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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안성군(安城郡)
동쪽은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은 충청도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양성현(陽城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8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서 현으로 만들었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뒤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이 송도(松都)에 침입하였으므로 임금이 남쪽으로 가는데,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부르니, 양주(楊州)ㆍ광주(廣州) 일대 주군(州郡)에 이르는 곳마다 그 칼날을 꺾는 자가 없었다. 오직 안성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연회를 베풀어서 적군을 호궤하다가, 취한 틈을 타서 괴수 6명을 베어 죽였다. 이 때문에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11년에 그 공으로 군으로 승격되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에 충청도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공민왕이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수주(水州)의 양량(陽良)ㆍ감미탄(甘彌呑)ㆍ마전(馬田)ㆍ신곡(薪谷) 등의 네 부곡(部曲)을 떼어 주었는데, 뒤에 김용(金鏞)이 뇌물을 받고 마전ㆍ신곡을 수주로 돌려 주게 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원년에 또 양량을 쪼개어서 양지현(陽智縣)을 설치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혜홀(奈兮忽)ㆍ백성(白城).
【성씨】 본군 이ㆍ김ㆍ조(趙)ㆍ설(薛)ㆍ장(張)ㆍ경(敬). 감미탄(甘彌呑) 유(柳).
【형승】 천흥산(天興山)과 청룡산(靑龍山)이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둘러 있다 권근(權近)이 지은 극적루(克敵樓) 기문(記文)에 있다.
【산천】 서운산(瑞雲山)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밑에 우물 셋이 있다. 가뭄을 만나서 우물을 수리하고 비를 빌면 문득 영험이 있다. 백운산(白雲山) 군 동쪽 14리 지점에 있다. 보산(寶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구포산(九苞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옛 성터가 있다. 남천(南川) 군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한 가닥은 백운산 북쪽에서 나오고, 한 가닥은 남쪽에서 나온다. 이것이 합류하여 양성현 홍경천(弘慶川)으로 들어간다. 목동지(木洞池)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麻]ㆍ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
【누정】 극적루(克敵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권근이 지은 기문(記文)에, “나의 벗 정군(鄭君) 수홍(守弘)이 성(省)의 낭관으로서 안성 수령이 되어 나왔다. 정사를 잘하니 백성이 의지하여 편하여졌다. 이에 그 공관을 수리하고 고을 학장(學長) 정한(鄭翰)을 서울에 가게 하여 양촌(陽村)의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누(樓)는 본래, 거창(居昌) 신군(愼君) 인도(仁道)가 이 고을 원이었을 때 설치한 것이다.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홍건적에게 송도가 함락되고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였을 때 이 고을에서 북쪽으로 30여 주(州)는 풍문(風聞)만 듣고도 항복하였다. 심지어는 공복(公服)을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하늘까지 뒤덮을 듯한 기세가 남으로 넘치니, 장차 온 나라가 같이 망해도 막을 수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이 남보다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하는 체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호궤하였다. 적이 취한 다음 섬멸하니, 적은 이 때문에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흥복(興復)하는 공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고을의 의기와 공렬을 표창하여 지관(知官)으로 승격시켰다. 다음해 계묘년에 신군(愼君)이 원으로 와서 이 누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누는 적을 대항한 공과 지관으로 승격된 영관을 표한 것이니, 중요한 뜻을 가졌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신군이 이 누를 짓기는 하였으나 누 이름은 짓지 못하였고, 또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도 못하였다. 