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1

대진(大津)기행-2...한진나루~영웅암~안섬~고대리항 등대

吾心竹--오심죽-- 2009. 11. 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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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높게 치솟은 바위가 영웅암...임진왜란때 적선을 물리친 바위...대진나루(평택항) 중류에 위치함...// 

  

대진(大津) 서남쪽으로 1백 리이며 넓이가 10여 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중류(中流)에 영옹암(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수원부)

 

 

東岳先生集  卷之 二十三   拾遺錄 下 : 이안눌(1571~1637) 詩

 

이안눌 [, 1571~1637]

 

본관 덕수(). 자 자민(). 호 동악(). 시호 문혜().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 ·호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예조좌랑이 되어 서장관()으로 진하사 정광적()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안동()부사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때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일찍이 특진관으로 있다가 조정의 일에 시비를 가려 극언하여 고관들의 미움을 사 사직했다.  

청나라 사신이 사문()하러 왔을 때 실언()한 일로 인해 북변으로 귀양갔다. 정묘호란 때 용서받아 왕의 피란처인 강화부유수()가 되었다가 형조참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1632년(인조 10) 주청부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추존을 허락받아 원종()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그 공으로 예조판서에 오르고 전장()을 상으로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죽은 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뛰어나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동악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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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原 大津舟中---(수원 대진 배 안에서 / 평택 만호리 대진~송악 대진을 건너는 중)


天啓癸亥七月二十一日己酉。以掃墳呈告。詣闕拜辭而行。

宿果川。庚戌。次水原栗田村舍。辛亥。次設倉。

壬子。渡大津。入沔川鄕墅。


하늘의 계시가 있어 1623년 7월 21일(기유일)

소분(경사 -1623년3월12일 인조반정으로 재임용됨-가 있어 조상께 제사 지내는 일)을 삼가 고하매,

궁궐에 나아가 임금님께 절을하고, 고향 면천으로 향하매, 과천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7월22일 이어 수원의 율촌 객사에,

그 다음날 7월23일 창고를 설치하고, 7월23일 대진(평택항-만호리~신전포 사이)을 건너

면천의 고향 서당(동악서원-당진군 송산면 명산리)에 들어가다.

 

*** 덕수이씨 선산--충남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 산 79-1번지 

 

이행--문헌공은 1478년 5월 22일 연헌공 의무(宜茂)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 청학도인(靑鶴道人), 창택어수(滄澤漁叟),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용재 이행의 증손이 이안눌 //

 

鄕山隔浦對松杉。(향산격포대송삼) - 나루 저편 고향의 소나무 삼나무를 마주보고

雨霽長風送客帆。(운제장풍송객범) - 비 갠 뒤 시원한 바람 범선은 나그네를 띄워 보내구려

畏比游魚簇香餌。(외비유어족향이) - (벼슬 길은) 삼가 비유컨대 맛좋은 미끼에 걸린 물고기 같고

欣同逸驥脫重銜。(흔동일기탈중함) - 천리마 타고 달리듯 자유로운 몸에 재갈을 물리는구나

紅塵紫陌黃金帶。(홍진자맥황금대) - 도성의 황금관대 세속의 홍진(티끌)같고

碧樹蒼崖白罽衫。(벽수창애백계삼) - 푸른 나무와 파란 절벽에 하얀 융단 적삼이 걸린꼴이구나

向午篙工賀利涉。(향오고공하리섭) - 정오를 향해 뱃사공 축하(벼슬길)소리 들으며 건너는데

艫頭已過令公巖。(노두이과영공암) - 뱃머리는 이미 (대진)중류의 영공암(영웅암)을 지나는구려

 

大津。乃我東邦津渡中第一險處也。有一大巖。屹立中流。

名曰海神令公巖。彼此來往之船。若過此岩。例得無虞云


 대진-우리나라 건너는 나루중 제일험한 곳이라. 커대란 바위있는데,

대진 건너는 중 서해바다 중류에 우뚝 솟아(100척), 이름을 바다의 신 영공암이라 한다.

이쪽저쪽을 왕래하는 배들은 이 바위를 지날 때에

근심 걱정없이 무사히 건너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건너는 관례가 있다.

 

---오심죽 拙譯---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제2권    시(詩)...이식 [李植, 1584~1647] 

 

 

 영공암(令公巖) 면천(沔川) 의 대진(大津) 가운데에 있다. 

