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3:25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1대 시조 동명성왕<始祖 東明聖王  B.C 37~B.C19  재위기간 18년>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구나!"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며 금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붕어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3년 봄 3월,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다.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4년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6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치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10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1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곳의 왕 금와가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제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B.C19~A.D18  재위기간 37년>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의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2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가을 7월,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취를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이니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따로 살게 하였다. 그 후,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인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했다. "네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도망가버렸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 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왕이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 노래를 불렀다. "꾀꼬리도 이리저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며 노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13년 봄 정월, 화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
19년 가을 8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은 탁리와 사비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 늪에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랐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에 어찌 상처를 낼 수 있는가?" 왕은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왕이 병들었다. 무당이 "탁리,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 되었다"고 하므로, 왕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였다. 곧 왕의 병이 나았다.
20년 봄 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21년 봄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우선 국내 사람의 집에서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왕에게 말했다. "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름 4월, 왕이 위중림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9월,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 보고 오다가 사물 못에 이르러, 한 사나이가 연못 가운데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흔쾌히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씨라는 성을 주었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말했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응당 열심히 사회의 안정과 정치와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왕께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관가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하여 그 나라를 떠나 남한으로 갔다.
23년 봄 2월, 왕의 아들 해명을 태자를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4년 가을 9월, 왕이 기산의 들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27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센 활을 선사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룡왕이 부끄러워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황룡왕에게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 버리라"라고 말했다.
3월,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며 간하기를 "오늘 이웃 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드디어 떠났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만나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돌려 보냈다.
28년 봄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태자에게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결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했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했다. "전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 일부러 활을 잡아 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다고 생각하여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태자는 여진 동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이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식으로 동원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 땅을 창원이라 하였다.
저자의 견해 :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땅히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삼아, 마치 문왕이 세자 시절에 행동하듯 하여야 한다. 해명은 옛 도읍에 살면서 용맹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으니, 그는 당연히 죄를 범한 것이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아들을 사랑하거든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 왕이 처음에는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다가, 죄악이 이루어진 다음에 지나치게 미워하여 죽여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애비는 애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서로 의좋게 지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도록 유인하는 것은, 백성을 모두 모아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나라에는 대국과 소국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것은 예절이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이다. 이제 왕이 만약 예절과 순리로써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은, 나라를 세운 역사가 짧으며, 백성과 군대는 약하므로, 치욕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치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부여왕에게 "과인이 바다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왔기에 예의에 대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제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 이 때, 왕자 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가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부여의 사신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었는데,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였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게 하는 직위를 주도록 참소하여 욕을 보인 까닭에 불안하여 탈출했던 것이다. 이제 대왕이 전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어 우리 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곳에 알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보고하라." 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그 뜻을 두루 물었다. 한 노파가 "쌓아놓은 알은 위태로운 것이니,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편안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노파의 말은 곧, 왕이 자신에게 위기가 왔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위기를 만들지 않고 차라리 평화를 택하여 자기 나라를 먼저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9년 여름 6월,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지어 싸우다가,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해설하는 사람이 "검은 것은 북방의 색깔이니, 북부여가 파멸될 징조"라고 말했다.
31년, 한 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 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貊)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요동과 현토의)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 나라 서울로 보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 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32년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33년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를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계속 진군하여 한 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 탈취토록 하였다.[현은 현토군에 속한다.]
37년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붕어하였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18~44  재위기간 26년>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 그의 이름은 무휼이며, 유리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장성하여서는 호걸의 풍모를 갖추었고, 지략이 많았다.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당시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이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이니,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2년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3년 봄 3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 왕이 골구천에서 사냥하다가 신마를 얻어 거루라고 이름 지었다.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통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고구려를 합병함이 어떤가요?"라고 말하였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 한 말도 전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부여왕에게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대소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5년 봄 2월,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왕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말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두려워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부여왕이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기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을 급히 몰아 진군하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 때 괴유를 출동시켰다. 괴유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이 때 괴유가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굶주리니 왕은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갑자기 큰 안개가 7일 동안 끼어 지척에서도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허수아비에게 병기를 들게하여 병영 안팎에 세워서 마치 병사로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그리고 사잇길로 밤을 도와 몰래 행군하였다. 이 와중에 골구천에서 얻은 신마와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큰 솥을 잃어 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음지(飮至)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내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사자를 직접 조상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왕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되어,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모두 다짐하였다.
3월, 신마 거루가 부여의 말 백 필을 가지고 학반령 아래 차회곡에 왔다.
