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환단고기의 평가...진서인가? 위서인가?

吾心竹--오심죽-- 2009. 1. 14. 23:12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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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 역사서이며, 이른바 동이족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위대함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진위 논란이 있으나, 남·북한학계 모두 그 내용이 왜곡된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1]

《환단고기》〈범례〉에 따르면, 1911년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자금지원으로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고 이기(李沂)가 교열(校閱)하였다고 한다. 1949년이유립오형기에게 정서시켰고, 한 차례 원본과 함께 관련 자료를 분실하였다가 그 후 기억을 되살려 필사하였다고 주장되었다.[2]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복원된 1979년 영인본(광오이해사 발행)이다.[3]

목차

[숨기기]

[편집] 출간 경위 및 경과

계연수, 이유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1911년, 광무 15년(《환단고기》〈범례〉에 따른 연도. 실제 광무 연호는 10년까지만 사용) 계연수가 전해지는 사서를 묶어 《환단고기》라는 책명으로 간행하였다고 한다.
  • 1920년 이전,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원본을 계연수(~ 1920년)로부터 건네받았다고 하며, 1975년에 1920년대부터 보관해 오던 원본이 모든 관련 자료와 함께 유실되었으나,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했다고 한다.
  • 1979년 11월에 필사·영인한 한문본(100부 한정)이 출간되었고, 이유립은 박창암[4] 통하여 일본의 변호사 출신 재야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曻)와 접촉하여 직접 원본을 전달하였다.[5]
  • 1982년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가지마 노보루는 이 책에 붙여진 상세한 해제를 통해 고대 한반도에 ‘우가야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 1985년 일반을 대상으로 한 첫 한글 번역본[6]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편집] 개요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졌다는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다.

  • 《삼성기》는 환웅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배달국과 그 전신이라 하는 3301년간의 환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단군세기》는 47대의 단군이 2천 년 간 다스린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북부여기》는 북부여에 6명의 왕이 있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 《태백일사》는 환국, 배달국, 삼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한말 - 일제강점기 초에 대종교가 경전으로 채택한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1975년에 채택한 〈천부경〉이 포함되어 있다.

[편집] 구성

  • 목차
  • 범례(凡例)
  • 삼성기(三聖紀) 상 - 안함로 지음.
  • 삼성기(三聖紀) 하 - 원동중(元董仲) (신시역대기 포함)
  • 단군세기(檀君世紀) - 이암 지음.
    • 단군세기서(檀君世紀序)
    • 단군세기
  • 북부여기(北夫餘紀) -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지음.
    • 북부여기(北夫餘紀) 상
    • 북부여기(北夫餘紀) 하
    •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 태백일사(太白逸史) -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지음.
    • 태백일사목록(太白逸史目錄)
    •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 환국본기(桓國本紀)
    • 신시본기(神市本紀)
    •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 삼한관경본기제사(三韓管境本紀)
      • 마한세가(馬韓世家) 상
      • 마한세가(馬韓世家) 하
      • 번한세가(番韓世家) 상
      • 번한세가(番韓世家) 하
    •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천부경, 삼일신고 포함
    •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 태백일사발(太白逸史跋)
  • 환단고기발(桓壇古記跋)

[편집]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7]

  • 확인되는 문헌 - 《사기》, 《운급헌원기》, 《관자》, 《한서
  • 확인되지 않는 문헌 -《대변설(大辨設)》, 《삼성밀기(三聖密記)》, 《삼한비기(三韓秘記)》,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遺記)》, 《표훈천사(表訓天祠)》

[편집] 주요 내용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에 환국배달국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는 환인환웅이 통치하였으며, 각각 7대와 18대를 전하였다고 한다.

[편집] 환국

[편집] 건국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사백력을 시베리아로, 천해는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 비정되기도 한다.

[편집] 12연방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며 각각의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였다[8]고 하나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부는 수밀이국이 수메르라고 주장하고 있다.

[편집] 역대 환인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다수의 대한민국 사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 1대 환인 : 안파견(安巴堅) 환인
  • 2대 환인 : 혁서(赫胥) 환인
  • 3대 환인 : 고시리(古是利) 환인
  • 4대 환인 : 주우양(朱于襄) 환인
  • 5대 환인 : 석제임(釋提壬) 환인
  • 6대 환인 : 구을리(邱乙利) 환인
  • 7대 환인 : 지위리(智爲利) 환인 또는 단인(檀仁)

[편집] 배달국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고대국가라고 한다. 중국사서에서 이 나라를 ‘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9]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가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주신(主神)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렸는데, 이를 신시라 하였다고 한다. 신시의 멸망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으며, 단지 신시를 이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에서는 환웅이 나라를 세운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백성을 보살피는 직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즉, 호가(虎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과 같이 이름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짐승의 이름으로 관직을 나타내는 것은 후대에 등장하는 여러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편집] 치우의 전쟁

《환단고기》에는 치우헌원·유망 사이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개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치우가 신시국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 중국의 임금은 유망(楡罔)이었다. 치우는 신시국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유망을 공격하였으며, 승리하였다.

치우가 유망의 나라를 아울러 통치한다는 소리를 헌원이 듣고 공격하여 왔다. 1차 전쟁에서 치우는 헌원과 탁록(涿鹿)에서 싸워 이겼으며 이때 헌원은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兗)의 모든 땅을 신시의 영토로 삼았다고 한다. 치우는 이후에도 70여 차례 헌원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며, 치우가 죽은 후에 점차 그 땅에서 물러나왔지만 많은 유민들이 고조선 시대에도 남아 있어 그 영향력을 중국에 미쳤다고 한다. 중국 사서에서는 이들을 회대지방에 있으므로 주로 회이(淮夷)라 기록하고 있으며, 우이(嵎夷), 래이(萊夷), 도이(島夷), 구이(九夷)라고도 기록하였다고 한다.

[편집] 역대 환웅

《환단고기》는 에는 환웅이 천오백여 년간 배달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 역년을 기록하고 있다.

