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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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 역사서이며, 이른바 동이족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위대함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진위 논란이 있으나, 남·북한학계 모두 그 내용이 왜곡된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1]
《환단고기》〈범례〉에 따르면, 1911년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자금지원으로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고 이기(李沂)가 교열(校閱)하였다고 한다. 1949년에 이유립이 오형기에게 정서시켰고, 한 차례 원본과 함께 관련 자료를 분실하였다가 그 후 기억을 되살려 필사하였다고 주장되었다.[2]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복원된 1979년 영인본(광오이해사 발행)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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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출간 경위 및 경과
- 1920년 이전,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원본을 계연수(~ 1920년)로부터 건네받았다고 하며, 1975년에 1920년대부터 보관해 오던 원본이 모든 관련 자료와 함께 유실되었으나,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했다고 한다.
- 1979년 11월에 필사·영인한 한문본(100부 한정)이 출간되었고, 이유립은 박창암[4] 통하여 일본의 변호사 출신 재야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曻)와 접촉하여 직접 원본을 전달하였다.[5]
- 1982년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가지마 노보루는 이 책에 붙여진 상세한 해제를 통해 고대 한반도에 ‘우가야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편집] 개요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졌다는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다.
- 《삼성기》는 환웅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배달국과 그 전신이라 하는 3301년간의 환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단군세기》는 47대의 단군이 2천 년 간 다스린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북부여기》는 북부여에 6명의 왕이 있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 《태백일사》는 환국, 배달국, 삼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한말 - 일제강점기 초에 대종교가 경전으로 채택한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1975년에 채택한 〈천부경〉이 포함되어 있다.
[편집] 구성
- 목차
- 범례(凡例)
- 삼성기(三聖紀) 상 - 안함로 지음.
- 삼성기(三聖紀) 하 - 원동중(元董仲) (신시역대기 포함)
- 단군세기(檀君世紀) - 이암 지음.
- 단군세기서(檀君世紀序)
- 단군세기
- 북부여기(北夫餘紀) -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지음.
- 북부여기(北夫餘紀) 상
- 북부여기(北夫餘紀) 하
-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 태백일사(太白逸史) -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지음.
- 태백일사목록(太白逸史目錄)
-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 환국본기(桓國本紀)
- 신시본기(神市本紀)
-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 삼한관경본기제사(三韓管境本紀)
- 마한세가(馬韓世家) 상
- 마한세가(馬韓世家) 하
- 번한세가(番韓世家) 상
- 번한세가(番韓世家) 하
-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천부경, 삼일신고 포함
-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 태백일사발(太白逸史跋)
- 환단고기발(桓壇古記跋)
[편집]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7]
- 확인되는 문헌 - 《사기》, 《운급헌원기》, 《관자》, 《한서》
- 확인되지 않는 문헌 -《대변설(大辨設)》, 《삼성밀기(三聖密記)》, 《삼한비기(三韓秘記)》,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遺記)》, 《표훈천사(表訓天祠)》
[편집] 주요 내용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는 환인과 환웅이 통치하였으며, 각각 7대와 18대를 전하였다고 한다.
[편집] 환국
[편집] 건국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사백력을 시베리아로, 천해는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 비정되기도 한다.
[편집] 12연방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며 각각의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였다[8]고 하나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부는 수밀이국이 수메르라고 주장하고 있다.
[편집] 역대 환인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다수의 대한민국 사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 1대 환인 : 안파견(安巴堅) 환인
- 2대 환인 : 혁서(赫胥) 환인
- 3대 환인 : 고시리(古是利) 환인
- 4대 환인 : 주우양(朱于襄) 환인
- 5대 환인 : 석제임(釋提壬) 환인
- 6대 환인 : 구을리(邱乙利) 환인
- 7대 환인 : 지위리(智爲利) 환인 또는 단인(檀仁)
[편집] 배달국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고대국가라고 한다. 중국사서에서 이 나라를 ‘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9]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가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주신(主神)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렸는데, 이를 신시라 하였다고 한다. 신시의 멸망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으며, 단지 신시를 이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에서는 환웅이 나라를 세운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백성을 보살피는 직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즉, 호가(虎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과 같이 이름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짐승의 이름으로 관직을 나타내는 것은 후대에 등장하는 여러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편집] 치우의 전쟁
《환단고기》에는 치우와 헌원·유망 사이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개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치우가 신시국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 중국의 임금은 유망(楡罔)이었다. 치우는 신시국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유망을 공격하였으며, 승리하였다.
