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3년 직산금광...입장~성환~천안의 모습(소화 8년) >>>
*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용정리...한천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준설채금선의 모습 //
온조(溫祚)의 왕도(王都)이었음은 근거(根據)가 충분(充分)할 뿐 아니라, 더욱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건치연혁(建置沿革)에 「本百濟 南漢山城 始祖 溫祚王 十三年 自慰禮城 移都之 (下略) 」이라 하였나니 여상(如上)의 사기(史記)를 종합(綜合)하여 보면 온조왕(溫祚王)의 구도(舊都)이였던 것은 확실(確實)하지만은 하남(河南)이라는 하(河)의 위치(位置)가 금(今)의 한강(漢江)을 운(云)하였던 것인지? 또는 거성(距城) 2리 북(二里 北)에 있는 안성천(安城川)이 석일(昔日)에 있어서 하(河)이였던 것인지 확증(確證)키 난(難)하나 안성천(安城川)의 유역(流域)이 상당(相當)히 광활(廣闊)함을 볼진대 이시(伊時)의 하(河)이었는지? 또한 의문(疑問)인 바 성근지(城近地)의 촌명(村名)이 기로(耆老), 시랑(侍郞), 남창(南倉) 등 명칭(名稱)을 가졌고, 또는 근고(近古)에 있어서 채광(採鑛) 중에 지하(地下) 20여장(二十餘丈)에서 주즙(舟楫)의 파편부(破片部)를 다수(多數)히 발견(發見)하였음을 보면 현재(現在)의 육지(陸地)가 혹(或)은 기시(其時)의 강하(江河)인 듯한 의문(疑問)도 생(生)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사실(事實)이 종종(種種)있나니 필자(筆者)는 우월(偶越)하나 직산 위례성(稷山 慰禮城) 이 백제(百濟)의 왕도(王都)이였던 것이 무의(無疑)하다고 주장(主張)하고 싶다. 끝
<1927.8.27 동일일보 신문기사 내용>
* 직산금광 준설채금선...고대 선박의 뱃조각,주즙편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기사내용입니다.
지하 20여장...1장=3.58m, 혹은 1장=10척(1척=23cm)
20장*3.58=71.6m
20장*2.3m=46m...
*1장의 길이는 보통 사람키, 혹은 양팔을 벌린 길이와 비슷하다고 판단함.
*입장 용정리~도토성~모전리 일대까지 아산만의 최대 조수간만의 차 8.7m를 적용하면
가능한 얘기이며, 성환 홍경사 부근 수향리 무내(수천) 역시 바닷물이 들어왔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고려 현종이 갈대밭이 우거진 들판에 봉선홍경사를 건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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