  1. (기원전 3898년): 거발한(居發桓)환웅, 재위 94년, 120세
  2. (기원전 3804년): 거불리(居佛理)환웅, 재위 86년, 102세
  3. (기원전 3718년): 우야고(右耶古)환웅, 재위 99년, 135세
  4. (기원전 3619년): 모사라(慕士羅)환웅, 재위 107년, 129세
  5. (기원전 3512년): 태우의(太虞儀)환웅, 재위 93년, 115세
  6. (기원전 3419년): 다의발(多儀發)환웅, 재위 98년, 110세
  7. (기원전 3321년): 거련(居連)환웅, 재위 81년, 140세
  8. (기원전 3240년): 안부련(安夫連)환웅, 재위 73년, 94세
  9. (기원전 3167년): 양운(養雲)환웅, 재위 93년, 139세
  10. (기원전 3071년): 갈고(葛古)환웅 또는 독로한환웅 재위 100년, 125세
  11. (기원전 2971년): 거야발(居耶發)환웅, 재위 92년, 149세
  12. (기원전 2897년): 주무신(州武愼)환웅, 재위 105년, 123세
  13. (기원전 2774년): 사와라(斯瓦羅)환웅, 재위 67년, 100세
  14. (기원전 2707년): 자오지(慈烏支)환웅, 치우천왕이라고도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15. (기원전 2598년): 치액특(蚩額特)환웅, 재위 89년, 118세
  16. (기원전 2509년): 축다리(祝多利)환웅, 재위 56년, 99세
  17. (기원전 2453년): 혁다세(赫多世)환웅, 재위 72년, 97세
  18. (기원전 2381년): 거불단(居弗壇)환웅 혹은 단웅(壇雄), 재위 48년, 82세

[편집] 고조선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1. 왕검(王儉)단군 : 재위 93년
  2. 부루(扶婁)단군 : 재위 58년
  3. 가륵(嘉勒)단군 : 재위 45년
  4. 오사구(烏斯丘)단군 : 재위 38년
  5. 구을(丘乙)단군 : 재위 16년
  6. 달문(達文)단군 : 재위 36년
  7. 한율(翰栗)단군 : 재위 54년
  8.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烏舍咸)단군 : 재위 8년
  9. 아술(阿述)단군 : 재위 35년
  10. 노을(魯乙)단군 : 재위 59년
  11. 도해(道奚)단군 : 재위 57년
  12. 아한(阿漢)단군 : 재위 52년
  13. 흘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단군 : 재위 61년
  14. 고불(古弗)단군 : 재위 60년
  15.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단군 : 재위 51년
  16. 위나(尉那)단군 : 재위 58년
  17. 여을(余乙)단군 : 재위 68년
  18. 동엄(冬奄)단군 : 재위 49년
  19. 구모소(緱牟蘇)단군 : 재위 55년
  20. 고홀(固忽)단군 : 재위 43년
  21. 소태(蘇台)단군 : 재위 52년
  22. 색불루(索弗婁)단군 : 재위 48년
  23. 아홀(阿忽)단군 : 재위 76년
  24. 연나(延那)단군 : 재위 11년
  25. 솔나(率那)단군 : 재위 88년
  26. 추로(鄒盧)단군 : 재위 65년
  27. 두밀(豆密)단군 : 재위 26년
  28. 해모(奚牟)단군 : 재위 28년
  29. 마휴(摩休)단군 : 재위 34년
  30. 나휴(奈休)단군 : 재위 35년
  31. 등올(登兀)단군 : 재위 25년
  32. 추밀(鄒密)단군 : 재위 30년
  33. 감물(甘勿)단군 : 재위 24년
  34. 오루문(奧婁門)단군 : 재위 23년
  35. 사벌(沙伐)단군 : 재위 68년
  36. 매륵(買勒)단군 : 재위 58년
  37. 마물(麻勿)단군 : 재위 56년
  38. 다물(多勿)단군 : 재위 45년
  39. 두홀(豆忽)단군 : 재위 36년
  40. 달음(達音)단군 : 재위 18년
  41. 음차(音次)단군 : 재위 20년
  42. 을우지(乙于支)단군 : 재위 10년
  43. 물리(勿理)단군 : 재위 36년
  44. 구물(丘勿)단군 : 재위 29년
  45. 여루(余婁)단군 : 재위 55년
  46. 보을(普乙)단군 : 재위 46년
  47. 고열가(古列加)단군 : 재위 58년

[편집] 〈북부여기〉 의 내용

북부여와 가섭원부여의 역사를 적고 있다.

[편집] 〈태백일사〉의 내용

[편집] 〈삼신오제본기〉

[편집] 〈삼한관경본기〉

마한과 번한의 역사를 적고 있다. 역대 마한, 번한의 군주가 나타난다.

[편집] 〈소도경전본훈〉

단군 시대의 종교를 설명하고 있다. ‘삼일신고’, ‘천부경’이 나타나며, 교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종교철학적 내용이다.

[편집] 〈고구려국본기〉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편집] 〈대진국본기〉

대진국(발해)의 역사와 함께 역대 황제(왕)의 묘호와 시호, 연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 대중상: 세조(世祖)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 연호 중광(重光)
  2. 고왕: 태조(太祖)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연호 천통(天統)
  3. 무왕: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연호 인안(仁安)
  4. 문왕: 세종(世宗)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연호 대흥(大興)
  5. 대원의: 폐위되어 묘호와 시호 없음. 재위 당시 사용한 연호는 기록 없음
  6. 성왕: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연호 중흥(中興), 휘 화흥(華興)
  7. 강왕: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연호 정력(正曆)
  8. 정왕: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연호 영덕(永德)
  9. 희왕: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연호 주작(朱雀)
  10. 간왕: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연호 태시(太始)
  11. 선왕: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연호 건흥(建興)
  12. 대이진: 장종(莊宗) 화황제(和皇帝), 연호 함화(咸和)
  13. 대건황: 순종(順宗) 안황제(安皇帝), 연호 대정(大定)
  14. 경왕: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연호 천복(天福)
  15. 애왕: 묘호 없음. 애제(哀帝), 연호 청태(淸泰)

'대위해'는 황제로 기록하지 않았다.

