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2

성거산 천흥사 5층석탑, 위례성 동장지주...위례성 차일봉(遮日峯, 예봉)을 바라보다

吾心竹--오심죽-- 2011. 8. 11. 13:02

<<< 성거산 천흥사??? 위례성 동장기(修山 李種徽(1731~1797) 1751년 作 ...천흥사 5층석탑 >>>

 

 

銅檣記 (1751년, 21세)...수산 이종휘

 

이종휘(李種徽) 1731(영조 7)∼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 아버지는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철(李廷喆)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역사서인 『동사(東史)』를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했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문집으로는 『수산집(修山集)』이 있다.

 

<동장기-銅檣記>는 1751년 장인(丈人)이 부임한 직산현감 최보흥(崔普興)의 명에 의해

<온왕사기-溫王祠記> <成歡驛, 척수루기-滌愁樓記>를  직산관아에 머물며 기록하였다.

 

 

 *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사 당간지주??? 위례성 동장(銅檣,구리돛대)지주...직산현지- 당나라 때 세움.

 

 

 

 

 

 

 

 

 

 

 

 

 

 

 

 

 

 

 

 

 

 

 

 

 

 

 

 

 

 

 

 

 

 

 

 

 

 

 

 

 

 

 

 

 

 

 

 

 

 

 

 

 

 

 

 

 

 

 

 

 

 

 

 

 

 

 

 

 

 

 

 

 

 

 

 

 

 

 

 

 

 

 

 

 * 성거산에서 본 천흥사지와 5층답(저수지 제방 아래), 위례성 동장지주는 230m 밖에 있슴...직산 위례성 강역 //

 

 * 성거산에서 본 위례강역과 서울 삼각산, 도봉산, 관악산, 청계산...2011.7.20  아침 촬영 //

 

 

 

* 천안시 성거산에서 본 관악산, 수원 광교산 //

 

* 천안시 성거산에서 본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 포대능선...200리 서울이 잘 보입니다 //

 

* 남서쪽 천안~아산~예산~덕산의 가야산 원효봉, 석문봉~덕숭산이 잘 보입니다 //

 

* 대진 큰나루...솔개나루...직산현 외야곶면 평택항이 코앞에...서해대교 //

 

* 성거산 천흥사 당간지주???...동장기 파일참조 //

 

 

 

동장기(구리돛대)...수산 이종휘(1721~1797).hwp

 

 

 

 

 

동장기-銅檣記...수산 이종휘(1731~1797)...1751년 신미년 作

 

동장(銅檣-구리돛대)이라는 것은 중국인의 세움으로 전국에 많이 서 있다. 대개 한나라 마원(BC14~AD49)장군이 동주(銅柱-구리기둥)를 세움으로 비롯되었다. 천흥사는 직산현 동남쪽 십리에 있는데 천흥사 문 밖에 서있는 동장의 높이가 수 길인데 네가닥 철노(끈)를 꼬은 것이 매우 견고하다. 사지(寺誌)에는 당나라 때 세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묘년(1751년) 모월 모일에 이 고을에 살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따라 성거산에 올라 위례성을 바라보고 잠시 천흥사 서쪽에 있는 누대에서 쉬어 두루 고적을 보면서 동장 아래에 서성거리다가 보니 탄식만 나오는데 방금 서산에 햇빛이 반조되어 광채가 붉은 금빛처럼 찬란해짐으로 그것이 천년 전 물건이라 보기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도서나 기록을 참고해 보면 누가 만들어 세운 것은 알 수 없고 또한 유민이나 고로(古老)들의 전해온 말도 없지만 동국사기의 말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가 서해로부터 건너와 호서 호남 접경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백제 의자왕 당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대장으로서 사비성을 평정하고 의자왕과 장사들을 항복케 하고 바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그 군사들이 아산과 직산까지 당도하지 못했으니 동장은 아마도 소정방이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소정방이 돌아감에 왕자 풍을 다시 왕으로 세웠으니 그의 장수 도침, 흑치상지, 사타상여 이 분들이 각 성(城)에 분거하면서 또 당나라 사람들과 이삼년을 교전하였는데 그 후 당나라 장수인 유인궤가 대중의 힘으로 근근히 승전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 군사가 들어올 때 그의 장수인 유백영, 풍사귀, 방효공, 유인원, 왕문도 등 뿐만 아닌데도 다만 동국사기에 소정방과 유인궤 두 명만 알려진 것이다. 유인궤가 또 머물러 있으면서 수년간 웅진(熊津)을 다스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에 유인궤의 명성을 학사들이 간혹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인궤가 동국(東國)을 떠날 적에 당태종의 정삭(正朔) 묘휘(廟諱)를 청하려고 반포령까지 내렸으니 그의 소행이 어찌 공명(功名)에 자희(自喜)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때 백제 왕자 풍을 쫓아내고 서상관을 항복시켰으며 공명을 이루고 뜻을 얻어 천만년 명성을 드날리기 위하여 구리를 녹여 높게 기둥을 세우면서 자신의 공적을 복파(伏波) 마원장군에 비교하려 하였으니 이와 같은 행위는 매우 희귀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런즉 동장을 만들었을 것을 그때의 물건으로만 볼 수 없고 그때 인물로 추구해 본다면 유인궤 이외의 사람도 아닐듯하다. 옛날 양양은 한골인데 양두는 그 고을을 잘 다스림으로 모두 오나라를 평정한 공적을 신임하면서 원개에게만 유독 비석을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산속에 두고, 하나는 물속에 던져 버렸음으로 오늘날 전해지지 못하지만 양숙자의 명성은 천만년 가도록 아직도 양양 사람들이 존모(尊慕)하는 생각이 원개보다 더하고 있다. 대개 원개는 전공으로 명성을 얻었고, 양숙자는 덕만으로서 명성을 얻은 분이기에 이와같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사에 의하면 유인궤가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치안하던 이때에 백제의 경내에는 시체가 풀잎 쓰러진 것처럼 많았기에 유인궤가 비로소 시체를 묻어주고 호적을 정리해 주었으니 이와 같은 소행으로 볼 때 인궤가 전쟁 할 적에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덕(德)으로 유회하면서 서서히 진정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천하의 많은 구리를 수집하여 동주를 높이 세웠으니 당시 위세만은 가상하다고 하겠지만 무엇이 양숙자의 덕정을 베풀어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고 사모하는 것만 하겠는가. 의당 그 동장이 황초야전(荒草野田) 속에 빛을 가리듯 우뚝 서있어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나 공연히 과객으로 하여금 의심만 하게하는 것인가. 한나라 때 마원이 교지(交趾-베트남)를 정벌한 일은 반역하는 자들을 정벌하였기에 위덕이 다같이 행하였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마 자(字)로 성(姓)을 하였고, 염주를 지나는 사람들이 지금도 동주(銅柱)를 보고 절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그분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나도 이점에 있어 또한 유감스럽기만 하다. 천흥사 위에는 옛날 위례성이 있다. 자손들이 교만하고 방탕하므로 온조왕의 공덕을 생각하지 못하고 유연황망(流連荒亡)하여 바닷가에 누대를 높이 세워 바라보며 안일하게 있다가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졸연간 들어와 성읍이 페허가 되어 천년이 되도록 황폐하고 쓸쓸해졌는데 동주만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남은 수욕(羞辱)을 지울 수 없으니 슬프기만 하구나. 이로써 반드시 국가를 소유한자의 귀감일 것이요 어찌 오로지 백제만이 그러하리오. 혹자는 말하기를 부도가(浮屠家=佛家,불교)에서 세워 그 탑을 보도록 했다 하기도 하고, 혹자는 중국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명장이 많이 배출되어 동장을 세워 지맥(地脈)을 제압했다고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믿을 수 없기에 돌아와 동장기(銅檣記)를 쓰노라. 이때 함께한 일행들은 최진보, 진사 염치주, 최흥석, 동자 최윤보 그리고 그분의 종자 수득이다.

