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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인주면...영인산성(평택성)>신성산성(薪城山城)>섶머리성(삼각주), 섬머리성>大豆山城>大頭山城...//
***당진군 신성면 맷돌포에서 본 아산의 대두산성...영인산성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아산현(牙山縣)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40리이고, 남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6리,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32리이고, 북쪽으로는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4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 음잠(陰岑)이라고도 했다. 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는 인주(仁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목종(穆宗) 8년에 다시 이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는데, 세조 5년에 현을 줄여서 온양ㆍ평택ㆍ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1년에 복구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燕山君) 을축년에 경기로 이속시켰던 것을 금상 초년에 환원되었다.
【군명】 아술(牙述)ㆍ음봉(陰峯)ㆍ음잠(陰岑)ㆍ인주(仁州)ㆍ영인(寧仁)ㆍ아주(牙州).
【성씨】 본현 이(李)ㆍ강(康)ㆍ백(白)ㆍ전(全)ㆍ유(兪)ㆍ신(申)ㆍ현(玄) 씨가 있고, 장(蔣)ㆍ신(申)ㆍ이(李)ㆍ강(康)ㆍ현(玄)ㆍ유(兪)ㆍ윤(尹) 모두 촌성(村姓)이다. 임(林) 개경(開京). 덕천(德泉) 유(兪)ㆍ이(李)ㆍ안(安)ㆍ강(康).
【형승】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交錯)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른다 정이오(鄭以吾)의 여민루(慮民樓) 기문에 있다.
【산천】 신성산(薪城山) 현 서쪽 5리에 있다. 동림산(桐林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고용산(高勇山) 현 북쪽 12리에 있다. 동심산(東深山) 현 동쪽 5리에 있다. 연암산(鷰巖山) 현 동쪽 29리에 있다. 입암산(笠巖山) 현 서쪽 12리에 있다. 바다 현 서북쪽 15리에 있다. 창정지(倉正池) 현 북쪽 11리에 있다. 장자지(長者池) 현 남쪽 18리에 있다. 대내산진(大迺山津) 현 서쪽 10리에 있다. 경기 안성군(安城郡)에서 발원하여 뭇 지류를 받아들여 이 나루가 되었다. 개포진(介浦津) 현 서쪽 13리에 있다. 시진(市津) 현 북쪽 26리에 있다. 당포(堂浦) 현 북쪽 16리에 있다. 봉화천(烽火川)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전의현(全義縣)에서 발원하여 견포(犬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백옥(白玉) 소암리(所巖里)에서 난다. 옥돌[玉石] 고현(羔峴)에서 난다. 수정(水晶) 불장원리(佛藏院里)에서 난다. 황소어(黃小魚)ㆍ세미어(細尾魚)ㆍ조기[石首魚]ㆍ웅어[葦魚]ㆍ뱅어[白魚]ㆍ새우[鰕]ㆍ산우애뱀[白花蛇]ㆍ숭어[秀魚].
【봉수】 연암산 봉수(鷰巖山烽燧) 남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대학산(大鶴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직산현(稷山縣) 망해산(望海山)과 호응한다.
【학교】 향교 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장시역(長時驛) 현 북쪽 2리에 있다. 불장원(佛藏院) 현 남쪽 6리에 있다. 요로원(要路院) 현 동쪽 22리에 있다. 흥인원(興仁院) 현 북쪽 5리에 있다.
【창고】 공세곶창(貢稅串倉) 현 서쪽 10리에 있다. 본현 및 서산(瑞山)ㆍ한산(韓山)ㆍ연산(連山)ㆍ임천(林川)ㆍ정산(定山)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ㆍ신창(新昌)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전의(全義)ㆍ청양(靑陽)ㆍ이산(尼山)ㆍ대흥(大興)ㆍ석성(石城)ㆍ해미(海美)ㆍ태안(泰安)ㆍ천안(天安)ㆍ비인(庇仁)ㆍ은진(恩津)ㆍ목천(木川)ㆍ면천(沔川)ㆍ연기(燕岐)ㆍ덕산(德山)ㆍ서천(舒川)ㆍ직산(稷山)ㆍ홍산(鴻山)ㆍ부여(扶餘)ㆍ남포(藍浦)ㆍ예산(禮山)ㆍ당진(唐津)ㆍ평택(平澤)ㆍ온양(溫陽)ㆍ청주(淸州)ㆍ문의(文義)ㆍ회덕(懷德)ㆍ진잠(鎭岑)ㆍ옥천(沃川)ㆍ회인(懷仁) 등 여러 고을의 세곡을 이곳에 수납하였다가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가니, 수로의 거리가 무릇 5백리이다. 『신증』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가정(嘉靖) 계미년에 비로소 집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
【불우】 동림사(桐林寺)ㆍ신심사(神心寺)ㆍ축봉사(縮鳳寺)ㆍ보림사(寶林寺)ㆍ현암사(懸巖寺) 모두 동림산에 있다. 동심사(桐深寺)ㆍ연암사(燕巖寺)ㆍ개현사(開現寺)ㆍ용화사(龍華寺) 모두 연암산에 있다. 관서사(觀西寺)ㆍ고정사(高井寺) 모두 고용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동남쪽 5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황촌부곡(黃村部曲) 현 북쪽 15리에 있다. 덕천향(德泉鄕) 현 동쪽 20리에 있다. 불암(佛巖) 동림산 동북쪽 기슭에 있으니, 본현과의 거리는 5리이다. 그 바위가 산봉우리 위에 널려 있는 것이 거의 수리(數里)나 되는데, 가장 큰 것의 형상이 부처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속설에 이르기를, “이 바위로 인하여 수령은 어리석은 미치광이가 되고, 향리(鄕吏)들은 모두 흉악하고 간사하다.”는 것이다. 세조(世祖) 때에, 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이 대신(大臣)의 뜻을 받아 조정에 아뢰어 현(縣)을 감생(減省) 시키고 그 땅을 세 개로 구분하여 온양ㆍ평택ㆍ신창에 붙이고는 그 관사(館舍)와 관전(官田)을 황수신(黃守身)에게 내려주었다. 본읍 사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구(金鉤), 전 청산 현감(淸山縣監) 조규(趙圭) 등의 상언(上言)을 여러 해를 두고 윤허하지 않았는데, 성화(成化) 을유년에 세조가 온양에 거둥하매, 조규 등이 다시 거듭 호소하므로 거가를 따라갔던 종친과 재상 등에게 명하여 현지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드디어 다시 현을 두었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그 바위에 글을 쓰기를, “괴석(怪石)이 신기한 부처를 이루어, 3년 동안에 다섯 원을 갈려 보냈다네. 강 바람이 부끄럼이 있다면, 눈을 몰아쳐 산의 얼굴을 가리우리라.” 하였다. 여민루(慮民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記文)에 “영락(永樂) 을미년 여름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유현(兪顯) 군이 아산지도(牙山地圖)를 받들고 와서 호정공(浩亭公 하륜(河崙))을 뵙고 말하기를, ‘아산은 현(顯)의 외가 고장입니다. 지금의 현감 최후(崔侯) 안정(安正)이 계사년에 비로소 본관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으며, 그 다음해에는 인심이 화열하고 농사 또한 풍등(豐登)하였는지라, 노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재목을 취해 오고 기와를 구어, 객사(客舍)의 최절(催折) 부패한 부분은 이를 바꾸어서 견고 정치(精緻)하게 하고, 무너지고 떨어저 변별할 수 없는 부분은 이를 도식(塗飾)하여 선명하게 하였으며, 또 학당(學堂)을 증설하여 고을 자제들의 과독(課讀)을 권장하였다.’ 하였다. 또 그 다음해에 드디어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객사가 지대가 낮고 제도가 협소하여 여름철을 당하면 찌고 더운 것이 더욱 심하여 빈객(賓客)이나 사신(使臣)이 이르면 그 숨막히고 답답한 정을 발설(發洩)케 할 도리가 없으니, 마땅히 서늘한 누정을 지어 그 마음을 받들어 즐겁게 하고, 그 화기를 인도 발양(發揚)하게 할 것이다. 사신의 화기가 흘러 퍼지는 것이 어찌 우리 현민(縣民)의 복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객사 동쪽으로 나아가서 약간 영(若干楹)의 누정을 기공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즐겨 이에 취역하여 달을 넘지 않아서 낙성을 고하게 되었는데, 바라보기만 하여도 날아가는 듯합니다. 청하건대, ‘이를 이름해 주시고 또 기(記)를 지어 주시어 이 누정을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뜻을 취하여 여민(慮民)이라 이름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유군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최후(崔侯)의 본지(本志)입니다.’ 하였다. 당시 나는 그 객석에 끼어 있었더니, 공이 나에게 그 명명한 의의(意義)를 부연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그 도면을 상고하여 보건대, 아산의 고을 된 것이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交錯) 대치하여 곁으로 둘러싸고, 두 시냇물이 좌우로 둘러 흐르는데, 그 중간에 평야가 길게 뻗쳐 있고, 수목이 울창하게 들어섰으니, 정말 이러한 곳에 누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개 수령의 직책이란 백성과 친근히 하는 것이다. 인(仁)으로써 위로하고 사랑하며, 의(義)로써 베풀고 다스려서 그 업에 안정하여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게 한다면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길은 윗사람의 명령을 공경히 받드는 데 있고, 윗사람의 명령을 공경히 받드는 자는 마땅히 나라의 법을 준수하고 왕인(王人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을 섬기는 데 삼갈 따름이다. 최후는 그 급히 할 바를 알고 있는가. 절(節)을 빌려 백성들의 풍속을 관찰하며, 부절(符節)을 나누어 가지고 임금의 덕화(德化)를 널리 펴는 자가 이 고을에 가서 이 누정에 올라 그 번다한 노고를 잊고 화락하고 광활한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강퍅한 정이 사라지고 화평한 기상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는 곧 그 지역을 지키는 자만의 기쁘고 다행한 일이 아니라, 아전과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누정의 창건이 어찌 백성을 위하는 생각이 아니리요. 나는 생각건대 한 여름에 무섭게 뜨거운 해가 한없이 길 때, 산 빛과 물 기운이 아래위로 잠겨 있고, 맑게 갠 경치와 온화한 바람이 궤석(几席) 사이를 서늘하게 해 주면, 눈에 희열을 느끼고, 마음에 쾌감을 얻을 것이니, 이를 사방에 고루 베풀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번열(煩熱)을 씻고 서로 정신이 통하게 하여 성주(聖主)의 덕화 속에서 고무(鼓舞)하도록 한다면 거의 이 누정을 이름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슬프다. 이 정자에 오르고 내리는 자 그 또한 백성을 생각지 않겠는가. 인하여 유군이 고한 말을 쓰고, 또 최후의 백성을 위하는 심려를 부연하여 그 기를 삼고자 한다.” 하였다. 어라정산성(於羅頂山城) 현 동쪽 21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3백 64척에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수한산성(水漢山城) 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4백 20척에,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앵리산성(鶯里山城) 현 동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6백 55척에 높이는 7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성산성(薪城山城) 그 산마루에 옛성 두 개를 연해서 쌓은 것이 있는데, 그 북쪽 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주위가 4백 80척에 높이는 10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날이 가물면 이곳에 비를 빈다. 그 남쪽 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위가 4백 80척에 높이가 4척인데, 옛날에 평택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우거한 사실이 있어 평택성(平澤城)이라 이름했다.