여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왕이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자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다가, 사냥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이 사람이 곧 갈사왕이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종제가 백성에게 "우리 선왕이 별세하고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왕의 아우는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나 역시 불초하여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라고 말하고, 만여 명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왕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있게 하였다. 그의 등에 낙(絡) 무늬가 있다 하여 성씨를 낙(絡)으로 정하여 주었다.
겨울 10월, 괴유가 죽었다. 처음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왕이 직접 가서 문병하였다. 그 때 괴유가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관리를 시켜 철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8년 봄 2월, 을두지를 우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9년 겨울 10월, 왕이 직접 개마국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자기 군사들이 백성을 약탈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지역만 따로 군현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개척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
10년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를 우보로 삼았다.
11년 가을 7월, 한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공격과 방어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니, 이는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필시 변방의 장수가 사욕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 나라를 무단 침범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에 위배되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그들의 군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였다가 불시에 기습을 한다면,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했다. "수가 적은 편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수가 많은 편에게 잡히게 됩니다. 제가 대왕의 군사와 한 나라 군사 중에 어느 편이 많은가를 생각하여 보았는데,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 있을지언정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계략으로 공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을두지가 대답했다. "지금 한 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왕은 성문을 닫고 우리의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굳게 수비하였으나 한 나라 군사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아군의 힘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해졌으므로 두지에게 물었다. "더 이상 수비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 두지가 대답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처하고 있으므로 물있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궁에 처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 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두지의 말에 따라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내가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지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의 황폐한 경내에서 노숙 생활을 하게 하였다. 장군의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어, 이에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마 장군의 막하에 보낸다." 이 때 한 나라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빠른 시간 내에 점령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곧 회답하여 말했다. "우리 황제가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출사의 명령을 내려 대왕의 죄과를 묻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 국경에 온지 열흘이 넘도록 행동할 바를 몰랐는데, 이제 보내 온 편지를 보니 말이 순리에 맞고 공손하니, 내가 황제에게 이 말대로 보고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13년 가을 7월, 매구곡 사람 상수가 그의 아우 위수 및 사촌 우도 등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14년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15년 봄 3월, 대신 구도·일구·분구 등의 세 사람을 축출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 세 사람은 비류의 부장으로 있을 때, 자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과 우마와 재물을 함부로 빼앗으며,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었다. 만약 이를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며 원망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을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하여 축출한 것이다. 그리고 곧 남부 사자 추발소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하여 부장이 되게 하였다. 발소가 부임한 후, 별도로 큰 집을 짓고 살면서 구도 등은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와서 말했다. "우리들은 소인이라 왕법을 위반하였으니, 그 부끄럽고 뉘우치는 심정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원컨대 공이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발소가 그들을 오르게 하여 같이 앉아서 말했다. "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잘못을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발소는 그들과 더불어 벗을 삼았다. 구도 등이 수치심을 느끼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발소는 위엄이 아닌 지혜로써 악한 사람을 바로 잡았으니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 하고, 발소에게 대실씨라는 성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 때 낙랑왕 최 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 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아 들이지 않겠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 때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 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들이 소리없이 성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수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 그녀를 본국에 돌려 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겨울 11월,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미려하여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이라고 하였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한다." 왕이 대답히였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첫째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했다. "청컨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죄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왕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호동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는,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하듯이 조금 때리면 맞고 많이 때리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호동은 이러한 행동으로 나아갈 줄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으니, 가히 작은 성실을 행하기 위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옛날의 공자 신생에 비유할 만하다.
12월,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 8년이었다.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24년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매화가 피었다.
27년 가을 9월, 한 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와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북이 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그를 대수촌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제4대 민중왕<閔中王  44~48  재위기간 4년>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이며,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붕어하였을때, 태자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3월, 여러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3년 가을 7월,왕이 동쪽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12월,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4년 여름 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7월, 다시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할 것이며, 별도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9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년에 왕이 붕어하였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호를 민중왕이라 하였다.


제5대 모본왕<慕本王  48~53  재위기간 5년>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이며,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붕어하자,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원년 가을 8월, 홍수가 나서 20여 개 소의 산이 무너졌다.