〈대진국본기〉에서는 ‘대진국’의 명칭만 사용되며,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편집] 〈고려국본기〉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편집] 평가 및 논란

[편집] 사학계의 의견

《환단고기》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1]. 범례에는 1919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편집] 대한민국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고 있으며[1], 그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다. 광대한 환국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부족하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내용 채택을 보류하고 있다.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환단고기》는 위작이며, 대부분의 역사 기록들은 그 문헌적 근거가 없고 당시의 역사 발전·문화 발전 단계에도 부합되지 않고 객관적인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역사연구에 이용하지 않는다.[10][11]

[편집] 일본

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그러나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 아고 기요히코(吾郷清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 평가하였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기록과 다른 위서 《고시코덴(古史古伝)》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편집] 진위 논란

[편집] 진서론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변론은 다음과 같다.

  • 근대 용어 등 후세에 일부 가필되었더라도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작했다면 보다 완벽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다.[12]

[편집] 위서론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1]

  • 용어사용이 적절하지 않다.
    • 사백력(시베리아), 파나류산(파미르고원), 수밀이(수메르), 우루, 지백특(티베트), 남녀평권, 부권, 상춘, 세계만방(世界萬邦) 등 근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 고려(高麗), 몽고(蒙古)[13], 흑수(흑룡강), 영고탑[14], 산동(山東)[15] 등 실제 사용 시기가 상이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 저술연대
    • 1911년 출간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출간연도인 1979년 보다 전에 환단고기 또는 그 저본이 되는 5권의 저서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다.
    • 1911년에 편집된 책이 1979년에 출간되기까지 60년이 소요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 기존 사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 후대의 글을 인용하는 등 내용상의 모순이 있다.
    • 1909년에 사망한 이기가 1911년에 완성된 환단고기를 감수하였다고 설명되었다.
    • 신채호가 《사기집해》의 주석을 잘못 해석하고 주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삼한, 후삼한설'이 반영되어 있다.[16]
    • 이화사의 《언행록》에 수록된 시가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에 인용되었다.
  •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
  •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 시대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문명이 등장하는 시기도 그 이후이다.

[편집] 중도론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 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17]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18]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19]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이용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20]도 있다.

[편집] 민족주의적 성격에 대한 의문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1]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발달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제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22]

[편집] ‘桓’의 발음에 대하여

《삼일신고주해》, 《신리대전》의 옛 기록은 음차라는 내용을 근거로 ‘桓’과 ‘韓’은 같은 글자이기 때문에 ‘한’으로 발음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필요]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주요 견해로는
    김상호, 〈고조선 문제를 둘러싼 노쟁과 금후의 과제〉, 《창작과비평》 1988년 가을호.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0호, 1990년.
    이도학,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이순근,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년.
    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고려원, 1990년.
    조인성, 〈《규원사화》론첨보〉, 《경대사론》 3, 경남대학교, 1987년.
    조인성,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검토〉, 《이병도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집》, 1987년.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시민강좌》 2집, 1988년.
    조인성, 〈한말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 《국사관논집》 3, 1989년.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6년
    등을 참조.
  2.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열 세 살이었던 이유립에게 건네면서 '경신년에 공개하라'라고 했다고 하나, 그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신동아》, 2007.9.
  3. 2006년 초에 숙명여대 도서관에서 1912년에 첫 출판된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1989년에 기증된 영인본(배달의숙 발행)이었고, 뒷면에 1979년 인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 김유경, '박창암과 장도빈 - 국사찾기운동', 프레시안뉴스, 2003.12.13.
  5. 가지마 노보루 역,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6. 김은수 역주, (주해)《환단고기 - 단군은 아시아를 통일했다》, 가나출판사, 1985년.
  7. ‘확인되지 않는 문헌’은 해당 문서가 현존하지 않아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조대기》와 《진역유기》의 경우, 해당 문헌을 인용했다는 《규원사화》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8. 《진서》〈사이전〉참조.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에 있어,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20,000호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20,000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50,000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며, 이곳은 숙신부터 따지자면 그 거리가 50,000리이다.'
  9. 여운건·오재성,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2004년.
  10.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북조선 사회과학출판사와 남한의 도서출판 중심에서 펴냄, 2001년 3월, 40쪽 등 참조.
  11.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2006년.
  12. 김막순, 〈한국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방대학원, 2000년, 8쪽.
  13. 몽고라는 명칭은 징기스칸이 등장할 무렵에 등장한다.
  14.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다.
  15.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
  16.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2006
  17. 김한식, 「상고사 연구에 관련되는 문헌비판」, 《교수논총 36집》, 국방대학교, 2004.
  18.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년.
  19. 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1993년, 95쪽,
    김병기·신정일·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7년.
  20. 이문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전국역사학대회 과학사분과 발표문, 2003년.
  21.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 《환단고기》가 저술되었다는 1911년은 항일민족투쟁기인데, 범례에서는 “세계 인류가 대등하게 모여서 함께 존재함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저술하고 있어 민족주의와 어긋난다.
    • 고려 우왕 말기에 기록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왜구와의 싸움에 대한 언급이 없다.
    • 《단군세기》에는 ‘소시모리’가 3도를 거점으로 ‘천왕’을 자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 신화에서 나타나는 ‘스사노오노 미코토’를 연상시키며, 일선동조론에 이용될 소지가 충분하다.
  22. 상동

[편집] 참고 문헌 및 링크

[편집] 단행본

  • 《고조선력사개관》, 허종호,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년.
  •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이상시, 고려원, 1990년.
  •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전병훈, 1919년.
  •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
  • 《한민족의 뿌리사상》, 송호수, 가나출판사, 1985년.
  •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한영우 외, 일지사, 2002년.
  • 《환단고기》, 환단학회 편, 광오이해사, 1979년 - 한정판 100부 발행
    • 가지마 노보루(鹿島曻) 역, 《환단고기》, 歴史と現代社 (新国民社), 1982년 - 일본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 김은수 역, 《환단고기》, 가나출판사, 1985년 -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편집] 논문

  • 이도학, 〈환단고기〉, 《민족지성》 9, 1986년 11월, 민족지성사.
  • 조인성, 〈한말 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제3집, 1989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
  • 안창범,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한국종교사연구》 통권 제10호, 2002년 2월.