【명환】 고려 김행도(金行濤) 태조(太祖) 때에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었다. 본조 김시주(金時霔).
【우거】 본조 김구(金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는데, 사람됨이 순후(醇厚)ㆍ근각(謹慤)하여 마음이 한결같았고, 경학(經學)에 정밀하고 널리 통하여 성균관에 있으면서 교훈을 게을리 하지 않은 자는 윤상(尹祥) 이후에는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제영】 읍거흥체갱수우(邑居興替更誰尤)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아산(牙山)은 역시 예로부터 이름 있는 지역으로, 땅이 기름지고 백성 많아 한쪽 지방에서 으뜸 갔던 곳. 풍속의 후박(厚薄)을 어찌 깊이 걱정하며, 시읍의 흥폐를 다시 누구를 원망하랴. 한스럽다 공수(龔遂)ㆍ탁무(卓茂 모두 한 나라 시대의 유명한 지방관)와 같은 태수(太守) 없고 노(魯 공자의 출생국) 나라 추(鄒 맹자의 출생국) 나라에 견줄 만한 문풍(文風)을 보지 못하겠네. 저 객관 수십 영(楹)만이 부질없이 날아들어, 뜬구름같이 지나간 일들이 나의 시름 자아낸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 일동(一東) 처음은 15리, 끝은 35리. 이동(二東)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근남(近南)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원남(遠南)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일서(一西)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서(二西)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삼서(三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북(一北)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이북(二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북(三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5리.
【사원】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워졌고, 정해년에 사액되었다. 이순신(李舜臣)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선조 무술년에 남해(南海) 노량(露梁)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통제사(統制使) 좌의정(左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완(李莞) 자는 열보(悅甫). 이순신의 조카인데 인조 정묘년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순절하였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이봉상(李鳳祥)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으로 청주(淸州)에 보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온양군(溫陽郡)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4년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溫昌)이라 칭호를 고쳤더니, 16년에 이를 다시 나누어 온수현(溫水縣)을 설치하였는데, 세종 24년에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탕정(湯井)ㆍ온수(溫水)ㆍ온창(溫昌)ㆍ온천(溫泉).
【성씨】 본군 정(鄭)ㆍ이(李)ㆍ방(方)ㆍ강(康)이 있으며, 윤(尹) 촌성(村姓)이다.
【산천】 연산(燕山) 군 북쪽 2리에 있는 이 고을 진산(鎭山)이다. 배방산(排方山) 군 동쪽 8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 가장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속칭 과안봉(過雁峯)이라 한다. 서달산(西達山) 군 남쪽 3리에 있다. 송악산(松岳山) 군 남쪽 23리에 있다. 화산(華山) 군 남쪽 11리에 있다. 거차라산(巨次羅山)ㆍ월라산(月羅山) 모두 군 서쪽 7리에 있다. 광덕산(廣德山) 군 서남쪽 13리에 있다. 가문현(佳文峴) 군 남쪽 30리에 있다. 포천(布川) 군 동쪽 7리에 있다. 천안군 풍세동(豐世洞)에서 발원하여 신창현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가리천(加里川) 군 동북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군 서쪽 전족령(全足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가문현에서 나오며, 다른 하나는 군 동쪽 잉읍현(仍邑縣)에서 나오는데, 신창현의 견포로 들어간다. 온천(溫泉) 군 서쪽 7리에 있다.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우리 태조ㆍ세종ㆍ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어실(御室)이 있다. 신정(神井) 임원준(任元濬)의 긴(記)에, “천순(天順) 8년 봄 2월에 우리 주상(主上) 승천체도 열문영무 전하(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께서 남쪽으로 충청도를 순수(巡狩)하시면서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에 거둥하사 혜각존자(慧覺尊者)를 만나 보시고, 그 뒤 3월 초 1일에 온양군의 온탕(溫湯)에 거가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神泉)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고 명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는 눈과 같고, 맑기는 거울 같고, 맛은 달고도 짜릿하고, 성질은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이다.’ 하여, 8도에서 표문[表]을 올려 하례하고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 신정(駐蹕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하였다.
【토산】 옻[漆]ㆍ대추[棗]ㆍ감[枾]ㆍ복령(茯苓).
【성곽】 배방산성(排方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3백 13척에 높이는 13척이며,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대청루(大淸樓)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최린(崔潾)이 중건한 것이다. 이숙함(李淑瑊)이 빙설루(氷雪樓)라 이름을 고치고 지은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시흥역(時興驛) 옛날에는 이흥역(理興驛)이라 호칭하였는데, 군 남쪽 8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에 속역(屬驛)이 일곱 개가 있으니 창덕(昌德)ㆍ일흥(日興)ㆍ급천(汲泉)ㆍ순성(順城)ㆍ흥세(興世)ㆍ장시(長時)ㆍ화천(花川)이다. ○ 승(丞) 1인이 있다. 애원(艾院) 군 동쪽 18리에 있다. 신원(新院) 군 동쪽 2리에 있다. 혹은 태산원(泰山院)이라고도 일컫는다. 망빈원(望賓院) 군 동쪽 13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군 남쪽 24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군 동쪽 7리에 있다. 오산원(烏山院) 군 동쪽 10리에 있다. 임반원(任潘院) 군 동쪽 20리에 있다.
【불우】 과안사(過雁寺)ㆍ기린사(麒麟寺)ㆍ남산사(南山寺) 모두 서달산(西達山)에 있다. 목사(木寺) 배방산(排方山)에 있다. 외암(隈菴)ㆍ현우사(玄雨寺). 중암(中菴)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석암사(石菴寺)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연산(燕山)에 있다. ○ 고려 고종(高宗) 23년에 몽고(蒙古)의 군사가 와서 성읍을 포위하였는데, 아전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의 머리 2급(級)을 베었고,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노획한 군기도 매우 많았다. 왕이 성황신이 음으로 도운 공이 있었다 하여 신호(神號)를 더 봉하였다. 여단 읍 북쪽에 있다.
【고적】 남산(南山) 고려 태조(太祖)가 유검필(庾黔弼)에게 명하여 양정군(陽井郡)에 성을 쌓았다. 이때 후백제의 장수 김훤(金萱)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청주(淸州)를 침공하였다. 하루는 검필이 본군의 남산에 올라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거대한 사람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속히 가서 구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검필이 놀라 깨어 청주로 달려가서 후백제의 군사와 더불어 싸워 격퇴하고, 독기령(禿岐嶺)까지 추격하여 죽이고 잡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개흥부곡(開興部曲) 군 서쪽 14리에 있다. 상곡부곡(上谷部曲) 군 남쪽 13리에 있다. 목촌부곡(木村部曲) 군 동쪽 10리에 있다. 박산부곡(朴山部曲) 군 남쪽 12리에 있다. 독촌부곡(禿村部曲) 군 북쪽 10리에 있다. 묘산부곡(卯山部曲) 읍 동쪽 20리에 있다.
【명환】 고려 이성(李晟)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감무(監務)에 임명되었다.
