여 저절로 착해졌던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방법이 분명하고 권면하여 인도하는 데 방도가 있었기 때문에 착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의 교화(敎化)가 이미 아득해짐에 백성들의 풍속이 날로 각박해져서 놀며 떠도는 것이 습속이 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이를 다잡으려 한다면 약법(約法)을 정해 단속하는 정치를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다. 이것이 바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이 만들어진 까닭인데, 주자(朱子)가 이를 적절히 손질하여 후세에 반드시 시행해야 할 좋은 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끓이듯 살살 다루어야 하는바, 반드시 점차적으로 길들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이 나아가게 함으로써 갑작스럽게 서둘러서 거부감을 일으키는 걱정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전일에 반포한 동회의(洞會儀)는 간단하고 쉬워서 쉽사리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통해서 차츰 단결하여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 비로소 여씨향약의 본 조항을 참작하여 일으켜 행하도록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약법을 정해 단속하지 않으면 가다듬고 검속할 수 없으며, 상과 벌을 내리지 않으면 경계시키고 격려할 수 없으니, 요체는 여러 군자들이 적절히 헤아려서 시행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아, 민심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더라도 제(齊) 나라가 변하면 노(魯) 나라에 이를 수 있고, 세도(世道)가 아무리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은(殷) 나라의 예(禮)를 송(宋) 나라에서 징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향약을 시행하는 것은 실로 오늘날에 있어서 시급한 일이다.
지금 듣건대, 동면(東面) 중에는 이를 일으켜 시행하는 동이 있다고 한다. 각 면과 각 동에서 이를 본받아서 점차적으로 일으켜 시행한다면, 예속(禮俗)의 시행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이 우리 성상의 치화(治化)에 도움이 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다시 여러 군자들에게 한 마디 해줄 만한 말이 있다. 주자가 일찍이 향약에 대하여 말하기를, ‘선배들이 사람들을 가르쳐서 풍속을 착하게 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수양할 덕목(德目)을 알게 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더욱더 가슴속에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 그러니 여러 군자들은 부디 깊이 유념하기 바란다.
옛 사람들이 마을마다 단(壇)을 쌓고 큰 나무를 심고는 매년 봄가을의 중월(仲月)의 첫번째 무일(戊日)에 집집마다 돈을 거두어서 음식을 마련할 경비를 준비해서 사신(社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였는데, 그 법이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갖추어져 있다. 이것은 실로 의심할 여지 없이 반드시 시행하여야 할 일이다.”
○ 사마소(司馬所)를 다시 설치하다.
사마소는 바로 고을 안의 선비들이 학업을 닦는 곳으로, 국초에 창설되었다가 중도에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관에서 재력(財力)를 도우고 또 조약(條約)을 세워 여러 유생들에게 유시하여 다시 설치한 것이다.
○ 4월에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다.
6월에 감사에게 세 번 사장(辭狀)을 올려서 비로소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 뒤 신축년(1781)에 고을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읍의 동쪽에 있는 복귀정(伏龜亭)에 세웠다.

정종대왕(正宗大王) 4년 경자(1780), 선생의 나이 69세.
○ 4월에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다.
동중(洞中)의 여러 유생들 가운데 예를 좋아하는 자들이 찾아와서 향사례를 행할 것을 청하자, 선생이 고금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향사홀기(鄕射笏記)를 만들어서 행하였다.

정종대왕(正宗大王) 5년 신축(1781), 선생의 나이 70세.
○ 4월에 《가례집해(家禮集解)》를 완성하다.
선생은 일찍이 세상의 학자들이 《가례》에 대해서 글 뜻을 두찬(杜撰)하고 예(禮)의 마땅함을 전혀 모르는 것을 걱정스럽게 여겼다. 이에 구절에 따라 주석(註釋)을 달고 간간이 선유(先儒)들의 학설을 덧붙이고는 《가례집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을해년(1755, 영조 31)부터 초고(草稿)를 작성하기 시작하여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서 문인인 황덕일(黃德壹)과 함께 교열하고 교정한 다음 정서하여 베낀 것이다.
○ 6월에 상께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안으로 들이라는 하교를 내리다.
승선(承宣) 정지검(鄭志儉)을 통해서 상에게 올렸다.
○ 12월에 돈령부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돈령(敦寧)의 대(代)가 다하였다는 이유로 정장(呈狀)하여 체차된 것이다.

정종대왕(正宗大王) 6년 임인(1782), 선생의 나이 71세.
○ 8월에 권철신의 편지에 답하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예(禮)는 시대에 따라서 변혁되어 왔는데, 이는 굳이 달리하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숭상하는 것이 점차 달라져서 그에 따라 변혁된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예를 행함에 있어서는 굳이 시속(時俗)과 다르게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으니, 예의 원칙만 그대로 서 있으면 사소한 형식쯤은 시속을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지금 공이 《가례》의 ‘유식(侑食)이 삼헌(三獻) 뒤에 있고 축문(祝文)을 초헌(初獻) 때 읽게 한 것’은 크게 성인의 본뜻을 잃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고례(古禮)에는 시동씨[尸]가 있었기 때문에 시동씨를 맞기 전에 귀신의 자리를 만들고 제물(祭物)을 차려 귀신이 흠향하도록 축문을 읽었으며, 그 뒤 시동씨를 맞아 삼헌을 하면서 그 때마다 유식과 고포(告飽)하는 절차가 있었네. 그렇지만 후세에는 시동씨가 없으니 형편상 부득이해서 초헌 뒤에 축문을 읽어야 하고 개원례(開元禮)가 이미 그렇다. 시동씨를 대접하는 절차가 없으니 형편상 삼헌 뒤에 유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런데 공은 이것을 가지고 틀렸다고 하니, 그렇다면 공은 강신(降神) 뒤에 축문을 읽고 시동씨를 대접하듯이 삼헌을 한 잔 올릴 적마다 유식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인가? 고례(古禮)가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가례》에서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생략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꼭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리고 강신(降神) 술을 붓고 쑥을 태우는 것이 참람한 짓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이미 말하여 분향하고 술 붓는 것으로 대신하였고, 주자도 ‘강신 술을 붓고 쑥을 태우는 것은 천자나 제후가 쓰는 예이다.’고 하였으며, 구씨(丘氏)는 이르기를, ‘후세에 신을 제사하면서 분향하는 것이 비록 고례(古禮)는 아니지만, 통용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귀신도 편안하게 여길 것이다.’ 하였네.