[편집] 기고문 및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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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

구분 역사책
저자 계연수 편집
시대 1911년
본문
'한단고기'라고도 한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으로서 최근에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의 소개서에 의하면, 환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하였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네 가지 사서, 즉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것이다. 한국사의 상고 및 고대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책의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그리고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으로, 환인()과 환웅(), 단군()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환국()시대의 환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환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에는 신시 역대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인 1363년(공민왕 12)에 행촌()선생 문정공 이암( 嵒)이 저술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요약 정리하였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학자인 휴애거사() 범장()이 찬술한 책이다. ‘상권’은 1세 해모수(潄)로부터 4세까지 163년을 담았고, ‘하권’은 5세 ~ 6세의 51년간을 담았는데, 5세는 북부여가 쇠하여지자 졸본()으로 내려와 다시 즉위하고 동명()이라고 하였다 하니, 이가 곧 국사학계에서 말하는 고구려 시조로 여겨진다. 이어서 ‘가섭원부여기()'는 시조 해부루로부터 108년간을 담고 있다.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변모하여 이어지는 부분이 담겨있다.

〈태백일사()〉는 근세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이맥()이 편찬한 책으로, 《환단고기》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원시국가 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

《환단고기》 말미에, 이유립(岦)의 청을 들어 책의 정서를 한 오형기()가 쓴 발()문에는, 우리의 역사가 매우 유구함을 강조하고, 기자()를 부정하고 있다. 또한 신성시되는 우리의 역사를 조선의 유생()과 불가()에서는 이를 등한시하고 있으며, 서양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우리 것을 알지 못함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환인, 환웅, 단군 시대를 세부적으로 다루어 실사화하였고, 그 후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대외적으로도 크게 팽창한 우수하고 장구한 역사로 인식토록 하고 있다. 이는 외세의 침략기에 나타나는 애국심의 발로로 보아지며, 오늘날 한국사학계에서 정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출현한 것은 최근의 일인데, 편찬자 계연수는 제자 이유립에게 경신년(1980)에 이 책을 공개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1979년에 영인된 뒤,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라는 사람이 일역을 하고 그 원문을 게재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오형기가 발을 쓴 것이 1948년(신시개천 5846년이라고 기원을 밝힘)이다. 그렇다면 <계연수-이유립-오형기> 3인(대)을 거치면서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애국적 저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책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왜 7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공개하지 않았을까? 일제시대 일본의 탄압을 피해 숨겨두었다가, 언젠가 독립되는 날 공개하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나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4가지의 원사료를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삼성기와 같이 원시·상고사를 그토록 자세하게 기술한 근거는 무엇이며, 고대사에 나오는 역사 용어가 상고사에도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보다 강한 의문은, 근거가 있는 것처럼 자세하게 서술하여 조작한 위서()가 아닐까? 등이다.

그러나 일부 민간 사학자들은 이를 깊이 신봉하기도 한다. 이런 논쟁은 역사적 사실( historical fact)의 진위여부와 함께 앞으로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
 
<류재택> 


환단고기는 진서(眞書)인가 위서(僞書)인가?

 

1. 서설(序說)

 

국내 대부분의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들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위서(僞書)로 보고 이를 믿지 않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하여 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학자는 극히 소수이고, 이들은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서(僞書)일까? 아래에서 강단사학자들이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위서(僞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살펴본다.

 

2.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서(僞書)라는 견해

 

가. 그 당시의 사회.문화 발전 단계와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는 기사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3세 가륵(嘉勒) 단군 2년조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 가림토 38자 중 28자는 이조 세종대왕 때 창제(創製)한 훈민정음 28자와 모양이 같고 나머지 10자는 모양이 약간 변형되어 있다. 만약 단군조선(檀君朝鮮) 시대에 가림토(加林土)라는 문자가 사용되었으면, 이를 사용한 비문(碑文)이나 암벽(岩壁)에 조각되어 있어야 하는데도 만주나 한반도 어디에도 이제까지 발굴된 유적.유물에 가림토 문자나 이와 비슷한 문자가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단군조선(檀君朝鮮) 시대에 한글과 같은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가륵(嘉勒) 단군 3년에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遺記)를 편수케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가림토(加林土)를 발명한 다음해 가림토를 사용하여 사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또 8년에 지백특(支伯特 : 티베트)을 토벌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단군조선의 영역이 서쪽으로 티베트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또 빈부의 격차에 따라 조세(租稅)를 감(減)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조세제도가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 원년에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몽고는 후대에 사용된 말이므로 믿기 어렵고, 5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화폐(貨幣)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4세 오사구 단군 7년에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조선소(造船所)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5세 구을(丘乙) 단군 4년에 60 갑자(甲子)를 사용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책력을 만들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8세 우서한(于西翰) 단군 원년에 20분의 1을 세금(稅金)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선진 조세제도(租稅制度)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0세 노을(魯乙) 단군 5년에 궁문(宮門) 밖에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고 백성(百姓)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신문고 등 제도는 후대에 실시된 제도로 이때 벌써 이런 제도가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11세 도해(道奚) 단군 28년에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진귀(珍貴)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박람회(博覽會)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3세 흘달(屹達) 단군 16년에 주(州)와 현(縣)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군현제(郡縣制)가 실시되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50년에 5성(星)이 루숙(婁宿)에 모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이 정도의 천문지식(天文知識)이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14세 고불(古弗) 단군 을해 56년에 관리를 사방에 보내어 호구(戶口)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8천만인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전국적으로 인구조사(人口調査)를 실시하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19세 구모소(구牟蘇) 단군 54년에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별들이 운동하는 것을 적은 천문학(天文學)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27세 두밀(豆密) 단군 8년에 큰 가뭄 뒤끝에 큰비가 쏟아져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니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벌써 구휼제도(救恤制度)인 의창(義倉)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44세 구물(丘勿) 단군 17년에 감찰관(監察官)을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아전과 백성들의 죄상(罪狀) 등을 자세히 밝히고 효도(孝道)하는 사람과 청렴(淸廉)한 사람을 천거(薦擧)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벌써 이런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믿기 어렵다.