【효자】 본조 맹희도(孟希道)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워 표창받았다. 신창현(新昌縣) 인물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제영】 필불영천용(觱沸靈泉湧) 이승손(李承孫)의 시에, “콸콸 영천이 솟아나는 것은, 활활 타는 화덕(火德)이 통함이로다.” 하였다. 교전상운합(郊殿祥雲合) 이숙치(李叔畤)의 시에, “들 밖의 궁전엔 상서로운 구름이 모여 가득하고, 신령한 샘에는 따뜻한 옥류(玉溜)가 맑구나.” 하였다. 행궁비수령(行宮非繡嶺)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이 행궁이 수령궁이 아니거니, 대가(大駕) 임행하신 곳 어찌 저 곤명(昆明) 땅이랴.” 하였다. 봉강토덕형(封疆土德亨)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읍호(邑號)를 올리니 천은(天恩)이 무겁고, 계역을 바로하니 토덕이 형통하는도다.” 하였다. 팔영(八詠) 이숙함(李叔瑊)의 시와 그 서문에, “내가 산수(山叟), 영숙(永叔)과 같이 온천행궁(溫泉行宮)의 직려(直廬)에 입직하고 있으면서 때로 서하(西河)ㆍ고양(高陽)ㆍ언양(彦陽) 등 여러 상공(相公)과 더불어 왕복 수창(酬唱)하며 스스로 그 회포를 풀고 지냈는데, 영숙이 그 사이에 팔경(八景)의 제목을 얻어, 나에게 먼저 고체시(古體詩)를 지으라 요구하여, 장차 화교(和敎)의 장본으로 삼으려 하니, 그야말로 키질해 까부르면 쭉정이와 겨가 먼저 나가는 법이다. 이를 보는 자 그 나의 광참(狂僭)함을 용서하라.” 하였다. 행궁의 상서로운 구름[行殿祥雲] “봄바람에 어가(御駕)가 호서(湖西)에 거둥하사, 온천 이곳에 깊숙히 어연(御輦)을 머무르셨네. 궁전 위에 애애(靄靄)하게 떠오르는 구름송이, 상서의 광채가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든다. 북녘으로 아득하게 봉래궁(蓬萊宮)과 연하여, 성주(聖主)의 효성어린 생각 바라보는 가운데에 있네. 저 구름은 무정한 듯하면서도 도리어 유정한 것이런가. 하물며 다시 비를 주어 전공(田功)을 도움에랴.” 하였다. ○ 임원준(任元濬)의 시에, “바위 위의 꽃과 시냇가의 버들이 연(輦) 길에 비치니, 온천 한 지역에 봄이 길이 머물렀네. 봉가(鳳駕)가 때로 구천(九天)으로 좇아 내려오시니, 아름답고 이상스런 상서가 모두 함께 모여들었어라. 상서로운 구름 욱욱(郁郁)하게 행궁을 뒤덮으니, 현란(絢欄)한 오색 광채 공중에 떠 있어라. 저 구름 흩어졌다 다시 모여 천지와 사방에 은택 줌을 알았노니, 만물이 힘입어 사는 공을 우러러 바라노라.” 하였다. 영천의 서액[靈泉瑞液] 이숙함의 시에, “화룡(火龍)이 길이 땅밑에 굴을 파서, 샘 길을 열어 놓아 맑은 물 솟아나니, 따뜻한 물 신령한 진액이 사람의 질병을 쾌히 다스려, 해묵은 난치(難治)의 병이 저절로 떠난단다. 세 전하[三殿] 욕탕에 하림하사 옥체의 피로 풀어 흩으실 제, 윤활하고 부드러운 약물 마음껏 끼얹으시니 떠오르는 저 물김은 연기가 아니다. 한 번 씻고 나시면 성수(聖壽) 계산하는 수가지[籌] 더 첨가했노라고, 서왕모(西王母)가 보낸 글을 푸른 새[靑鳥]가 전해 온다네.” 하였다. ○ 임원준(任元濬)의 시에, “따뜻하기 끓인 물 같고 맑기도 한없으니, 불덩이 땅속에 묻혀 때로 물이 솟는다네. 고질(痼疾) 낫게 하여 만백성을 구제할 뿐 아니라, 번뇌(煩惱)도 씻어버려 성체(聖體)도 조호(調護)하나니, 구름같이 피어오르고 옥 같은 것 퍼부어서 풀고 흩어버리시니, 화기도 애애(靄靄)하여 상서 연기인 듯하였어라. 남기신 윤택 나누어서 전답에 물을 대면, 여러 해 풍년든 칭송을 서로 전해 들으리라.” 하였다. 천주의 어선 반사[天廚分膳] 이숙함의 시에, “행궁(行宮) 안에 우리 님 주포(廚庖)에는, 바다 진미 가득하고 들나물도 가지가지, 날마다 호종한 신료(臣僚)들에게 반포해 내리시니, 팔진(八珍) 낙역부절(絡繹不絶) 중사(中使)의 발걸음도 수고롭다. 또다시 궁중 항아리의 우로향(雨露香)을 내리시며, 십분(十分) 취하라는 권교까지 있어 취광(醉狂)이 되어서는, 다 같이 이르기를 이 홍은(鴻恩) 갚을 길 없으니, 다만 축원하건대 저 능강(陵岡)같이 오래오래 장수하소서.”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타봉(駝峯 낙타 등에 산봉우리같이 솟은 살덩이. 진미로 일컫는다.) 웅장(熊掌)이 천주(天廚)에 가득하니, 심상한 고기와 소채 어찌 이에 비하랴. 은총 입어 나날이 팔진 진미 내리시니, 감격도 하지만은 도리어 분촌(分寸)의 공 없음이 부끄럽다. 하물며 궁에서 빚은 술 님의 향기 띠었는데, 금술잔에 가득 부으니 이 기쁨 미칠 것만 같구나. 어가 호위하고 돌아갈 기일이 멀지 않건만, 쌍궐(雙闕)을 바라보고자 높은 봉에 올라 본다.” 하였다. 신정에 새긴 빗돌[神井勒石] 이숙함의 시에, “세조 당년에 이곳에 임행하니, 행전(行殿) 뜰 한가운데 신정(神井)이 솟아났다. 호종했던 신하의 그 재예 진정 당대 제일이라, 성덕 칭송한 웅건(雄健)한 그 문사(文詞)를 한 붓으로 휘둘렀다네. 돌에 새긴 그 글자가 이제 벌써 깎이고 떨어져 나갔으니, 20년의 광음이 한 순간임에 놀랐노라. 자성(慈聖)께서 이를 측은히 생각하시고 중건하라 명하시니, 뒷날에 흘러 전하는 건 다시 태사(太史)의 붓대에 빙의(憑依)하리로다.”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살아서 성조(聖祖)를 뵈온 것은 진실로 만행한 일, 호종했던 그 당시에 이 온정(溫井)에 왔었노라. 찬 샘물 홀연히 두 온탕 사이에 솟아올라, 신에게 기록하라 명하시어 거친 문구 붓을 달렸었네. 20년이 채 안 되어 글자 이미 상하였고, 때 옮기고 세사도 변개되니 일순(一瞬) 인생에 함께 놀랐노라. 반짝반짝 한 치의 작은 마음, 다시 챙겨 눈물 뿌리면서 돌 다듬어 거듭 필적 실었노라.” 하였다. 광덕산의 아침 아지랑이[廣德朝嵐] 이숙함의 시에, “남녘을 바라보니 광덕산이 드높이 비꼈는데, 저멀리 새들만이 중천으로 지나는구나. 아침마다 저 아지랑이 뜻이 있어 뜨는 건가. 가늘고 가는 흰 깁[紈] 같기도 하고 다시 비단[綺羅] 같기도 하다. 저 아름다운 산속에 삼라(森羅)한 만상(萬象)을, 짚신 신고 가서 유상(遊賞)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어찌하면 화공(畫工)의 손을 빌려 한 폭의 산수도를 그려서, 그대의 고당(高堂) 흰 벽위에 걸어 줄까.”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첩첩이 반공(半空)에 가로질린 산봉우리 천길이나 높아서, 원숭이도 오르기 어렵고 기러기도 넘기 어려운데, 다만 가벼운 아지랑이 절정(絶頂)을 살짝 덮어, 아침이 오면 분연(紛然)한 풍경 만상이 삼라하다. 그 누가 무상(無像)한 것을 유상(有像)하게 하는고. 볼수록 그의 변태(變態) 그윽히 감상하기에 족하다. 어찌하면 저 연하(煙霞) 속에 사는 승려를 불러서, 함께 지팡이 이끌고 깊숙히 푸른 절벽 위를 탐색해 볼까.” 하였다. 공곶의 봄 조수[貢串春潮] 이숙함의 시에, “호서(湖西)의 큰 바다 물결 어찌 그리 도도(滔滔)한가, 해추(海鰌)가 봄 조수 보내오니 찬 물결이 일어난다. 남쪽 나라 조운(漕運) 배는 많기도 하다. 구름 돛대 만길이 하늘과 함께 높았어라. 해류(海流) 평온하게 하라고 풍백(風伯)을 단속하고, 밤낮을 계교 않고서 용산강(龍山江) 머리로 향해 간다. 만억(萬億) 자(秭)를 수송하여 국고를 높이니 우리의 세상 형편도 이미 서주(西周)와 같음을 깨달았노라.”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긴 강물 밤낮으로 도도하게 흘러, 천리 길, 만리 길을 넓은 파도 속 달려간다. 뇌성을 울리며 눈더미를 몰아치는 듯 기세 어이 그리 장하냐. 평상시에도 놀란 파랑(波浪)이 하늘과 연하여 출렁댄다네. 호서의 이곳은 물결이 평온타고 불리는 곳, 남방의 부세를 이곳에서 서울로 조운해 간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나, 하늘엔 바람 없고 바다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것, 성덕(聖德)의 감화가 어찌 홀로 서주(西周)만이 장하리.” 하였다. 송령의 찬 물결[松嶺寒濤] 이숙함의 시에, “온정(溫井) 서쪽 머리에 자그마한 한 고개, 엉성하게 늘어선 소나무들이 구름 위를 쓸고 있다. 큰 바람 세차게 불면 푸른 물결이 놀란 듯 일어나고, 그늘진 골짜기에서 음향이 생겨나면 나뭇가지들이 맑은 소리 내어 운다. 선계(仙界)의 학(鶴)이 여기 와서 깃들고 있어, 냉랭한 그 울음소리 밤마다 낮은 가지서 난다네. 내 한번 그 소리 타고 가서 진인(眞人)을 찾으련다. 상계(上界 천계(天界))의 관부(官府) 길이 설지 않으리라.”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사방에 산이 싸고 둘러 동문(洞門)은 작은데, 고개 위에 멀리 서 있는 소나무의 모습 정정(亭亭)도 하다. 서늘한 밤 자연의 음향이란 싫지 않은 법, 10리 밖의 파도소리가 나뭇가지에 울린다. 가늘게 흔들리는 섬세한 잎새는 검푸른 구름이 깃들어 있는 듯, 가볍게 흔드는 버성긴 가지에는 차가운 달이 나지막이 걸려 있고, 이내 바람 자고 풍운(風韻)이 처음으로 고요해 질 양이면, 흉금도 쌀랑해져 시몽(詩夢)이 희미하다.” 하였다. 보리 밭 두둑의 이삭 물결[麥隴秀波] 이숙함의 시에, “꽃은 자고 버들도 졸아 봄이 한창인데, 일도 없는 저 포곡새[布穀 뻐꾹새]는 농사에 힘쓰라고 뻐꾹뻐꾹 울어댄다. 가을 보리 구름같이 연하여 이삭 물결 이니, 단비 내려 하룻밤에 푸른 꺼럭이 늘어졌다. 절기 흘러 자리 자리 가을이 또 왔는데, 농부들 먹을 일 생각하고 기쁨이 먼저 가슴에 뛸 것이리. 천만 개의 마을마다 조석 연기 일어나니, 태평스런 민간 풍경 춘대(春臺)에 올라 보는 듯하다.”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밭보리 푸르고 푸르러 생의에 차 있는데, 평지와 산간에 부지런히 지은 것을 농부들은 함께 기뻐한다. 무성한 이삭들 한 대에 두 이삭씩 달렸으니, 높고 낮은 푸른 물결이 몇 겹이나 되던가. 일진(一陣) 화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만경(萬頃)의 누른 구름이 가을을 재촉하네. 우리에게 풍년 줌이 이로부터 시작하리니, 햇무리만으로 어찌 노대(魯臺)를 점치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 동면(東面) 처음은 5리, 끝이 20리. 서면(西面) 끝이 10리. 남군내(南郡內)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남상(南上)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남하(南下)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이북(二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성지】 배방산성(排方山城) 배방산에 있으며 3천 5백 13척이며, 우물이 둘이 있다.
