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1

아산 영인산~선장 우강대교~우평~혜군 가리저(합덕)~맷돌포~대진(평택)-2

吾心竹--오심죽-- 2009. 11. 10. 13:29

<<< 아산 영인산~선장 우강대교~우평~혜군 가리저(합덕)~맷돌포~대진(평택)-2 >>>

 

 ***당진군 신평면 맷돌포에서 본 대진 서해대교의 풍경...당항(唐項)...당나라 가는 길목...///

 

 

 

***좌-안성천...우-삽교천...중앙-밀두리(밀물의 머리-密頭) 해빈 미추홀...뒷산-대두산성>신성>영인산성...///

 

***영인산=마치 거대한 배가 대양을 향해 뱃머리를 내미는 형상...택리지 이중환...///

 

 

 

 

 

***삽교천 해상 함상공원과 삽교천 방조제...///

 

 

***10리 넓은 대진(大津,한진)...백제 하남위례성의 해양 제1관문...신라의 대당교역(조공)로...///

 

 

 

 

 

 

***멀리 아파트-평택시 안중읍 포승읍...멀리 서운산(좌성산)의 협탄령-엽전재...백제의 진산 부소산 위례성...///

 

 

***아산 인주(仁州) 밀두리...영인산성...좌 작은산-입암산(갓바위 봉수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忠淸道)
직산현(稷山縣)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유(兪)ㆍ백(白)ㆍ조(趙)ㆍ전(全) 모두 촌성(村姓)이다. 경양(慶陽) 김(金)ㆍ조(趙)ㆍ백(白)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세대에 와서는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 쓰기를 좋아하여 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義慈王)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成忠)의 간언을 거절하다가 당 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오자 나라가 곧 망했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詩)를 지어 조상한다.
시(詩)에, ‘백제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네. 다섯 용(龍) 천안부(天安府)에서 싸워 끝나고, 한쌍 봉황(鳳凰) 위례성(慰禮城)에서 울었네. 시조(始祖)의 사당이 깊은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聖居山)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누(樓)에 올라 가을 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鐵笛) 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 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성환역(成歡驛)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인. 통수원(通水院)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은, 이곳이 갈래길의 요충(要衝)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强盜)를 만나기 때문에, 중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불렀다.
○ 이색(李穡)의 시에,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 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서서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馬]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眼界)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속이 시원히 트였네.학야(鶴野)로부터 달리는 말을 몰았고,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겨 공자(孔子)의 상달(上達)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微], 평택(平澤)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왕자성(王字城) 앞을 달리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하지 않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詩)에, “말[馬]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구름일세. 현묘(顯廟)께서 효도를 극진히 하여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하였다.
『신증』 신원(新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명환】 본조 이영구(李英耈) 맑고 근신해서 정사를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인물】 신라 심나(沈那)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부서지지 않는 진(陣)이 없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렀다. 소나(素那) 심나(沈那)의 아들.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靺鞨)이 비밀리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노략질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신라(新羅)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솔 뿐이었다.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모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는단 말이냐.’ 하더니 이제 죽은 것은 그 뜻이로다.” 했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소나(素那)의 부자는 참으로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었도다.” 하고, 잡찬(匝飡)으로 추증하였다.
고려 백문보(白文寶) 자는 화보(和父)로, 호는 담암(淡庵)인데, 성격이 청렴하고 개끗하며 정직했다. 공민왕(恭愍王) 초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을 때, 십과(十科)를 설치해서 선비를 뽑아 쓰자고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大君)이 되자 임금이 문보(文寶)를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직산군(稷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한다.
【효자】 본조 봉유지(奉由智)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
【제영】 할계언시희(割鷄言是戲) 성석린(成石璘)의 시(詩)에, “직산(稷山)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의 인덕(仁德)을 시험해 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한 외로운 이부터 시작하고, 세(稅)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 닭을 잡는다는 것은 희롱의 말이요,송아지 머물러 둔다는 말 지킬 만하네. 어려서 배운 것, 마침내 어디다 쓰리, 모름지기 혜택을 백성에게 미치게 함이로세.” 하였다. 아조고허유(鴉噪古墟幽)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가마귀 울어대니 옛터 그윽하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백제의 사산(蛇山)이었다.
【방면】 동변(東邊) 끝이 5리. 서변(西邊) 끝이 5리. 일동(一東)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동(三東)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일남(一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남(二南)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서(一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이서(二西)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삼서(三西)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북(二北)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경양(慶陽)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언리(堰里) 서북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 외야곶(外也串) 수원(水原) 서남쪽 경계에 넘어가 있는데, 진의 북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경양면(慶陽面)에 있다.
【교량】 아교(牙橋) 북쪽으로 27리에 있는데, 진위(振威)의 큰길로 통한다. 맹간교(盲看橋) 아교의 서쪽에 있는데, 평택(平澤)과 통한다.
【토산】 게.


 

[주D-001]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 : 입술과 이, 볼과 잇몸[輔車]은 서로 의지하여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주D-002]운몽택(雲夢澤)……트였네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가슴 가운데 운몽(雲夢) 같은 것 팔구(八九)를 삼켜도 조금도 걸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운몽은 초국(楚國)에 있는 큰 못이다.
[주D-003]학야(鶴野) :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 때문에 요동(遼東) 들판을 학야(鶴野)라 한다.
[주D-004]동산에……배웠네 : 맹자가, “공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보셨다.”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달한다.”[下學而上達] 하였다.
[주D-005]어찌……종알종알하리 : 한유(韓愈)의 글에, “지금 벼슬하는 이들은 삼성(三省)에 숙직 차례가 되면, 이불을 가지고 들어 가면서 계집종을 돌아보며 집안일 부탁하는 말이 종알종알하는데 오늘 은원외(殷員外)는 만리 밖 회골(回鶻)로 사신이 되어 가는 장도(壯途)에 오르지만,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
[주D-006]닭을……말이요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학생들의 현가(絃歌)하는 소리를 듣고 웃으며, 자유에게 “닭을 잡으면서 소 잡는 큰 칼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그것은 작은 고을에 천하를 다스리는 예악(禮樂)을 가르친다는 말이었다. 조금 뒤에 공자는, “나의 말은 희롱이었다.” 하였다.
[주D-007]송아지 머물러 둔다 : 진(晉)나라 양편(羊篇)은 청렴한 관원이었다. 자기의 소[牛]를 관사(官舍)에서 길렀는데 송아지를 낳았다. 그 뒤 옮겨 갈 때에 그 송아지는 관사에 두고 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당진현(唐津縣)


동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는 맹곶(孟串)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었는데 혹은 부지군(夫只郡)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벌수지(伐首只)ㆍ부지(夫只).
【성씨】 본현 장(張)ㆍ한(韓)ㆍ황보(皇甫)ㆍ임(任)ㆍ고(高). 신법(新法) 땅 이름으로 《주관육익(周官六翼)》에 나와 있으나, 그 지역은 상세하지 않다. 박(朴)ㆍ서(徐)ㆍ현(玄) 혜성(槥城).
【산천】 고산(高山) 현 서북쪽 22리에 있다. 이배산(利背山)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적현(赤峴) 현 남쪽 10리에 있다. 바다 현 북쪽 10리에 있다. 채원포(菜元浦) 현 서쪽 5리에 있다. 산도(蒜島) 현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주위가 9리이다. 맹곶(孟串) 현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32리이며, 옛날에는 목장이 있었다.
【토산】 백복령(白茯苓), 청옥석(靑玉石) 현 남쪽 5리인 관음동(觀音洞)에서 난다. 굴[石花]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자하(紫鰕)ㆍ조기[石首漁], 조개[蛤] 맹곶에서 난다. 부레[魚鰾]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꼬막[江瑤柱]ㆍ게[蟹]ㆍ붕어[鯽魚].
【성곽】 읍성(邑城) 정통(正統) 경신년에 쌓은 돌 성으로서, 주위가 1천 9백 54척에 높이는 8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당진포영(唐津浦營) 현 서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갑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는 1천 3백 40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 난지도수(難知島戍) 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주위는 34리이며, 당진포의 만호(萬戶)가 군병을 나누어서 지킨다.
【봉수】 고산 봉수(高山烽燧) 동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창택산(倉宅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해미현(海美懸) 안국산(安國山)과 호응한다.
『신증』 누정 권가정(勸稼亭) 객관 동쪽에 있다. 해망정(海望亭) 당진포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홍세역(興世驛) 현 남쪽 9리에 있다.
【교량】 채원포교(菜元浦橋).
【불우】 고산사(高山寺) 고산에 있다. 능암사(能庵寺) 태산(泰山)에 있다. 성당사(聖堂寺)ㆍ사근사(沙斤寺) 모두 이배산에 있다. 영랑사(影浪寺) 영파산(影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제영】 건렴운출수(褰簾雲出岫)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발을 걷으니 구름이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휘장을 열어 젖히니 물이 하늘과 연했구나.” 하였다. 평강단롱노고저(平岡斷隴路高低)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편평한 산등성 끊어진 언덕엔 길도 높고 낮은데, 미끄러운 푸른 진흙 속으로 말굽이 푹푹 빠진다. 그늘졌던 골짜기에 눈이 녹으니 시냇물이 붓고, 양지쪽 언덕에 햇볕이 따뜻하게 쬐니 보리싹 가지런하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이다. 고산(高山)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4리, 끝은 10리이다. 남면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대진(大眞)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내맹(內孟)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외맹(外孟)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35리이다.
【토산】 소금[鹽]ㆍ감[枾].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평택현(平澤縣)


동쪽으로는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8리,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경기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20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부 경계까지 1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4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하팔현(河八縣)이라 불렀던 것을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천안부(天安府)에 붙였으며, 뒤에 감목(監牧)을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燕山) 을축년에 경기로 이속(移屬)시킨 것을 금상(今上) 초년에 다시 예전대로 환원하였다.
【군명】 하팔(河八).
【성씨】 본현 이(李)ㆍ임(林)ㆍ박(朴)ㆍ전(田)ㆍ손(孫)ㆍ전(全)이 있으며, 박(朴) 촌성(村姓)이다.
【산천】 성산(城山) 현(縣) 북쪽 1리에 있다.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 현 북쪽 10리에 있다. 시포(市浦) 현 남쪽 11리인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에 있다. 신덕포(新德浦) 현 서쪽 5리에 있다.
【토산】 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지황(地黃).
【누정】 관가정(觀稼亭) 객관 북쪽 언덕 위에 있다. 본현에는 사방에 산이 없고, 오직 이 언덕이 약간 높아서 조망할 만하다.
【학교】 향교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화천역(花川驛) 현 동쪽 5리에 있다. 상원(上院) 현 서쪽 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백랑부곡(白浪部曲).
『신증』 【효자】 본조 박녕(朴寧) 본현의 아전이다. 아버지를 섬기기를 매우 효성스럽게 하여 아침 문안과 저녁 잠자리를 잘 보살피며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금상 6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수완산저옥야평(水緩山低沃野平) 박서생(朴瑞生)의 시에, “물 천천히 흐르고 산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곳곳마다 밭갈이를 일삼는다.” 하였다. 춘풍원습화여해(春風原隰花如海)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기름진 들 멀리 손바닥 모양 편편한데, 농부들 도롱이 삿갓 쓴 채 구름 헤치며 밭을 간다. 봄바람 질펀한 들엔 꽃바다 이루었고, 밭머리선 꾀꼬리가 아래 위로 날며 운다.” 하였다. 지증근해요어해(地曾近海饒魚蟹)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한 언덕 약간 높게 사면이 편편한데, 날 저물면 돌아와서 외로운 정자에 올라본다. 이 지역 본래 바다와 가까워서 물고기ㆍ게가 풍부하고, 들엔 이미 가을 깊어 벼농사로 가득 찼다. 구름 한 점 없는 긴 창공(蒼空)엔 기러기 그림자 머금었고, 조수 돌아온 옛 나루터선 용(龍) 비린내 풍긴다. 내 집에 수경(數頃) 황무(荒蕪)한 밭이 있으니, 어느 날 찾아와서 백조(白鳥)와 맹약할꼬.”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29년에 개혁하여 직산(稷山)에 예속시켰으니, 왜구(倭寇)의 탕잔(蕩殘) 때문이었다. 광해군 2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처음은 1리, 동남쪽으로 끝은 25리. 동면(東面) 끝이 8리. 서면(西面) 끝이 7리. 남면(南面) 끝이 2리. 북면(北面) 끝이 8리. 소북(小北)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 백랑부곡(白浪部曲)이다.
【성지】 고성(古城) 당산(堂山)에 있는데, 성산(城山)이라고도 하며 옛터가 있다.
【진도】 군물진(軍勿津) 통양성(通陽城)과 진위(振威)와의 사잇길이다. 지진(池津) 소북면(小北面)과 수원지(水原地)로 통한다.
【토산】 게.
【사원】 포의사(褒義祠) 현종 신축년에 세워졌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되었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 모두 강화(江華)에 보임. 오달제(吳達濟) 광주(廣州)에 보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양성현(陽城縣)