겨울 10월, 왕자 익을 왕태자로 삼았다.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국내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4년,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6년 겨울 11월, 두노가 임금을 죽였다. 두노는 모본 사람으로서 왕의 근신이었는데, 자기가 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통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왕을 처치하라"라고 하였다. 두노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가니 왕이 그를 앉게 하였다. 이 때 두노가 칼을 빼어 왕을 죽였다. 그를 모본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모본왕이라 하였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6  재위기간 93년>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고, 아명은 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맞이하여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3년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4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어 국경을 개척하였으니,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7년 여름 4월, 왕이 고안연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날개가 붉은 백어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10년 가을 8월, 동쪽 지방에서 사냥을 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16년 가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20년 봄 2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치고,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를 삼았다.
25년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서울에 눈이 3자 내렸다.
46년 봄 3월, 왕이 동쪽 책성으로 가는 도중에,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50년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왕이 한 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 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왕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 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55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56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붉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57년 봄 정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하였다.
59년,왕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
62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64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66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 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채 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70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71년 겨울 10월, 패자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72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80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에서 사냥을 하며 좌우의 근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와 비류나조의 양신 등이 남모르게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계승케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왕이 이미 늙었으나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대책을 세우라." 수성이 말했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이다. 왕이 지금 비록 연로하다고 하지만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있겠는가?"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 그대는 이를 의심치말라." 이 때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구실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86년 봄 3월, 수성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즐기기만 할 뿐 행동에 절도가 없었다.가을 7월, 수성이 또 기구에 사냥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가 간했다. "화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따라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예절과 겸양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형을 떠나지 않고 화란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인들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으랴만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90년 가을 9월,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끊었다. 왕이 잠을 깨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어른이며, 표범은 호랑이의 한 종류로서 작은 짐승이다. 아마도 왕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대를 끊으려고 획책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치않아 우보 고 복장에게 "내가 어제 밤 꿈에 본 것에 대하여,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고 복장이 대답하였다. "안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좋은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 일과 같이 걱정하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사소한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94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 아래서 사냥하면서 좌우의 근신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많으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기 바란다." 근신들이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누군가가 혼자 나서서 "조금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결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올바른 말로 말리지 않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당신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수성이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무엇을 의심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우리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비록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위시키려고 하니, 이것이 한 오라기의 실로 1만 균의 물건을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충효와 공손함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당신의 어진 마음을 깊이 헤아려, 반드시 당신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의 근신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였다. "대왕이 나이 많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환을 초래할까 염려된다. 따라서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그 말을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 나라 요동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겨울 10월, 우보 고 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했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12월, 왕이 수성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 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또한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오랫 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왕은 곧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이를 태조대왕이라 하였다.[[후한서]에는 "안제 건광 원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현토 태수 요광이 왕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하여 치고 싶다고 안제에게 말하니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전에는 궁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안제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에 수성이 한 나라 포로를 돌려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 때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에 이르러, 동복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 때 궁의 나이가 1백세로서, 재위 94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건광 원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의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제7대 차대왕<次大王  146~165  재위기간 19년>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이며 태조왕의 동복 아우이다. 그는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 태조대왕이 물려 준 자리를 받아 즉위하엿다. 이 때 나이 76세였다.
2년 봄 2월,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로 임명하였다.
3월, 우보 고 복장을 죽였다. 복장이 죽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선왕의 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한다. 내가 이와 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고 복장은 곧 형을 받았다. 원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7월, 좌보 목도루가 병을 구실로 퇴직하자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삼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라 하였다.겨울 10월, 비류나부 양신을 중외 대부로 삼고, 작위를 올려 우태라 하니, 그들은 모두 왕의 옛친구였다.11월, 지진이 있었다.
3년 여름 4월,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이자, 그의 아우 막덕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매어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 송 선공이 그의 아들 여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아우 목공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작은 인정에 이끌려 국가의 대계를 어지럽힌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여러 세대에 걸친 환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춘추에서는 "정도(正道)에 처하는 것을 가장 크게 여기라"라고 말하였다. 이제 태조왕이 정의를 알지 못하고, 중대한 왕위를 가볍게 여겨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넘김으로써, 화란이 한 명의 충신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으랴?
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 오면서 울었다. 왕이 여우를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왕이 사무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여우는 원래 요사스럽고,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더구나 그 빛깔이 희니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간절한 뜻을 말로 전할 수 없으므로 요괴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반성할 줄 알게 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덕을 닦으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흉하면 흉하다 하고, 길하면 길하다 할 것이지, 이미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말해놓고 다시 복이 된다고 하니, 이 무슨 거짓말인가?" 왕은 마침내 그를 죽였다.
4년 여름 4월 그믐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5월, 오성이 동방에 모였다. 천기를 맡은 관원이 왕이 노할까 두려워 하여 거짓으로 "이는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기뻐하였다.