【궁실】 온천행궁 온천에 있으며 여러 임금이 머물고 갔던 곳이다.
[주D-002]자(秭) : 자란 말은 우리 고어(古語)로 천억(千億)이란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신창현 新昌縣
동쪽으로는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26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 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祁梁)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이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본현 서쪽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서 당성(溏城)이라 이름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는 이를 해상으로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수송하였으므로 비로소 만호 겸 감무(萬戶兼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는 감생(減省)하고, 태종 14년에 온수(溫水)와 병합하고 읍호를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굴직(屈直)ㆍ기량(祁梁)ㆍ온창(溫昌).
【성씨】 본현 표(表)ㆍ맹(孟)ㆍ방(方)ㆍ조(趙)가 있으며, 노(盧) 촌성(村姓)이다. 이(李) 역성(驛姓)이다.
【산천】 성산(城山) 현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성당산(禁城堂山) 현 동남쪽 11리에 있다. 마산(馬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도고산(道高山) 현 남쪽 16리에 있다. 또 예산현(禮山縣) 산천에도 나와 있다. 정포도(井浦渡) 현 서쪽 20리에 있으니 즉 장포(獐浦)의 하류이다. 또 예산현 무한천(無限川)이 여기서 합류하여 면천군(沔川郡) 범근내포(犯斤乃浦)로 들어간다. 장포(獐浦) 현 서쪽 15리에 있다. 도고산에서 발원하여 정포도로 들어간다. 차륜탄(車輪灘) 현 동쪽 12리에 있는데, 온양군 가리천(加里川)과 천안군 포천(浦川)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견포(犬浦) 현 북쪽 15리에 있으니 즉 차륜탄의 하류이다. 범근내포로 들어간다.
【토산】 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뱅어[白魚]ㆍ조기[石首魚]ㆍ복령(茯苓).
【누정】 공북정(拱北亭) 객관의 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記]에, “무송(茂松) 윤 상국(尹相國 윤자운(尹子雲))이 거정(居正)에게 말하기를, ‘신창 태수(新昌太守)의 조침(趙琛) 후가 새 정자를 짓고 공북(拱北)이라 편액(扁額)하고는 그 기문을 요구해 왔으니 그대의 말이 있기를 바란다.’ 하였다. 내 추억하건대 병자년 여름에 서원(西原)의 공성(公城)으로부터 이른바 신창이란 땅으로 길을 들어 지나는데, 나의 동년(同年)인 태수 김율(金慄)이 길로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열(酷熱)이었는지라 잠깐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나누면서 이내 그 고을의 대략 형편을 물었더니, 김이 말하기를, ‘이 고을이 지역이 좁고 백성도 적으며 토질이 박하고 산물이 적은데다가 아전들은 교활ㆍ완만하고, 백성 역시 시끄럽고 또 송사를 좋아하는데 반하여 나는 서리고 얼킨 것을 다스리어 부석(剖析) 변별할 만한 재간이 없어, 다만 요동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요, 너그럽게 대할 따름이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생선을 삶을 때와 같이 하라.」 하였으니, 군의 고을 다스리는 방법이 거의 그 대체(大體)를 얻은 것이다. 군의 뒤를 이어 오는 자로 하여금 군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군의 정사를 그대로 실행하게 한다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나의 노정(路程)의 급박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거기서 고별하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 후 몇 해 만에 다시 호남 지방으로 가는데 또 이 길을 지났더니, 태수 윤호(尹壕) 공이 길에 나와서 나를 맞아주고 술잔을 들었는데, 내가 그 고을 다스리는 법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나의 동년 김군과 같았다. 또 나의 갈 길이 바쁘고 역방(歷訪)할 겨를을 얻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기기를, 거정이 이 읍과는 본래의 인연이 없어 그런 것인가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들으니, 조후(趙侯)가 고을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고도 민첩하며, 간소하게 하면서 요령이 있어 그 명령을 번다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업(業)에 충실하고, 백성들에게 빨리 하지 말라 하여도 그들은 즐겨 그 일에 달려와서 관청과 정자가 환연(煥然)하게 일신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정사를 사모하나, 친히 그 읍의 상황을 보지 못한 즉, 김 동년(金同年)ㆍ윤 사문(尹斯文 윤호)과 더불어 일찍이 서로 토론한 말들이 나의 흉중을 왕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조후가 정자를 짓고 무송 윤공의 기문의 부탁이 홀로 나에게 지워지니, 이는 전일 나에게 두 차례 걸친 기망(期望)이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니 감히 즐겨 말하지 않으리요. 나는 생각하기를, 누대나 정자를 세우는 것이란 완상(玩賞)하며 놀기를 일삼으려는 것이 아니요, 곧 왕명을 받들고 온 이를 존경하고 빈객을 잘 접대하며, 울적한 것을 이끌어 풀어버리기 위한 것인데, ‘공북(拱北)’이라 이름한다면 다만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조망(眺望)해 내다보고, 여기서 술 마시며 글 읊는 사람들로 하여금 멀리 궁궐문을 바라보고, 하늘 아래의 장안(長安 서울)을 가리키며, 일찍이 한 그릇의 밥이라 할지라도 임금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한다면, 춘추(春秋)의 왕실(王室)을 존중한 큰 의리를 깊이 얻은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춘추는 선(善)을 높이 선양해 권장하고 악(惡)을 깎아내려 징계한 책으로, 왕실을 존중한자 있으면 이를 썼고, 백성의 일을 소중히 한 자 있으면 이를 썼던 것이다. 조후의 이번 일은 공역에 있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시세(時勢)로 보아서도 과잉한 거조가 아니었고, 왕실을 존중함이 이와 같으니, 춘추의 전례에 있어서도 오히려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이를 찬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요, 나 같은 사람은 사국(史局)의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고 있는 터이니, 비록 쓰려고 하지 않은들 어찌 면하겠는가. 그 산천과 읍터의 형승(形勝)에 있어서는 내 일찍이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으니, 어찌 장황하게 늘어놓으랴. 나의 박전(薄田) 1경(頃 백마지기)이 평택(平澤)에 있는데, 다른 날 혹 은퇴를 원하여 그곳에 돌아가서 휴양한다면, 마땅히 한 번 그 정자 위에 가서 보고 그 말을 다하겠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창덕역(昌德驛) 현 동쪽 3리에 있다. 명암원(鳴巖院) 현 동쪽 11리에 있다. 마장원(馬場院) 현 동쪽 15리에 있다. 용정원(龍頂院) 현 남쪽 15리에 있다. 신례원(新禮院) 현 서쪽 20리에 있다.
【교량】 미륵탄교(彌勒灘橋) 마장원 동쪽에 있다.
【불우】 한량사(閑良寺)ㆍ천일암(千日庵)ㆍ도명사(道明寺)ㆍ원암(元庵)ㆍ석천사(石泉寺)ㆍ불암(佛庵)ㆍ안심사(安心寺) 모두 도고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성(城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2백 13척에 높이는 15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인물】 본조 맹희도(孟希道)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이르렀고,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맹사성(孟思誠)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인데, 고려 신우(辛禑) 때에 과거에 장원하고, 우리 세종 13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평생에 재물과 전택(田宅)을 일삼지 않고, 청백으로 한결같이 절조를 지켰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영규(趙英珪) 태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신증』 표연말(表沿沫)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걸려 멀리 귀양가던 도중에 죽었다. 아들 빙(憑)도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이르렀다. 부자가 모두 문명(文名)이 있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대동(大東)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소동(小東) 처음이 5리, 끝이 8리이다. 대서(大西)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서(小西)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13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성지】 당성(溏城) 장포(獐浦)에 있는데, 이웃 현의 조세(租稅)를 받아 배로 서울로 실어온다.
【교량】 곡교(曲橋) 미륵천(彌勒川)에 있는데 가물면 다리를 놓고, 물이 불면 배로 건너는데 내포 10여 읍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이다.
【토산】 감[枾]ㆍ붕어[鯽魚]ㆍ게[蟹]ㆍ황석어(黃石魚)ㆍ세미어(細尾魚).
***아산 곡교천(曲橋川)...좌 탕정성(배방산성)~망경산~설화산~광덕산의 빼어난 산세...//
***영인산성>신성>섶머리성>대두산성...//
***곡교천에서 본 靈仁山城=薪城=大豆山城=大頭山城 ///
***선우대교(아산시 선장면~합덕 우강면)을 잇는 다리...궁평나루...//
***우평(牛坪, 牛頭坪)...합덕읍 우강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예산현 禮山縣
동쪽으로는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9리이고, 서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북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산(孤山)으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태조(太祖) 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오산(烏山)ㆍ고산(孤山).