지금 벌써 3기(紀)라는 오랜 세월을 지나서 늙은 사람은 죽었고, 장성했던 사람은 늙었다. 또 오랜 시일을 지나게 되면, 이 고을이 국가에 공이 있었고 이 누가 고을에 중한 뜻이 있다는 것을 후세 사람은 장차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옛 규모대로 수리하여서 썩은 부분은 바꾸어서 견고하게 하고, ‘극적루(克敵樓)’라 명명하였으니, 자네 글을 받아서 후일 증거로 삼고, 고을 사람에게 전인(前人)의 공렬을 대대로 잊지 않게 하기를 원한다. 이 누의 경치를 말하자면, 가깝게는 산이 동북쪽에 진좌(鎭座)하여 푸른 솔과 높은 나무가 울창하고 그윽하며, 남쪽에는 큰 냇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 안쪽에 10여 채 소민(小民)의 집이 띄엄띄엄 있고, 바깥쪽에는 편평한 밭 수십 이랑이 펼쳐져 있다. 뽕나무ㆍ삼이밭 경계에 잇닿았고, 벼농사가 논 배미에 가득하다. 봄에 갈아서 여름에 김매고,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무릇 고을 사람으로서 이 지역에 일이 있는 자는, 모두 고개만 숙이면 볼 수 있다. 멀리로는 천흥ㆍ청룡의 여러 봉우리가 머리를 넌지시 내밀면서, 조회하는 듯 읍하는 듯,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벌여서, 시계(視界)가 끝이 없다. 옛날에 한문공(韓文公)이 등왕각(滕王閣)에 올라보지 못했으나, 기문하였으니, 자네도 이 누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는 것으로써 사퇴(辭退)하지 말았으면 다행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왕씨(王氏)가 고려를 건국한지 5백 년 동안에 도둑의 침해를 매우 받은 것이 충렬왕(忠烈王) 경인년에 있은 합단(哈丹)의 침입과, 공민왕 신축년에 있은 홍건적의 변이었다. 철령(鐵嶺)을 지켜내지 못하니, 합단이 마구 들어와서 빈 고을에 나아가듯 하였다. 원주(原州)에 들어오자, 충갑(冲甲 원충갑)이 필부(匹夫)로서 팔을 뽐내며 호통쳐서 도둑을 죽이니 지금까지 아름답게 여긴다. 송도가 함락되니 홍건적이 더욱 성해져서, 군사를 갈라 남쪽으로 향할 적에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하였고, 강물을 터 놓은 듯한 도도한 기세를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고을 사람이 충의를 다해 적군을 섬멸하였다. 우뚝한 제방이 되어, 옆으로 뻗치는 적군의 기세를 막았으니, 그들의 거룩한 공은 충갑과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 그 사실을 특별히 적어서 만세에 충의를 권장하는 표본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 충의는 인도(人道)의 큰 대목이며, 왕교(王敎)의 근본이다. 정군(鄭君)은 일찍부터 충효한 자질로써 인의(仁義)를 강명(講明)하였다. 고상한 뜻 가짐과 확고한 절조는 진실로 우뚝하여 짝할 사람이 없다. 이제 이 고을 정사에 임하게 되어서는, 첫째로, 이 사실을 높이 들어 이 누에 이름하여서 후인에게 무궁하도록 장려하였으니, 이 점도 또한 적을 만하다. 후일, 이 누에 오르는 자가 전인의 공열을 거슬러 생각하고 정군의 뜻을 생각하여, 타고난 덕을 좋아하는 양심에 감발하는 바 있으면, 충의와 절개 있는 선비가 성하게 나올 것이다. 그 왕화(王化)에 도움됨이 어떠하겠나. 어떤 사람은, ‘적을 이기는 공은 반드시 위란(危亂)을 겪은 다음이라야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은 오랜 세대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절의 있는 사람이 비록 감발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어느 곳에 그 뜻을 나타내겠는가.’ 하여, 나는 말하기를, ‘일에 크고 작음은 있으나 그 이치는 같다. 무릇 물욕이 내 마음의 의리를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적이다. 탐하는 마음은 염치를 해하고, 모진 것은 인(仁)을 해하며, 아부는 공(公)을 해하고, 편곡(偏曲)은 정의를 해하는데, 모두 사람이 적으로 돌려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극복하는 마음을 유(類)에 따라서 커지게 하고 사물에까지 미룬다면, 일상생활에 무릇 스스로 그 사심(私心)을 이겨서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것이, 어디를 가나 적을 극복하는 공이 아님이 없으며, 의(義)를 두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여 천리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인(仁)이다.’ 하였다. 이 누에 오르는 자가 이것으로써 일삼는다면, 정군의 뜻은 거의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군(郡)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강부역(康富驛)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광실원(光實院)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군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룡사ㆍ석남사(石南寺) 모두 서운산에 있다. 금강사(金剛寺) 백운산에 있다. 봉안사(鳳安寺) 구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감미탄부곡ㆍ마전부곡 모두가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정수홍(鄭守弘)ㆍ김겸(金謙).