동쪽으로 안성군 경계까지 3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 직산(稷山)현 경계까지 27리이며, 서쪽으로 진위현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 용인현 경계까지 1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사복홀(沙伏忽)인데, 신라 경덕왕이 적성(赤城)이라 고쳐서 백성군(白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는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명종이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예대로 현감으로 만들고, 충청도에서 본도로 이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사복홀ㆍ적성ㆍ사파을(沙巴乙)
【성씨】 본현 하ㆍ유(柳)ㆍ이ㆍ임(任)ㆍ갈(葛)ㆍ강(康)ㆍ송(宋)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천덕산(天德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진위현 조에도 적었다. 백운산(白雲山)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다. 바다 괴태길곶 서쪽 1백리 지점에 있다. 괴태길곶(槐台吉串) 현 서쪽 1백 리 지점에 있다. 줄같은 한 가닥 길이 진위현의 송장, 수원 양간(楊干)을 지나서 바다에 불쑥 들어 갔는데, 무릇 75리이다. 목장(牧場)이 있다. 홍경천(弘慶川) 현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선원천(禪院川)과 안성군 남천 물이 합쳐지고, 서쪽으로 흘러 직산현 홍경원 북쪽에 와서 이 냇물이 된다. 또 수원부 오을미곶(吾乙未串)에 들어간다. 선원천 고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죽산현 좌찬역(佐贊驛) 서쪽 골에서 나와, 고양지(古陽智)를 지나고, 현의 선원(禪院) 앞에 와서 냇물이 된다.
【토산】 웅어ㆍ지황.
【봉수】 괴대길곶 봉수(槐台吉串烽燧) 남쪽으로 충청도 면천군 창택산(沔川郡倉宅山)에 응하고, 또 직산현 망해산(望海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수원부 흥천산(興天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가천역(加川驛)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소초원(所草院)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원사(靑原寺) 천덕산에 있다. 수정사(修淨寺)ㆍ덕적사(德積寺) 아울러 백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무한성(無限城)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3백 5척이며, 성의 안에 못 하나가 있다.
【인물】 고려 이천(李梴) 벼슬이 첨의 평리 개성윤(僉議評理開城尹)에 이르렀다. 본조 이옥(李沃) 천의 증손이다. 무과에 뽑혀서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추(李推) 벼슬이 황해도 도관찰 출척사(黃海道都觀察黜陟使)에 이르렀다. 이순지(李純之)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이예(李芮) 과거에 두 번이나 올라서,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글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이승소(李承召) 세종조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뽑혔다. 성종조(成宗朝)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여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 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증』 이세영(李世英)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찬에 이르렀고, 청간(淸簡)하다는 것으로써 일컬었다.
【제영】 읍호요동간의명(邑號聊同諫議名) 고려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용성(龍城) 깊은 지역에 외로운 성 있는데, 고을 이름은 간의의 이름과 같다. 옛 시를 뒤좇아 화답하며 오래 앉았으니, 숲을 격한 주막에 낮닭이 운다.” 하였다. 노수참천요적성(老樹參天繞赤城) 유정현(柳廷顯)의 시에, “노목이 하늘을 찌를 듯 적성(赤城 적현과 같은 것)을 둘렀는데, 문앞 작은 길이 우정(郵亭)에 잇달았다. 송사 다루는 뜰에 해 길고, 일은 없어 한가로이 꾀꼬리 우는 소리 듣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백운산고성(白雲山古城) 무한성(無限城)을 칭하며, 둘레가 1천 3백 5척이고 못이 하나다. 고루(古壘) 소사천(素沙川)의 남북쪽에 네 군데 있다.
【봉수】 괴대곶(槐台串) 서쪽 1백 리에 있음.
【방면】 지질동(紙叱洞)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8리. 송오리(松五里)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60리. 구천(九千)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공제(孔悌)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반곡(盤谷) 서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30리. 원당(元堂)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승량(升良)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영통(令通)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금질동(金叱洞) 동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덕산(德山) 남쪽으로 처음과 끝이 10리. 구룡동(九龍洞)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소고니(所古尼)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도일(道一) 남쪽으로 끝이 35리. 율북(栗北) 서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서신리(西新里) 서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55리. 감미동(甘味洞) 서쪽으로 처음은 65리, 끝은 65리. 이상 세 면은 수원(水原) 남쪽 경계를 넘어 옹포(瓮浦)의 옆에 있다. 외양동(外良洞) 서쪽으로 처음은 90리, 끝은 1백 15리인데, 서쪽은 바다에 닿았다.
【사원】 덕봉서원(德峯書院)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경진년에 사액하였다. 오두인(吳斗寅) 파주(坡州)에 보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진위현(振威縣)


동쪽으로 양성현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은 충청도 직산현 경계까지 37리이며, 서편으로는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12리이고, 북쪽으로 용인(龍仁)현 경계까지 33리인데, 서울과는 1백 18리의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부산현(釜山縣)인데 옛 연달부곡(淵達部曲)인데, 혹 금산(金山)이라 하기도 하고,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수성군(水城郡)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두었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그 뒤에 영(令)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태조(太祖) 7년에 충청도에서 떼어서 본도에 이속시켰다.
【관원】 현령 1인. 관직 품계는 종5품이며, 다른 현령과 같다. 훈도 1인.
【군명】 부산ㆍ연달(淵達)ㆍ송촌활달.
【성씨】 본현 김ㆍ이ㆍ유(柳)ㆍ최ㆍ송. 영신(永新) 김ㆍ최ㆍ오ㆍ황ㆍ이. 송장(松莊) 이ㆍ유(柳).
【형승】 길이 남과 북으로 통한다 하륜(河崙)이 기문을 지었다. 3도 요충(要衝)이 되는 지역에 위치했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기문이 있다.
【산천】 부산(釜山)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무봉산(舞鳳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수원부 편에도 적혀 있다. 천덕산(天德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양성현 편에도 적혀 있다. 장호천(長好川) 현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용인 속현으로 되어 있는 처인(處仁) 동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옛 양지현 서편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객관 남쪽을 지나 다시 서편으로 흘러 수원부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으로 들어간다.
【토산】 붕어[鯽魚]ㆍ게ㆍ지황(地黃).
【궁실】 객관(客館) 하륜이 지은 중수기(重修記)에, “진위는 한길 옆이어서, 노력과 비용이 딴 고을보다 갑절이나 된다. 원이 된 자가 진실로 마음을 지극히 쓰지 아니하면, 민생을 편하게 하여 사공(事功)을 이룰 수 없다. 현령 이후(李侯)가 수원(水原) 나의 여차(旅次)에 와서 문안하고 또 말하기를, ‘고을 객사(客舍)가 거의 폐사(廢舍) 지경이었다. 내가 고을 사람과 중건하기를 도모하고 도관찰(都觀察) 민공(閔公)에게 두 번이나 말했더니, 공이 허가하고 또 비용도 도와주었다. 내 이에 놀고 있는 자를 모집하고, 녹봉(祿俸) 중에서 남는 것으로 먹이며,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구웠다. 옛터에 가서 더하기도 줄이기도 하여, 가운데 당(堂)을 높게 하고, 양 옆으로는 퇴를 달고 꺾어서 따뜻한 방과 서늘한 마루를 만들었다. 마루와 행랑채, 대문까지도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약간 채인데 붉은 흙과 백토를 발랐고, 주위에는 담을 둘렀다.’ 하였다. 완성된 뒤에 민공이 와서 보고, ‘현령이 이와 같이 할 줄은 요량하지 못하였다. 기록하여 후인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그 달을 넘기지 못하고 민공은 조정에 돌아갔다. 아, 지금 공은 서거하였으나, 그의 말씀은 아직도 나의 귀에 있어서 잊을 수 없으니, ‘자네는 행여 기문을 지어 민공의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하기를 청한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내 글이 졸렬한데 어찌 기문을 지으리요.’ 하였다. 그러나, 생각하니, 내가 전일 전라도 관찰사로 가던 날에 이 고을을 지나게 되어 객사에 유숙하였다. 터가 낮고 습하며,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위태한 것이 거의 반이나 되었다. 밤에 비가 왔는데, 밑으로 젖어들고 위로는 샐까 염려되어서 누워서 잠들 수 없었다. 날이 밝아서 떠날 참에 늙은 아전 두어 사람이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나는 객사가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물였더니, 대답하기를, ‘3ㆍ40년 이래로 고을에 사고가 많아서 백성이 살 수 없었고, 더구나 저의 고을은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이므로, 사신과 빈객의 행차가 잇달아서 영접ㆍ전송하고 공궤(供饋)하느라고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는데, 관사 수리까지 어찌 바라겠습니까. 우리들이 진실로 몸 둘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민망해 하다가 떠났는데, 손꼽아 보니 지금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이번에 후(侯)가 황폐한 것을 일으킨 것이 이와 같으니, 전에 늙은 아전의 말과 어찌 거리가 멀까. 후가 무슨 수단으로 이렇게 하였는지 모르거니와, 오늘날 세상 형편이 전날의 3ㆍ40년과는 벌써 다름을 볼 수 있고, 후(侯)의 다스림이 또한 3ㆍ40년 동안의 원으로 있던 이와 같은 날에 논할 바가 역시 아닌 것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관사라는 것은 사신을 공궤하고 임금의 위덕(威德)을 선포하는 곳인데, 수령된 자가 그 황폐해 가는 것을 그냥 보고 수리하지 않으면, 이것은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하였었다. 그러나, 수령으로서 흥작(興作)하는 일에 능하다고 이름난 자는, 으레 백성의 힘을 부리고 혹은 백성의 농사 시기마저 빼앗아 백성의 걱정이 되게 한다. 그런데 후의 이번 거사(擧事)는 놀고 있는 무리만 부렸을 뿐, 온 고을 농사짓는 자에게는 고을 관원이 흥작하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게 하였으니, 이 점이 적을 만한 것이다. 후의 이름은 치(稚)이며, 계림 사족(鷄林士族)이다. 과거에 합격하였고, 조정에 올라서 문장과 행실로써 칭찬받다가, 나가서 이 고을을 맡게 되었으나, 작은 벼슬이라도 낮추어 여기지 아니하고, 당연히 해야 할 바를 다해서 사공(事功)을 나타낸 것이다. 후의 뒤를 이어서 다스리는 자는, 전일에 오랫동안 황폐하여도 능히 중수하지 못하던 것을 생각하고, 오늘날 다시 일으킨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서, 기운 것을 살피고 새는 곳을 살펴서, 어렵게 될 일을 쉬운 때에 생각하여, 때때로 수리, 완전하게 하여, 다시 황폐하지 않게 할 지어다.” 하였다.
○ 서거정이 지은 기문에, “진위는 작은 고을로서 3도의 요충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사신과 빈객의 왕래로 말발굽과 수레바퀴가 서로 엇갈렸다. 쇠잔한 백성과 곤궁한 아전이 번거로운 영접ㆍ전송에 곤란 받고, 수령된 자는 대접하기에 고달픈데, 또 무슨 다른 일을 겨를할 것이랴. 이러므로 객관이 비습하고 협소하여도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수리하지 않은 지가 여러 해였다.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의 연호) 갑오년에 연안(延安) 이후(李侯) 숙규(淑珪)가 원이 되어 왔다. 백성을 무휼(撫恤)하며 정사가 이루어져서, 온갖 조치에도 또한 놀리는 칼날에 여유가 있었다. 개연히 관사를 중수할 뜻이 있으니, 향중(鄕中) 부로(父老)인 전 현감 최각(崔塙)ㆍ민의(閔誼), 부장(部將) 최철석(崔哲錫), 도사(都事) 최윤신(崔潤身) 등이 각자 재물을 추렴하여 비용을 도왔다. 이에 놀고 있는 자를 뽑아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워서, 옛터에다가 본래 규모보다 크게 지었다. 무릇 건립한 것은 대청이 5칸이고, 동헌(東軒)이 2칸인데, 모두 앞뒤 툇마루가 있다. 윗방이 2칸이고, 거기에 달아서 서늘한 방과 따뜻한 방이 있다. 마루와 행랑이 잇달렸고 담으로 둘렀는데, 단청이 새로워서 온 고을이 장관으로 여겼다. 후의 둘째 형인 성균관 사성 숙감(淑瑊)이 나에게 기문 짓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원 된 자가 능히 그 책임을 다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청간(淸簡)하다고 불리는 자는 오활하기가 보통이고, 반착(盤錯 복잡하고 얽힌 것)한 것을 처리하는 자는 번요(煩擾)하기가 쉽다. 오활한 폐단은 관해(官廨)를 여관같이 보아서 무너져도 그냥 두고, 번요한 폐단은 천시(天時)를 빼앗고, 백성의 힘을 해롭게 하여 고달프게 한 뒤에 그친다. 청간하면서 오활한 데에 이르지 아니하고, 반착하면서 번요하지 않는 것은 호걸로서 유용(有用)한 재주가 아니면 능히 못한다. 들으니, 후가 진위에 정사한 지가 지금 6년이라 한다. 오로지 일 없이 하기만을 숭상하여 영건하기를 일삼지 않는 것 같았으나, 여러 해 동안 수리하지 못했던 관사를 하루아침에 모습을 고치게 하였으니, 후의 일을 결단하는 묘함이 어찌 이같이 신기한가. 그 청간하다는 명성만 도둑질하면서, 편하고 한가롭게 세월만 허송하는 자와 견주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원으로서 능히 그 책임을 다하는 후와 같은 자를 쉽게 얻을 수 있으랴. 옛 사람이 말하기를, ‘무릇 고을에 어진 원을 만나기가 어렵고, 다행히 어진 원을 만났다 하더라고, 능히 사업을 일으키기는 더욱 어렵다. 비록 능히 일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다음 사람이 황폐ㆍ파괴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만나기가 또 어렵다.’ 하였다. 다만 모를 것은 후(侯)의 뒤를 잇는 자가 능히 앞사람의 청사를 저버리지 않고 황폐ㆍ파괴되지 않게 할는지 모르겠다. 후가 만기되어서 돌아갈 참에, 고을 부로가 후의 덕을 말하여 마지아니하고, 간 뒤에도 생각하는 뜻을 기문에 넣고자 하여, 나에게 정녕(丁寧)하게 말하는 자가 있는 까닭으로, 아울러 적어서 보낸다.” 하였다.

