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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문화재 탐방-1...구룡동 통덕랑 윤세명 묘~광덕면 오자경 묘, 사당~태화산 개천사지

吾心竹--오심죽-- 2012. 12. 2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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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동 통덕랑 윤세명 묘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자헌대부, 양무공, 보산군 오자경 신도비 //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자헌대부, 양무공, 보산군 오자경 //

 

* 양무공지묘 상량문에 보면 오자경의 사당은 초축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상량문에 <용 숭정기원후사병진사월건계사십오일 신축오시인좌신향신득 미파택지중건묘우 유신만세불조 귀...龍 崇禎紀元後四 丙辰四月建 癸巳十五日 辛丑午時 寅坐申向辛得 未破擇地重建廟宇 猶新萬世不祧 龜>라 1796년 4월 15일 다시 중건한 사당이라고 전하며, 1838년경에 화재로 불타버리고, 1855년 7월 18일(철종6년)에 중건한 사당이라고 전한다.

광덕면 보산원에서 아산 배방면으로 넘는 망경산과 태화산 넋치고갯 길에 위치한다. 양무공 오자경을 모신 사당으로 양무공지묘(襄武公之廟)라 현판이 걸려있다.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오자경의 묘소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 약 700m 거리에 마주보며 있다. 사당 밑에는 그의 종가택이 자리 잡고 있다. 모진 비바람에 건물 곳곳이 누수가 심각하며, 사당엔 비가림 천막으로 덮여 있어 보호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맞배집이며, 입구의 숭모문을 지나면 약50평의 대지에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매년 양력 8월12일, 12월20일에 시향을 지낸다.

 

*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 산31-1 (보산원4길 26번지)

 

 

 

 

 

* 양무공지묘 //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자헌대부, 양무공, 보산군 오자경 묘소 //

 

* 병조판서, 양무공 보산군 오자경의 묘소는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에서 아산 배방면으로 넘는 망경산(일명 태화산) 넋치고갯 길의 서쪽에 위치한다. 양무공 오자경을 모신 사당과 묘소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 약 700m 거리에 마주보며 있다. 보성리 주유소 뒷길에 보산군(양무공) 오자경의 신도비가 새롭게 세워져 있다. 신도비 앞으로 능선을 타고 200m정도 능선을 타고 오르면 묘소에 이른다. 묘소는 동향이며, 양무공 사당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봉분이 매우 크게 조성되었으며 문인상과 무인상, 상석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 오자경(吳子慶) 1414(태종 14)∼1478(성종 9).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길보(吉甫).

처음 별시위(別侍衛)에 속해 있다가 1454년(단종 2)무과에 합격하여 내금위로 옮겨 북방군관(北方軍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61년(세조 7) 첨지중추원사에 발탁되고 이어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466년 무과중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등준시(登俊試)무과에 장원하여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고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서 구성군 준(龜城君浚)의 막하에 들어가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3등에 책록되고 보산군(寶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평안중도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가 되었으며 1469년(예종 1) 보산군에 다시 봉해졌다.

1473년(성종 4) 집을 수리하는데 목공이 오지 않는다고 잡아다 장살한 혐의로 관직과 공신적을 삭탈당하고 전주로 귀양갔다가 공주로 부처되었다.

1475년 귀양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직첩을 돌려받고 다시 보산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자헌대부, 양무공, 보산군 오자경 묘소 //

*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 산117, 산116

 

 

 

 

 

 

 

 

 

 

 

 

 

 

 

* 태화산(泰華山, 일명, 망경산(望京山) 개천사지(開天寺址)

 