【인물】 고려 이영(李永) 자는 대년(大年)이다. 서리(胥吏)가 되어서 서류를 정조 주사(政曹主事)에게 올리면서 읍하지 않았다. 주사가 노하여 꾸짖으니, 영은 곧 그 서류를 찢으면서, “나도 과거 보아서 조정에 벼슬할 것인데, 너희들에게 무슨 읍을 하리요.” 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 을과(乙科)에 뽑혔고, 인종(仁宗) 초년에 지어사 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을 죽였는데, 이영은 한의 매부(妹夫)로서, 연좌되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었다. 그의 어미와 자식도 적몰(籍沒)당해, 장차 노비로 된다는 말을 듣고, “내가 평소 일을 반성하여도 부끄러운 일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견디고 기다린 것인데, 만약 늙은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천한 노예가 된다면, 내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하랴.” 하고, 이내 말술을 마시고 분하게 여기다가 죽었다. 자겸이 술사(術士)를 보내어 길섶에 묻었더니, 마소가 그 무덤을 밟지 않았다. 자겸이 패망하자, 첨서 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로 추증되었다. 김유성(金有成) 15세 때 과거에 올라, 덕원부 서기(德源府書記)로 조용(調用)되었고, 태복윤(太僕尹)까지 하였다.
본조 이숙번(李叔蕃) 우리 태종조(太宗朝) 정사 공신(定社功臣)이다,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안성군(安城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신증』 【효자】 본조 이윤종(李閏宗) 서리(書吏)이다. 아비가 오랜 병중이었는데,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여서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이락우청홍행화(籬落雨晴紅杏花) 허식(許湜)의 시에, “방탕한 객(客)은 본래 조롱(鳥籠) 밖 새와 같은 것, 세상 사람 어느 누구, 우물안 개구리를 부러워하리. 산 고을에 오가면서 봄 경치 찾으니, 울타리에 비 개였는데 살구꽃이 붉다.” 하였다. 지탁서남옥야평(地坼西南沃野平) 최부(崔府)의 시에, “산은 동북쪽을 막아서 저절로 성이 되었고, 지역은 서남으로 트이었는데, 기름진 들판이 질펀하다.” 하였다. 십실풍연 사무성(十室風煙似武城)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열 집 풍경은 무성과 같은데, 남쪽 들은 기름지고, 사방 산 편평하다. 사군(使君)이 현가(弦歌)로써 다스리는데, 고을에는 멸명(滅明) 같은 사람 몇이나 있을까.”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
【연혁】 태종 13년 충청도로부터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서운고성(瑞雲古城) 둘레가 3리이다. 금강고성(金剛古城) 동남쪽으로 15리인데 둘레가 5리이다. 비봉고성(飛鳳古城) 둘레가 2리이다. 토성(土城) 남쪽으로 15리이며, 의병 홍계남(洪季男)이 성을 쌓아 싸운 곳인데, 지금은 진터[陣基]라 부른다.
【누정】 경설정(鏡雪亭) 읍내에 있다. 비각(碑閣) 남쪽으로 3리에 있는데, 영종(英宗) 무신년 오명항(吳命恒)의 승첩비(勝捷碑)이다.