【누정】 부산정(釜山亭) 객관 북편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장호원(長好院)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이방원(李方院)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백현원(白峴院)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갈원(葛院)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불우】 만기사(萬奇寺) 무봉산(舞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영신폐현(永新廢縣)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영풍(永豐)이라 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양성 속현이었는데, 본조 태종 때에 현 경계가 개 이빨처럼 서로 들어갔다 하여 수원부에 이속시켰다가, 세종 15년에 다시 내속시켰다. 송장부곡(松莊部曲)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수원부에 딸렸던 것인데, 본조 세종 6년에 내속하였다. 천장부곡(川場部曲) 현 서쪽 12리 지점에 있다.
【우거】 본조 김지(金漬) 과거에 올라 벼슬이 성균관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성품이 옛것을 좋아하고 음률에 밝았으며, 집이 가난하여도 태평인듯 하였다.

《신증문헌비고(新增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부산고성(釜山古城) 동쪽으로 1리에 있는데 산의 형세가 솥 길이와 같고, 좋은 내가 그 앞에 흐르며, 향교가 그 가운데 있다. 영신고성(永新古城) 흙으로 쌓은 성의 옛터가 있다. 고루(古壘) 연봉(延峯)의 서쪽에 두 군데 있다.
【방면】 마산(馬山)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송장(松莊)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인데, 본 수주(水州)ㆍ송장의 부곡(部曲)은 세종(世宗) 6년에 내속되었다. 병파(丙坡) 서남쪽으로 25리이다. 우두(右頭) 서쪽으로 30리이다. 성북(城北)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탄현(炭峴)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여방(餘方)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동면(東面) 끝이 20리이다. 성남(城南) 끝이 15리이다.


 

[주D-001]놀리는……있었다 : 소[牛] 잡는 사람이 원체 많이 잡아 보아서, 그 뼈와 살 붙은 곳에 칼이 들어가서 갈라내는 것이 항상 여유 있어, 칼날이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고 장자(莊子)가 말한 것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안성군(安城郡)


동쪽은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은 충청도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양성현(陽城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8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서 현으로 만들었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뒤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이 송도(松都)에 침입하였으므로 임금이 남쪽으로 가는데,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부르니, 양주(楊州)ㆍ광주(廣州) 일대 주군(州郡)에 이르는 곳마다 그 칼날을 꺾는 자가 없었다. 오직 안성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연회를 베풀어서 적군을 호궤하다가, 취한 틈을 타서 괴수 6명을 베어 죽였다. 이 때문에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11년에 그 공으로 군으로 승격되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에 충청도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공민왕이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수주(水州)의 양량(陽良)ㆍ감미탄(甘彌呑)ㆍ마전(馬田)ㆍ신곡(薪谷) 등의 네 부곡(部曲)을 떼어 주었는데, 뒤에 김용(金鏞)이 뇌물을 받고 마전ㆍ신곡을 수주로 돌려 주게 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원년에 또 양량을 쪼개어서 양지현(陽智縣)을 설치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혜홀(奈兮忽)ㆍ백성(白城).
【성씨】 본군 이ㆍ김ㆍ조(趙)ㆍ설(薛)ㆍ장(張)ㆍ경(敬). 감미탄(甘彌呑) 유(柳).
【형승】 천흥산(天興山)과 청룡산(靑龍山)이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둘러 있다 권근(權近)이 지은 극적루(克敵樓) 기문(記文)에 있다.
【산천】 서운산(瑞雲山)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밑에 우물 셋이 있다. 가뭄을 만나서 우물을 수리하고 비를 빌면 문득 영험이 있다. 백운산(白雲山) 군 동쪽 14리 지점에 있다. 보산(寶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구포산(九苞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옛 성터가 있다. 남천(南川) 군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한 가닥은 백운산 북쪽에서 나오고, 한 가닥은 남쪽에서 나온다. 이것이 합류하여 양성현 홍경천(弘慶川)으로 들어간다. 목동지(木洞池)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麻]ㆍ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
【누정】 극적루(克敵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권근이 지은 기문(記文)에, “나의 벗 정군(鄭君) 수홍(守弘)이 성(省)의 낭관으로서 안성 수령이 되어 나왔다. 정사를 잘하니 백성이 의지하여 편하여졌다. 이에 그 공관을 수리하고 고을 학장(學長) 정한(鄭翰)을 서울에 가게 하여 양촌(陽村)의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누(樓)는 본래, 거창(居昌) 신군(愼君) 인도(仁道)가 이 고을 원이었을 때 설치한 것이다.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홍건적에게 송도가 함락되고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였을 때 이 고을에서 북쪽으로 30여 주(州)는 풍문(風聞)만 듣고도 항복하였다. 심지어는 공복(公服)을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하늘까지 뒤덮을 듯한 기세가 남으로 넘치니, 장차 온 나라가 같이 망해도 막을 수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이 남보다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하는 체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호궤하였다. 적이 취한 다음 섬멸하니, 적은 이 때문에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흥복(興復)하는 공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고을의 의기와 공렬을 표창하여 지관(知官)으로 승격시켰다. 다음해 계묘년에 신군(愼君)이 원으로 와서 이 누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누는 적을 대항한 공과 지관으로 승격된 영관을 표한 것이니, 중요한 뜻을 가졌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신군이 이 누를 짓기는 하였으나 누 이름은 짓지 못하였고, 또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도 못하였다. 지금 벌써 3기(紀)라는 오랜 세월을 지나서 늙은 사람은 죽었고, 장성했던 사람은 늙었다. 또 오랜 시일을 지나게 되면, 이 고을이 국가에 공이 있었고 이 누가 고을에 중한 뜻이 있다는 것을 후세 사람은 장차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옛 규모대로 수리하여서 썩은 부분은 바꾸어서 견고하게 하고, ‘극적루(克敵樓)’라 명명하였으니, 자네 글을 받아서 후일 증거로 삼고, 고을 사람에게 전인(前人)의 공렬을 대대로 잊지 않게 하기를 원한다. 이 누의 경치를 말하자면, 가깝게는 산이 동북쪽에 진좌(鎭座)하여 푸른 솔과 높은 나무가 울창하고 그윽하며, 남쪽에는 큰 냇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 안쪽에 10여 채 소민(小民)의 집이 띄엄띄엄 있고, 바깥쪽에는 편평한 밭 수십 이랑이 펼쳐져 있다. 뽕나무ㆍ삼이밭 경계에 잇닿았고, 벼농사가 논 배미에 가득하다. 봄에 갈아서 여름에 김매고,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무릇 고을 사람으로서 이 지역에 일이 있는 자는, 모두 고개만 숙이면 볼 수 있다. 멀리로는 천흥ㆍ청룡의 여러 봉우리가 머리를 넌지시 내밀면서, 조회하는 듯 읍하는 듯,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벌여서, 시계(視界)가 끝이 없다. 옛날에 한문공(韓文公)이 등왕각(滕王閣)에 올라보지 못했으나, 기문하였으니, 자네도 이 누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는 것으로써 사퇴(辭退)하지 말았으면 다행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왕씨(王氏)가 고려를 건국한지 5백 년 동안에 도둑의 침해를 매우 받은 것이 충렬왕(忠烈王) 경인년에 있은 합단(哈丹)의 침입과, 공민왕 신축년에 있은 홍건적의 변이었다. 철령(鐵嶺)을 지켜내지 못하니, 합단이 마구 들어와서 빈 고을에 나아가듯 하였다. 원주(原州)에 들어오자, 충갑(冲甲 원충갑)이 필부(匹夫)로서 팔을 뽐내며 호통쳐서 도둑을 죽이니 지금까지 아름답게 여긴다. 송도가 함락되니 홍건적이 더욱 성해져서, 군사를 갈라 남쪽으로 향할 적에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하였고, 강물을 터 놓은 듯한 도도한 기세를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고을 사람이 충의를 다해 적군을 섬멸하였다. 우뚝한 제방이 되어, 옆으로 뻗치는 적군의 기세를 막았으니, 그들의 거룩한 공은 충갑과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 그 사실을 특별히 적어서 만세에 충의를 권장하는 표본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 충의는 인도(人道)의 큰 대목이며, 왕교(王敎)의 근본이다. 정군(鄭君)은 일찍부터 충효한 자질로써 인의(仁義)를 강명(講明)하였다. 고상한 뜻 가짐과 확고한 절조는 진실로 우뚝하여 짝할 사람이 없다. 이제 이 고을 정사에 임하게 되어서는, 첫째로, 이 사실을 높이 들어 이 누에 이름하여서 후인에게 무궁하도록 장려하였으니, 이 점도 또한 적을 만하다. 후일, 이 누에 오르는 자가 전인의 공열을 거슬러 생각하고 정군의 뜻을 생각하여, 타고난 덕을 좋아하는 양심에 감발하는 바 있으면, 충의와 절개 있는 선비가 성하게 나올 것이다. 그 왕화(王化)에 도움됨이 어떠하겠나. 어떤 사람은, ‘적을 이기는 공은 반드시 위란(危亂)을 겪은 다음이라야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은 오랜 세대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절의 있는 사람이 비록 감발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어느 곳에 그 뜻을 나타내겠는가.’ 하여, 나는 말하기를, ‘일에 크고 작음은 있으나 그 이치는 같다. 무릇 물욕이 내 마음의 의리를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적이다. 탐하는 마음은 염치를 해하고, 모진 것은 인(仁)을 해하며, 아부는 공(公)을 해하고, 편곡(偏曲)은 정의를 해하는데, 모두 사람이 적으로 돌려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극복하는 마음을 유(類)에 따라서 커지게 하고 사물에까지 미룬다면, 일상생활에 무릇 스스로 그 사심(私心)을 이겨서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것이, 어디를 가나 적을 극복하는 공이 아님이 없으며, 의(義)를 두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여 천리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인(仁)이다.’ 하였다. 이 누에 오르는 자가 이것으로써 일삼는다면, 정군의 뜻은 거의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군(郡)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강부역(康富驛)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광실원(光實院)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군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룡사ㆍ석남사(石南寺) 모두 서운산에 있다. 금강사(金剛寺) 백운산에 있다. 봉안사(鳳安寺) 구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감미탄부곡ㆍ마전부곡 모두가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정수홍(鄭守弘)ㆍ김겸(金謙).
【인물】 고려 이영(李永) 자는 대년(大年)이다. 서리(胥吏)가 되어서 서류를 정조 주사(政曹主事)에게 올리면서 읍하지 않았다. 주사가 노하여 꾸짖으니, 영은 곧 그 서류를 찢으면서, “나도 과거 보아서 조정에 벼슬할 것인데, 너희들에게 무슨 읍을 하리요.” 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 을과(乙科)에 뽑혔고, 인종(仁宗) 초년에 지어사 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을 죽였는데, 이영은 한의 매부(妹夫)로서, 연좌되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었다. 그의 어미와 자식도 적몰(籍沒)당해, 장차 노비로 된다는 말을 듣고, “내가 평소 일을 반성하여도 부끄러운 일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견디고 기다린 것인데, 만약 늙은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천한 노예가 된다면, 내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하랴.” 하고, 이내 말술을 마시고 분하게 여기다가 죽었다. 자겸이 술사(術士)를 보내어 길섶에 묻었더니, 마소가 그 무덤을 밟지 않았다. 자겸이 패망하자, 첨서 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로 추증되었다. 김유성(金有成) 15세 때 과거에 올라, 덕원부 서기(德源府書記)로 조용(調用)되었고, 태복윤(太僕尹)까지 하였다.
본조 이숙번(李叔蕃) 우리 태종조(太宗朝) 정사 공신(定社功臣)이다,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안성군(安城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신증』 【효자】 본조 이윤종(李閏宗) 서리(書吏)이다. 아비가 오랜 병중이었는데,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여서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이락우청홍행화(籬落雨晴紅杏花) 허식(許湜)의 시에, “방탕한 객(客)은 본래 조롱(鳥籠) 밖 새와 같은 것, 세상 사람 어느 누구, 우물안 개구리를 부러워하리. 산 고을에 오가면서 봄 경치 찾으니, 울타리에 비 개였는데 살구꽃이 붉다.” 하였다. 지탁서남옥야평(地坼西南沃野平) 최부(崔府)의 시에, “산은 동북쪽을 막아서 저절로 성이 되었고, 지역은 서남으로 트이었는데, 기름진 들판이 질펀하다.” 하였다. 십실풍연 사무성(十室風煙似武城)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열 집 풍경은 무성과 같은데, 남쪽 들은 기름지고, 사방 산 편평하다. 사군(使君)이 현가(弦歌)로써 다스리는데, 고을에는 멸명(滅明) 같은 사람 몇이나 있을까.”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
【연혁】 태종 13년 충청도로부터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서운고성(瑞雲古城) 둘레가 3리이다. 금강고성(金剛古城) 동남쪽으로 15리인데 둘레가 5리이다. 비봉고성(飛鳳古城) 둘레가 2리이다. 토성(土城) 남쪽으로 15리이며, 의병 홍계남(洪季男)이 성을 쌓아 싸운 곳인데, 지금은 진터[陣基]라 부른다.
【누정】 경설정(鏡雪亭) 읍내에 있다. 비각(碑閣) 남쪽으로 3리에 있는데, 영종(英宗) 무신년 오명항(吳命恒)의 승첩비(勝捷碑)이다.
【방면】 군내(郡內) 끝이 10리이다. 가사(加士)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가지곡(加之谷)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좌촌(北佐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덕곡(德谷)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목촌(木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송죽촌(松竹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진두(辰頭)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우지곡(于只谷)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문리(大門里)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죽촌(竹村)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거호곡(居乎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잉상곡(芿山谷)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사원】 도기서원(道基書院) 현종 계묘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김장생(金長生) 경도(京都) 문묘 편에 있다.


