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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사람과산_김규순의 풍수이야기_201701
흑성산의 정기와 아우내 장터의 기운
독립기념관 전경 >>> 흑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독립기념관의
경관과 위용. 하늘의 짙은 구름이 최순실국정농단사태에 대해 선열들의 걱정을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글 사진 || 김 규 순
성거산의 위용 >>> 안성 칠현산에서 금북정맥이
분기한 뒤로 역량이 큰 산이다. 안성천과 삽교천 사이의 모든 능선이 성거산에서 시작된다. 군부대가 산 정상에 있어 성거산의 신령스러움이 자취를
감추었다.
성거산 천안의 자연지형은 크게 동서로 나뉜다. 성거산과 태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평지구릉이고 동쪽은 산지이다. 서쪽 평지구릉의 개천은 아산만으로 흘러들어가고, 동쪽 산지지역의 병천천은 미호천을 통해 금강으로 이어진다.
천안 지역의 개천은 성거산(573.3m)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발달했다. 서부의 평지구릉도 남북으로 나누어 개천이 발달했다. 남부지역은
태조산에서 발원한 물은 남쪽의 시내를 거쳐 곡교천을 통해 삽교호로 흘러들어가고, 북부지역은 개천이 북쪽으로 흘러 안성천을 만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성거산의 동남부에서 발원한 물은 목천과 병천을 지나 미호천을 만난다. 성거산이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능선이 사방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서쪽으로 뻗은 구릉지의 능선은 천안시내에 봉서산을 만들어 천안시청의 주산역할을 한다. (구)천안시청이 현재의
동남구청 자리에 있었을 때에는 가까이 있는 태조산이 진산이었으나 지금은 시청을 이전하였으므로 성거산을 진산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천흥사지 오층석탑 >>> 보물 제 354호, 성거산 아래에는
천흥사지가 있다. 고려시대에 3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평지사찰의 경우 전란을 피해가기 어려운지라 옛 터는 과수원과 밭으로 변했고
그곳에서는 부서진 기와조각만 나올 뿐이지만, 아직도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그 당시의 영화를
전해준다.
산이란 평야에 흙과 물을 공급한다. 폭우가 쏟아지면 산의 흙이 떠내려가 들판으로
운반되어 옥토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평상시에는 빗물을 개천으로 모이게 하여 평야에 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거산은
천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성거산의 꼭대기가 삼각형으로 솟은 모양이었으나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꼭대기를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군 시설물을 만드는 바람에 산정상이 평평해졌다고 마을 주민이 전한다. 무릇 산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야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
이것을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고 한다. 산 정상에 군부대가 세워지면 군인들의 기합소리가 드높아지므로 영험함이 사라진다. 예전 천안의 인물은
목천과 병천에서 나왔다. 김시민장군(1554-1592), 어사 박문수(1691-1756), 홍대용(1731-1783), 이동녕
임시정부국무령(1869-1940), 조병옥 박사(1894-1096), 류관순(1902-1920) 등등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들이다. 성거산의 군부대가 이전하거나 없어진 다면 천안에서 다시 걸출한 인물이 속출할 것이다.
천흥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99호. 당간지주는 오층석탑에서
직선거리로 250m나 된다. 당간지주의 형상이 매우 수려하고 깔끔하며 위엄이 있다. 오층석탑과 당간지주사이의 땅은 모두 사찰 터로 추정된다.
아직도 밭에서는 부서진 기왓장이 발견된다. 성거산에 십여개의 고찰들이 있는데 이들도 천흥사의 암자였다고 한다.
천안 봉선 흥경사 갈기비(天安 奉先 弘慶寺 碣記碑)
>>> 국보 제7호. 성환읍 대흥리 성환평야 중앙에 세워져 있는 석비. 고려 최충이 비문을 작성한 봉선흥경사의 사적비로
1026년에 건립되었다. 평야지대에 사찰을 세운 것은 승려집단을 통하여 임금이 이 지역을 직접 관리한 것을 말해준다. 이를 통치성의 지리학이라
한다.
풍수시장_아우내장터 아우내장터는 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 장소이다. 아우내 장터는 은석산(455m) 정상부근에
있는 박문수의 묘에서 유래한다. 고령박씨 병조판서 출신 박문수는 장군대좌형의 터에 묘지를 정한다. 장군대좌형의 터이지만 문제는 병졸에 해당하는
지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졸이 없는 장군은 위엄이 없듯이, 장군형의 명당에 병졸들이 보이지 않으면 그 땅이 무슨 위력이 있겠는가. 이에
어사 박문수는 ‘병졸이 없으면 병졸을 모으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사고의 전환을 통하여 은석산 아래 병천시장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만든다. 장에 모인 사람들이 병졸이 되었다. 박문수가 만든 아우내 장터가 163년이 지나 1919년에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장터가 되었다. 명당을
만들기 위해 만든 풍수시장이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신기하다. 이것이 풍수의
묘미이다.