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기록된 역대 단군의 평균 재위년수가 44년 6개월이 되는데, 이는 현저하게 객관성, 타당성이 없다.

다. 중국의 문헌(文獻)과 맞지 않는 기사가 있다.

-4세오사구(烏斯丘) 단군 19년에 하(夏) 나라 왕 상(相)이 덕(德)을 잃자 단군께서 식달(息達)에게 명하여 남(藍), 진(眞), 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하면 이 기사는 하(夏) 나라 3세 왕 태강(太康) 때의 사실이지 5세 왕 후상(后相) 때의 사실이 아니다.

-23세 아홀(阿忽) 단군 2년에 남국군(藍國君) 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 및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 나라의 성책을 쳐부수고 깊숙이 오지(奧地)로 들어가 회(淮).대(岱) 지역의 땅을 평정하더니 박고씨(薄古氏)를 엄(淹) 땅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 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각 임명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하면 이는 은(殷) 나라 22세 조갑(祖甲) 23년의 기사가 아니라 은(殷) 나라 25세 무을(武乙 : B.C 1978-1955) 때의 일이다. 약 40년 차이가 난다.

라. 객관적 타당성이 없는 기사가 있다.

3세 가륵(嘉勒) 단군 8년조에 강거(康居 : 중앙아시아 소재)가 반하므로 단군이 이를 지백특(支伯特 : 티베트)에서 정벌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티베트 민중들이 믿고 있는 개국연대는 B.C 477년이므로, 단군조선 시대에 티베트라는 지명이나 국명이 있을 수 없다.

마. 고고학적(考古學的) 유물과 맞지 않는다.

이 주장은 일부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의 주장인데, 만주(滿洲)의 유물을 보면 만주에 나라가 세워진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이는데, 기원전 2333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세워졌다거나, 그 전에 배달국(倍達國), 환국(桓國)이 존재했다고 적은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서(僞書)이다.

이처럼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객관적 타당성이나 합리성이 없으므로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포함한 환단고기(桓檀古記) 내용 전부가 위서(僞書)이고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3.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다소 과장(誇張)된 내용이 들어있지만 위서(僞書)가 아니라는 견해

 

가.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적혀 있는 자연현상 주로 천체(天體)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검증(檢證)하여 위서(僞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은 주로 천체학(天體學) 등을 연구한 분들로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천체현상을 검증해 본 결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보고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실사(實事)로 보고 있다.

 나. 중국의 정사(正史)와 비교연구로 검증

 중국의 정사(正史)에 나오는 한국고대사에 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고기(古記)에 의하면 쉽게 해명(解明)이 되는 것을 보고 다소 과장(誇張)과 오류(誤謬)가 있을지라도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실사(實史)로 보고 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이분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이 다른 사서에 1038년, 1048년, 1908년 등으로 적혀 있는 이유,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중국의 사서에 고구려가 나타나는 이유, 중국의 사서에 백제군(百濟郡)이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과 요서(遼西) 지방에 나타나는 이유, 고대에 백제(百濟)와 왜(倭) 관계는 고기(古記)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고기(古記)의 내용 중에 중국의 사서와 일치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고기(古記)를 지을 때 중국의 사서를 보고 인용(引用)하였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있다.

 

4. 환단고기(桓檀古記) 저술방법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안전히 날조(捏造)된 위서(僞書)라는 주장, 진서(眞書)라는 주장, 후에 가필(加筆)된 내용이 들어가 있고 좀 과장(誇張)된 내용이 있지만 대부분 실사(實史)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완전히 날조(捏造)된 위서(僞書)인지? 아니면 다소 과장(誇張)과 후대의 가필(加筆)이 들어가 있지만 대부분 실사(實史)인지? 살펴보기 위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 저술방법을 살펴본다.