 

[주D-001]옛날에……기문(記文)하였으니 : 한문공(韓文公)은 한퇴지이다. 그가 원주 자사(袁州刺史)로 있을 때에 등왕각(滕王閣)의 기문을 지었는데, 보지 못하여 기문을 짓노라고 말하였다.
[주D-002]열 집 풍경 : 공자가 열 집 못 되는 동네라도 충성되고 신용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이 안성은 조그만 고을이지만, 옛날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有)라는 사람이 원 노릇하던 무성(武城) 지방에서와 같이 충성되고 신용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 무성에서 자유가 현가(絃歌), 곧 음악을 이용하여 백성을 교화시켰다 한다.
[주D-003]멸명(滅明) :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무성 사람으로 자유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동쪽으로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24리요, 남쪽으로 같은 부 쌍부현(雙阜縣) 경계까지 20리요, 서쪽으로 화량(花梁)까지 41리요, 북쪽으로 안산군(安山郡) 경계까지 43리며, 서울까지 1백 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唐恩)으로 고치었다가, 고려 초년에 예전 이름을 회복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속했다가 뒤에 옮겨 인주(仁州)에 붙이었고, 명종(明宗)이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元) 나라에 벼슬하여 정동행성 우승(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하고, 뒤에 승격하여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만들고, 또 승격하여 익주목(益州牧)으로 만들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을 없앨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강등하여 부를 만들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치었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당성(唐城)ㆍ당은(唐恩)ㆍ익주(益州)ㆍ강녕(江寧)ㆍ영제(寧提)ㆍ과포(戈浦).
【성씨】 본부(本部) 홍(洪)ㆍ송(宋)ㆍ방(房)ㆍ박(朴)ㆍ최(崔)ㆍ서(徐)ㆍ재양(載陽) 손(孫)ㆍ윤(尹)ㆍ신(辛)ㆍ우(祐)ㆍ오(吳) 홍주(洪州) 서(徐) 안산(安山) 전(田) 속성(續姓)이다.
【산천】 비봉산(飛鳳山) 부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염불산(念佛山) 부 서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청명산(晴明山) 부 서쪽 22리 되는 곳에 있다. 절명산(絶命山)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해운산(海雲山)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사나산(舍那山) 부 동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바다 부 서쪽 54리 되는 곳에 있다. 수홀도(愁訖島) 부 서쪽 41리 되는 곳에 있다. 우음도(亏音島) 부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다. 선감미도(仙甘彌島) 부 서쪽 5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대부도(大部島) 부 서쪽 53리 되는 곳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영흥도(靈興島) 대부도 서쪽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소홀도(召忽島) 성종(成宗) 17년에 안산군(安山郡)에 옮겨 붙였다. 『신증』지금 임금 14년에 안산(安山)으로부터 도로 남양부에 붙였다. 덕적도(德積島) 성종(成宗) 17년에 인천부(仁川府)에 옮겨 붙였다. 독갑도(禿甲島) 덕적도 남쪽에 있으며 주위가 25리이고 목장이 있다. 승황도(昇黃島) 독갑도 서남쪽에 있으며 주위가 45리이고 목장이 있다. 풍도(楓島) 성종(成宗) 17년에 수원부에 옮겨 붙였다. 신야곶도(新也串島) 성종(成宗) 17년에 인천부에 옮겨 붙였다. 이측도(伊則島)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 제부도(濟扶島) 선감미도(仙甘彌島) 남쪽에 있다. 탄모로도(炭毛老島) 소우도(小牛島) 남쪽에 있다. 오질도(於叱島) 부 서쪽에 있고 목장이 있다. 소우도(小牛島) 대부도 서쪽에 있다. 선협도(仙俠島) 독갑도 서쪽에 있다. 입파도(立波島) 풍도 동쪽에 있다. 구을압도(仇乙鴨島) 신야곶도(新也串島) 서쪽에 있다. 결오리도(結吾里島) 오질도(於叱島) 북쪽에 있다. 사나천(舍那川) 부 동쪽15리 되는 곳에 있다.
【토산】 경석(磬石) 부 동쪽 사나사(舍那寺) 서쪽에서 나는데 돌빛이 푸르고 흰 것이 서로 섞이어 무늬가 있다. 본조 세종(世宗) 9년에 캐어서 경쇠를 만들었더니 소리가 음률에 맞았다. 정옥사(碇玉沙)ㆍ소금[鹽]ㆍ감[柿] 국원(國苑)에서 난다.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전어(錢魚)ㆍ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참조기[黃石首魚]ㆍ호독어(好獨魚)ㆍ민어(民魚)ㆍ농어[鱸魚]ㆍ홍어(洪魚)ㆍ뱅어[白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낙지[絡締]ㆍ조개[蛤]ㆍ가무락조개[黃蛤]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소라(小螺)ㆍ해파리[海䑋]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쌀새우[白鰕]ㆍ곤쟁이[紫蝦]ㆍ게[蟹]ㆍ청해(靑蟹)ㆍ부레[魚鰾]ㆍ맛조개[竹蛤].
【관방】 화량진(花梁鎭)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좌도수군 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는데 관할하는 곳은 영종포(永宗浦)ㆍ초지량(草芝梁)ㆍ제물량(濟物梁)이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한 사람이 있는데 종삼품이며, 여러 진(鎭)이 같다.
○ 진(鎭)이 예전에는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 본영(本營)이었었는데 성종(成宗) 16년에 혁파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아침에 당성(唐城)을 떠나 서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가니, 연파(煙波)가 아득하여 끝이 없네. 원하건대 만곡(萬斛)이나 드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배를 멍에하여, 바다를 지나 고래를 베려 하노라.” 하였다.
영종포영(永宗浦營) 부 남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 있는데 종사품이다. 여러 포(浦)와 보(堡)도 같다.