【방면】 군내(郡內) 끝이 10리이다. 가사(加士)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가지곡(加之谷)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좌촌(北佐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덕곡(德谷)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목촌(木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송죽촌(松竹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진두(辰頭)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우지곡(于只谷)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문리(大門里)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죽촌(竹村)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거호곡(居乎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잉상곡(芿山谷)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사원】 도기서원(道基書院) 현종 계묘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김장생(金長生) 경도(京都) 문묘 편에 있다.
[주D-002]열 집 풍경 : 공자가 열 집 못 되는 동네라도 충성되고 신용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이 안성은 조그만 고을이지만, 옛날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有)라는 사람이 원 노릇하던 무성(武城) 지방에서와 같이 충성되고 신용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 무성에서 자유가 현가(絃歌), 곧 음악을 이용하여 백성을 교화시켰다 한다.
[주D-003]멸명(滅明) :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무성 사람으로 자유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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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京畿) | ||||
양성현(陽城縣) |
동쪽으로 안성군 경계까지 3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 직산(稷山)현 경계까지 27리이며, 서쪽으로 진위현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 용인현 경계까지 1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사복홀(沙伏忽)인데, 신라 경덕왕이 적성(赤城)이라 고쳐서 백성군(白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는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명종이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예대로 현감으로 만들고, 충청도에서 본도로 이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사복홀ㆍ적성ㆍ사파을(沙巴乙)
【성씨】 본현 하ㆍ유(柳)ㆍ이ㆍ임(任)ㆍ갈(葛)ㆍ강(康)ㆍ송(宋)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천덕산(天德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진위현 조에도 적었다. 백운산(白雲山)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다. 바다 괴태길곶 서쪽 1백리 지점에 있다. 괴태길곶(槐台吉串) 현 서쪽 1백 리 지점에 있다. 줄같은 한 가닥 길이 진위현의 송장, 수원 양간(楊干)을 지나서 바다에 불쑥 들어 갔는데, 무릇 75리이다. 목장(牧場)이 있다. 홍경천(弘慶川) 현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선원천(禪院川)과 안성군 남천 물이 합쳐지고, 서쪽으로 흘러 직산현 홍경원 북쪽에 와서 이 냇물이 된다. 또 수원부 오을미곶(吾乙未串)에 들어간다. 선원천 고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죽산현 좌찬역(佐贊驛) 서쪽 골에서 나와, 고양지(古陽智)를 지나고, 현의 선원(禪院) 앞에 와서 냇물이 된다.
【토산】 웅어ㆍ지황.
【봉수】 괴대길곶 봉수(槐台吉串烽燧) 남쪽으로 충청도 면천군 창택산(沔川郡倉宅山)에 응하고, 또 직산현 망해산(望海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수원부 흥천산(興天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가천역(加川驛)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소초원(所草院)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원사(靑原寺) 천덕산에 있다. 수정사(修淨寺)ㆍ덕적사(德積寺) 아울러 백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무한성(無限城)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3백 5척이며, 성의 안에 못 하나가 있다.
【인물】 고려 이천(李梴) 벼슬이 첨의 평리 개성윤(僉議評理開城尹)에 이르렀다. 본조 이옥(李沃) 천의 증손이다. 무과에 뽑혀서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추(李推) 벼슬이 황해도 도관찰 출척사(黃海道都觀察黜陟使)에 이르렀다. 이순지(李純之)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이예(李芮) 과거에 두 번이나 올라서,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글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이승소(李承召) 세종조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뽑혔다. 성종조(成宗朝)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여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 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증』 이세영(李世英)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찬에 이르렀고, 청간(淸簡)하다는 것으로써 일컬었다.