살펴보건대 개원례(開元禮)를 보면 사대부 이하의 제례(祭禮)에는 모두 화로에 숯불을 피워 쑥, 기장, 쇠기름을 태운다는 기록이 있은즉, 이를 보면 당(唐) 나라 때부터 이미 써도 무방하다고 허락하였던 듯하네. 그리고 분향하고 술 붓고 하는 것은 바로 귀신을 음(陰)과 양(陽)에서 구하는 뜻이 있어 그 의리가 정미하네. 그러니 구씨의 ‘귀신도 편안하게 여길 것이다.’고 한 설이 옳네.
공의 고례를 좋아하는 뜻에 대해서는 참으로 흠앙하는 바이나, 다만 당송(唐宋) 이후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행하였던 예까지 모두 무시해 버리고 공이 독단적으로 예를 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네. 이러한 예는 왕자(王者)가 나타나서 한 시대의 예를 다시 제정한 다음에라야 가할 것이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세세한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굳이 따질 것이 없다고 여겨지네.”

정종대왕(正宗大王) 7년 계묘(1783), 선생의 나이 72세.
○ 7월에 다시 돈녕부 주부에 제수되다.
○ 8월에 특별 전교를 내려 장릉 영(長陵令)과 서로 바꿈에 사은하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이 자리에 낙점하였을 때 곧바로 정장(呈狀)하여 체차되었던 것은 신병이 있어서 그러하였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제 승선(承宣)의 말을 들으니, 돈녕(敦寧)의 자격이 없어서였다고 하는바, 지금 비록 다시 그 자리에 제수하더라도 역시 응당 체차되어야 하는 데 속할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계방(桂坊)에 있을 적부터 잘 알고 있으며, 또 서책을 편찬한 것도 있으니, 한 번 불러 보고 싶다. 돈녕부 주부 안정복을 다른 관사의 한가한 자리와 서로 바꾸라.”
○ 또 특별 전교를 내려 헌릉 영(獻陵令)과 서로 바꿈에 사은하다.
장릉은 거리가 멀어서 특별히 전교를 내려 바꾸게 한 것이다. 사은을 하니 머물러 기다리고 있다가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상이 장차 원릉(元陵)에 알현하고자 편전(便殿)에서 재숙(齋宿)하고 있었는데, 어떤 한 나이 어린 문관(文官)이 나와 앞에서 인도하여 들어갔다. 어전(御前)에 이르자, 상이 웃으면서 하유하기를,
“그 동안 만나보지 못한 지 8, 9년이 되는데 얼굴이 전에 계방에 있을 때보다 더 좋아졌다.”
하니, 선생이 일어났다 엎드려 아뢰기를,
“국가의 경사는 실로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인바, 축하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의 늙음은 전에 비해 더욱 심한데다 또 이상한 병마저 있어서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는바, 이 때문에 황공스럽고 걱정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능히 직임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 능소(陵所)의 일은 편하고 또 집에서도 멀지 않으니, 노인이 있기에는 참으로 합당한 자리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앞뒤로 특별한 은혜를 거듭 내리시니, 신이 어찌 감히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에서 내린 책자는 개인집으로 가져갈 수 없으므로 장차 곧장 재소(齋所)로 가지고 들어가서 교정(較正)한 다음 안으로 들이고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헌릉 영은 먼저 물러가라.”
하니, 선생이 드디어 나왔는데, 이는 대개 상의 뜻은 선생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오랫동안 대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겨 선생으로 하여금 먼저 나가게 한 것이다. 문관이 뒤따라 나와 앞에서 인도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서 외문(外門)까지 인도하였는데, 이는 대개 특별한 은혜이다.
○ 재소에 입직하면서 《동사강목》을 교정하다.
선생이 찬한 책으로, 전주(全州) 감영(監營)에 명하여 등사해서 전하게 하였는데, 오자(誤字)가 많이 있었으므로 선생에게 명해 교정하게 한 것이다. 9월에 이르러서야 작업을 마쳐서 도로 안으로 들였다.
○ 11월에 예조에 사장(辭狀)을 올리다.
12월에 이르러서 삼도 정순(三度呈旬)하니, 예조에서 개차(改差)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상께서 병을 조리 하면서 직임을 살피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종대왕(正宗大王) 8년 갑진(1784), 선생의 나이 73세.
○ 2월에 계방(桂坊)의 천거에 뽑히다.
상께서 2품관 이상에게 각각 2명씩을 천거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선생은 판서 이재협(李在協)과 참판 오대익(吳大益)의 천장(薦狀) 안에 들었다.
○ 5월에 예조에 사장을 올리니, 예조에서 개차하기를 계청하였는데, 특별 전교를 내려 서울에 있는 관사와 서로 바꾸게 함에 의빈부 도사가 되다.
○ 7월에 세자익위사 익찬에 제수되다.
상이 경모궁(景慕宮)에 임어하여 책봉(冊封)하라는 명을 내리고, 인하여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관원을 차출하게 하였는데, 선생 역시 은혜로운 제수를 받았다.
○ 사은한 뒤 곧바로 예조에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손철중(孫喆重)에게 명하여 유계(遺戒)와 송종록(送終錄)을 쓰게 하다.
선생은 갑술년(1754)에 상을 당한 이후로 피를 토하는 증세가 있어서 위독할 때가 많았다. 기묘년(1759)에 아들 안경증에게 명해 유계를 쓰게 하였으며, 병술년(1766)에 심하게 종기를 앓을 때에도 유계를 썼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 또 나이가 칠순이 넘어 언제 죽을지 몰라 걱정되었으므로 기묘년과 병술년에 말씀하신 데 의거하여 이를 다시 수정하게 한 것인데, 간략하게 장사 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 8월 갑신일에 책례(冊禮)의 습의(習儀)에 참가하다.
이 날 상이 중희당(重熙堂)에 임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하사하였다. 이를 마치고 춘방과 계방의 관원들이 각각 자신의 직책과 성명을 진달하고 물러나왔는데, 상이 유독 선생에 대해서는 위로하면서 유시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늙어 병든 몸이라 실로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이번의 국가 경사에 대해서는 어찌 감히 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쇠하지 않았다.[不衰]”
하면서 정중하게 유시하였다. 이에 선생은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물러 나온 다음 ‘불쇠(不衰)’ 두 글 자로써 헌(軒)의 이름을 삼았다.
○ 9월에 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차됨에 시골로 돌아가다.
미천서원(眉泉書院)의 유생들이 서원의 부원장을 맡아 달라고 청하다.