치우가 유망의 나라를 아울러 통치한다는 소리를 헌원이 듣고 공격하여 왔다. 1차 전쟁에서 치우는 헌원과 탁록(涿鹿)에서 싸워 이겼으며 이때 헌원은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兗)의 모든 땅을 신시의 영토로 삼았다고 한다. 치우는 이후에도 70여 차례 헌원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며, 치우가 죽은 후에 점차 그 땅에서 물러나왔지만 많은 유민들이 고조선 시대에도 남아 있어 그 영향력을 중국에 미쳤다고 한다. 중국 사서에서는 이들을 회대지방에 있으므로 주로 회이(淮夷)라 기록하고 있으며, 우이(嵎夷), 래이(萊夷), 도이(島夷), 구이(九夷)라고도 기록하였다고 한다.
[편집] 역대 환웅
《환단고기》는 에는 환웅이 천오백여 년간 배달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 역년을 기록하고 있다.
- (기원전 3898년): 거발한(居發桓)환웅, 재위 94년, 120세
- (기원전 3804년): 거불리(居佛理)환웅, 재위 86년, 102세
- (기원전 3718년): 우야고(右耶古)환웅, 재위 99년, 135세
- (기원전 3619년): 모사라(慕士羅)환웅, 재위 107년, 129세
- (기원전 3512년): 태우의(太虞儀)환웅, 재위 93년, 115세
- (기원전 3419년): 다의발(多儀發)환웅, 재위 98년, 110세
- (기원전 3321년): 거련(居連)환웅, 재위 81년, 140세
- (기원전 3240년): 안부련(安夫連)환웅, 재위 73년, 94세
- (기원전 3167년): 양운(養雲)환웅, 재위 93년, 139세
- (기원전 3071년): 갈고(葛古)환웅 또는 독로한환웅 재위 100년, 125세
- (기원전 2971년): 거야발(居耶發)환웅, 재위 92년, 149세
- (기원전 2897년): 주무신(州武愼)환웅, 재위 105년, 123세
- (기원전 2774년): 사와라(斯瓦羅)환웅, 재위 67년, 100세
- (기원전 2707년): 자오지(慈烏支)환웅, 치우천왕이라고도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 (기원전 2598년): 치액특(蚩額特)환웅, 재위 89년, 118세
- (기원전 2509년): 축다리(祝多利)환웅, 재위 56년, 99세
- (기원전 2453년): 혁다세(赫多世)환웅, 재위 72년, 97세
- (기원전 2381년): 거불단(居弗壇)환웅 혹은 단웅(壇雄), 재위 48년, 82세
[편집] 고조선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 왕검(王儉)단군 : 재위 93년
- 부루(扶婁)단군 : 재위 58년
- 가륵(嘉勒)단군 : 재위 45년
- 오사구(烏斯丘)단군 : 재위 38년
- 구을(丘乙)단군 : 재위 16년
- 달문(達文)단군 : 재위 36년
- 한율(翰栗)단군 : 재위 54년
-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烏舍咸)단군 : 재위 8년
- 아술(阿述)단군 : 재위 35년
- 노을(魯乙)단군 : 재위 59년
- 도해(道奚)단군 : 재위 57년
- 아한(阿漢)단군 : 재위 52년
- 흘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단군 : 재위 61년
- 고불(古弗)단군 : 재위 60년
-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단군 : 재위 51년
- 위나(尉那)단군 : 재위 58년
- 여을(余乙)단군 : 재위 68년
- 동엄(冬奄)단군 : 재위 49년
- 구모소(緱牟蘇)단군 : 재위 55년
- 고홀(固忽)단군 : 재위 43년
- 소태(蘇台)단군 : 재위 52년
- 색불루(索弗婁)단군 : 재위 48년
- 아홀(阿忽)단군 : 재위 76년
- 연나(延那)단군 : 재위 11년
- 솔나(率那)단군 : 재위 88년
- 추로(鄒盧)단군 : 재위 65년
- 두밀(豆密)단군 : 재위 26년
- 해모(奚牟)단군 : 재위 28년
- 마휴(摩休)단군 : 재위 34년
- 나휴(奈休)단군 : 재위 35년
- 등올(登兀)단군 : 재위 25년
- 추밀(鄒密)단군 : 재위 30년
- 감물(甘勿)단군 : 재위 24년
- 오루문(奧婁門)단군 : 재위 23년
- 사벌(沙伐)단군 : 재위 68년
- 매륵(買勒)단군 : 재위 58년
- 마물(麻勿)단군 : 재위 56년
- 다물(多勿)단군 : 재위 45년
- 두홀(豆忽)단군 : 재위 36년
- 달음(達音)단군 : 재위 18년
- 음차(音次)단군 : 재위 20년
- 을우지(乙于支)단군 : 재위 10년
- 물리(勿理)단군 : 재위 36년
- 구물(丘勿)단군 : 재위 29년
- 여루(余婁)단군 : 재위 55년
- 보을(普乙)단군 : 재위 46년
- 고열가(古列加)단군 : 재위 58년
[편집] 〈북부여기〉 의 내용
북부여와 가섭원부여의 역사를 적고 있다.
[편집] 〈태백일사〉의 내용
[편집] 〈삼신오제본기〉
[편집] 〈삼한관경본기〉
마한과 번한의 역사를 적고 있다. 역대 마한, 번한의 군주가 나타난다.
[편집] 〈소도경전본훈〉
단군 시대의 종교를 설명하고 있다. ‘삼일신고’, ‘천부경’이 나타나며, 교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종교철학적 내용이다.
[편집] 〈고구려국본기〉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편집] 〈대진국본기〉