【봉수】 염불산봉수(念佛山烽燧) 동쪽으로 수원(水原) 흥천산(興天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해운산(海雲山)에 응한다. 해운산봉수(海雲山烽燧) 북쪽으로 안산군(安山郡) 오질이도(吾叱耳島)에 응하고 남쪽으로 염불산(念佛山)에 응한다.
【누정】 상명정(尙明亭)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부 동쪽 2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해문역(海門驛) 부 동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진수원(鎭水院) 부 동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불우】 사나사(舍那寺) 사나산(舍那山)에 있다. 봉림사(鳳林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홍법사(弘法寺) 청명산(晴明山)에 있다. 장생사(長生寺) 절명산(絶命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여단(厲壇) 부 북쪽에 있다.
【고적】 고당성(古唐城)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古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 4백 15척이고 높이가 10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당 나라에서 재사(才士) 여덟 사람을 보내어 와서 고려 사람을 가르쳤는데 홍(洪)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자손이 대대로 귀히 되어 사는 곳을 당성(唐城)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지금은 과원(菓園)이 되었는데 장원서(掌苑署)에 속하였다. 석산성(石山城) 부 서쪽 33리 되는 곳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5척이다 재양폐현(載陽廢縣) 부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예전 안양현(安陽縣)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주(水州)에 붙이고 또 인주(仁州)에 붙였다가 뒤에 내속되었다. 분황부곡(奔黃部曲) 부 동남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양등간처(陽等干處) 부 북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망해루(望海樓) 고당성(古唐城)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남양부(南陽府)를 삼국 시대에는 당성(唐城)이라 이름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중세(中世) 이래로는 익주(益州)가 되었다. 익주의 홍씨(洪氏)가 태조(太祖)가 처음 일어날 때에 보익한 공이 있는데 은열(殷悅)이라는 이가 그 사람이다. 대대로 대족(大族)이 되었고 강도(江都) 말년에 이르러 남양군(南陽君)이 권신(權臣)을 죽이고 정치를 왕실로 돌려보냈으며 문예부주(文睿府主)를 낳아서 두 조정의 태모(太母)가 되었으므로 승격하여 부를 만들었다. 대개 산천이 신령하고 이상한 기운이 뭉치어 아름다운 상서가 되어서 억만년 한없는 왕업의 기초가 되었으니 참으로 다른 고을들과 평등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을을 지키는 신하를 중하게 여기고 또한 반드시 삼가 선택하였다. 해정어수(海亭漁叟) 정후(鄭侯)가 와서 생각하기를, ‘날[日]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있고 물은 근원과 끝이 있는 것이어서, 비록 멀고 큰 것이라도 그것을 잘 볼 줄 아는 자는 모두 그 난 곳과 근원을 알거든, 하물며 군상(君上)이 나온 곳(어머니의 집)이겠는가. 신하된 자가 진실로 마땅히 공경하여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영광스럽게 명령을 받아서 임금이 출생한 땅을 지키는 신하가 된 것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오직 공경하여 덕으로써 솔선하기를 힘썼으니, 그 아전을 감화시키고 감히 형벌을 가하지 않으며, 그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고 감히 위엄을 베풀지 않았다. 일 년 만에 크게 화평해져서 이익이 되지 않음이 없고, 모든 해가 제거되었다. 이에 고을 읍내에 누각을 지어 백성들의 우러러보는 것을 장려하게 하며, 찾아오는 빈객과 사신을 즐겁게 하였다. 누의 이름을 써 붙이기를 ‘망해(望海)’라 하고 그 아들 국자생(國子生) 이(彝)를 시켜 내 글을 받아서 기(記)를 삼게 하면서 말하기를, ‘고을에 예전에는 못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버려두고 수축하지 않아서 위에는 풀이 우거지고 아래는 지적지적하여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 가운데에 섞이어 경작하고 있다. 고을 사람들이 서로 못의 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매 그 뒤에 못이 말랐다고 전하나 참으로 그러한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정후가 이른 뒤에 명하여 못을 파서 수축하였더니 이날에 검은 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일고 바람과 우레가 따라 이르렀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용의 꼬리가 꿈틀꿈틀하며 못에 닿아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못 물이 사흘 동안을 끓어 흰 기운이 무럭무럭 올라서 그치지 않으니 늙은이와 어린이가 탄식하고 이상하게 여기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마음의 작용이란 큰 것이다. 한 번 그 마음을 정하면 천하도 하잘 것이 없는 것이다. 정후(鄭侯)의 공경하는 마음이 멀리 통달하여 간격이 없으므로, 밝은 곳에서는 사람이 화합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용같은 물(物)이 감동되었으니, 이 누각이 작은 것쯤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먼저 고을의 고사(故事)를 말하고 다음에 용이 돌아온 사유를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고하노라. 정후의 이름은 을경(乙卿)이요 자(字)는 선보(善輔)이며, 재간과 능력으로 세상에 쓰여졌다.’ 하였다.” 했다.
【명환】 신라 극정(極正) 흥덕왕(興德王) 4년에 당은군(唐恩郡)으로 당성진(唐城鎭)을 삼고 사찬(沙餐) 극정(極正)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고려 정도전(鄭道傳) 공양왕(恭讓王) 때에 수령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이 고을에 왔었다. 뒤에 왕이 도전에게 이르기를, “남양 백성이 경의 은혜스런 정사에 감복되어 지금까지 칭송한다.” 하였다.
본조 민효남(閔孝男) 부사가 되었었다.
『신증』 박처륜(朴處倫).
【인물】 고려 홍관(洪灌)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벼슬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평(忠平)이다. 홍자번(洪子藩)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이며,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고 경흥군(慶興君)을 봉하였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홍문계(洪文係) 뒤에 규(奎)로 고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이고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홍경(洪敬) 자번(子藩)의 아들이고 벼슬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순(良順)이다. 홍언박(洪彦博) 공민왕(恭愍王) 때 사람으로 벼슬이 첨의정승(僉議政丞)이다. 남양후(南陽侯)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흥왕(興王)의 변에 집사람들이 말하기를, “빨리 피하라.” 하니, 언박이 말하기를, “어찌 수상(首相)으로서 죽음을 피하는 자가 있겠는가.”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서 드디어 피살되었다. 홍빈(洪彬) 그 조상은 원 나라 연경(燕京)에서 대대로 살았다. 빈(彬)이 내정(內庭)에 숙직하며 호위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 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빈이 왕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해서 그 억울한 것을 하소하여 변명하였다. 왕이 복위되어 동쪽으로 돌아오매 빈이 따라와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본조 홍여방(洪汝方)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홍달손(洪達孫) 무예(武藝)로 현달하였다. 세조(世祖) 때에 정난좌익공신(靖難左翼功臣)이 되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러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을 봉하였으며, 시호는 안무(安武)이다. 홍일동(洪逸童) 두 번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홍응(洪應) 신미년에 과거에 장원하여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에 참여하였고,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러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을 봉하였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문명(文名)이 있고 글씨를 잘 쓰고 풍신이 단정하고 아담하며 몸가짐이 법도가 있으니 사람들이 어진 정승으로 일컬었다. 성종묘정(成宗廟庭)에 배향하였다. 『신증』 홍형(洪泂)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지금 임금 초년에 참판(參判)을 추증하였다. 홍식(洪湜) 홍형의 아우이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연산(燕山) 갑자년에 피살되었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참판을 추증하였다. 홍한(洪瀚) 식(湜)의 아우이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강하고 곧아서 허여하는 것이 적으므로 권귀(權貴)에게 미움을 받았다. 마침 무오년의 사옥(史獄)이 일어나매 드디어 무함을 당하여 멀리 귀양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지금 임금 초년에 참판을 추증하였다. 홍흥(洪興)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전림(田霖) 무과에 올라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위절(威節)이다. 사람됨이 청백하고 엄하였다. 홍경주(洪景舟) 과거에 오르고 정국공(靖國功)에 참여하여 남양군(南陽君)을 봉하였으며 벼슬이 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정희(靖熹)이다.
【제영】 바다 가운데 여러 섬은 남북으로 나뉘었다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바다 가운데 여러 섬은 남북으로 나뉘었고, 구름 밖에 먼 멧부리는 혹 있다 없다 하네. 궁벽한 골짜기에 눈이 녹으니 시내에 푸른 물결 창일하고, 굽은 언덕에 바람이 지나니 버들이 누른 빛을 흔든다.” 하였다. 먼산은 새로 그린 눈썹이 비낀 듯하고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먼산은 새로 그린 눈썹이 비낀 듯하고, 긴 버들은 가는 허리로 춤을 추네. 올라가 달을 맞는 저녁이라. 읊조리며 읊으니 연기를 완상하는 아침이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仁祖) 22년에 현으로 내렸다. 역적 형(衡)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효종 4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현종 6년에 현으로 내렸다 종으로써 주인을 죽였다. 1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16년에 본 부에 있는 수원진(水原鎭)으로 옮겼다 읍을 관장한다.
【영아】 총융전영(摠戎前營) 전영장(前營狀)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인조(仁祖) 조에 좌영(左營)을 세웠다가 후에 전영으로 고쳤다.
○ 속읍으로는 남양(南陽)ㆍ양천(陽川)이 있다.