봄에 서원의 유생들이 와서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허락한 것이다.

정종대왕(正宗大王) 9년 을사(1785), 선생의 나이 74세.
○ 2월에 소남 윤동규의 행장(行狀)을 찬하다.
○ 3월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짓다.
천주학(天主學)이 서양(西洋)에서 나와 중국으로 흘러든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며, 또 그에 관한 서적이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로 전해짐에 나이 어린 후배들이 그 속으로 많이 빠져드니, 선생이 이를 걱정스럽게 여겼다. 이에 천주학의 내력을 서술하여 천학고를 짓고, 천주학의 시비(是非)를 변석하여 천학문답을 지어 보여 주었는데, 모두 몇천 마디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양 사람들이 제아무리 장황하게 말하여도, 이는 모두가 석씨(釋氏)가 밟고 지나간 조잡한 발자취로서, 논리의 정미함에 있어서는 도리어 석씨 쪽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네. 그러니 차라리 달마(達摩)나 혜능(慧能)의 식심(識心)이니 견성(見性)이니 하는 말을 따를지언정, 어찌 밤낮없이 간절히 기도하기를 무당이나 다름없이 하는 서양 사람들이 하는 짓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과연 지옥(地獄)가는 것을 면한다고 하더라도 뜻이 있는 선비는 하지 않을 것이네. 그런데 더구나 우리 유학(儒學)을 하는 사람들이겠는가. 이는 성문(聖門)의 도깨비요 유림(儒林)의 해충들로서 하루 속히 쫓아내야 할 것이네.
무릇 도가(道家)에서 노군(老君)을 존경하는 것이나, 석씨들이 석가(釋迦)를 존경하는 것이나, 서양 사람들이 예수[耶蘇]를 존경하는 것이나, 그 뜻은 다 한 가지이네. 서양 사람들의 학문이 뒤에 나왔으면서도 도가나 석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무상(無上)의 천주(天主)를 내세웠네. 그리하여 제가(諸家)들로 하여금 아무 소리 못 하게 하면서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를 호령하듯이 하고 있으니, 그 계책이 역시 교묘하기도 하네.
내가 그들의 책을 대충 보았더니 흠집 투성이라서 책 안에 있는 말들이 망녕스럽고 허탄스러워 성현을 헐뜯은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참된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꺼림이 없단 말인가. 그런데도 우리 유자들이 이를 분명하게 변석하여 배척하지 못하고, 도리어 옷깃을 여민 채 손을 묶고 앉아 있으니, 모르겠거니와 거기에 무슨 확실하고 분명한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대개 서양 사람들은 실로 이류(異類)가 많아서 총명과 재변, 기예와 법술에 있어서 중국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거기에 굴복되어 그들의 학문까지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들의 학설이 황당무계하고 괴상망측하기로는 실로 저 노씨와 석씨 이가(二家)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네. 그런데 지금의 유자들은 노씨와 석씨는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면서도 도리어 이쪽은 참된 학문이라고 하고 있네.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되어 빠져드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바로 세도(世道)의 부침(浮沈)과 학문의 사정(邪正)이 나뉘어지는 하나의 큰 전기라고 하겠네.
아, 이 세상에 인류가 살아온 지 이미 오래이네. 그런데 기화(氣化)의 운행에 따라 풍속이 각박해지고 인심이 야박해져서, 태평한 날은 적고 혼란한 날은 많으며, 군자의 도는 소멸하고 소인의 도가 자라며, 정학(正學)은 꺼져 가고 사설(邪說)이 판을 치네. 그리하여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못된 데로만 내려가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서양의 예수[耶蘇]란 이름은 바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인데, 높이 떠받드는 것은 천주이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함에 있어서 천당과 지옥의 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저 노씨나 석씨와 같네. 그들이 사람들을 꾀어내기 위해 하는 말은 기껏해야 천주, 천당, 지옥으로, 큰 뜻은 단지 이것일 뿐이네.
이제 내가 그들의 말에 따라 해명해 보겠네. 저들이 천주가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도 천주가 있네. 천주는 상제(上帝)를 말하는 것일진대, 《시경》, 《서경》에서 상제를 말하였네. 성인(聖人)이 하늘을 말한 것은 분명한 문(文)이 있으니, 어찌 실제로 없는 것을 가상해서 말한 것이겠는가.
그들이 천당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에게도 천당이 있네. 《시경》에 이르기를, ‘문왕이 오르내리며 상제 곁에 계신다네.[文王陟降 在帝左右]’라고 하였고, 또 ‘삼후가 하늘에 계시는도다.[三后在天]’라고 하였으며, 《서경》에도 이르기를, ‘많은 선대의 어진 임금들이 하늘에 계신다.[多先哲王在天]’라고 하였네. 이미 상제가 계신 바에야 어찌 상제가 사는 곳이 없겠는가.
또 저들이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지옥의 형벌이 성왕(聖王)이 형벌을 만든 뜻과는 달라 몹시 의심이 가네. 성왕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형벌을 두었으니, 그 얼마나 인자한가. 그런데 저 지옥의 형벌이란 것은, 살았을 때는 무슨 짓을 하든지 내버려 두었다가 죽은 뒤에야 그 영혼에게 죄를 소급해서 따지니, 이는 백성들을 죄망(罪網)으로 그물질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지금 그들의 책을 보건대, 이른바 지옥의 형벌이란 것이 자못 인간 세상의 형벌과는 비교가 안 되네. 지극히 인자하여야 할 상제의 마음이 어쩌면 그리도 참혹하고 모질단 말인가.
그들은 또 ‘사람들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면서 선악을 행한 데 따른 보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이래로 그 수가 아주 많은데, 지옥과 천당이 제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 영혼들을 어디에 수용할 것인가. 인간 세상을 두고 미루어 말하더라도,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사람들의 숫자가 아주 많을 것인데, 이 세상에 다 수용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불가의 서적을 보니 ‘바리[鉢] 하나 위에 보살 60만을 수용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이와 같다는 것인가. 이것은 물론 망녕된 말이네. 그러나 굳이 배척할 것 없이 그들의 말에 따라 말해 보겠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는 천당이 있으면 역시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지옥도 있다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네. 그러나 천당과 지옥을 그 누가 보았는가. 전기(傳記)에 남아 있다거나 민속(民俗)에 전해지는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이는 결국 황당무계한 말이니 논외로 쳐야 할 것이네.