어사 박문수 묘 >>> 영조 대의 충신이다. 이 묘를 조성하면서
병천시장 즉, 아우내 장터가 만들어졌다는 풍수설화가 전해온다. 묘지가 산 정상부분에 있어서 찾아가기 쉽지 않다. 산길은 정비가 되어 있어서
불편하지 않으며 은석사까지 차량이동이 가능하여 접근이 한경 용이하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 병천순대길 바로 옆에
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어느 한 사람이 만든 사건이 아니었다. 병천 일대 7천여명의
민초들이 아우내 장터에 모여 한마음으로 대한독립을 염원한 대사건이었다. 천안 동부 6개 면의 중심지였던 병천에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7천명의
군중이 모였다는 것은 지방의 유지와 현지 지식인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며, 또한 수 천 장의 태극기를 그린다는 것도 현지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일이었기 때문이다. 김구응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문중과 병천 지방 지식인과 진명학교를 위시한 성공회 조직이 한
축이었고, 류관순과 고흥류씨 문중 그리고 조원진을 비롯한 지방유지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조직이 또 다른 한 축으로 상호 정보를 주고받으며
합심하여 일구어낸 거사였다.
김시민 장군 사사처(射蛇處) >>> 김시민
장군이 활을 쏘아 이무기를 잡았다는 설화를 간직한 곳으로.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바위가 김시민 장군 생가마을 입구에 있다. 생가터는
이곳에서 마을 안쪽으로 100미터 거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김방경의 자손으로 안동김씨이며, 아버지 김충갑이
병천으로 장가를 와서 처갓집에서 김시민을 낳았다.
직산향교>>> 지방의 향교이지만 향교의 규모를 보면 직산이 부유한
동네였을 것이다.
온조왕사당 >>> 온조는 주몽 동명성왕의 아들이지만
이복형 유리에게 고구려가 승계되자, 어머니 소서노와 형 비류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 백제를 창건하였다. 건물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온조왕
사당을 보면 뒤편이 계곡 중앙이다. 사당 건물에서 계곡을 뒤로 한 채 짓지 않는다. 사당은 혼을 모시는 곳이며, 혼은 정신이고 정신은 산이
관장한다고 한다. 산의 능선을 피하고 계곡을 이어서 사당을 지은 것은 전통정신과 위배된다. 행정기관의 세심한 배려가
요구된다.
류관순의 열정과 희생정신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병천 지역 민초들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희생의 결과물인 것이다. 류관순은 서울파고다공원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3월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김구응에게 전한다. 이로써 김구응(金球應, 1887-1919)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김구응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장군의 후예로 한학과 신학문을 섭렵하고 성공회 소속 진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진명학교는 성공회 소속의
교육기관으로 영국인 구세실 신부가 경영하였다. 진명학교 학생들은 류관순과 함께 태극기를 그렸으며 만세 당일에는 태극기를 민중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병천지역 민중들이 모일 수 있도록 연락을 한 것은 지방 유지라고 봐야 한다. 이 날 일본경찰이 체포한 사람은 37명이며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중 일제가 시신을 숨겨버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분이 11명이나
된다.
한명회 묘역 >>> 수양대군의 오른팔로서 계유정난의
주모자. 예종·성종의 장인으로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랐으나, 연산군에게 부관참시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묘의 위치가 아래쪽으로 쏠려 당당함이
부족하다. 기록에 의하면,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고 싶어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긴다’고 하였으니 명풍수사를 곁에 두지 못한
듯하다.
흑성산 정상의방송중계소 >>> 흑성산의 이름에 걸맞게 현무암으로
성곽을 조성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김구응과 그의 모친
최정철은 1919년 4월1일 병천주재소 앞에서 순국했다. 현장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재판도 없었고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그의 활약상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는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선두에서 민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순국한다. 김구응은
1991년에야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이 날 독립만세운동의 또 다른 축인 류관순과 조인원(조병옥의 부친)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류관순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1962)을 수여하였고, 현장에서 일제에 의해 순국한 류중권(아버지)·이소제(어머니)·류우석(오빠)는 각각
애국장을. 류중무(숙부)와 류예도(사촌언니), 류제경(조카)는 애족장을 수여했다. 병천지역 민초들의 궐기는 한민족 정기의 표상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분은 현재 30명에 이르는 것만 봐도 지역민중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부족하고 많은 사실이 역사 속에 묻히고 사라져 훈장을 받지 못한 분도 많겠지만, 그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길이 빛날 것이다. 이제까지는 몰랐지만
병천의 후예들에게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독립운동가 이동녕선생 생가
흑성산과 독립기념관 흑성산(517,7m)은 목천에 있고, 병천에는 은석산이 있다. 그럼에도 흑성산은 병천
사람들에게까지 영험한 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흑성산은 검은산으로 불리우는데 병천에서 보면 검게 보인다. 흑성산에 오르면 방송국중계소가 있는데,
흑성산의 검은색을 표현하기 위해 현무암으로 성을 쌓아 놓고 있다. 흑성산은 독립기념관의 뒷산이다. 풍수에서는 뒷산을 주산(主山)이라고
한다. 즉, 주인된 산이라는 의미이다. 주산은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예로부터 학교의 교가에는 학교부근에 있는 명산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산의 정기를 타고났다고 노래를 불렀던 이유이다. 흑성산 아래 독립기념관의 지형을 보면 전통적 지리관인 풍수적 관점에서 조성된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흑성산을 주산으로 하여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좌청룡·우백호로 구분되는 능선이 감싸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길지에서 안산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데, 정문 앞 로타리 부근의 안산이 낮기는 하지만 이를 보완하지 않고
도로를 낸 것이 마음에 걸린다. 지금이라도 진입로를 우회시켜 완성도가 높은 풍수적 경관이 만들어 지기를 기대한다.
출처 : 월간사람과산_김규순의 풍수이야기_201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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