대진국(발해)의 역사와 함께 역대 황제(왕)의 묘호와 시호, 연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대중상: 세조(世祖)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 연호 중광(重光)
- 고왕: 태조(太祖)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연호 천통(天統)
- 무왕: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연호 인안(仁安)
- 문왕: 세종(世宗)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연호 대흥(大興)
- 대원의: 폐위되어 묘호와 시호 없음. 재위 당시 사용한 연호는 기록 없음
- 성왕: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연호 중흥(中興), 휘 화흥(華興)
- 강왕: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연호 정력(正曆)
- 정왕: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연호 영덕(永德)
- 희왕: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연호 주작(朱雀)
- 간왕: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연호 태시(太始)
- 선왕: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연호 건흥(建興)
- 대이진: 장종(莊宗) 화황제(和皇帝), 연호 함화(咸和)
- 대건황: 순종(順宗) 안황제(安皇帝), 연호 대정(大定)
- 경왕: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연호 천복(天福)
- 애왕: 묘호 없음. 애제(哀帝), 연호 청태(淸泰)
'대위해'는 황제로 기록하지 않았다.
〈대진국본기〉에서는 ‘대진국’의 명칭만 사용되며,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편집] 〈고려국본기〉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편집] 평가 및 논란
[편집] 사학계의 의견
《환단고기》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1]. 범례에는 1919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편집] 대한민국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고 있으며[1], 그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다. 광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부족하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내용 채택을 보류하고 있다.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환단고기》는 위작이며, 대부분의 역사 기록들은 그 문헌적 근거가 없고 당시의 역사 발전·문화 발전 단계에도 부합되지 않고 객관적인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역사연구에 이용하지 않는다.[10][11]
[편집] 일본
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그러나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 아고 기요히코(吾郷清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 평가하였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기록과 다른 위서 《고시코덴(古史古伝)》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편집] 진위 논란
[편집] 진서론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변론은 다음과 같다.
- 근대 용어 등 후세에 일부 가필되었더라도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작했다면 보다 완벽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다.[12]
[편집] 위서론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1]
- 용어사용이 적절하지 않다.
- 저술연대
- 기존 사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 후대의 글을 인용하는 등 내용상의 모순이 있다.
-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
-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 시대로 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문명이 등장하는 시기도 그 이후이다.
