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吾心竹--오심죽-- 2009. 9. 16. 20:02

동명성왕 (주몽)| ♤♤ 역사 추억의 게시판
 
소장 조회 48 | 09.08.28 11:35 http://cafe.daum.net/kjg1234/Lt4r/152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은 고(高)씨이며, 원래 성은 해(解)이다. 는 주몽(朱蒙), 추모(鄒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慕)라고 한다. 동명왕(東明王), 동명제(東明帝), 또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도 한다.

 

탄생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및 《동명왕편》은 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어여쁜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더위를 피하여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오다 연못안에 세 처녀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세 처녀를 모처로 유인하여 술에 취하게 한뒤, 문을 걸어잠그고 사욕을 채우려하였다. 훤화, 위화는 힘을다해 탈출하였으나 유화는 그만 해모수에게 붙잡히게 된다.

 

하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너는 대관절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듯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하니 해모수가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높은 문족과 혼인하기를 청합니다"하고 말하자, 하백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며 해모수를 시험해본뒤, 곧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며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나 여전히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하백은 가죽주머니에 술에 크게 취한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뒤에 올려보내나 물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 깨버린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주머니를 뚫고 울면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유화를 버리고 홀로 떠나버렸다.

 

이에 하백은 유화에게 함부러 남자를 만난것을 나무라며 시녀 몇명을 붙여준뒤 귀양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柳花)를 만나고, 유화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더니 마침내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유화가 아이가 아니라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유화에게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다. 그 뒤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소와 말은 알을 피해 갔고,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해부루와 고주몽은 배다른 형제로 해석할 수 있는데 주몽은 연대상으로 해부루의 손자뻘에 해당된다.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부여에서 주몽은 자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일곱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졸본의 구려국(句麗國) (혹은 졸본부여)에 이르게 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유력자였던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卒本)에 구려국의 뒤를 이어 높을 고(高)를 붙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자신의 성(姓)을 ‘고’(高)라 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의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송양국’이라고도 한다)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동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죽었다. 이때 금와왕이 그녀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이에 주몽은 동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하지만 금와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위에 오르면서(기원전 19년 전후)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된다.

 

기원전 19년 여름 음력 4월에 주몽의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주몽은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삼았으며, 그 후 5개월 뒤에 40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능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가족 관계

  • 예씨(禮氏) 부인
    • 瑠璃, 기원전 38년 - 기원후 18년) : 고구려 제2대 왕이다.
  •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기원전 6년) : 연타발유리 (의 딸이다. 아래의 두 아들은 양자라는 설과 친자라는 설이 있다.
    • 비류 (沸流, ?~? )
    • 온조 (溫祚, ?~28년) : 기원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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