【제영】 읍호요동간의명(邑號聊同諫議名) 고려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용성(龍城) 깊은 지역에 외로운 성 있는데, 고을 이름은 간의의 이름과 같다. 옛 시를 뒤좇아 화답하며 오래 앉았으니, 숲을 격한 주막에 낮닭이 운다.” 하였다. 노수참천요적성(老樹參天繞赤城) 유정현(柳廷顯)의 시에, “노목이 하늘을 찌를 듯 적성(赤城 적현과 같은 것)을 둘렀는데, 문앞 작은 길이 우정(郵亭)에 잇달았다. 송사 다루는 뜰에 해 길고, 일은 없어 한가로이 꾀꼬리 우는 소리 듣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백운산고성(白雲山古城) 무한성(無限城)을 칭하며, 둘레가 1천 3백 5척이고 못이 하나다. 고루(古壘) 소사천(素沙川)의 남북쪽에 네 군데 있다.
【봉수】 괴대곶(槐台串) 서쪽 1백 리에 있음.
【방면】 지질동(紙叱洞)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8리. 송오리(松五里)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60리. 구천(九千)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공제(孔悌)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반곡(盤谷) 서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30리. 원당(元堂)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승량(升良)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영통(令通)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금질동(金叱洞) 동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덕산(德山) 남쪽으로 처음과 끝이 10리. 구룡동(九龍洞)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소고니(所古尼)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도일(道一) 남쪽으로 끝이 35리. 율북(栗北) 서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서신리(西新里) 서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55리. 감미동(甘味洞) 서쪽으로 처음은 65리, 끝은 65리. 이상 세 면은 수원(水原) 남쪽 경계를 넘어 옹포(瓮浦)의 옆에 있다. 외양동(外良洞) 서쪽으로 처음은 90리, 끝은 1백 15리인데, 서쪽은 바다에 닿았다.
【사원】 덕봉서원(德峯書院)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경진년에 사액하였다. 오두인(吳斗寅) 파주(坡州)에 보임.
***안성향교 //
***직산의 산하...멀리 아산 온양의 설화산과 광덕산이 손에 잡힐듯...//
***안성시가지와 소사평(素沙坪)...//
***멀리 남양만이 한눈에 조망되고...//
***천고유유백제천 삼분강역결삼전...//
***내혜홀의 진산 비봉산...혜산 박두진시인의 해.../ 대학 강단에서 조용하시던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양성현의 좌-백운산~무한산성(운수암)~대아산~고성산~진산 천덕산...//
***백제초도 하남위례성...부소산(459.1m) 위례산성(523m)의 모습...//
***안성 비봉산에서 바라본 서해대교의 주탑...<大津 평택항-멀리 한가닥 길이 실처럼 이어졌구나...양성현지>
***대진 평택항의 서해대교...백제, 신라의 대중국무역로.../ 평택시가지의 모습...//
***안성 비봉산...서해대교의 주탑과 마린센터가 손에 잡힐듯...//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밀머리)의 大頭=大豆山城>섶(섬)머리성-薪城>현재의 영인산성...//
***양성현의 진산-천덕산(天德山)...//
***양성의 무한산성(武(手+旱)山城, 無限山城-운수암-雲峀庵, 雲水庵)~대아산 //
***좌-서운산(547m, 좌성산)~부소산 위례산성(523m)~성거산(우성산, 579m)...위례성 좌우로 익성을 배치함.
***멀리 태화산... 광덕산(699m)..//
***백제초도 직산위례성(bc18~6,13년)...직산(사산)의 진산 사산성과 휴류암...//
***마둔지의 배티고개(梨峙-大門嶺, 天門嶺, 大明嶺-서울대학교 규장각고지도)...//
<<< 오심죽...안성 비봉산 탐방...2009.9.6 >>>
<脇呑嶺-협탄령>---吾心竹 詩 //
今勿奴 都堂山城 보름달 외로운데
人跡은 간곳없고 文案山 다가서네
산 넘어 曲澗里요 물 건너 大門里라
돌고개 장터마당 숯 지게 가득한데
西戍院 느티나무 幾百年 살았고야
찬 이슬 그대론데 잎새만 피고 지고
左城山 여기더냐 慰禮城 저기더냐
脇呑嶺 五十里 길 저녁 놀 비끼는데
素沙伐 오리 기러기 북녘하늘 맴을도네
漢川邊 황톳길엔 古人들 뵈질 않고
청룡사 오색구름 별빛 속 잠기나니
해골 물 큰 깨우침을 한 잔 술 달래이네
< 오심죽...협탄령(엽전재, 진천~입장)을 넘으며...2009.11. 4 >
*** <협탄령 詩>--주(注)---
1. 금물노(今勿奴) : 금물노(今勿奴:거물라)...흑성(黑城)-단재 신채호 //
충북 진천군(鎭川郡)의 고려시대 이름은 진주(鎭州), 통일신라시대 이름은 흑양군(黑壤郡), 고구려시대 지명은 금물노군(今勿奴郡). 여기서 ‘흑양(黑壤) = 금물노(今勿奴)’라는 등식(等式)이 형성된다.