《진서(晉書)》에 보면 왕탄지(王坦之)가 승려 축법사(竺法師)와 학문을 가지고 사귀는 친구로 지냈는데, 일찍이 천당과 지옥에 대한 의심이 있었네. 이에 먼저 죽은 자가 와서 알려 주기로 서로 약속하였는데, 하루는 축법사가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이미 죽었다. 지옥에 관한 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 다만 부지런히 도덕을 닦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네. 그렇다면 이는 지옥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네. 지옥이 있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고 단지 ‘성인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 말만 있으면 되네. 괴(怪)란 드물게 있는 일을 말하고, 신(神)이란 무형의 물체를 말한 것으로, 드물게 있는 일이나 무형의 물체에 대해 계속 말하게 되면 그 폐단이 장차 어디에 이르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이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네. 우리 유자(儒者)들이 상제를 섬기는 도리로써 말하면, 상제가 내려주신 성품과 하늘이 명하신 성품은 모두 하늘에서 품부받은 것으로서, 나에게 고유한 것이네. 《시경》에 이르기를, ‘상제가 네 곁에 계시니 네 마음에 의심을 두지 말라.[上帝臨汝 無貳爾心]’ 하였고, 또 ‘상제를 대한 듯이 하라.[對越上帝]’고 하였고, 또 ‘천명을 두려워하라.[畏天命]’고 하였는바, 이 모두가 우리 유자들의 계구(戒懼), 근독(謹獨), 주경(主敬), 함양(涵養)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네. 상제를 높이 받드는 도가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이는 서양 사람들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명한 일이네.
가슴 아픈 일은 서양 사람들이 상제를 자기들의 사주(私主)로 생각하면서 중국 사람들은 상제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네. 그들은 반드시 하루에 다섯 번 하늘에 예배하고 7일에 한 번 재소(齋素)하고, 밤낮으로 기도하여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하늘을 섬기는 실제적인 일이 되니, 이는 불가(佛家)에서 참회(懺悔)하는 일과 다를 것이 뭐가 있는가.
우리 유가의 학문은 광명정대하기가 마치 높고 넓은 천지(天地)와 같고, 천지를 비추는 해나 달과 같아서 털끝만큼도 가리워져 있거나 보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이 전혀 없네. 그런데 어찌하여 이 길을 버려 두고 도리어 참된 길이 저쪽에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들의 학설에 말하기를, ‘이 세상은 현세인데, 현세의 화복(禍福)은 잠시일 뿐이다. 어찌 만세(萬世)를 두고 고락(苦樂)을 받는 후세(後世)의 천당과 지옥의 화복에 비하겠는가.’라고 하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네. 천주가 이 세상에 상계(上界), 중계(中界), 하계(下界)의 삼계(三界)를 만들어 상계에는 상계대로의 일이 있고, 중계와 하계에도 각각 일이 따로 있네. 이른바 상계와 하계의 일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중계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로 말하면, 인간 노릇을 하는 길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그것뿐이고, 수기와 치인하는 일은 모두 책에 있네. 만약 그에 의지하여 행한다면 자연 행할 만한 도리가 있을 것이네. 그러니 이른바 서학에서 말하는 세상을 구제한다는 술법이 어찌 이것보다 낫겠는가.
그들은 명분은 비록 세상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속 내용은 오로지 개인의 사욕을 위한 것으로, 도교나 불교와 다를 것이 없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성인의 명덕(明德)이나 신민(新民)의 일과는 공사(公私), 대소(大小)의 차이가 과연 어떠한가. 그 말류의 폐단은 장차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허한 것을 실하다고 속여 온 세상을 환망(幻妄)의 영역으로 몰아넣고 말아 인심을 선동할 것이네. 그리하여 후세에는 이른바 연사(蓮社) 같은 무리들이나 미륵불(彌勒佛)을 사랑하는 자들이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요적(妖賊)의 효시(嚆矢)가 되어 난리가 그칠 날이 없게 될 것인바, 못된 짓을 창안한 죄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네.
우리가 이미 이 현세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현세의 일을 하면서 경전에서 가르친 대로 따라 행하면 그만이네. 천당과 지옥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설령 어떤 사람이 이들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워서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경우, 그때 가서 천주가 능히 구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천당의 즐거움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이 세상의 화가 먼저 이를 것이네. 그러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유감시(有感詩) 한 수를 짓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학술의 파 나눠짐에 각각 따로 가는데 / 道術分派各自逃
서양서 온 한 학파가 기세 또 부리누나 / 西來一學又橫豪
낙엽 위에 바람 불면 뿔뿔이 흩날리고 / 風吹亂葉紛紛去
나무에 달 비치면 우뚝하게 더 높다네 / 月照孤株孑孑高
약단지에 불 꺼지니 어찌할 도리 있나 / 丹竈煙消無可奈
늙어 힘 다했으니 울면서 소리칠 뿐 / 白鬚力盡但嚎咷
차라리 다 관두고 술 마심만 못하거니 / 不如且進杯中物
성인 되건 광인 되건 그들에게 내맡긴 채 / 爲聖爲狂任爾曹
○ 6월에 위학잠(爲學箴) 두 수를 지어 벽에 걸다.
그 잠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하는 공부는 / 爲學之工
경전 연구와 경에 거하는 것 / 窮經居敬
경전은 모든 이치 달통하고 / 經通萬理
공경은 동정을 꿰뚫는도다 / 敬貫動靜
아침저녁 부지런히 힘써 / 夙夜孜孜
오직 덕을 잡으며 / 惟德之秉
잠시라도 소홀히 말아 / 須臾莫忽
일에 따라 살피라 / 隨事警省
또 다음과 같다.
학문을 하는 공부는 / 爲學之工
오직 공경과 부지런함이니 / 惟敬惟勤
게으름과 나태함 이기고 깨쳐서 / 勝怠警惰
아침저녁으로 가다듬으라 / 惕厲朝曛
한 번이라도 살피지 못하면 / 一或不省
성인과 광인이 여기에서 나뉘나니 / 聖狂斯分
늙어서는 더욱더 돈독히 믿어 / 老更篤信
나의 천군을 섬길지어다 / 事我天君
○ 《시경명물고(詩經名物考)》를 완성하다.
《시경》에 실려 있는 조수(鳥獸), 초목(草木), 물품(物品)의 이름 가운데 착오가 난 것을 바로잡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변석하여 완성하였다.
○ 12월에 육잠(六箴)을 작은 병풍에 쓰고, 또 좌우명(座右銘)을 지어서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다.