【성씨】 본현 신(申)ㆍ손(孫)ㆍ심(沈)ㆍ장(張)이 있으며, 심(沈) 속성(續姓)이다. 화물(化物) 방(方) 문석(文石)과 같다.
【산천】 금오산(金烏山) 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현 남쪽 6리에 있다. 도고산(道高山) 현 북쪽 11리에 있다. 또한 신창현(新昌縣) 산천에도 나와 있다. 무한산(無限山) 현 서쪽 9리에 있다. 소기현(蘇機峴) 현 동북쪽 28리에 있다. 무한천(無限川) 무한산 서쪽에 있는데, 홍주(洪州) 여양천(驪陽川)의 하류이다. 매양 여름철에 물이 벌창하면 큰 뱀이 산에서 나와 냇물에 잠복하여 사람과 가축에 우환을 준다. 호두포(狐頭浦) 현 북쪽 19리에 있는데, 곧 무한천의 하류이다.
【토산】 사기그릇[磁器]ㆍ숭어[秀魚]ㆍ게[蟹]ㆍ웅어[葦魚]ㆍ복령(茯苓).
【학교】 향교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일흥역(日興驛) 현 서쪽 13리에 있다. 무한성원(無限城院) 무한천 냇가에 있다. 고사원(古沙院) 현 동쪽 13리에 있다.
【불우】 향천사(香泉寺)ㆍ안락사(安樂寺)ㆍ관정사(觀正寺) 모두 도고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입석소(立石所) 구명은 문석(文石)이며, 현 동쪽 16리에 있는데, 지금은 대지동촌(大枝洞村)으로 되어 있다. 화물장(化物莊) 현 서쪽 22리에 있는데 지금은 입암촌(立巖村)으로 되어 있다. 무한산성(無限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본조 유문통(柳文通) 현감이 되었었다.
【효자】 본조 김근(金勤)ㆍ이개우(李開右) 모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열녀】 본조 매읍덕(每邑德) 호장(戶長) 장중연(張仲淵)의 딸이다. 나이 23세에 남편이 죽었는데, 무덤 곁에 여막[廬]을 세우고 3년간을 친히 제사하며 소금ㆍ장 등을 먹지 않았다. 뒤에 부모가 그 뜻을 꺾고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죽음으로 스스로 맹세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본래 백제의 고산(孤山)이다 오산(烏山)이라고도 한다. 당(唐)이 마진(馬津)이라 고치고 지심주(支潯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 술곡(述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은 20리. 대지동(大枝洞) 본래는 입석소(立石所)인데,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20리이다. 금평(金坪)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두촌(豆村)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입암(立巖) 본래는 화물장(化物莊)인데,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거구화(巨仇火)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자가산(子加山) 서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오원(吾元)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0리이다.
【성지】 오산성(烏山城) 바로 옛읍의 터인데 지금 치소(治所)에서 서쪽으로 6리에 있다. 평평한 들에서 외롭게 서 있기 때문에 고산(孤山)이라 하며, 오산산성(烏山山城)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2천 2척인데 우물 하나가 있다.
【역참】 북쪽으로 10리에 있는데, 내포(內浦) 11읍에서 서울로 통하는 큰길에 있다.
【토산】 감[枾]ㆍ붕어[鯽魚].
【사원】 덕잠서원(德岑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워졌고, 갑오년에 사액되었다. 김구(金絿)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
동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7리고, 남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현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이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복규(卜奎)가 합단(哈丹)의 군병을 방어한 공로가 있어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시킨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한 것이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혜군(槥郡)ㆍ혜성(槥城) 혜(槥)를 우리나라 속자(俗字)로 추(橻)로 쓰기도 하고, 혹은 유(杻)로 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마산(馬山)ㆍ해종(海宗)ㆍ면주(沔州).
【성씨】 본군 복(卜)ㆍ한(韓)ㆍ현(玄)ㆍ유(兪)ㆍ임(任)ㆍ박(朴)ㆍ정(井)ㆍ서(徐)가 있으며, 유(兪) 촌성(村姓)이다. 구(具) 능성(綾城). 왕(王) 개성(開城). 한(韓)ㆍ김(金)ㆍ박(朴) 모두 역성(驛姓)이다. 한(韓) 부곡성(部曲姓)이다.
【산천】 신암산(申庵山) 군 북쪽 12리에 있다. 다불산(多佛山) 군 서쪽 10리에 있다. 몽산(蒙山) 군 북쪽 4리에 있다. 봉서산(鳳棲山) 군 동쪽 2리에 있다. 마산(馬山) 군 남쪽 8리에 있다. 소이산(所伊山) 군 북쪽 9리에 있다. 창택산(倉宅山) 일명 고산(高山)이라고도 하는데, 창택곶(倉宅串)에 있다. 바다 군 북쪽 45리에 있다. 범근내포(犯斤乃浦) 군 동쪽 27리에 있다. 이곳에 창고가 있어 공주ㆍ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세미(稅米)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漕運)하여 갔었는데 성화(成化)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바닥에 부딪히므로 아산(牙山)의 공세곶(貢稅串)으로 옮겼다. 창택곶(倉宅串) 군 북쪽 35리에 있고, 목장(牧場)이 있다. 벽골지(碧骨池) 군 동쪽에 있다.
【토산】 모시[苧]ㆍ지치[紫草]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석굴[石花]ㆍ조기[石首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새우[蝦]ㆍ부레[魚鰾]ㆍ김[海衣]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전어(錢魚)ㆍ게[蟹]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2척에 높이는 15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창택산 봉수(倉宅山烽燧)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고산(高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 양성현(陽城縣)의 괴대길곶(槐臺吉串)과 호응한다.
『신증』 【누정】 반월루(伴月褸)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군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순성역(順城驛) 군 동쪽 4리에 있다. 동제원(東濟院) 군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구룡사(具龍寺)ㆍ장안사(長安寺) 모두 신암산에 있다. 보회사(保會寺) 다불산에 있다. 석수암(石水庵) 창택관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몽산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군자지(君子池) 객관 앞에 있다. 지군사(知郡事) 곽충룡(郭翀龍)이 창건한 바로서 못 가운데에 연(蓮)을 심고 염계(濂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의 말을 취하여 군자지라 이름하니, 이제현(李齊賢)이 찬(讚)하여 말하기를, “꽃과 열매가 한때 피고 맺되, 진흙에 오염되지 않아서, 군자와 같은지라, 염계에게 사랑 받았다.” 하였다. 구준대(衢樽臺) 군 남쪽 1리에 있으며, 역시 곽충룡이 축조한 것이다. 앞사람이 찬(讚)하기를 “만민이 모두 나의 동포라 함은,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말이거니와, 혼자서 즐기는 것이 무엇이 즐거우랴. 구준(衢樽)이 여기 있도다.” 하였다. 강구정(康衢亭) 군 동쪽 1리에 있으니, 역시 곽충룡이 세운 것이다. 앞사람이 찬하기를, “담대멸명(澹臺滅明)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노론(魯論)에 기록돼 있으며, 평탄한 대로(大路)를, 군자가 가도다.” 하였다. 치의당(緇衣堂) 군 서쪽 1리에 있으니, 역시 곽충룡이 세운 것이다. 앞사람이 찬하기를, “읍은 비록 10실(室)에 불과하나, 신(信)하고 충(忠)한 사람이 있다. 어진이의 감화란, 집집이 어진이를 낳게 한다.” 하였다. 도촌소(桃村所) 군 북쪽 20리에 있다. 온월부곡(溫月部曲) 군 동쪽 23리에 있다.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군 동쪽 25리에 있다. 몽산성(蒙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14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신라 김준(金峻) 진성왕(眞聖王) 7년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당 나라로 가서 정절(旌節)을 바치려다가 바다에 익사하여 혜성군 태수(槥城郡太守) 김준을 고주사(告奏使)에 임명하여 보냈다. 고려 서인(徐堙) 본군이 처음에 면주(沔州)로 승격하였을 때에 서인이 당시 지주사(知州事)가 되어 선정을 베푼 바 있다. 곽충룡(郭翀龍) 원외(員外)로 있다가 지군사(知郡事)로 나왔다. 본래 서생(書生)으로 군사(軍事)를 익히지 않았는데 왜적이 돌연 습격해 오자, 온 고을 사람들이 달아나는 것을 충룡이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용기를 내어 군중을 격려하니, 한 사람이 적군 백 명을 당할 수 있게 되어 먼저 험요(險要)한 곳을 끊으니, 적이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물러갔다. 본조 맹사성(孟思誠)ㆍ박안신(朴安信)ㆍ이영견(李永肩) 모두 지군사(知郡事)로 부임하여 그 은택이 백성에게 미친 바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한다. 홍윤성(洪允成) 문과에 오르기 전에 본군의 교도(敎導)가 되었다.
【인물】 고려 복지겸(卜智謙) 신라 말엽에 복학사(卜學士)라 일컫는 자가 당 나라로부터 본군으로 와서 살면서 바다 도적을 물리쳐 죽이고, 머물러 남은 백성들을 모아 보전한 적이 있었는데, 지겸은 그의 후손이다. 처음 이름은 사괴(砂瑰)이며, 배현경(裵玄慶)과 더불어 태조(太祖)를 추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어 본주의 토지 3백 경(頃)을 하사받아 자손이 대대로 이를 먹고 살았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복지유(卜智柔)ㆍ박술희(朴述熙) 나이 18세에 궁예(弓裔)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뒤에 태조를 섬겨 공이 있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엄의(嚴毅)이며, 혜종 묘정(惠宗廟庭)에 배향되었다. 복규(卜奎)ㆍ복기(卜祺) 모두 복지겸의 후손이다. 본조 복승정(卜承貞) 문과에 올라 여러 주군(州郡)을 역임하였는데, 법을 지키고 치적이 있었다는 것으로서 명칭이 있다.