현재 출판되어 시판되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범례(凡例)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고기(古記)를 책에서 인용한 것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처음이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를 구해 볼 수 없으니 삼성기(三聖紀), 단군새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한 책에 합쳐 환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 하였다. 삼성기는 2종류가 있는데, 비슷하나 완전하지는 않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것으로 우리 집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을 이제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으로 삼았다.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것은 태천의 진사 백관묵(白寬黙)에게서 구한 것으로 이제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으로 삼아 이 두권을 합하여 삼성기전(三聖紀全)이라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홍행촌수(紅杏村叟)가 역은 것이니 곧 행촌(杏村) 선생 문정공(文貞公)이 전해주었다. 이 책 또한 백진사(白進士)에게서 얻었다. 진사는 문조고가(文藻古家)로서 많은 책을 소장했고 이제 두 종류의 역사책이 모두 그의 집에서 나왔으니 어찌 만금(萬金)을 주는 것에 비유하겠는가? 조국의 크나큰 광채라 할 수 있겠다. 북부여기(北夫餘紀) 상하는 휴애거사(休厓居士) 범장(范樟)이 지었다. 예전에 단군새기(檀君世紀)와 합편(合編)한 것을 삭주(朔州) 뱃골 진사(進士) 이형식(李亨栻)의 집에서 구했는데, 단군새기(檀君世紀)는 백진사(白進士)의 소장본(所藏本)과 1 자(字)의 다름없이 똑같다. 그런데 또다른 단군새기(檀君世紀)가 세상에 전하고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이 앞 책과 매우 다르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일십당(一十堂) 주인 이맥(李陌 : 1455~1528년)이 엮은 책이고 해학(海鶴) 이기(李沂 : 1848~1909년).) 선생이 간직하였다. 내용을 보면 환단(桓檀) 이래 전해오는 교학(敎學)과 경문(經文)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인용한 전거(典據)를 한번 보면 훤히 알 수 있다. 또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두 글의 전문(全文)이 모두 이 책 속에 있으니 우리 핵량들에게는 참으로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이라 할 만하다. 아 환웅(桓雄)과 단군(檀君)을 이어 전해오는 삼일심법(三一心法)이 진정 이 책속에 있으니 우리 태백진교(太白眞敎) 중흥의 터전이 될 것이다. 손과 발이 절로 덩실거리며 흥겨워 소리를 지르니 기뻐 미칠 듯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모두 해학(海鶴) 이기(李沂) 선생의 감수(監修)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을 다하여 옮겨 적었다. 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 두 벗이 자금을 마련하여 인쇄에 부쳤으니 그 기쁨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적어본다. 하나는 자아인간(自我人間)의 주체성(主體性)을 발견하기 위함이니 크게 기쁘고, 하나는 민족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기 위함이니 크게 기쁘고, 마지막 하나는 세계인류의 공존을 발맞추어 이뤄가기 위함이니 크게 기쁘다. 신시개천(神市開天) 5808년 곧 광무(光武) 15년(A.D 1911년) 신해(辛亥) 5월 광개절(廣開節) 날에 태백유도(太白遺徒) 선천(宣川) 인경(仁卿)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妙香山)의 단굴암(檀窟庵)에서 쓰다.」 [註 2종류의 단군세기(檀君世紀)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역년이 기자 동래 이전에 끝나는 것을 말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대종교의 단군세기, 제왕운기, 응제시주 등이다. 그러나 이는 삼국유사 등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의 역년과 다르다.]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에는 1898년에 계연수(桂延壽)가 단군세기(檀君世紀. 범례 글에 의하면 북부여기가 포함됨)와 태백유사(太白遺史)를 간행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1911년경에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편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계연수가 1911년에 책을 출판했다고 적혀 있지만 계연수가 출판하였다는 환단고기(桓檀古記)는 현존하는 것이 없다. 현존하는 것은 이유립(李裕岦)이 1979년에 출판한 것이다. 이유립 말에 의하면 계연수가 1920년에 죽으면서 60년 후인 다음 경신년(1980년)에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1979년에 출판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지금 시중에서 보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출판되게 된 경위를 살펴본다.

계연수(桂延壽)는 이유립(李裕岦)에게 환단고기(桓檀古記 : 실은 계연수가 지은 太白遺史와 檀君世紀<北夫餘紀 포함>) 등 자료를 넘겨준 후 만주(滿洲)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지가 절단된 채 시신이 압록강에 버려졌다.

계연수(桂延壽)가 독립운동을 하러 떠날 시기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이미 일본에 합병된 시기라 이 시기에 환단고기(桓檀古記) 같은 민족주의 사서를 극비리(極秘裏)에 출판하는 것은 몰라도 들어내 놓고 출판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이유립(李裕岦)은 월남(越南)하여 지내다가 1949년에 계연수(桂延壽)부터 넘겨 받은 필사본(筆寫本 : 아마 桂延壽가 건네준 太白遺史와 檀君世紀<北夫餘紀 포함> 및 기타 底本 史料를 指稱하는듯)을 오형기(吳炯基)로 하여금 정서(正書)하게 하였다. 그런데 오형기는 그것을 정서하면서 끝에 자신의 발문(文 : 책끝에 본문의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의 경위 ·날짜 ·저자 기타 관계되는 사항을 간략하게 적어 넣는 것)을 적어 넣었다. 이유립(李裕岦)은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겨 평소에도 제자들에게 ‘跋文은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筆寫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오형기를 비난하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또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오자(誤字)가 있다며 일일이 틀린 글자를 지적하며 수정(修正)하였다고 한다.

그후 1979년 이유립(李裕岦)에게서 역사와 한문을 배운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이 이유립(李裕岦)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오형기(吳炯基)가 필사(筆寫)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박기엽(朴琪燁)이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檀檀學會) 대표로 적어놓았다. 이렇게 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유립(李裕岦)은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조병윤(趙炳允)을 파문하고(그후 그는 승려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창해출판사 사장 전형배(全炯培)에게 오형기(吳炯基)의 발문을 제외한 내용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렇게 하여 오형기(吳炯基)의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桓檀古記)와 오형기(吳炯基)의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桓檀古記) 두 종류가 1979년에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유립(桂延壽)은 1979년에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출판할 의향이 없었는 것 같다(아마 이때는 환단고기(桓檀古記) 수정.정리가 아직 덜 된 시점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병윤(趙炳允)이 덥석 출판을 해 버리자 할 수 없이 출판을 하고 그 이유를 계연수(桂延壽)가 죽으면서 60년 후에 출판하라고 해서 그랬다고 돌려서 말한 것 같으로 추정된다. 조병윤(趙炳允)이 출판한 것은 그후 1982년에 가지마가 일본으로 가져가 번역 출판되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하여 위서(僞書)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저본(底本) 사료(史料)가 현존하지 않고 또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가 처음으로 출판하였다는 원본(原本)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79년에 출판한 2 종류만 남아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어떤 책에도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책이 인용된 흔적이 없고, 또 그 찬술자(撰述者)라는 이암(李嵒), 범장(范樟), 이맥(李陌)이 그러한 책을 찬술하였다는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연수(桂延壽)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이유립(李裕岦)이 계연수(桂延壽)로부터 "太白遺史"와 "檀君世紀" 및 기타 저본사료만 넘겨 받아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창작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라 부르며 계연수(桂延壽)를 들먹이는 것일까?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소설처럼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은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문구는 각종의 사서를 동원하여 분석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대마도(對馬島)가 옛날에 삼한(三韓) 땅이고 신라(新羅)의 영역이었다는 것, 소잔오존이 구주(九州)로 이주하기 전 한동안 대마도(對馬島)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素尸毛犁)에 정착해 있었다는 것 등은 일본서기(日本書紀), 구주(九州) 및 대마도(對馬島)에 관한 풍토지(風土誌),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 진도기사(津島紀事),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각종의 서적을 읽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한 두 사람의 머리로 창작해 내기에는 벅찬 내용이다. 반면에 뒤에 가필한 것이 뻔히 보이는 문구도 많이 보인다. 유치한 문구와 각종의 사서를 동원하여 고도로 분석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문구가 공존한다는 것을 환단고기(桓檀古記) 문구 중 어느 부분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고, 어느 부분은 고기(古記) 내용의 부실(不實)을 메꾸거나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유치한 내용을 가필(加筆)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기(三聖紀) 내용을 살펴본다.