육잠은 선생이 병술년(1766)에 지은 것이다.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
날이 밝으려 하면 / 日欲曉矣
네가 잠에서 깨어난다 / 爾寢斯覺
아침 해가 동녘을 비추고 / 朝暾東明
상제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 上帝下矚
오직 이 한 마음은 / 惟此一心
중도를 잃기 쉽나니 / 易以失中
바라건대 조심하여 / 庶幾惕厲
본연의 양심을 잃지 말라 / 無椓天衷
이상은 조명(朝銘)이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으니 / 日已午矣
너는 응당 일이 많으리라 / 爾應多岐
일에는 의리가 있고 / 事有義利
마음에는 공사가 있나니 / 心有公私
조심해서 처사하되 / 操心處事
반드시 기미를 살피라 / 必審其幾
혹시라도 차질이 생기면 / 如或差忽
허물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나 / 過將誰歸
이상은 주명(晝銘)이다.
해가 이미 저물어가니 / 日之夕矣
너의 일도 그치리라 / 爾事向歇
마음가짐과 남 대함에 / 處心應物
소홀함은 없었는가 / 能不有忽
혹시라도 잘못하였으면 / 如有差失
두려워하고 반성하며 / 悚然省念
어긋남이 없었다면 / 若其無違
더욱더 수렴하라 / 益加收斂
이상은 모명(暮銘)이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 日將昏矣
네 맘 점점 게을러지리 / 爾心漸怠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않음을 / 不欺暗室
옛 사람이 귀하게 여겼나니 / 古人所貴
공경은 동정을 관통하는 것이라 / 敬貫動靜
성실하면 전일하게 되고 / 誠則能一
곧으면 본원을 회복하여 / 貞則復元
다시 내일이 있는 법이다 / 又有明日
이상은 야명(夜銘)이다.

정종대왕(正宗大王) 10년 병오(1786), 선생의 나이 75세.
○ 5월에 덕곡동(德谷洞) 안에 재사(齋舍)를 세우다.
선생의 12대조 이하의 선롱(先壟)이 모두 덕곡에 있었다. 선생이 제전(祭田)을 두고 제식(祭式)을 정하였는데, 조위(祧位)에는 10월 초하룻날 아침에, 봉사위(奉祀位)는 봄에는 한식(寒食)에, 가을에는 추석(秋夕)에 제사를 지내되, 묘역(墓域)을 청소한 뒤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재(齋) 안에서 제사 지냈으며, 후사(後嗣)가 없는 신위까지도 모두 축문(祝文)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이곳을 후배들이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므로 역시 이름을 이택재(麗澤齋)라고 하였으며, 이를 인해서 월강(月講)에 대한 규정을 정하였다.
○ 덕사(德社)의 학약(學約)을 만들다.
○ 왕세자의 상(喪)을 듣고 위(位)를 설치하고서 예를 행하다.
17일에 성복(成服)하고서 28일에 제복(除服)하였는데, 복제(服制)에 대한 사의(私議)가 있다.
○ 윤달에 채번암(蔡樊菴)에게 편지를 보내다. 채공의 이름은 제공(濟恭)이다.
채번암이 여러 친구들에게 선생이 천주학을 배척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고 자주 칭찬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찬한 불쇠헌기(不衰軒記)에서 오도(吾道)가 쇠해지지 않았다는 뜻을 갖추어 말하였으니, 아마도 연소배들의 지목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해에 영남(嶺南)의 유생 황태희(黃泰熙)가 와서 ‘천주학을 배척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장하더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고, 금년 봄에는 상사(上舍) 홍석주(洪錫疇)가 와서 또 ‘불쇠헌기를 찾아가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였는데, ‘불쇠(不衰)’ 두 글자에 대하여 대감께서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것은 과연 성상께서 총애하고 포장(褒奬)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날 유독 이 늙은 신하에 대해서만 위로해 주시면서 ‘불쇠’ 두 글자를 내려 포장하시었습니다. 이에 물러나옴에 미쳐서는 동료들이 모두 축하하였고 편액(扁額)에 써서 보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돌아온 뒤에 생각하니, 이 늙고 병든 약한 몸이 다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성상께서 이렇게 유시하시었으니, 이는 실상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 말할 만한 것이 있기에 망녕되이 졸렬한 시구를 하나 읊었는데, 그 시에,
갈수록 근력 쇠해 나 자신은 한탄인데 / 自歎筋力逐年衰
성상께선 쇠하지 않았다고 하시네 / 天語丁寧諭不衰
신의 몸이 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 不是臣身能不衰
지기마저 나이 따라 쇠하지 말라는 게지 / 要令志氣不隨衰
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저 자신을 가다듬는 것은 오직 지기(志氣)에 있는데, 지기 역시 쇠해지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의 시를 차운하시어 저의 초라한 문이 빛나게 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근래에 와서 평소에 재기(才氣)를 자부하던 우리 쪽 나이 어린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 쪽으로 많이 쏠려 너도나도 그 쪽으로 휩쓸리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쪽으로 빠져드는 꼴을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하겠기에 대충 경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는데도 도리어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에서 그랬다고들 하면서, 심지어는 저와는 절교하지 못할 사이인데도 절교하는 자까지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용감하기는 용감합니다만, 이 역시 세상 변고의 하나인바, 지금처럼 당의(黨議)가 횡행하는 때를 당하여 곁에서 엿보고 있다가 돌을 던지는 자가 없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 형세가 반드시 망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일을 되는 대로 내맡긴 채 벼룻집에 말을 삼가라는 뜻으로 ‘마두견(磨兜堅)’ 세 글자를 새겨두고서 저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듣건대 대감께서 지은 불쇠헌기(不衰軒記) 가운데 천주학을 배척한 말이 있어서 연소배들의 지목을 받을까 염려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우리 두 사람이 천주학을 배척하지 않으면 그 누가 배척하겠습니까. 풍상을 모질게 겪은 나머지 또 하나의 적이 생길까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까?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 7월에 동명도(東銘圖)를 만들다.
문인(門人) 정지영(丁志永)에게 《심경》을 강하다가 동명(東銘) 부분을 읽음을 인하여 선생이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고는, 이어 벽에 걸어 두었다.
○ 9월에 파록(巴麓) 황공(黃公)의 행장을 찬하다. 황공의 이름은 여구(汝耉)이다.
인조조(仁祖朝) 병자년(1636, 인조 14)의 난리에 황공이 강도(江都)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성이 함락되자 온 가족이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심씨(沈氏)와 부인 허씨(許氏) 및 두 여동생이 모두 정려(旌閭)되니, 세상에서는 ‘한 집안의 다섯 절의(節義)’라고 칭하였다.