‘흑양’이란 ‘검은 평야’를 말한다. ‘금물’이란 ‘검을(검은)’의 옛말이다.
한편 ‘노’란 ‘들판’을 가리키는 고구려말이다. 따라서 ‘흑양 = 검은 들판’이라는 등식이 입증되는 동시에, ‘들판’이란 뜻의 고구려말 ‘노(野)’와, ‘들판’이란 뜻의 일본말 ‘노(野·の)’가, 어김없는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임도 여기서 밝혀진다. [출처-이영희 교수의 고대 철강사]
2. 도당산성(都堂山城, 都唐山城...一名 : 徒幢(郎幢)山城-화랑, 渡唐山城)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도당산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 석축 산성의 둘레는 824m.
진천읍에서 서남쪽 1km 떨어진 해발 약 200m의 도당산(都堂山)의 정상에 축성된 산성이다.
진천 도당산성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설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하룻만에 산성을 축성했다고 전해지며, 당나라 소정방이 함께 주둔하면서 고구려군을 막았다고도 전해진다.
3. 문안산성 [文案山城]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앞쪽에는 봉화산(소을산) 봉수대가 있다.
진천읍에 있는 해발 420m의 문안산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이다. 문안산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축성되었으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산성을 축성하였다. 지금은 미군부대가 위치함.
4. 곡간리(曲澗,曲干)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곡간리.
마을이 산속 깊이 있어서 개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는데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할 당시
이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 곡간이었다 한다. 곳간(곡식창고) = 곡간(曲澗), 곡대라고도 부른다.
5. 대문리(大門里) :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동네가 서쪽으로 만뢰산을 등지고 산 계곡에 산재(散在) 위치하여 숨은골이라 하였다. 옛날 군사 훈련을 할 당시 물을 가두었다가 이용하는 수문(水門) 이 있었다하여 수문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대문리는 지형상 직산 위례성 동쪽의 부소산 만뢰지맥에 있으며, 곡간리,군단이, 벼장골의 동쪽 입구.
*다물(多勿)-<復舊土>의 고구려어 / 다(多-ta)-大,對,地 / 물(勿-mor)-水,文,門,美,密,頭.龍(彌),馬,物과 대응함 / 그러므로 대문리의 大門은 <다물계-多勿系>의 지명을 의미함.
<출처-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저>
6. 돌고개(石峴里) :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장대마을을 장터라 한다. 옛날에는 돌고개라 하였다. 물물교환(物物交換) 이 이루어질 때부터 이곳은 소금장으로 유명하다. 충남 아산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충청 내륙지방인 괴산 증평, 음성 등지에서 이곳 돌고개에 와서 소금을 사갔다 한다. 지금도 앞 냇가에 소금소(沼) 라는 곳이 있다. 백곡면 소재지이며 장터이기에 장대(場垈)라 부른다. 옛이름 돌고개라 한 것은 돌이 많아서 돌고개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돌석(石) 고개현(峴) 자를 써서 석현이라 한다.
7. 서술원(西戌院): 진천군 백곡면 서수마을.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름.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陣)을 치고 주둔했던 서수마을이다.