삼성기(三聖紀)에는 환국(桓國)의 영역은 천해(天海)의 동쪽, 배달국(倍達國)의 영역은 만주(滿洲) 전지역과 중국의 북부.동부지방, 단군조선의 영역은 만주(滿洲) 전지역, 한반도(韓半島), 대마도(對馬島), 구주(九州), 중국의 북부.동부지방 등 아주 광범위한 지역으로 적혀 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면 "만주에는 가끔 100여 개의 융(戎 : 북방 이민족)이 합치는 일은 있어도 하나로 단결되지는 못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삼성기(三聖紀)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배달국(培達國)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왜 이렇게 아주 광범위한 지역으로 적혀 있을까?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저본(底本)은 발해인(渤海人)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단기고사(檀奇古史)인데, 단기고사에 만주(滿洲) 기마족(騎馬族)이 거주한 전지역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영역으로 적혀 있는 것은 발해인(渤海人)들이 나라를 세운 후 정통성(正統性)을 내세우기 위하여 발해국(渤海國)이 단군조선(檀君朝鮮),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 순서로 정통성(正統性)이 승계(承繼)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천하(天下)의 중심지는 발해(渤海)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해와 달을 숭배한 만주 기마족이 거주한 전지역을 배달국(培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영역으로 적은 것이다.

삼성기(三聖紀)에 나오는 환국(桓國) 12국은 대부분 7세기 초에 지은 진서(晋書)에 그 이름이 나오고, 삼성기(三聖紀)에 적혀 있는 환국(桓國)의 영역 남북 5만리는 진서(晋書)에 적혀 있는 일군국에서 숙신까지 거리 5만리와 일치한다. 환국(桓國) 12국의 이름은 7세기 초에 지은 진서(晋書)의 동이국(東夷國) 명칭과 같다. 이는 삼성기(三聖紀)를 지을 때 전래된 일부 사료에다 진서(晋書)에 나오는 환국(桓國) 12국 명칭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기(三聖紀)에는 환국(桓國) 때 6환인(桓因)이, 배달국(培達國) 때 18천왕(天王)이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배달국(培達國)의 역사에는 시조(始祖) 환웅, 갈고(葛古) 환웅, 자오지(慈烏支) 환웅(치우 천왕)에 관한 사실만 나오고, 다른 천왕(天王)에 관한 사실은 나오지 않다. 이로 보아 삼성기(三聖紀)를 지을 때 전래사료(傳來史料)에는 시조(始祖) 환웅, 갈고(葛古) 환웅, 자오지(慈烏支) 환웅(치우 천왕)에 관한 내용만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단군세기(檀君世紀) 내용을 살펴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홍행촌 노인이 고려 말인 A.D 1363년에 강화도 해운당에서 지었다고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발해인 대야발(大野勃)이 A.D 719년에 지은 단기고사(檀奇古史) 내용과 아주 유사하다. 이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을 때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저본(底本)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 나오는 내용 중 그 시대의 문화 발달 정도에 비하여 믿기 어려운 내용 즉 각종 전기기기 제품류 등을 만들었다는 내용, 정치원론을 저술하였다는 내용, 총을 만들었다는 내용, 성리학. 심리학을 지었다는 내용 등은 삭제되고 없다.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을 당시에 어떤 저본(底本) 사료가 남아 있었을까?

단군조선의 역사를 지은 책으로는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 규원사화(揆園史話)가 있다. 그런데 단군세기(檀君世紀)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대비(對比)해 보면 내용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존속기간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이 B.C 2333년부터  238년까지 2,096년간 존속하였다고 적혀 있는 반면에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B.C 2333년부터 B.C 1139년까지 1,195년간 존속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도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檀君)에 관한 사실 중에 1세 단군(檀君)에 관한 내용,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檀君)이 순시하다가 영초를 얻었다는 내용, 8세 우서한(于西翰) 단군(檀君)이 수확물에 대한 세금 비율을 정하였다는 내용(세율이 揆園史話에는 90분의 1, 檀君世紀에는 20분의 1), 10세 노을(魯乙) 단군(檀君) 때 짐승을 우리에 넣어 길렀다는 내용, 15세 대음(代音) 단군(檀君)이 수확물의 80분의 1로 세율을 바꾸었다는 내용, 23세 아홀(阿忽) 단군(檀君)이 동생 고불가(固弗加)에게 낙랑골(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으로 하여금 은(殷)나라를 남정(南征)하는 군사를 살펴보게 하였다는 내용, 30세 나휴(柰休) 단군(檀君)이 청구(靑邱)를 둘러 보고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諸侯國)의 한(汗)을 만났다는 내용, 47세 고열가(高列加 ) 단군(檀君) 때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했다는 내용 등은 똑 같다.

단군세기(檀君世紀)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대비하면 단군(檀君)의 재위시기(在位時期)가 틀리는데도 왜 47명 단군(檀君)의 이름과 숫자, 단군(檀君)에 관한 사실이 거의 같을까?