 

< 번역 : 한학자 임용순 翁 // 교정 : 오심죽...2012. 6. 5 >

 

 

 

銅檣記...修山集 卷之三 記

 

銅檣者。華人所立。八域多有之。盖漢馬援銅柱之流也。天興寺在稷之東南十里。寺門之外。銅檣高數丈。鐵索以四維之者甚牢。寺誌。唐時所立。辛未某月某日 從邑中二三子。登聖居。望慰禮城。憇寺之西樓。周覽古蹟。而徘徊歎息於銅檣之下。方西日返照。而光射赤金。燦然如新。不卞其爲千年前物也。然考諸圖記。不知所立者爲誰。又非遺民故老所可得以傳說。然以東史言之。唐之將帥渡海。入兩湖之界。惟百濟義慈時。而蘇定方以大將。及平泗泚。與降王將士。卽西歸。其兵初不及今牙稷之間。則檣固非定方樹也。定方之還。王子豐。復立爲王。其將福信,道琛,黑齒常之,沙吒相如。分據諸城。復與唐人苦戰三二年。其後唐將劉仁軌。以大衆僅乃克之。故唐兵之來。其將劉伯英,馮士貴,龎孝公,劉仁願,王文度等。不爲不多矣。然東史獨稱蘇定方,劉仁軌。仁軌又留治熊津數年而後返。故仁軌之名。學士猶或知之。且仁軌之東。請唐正朔廟諱。將以頒行於東國。此其意豈非自喜功名者邪。及其走豐而降常之也。功成志得。又爲千載之名。而冶銅爲柱。以自附於馬伏波。此固無甚怪者。然則檣之爲其時物無疑。而欲求其人。則又無出於仁軌之外者。昔襄陽一郡而羊杜繼治。皆任平吳之功。元凱獨爲二石。一置之山。而一投之水。然碑今不傳。而羊叔子之名。至于千萬年。而猶爲襄人之慕過於元凱。盖元凱以功。叔子以德。此其所異也。史稱仁軌留鎭之日。濟之境內。殭尸如莽。軌始爲之瘞骸籍戶。以此觀之。軌之疾戰力征。多殺人命。不能以德綏懷。徐而定之者可知矣。雖收天下之銅。立柱齊雲。當時非不爲威。孰能久而不忘如叔子之爲乎。宜其荒草野田之中。翳然獨立。而不知爲誰氏之物。徒資過客之疑爾。馬援征徵。則徵貳威德並行。土人至於以馬爲姓。廉州之界。過者。至今拜銅柱。此豈非其驗歟。余於是。又有感焉。寺之上。故慰禮城也。子孫驕逸。不念溫王之烈。而流連望海之樓。使唐兵猝入。而城邑爲墟。及其千載。荒煙零落。至於銅柱尙存。而遺羞不泯。嗚呼。用此可爲有國者之鑑。豈獨百濟也哉。或曰。銅檣者。浮屠家所建。其用視㙮。或曰。華人謂我東多出名將。銅檣所以壓地脉。是二者。皆不可信。及歸而爲之記。從行者崔鎭普,進士廉致周,崔興碩,童子崔潤甫及其從子粹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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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기(구리돛대)...수산 이종휘(1721~179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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