【열녀】 본조 치자(梔子) 안지의(安止義)의 아내이다. 남편이 나병(癩病)을 얻은 지 10년 만에 죽으니, 원중(園中)에 빈(殯)하여 놓고, 주야로 슬퍼하고 울더니, 3년 만에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 시어니가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치자가 말하기를, “어머님께서 만일 이를 강요하신다면 나는 반드시 강에 몸을 던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시어머니가 두려워하여 그치고 말았다. 그 뒤에 치자도 또한 나병에 걸려 절개를 지킨 지 14년 만에 비애하던 끝에 몸이 파리하여 죽었다.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신증』 곽씨(郭氏) 박충간(朴忠幹)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몹씨 비통하며 몸을 돌아보지 않았고, 초하루 보름으로 반드시 친히 그 무덤에 가서 제사하였으며, 복을 마친 뒤에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아우 구세충(具世忠)의 아내도 또한 절행(節行)이 있어 남편의 상복을 마친 뒤에도 그대로 소의(素衣)와 소식(素食)을 하고, 죽은 이를 섬기기를 생존시와 같이 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니, 모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요검구안행(腰劍舊顔行)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재차 지나며 밤길을 번거롭게 하니, 관솔 불 양쪽에 밝혀 길을 인도해 간다. 비창(䏶槍) 든 저들은 새로 생긴 익위(翼衛)인가. 요검 찬 병사들은 옛날의 안행들. 함께 추운 해의 솜을 얻은들, 누가 능히 흉년 곡식을 분양해 주리. 민심을 수습할 조그마한 은택도 없으니, 매양 농사 힘쓰라 권장한 내가 부끄럽다.” 하였다. 왕명석산천(王命錫山川) 복오(卜吾)의 시에, “삼한(三韓)을 통일하던 그날, 지금 추사(追思)하건대 5백 년의 옛일. 무공공(武恭公)의 공도 적지 않아서, 왕명으로 산천을 하사했다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7리. 마산(馬山)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죽림(竹林) 동쪽으로 처음은 6리, 끝은 13리. 덕두(德頭)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가화(嘉火)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범천(泛川)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손동(孫洞)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정계(淨界)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초천(草川)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중흥(中興)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감천(甘泉)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송산(松山)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승선(昇仙)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송암(松巖)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성지】 몽산고성(蒙山古城) 둘레가 1천 3백 14척에 우물이 둘이 있다.
【토산】 감[枾].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홍주목(洪州牧)
동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는 보령현(保寧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쪽으로는 결성현(結城縣)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성종(成宗) 14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3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공민왕(恭愍王) 7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7년에 지주사로 강등되고, 20년에 다시 목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인습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신평현 (新平縣) 주 북쪽 90리에 있으며, 면천군(沔川郡) 동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가 있다. 본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던 것을 현종 9년에 본주로 붙였다.
【진관】 군(郡) 5 서천(舒川)ㆍ서산(瑞山)ㆍ태안(泰安)ㆍ면천(沔川)ㆍ온양(溫陽). 현(縣) 14 평택(平澤)ㆍ홍산(鴻山)ㆍ덕산(德山)ㆍ청양(靑陽)ㆍ대흥(大興)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아산(牙山)ㆍ신창(新昌)ㆍ예산(禮山)ㆍ해미(海美)ㆍ당진(唐津).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운주(運州)ㆍ안평(安平)ㆍ해풍(海豐)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
【성씨】 본주 홍(洪)ㆍ이(李)ㆍ한(韓)ㆍ송(宋)ㆍ백(白)ㆍ조(趙)가 있으며, 윤(尹)ㆍ보(甫)ㆍ노(盧) 모두 이성(吏姓)이다. 장(張)ㆍ최(崔)ㆍ만(萬) 모두 촌성(村姓)이다. 신평 이(李)ㆍ송(宋)ㆍ방(方)ㆍ호(扈). 흥양(興陽) 표(表)ㆍ조(趙)ㆍ최(崔)ㆍ이(李)ㆍ나(羅)ㆍ김(金). 고구(高丘) 이(李)ㆍ전(全)ㆍ임(任)ㆍ신(申)ㆍ노(盧). 여양(驪陽) 박(朴)ㆍ손(孫)ㆍ나(羅)ㆍ곽(郭)이 있으며, 진(陳) 촌성(村姓)이다. 이(李) 홍주(洪州). 오(吳) 해주(海州). 강(康)ㆍ송(宋) 모두 서울 사람. 박(朴) 삭주(朔州). 합덕(合德) 문(文)ㆍ김(金)이 있으며, 이(李) 속성(續姓)이다. 용화(用和) 최(崔). 정성(政聲) 최(崔)ㆍ이(李)ㆍ백(白). 운천(雲川) 김(金)ㆍ이(李). 태산(太山) 백(白). 용천(龍泉) 배(裵) 궁경(躬耕)과 같다.
【산천】 월산(月山) 주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사성산(巳城山) 주 동쪽 4리에 있다. 삼존산(三尊山) 주 서쪽 17리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주 북쪽 8리에 있으니, 곧 덕산현(德山縣)이다. 봉수산(鳳首山) 주 동쪽 21리인 대흥현(大興縣) 경계에 있다. 오서산(烏栖山) 일명 오성산(烏聖山)이라고도 한다. 주 남쪽 18리에 있으며, 또 보령(保寧)ㆍ결성(結城) 두 고을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오리현(吾里峴) 주 남쪽 47리인 청양현(靑陽縣) 경계에 있다. 바다 신평(新平)ㆍ고구(高丘)ㆍ흥양(興陽)은 모두 바다와 접하고 있다. 금마천(金馬川) 주 동쪽 5리에 있으니, 오서산에서 발원하여 덕산현 신교천(新橋川)으로 들어간다. 여양천(驪陽川) 여양현(驪陽縣) 남쪽에 있다. 오서산에서 발원하며, 신창현(新昌縣) 정포도(井浦渡)로 들어간다. 원산도(元山島) 주위는 47리이며, 목장(牧場)이 있다. 동을비도(冬乙非島) 원산도 곁에 있으며, 주위는 1백 13리이다. 잉분도(芿盆島) 주위가 95리이다. 사읍시도(沙邑時島) 주위가 59리이다. 흥아음도(興兒音島) 주위가 73리이다. 고태도(古台島) 주위가 29리이다. ○ 이상의 섬들은 모두 본주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다. 흥양곶(興陽串) 즉 옛 흥양현(興陽縣)이니, 주위는 49리이며, 목장이 있다. 대산곶(大山串) 대산부곡(大山部曲)에 있다. 서산군(瑞山郡) 경계와 연해 있으며, 주위는 90리이고, 목장이 있다. 대진(大津) 신평현(新平縣) 북쪽 1백 14리에 있다. 『신증』 원당산(元堂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삼봉산(三峯山) 주 동쪽 23리에 있는데, 그 가운데 봉우리에 최영(崔瑩)의 사당(祠堂)이 있다. 장고도(杖鼓島) 고태도(古台島)와 대치(對峙)하고 있는데, 주위는 10리이다. 사아음도(沙兒音島) 주위가 25리이다. 외야대도(外也代島) 주위가 30리이며, 죽전(竹箭)이 난다. 어을초대도(於乙草代島) 주위는 25리이며, 죽전이 난다. 횡건도(橫巾島) 주위는 13리이다. 이상의 섬들도 모두 본주 남해 가운데에 있다.
【토산】 청어(靑魚)ㆍ넙치[廣魚]ㆍ상어[鯊魚]ㆍ홍어(洪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낙지[絡締]ㆍ조개[蛤]ㆍ굴[石花]ㆍ토화(土花)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자하(紫蝦)ㆍ황소어(黃小魚)ㆍ전어(錢魚)ㆍ삼치[麻魚]ㆍ살조개[江瑤柱]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김[海衣]ㆍ황각(黃角)ㆍ청각(靑角)ㆍ대나무[竹]ㆍ왕골[莞草], 철(鐵) 생천포(生天浦)에서 난다. 뱅어[白魚]ㆍ준치[眞魚]ㆍ밴댕이[蘇魚]ㆍ농어[鱸魚]ㆍ게[蟹]. 『신증』 죽전(竹箭).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4천 9백 15척에 높이 1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샘이 있다.