[편집] 중도론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 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17]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18]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19]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이용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20]도 있다.
[편집] 민족주의적 성격에 대한 의문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1]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발달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제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22]
[편집] ‘桓’의 발음에 대하여
《삼일신고주해》, 《신리대전》의 옛 기록은 음차라는 내용을 근거로 ‘桓’과 ‘韓’은 같은 글자이기 때문에 ‘한’으로 발음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필요]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가 나 다 라 주요 견해로는
김상호, 〈고조선 문제를 둘러싼 노쟁과 금후의 과제〉, 《창작과비평》 1988년 가을호.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0호, 1990년.
이도학,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이순근,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년.
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고려원, 1990년.
조인성, 〈《규원사화》론첨보〉, 《경대사론》 3, 경남대학교, 1987년.
조인성,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검토〉, 《이병도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집》, 1987년.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시민강좌》 2집, 1988년.
조인성, 〈한말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 《국사관논집》 3, 1989년.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6년
등을 참조. - ↑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열 세 살이었던 이유립에게 건네면서 '경신년에 공개하라'라고 했다고 하나, 그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신동아》, 2007.9.
- ↑ 2006년 초에 숙명여대 도서관에서 1912년에 첫 출판된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1989년에 기증된 영인본(배달의숙 발행)이었고, 뒷면에 1979년 인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 김유경, '박창암과 장도빈 - 국사찾기운동', 프레시안뉴스, 2003.12.13.
- ↑ 가지마 노보루 역,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 ↑ 김은수 역주, (주해)《환단고기 - 단군은 아시아를 통일했다》, 가나출판사, 1985년.
- ↑ ‘확인되지 않는 문헌’은 해당 문서가 현존하지 않아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조대기》와 《진역유기》의 경우, 해당 문헌을 인용했다는 《규원사화》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 ↑ 《진서》〈사이전〉참조.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에 있어,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20,000호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20,000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50,000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며, 이곳은 숙신부터 따지자면 그 거리가 50,000리이다.'
- ↑ 여운건·오재성,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2004년.
-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북조선 사회과학출판사와 남한의 도서출판 중심에서 펴냄, 2001년 3월, 40쪽 등 참조.
- ↑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2006년.
- ↑ 김막순, 〈한국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방대학원, 2000년, 8쪽.
- ↑ 몽고라는 명칭은 징기스칸이 등장할 무렵에 등장한다.
- ↑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다.
- ↑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
- ↑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2006
- ↑ 김한식, 「상고사 연구에 관련되는 문헌비판」, 《교수논총 36집》, 국방대학교, 2004.
-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년.
- ↑ 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1993년, 95쪽,
김병기·신정일·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7년. - ↑ 이문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전국역사학대회 과학사분과 발표문, 2003년.
- ↑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 ↑ 상동
[편집] 참고 문헌 및 링크
[편집] 단행본
- 《고조선력사개관》, 허종호,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년.
-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이상시, 고려원, 1990년.
-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전병훈, 1919년.
-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
- 《한민족의 뿌리사상》, 송호수, 가나출판사, 1985년.
-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한영우 외, 일지사, 2002년.
- 《환단고기》, 환단학회 편, 광오이해사, 1979년 - 한정판 100부 발행
- 가지마 노보루(鹿島曻) 역, 《환단고기》, 歴史と現代社 (新国民社), 1982년 - 일본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 김은수 역, 《환단고기》, 가나출판사, 1985년 -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편집] 논문
- 이도학, 〈환단고기〉, 《민족지성》 9, 1986년 11월, 민족지성사.
- 조인성, 〈한말 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제3집, 1989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
- 안창범,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한국종교사연구》 통권 제10호, 2002년 2월.
[편집] 기고문 및 기사
- '환단고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환단고기의 진실', 신동아, 2007.9.
- ‘‘환단고기’ 토대로 상고사 연구 보류해야 - 검증안된 내용 왜곡 우려’, 정영훈, 제주대신문, 2004년 3월 31일자.
-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 개천절에 되새겨 보는 ‘실증적’ 단군조선사’, 고준환, 오마이뉴스, 2003년 10월 3일자.
- 〈환단고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조인성, 국토포탈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