정종대왕(正宗大王) 12년 무신(1788), 선생의 나이 77세.
○ 6월에 황덕일(黃德壹)의 편지에 답하였다.
이 때 서조수(徐祖修)란 자가 반새설(反僿說)을 지어 성호 선생의 설을 많이 헐뜯으니, 황덕일이 선생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선생이 답한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보내 준 편지에서 말한 것은 스승을 높이고 우리 도를 지키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에 몹시 흠앙하면서 읽었네. 그러나 해를 가리는 무지개나 하늘을 가리는 안개가 있다한들 해의 밝음과 하늘의 큼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공북해(孔北海 공융(孔融)을 말함)가 말하기를, ‘지금의 나이 어린 자들은 선배들을 비방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나쁜 습관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네. 《논어》와 잡기(雜記)에 나오는 성인의 언행(言行)은 지극히 정밀하고도 간략한데, 말 잘하는 자로 하여금 그에 대해 말하게 하면 반드시 함부로 뜯어고치는 곳이 없지 않을 것이네.
아무개가 헐뜯는 것이 오로지 새설(僿說)에 있다고 하는데, 이 설 하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평생을 단정하면서 함부로 욕하고 헐뜯는다면, 이는 망녕된 것이네.
선생님께서는 밝고 뛰어난 자품을 타고나신데다 부지런하고 독실한 공부를 더하셨으며, 높인 바는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이고 배척한 것은 이단(異端)과 잡학(雜學)이었네. 그리하여 경전(經典)의 뜻에 있어서는 미처 발현하지 못하였던 뜻을 많이 발현하였으며, 이단의 학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속셈을 지적하여 드러내 도망칠 수 없게 하였네. 그런데 아무개가 이를 서학(西學)이라고 배척하였다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천학고(天學考)에서 이미 변석하였으므로 다시 말하지 않겠네.”

정종대왕(正宗大王) 13년 기유(1789), 선생의 나이 78세.
○ 1월에 통정대부로 승진하다.
벼슬살이한 지 40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가자(加資)된 것이다.
○ 4월에 미천서원(眉泉書院)의 유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부원장직을 사임하고, 또 강학(講學)에 대한 규정을 권장하여 행하게 하다.
덕곡사(德谷社)의 학약(學約)을 썼는데, 끝에 고양계(高梁溪)가 게양(揭陽)의 여러 벗들에게 보낸 편지를 덧붙여 써서 보냈다.
○ 8월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됨에 사은하다.
이 때 나라에 천원(遷園)하는 예가 있었는데, 주상께서 복제(服制) 중에 있었으므로 분문(奔問)하러 가는 차림과 다름이 없었다.
○ 9월에 운계(雲溪) 정공(鄭公)의 행장을 찬하다. 정공의 이름은 뇌경(雷卿)으로, 인조조(仁祖朝)에 심양(瀋陽)에서 나라의 일로 순절하였다.

정종대왕(正宗大王) 14년 경술(1790), 선생의 나이 79세.
○ 봄에 족보(族譜)를 개수(改修)하다.
○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다.
원자(元子)의 탄생으로 인해 기로(耆老)들에게 가자(加資)한 것이다.
○ 7월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광성군(廣成君)을 습봉(襲封)하였으며, 은혜를 미루어서 삼대(三代)가 추증되다.
선생의 6대조께서 선묘조(宣廟朝)의 호성공신(扈聖功臣)에 훈봉(勳封)되었으므로 이를 습봉한 것인데, 날씨가 무덥다는 이유로 사은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8월에 제사를 지내어 가묘(家廟)에 고하다.
은혜를 미루어 추증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9월 초하루에 분황(焚黃)하다.
○ 10월에 향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축하함에 잔치를 베풀다.
선생이 자급이 승진되고 습봉을 받았으므로 동중(洞中)의 여러 유생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풍악을 갖추어서 축하한 것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이런 축하를 받을 수 있겠는가. 나라에 경사가 있은 이후로 경외(京外)의 사민(士民)들이 풍악을 울리면서 함께 경하하고 있는데, 우리 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이를 인하여 나라의 경사에 대해 축하하는 것이 옳다.”
하고는, 드디어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잔치를 베풀었다. 선생이 즉석에서 7언 절구 한 수와 7언 율시 두 수를 읊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팔십 먹은 노신이 아직 쇠하지 않아 / 八十老臣尙不衰
불쇠라고 하신 말씀 편액에 써 걸었다네 / 不衰天語揭門楣
풍악이야 그 어찌 궁한 선비 일이랴만 / 笙歌豈是窮儒事
제군들과 성상의 복 빌기 위해서라오 / 聊與諸君祝聖釐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차례대로 화답하여 올렸다. 친구들과 사대부들 사이에 이 사실을 듣고 화답한 자가 많아 한때의 성대한 일로 전하여졌다.

정종대왕(正宗大王) 15년 신해(1791), 선생의 나이 80세.
○ 1월에 간옹(艮翁) 이공(李公)의 만사(挽詞)를 짓다. 이공의 이름은 헌경(獻慶)이다.
만시(挽詩)에,
하루 아침 갑자기 신선 되어 떠남에 / 一朝倐忽仙驂遠
죽지 못한 외로운 신세 눈물이 절로 나네 / 不死踽涼淚眼辛
이교의 떠들어 댐 점점 치성해지는데 / 異敎喧豗今漸熾
물리칠 정론을 누가 다시 펼치리오 / 正論闢廓更誰人
외로운 나는 홀로 벙어리가 되었는데 / 轋轋獨我成瘖嘿
많고 많은 현자들은 참된 도라 말을 하네 / 濟濟群賢說道眞
생각이나 했겠는가 삼한의 군자국이 / 豈意三韓君子國
어느 사이 천축국과 서양으로 변할 줄을 / 居然化作竺西民
하였는데, 대개 이공이 일찍이 서학을 배척하는 글을 지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2월에 백불암(百佛菴) 최공(崔公)의 묘지명(墓誌銘)을 찬하다. 최공의 이름은 흥원(興遠)이다.
최공은 영남(嶺南) 사람이다. 대구(大丘)에 살았는데, 이대산(李大山)과 친하게 지내었다. 정종(正宗) 갑진년(1784)에 선생과 같이 계방(桂坊)에 천거되었으므로 동기간과 같은 정이 있었다.
○ 3월에 망자(亡子) 안경증의 묘지명을 찬하다.