 


令公巖乃在大津之中央         海濤日夜聲澎浪

 屹然不移亦不僵               嗟乎峙質堅且强

 有如大人特立扶天綱           舟人敬之報馨香

 呼以令公名固當               君不見緋袍錦韉塞康莊      

 行人辟易分兩傍               誰能考實以名償  

 紛紛金銀銅鐵木石納官以爲常   或縛草偸捕熊狼 

 此等令公不可量               但使天爵日耗公廩瘡

 嗚呼安得喚起郭汾陽           二十四考中書堂

 削平胡羯安黔蒼


영공암은 바로 대진 한복판에 있는 바위

파도가 밤낮으로 소리내며 부서지나

꼼짝 않고 끄떡없이 서 있는 모습

아산의 바탕 굳세고 강함이여

대인이 우뚝 서서 하늘을 떠받치는 듯

뱃사람들 공경하여 제사 올리며

영공의 이름 붙인 것도 당연하다 하리로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홍색 관복에 비단 안장 길거리 메우고 행차할 때

길 옆으로 썰물처럼 물러서는 행인들

누가 제대로 실적 따져 영공이란 이름 붙여 줬나

각종 재물 상납을 다반사로 여기면서

간혹 강도와 도적 붙잡아내기도 한다마는

이와 같은 영공의 역량 헤아릴 수 없는 속에

천작은 날로 마모되고 공름은 엉망되게 할 뿐

아 어떡하면 곽 분양 불러내어

중서당에 앉아 스물네 번 고과(考課)하며

오랑캐 평정하고 민생 안정시킬꼬


[주D-001]영공 : 보통 방백(方伯)을 영공이라고 불렀다.

[주D-002]어떡하면 …… 안정시킬꼬 : 곽 분양은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당(唐) 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로, 곽 영공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가 그의 한몸에 달려 있었는데, 그가 오래도록 중서령(中書令)으로 재직하면서 무려 스물네 번이나 인사 고과를 매기는 등 천하에 위세를 부렸는데도 조정이 시기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郭子儀傳》

 

***대동여지도---영웅암 // 

 

***광여도-수원부 영옹암 // 

 

 택당선생 속집(澤堂先生續集) 제 2권  시(詩)...이식 [李植, 1584~1647]

 


 渡大津 (도대진) - 대진(大津)을 건너며

 


 利往從貞卜 (이왕종정복) - 가는 게 이롭다는 점괘가 적중하려는 듯

 遐觀豁滯胸 (하관활체흉) - 툭 터진 경치에 막힌 가슴 뚫리더니

 平明大津渡 (평명대진도) - 새벽빛 밝아 오며 건너는 대진 나루

 極目衆山重 (극목중산중) - 겹겹이 싸인 산만 눈에 온통 들어오네

 日射魚龍竄 (일사어룡찬) - 아침 햇빛 쏘아 대자 물고기 화들짝 깊이 숨고

 風微瘴霧濃 (풍미장무농) - 바람도 힘이 없어 운무(雲霧)만 짙게 깔렸어라

 終南何處是 (종남하처시) - 저 산 중에 어딘가 남산도 서 있겠지

 沔水亦朝宗 (면수역조종) - 면수 이 물결도 조종하러 흐르나니


[주D-001]조종(朝宗) : 옛날 제후가 천자를 뵙고 인사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작은 강물이 큰 강물과 합수(合水)한다는 뜻으로, 면수가 한강에 합류되는 것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강한(江漢)이 바다에 조종(朝宗)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식 [李植,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낙향하여 은거한 후 수차례에 걸친 왕의 출사(出仕) 명을 계속 거부하여 1621년(광해군 13)에는 왕명을 어겼다 하여 구속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예조참의·동승부지·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간·대사성·좌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1633년 부제학을 거쳐 대제학과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義州)에서 구치(拘置)되었으나 탈주하여 돌아왔다. 이후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47년(인조 25) 택풍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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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도-영웅암...///

 

***대동방여전도...대진 // 

 

***팔도지도...대진 부근도 //

 

***여지도-영웅암 //

 

 

 

 

 

 

 

 

 

 

 

 

 

 

 

 

 

 

 

 

 

 

 

 

 

 

 

 

 

 

 

 

 

 

 

 

 

 

 

 

 

 

 

 

 

 

 

 

 

 

 

 

 

 

 

 

 

 

 

 

 

 

 

 

 

 

 

 

 

 

 

   ***호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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