【방면】 부내(府內) 끝은 5리이다. 화척(禾尺)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저팔리(楮八里)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나중은 20리이다. 둔지산(屯之山)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신리(新里)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송산(松山) 서쪽으로 끝이 30리이다. 미지곶(彌之串) 동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은 20리이다. 분향(分鄕) 동남쪽으로 수원(水原) 경계를 넘어 들어가는데, 처음은 30리, 끝도 30리이다. 마도(麻道)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20리이다. 서여제(西如堤) 서쪽으로 끝이 35리이다. 세곶(細串) 서쪽으로 끝이 25리이다. 수산(水山) 서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쌍수리(雙守里)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목장】 대부장(大部場) 섬 가운데 있는데 감목관(監牧官) 한 사람이 있다. 속장(屬場) 선감미(仙甘彌)ㆍ영흥(靈興)ㆍ명홀(名忽)ㆍ이작(伊作)ㆍ소우(小牛)ㆍ불(佛)ㆍ입피(立彼)가 있다. 폐장(廢場) 섬에 있는 승황(昇黃)이다.
【사원】 용백사(龍柏祠) 현종(顯宗) 병오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제갈량(諸葛亮) 한(漢)의 승상이며 충무후(忠武侯)였다. 호안국(胡安國) 경도(京都)의 문묘조에 있다. 윤계(尹棨) 강화(江華) 조에 있다.
○ 안곡사(安谷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경종(景宗)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박세훈(朴世勳) 자는 훈지(勳之),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상주(尙州)인데, 벼슬은 첨정(僉正)이었으며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박세희(朴世熹)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인데, 세훈의 아우로 벼슬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홍섬(洪暹)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영의정 전문형(領議政典文衡)을 지냈으며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고읍】 재양(載陽) 동쪽으로 10리이며, 본래는 안양(安陽)이었다. 신라 때 본 군의 예속 현이 되었고, 고려 때에 재양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수주(水州)를 거느렸다가 다시 인주(仁州)에 예속되었고 후에 내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동쪽으로 용인현(龍仁縣) 경계까지 21리, 남쪽으로 충청도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50리, 같은 현 경계까지 59리, 진위현(振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남양부(南陽府) 경계까지 20리, 같은 부 경계까지 1백 13리, 북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39리, 서울까지는 88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수성군(水城郡)이라 고치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남쪽으로 정벌할 때에, 이 고을 사람 김칠(金七)ㆍ최승규(崔承珪) 등이 귀순하여 힘을 다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승격시켜 수주(水州)라 하였다. 고려 성종(成宗)이 도단련사(都團鍊使)를 두었는데, 목종(穆宗)이 혁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지수주사(知水州事)로 회복하였다. 원종(元宗) 12년에 착량(窄梁)에 방수(防戍)하고 있는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침노하고 노략질하자, 섬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몽고 군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쳐 평정하자, 그 공로로 도호부로 승격시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뒤에 또 승격시켜 수주목(水州牧)이 되었는데, 충선왕(忠宣王) 2년에 모든 목사(牧使)를 없앰에 따라, 강등시켜 수원부(水原府)를 만들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양광도(楊廣道)의 주군(州郡)에게 항복하기를 권유하자, 수원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맞아 항복하여, 적의 형세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드디어 강등시켜 군이 되었는데, 군 사람들이 재상 김용(金鏞)에게 중한 뇌물을 바치니 다시 부(府)가되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설치하고, 또 판관(判官)을 두었다.
【속현】 쌍부현(雙阜縣) 부(府)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날 육포(六浦)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용성현(龍城縣) 부 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 수릿골)이라고 한다. 신라에서 차성(車城)이라 고치어 당은군(唐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진관】 도호부(都護府)가 3이고 부평(富平)ㆍ남양(南陽)ㆍ인천(仁川). 군(郡)이 2이고 안산(安山)ㆍ안성(安城). 현(縣)이 7이다 진위(振威)ㆍ양천(陽川)ㆍ용인(龍仁)ㆍ금천(衿川)ㆍ양성(陽城)ㆍ통진(通津)ㆍ김포(金浦).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지금 임금 21년에 부의 백성 가운데 그의 부모를 죽인 자가 있어서, 강등하여 군(郡)이 되었다.
【관원】 군수(郡守) 1인.
【군명】 한남(漢南)ㆍ수성(隋城)ㆍ매홀(買忽)ㆍ수성(水城)ㆍ수주(水州).
【성씨】 본부(本府) 최(崔)ㆍ김(金)ㆍ이(李)ㆍ서(徐), 백(白). 내성(來姓)이다. 백(白)ㆍ최(崔)ㆍ이(李)ㆍ방(方)ㆍ하(河). 모두 촌성(村姓)이다.
쌍부(雙阜) 서(徐)ㆍ송(宋)ㆍ박(朴)ㆍ이(李)ㆍ심(沈)ㆍ신(愼).
용성(龍城) 차(車)ㆍ송(宋)ㆍ임(任)ㆍ장(張). 청구(靑丘) 정(鄭)ㆍ박(朴)ㆍ이(李). 공촌(公村) 김(金)ㆍ섭(葉). 내미(內彌) 이(李)ㆍ백(白). 심곡(深谷) 차(車). 오타(五朶) 여(呂)ㆍ김(金). 주석(柱石) 송(宋)ㆍ김(金). 최(崔) 차(車). 쟁홀(爭忽) 이(李)ㆍ김(金)ㆍ박(朴). 정송(貞松) 이(李)ㆍ김(金)ㆍ최(崔)ㆍ윤(尹). 양간(楊干) 박(朴)ㆍ김(金). 사정(奢井) 도(都). 금음촌(今音村) 여(呂)ㆍ이(李). 종덕(宗德) 유(柳)ㆍ서(徐)ㆍ이(李)ㆍ차(車). 분촌(盆村) 백(白)ㆍ전(田). 사량(沙梁) 견(堅)ㆍ김(金)ㆍ주(朱). 공이(工二) 송(宋). 유제(楡梯) 차(車).
【산천】 발점산(鉢岾山) 부 남쪽 2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광교산(光敎山) 부 북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또 용인현(龍仁縣) 편에 보라. 무봉산(舞鳳山) 부 동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일명 만의산(萬義山)이라고도 한다. 독성산(禿城山) 부 남쪽 77리 되는 곳에 있다. 홍법산(弘法山) 부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흥천산(興天山) 쌍부현에 있다. 바다 부 서남쪽 63리 되는 곳에 있다. 사근천(沙斤川) 부 북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은 광교산(光敎山)에서 나와서, 또 동쪽으로 흘러 대천(大川)으로 들어간다. 대천(大川) 부 동쪽 8리 되는 곳에 있다. 사근천과 용인현(龍仁縣) 구흥천(駒興川)이 합류하는 곳이다. 또 남쪽으로 흘러 광덕현(廣德縣)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구이포(仇二浦)ㆍ진목포(眞木浦)ㆍ적진포(赤津浦) 모두 쌍부현에 있다.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 부 남쪽 67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천과 진위현(振威縣) 장호천(長好川)의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여, 또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양야곶(陽也串) 쌍부현(雙阜縣)에 있는데 부 서쪽까지 50리이다. 둘레가 68리이고 목장(牧場)이 있다. 홍원곶(洪源串) 용성현(龍城縣)에 있는데 부 남쪽까지 55리이다. 둘레가 75리이고 목장이 있다. 팔라곶(八羅串) 쌍부현에 있다. 오을미곶(吾乙未串)ㆍ대저지도(大楮只島)ㆍ소저지도(小楮只島)ㆍ응도(鷹島)ㆍ구화도(仇火島) 모두 쌍부현에 있는데, 부 서쪽까지 90리이다. 풍도(楓島) 부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성종(成宗) 17년에 남양(南陽)으로부터 와서 예속되었으며 목장이 있다. 기지(機池) 부 동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손항지(孫項池) 쌍부현에 있다. 도제지(刀梯池) 신영장(新永莊)에 있으며 부 남쪽까지 60리이다.
【토산】 백옥(白玉) 저지도(楮只島)에서 난다. 소금[鹽]ㆍ밴댕이[蘇魚]ㆍ병어(兵魚)ㆍ홍어(洪魚)ㆍ조기[石首魚]ㆍ참조기[黃石首魚]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뱅어[白魚]ㆍ숭어[秀魚]ㆍ준치[眞魚]ㆍ오징어[烏賊魚]ㆍ호독어(好獨魚)ㆍ조개[蛤]ㆍ가무락조개[黃蛤]ㆍ맛조개[竹蛤]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낙지[絡締]ㆍ해파리[海䑋]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곤쟁이[紫蝦]ㆍ게[蟹]ㆍ청해(靑蟹)ㆍ부레[魚鰾].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35척(尺)이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봉수】 흥천산(興天山) 봉수(烽燧) 남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응하고, 서쪽으로 남양부(南陽府) 염불산(念佛山)에 응한다.
【누정】 운금루(雲錦樓) 이색(李穡)이 지은 기(記)에, “지대(池臺)와 피사(陂榭)는 놀고 구경하는 곳인데, 세도(世道)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 그러나 국가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자취와, 주현(州縣)의 흥하고 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개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위와 아래가 기쁘고 편안하여, 이속(吏屬)은 그 직책을 즐겁게 여기고, 백성은 그 생업에 편안할 것이니, 지대와 피사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태평 시대의 성한 모습을 형용할 수가 있겠는가. 법령이 가혹하고 사나우며 세금 거두는 것이 번다하고 무거우면, 백성은 들에서 탄식하고 이속들은 관아에서 피곤할 것이니, 비록 지대와 피사가 있더라도 어찌 홀로 즐길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수원부의 새 정자를 지은 것에 기(記)가 없을 수 있으랴. 부의 치소(治所 관청 소재지) 동북쪽 모퉁이에 옛 못이 있는데, 황폐한 지가 이미 오래였다. 전성안(全城安) 군이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개연히 복구하는 데에 뜻이 있어 이에 못을 파서 깊게 하고,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서 새 정자를 산뜻하게 지었다. 재물은 관가에서 나오지 않고 역사는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다. 완성이 되자 고을 사람들이 보고서 서로 돌아보며 놀라 말하기를, ‘어떻게 그리 쉽게 이루어졌는가. 반드시 귀신이 와서 도왔나 보다. 어떻게 우리들을 부리지 않고도 이렇게 되었는가.’ 하였다. 아, 전군은 참으로 백성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로다. 마침 전군이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비서소감(祕書少監) 안군(安君)이 나와서 양광도(楊廣道 지금 경기도의 일부)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 전군이 행정에 능한 것을 가상히 여기어 내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전씨의 자취가 없어지지 않고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직 글로 기록하는 데 있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수원은 안찰부(按察部)의 치소(治所)로서 여러 주ㆍ군을 통제하므로, 도 전체의 일이 집중되는 곳이 된다. 그러나 성하고 쇠하며 흥하고 폐하는 것도 또한 한 도 안에서 첫째가 된다. 지금 전군은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지극하고 어루만지며 편안히 거하게 하는 도리가 마땅함을 얻었다. 또 소민(小民)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우리 국가의 태평한 아름다움을 넓혔다. 그리고 안군은 백성의 풍속을 살피는데 온 힘을 다하고 남의 착한 것을 즐겨 말하니 모두 기록할 만한 사실이다. 후일 색(穡)이 일을 마치고 물러나게 되면, 이 고을을 지나갈 것인데, 만일 연꽃이 피는 때를 만나면, 반드시 수레를 멈추고 정자에 올라서 나의 이 기(記)를 읽은 뒤에 갈 것이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중수기에, “천순(天順) 계미년(세조 9년) 봄에 내가 바야흐로 한가하게 있을 즈음에 편지를 보낸 이가 있었는데, 성균사성(成均司成) 공기(孔頎)와 예조 좌랑(禮曹佐郞) 김구영(金九英)은 모두 수원부의 사람이다. 편지에 이르기를, ‘부의 관사 동쪽에 연못이 있는데, 혹은 정자도 짓고 혹은 다락도 지어서 세워졌다 허물어졌다, 흥했다 폐하였다 하여 그 유래가 매우 오래이다. 지금은 막히고 답답하며 기울고 무너져서 사람이 거처할 수 없다. 여강(驪江) 민효열(閔孝悅) 선생이 명부(明府)가 되었는데, 정사가 이루어지고 여가가 많으므로, 이것을 민망하게 여겨 그 옛것을 회복하려 하였다. 장인에게 명하여 재목을 모으게 하고, 모두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서 일곱 달이 지난 뒤에 완성되었는데, 영(楹)이 셋이요 보동(補棟)이 20여 개나 되었다. 옛 못을 넓히고 또 그 북쪽을 파니, 누대(樓臺)가 이제는 완연히 못 가운데에 있게 되었다. 제도가 굉장하고 단청이 또 선명하며, 섬이 둘러 있고 꽃과 풀이 그윽하니, 이 못에 정자와 누각이 있은 이래로 일찍이 없던 바이다.
공사하는 시일이 오래 걸리지 않고 역사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서도, 능히 옛 물건을 회복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청하건대, 기(記)를 지어서 뒤에 남기라.’ 하였다. 옛날 전성안(全成安)이 이 정자를 지었을 때에, 목은(牧隱)이 일찍이 기를 지었으니 나 같은 자가 어찌 그 뒤를 이을 수가 있겠는가. 대개 물건의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운수가 있고, 일의 흥하고 폐하는 것이 때가 있어 이루워짐으로 인하여 허물어지고 폐하여짐으로 인하여 일어나서 돌고 돌아 끝이 없다. 그 정자가 되고 누각이 되며 완성되고 무너지며 흥하고 폐하는 것이, 어느 것인들 물건과 일이 합하고 운수와 때가 서로 합한 것이 아닌가. 선생은 세상에 처하는 것이 항상 담박하고, 정치를 하는 것이 또한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것을 힘쓰고, 헛되게 꾸미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정자가 없어진 것을 가장 민망하게 여기어, 옛것을 회복하여 더 크게 만들고서야 그만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건이 허물어지면 마땅히 이루워질 운수가 있고, 일이 폐하여지면 흥할 때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선생이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는 것이고, 이 못이 크게 때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내가 비록 용졸하나 또한 기(記)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연꽃을 사랑하는 말과 경치의 아름다운 데는 말이 미칠 겨를이 없다. 목은의, ‘꽃이 피면 수레를 멈추겠다.’는 뜻은, 마침내 그대로 되었는지 내가 뒤에 그곳에 가서 풍경을 눈으로 구경하고 흥취를 푸는 것도, 마침내는 또한 운수와 때에 붙일 뿐이다.” 하였다.
○ 권제(權踶)가 지은 서(序)에, “갑오(甲午)년 봄에 내가 지금 부사(府使) 조극관(趙克寬), 사인(舍人) 권극화(權克和), 장흥 부사(長興府使) 김돈(金墩)공과 더불어 과거에 떨어지고 [下䌡闈]남방으로 놀러 나와, 여기에 이르러 이 정자 위에 앉았다. 내가 정자의 좋은 경개를 즐거워하여 아름다운 정취를 한껏 말하고 싶어 이르기를, ‘뒷날에 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눈이 펄펄 날리며 밝은 달이 발[簾]에 들어오고 연꽃 향기가 자리에 가득한 그 때를 당하여, 내가 한 지방을 맡아 있으면서 두세 사람과 더불어 이 정자 위에서 휘파람 불고 읊으면, 또한 족히 오늘의 초라한 걸음에 대한 갚음이 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말이 어찌 그렇게도 이치에 맞지 않는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눈이 날리지 않을 것이요,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다. 연꽃 향기가 또 어찌 눈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하니 나 또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뒤에 제공은 모두 높은 과거에 뽑히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나도 또한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서 제공의 뒤에 끼게 되었는데 혹 때로 모이어 이야기하다 보면 반드시 말이 이 일에 미치게 되어 서로 매양 크게 웃었다. 금년 봄에 나는 외람하게 성은(聖恩)을 입어서 감사(監司)가 되었는데, 조공(趙公)이 와서 전송하며 술잔을 잡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수주(水州)의 눈 가운데 연꽃을 이제야 구경할 수 있겠네.’ 하고, 서로 웃었다. 두어 달이 못 되어 공은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있다가, 나와서 이곳의 부사(府使)가 되었다. 수레에 내린 지 3일 만에 내가 와서 순시하자, 예를 마치고 정자 위에 나가 앉으매 공이 들어와 뵙는데, 마침 연꽃이 성하게 피었다. 돌아보고 서로 눈짓하며 말하지 않고 웃었다. 아, 바야흐로 과거에 낙방하여[點額龍門]하여 근심스럽고 울울한 심정으로,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을 데리고 나그네의 피곤하고 초라한 행색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상상할 수 있는데, 어찌 다시 공이 조관(朝官) 중의 높은 물망으로 특별히 은명(恩命)을 받아, 붉은 깃발과 검은 일산으로 이 부사가 될 줄을 알았겠는가. 또 어찌 내가 고루하고 외람하고 세쇄한 자질로, 감사가 되어 관찰하여 출척(黜陟)의 권리를 전임하여, 다시 공을 여기에서 만날 것을 알았으랴.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귀신과 함께 어울려서 우리들의 궁한 것을 불쌍히 여기어, 가만히 시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던가. 그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또한 반드시 가만히 시키어, 짐짓 우습게 만들어서 오래되어도 잊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치에 어긋나는 그 말이 실제로 징험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설문우(薛文遇)의 시(詩)에, “연잎은 베개 맡의 빗소리에 요란히 울고, 버들개지는 발을 걷어치는 바람에 가볍게 날린다. 귀양살이 간 곳마다 강산이 좋으니, 만사는 모두 말 잃은 첨지[失馬翁] 그대로다.” 하였다.
○ 권람(權擥)의 시에, “수주(水州)에서 일찍이 연꽃 못을 구경했더니, 당일의 풍경이 꿈속에 들어오네. 두어 이랑 연꽃은 붉어서 선명하고, 몇 가지 버들은 푸르러 늘어졌네. 연못은 새 집으로 인하여 더욱 값을 더하고, 땅은 어진 부사를 기다려 다시 한 때에 빛이 난다. 엄친을 모셔 놀음 다시 얻기 어려우니, 머리를 돌이키매 부질없이 백년의 슬픔이로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일찍이 듣거니 산간(山簡)이 못에서 놀기를 좋아하였단다. 이제 새 못을 보니 내 흥취가 일어난다. 바람은 연꽃을 흔들어 향기 멀리 퍼지고, 연기는 버들 숲에 끼어 푸른 빛 낮추어 나직이 늘어졌다. 그윽한 회포는 번화한 땅을 저버리지 않겠건만, 장한 뜻은 어찌 늘그막에 어기어졌고, 곳곳의 누대(樓臺)에서 세월을 보내니, 가을이 온다고 어찌 송옥(宋玉)의 슬픔을 배우랴.”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부의 서쪽 3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장족역(長足驛) 부의 동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동화역(同化驛) 부의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다. 청호역(菁好驛) 부의 동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도산원(島山院) 부의 동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사원(蛇院) 부의 남쪽 13리 되는 곳에 있다. 대제원(大梯院) 부의 남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불우】 만의사(萬義寺) 무봉산(舞鳳山)에 있다.
○ 신우(辛禑) 때에 우리 태조(太祖)가 의주(義州)로부터 의거(義擧)를 일으켜 회군할 때에, 중 신조(神照)가 휘하에 있으면서 큰 계책을 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특별히 공패(功牌)를 주어서, 이 절을 맡게 하고 인하여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법손(法孫)에게 전하게 하였다.
창성사(彰聖寺) 광교산(光敎山)에 있다.
○ 이색(李穡)이 지은 고려 중 천희(千熙)의 비명이 있다.
반룡사(盤龍寺) 객사(客舍)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여단(勵壇) 부 북쪽에 있다.
【총묘】 최상저(崔尙翥)의 묘(墓) 홍법산(弘法山)에 있다. 덕원군(德源君)의 묘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적】 정송폐현(貞松廢縣)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 송산(松山)부곡(部曲)이다. 광덕폐현(廣德廢縣)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위의 두 현은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포내부곡(浦內彌部曲)ㆍ육내부곡(陸內彌部曲) 모두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쟁홀(爭忽)부곡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제촌(堤村)부곡 부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청구(靑丘)부곡ㆍ사량(沙梁)부곡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공촌(公村)부고 부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주석향(柱石鄕) 부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분촌향(盆村鄕)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공이향(工二鄕)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사정처(奢井處) 부 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다. 금음촌처(今音村處)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양간처(楊干處)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본래는 인주(仁州)에 속하여 있었는데, 우리 태종(太宗) 18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삼봉처(三峯處) 부 서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고등촌처(高等村處) 부 북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심곡처(深谷處) 부 서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유제처(楡梯處) 부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오타장(五朶莊) 부 남쪽 65리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영신현(永新縣)을 일명 오타(五朶)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영신은 지금 진위현(振威縣)에 속하였다. 종덕장(宗德莊)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신영장(新永莊)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는 양성(陽城)에 속하여 있었는데, 우리 태조 7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명환】 고려 김흥조(金興祖) 부사가 되어서 치적(治績)이 매우 드러났다. 윤승해(尹承解) 판관이 되었었다. 그보다 전에는 고을을 다스리는 자 중 청렴한 사람이 적어서 정치도 모두 해이해졌는데, 승해가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꺼리어,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신안지(愼安之) 송(宋) 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인데, 아비 수(脩)가 문종(文宗) 때에 바다의 배를 따라왔다. 안지(安之)는 예종(睿宗) 때에 벼슬하여, 나와서 지수주사(知水州事)가 되었다. 정사를 하는 것이 청렴하고 엄숙하여,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편안하였다. 전신(全信) 부사가 되었었는데 갈려간 뒤에 백성들이 오래도록 생각하였다. 이성(李晟)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정순(金正純) 예종(睿宗) 때에 지주(知州)가 되었는데, 본래 행정의 사무에는 익지 못하여 장부와 문서에 관한 것으로, 개의(介意)하지 않고 다만 대체만 살폈으나 실무가 잘못됨이 없었다. 이윤수(李允綏) 명종(明宗) 때의 지주사(知州事)이다.
본조 맹사성(孟思誠) 판관(判官)이 되었었다. 이예손(李禮孫) 부사가 되었다.
『신증』 문근(文瑾)ㆍ권복(權福) 모두 부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최자성(崔滋盛) 과거에 올라 인종(仁宗) 때에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고, 개부의 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하였다. 여러 번 글을 올려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효자】 고려 최누백(崔婁伯) 본래 부의 아전이다. 그의 아비 상저(尙翥)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하였다. 누백이 그때에 나이 15세로 호랑이를 잡으려 하자 어미가 말렸다. 누백은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고, 곧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추적하니, 호랑이는 먹고 나서 배가 불러 누워 있었다. 누백이 곧 앞으로 다가가서 꾸짖기를, “너는 우리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나는 너를 먹어야겠다.” 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곧 찍어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고기를 꺼내어 그릇에 담아서,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지내고 드디어 시묘(侍墓) 살이를 하였다. 하루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그 아버지가 와서 시를 읊기를, “덤불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은 느낌이 많고 눈물은 그지없다. 흙을 져다가 날마다 무덤 위에 더하니, 그것을 아는 이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로다.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무덤에서 지키니, 누가 효도가 시종(始終)이 없다 말하랴.” 하였다. 뒤에 누백이 과거에 올라 벼슬이 기거사인(起居舍人)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신증』 본조 최세호(崔世湖) 어머니가 오래 병들어 앓자 다리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렸더니 곧 나았다. 지금 임금 9년에 정려(旌閭)하였다.
한몽송(韓蒙松)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잡다가 아버지가 빠져 죽자, 몽송이 물에 뛰어들어 시체를 안고 나왔다. 지금 임금 2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해근어만반(海近魚滿盤) 이색(李穡)의 시에, “산이 깊으니 솔에는 연기가 뜨고, 바다가 가까우니 생선이 소반에 가득하다. 촌 송아지는 언덕 머리에 누워 있고, 들 사람은 머리에 갓이 없다.” 하였다. 누하하화만수개(樓下荷花滿水開)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누 밑에 연꽃이 물에 가득히 피었으니, 수성(隋城)의 6월은 정말 아름답구나.” 하였다. 천년벽루흥망구(千年壁壘興亡久)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연못을 낀 높은 누각은 묻노니 누가 지었느냐. 내가 등림(登臨)한 것이 마침 늦게 갠 때 뜰 아래는 의관(衣冠)을 갖춘 아전이 모이고, 길 옆에는 붉은 단장한 기생이 영접하구나. 천년의 성벽은 흥망이 오래이고, 만가구의 뽕나무와 삼은 정치가 태평이로다. 가장 한스럽구나. 목은(牧隱)이 일찍이 지은 기(記)가 있었는데, 옛 현판에 티끌이 끼어서 글자가 분명하지 않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치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중종(中宗) 30년에 복구(復舊)하였다 선조(宣祖) 35년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별중영장(別中營將)을 겸하였다. 숙종(肅宗) 13년에 총계좌영장(摠戒左營將)을 겸하도록 고치었다. 정종(正宗) 16년에 진(鎭)을 남양(南陽)으로 옮겼다. 정종 13년 부(府)의 화산(華山)에 있는 현륭원(縣隆院)으로 옮겼다 즉 옛 치소(治所)이다. 치소를 팔달산(八達山) 동쪽으로 옮겼다 광주(廣州)의 일용(日用)ㆍ송동(松洞) 두 면(面)을 내속(來屬)시겼다. 17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사도(四都) 중의 하나이다.
【관원】 유수(留守) 계축년에 장용외사(壯勇外使)를 겸하였다. 임술년에 총리사(摠理使)를 겸하도록 고치었다. 판관 화령전령(華寧殿令)과 관성장(管城將)ㆍ총리관(摠理官)을 겸하였다. 검률(檢律)ㆍ의학(醫學) 각 1인.
【토산】 쑥[艾]ㆍ감[枾] 면(綿)ㆍ마(麻)ㆍ저(楮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ㆍ칠(漆) 등은 전혀 없다.
【성지】 부성(府城) 정종 18년에 둘레 4천 6백 보(步)의 성을 쌓았다. 치성(雉城)이 여덟인데 남은 팔달문(八達門), 북은 장안문(長安門), 동은 창룡문(蒼龍門), 서는 서화문(西華門)이라고 한다. 동ㆍ서ㆍ남ㆍ북에 암문(暗門)이 있고 남ㆍ북에 수문(水門)이 있다. 성 둘레에 여러 모양의 누대가 거리를 굽어보고 있는데, 모두 25개 소이다. 독성산성(禿城山城) 남쪽으로 30리이다. 선조 25년에 고성(古城)을 쌓았다. 정종 20년에 둘레 1천 8백 보(步)로 개축하였으며 문이 넷이다. ○ 중군(中軍)이 독성 파총(把摠)을 겸하였다. 별장 1명, 유진장(留鎭將) 1명이다. ○ 선조 35년에 부사(府使) 변응성(邊應星)이 쌓았다. 구읍성(舊邑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는 4천 35보이다. 지금은 건릉(建陵)의 국내(局內)에 들어 있다.
【산천】 건달산(建達山) 서남(西南) 30리. 안산(案山) 부의 동성(東城)에 있다.
【궁실】 행궁(行宮) 성 안에 있다.
【누정】 영화정(迎華亭) 장안문(長安門) 북쪽 3리이다. 유수(留守)가 여기서 교체한다. 항미정(杭眉亭) 서둔제(西屯堤)의 서쪽 연안이다.
【역참】 영화도(迎華道) 장안문 밖이다. ○ 찰방(察訪) 1명, 총리척후장(摠理斥堠將)이 겸한다. ○ 속역(屬驛) 11인.
【진도】 계두진(鷄頭津) 남쪽으로 80리인데, 아산(牙山)으로 통한다. 이포진(里浦津) 남쪽으로 70리이며 평택(平澤)으로 통한다. 당포진(堂浦津) 남쪽으로 90리이며 아산으로 통한다. 대진(大津) 서남쪽으로 1백 리이며 넓이가 10여 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중류(中流)에 영옹암(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
【교량】 대황교(大皇橋) 남쪽으로 15리이며 건릉(建陵)의 영내이다. 오목천교(梧木川橋) 대황교 동쪽에 있으며 남쪽 큰 길로 통한다.
창고 창(倉) 4, 고(庫) 23 성 안에 있다. 삼창(三倉) 용주사(龍珠寺). 사창(四倉)ㆍ오창(五倉) 산성(山城). 칠창(七倉) 청룡(靑龍). 육창(六倉) 상홀. 팔창(八倉) 공향(貢鄕). 구창(九倉) 우정(雨井).
【목장】 홍원곶장(洪原串場) 서남쪽으로 80리이다.
○ 감목관(監牧官) 양야곶장(陽也串場) 서남쪽으로 70리이다.
【사원】 궐리사(闕里祠) 지평(芝坪)에 있다. 정종(正宗) 계축년에 옮겨 짓고, 어필(御筆)의 액판(額板)을 걸었다. 공자(孔子) 영정(影幀).
○ 매곡서원(梅谷書院) 숙종(肅宗) 갑술년에 짓고, 을해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송시열(宋時烈). 경도(京都)의 문묘 편에 보라.
○ 명고서원(明皐書院) 서쪽 20리 송동(松洞)에 있다. 현종(顯宗) 신축년에 짓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익(趙翼) 자(字)는 비경(飛卿)이고 호는 포저(浦渚)이며 풍양(豐壤)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복양(趙復陽) 자는 중초(仲初)이며 조익의 아들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 전문형(典文衡)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지겸(趙持謙) 자는 광보(光甫)이고 호는 우재(迂齋)이며 조복양의 아들이다. 벼슬은 부제학이었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능원 건릉(建陵) 화산(花山)의 남쪽인데, 정종대왕(正宗大王)의 능이며, 기신(忌辰)은 6월 20일이고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부장하였는데 기신은 3월 9일이다.
○ 영(令)ㆍ참봉(參奉) 각 1인.
현륭원(顯隆園) 영조 38년에 양주(陽州)의 배봉(拜峯)에 장사하고, 호를 격은묘(擊恩墓)라 하였는데, 정종 병신년에 영유원(永裕園)이라는 호를 드리고, 기유년에 이곳으로 원(園)을 옮기면서 지금의 호를 드렸다. 장헌세자원(莊獻世子園)인데 기신(忌辰)은 5월 21일이다. 혜빈(惠嬪) 홍씨(洪氏)을 부장하였는데 기신은 12월 23일이다.
○ 영(令)과 참봉(叅奉)이 각 1인.