이는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짓기 이전에 존재한 저본사료(底本史料)에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檀君)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이 저본(底本) 사료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B.C 2333년부터 B.C 1139년 사이에 집어 넣었고, 단군세기(檀君世紀)는 이 저본(底本) 사료를 토대로 하여 B.C 2333년부터  238년 사이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중국의 사서를 보고 연도에 맞추어 중국의 사서 내용에서 조선(朝鮮)과 관련되는 것을 발췌(跋萃)하여 연도에 맞추어 규원사화(揆園史話)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집어 넣었다.

계연수(桂延壽)가 다른 종류의 단군세기(檀君世紀)가 보인다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기자동래(箕子東來) 이전으로 보았고,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고 이를 모두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보았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은 B.C 239년에 해모수(解慕漱)가 고구려(高九黎)를 세울 때까지 존속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기자동래(箕子東來) 이전으로 본 것은 고려 말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이 강해져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동래(箕子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오는 초기단군조선(初期檀君朝鮮)만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보고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과 후기단군조선(後期檀君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성격은 초기(初期)는 추대에 의하여 단군(檀君)이 되었고, 단군(檀君)의 힘이 강하지 않아 태자(太子)가 세습(世襲)하기보다 양가(羊加 : 胡)나 우가(牛加 : 濊)가 단군(檀君)을 승계(承繼)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기(中期)는 무력(武力)에 의하여 단군(檀君)이 정해졌고 아들에게 상속(相續)되었으며, 후기(後期)는 압록(鴨綠) 18성(城)의 힘이 강하여 단군(檀君)은 전쟁(戰爭)의 결정권이 없는 등 단군(檀君)의 힘이 아주 약하였다.

다음으로 북부여기(北夫餘紀)를 살펴본다.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각 단군(檀君)에 관한 본기(本紀) 내용이 상당히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는 고구려(高究黎) 건국이 B.C 239년으로 상당히 후대(後代)였기 때문에 계연수(桂延壽) 등이 입수한 북부여기(北夫餘記) 관련 저본사료(底本史料)는 상당히 상세하게 적혀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북부여기(北夫餘紀)는 후대(後代)에 가필(加筆)한 것으로 의심되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북부여기(北夫餘紀)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멸망에 고구려(일명 북부여)가 어떤 관련이 있고, 후에 고구려(일명 북부여)가 분열되어 고구려(북부여) 무리들이 (고주몽)고구려, 북부여(北夫餘), 동부여(東夫餘) 등으로 갈라지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된다.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지 않고는 여당전쟁(麗唐戰爭) 전황(戰況)을 당제(唐帝)에게 보고하는 당나라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고구려(高九黎) 건국연도를 왜 B.C 232년으로 보았는지, 중국의 사서에서 고구려가 왜 B.C 37년 이전에 나오는지? 등을 이해할 수 없다.

 다음으로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살펴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범례에는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이맥(李陌 : 1455~1528년)이 지었다고 적혀 있고, 환국본기(桓國本紀), 배달국본기(倍達國本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와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등이 적혀 있다.

계연수(桂延壽)도 태백유사(太白遺史)를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 계연수(桂延壽)는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각종 고기(古記) 및 태백교 경전(經典)을 참조하여 태백유사(太白遺史)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태백일사(太白逸史)중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는 각종 경전(經典)이 적혀 있다.

환국본기(桓國本紀)에는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등을 인용하여 환국(桓國)의 역사가, 신시본기(神市本紀)에는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등을 각 인용하여 배달국(培達國)의 역사가 적혀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중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고기(古記)를 참고하여 마한(馬汗)의 역사와 번한(番汗)의 역사가 적혀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내용 중 신빙도(信憑度)가 가장 떨어진다고 평가되는 부분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중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는 띄염띄염 일부 왕에 대한 내용만 적혀 있지만 그 때문에 신빙도(信憑度)가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이 중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검열(檢閱)으로 삭제(削除)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광개토왕이 이(伊), 왜(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 임나연정(任那聯政) 설치 내용, 백제와 고구려의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 진출 내용 등은 정사(正史)에서 삭제(削除)된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검열(檢閱)으로 삭제(削除)된 내용이 있다는 것은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 진출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나오지 않지만 중국의 정사(正史)에는 나온다. 중국의 정사(正史)에 백제군(百濟郡)이 왜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에서 보이는지?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때 왜 백제(百濟)가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을 상실하고 남한(南韓)으로 갔는지? 등은 환단고기(桓檀古記) 자료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

또 환단고기(桓檀古記) 자료가 아니면 청대(淸代)의 초영제본(肖英斋本)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卽墨鄕土誌)에 실려 있는 내용 즉 당나라 정관17년(643년)에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과 당태종(唐太宗)간에 산동반도(山東半島) 래주(萊州) 방면에서 마산대전(馬山大戰 : 淵蓋蘇文이 登州, 萊州를 점령하자 唐太宗이 반격하려다 포위되어 죽게 되었을 때 장군 金杰이 대신 죽고 唐太宗은 도망간 싸움) 등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백제, 고구려 전성시대에 강병(强兵) 100만으로 유(幽).연(燕).제(齊).노(魯) 등지를 침략하였다는 문구가 무슨 말인지? 송서(宋書)나 남제서(南齊書)에 나오는 왜5왕(倭五王)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5. 결어

 

지금 시중에 나도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대부분은 계연수(桂延壽)가 옮겨 적은 것을 1949년에 이유립(李裕岦)의 지시에 따라 오형기(吳炯基)가 정서(正書)하였고, 그후 1979년에 조병윤(趙炳允)이 허락없이 출판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다른 본이 몇 개 있다. 그런데 오형기(吳炯基)가 정서(正書)하면서 원본과 다르게 정서하였을리 만무하므로, 이유립(李裕岦)이 가지고 있던 원본과 오형기(吳炯基)가 정서(正書)한 것은 내용에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다소 과장(誇張)과 가필(加筆)이 들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사(正史)의 공백(空白)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귀중한 보충 사서(史書)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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