당시는 이곳을 서술원(西戌院)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른다.
8. 좌성산(左城山, 左聖山) : 서운산의 다른 이름으로 좌성사가 있으며,
백제시대 축성한 산성임. 일명, 서운산성(瑞雲山城).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洪季男)이 북상하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의병을 지휘하여 수축(修築)하였다고 전한다.
9. 위례성(慰禮城,523m)-천안시 입장면~북면의 부소산(扶蘇山)에 있슴.
위례성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한 산성이다. 성내 면적은 5,700평이고, 성채의 길이는 900m에 이른다.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처음으로 도읍지를 삼은 곳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이 건국한지 13년 만에 경기도 광주 한성(漢城) 옮겼다고 전함. 직산 위례성 백제시대(bc18~6년, 13년)
《삼국유사》에는 충남 천안시 직산읍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의 학설에는 이곳 직산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례산성은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에 소용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 산성에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되어 있다.
10. 협탄령(脇呑嶺) : 협탄령>렵둔령>엽둔(돈)령>엽전재로 음훈 변화됨.
천안시 직산읍~입장면~안성 청용사~진천 백곡면~진천읍 도당산성을 잇던 백제와 신라의 교통로.
신라가 백제의 땅을 빼앗고 <백제의 옆구리를 삼켰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 지금은 엽돈재, 엽전재라 부름. 만뢰산이 분기하며, 금북정맥의 주능선 길이며. 백제초도 온조왕의 부소산 위례산성이 있다.
11. 소사벌(素沙伐, 素沙坪 / 안성시 양성면: 사복홀(沙伏忽)-새밝골)
경기도 평택시~안성시~천안시 성환지역의 안성천변(한천,홍경천,안성천)의 넓은 평야지대를 말함.
12. 한천(漢川, 大川)-통칭 소사벌이 있는 안성천을 말하며,
안성~양성현의 경계 하천임.
아래로 인천(仁川-지금의 충남 아산시 인주면)으로 흐른다고 1872년 직산현, 양성현 고지도에 전함.
13. 청룡사 [靑龍寺]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 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14. 해골 물 큰 깨우침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제1차 고구려의 육로를 통한 유학길이 실패하자, 제2차 해로(海路)를 선택, 당나라 유학길(AD661년)에 오른 원효와 의상은 김무력~김서현~김유신장군 가문(家門)이 개척한 신라의 육로를 통해 당항(黨項, 唐項-당나라로 가는 길목)의 지름길인 협탄령(脇呑嶺-백제의 옆구리를 삼키다, 진천~입장. 서운산 엽전재) 대당교역로(對唐交易路)를 따라 안전성이 우선 보장되는 충북 진천 도당산성(都堂(唐)山城, 일명-渡唐山城)~돌고개(백곡면 석현리)~서수원~협탄령~청룡사~입장(안성)~직산(양성)~평택(팽성)~대진(大津.漢津) 평택항 괴태길곶(槐台吉串, 홰대기곶,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의 봉화산 수도사(修道寺)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대오각성하며 다시 협탄령(엽전재)을 거쳐 신라 경주로 되돌아감.
< 엽전재 >--- 吾心竹 詩 //
지나는 하늬바람 온 몸이 떨리우고
나그네 한숨소리 꽃잎은 떨어지네
덜커덩 쇠달구지 더 이상 뵈질않네
나흐레 아흐레장 쇠전판 장돌뱅이
임꺽정 안무섭던 진천골 농부님네
철퍼덕 주저앉아 엽전재 하늘보네
등짐을 둘러메고 쉰 굽이 넘자스라
청룡사 남사당패 풍물소리 들리는다
깽깨깽 깽매소리 어깨춤 절로난다
줄타기 인생살이 그 뭣이 다를소냐
아차차 실수하면 맨 땅이 기다리네
어여쁜 바우덕이 협탄령 베고 누웠나니
<吾心竹...협탄령(脇呑嶺) 엽전재...2008.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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