묘전 화녕전(華寧殿) 정종대왕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생일과 사망일 두 번 제사하는데, 제사하는 의식은 영희전(永禧殿)과 같다.
【관원】 영 2명 1명은 판관이 겸한다. 위장(衛將) 2명 1명은 중군(中軍)이 겸한다. 수문장 2명 본부(本府)에서 파견한다.


 

[주D-001]명부(明府) : 원래는 밝은 원님이란 말인데, 그 원님을 대하여 말할 적에 상대편을 칭찬하여서 쓰는 말이다.
[주D-002]과거에 떨어지고 : 예위의 위(闈)라는 말은 과거 보이는 장소라는 말이다. 원래 과거를 예조(禮曹)에서 맡아 있으므로 예위(禮闈)라고 쓴다.
[주D-003]과거에 낙방 : 용문(龍門)은 황하(黃河)가 산간 지대에서 평야 지대로 나오는 곳인데, 수세가 매우 험난하다. 잉어가 이 용문을 지나 올라가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용되는 문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한다. 여기 점액용문(點額龍門)이란 말은 겨우 그 용문에 가서, 이마만 대어보고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말이니, 과거를 보기만 하고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4]산간(山簡)이……좋아하였단다 : 산간(山簡)은 진 나라 사람인데, 양양(襄陽) 땅에 살면서 못가에서 노는 것과, 술 마시기를 좋아하기로 유명하였다.

 

 

 

 

 

 

 

 

 

 

 

 

 

 

 

 

 

 

 

 

 

 

 

 

 

***홰대기곶(괴태길곶, 평택 해군2함대 사령부...원효대사 해골 물을 마신 수도사 터)

 

 

***당진 송악 한진나루(대진).../// 

 

 

 

 

 

 

 

 

  

 

 

 

 

 

 

 

 

 

 

 

 

 

 

 

 

 

 

 

 

 

 

 

 

 

 

< 大津-平澤港 > ---吾心竹 詩 //



파란물 부딪치는   저기가  밀머리라

비류왕 海濱古都   온조왕  大豆山城 

牛頭坪 너른 들판   槥郡의  可里渚라


脇呑嶺 곧장 질러   홰곶이 올라서니

唐項城 세대박이   羅唐船  오고가고

百濟倉 修築하여   唐稤館  懸板거네


泗泌城  떨어진 꽃   白馬江 흐르는데

周留城  劍歌소리   漁夫의 노래소리

어느 뉘  해골바가지 물  시원타 말했느뇨


防潮堤  막힌 곳에   숭어 떼  뛰노나니

그리운  慰禮古城   보고픈  님의 얼굴

뿌우웅  뱃고동소리  山東가는  카페리호


< 오심죽...大津...평택항에서...2009. 9. 21 >

 

**주(註) :

 

 1) 대진(大津)-옛 외야곶(外也串,吾也串, 왜곶이)--신라~당나라의

    공도(貢道)의 중심 항구. 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평택항.

 2) 밀머리-충남 아산시 밀두리...

    밀물(썰물)의 머리란 순 우릿말>밀두(密頭).