【봉수】 흥양곶 봉수(興陽串烽燧) 동쪽으로 보령현(保寧縣) 조침산(助侵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 결성현(結城縣) 고산(高山)과 호응한다. 고구성산 봉수(高丘城山烽燧) 남쪽으로 결성현 고산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서산군 도비산(都飛山)과 호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客館) 조위(曺偉)의 객관 기문[記]에, “협성(俠城)의 송후(宋侯) 요년(遙年)이 근후(謹厚) 독실한 재질로 일찍부터 좋은 벼슬에 올라 당세에 영명(令名)을 날렸으며, 일찍이 서원(西原)의 부관ㆍ면양 군수(沔陽郡守)ㆍ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푼 바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 사모함이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또 홍주 목사가 되어 나오니, 홍주는 호서(湖西)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을로 일컬어 왔다. 그러나 송후는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친근하게 접하는 정책을 써서 권유나 지시 등의 조목을 간략히 하고, 번쇄(煩瑣)한 정령(政令)과 가세(苛細)한 것을 털어 없애니, 온 경내가 안온하여 백성들이 그의 임사(任使)를 즐거워하였다. 하루는 뒷 청사에 앉아 문부(文簿)를 고찰하고는 통판(通判) 조후(曺侯) 말손(末孫)에게 말하기를, ‘해우(廨宇)는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며, 대청(大廳)은 곧 삭망(朔望)으로 조회 받는 정아(正衙)인데 지세가 낮아서 염찰의 위엄이 없고, 제도가 협소하여 예(禮)를 행할 곳이 없는데다가 세운 연대가 오래되어 장차 꺾이고 무너질 것이니 어찌 이를 고쳐 세워 오랫동안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지 않겠는가.’ 하니, 통판이 말하기를, ‘삼가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여 합의를 본지라 이에 재목을 모으고 돌을 캐는 데 노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기유년 봄에 그 낙성을 고하게 되니, 지난날 낮았던 것이 높아지고, 좁았던 것이 넓어졌다. 그 모퉁이와 뜰을 높이고 규모와 제도를 확장하고는 흰 회로 바르고 단청(丹靑)으로 채색하니, 높고 크고 또 미려하여 한 고을의 미관(美觀)을 이루었다. 송후가 서울로 편지를 띄워 내 말로 기문[記]을 삼고자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송후의 빛나는 성문(聲聞)이 일찍부터 조정 위에 전파되었고, 이어 금방(金榜)에 이름이 올랐으니, 마땅히 바로 요로(要路)에 올라서 대각(臺閣)에 출입할 것인데도, 늙으신 어버이가 있는 까닭으로 해서 그를 봉양코자 누차 지방관으로의 전보(轉補)를 청하여 여러 주군(州郡)으로 배회하면서 깨끗하고 기름진 봉양을 다하였으니, 이는 송후의 지극한 성효(誠孝)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캐고 들추어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고, 치고 때리지 않아도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촌간에서는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으며, 온 고을의 경내가 함포고복(含哺鼓腹)의 낙이 있었으니, 이는 송후의 행정의 공적이 열읍(列邑)과 다른 점이다.’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고을을 다스리는 재능은 진실로 사책(史策)에 기록하여 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이제 이 한 토목(土木)의 공사와 한 청사(廳舍)의 영선(營繕)이 어찌 송후를 위하여 칭찬하기에 충분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내 여기서 느낀 바 있으니, 요즈음 각 주군을 살펴보건대 근년 이래로 거의 모두 일신하게 중수하여 기울고 무너진 것들이 열에 두서넛도 없을 뿐더러 그 제작한 것이 모두 굉장하고 화려하여 옛것의 갑절이나 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장인(匠人) 석공(石工)들은 모두 법도에 어두웠고, 지금의 목공[梓人]들은 모두 반영(般郢)의 교묘한 수법이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이는 실로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중외가 무사(無事)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산(物産)이 은성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력(事力)에 여유가 있게 된 까닭이요, 또 옛날에 경영한 구조란 겨우 병란이 없는 틈을 타서 하였기 때문에, 그 초라한 창설(創設)이 저와 같았으나, 오늘날에 제작하는 자는 종용하고 한가하여 그 역량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굉장하고 화려함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 어찌 세도(世道)의 흥체(興替)에 관계되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한 관해(官廨)의 영선이 송후에게는 비록 증익(增益)도 손실도 없을 것이지만 이로써 위로는 국가의 승평(昇平)을 볼 수 있을 것이요, 그 다음으로는 또한 수령의 현능(賢能)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어찌 적게 평가하랴. 뒤에 오는 사람들도 이 제작한 바를 목도(目覩)하고 송후의 어짊과 오늘의 융성을 상상할 것이니, 송후의 이 공적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나는 송후께는 자제(子弟)들과 같은 반열이다. 그런데 글을 내리심이 두 번에 이른지라, 의리로 보아 사양할 길이 없어 우선 이것을 써서 보내드리는 바이다.” 하였다.
【누정】 계풍루(繫風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구름은 가벼워지고 바람은 급히 불어 가을철 다가오는데, 먼 손 누정에 올라 보니 마음 갑절 어둡구나. 물 많은 고장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라네. 천 겹 푸른 숲은 높고 낮게 나누어졌고, 한 줄기 푸른 산이 앞뒤를 싸안았구나. 행장 꾸려 돌아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이 몸, 그러므로 장계응(張季鷹)의 현명한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였다. 『신증』 감사(監司) 조위(曺偉)가 영훈루(迎薰樓)로 이름을 고쳤다.
【학교】 향교 주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세천역(世川驛) 주 동쪽 3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주 남쪽 15리로 옮겼다. 용곡역(龍谷驛) 주 남쪽 45리에 있다. 여양원(驪陽院) 여양현에 있다. 인후원(仁厚院) 주 동쪽 23리에 있다. 홍천원 (弘天院) 주 북쪽 11리에 있다.
【불우】 청송사(靑松寺)ㆍ용봉사(龍鳳寺) 모두 팔봉산(八鳳山)에 있다. 삼존사(三尊寺) 삼존산(三尊山)에 있다. 영봉사(靈鳳寺) 팔봉산(八峯山)에 있다. 청광사(靑光寺) 청광산(靑光山)에 있다. 법화사(法華寺)ㆍ서방사(西方寺) 모두 월산(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주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월산에 있다. 여단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여양폐현(驪陽廢縣) 주 남쪽 37리에 있다. 여(驪) 자는 여(黎) 자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인데 혹은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신량(新良)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본주에 붙였다. 고구폐현(高丘廢縣)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견현(牛見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본주에 붙였다. 흥양폐현(興陽廢縣) 주 남쪽 50리에 있으며,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었던 것을 고려 현종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본주에 붙였다. 합덕폐현(合德廢縣) 주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덕풍현(德豐縣)에 붙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던 것을, 고려 충렬왕(忠烈王) 24년에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황석량(黃石良)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은총을 받은 바 있어 현(縣)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본주에 붙었다. 용천부곡(龍泉部曲) 주 남쪽 30리에 있다. 지금은 용천리(湧川里)라 일컫는다. 대산부곡(大山部曲) 주 서쪽 90리에 있다. 서산군(瑞山郡)의 동북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궁경부곡(躬耕部曲) 주 남쪽 20리에 있다. 화성부곡(化城部曲) 주 남쪽 50리에 있다. 운천향(雲川鄕) 주 서쪽 40리에 있다. 해미현(海美縣) 북쪽 마을과 서산군의 동북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다. 정성향(政聲鄕) 주 남쪽 32리에 있다. 용화향(用和鄕) 주 남쪽 35리에 있다. 흥고향(興古鄕) 주 남쪽 52리에 있다. 옥사금소(玉賜金所) 주 남쪽 27리에 있다. 그 동쪽에 우물이 있는데, 옥사정 (玉賜井)이라 부른다. 상전소(上田所) 주 남쪽 74리에 있다. 청양현(靑陽縣) 남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다. 고이산소(高伊山所) 고구현(高丘縣) 서쪽 48리에 있다. 명해소(明海所) 신평현(新平縣) 북쪽 1백 14리에 있다. 오사소(烏史所) 주 남쪽 34리에 있다. 마여소(馬餘所) 주 북쪽 15리에 있다. 미륵사(彌勒寺) 구지(舊址)가 주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담이 남아 있다. 여양산성(驪陽山城)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6천 40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월산성(月山城)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9천 7백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고려 이함(李涵) 이규보(李奎報)의 아들이다. 이행검(李行儉) 모두 지주사(知州事)이다. 본조 안등(安騰)ㆍ신유정(辛有定)ㆍ유사눌(柳思訥)ㆍ전흥(田興)ㆍ김예몽(金禮蒙)ㆍ정자제(鄭自濟) 모두 본주 목사가 되었다. 조석문(曺錫文) 안산군사(安山郡事)에서 본주의 목사가 되었다. 김구(金鉤)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명신(李明晨) 목사가 되었다. 『신증』 이의무(李宜茂) 목사가 되어 치적이 본도의 최상으로 표리(表裏 옷감 한 벌)의 하사를 받았다. 안요경(安堯卿)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홍규(洪規) 태조(太祖)를 섬겨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진준(陳俊) 여양(驪陽) 사람으로 용력이 있어 군졸의 대열에서 발탁되어 공로를 쌓아서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명종(明宗) 때에 여러 번 벼슬을 전전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승진되었다. 경계(庚癸)의 화란 때에 문신(文臣)들의 집이 진준에게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음덕이 있어 그 뒤가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하였다. 진식(陳湜) 진준(陳俊)의 손자로 과거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진화(陳澕) 진식(陳湜)의 아우로, 신종(神宗) 때에 과거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에 뽑혀 들어갔고,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왔다가 죽었다. 시사(詩詞)를 잘하여 그 말이 맑고 미려하였으며, 젊어서는 이규보(李奎報)와 같이 이름을 떨쳤다. 본조 이첨(李詹)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혀 세 번 전전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다. 일찍이 아홉 가지 규간(規諫)의 말을 올리기를, “첫째 덕을 길러야 하며, 둘째 일을 멀리 생각하여야 하며, 셋째 허물을 고쳐야 하며, 넷째 근본에 힘써야 하며, 다섯째 자기 몸을 겸허(謙虛)하게 가져야 하며, 여섯째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일곱째 같은 유(類)는 유대로 나란히 포열(布列)하여야 하며, 여덟째 정사를 밝게 하여야 하며, 아홉째 백성의 업(業)을 보호 육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누차 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말미암아 영산(靈山)의 계성(桂城)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전서(典書), 집현전 직학사(集賢殿直學士),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고 죽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그의 저술인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세상에 간포(刊布)되어 있다. 이서(李舒)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효행이 있었다.
【효자】 본조 복한(卜僴)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한원발(韓元發) 지방 아전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다.