개천사의 실체는 전혀 규명(자료)된 바가 없으며 [천안시지]에 조차 규명되지 않은 폐사지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9년 최근에 들어 개천 명문와가 출토되는 영향으로 인하여 문헌적 전거와 유물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개천사지의 역사적 규명은 반드시 이루워져야 할 것 이라본다. 개천사지는 [광덕사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42대 흥덕왕(?-836)7년인 832년 진산화상이 현재의 광덕사와 동쪽에 만복사 및 북쪽에 개천사를 건립하여 일산삼대찰의 주지를 지냈다고 전 한다. 그 후, 진산화상은 신라 제46대 문성왕(?-857) 6년인 844년에 현재의 광덕사에서 입적 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광덕사사적기]의 기록에 있는 개천사의 창건 시기를 좀 더 신빙성 있게 뒷받침 하여 주는 것이 이규보 (1168-1260)의 [동국이상국집] 이라고 볼 수가 있다. [동국이상국집]은 당시 고려23대 고종 27년(1192-1260)인 1241년에 당시의 최고의 재상이자 문장가 이었던 이규보의 문집으로서 그의 아들 함이 53권을 연차에 걸쳐 간행한 문집으로 그 책 권 24기편에 본 개천사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개천사 청석탑기명 왕의 친척인 광릉후 면이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사심 없는 마음에 살며 불가의 교우인 고승 아무를 알고 있었는데 고승 아무가 천안 땅 풍세현의 남쪽 땅에 가서 개천사라는 옛 절을 얻어 무릇 다시 창건하려고 할 때 광릉후의 시주로 불사에 더욱 힘이 되었다. 이에, 고승의 수제자의 제자인 현규가 스승 문하에서의 도에 보답코자 범어의 솔도파라는 것을 세우되 모두 청석을 사용하여 빙빙 돌려 쌓아 청석 13층 석탑을 만들고 광릉후에게 부탁하여 국가에 보답하고 복을 빌어 받치려는 생각에서 청석13층 석탑을 세웠으니 대문장가에게 기록할 글을 받아서 영원히 그 뜻을 전하고자 하였다. 광릉후가 이규보에게 기명을 부탁하여 고종 원년(1214)에 현 개천사에 개천청석탑기명 이라는 청석탑비가 건립되게 된 것이다. 그 개천청석탑기명 에는 석가모니부처와 탑의 관계에 대하여 논했는데, 당시에 불가에 귀의했던 이규보의 사상과 숭불정책을 국가지도의 이념으로 삼았던 고려국의 문벌귀족 사회의 불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비석이 바로 개천사청석탑기명의 비석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사상은 청석이라는 돌과 영원히 그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인 불후지도와도 일맥상통하는 기문으로서 고려중기 귀족사회의 불교 사상을 연구하는데 에는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며, 현재 남북한을 막론하고 청석이라는 석재 품에 글귀를 기록한 기문은 전무하다. 이러한 와중에 천안신문사에서 입수한 '개천 開天'이라는 명문기와와 아직은 판독이 곤란하지만 대략 세 가지로 판독되고 있는 명문와가 있는데 그 판독내용은 다음과 같다.

 

판독 내용 첫째는 큰 장인이라는 사재라는 인물로 판독되며 둘째는 대장척시로 판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본 명문와 이외에 년삼이라는 명문기와와 무수히 많았던 시대별 '개천(開天)'이라는 명문와는 글자꼴과 크기, 획 등이 모두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여러 차례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왔음을 단편적이나마 방증 자료로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또한 금당지로 추정되는 맹 씨 문중의 묘라고 구전되는 묘 자리에는 대형의 장대석, 탑부재인 옥개석내지는 탑신, 기단석등으로 보이는 유물이 산견되며 초석, 내지는 각종 절의 석재용품으로 쓰여 졌을 유물 또한 산견 된다. 묘의 상단부에는 동국이상국집의 '개천사청석탑기명'의 내용 실려 있는 부도 1기의 내용에 부합할 수도 있는 유물이 반가량 지상에 노출 되어 있으며 현재의 사찰지에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청석탑비도 현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봉분의 우측 부분에는 개천사 사찰 건물지의 초석 열과 와편 및 자기편 등이 무수히 산견되고 있으며 모대학교수의 별장자리 또한 사찰의 건물지로서 '개천'이라는 명문기와 다수가 노출된 곳이기도 하다. 별장공사 상단 우측으로는 조각난 대형의 당간지주 및 옥석이 산견되는데 그곳에는 현재 폐허가 된 빈집이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유적파괴 상태에 놓인 개천사지는 천안지역의 수십여 폐사지 중에서 문헌기록과 현장의 명문유물 및 현지의 위치 등이 완전 일치되는 폐사지로서는 성환의 [봉선홍경사지]와 성거의 [천흥사지]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폐사지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조선7대 세조 3년(1457)에가 온양온천(지금의 아산시)에 행차 때에 들리어 위전을 받쳤다는 기록과 함께 광덕사에 소장된 면역교지에 '개천사'와 함께 감역을 받은 기록내용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거찰이었던 역사의 현장인 개천사지는 남북한을 통틀어 단 1점밖에 없는 국보급 유물인 청석탑비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또한 역사의 정립차원에서와 시민 역사교육의 현장으로서도 활용 가치가 매우 높으며 또한 현존 문헌기록 및 유물, 유적의 위치가 완전 일치되는 천안 최고의 사찰이라는 점에서도 개천사의 역사적, 학술적 문화적 중요성이 갖는 중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조속한 시일 내에 개천사(개천사지)의 역사는 반드시 규명하여 역사의 현장으로 기록, 보존, 보호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백 승 명 / 한국사학회 회원>

 

 

* 화산...태화산...현재, 망경산 개천사지...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 //

*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보산원리 567외 12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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