 3) 해빈고도(海濱古都)-비류왕이 세운 국가로 미추홀(彌鄒忽)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를 말함

 4) 대두산성(大豆山城)-백제 온조왕 27년(AD 9년) 축성-<삼국사기>

    大頭山城=大豆山城(多勿城)>섶머리성=薪城山城>靈仁山城(평택성)

    *섶머리-삼각주처럼 생긴 지형. 일명 섬머리를 한자로 표현함.

 5) 우두평(牛頭坪)-당진군 면천면 삽교천 유역의 평야를 말함.

    ...지금의 우강면, 신평면, 합덕읍 일대

 6) 혜군 가리저(槥郡 可里渚)--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백제 때 이름  (예) 금마저(金馬渚)--전북 익산의 백제시대 이름.

 7) 협탄령(脇呑嶺)--지금의 엽돈령, 엽전재...입장~진천간 고개 이름.

    ...안성 서운산 청룡사~입장 양대리 부소산(扶蘇山)에 걸쳐 있슴.

 8) 홰곶이-일명 홰대기곶>괴태길곶(槐台吉串)

    -횃불(봉화)를 올리던 곶이란 뜻 /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

 9) 당항성(黨(唐)項城)--<당나라로 가는 길목의 성>으로

    아산만~덕적도 사이 긴 해협(海峽)의 해안선을 통칭하여 말함.

10) 세대박이--주로 大洋을 항해하던 범선. 古代 돛대를 3개 세운 배.

11) 나당선(羅唐船)-신라, 당나라 배.

12) 당숙관(唐稤館)-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동쪽에 당관(唐館)을

    설치함.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인근의 차성(車城) 역시 唐館을

    두었을 것으로 사료됨.(대진만호-大津萬戶)

13) 사비성(泗泌城)-부여읍 쌍북리(雙北里)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14) 주류성(周留城)-백제부흥군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이

    이끄는 백제 최후의 항전지...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로 추정함.

15) 위례고성(慰禮古城)-백제초도 직산 위례성(BC18~6,13년간)

    백제 온조대왕이 세운 도읍지. 입장 호당리~북면 운용리에 있슴.

16) 산동(山東)-중국의 산동 반도.    

 

 

<脇呑嶺-협탄령>---吾心竹 詩 //



今勿奴  都堂山城  보름달  외로운데

人跡은  간곳없고  文案山  다가서네

산 넘어  曲澗里요  물 건너  大門里라


돌고개  장터마당   숯 지게  가득한데

西戍院  느티나무   幾百年  살았고야

찬 이슬  그대론데   잎새만  피고 지고


左城山  여기더냐   慰禮城  저기더냐

脇呑嶺  五十里 길   저녁 놀  비끼는데 

素沙伐  오리 기러기  북녘하늘  맴을도네


漢川邊  황톳길엔   古人들  뵈질 않고

청룡사  오색구름   별빛 속  잠기나니

해골 물  큰 깨우침을  한 잔 술  달래이네


< 오심죽...협탄령(엽전재, 진천~입장)을 넘으며...2009.11. 4 >

 


*** <협탄령 詩>--주(注)---

 

1. 금물노(今勿奴) : 금물노(今勿奴:거물라)...흑성(黑城)-단재 신채호 //

충북 진천군(鎭川郡)의 고려시대 이름은 진주(鎭州), 통일신라시대 이름은 흑양군(黑壤郡), 고구려시대 지명은 금물노군(今勿奴郡). 여기서 ‘흑양(黑壤) = 금물노(今勿奴)’라는 등식(等式)이 형성된다.

‘흑양’이란 ‘검은 평야’를 말한다. ‘금물’이란 ‘검을(검은)’의 옛말이다.

한편 ‘노’란 ‘들판’을 가리키는 고구려말이다. 따라서 ‘흑양 = 검은 들판’이라는 등식이 입증되는 동시에, ‘들판’이란 뜻의 고구려말 ‘노(野)’와, ‘들판’이란 뜻의 일본말 ‘노(野·の)’가, 어김없는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임도 여기서 밝혀진다.   [출처-이영희 교수의 고대 철강사]


2. 도당산성(都堂山城, 都唐山城...一名 : 徒幢(郎幢)山城-화랑, 渡唐山城)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도당산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 석축 산성의 둘레는  824m.

진천읍에서 서남쪽 1km 떨어진 해발 약 200m의 도당산(都堂山)의 정상에 축성된 산성이다.

진천 도당산성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설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하룻만에 산성을 축성했다고 전해지며, 당나라 소정방이 함께 주둔하면서 고구려군을 막았다고도 전해진다.


3. 문안산성 [文案山城]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앞쪽에는 봉화산(소을산) 봉수대가 있다.

진천읍에 있는 해발 420m의 문안산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이다. 문안산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축성되었으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산성을 축성하였다. 지금은 미군부대가 위치함.


4. 곡간리(曲澗,曲干)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곡간리.

마을이 산속 깊이 있어서 개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는데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할 당시

이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 곡간이었다 한다. 곳간(곡식창고) = 곡간(曲澗), 곡대라고도 부른다.


5. 대문리(大門里) :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동네가 서쪽으로 만뢰산을 등지고 산 계곡에 산재(散在) 위치하여 숨은골이라 하였다. 옛날 군사 훈련을 할 당시 물을 가두었다가 이용하는 수문(水門) 이 있었다하여 수문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대문리는 지형상 직산 위례성 동쪽의 부소산 만뢰지맥에 있으며, 곡간리,군단이, 벼장골의 동쪽 입구.

*다물(多勿)-<復舊土>의 고구려어 / 다(多-ta)-大,對,地 / 물(勿-mor)-水,文,門,美,密,頭.龍(彌),馬,物과 대응함 / 그러므로 대문리의 大門은 <다물계-多勿系>의 지명을 의미함.

<출처-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저>


6. 돌고개(石峴里) :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장대마을을 장터라 한다. 옛날에는 돌고개라 하였다. 물물교환(物物交換) 이 이루어질 때부터 이곳은 소금장으로 유명하다. 충남 아산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충청 내륙지방인 괴산 증평, 음성 등지에서 이곳 돌고개에 와서 소금을 사갔다 한다. 지금도 앞 냇가에 소금소(沼) 라는 곳이 있다. 백곡면 소재지이며 장터이기에 장대(場垈)라 부른다. 옛이름 돌고개라 한 것은 돌이 많아서 돌고개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돌석(石) 고개현(峴) 자를 써서 석현이라 한다.


7. 서술원(西戌院): 진천군 백곡면 서수마을.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름.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陣)을 치고 주둔했던 서수마을이다.

당시는 이곳을 서술원(西戌院)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른다.


8. 좌성산(左城山, 左聖山) : 서운산의 다른 이름으로 좌성사가 있으며,

   백제시대 축성한 산성임. 일명, 서운산성(瑞雲山城).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洪季男)이 북상하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의병을 지휘하여 수축(修築)하였다고 전한다.


9. 위례성(慰禮城,523m)-천안시 입장면~북면의 부소산(扶蘇山)에 있슴.

위례성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한 산성이다. 성내 면적은 5,700평이고, 성채의 길이는 900m에 이른다.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처음으로 도읍지를 삼은 곳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이 건국한지 13년 만에 경기도 광주 한성(漢城) 옮겼다고 전함. 직산 위례성 백제시대(bc18~6년, 13년)

《삼국유사》에는 충남 천안시 직산읍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의 학설에는 이곳 직산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례산성은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에 소용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 산성에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되어 있다.


10. 협탄령(脇呑嶺) : 협탄령>렵둔령>엽둔(돈)령>엽전재로 음훈 변화됨.

천안시 직산읍~입장면~안성 청용사~진천 백곡면~진천읍 도당산성을 잇던 백제와 신라의 교통로.

신라가 백제의 땅을 빼앗고 <백제의 옆구리를 삼켰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 지금은 엽돈재, 엽전재라 부름. 만뢰산이 분기하며, 금북정맥의 주능선 길이며. 백제초도 온조왕의 부소산 위례산성이 있다.


11. 소사벌(素沙伐, 素沙坪 / 안성시 양성면: 사복홀(沙伏忽)-새밝골)

경기도 평택시~안성시~천안시 성환지역의 안성천변(한천,홍경천,안성천)의 넓은 평야지대를 말함.


12. 한천(漢川, 大川)-통칭 소사벌이 있는 안성천을 말하며,

    안성~양성현의 경계 하천임.

아래로 인천(仁川-지금의 충남 아산시 인주면)으로 흐른다고 1872년 직산현, 양성현 고지도에 전함.


13. 청룡사 [靑龍寺]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 다니다가 이곳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14. 해골 물 큰 깨우침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제1차 고구려의 육로를 통한 유학길이 실패하자, 제2차 해로(海路)를 선택, 당나라 유학길(AD661년)에 오른 원효와 의상은 김무력~김서현~김유신장군 가문(家門)이 개척한 신라의 육로를 통해 당항(黨項, 唐項-당나라로 가는 길목)의 지름길인 협탄령(脇呑嶺-백제의 옆구리를 삼키다, 진천~입장. 서운산 엽전재) 대당교역로(對唐交易路)를 따라 안전성이 우선 보장되는 충북 진천 도당산성(都堂(唐)山城, 일명-渡唐山城)~돌고개(백곡면 석현리)~서수원~협탄령~청룡사~입장(안성)~직산(양성)~평택(팽성)~대진(大津.漢津) 평택항 괴태길곶(槐台吉串, 홰대기곶,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의 봉화산 수도사(修道寺)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대오각성하며 다시 협탄령(엽전재)을 거쳐 신라 경주로 되돌아감.


 

 

 < 대진-평택항 유래비 >



위치 :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대진은 일명 큰 나루, 한진(漢津), 한(진)나루, <솔개바위 나루-鳶岩津>라 부르며,

마한 진왕(馬韓 辰王)이 동북 100리를 온조왕에게 봉토(封土)하여

백제 첫도읍지 직산(稷山)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을 세우고(BC18년),

경양군(慶陽君), 하남백(河南伯) 백제개국공신 조성(趙成-직산조씨 시조)이 봉작(封爵) 받은

위례성 서북쪽 해로(海路)의 대중국(對中國), 대외무역(對外貿易)의 요충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 개로왕을 죽이고 (AD475년),

이곳을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수릿골)이라 개칭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은 한성 백제 땅을 빼앗고 신주(新州)를 설치(AD553년),

김무력~김서현~김유신장군 가문(家門)이 백제 의자왕 군대를 격파하며,

<대진>에 대당조공로(對唐朝貢路)를 다시 열었다(AD649년).


대진(大津)은 혜군 가리저(槥郡 可里渚-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동쪽에 백제의 수군창이 있었던 것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평정하고(AD660~663년), 신라에서 <숙(수)관-稤館>을

설치하여 대당, 대외무역의 제일해관(第一海關), 대당 조공로(對唐 朝貢路)로 이용되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2차 당나라 유학길(AD661년)

충북 진천의 도당산성~협탄령(엽둔치, 엽전재)~직산(양성, 안성)~대진나루를 통한 안전행로를 택한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원효대사의 유명한 <해골 물- 대오각성> 설화(說話)의 중심지 역시

홰대기곶(괴태길곶-槐台吉串, 봉화산,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 서남쪽에

염거(廉居, ?~844) 스님이 창건한 사찰 수도사(修道寺)라고 전해지며,

최근 해군사령부 공사를 할 때 불상과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대진> 인근 용성은 신라 경덕왕이 차성(車城)이라 개칭(AD 757년), 당은군(唐恩郡-남양)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 광종7년(AD 965년) 무렵에 용성현(龍城縣)으로 고쳤다.


“대진(大津)은 조선시대 직산현 왜곶이(外也串, 吾也串) 월경지 서쪽 80리에 있으며,

수원도호부 서남쪽으로 1백리, 넓이가 10여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중류(中流)에

임진왜란시 왜군을 물리친 영웅암(英雄岩, 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 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홍성) 면주(沔州-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규장각 <고지도>등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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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을 건너며>--택당 이식 詩

 


 가는 게 이롭다는 점괘가 적중하려는 듯

 

 툭 터진 경치에 막힌 가슴 뚫리더니

 

 새벽빛 밝아 오며 건너는 대진 나루

 

 겹겹이 쌓인 산만 눈에 온통 들어오네

 

 아침 햇빛 쏘아 대자 물고기 화들짝 깊이 숨고

 

 바람도 힘이 없어 운무(雲霧)만 짙게 깔렸어라

 

 저 산 중에 어딘가 남산도 서 있겠지

 

 면수 이 물결도 조종하러 흐르나니

 

 

         <渡大津>


  利往從貞卜    遐觀豁滯胸

 

  平明大津渡    極目衆山重

 

  日射魚龍竄    風微瘴霧濃

 

  終南何處是    沔水亦朝宗  

 


   < 澤堂 李植 詩, 1584~1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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