○ 죽림(竹林) 권공(權公)의 정충각기(旌忠閣記)를 짓다. 권공의 이름은 산해(山海)이다.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때 권공이 각(閣)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 관작을 회복시키고 정려하였으므로 선생이 기문을 지은 것이다.
○ 6월 신미일에 병환이 날 조짐이 있다.
더위로 인해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었다.
○ 7월 계사일 오시(午時)에 침실에서 돌아가시다.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경의패(敬義牌)를 가져 오라고 명하였는데, 말을 더듬거려서 무슨 말씀인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이에 여러 차례 되물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알고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자 벽에 걸도록 명하고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대개 몇 년 전부터 목패(木牌) 하나를 만들어서 ‘경의직방(敬義直方)’ 네 글자를 새긴 다음 항상 자리의 오른쪽에 걸어 두었는데, 이 때 이것이 바깥채의 대청 벽에 걸려 있었으므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때 폭우가 연일 내리자 사우(祠宇)에 비가 샐까 염려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으며,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도 그렇게 하였다. 돌아가실 즈음에 정신이 어지럽지 않았으나 집안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빈(殯)을 하는 날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집 위를 빙 둘러 감싸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 병신일에 부음을 상께 아뢰자, 해당 고을에 명하여 별치부(別致賻)를 내리게 하였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서연에 있을 적에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았다. 고문(顧問)을 함에 있어서 옛 사실을 상고하는 데 많은 힘을 입었기에 근래에는 매번 불러들여 만나 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병이 날로 심해진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지금 그가 졸서(卒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몹시 애석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당 고을로 하여금 전례대로 별치부를 내리는 이외에, 각별히 물품을 지급해 주는 일을 묘당에서 공문을 보내 알리라.”
○ 9월 병자일에 덕곡(德谷)에 있는 선영(先塋)의 국내(局內)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다.
부인 성씨(成氏)와 합장하였다.

순종대왕(純宗大王) 원년 신유(1801).
○ 9월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광성군(廣成君)에 추증하다.
이 해 아무 달에 장령 정한(鄭瀚)이 상소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말하기를,
“아,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설(邪說)을 지식(止息)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선대왕께서 고심하였던 부분입니다. 정학을 천명하는 방도는 반드시 정학을 하는 사람을 장려하여 높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고 광성군 안정복은 바로 선조(先朝)의 서연관(書筵官)으로 있던 신하입니다. 그의 학문은 경전(經典)을 날줄로 삼고 사서(史書)를 씨줄로 삼았으며, 문로(門路)는 염락(濂洛)을 거쳐 관민(關閩)에 이어졌습니다. 70년 동안 글을 읽어 성대히 당세의 대유(大儒)가 되었습니다. 선대왕께서 서연을 여는 자리에서 그의 그러한 점을 알고는 장려하고 우대하는 말을, 교서를 내리는 즈음에 여러 차례 표하였습니다. 이에 후배 학자들이 모두들 모범으로 삼으면서 종사(宗師)로 대우하였습니다.
서양의 서적이 처음 유입됨에 이르러서는 이교(異敎)가 널리 행해져 사람들이 모두 그에 빠져드는 것을 개탄스럽게 여겼습니다. 글을 지어서 이를 변석함에 있어서는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의 글이 있으며, 엄하게 변석하고 배척함에 있어서는 인척이라 하여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풍모와 목소리가 지금까지도 아직 남아 있는바, 한 무리의 사류(士類)들이 천주학의 교활함을 막고 음란함을 내쫓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그의 덕분입니다.
지금 만약 그를 장려하여 높이고 드러내어 밝힌다면 정학을 밝히고 사설을 지식시키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신은 고 광성군 안정복에게 속히 포상을 내려 증직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안정복은 글을 읽으면서 유도(儒道)를 지키고 온 힘을 다해 사학(邪學)을 배척하여 일찍이 그 이름을 드날렸는바, 가상하게 여겨 포상하는 것이 실로 합당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증직하는 것은 중한 은전이어서 한 대신(臺臣)의 말로 인해 함부로 의논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안정복에게 증직을 내리는 일에 대해서는, 말이 참으로 쓸만 하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시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때를 당하였으니, 특별히 표창하는 거조가 있는 것이 마땅하다. 고 동지중추부사 안정복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해서 장려하는 뜻을 표하라.”
하였다. 이에 드디어 좌참찬에 추증된 것이다.

동치(同治) 10년 신미(1871, 고종 8)
○ 3월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추증하다.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자신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것을 ‘숙(肅)’이라 한다.


[주D-001]호서(湖西)의……함락하였다. : 영조의 즉위로 소론(少論)이 실각하자, 이인좌가 소론의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한 다음 무력에 의한 정권찬탈을 꾀하였다. 이에 이 해 3월에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淸州)에 잠입하여 충청도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죽인 다음 대원수(大元帥)라 자칭하고, 각처에 통문(通文)을 돌려 병마를 소집하였다. 그 뒤 진천(鎭川), 안성(安城), 죽산(竹山) 등으로 진격하였으나, 용인(龍仁)에 은거 중이던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출동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 의해 대패하였으며, 이인좌는 숨어 있다가 잡혀 참형에 처해졌다.
[주D-002]서산은……맘 얻었어라 : 서산(西山)은 진덕수(眞德秀)를 말하고, 고정(考亭)은 주자(朱子)의 호이다.
[주D-003]현주(懸註) : 추천을 하거나 의망을 할 경우, 추천하는 사유나 의망하는 사유를 대상자의 이름 밑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승전(乘田)과 ……있는바 :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직분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승전은 채소밭과 목장을 담당하는 관리이고, 위리는 창고를 주관하는 관리로, 모두 낮은 관직이며, 성인은 공자를 가리킨다. 《맹자》 만장장구 하(萬章章句下)에, “공자께서 일찍이 위리가 되셔서는 말씀하시기를, ‘회계(會計)를 마땅하게 할 뿐이다.’고 하셨고, 승전이 되셔서는 말씀하시기를, ‘소와 양을 잘 키울 뿐이다.’고 하셨다.” 하였다.
[주D-005]이택(麗澤) : 학우 간에 서로 도와서 학문과 덕을 닦는 것을 말한다.
[주D-006]양 문공(楊文公)이나 소 장공(蘇長公) : 양 문공은 송(宋) 나라 양억(楊億)이고, 소 장공은 소식(蘇軾)이다.