【제영】 파명해상성(波明海上城) 이색(李穡)의 시에, “산중 길은 구름 깔려 어두운데, 바다 위에 임한 성은 물결도 맑다.” 하였다. 비예연운유고성(睥睨連雲有古城)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높은 평원 바둑판처럼 그 형세 펀펀한데, 비예가 구름과 연한 옛성이 있구나. 아득히 포열해 있는 바다 위 산에 날이 저물어 가고, 수북수북하게 올라온 벼 기장에는 비가 처음 개었다. 밭 사이로 들밥 이고 가는 촌아낙네 어린아이 데리고 가고, 언덕 위에 밭가는 어미소엔 송아지 따라다닌다. 동네 숲에서 모여 산신제는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흔들거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더운 바람도 맑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현종조에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시켰다가 고쳐 다시 승격시켰다. 순조(純祖) 조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주남(州南) 끝이 10리. 주북(州北) 끝이 10리. 성지(城枝)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도사(島史) 본래 오사(烏史)였는데 서남쪽에 있으며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번천(蕃川)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용천(湧川) 본래는 용천부곡(龍泉部曲)으로,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고남(高南)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고북(高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위의 두 면(面)은 고구(高邱)의 옛 현(縣)이다. 운천(雲川) 본래는 운천향(雲川鄕)으로, 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인데 건너서 서산(瑞山) 동해 미북(美北)에 있다. 합남(合南)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 합북(合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위 두 면은 합덕(合德)의 옛 현(縣)이다. 현내(縣內) 동북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은 1백리. 신남(新南) 동북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70리. 신북(新北) 동북쪽으로 1백리, 끝은 1백 10리. 위 세 면은 신평(新平)의 옛 현(縣)이다. 송지곡(松枝谷)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 홍안송(洪安松)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유곡(酉谷)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궁경(躬耕) 본래는 궁경부곡(躬耕部曲)인데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얼방(乻方)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 금동(金洞)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홍천(弘天)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치사(雉寺)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대감개(大甘介) 위와 같음. 평리(坪里)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우파(牛坡) 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5리. 화성(化城) 본래는 화성(化城)의 부곡(部曲)인데 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흥구향(興口香) 본래 흥구(興口)의 옛 고을이었는데, 처음과 끝이 모두 위와 같다. 상전(上田) 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70리.
【성지】 읍성(邑城) 옛 주류성(周留城)인데 둘레가 5천 8백 50척이고 샘이 셋, 문이 네 개, 곡성(曲城)이 여덟 개다. 월산고성(月山古城) 고려 태조(太祖) 11년에 운주(運州)와 옥산(玉山)에 성을 쌓고 수졸(戍卒)을 두었는데 둘레가 9천 7백척이요, 우물이 하나이다. 여양고성(驪陽古城) 둘레가 6천 40척, 샘이 둘. 고구고성(高邱古城) 지금 성산(城山)이라 하는데 옛터가 있다. 흥양고성(興陽古城) 옛터가 있다. 합덕고성(合德古城) 옛터가 있다.
【영아】 전영(前營) 인조(仁祖) 조에 세웠다. ○ 전영장(前營長) 한 사람. ○ 속읍으로 홍주(洪州)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보령(保寧)ㆍ한산(韓山)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
【사원】 노은서원(魯恩書院) 숙종 병진년에 세워졌고, 임신년에 사액되었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모두 과천(果川)에 보임.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로 세조 병자년에 대신들과 같이 순직하였다. 벼슬은 도총관(都摠管)이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주D-002]반영(般郢) : 공수반(公輸般)과 영석(郢石)은 예전에 공고한 공장으로 유명하였다.
[주D-003]장계응(張季鷹) : 계응(季鷹)은 진(晉) 나라 사람 장한(張翰)의 자인데, 그는 진 나라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시절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고향인 강동(江東) 땅에 농어[鱸魚]회와 순채(蓴菜)나물이 좋은데 공연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지금까지 그 지방 사람들은 강동 3고사(高士)라 하여 범려(范蠡)와 장한과 육구몽(陸龜夢)을 높이 사모한다.
[주D-004]경계(庚癸)의 화란 : 고려 의종(毅宗) 때인 경인(庚寅)년과 계사(癸巳)년에 무장(武將)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대흥현(大興縣)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30리이고, 남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 금주(今州)라고도 했다. 이었는데, 신라 때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임존성(任存城)ㆍ금주(今州)ㆍ임성(任城).
【성씨】 본현 이(李)ㆍ한(韓)ㆍ장(張)ㆍ오(吳)ㆍ백(白). 거변(居邊) 홍(洪)ㆍ이(李).
【산천】 봉수산(鳳首山) 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사자산(獅子山) 현 동쪽 21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현 남쪽 19리에 있다. 금롱산(金籠山) 현 남쪽 16리에 있다. 당산(堂山) 현 동쪽 21리에 있다. 박산(朴山) 현 동쪽 12리에 있다. 가차산(加次山) 현 동북쪽 11리에 있다. 송림산(松林山) 현 동쪽 19리에 있다. 비도현(飛到峴) 현 동쪽 14리에 있다. 내천(奈川) 현 동쪽 1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청양현(靑陽縣) 어호동(於乎洞)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홍주(洪州) 여양현(驪陽縣)에서 나와서 신창현(新昌縣) 정포(井浦)로 들어간다. 경결천(京結川) 현 동북쪽 6리에 있다. 바로 내천(奈川)의 하류이다. 죽천천(竹遷川) 거변소(居邊所)에 있다. 현에서 동쪽으로 17리 떨어져 있으며, 청양현 어사현(於士峴)에서 발원하여 경결천으로 들어간다. 달천(達川) 현 동쪽 17리에 있다.
【토산】 붕어[鯽魚]ㆍ게[蟹]ㆍ지황(地黃).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천 1백 15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정사】 포정정(布政亭)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안침(安琛)이 견사정(見思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학교】 향교 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광시역(光時驛) 현 남쪽 19리에 있다. 가방원(加方院) 현 남쪽 2리에 있다.
【교량】 내천교(奈川橋) 현 동쪽 2리에 있다. 거변교(居邊橋) 달천에 있다. 금막천교(金莫川橋) 현 북쪽 19리에 있다.
【불우】 대련사(大連寺) 봉수산에 있다. 용흥사(龍興寺) 사자산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백월산에 있다. 은사(銀寺) 금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봉수산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을 사당의 신으로 모시고 봄 가을에 본읍에서 제사하였다 한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임존성(任存城) 이곳이 바로 백제의 복신(福信),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당 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와 항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현 서쪽 13리에 옛 돌성이 있는데, 그 주위가 5천 1백 94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심컨대 이 성이 아닌가 한다. 부여 인물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後百濟)의 임존성을 공격하여 형적(刑積) 등 3천여 명을 죽이고 잡았다. 거변소(居邊所) 옛날에는 거질물소(居叱勿所)로 불리웠으며, 현 동쪽 21리에 있다.
【인물】 고려 한문준(韓文俊) 천성이 고아(高雅) 정직하고 작문(作文)에 능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외임[外重]을 중히 여기던 시대였는데 장주(長州)ㆍ장흥(長興)ㆍ남원(南原) 3개 군의 부사(副使)와 남경 부유수(南京副留守)를 역임하면서 모두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그의 제자 오세재(吳世才)의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는 세 군의 사람들을 소식(蘇息)하게 하고, 동쪽으로 한 주(州)의 백성을 무애(撫愛)하였다.” 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 하였다.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한취(韓就)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성사(門下省事)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이성만(李成萬) 성만이 그 아우 순(淳)과 더불어 모두 지극한 효성이어서 부모가 죽자, 성만은 아버지의 분묘를 지키고, 순은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면서 각각 애통과 경근(敬謹)을 다하였으며, 3년의 복제를 마치고는 아침에는 아우가 형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형이 아우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의 음식이 생겨도 서로 모여 만나지 않으면 서로 먹지 않았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 되자 되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열녀】 고려 곽씨(郭氏) 나이 19세에 박근(朴根)에게 시집갔는데, 23세에 근이 죽으니, 3년간 여묘(廬墓)를 살고는 상을 마치고도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를 효성껏 받들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되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관어지북인한천(觀魚池北引寒泉)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포정정(布政亭) 동쪽에선 흰 달을 맞이하고, 관어지 북쪽에는 찬 샘물 끌어왔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백제의 지분촌(只分材)이었는데, 당(唐)이 지심(支潯)으로 고치고 지심주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인데, 청정(靑正)ㆍ고산(孤山)이다. 숙종 7년에 현종의 어태(御胎)를 묻어 군으로 승격시켰다.
【방면】 읍내 끝이 7리. 일남(一南)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이남(二南) 처음은 6리, 끝은 20리. 거변(居邊) 동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30리. 근동(近東)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원동(遠東)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내북(內北) 처음은 10리, 끝은 19리. 외북(外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원】 소도독사(蘇都督祠) 대잠도(大岑島)에 있으며 고려 때부터 춘추로 향축(香祝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소정방(蘇定方) 당 고종 때 백제를 평정하였다
***칠갑산에서 발원~홍성~예산~신례원...삽교천...당진군 합덕읍 범천...백제의 혜군 가리저...백제 수군창이 있던 곳 ...///
***합덕읍 우평에서 본 서해대교...혜군 가리저(면천의 옛이름)-백제수군창...//
***혜군 가리저 우평에서 본 아산의 영인산성=신성=대두산성//
***당진군 합덕읍 우강면 창리...백제수군창이 있던 곳...//
***합덕읍 성동리...혜군 가리저...철탑아랫마을...//
***합덕읍, 우강면의 풍경...///
***혜군 가리저...합덕저수지 터...성동리 //
***혜군 가리저...합덕읍 성동리...범근내포...밀물때 바닷물이 이 근처까지 들어옴...백제수군창이 있던 곳...///
***합덕읍 성동리...성동리 토성이 남아있슴...///
< 慰禮城-위례성 > ---吾心竹 詩 //
慰禮城 부소모이 물 따라 일 백리 길
素沙河 沃澤田畓 기장 벼 베어내니
오리 떼 群舞되어 하늘을 덮는구나
雙嶺山 車嶺고개 산 따라 일 백리 길
曲橋川 沼澤田畓 수수 조 걷어내니
참새 떼 이리저리 낱알을 쪼는구나
曲橋川 素沙河에 百姓들 모여드니
집마다 굴뚝연기 太平을 누리나니
城壁을 둘러막고 百濟라 이름하네
밀머리 산꼭대기 西海를 바라보며
溫祚王 세대박이 大洋을 누비나니
뉘라서 七百年 大業 虛無타 말을하리
<<< 오심죽..대두산성>신성산성>영인산성에 올라...2008.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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