[주D-007]《자경편(自警編)》 : 송 나라의 조선료(趙善璙)가 엮은 책으로,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송대(宋代) 명현들의 언행을 여덟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채록하였다.
[주D-008]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 : 송(宋) 나라 때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규범은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계하고, 예속(禮俗)으로 서로 사귀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한다는 등 네 조항이었다. 이것이 후대에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六 善行》
[주D-009]호향(互鄕) : 《논어》에 나오는 마을 이름으로, 풍속이 아주 나쁜 마을이다.
[주D-010]용강 : 와룡강(臥龍岡)을 말한다. 와룡강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남양현(南陽縣)의 서남쪽에 있는데, 제갈량(諸葛亮)의 초려(草廬)가 있던 곳이라고 전한다.
[주D-011]율리 :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지명으로, 도잠(陶潛)이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주D-012]무릎 위엔……양보음 : 무현금(無絃琴)은 현(絃)이 없는 금(琴)으로, 도잠이 음률(音律)을 잘 몰랐으므로 현이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가지고 술을 마시며 노닐다가는 이 거문고를 타면서 뜻을 붙였다. 양보음은 제갈량이 지었다고 하는 악곡(樂曲)이다.
[주D-013]연지화상(蓮池和尙) : 명 나라 항주(杭州) 운서사(雲棲寺)의 승려로, 운서대사(雲棲大師)라고도 칭한다. 처음에는 유교를 배우다가 불법으로 귀의하였다.
[주D-014]이마두(利瑪竇) : 이탈리아의 전도사 마테오릿치를 말한다. 마테오릿치는 명 나라 만력(萬曆) 8년에 광동(廣東)에 이르러서 이서태(利西泰)라는 중국 이름으로 바꾸었고, 그 뒤에 북경으로 들어가서 천주교당을 세우고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 중국의 대신들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에 《건곤체의(乾坤體義)》, 《기하학원본(幾何學原本)》 등이 있다.
[주D-015]마명(馬鳴)이나 달마(達摩) : 마명은 보살(菩薩)의 이름으로, 부처가 죽은 지 5, 6세기 뒤에 태어나 중인도(中印度)에 살았다. 처음에는 바라문교(婆羅門敎)를 받들다가 불교로 귀의하였으며,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일으켰다. 달마는 양(梁) 나라 고승의 이름으로, 선종(禪宗)을 개창하였다.
[주D-016]피리를……여기는 듯하여 :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뜻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일유(日喩)에,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자는 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해의 빛은 촛불의 빛과 같다.’ 하자, 초를 만져 보면서 해가 그렇게 생겼다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피리를 만지면서 그것을 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주D-017]문을 닫고……만들어도 :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대체적인 것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장구 상(告子章句上)에, “발 크기를 모르고서 신발을 만들어도 삼태기를 만들지는 않는 법이니, 그것은 천하 사람들의 발이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18]초궁(楚弓)의 득실(得失) : 《가어(家語)》에, “초왕(楚王)이 활을 잃어버리자 좌우 신하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초왕이 ‘내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초 나라 사람이 주을 것이니, 찾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하였다.
[주D-019]상고 시대부터 《강목(綱目)》 이전까지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주 위열왕(周威烈王)부터 송대(宋代)까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바, 《사감》은 상고 시대부터 주 위열왕 이전, 즉 춘추 시대 말까지의 사실을 기록하였다는 말이다.
[주D-020]심상복(心喪服) : 상복(喪服)은 입지 아니하되, 상복을 입은 것처럼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을 말한다. 제자가 스승의 상에 대하여 이 복을 입었다.
[주D-021]노(魯) 나라의 양생(兩生) : 한 고조(漢高祖)가 조정으로 불러 내지 못한 노 나라의 서생 두 명을 가리킨다. 《史記 卷七十九 劉敬叔孫通列傳》
[주D-022]제(齊) 나라의 우인(虞人) :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을 나갔을 때 우인(虞人)을 부르는 예가 아닌 대부(大夫)를 부르는 예인 정(旌)을 써서 부르자,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다고 하여 오히려 죽음으로써 지키고 가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孟子 滕文公章句下》
[주D-023]노 나라의 유자(儒者) : 이백(李白)의 시 ‘노 나라의 유자를 조롱하다[嘲魯儒]’에 나오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D-024]새상옹(塞上翁) :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변경에 사는 노인을 가리킨다. 《淮南子 人間訓》
[주D-025]상(殤) : 일찍 죽는 것을 말한다. 16세에서 19세 사이에 죽는 것을 장상(長殤), 12세부터 15세 사이에 죽는 것을 중상(中殤), 8세에서 11세 사이에 죽는 것을 하상(下殤), 7세 이하에 죽는 것을 무복지상(無服之殤)이라 한다. 《儀禮 喪服 第十一》
[주D-026]네 가지 : 공자가 근절하였던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를 말하는데, 무의는 자의(自意)가 없는 것이고, 무필은 기필함이 없는 것이고, 무고는 고집함이 없는 것이고, 무아는 독존함이 없는 것이다. 《論語 子罕》
[주D-027]동룡문 : 한(漢) 나라 때 태자궁(太子宮)의 대문 이름이다.
[주D-028]방역소(防役所) : 방역(防役)은 백성들에게 부역 대신 돈이나 곡식을 내게 하는 것이다. 《우서(于書)》 논전정(論田政)에, “혹자는 말하기를, ‘수령들이 성심으로 백성들을 위한다면 윗 관사에 보고하여 재결(災結)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인바, 이것을 가지고 혹 급재(給災)하거나, 민역 대신 받아들이거나[防民役], 공용(公用)에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모두를 사용(私用)이라고 지목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내가 답하기를, ‘윗 관사에 보고하고서 재결을 얻는 것은 세력 있는 수령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 방역(防役)에 대한 설은 더더욱 무식한 말로, 백성들은 임금의 땅을 부쳐 먹으면서 나라의 부역에 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고을 수령이 대신 방역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주D-029]삼도 정순(三度呈旬) : 사직장을 올리되, 열흘마다 한 차례씩 세 번을 연거푸 올리는 것을 말한다.
[주D-030]미천서원(眉泉書院) : 전라남도 나주(羅州)에 있는 서원으로, 허목(許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며, 뒤에 채제공(蔡濟恭)을 함께 모셨다.
[주D-031]다른 사람에게……편지 : 다른 사람은 권철신(權哲身)이다.
[주D-032]분황(焚黃) : 증직(贈職)이 되었을 때 교서(敎書)를 베낀 누런 종이를 추증된 자의 무덤 앞에서 불태우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