겨울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8년 여름 6월, 서리가 내렸다.
겨울 12월, 우뢰와 지진이 있었고, 그믐날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13년 봄 2월,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여름 5월 그믐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20년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붕어하니, 나이 11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하여 왕을 죽였다. 호를 차대왕이라 하였다.

 

 

제8대 신대왕<新大王  165~179  재위기간 14년>  

 

신대왕의 이름은 백고['고(固)'를 '구(句)'라고도 한다.]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성품이 인자하며 너그러웠다. 선왕인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가까이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고는 환란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었다. 차대왕이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백고를 모셔오게 하였다. 백고가 돌아오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치면서 말했다. "선왕이 불행하게 돌아가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인심이 인자하신 당신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청컨대 존위에 오르소서." 이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가 77세였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도 왕의 근친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앞서 형제 사이에 정권을 맡긴 것은 왕위를 자손에게 전하는 법도에 대단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마음이 편치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사람 사는 곳을 떠나 먼 곳에 은둔했다가, 선왕의 흉보를 듣고 슬픈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 오늘 백성들이 나를 즐거이 추대하며 여러 대신들이 왕위를 권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그릇되게도 못난 자격으로 거룩한 자리에 앉게 되니, 편치 못함이 마치 깊은 물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혜를 먼 곳까지 펴야 할 것이며, 대중들과 더불어 나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니, 전국의 죄수들을 대사하라!" 백성들이 대사령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경하하여 "크도다! 새 임금의 은덕이여!"라고 말하였다. 애초에 명림답부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도망하였다가 새 왕의 대사령을 듣고 곧 궐문에 이르러 고하였다. "지난번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 제가 죽지 못하고 산곡으로 도망하였다가, 이제 새로운 정치가 베풀어졌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의 죄를 말씀드립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여 주시면, 시체를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라도 받겠으며, 만약 죽음을 면하게 하여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을 사람을 살리는 은혜이니, 이는 저의 원하는 바이나 감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구산뢰·누두어 두 곳을 주고, 양국군으로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패자로 삼아, 내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동시에 양맥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국상으로 고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4년, 한 나라 현토군 태수 경 림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5년,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 태수 공손 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치게 하였다.
8년 겨울 11월, 한 나라에서 대병을 일으켜 우리를 향하여 왔다. 왕이 군신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우리를 겁쟁이라 하여 자주 침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그러나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병으로 멀리까지 쳐들어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력이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은 자는 수비해야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도입니다. 이제 한 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사람 하나없이 비워 놓고 기다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써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리다 못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답부가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리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12년 봄 정월, 군신들이 태자를 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3월, 왕자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다.
14년 겨울 10월 그믐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15년 가을 9월, 국상 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내고, 20여 호의 묘지기를 두었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고국곡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이라 하였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179~197  재위기간 18년>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 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왕은 키가 9척이오,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세었고, 일의 처리에 있어서 관용과 예리함을 알맞게 겸비하였다.
2년 봄 2월, 왕비 우씨를 왕후로 삼으니, 그는 제나부 우소의 딸이다.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4년 봄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 성좌를 관통하였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6년 한 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하여 대항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8년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12년 가을 9월, 서울에 눈이 여섯 자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딸을 겁탈하고, 남의 토지와 주택을 갈취하였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모반하였다.
13년 여름 4월, 좌가려가 무리를 모아 서울을 침공했다. 왕은 서울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근자에 관직이 정실에 따라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아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나의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다. 이는 내가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의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하부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이에 4부에서는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국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자손인데,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로우며 사려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농사로 생계를 삼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써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고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 선대의 왕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처하였으나, 덕과 재주가 없어 정치를 잘 할 수 없었다. 선생은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이곳에 왔으니, 이는 나의 기쁨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행복이다. 그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진정을 다하여 주기바란다."
파소는 비록 나라에 공헌하고 싶었으나, 맡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우둔한 저로서는 감히 왕의 엄명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위업을 달성하게 하소서."
왕이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조신과 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대신들을 이간질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리라."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도이다. 이제 왕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전일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고,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안류에게 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상례를 따지지 않았으며,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은 나라 고종은 부열에게, 촉 나라 유비는 공명에게, 진 나라 부견은 왕맹에게 그러하였다. 이러한 연후에야 직위에서 현명함과 능력이 발휘되어 정치가 개선되고 교화가 이루어져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이 결연히 혼자 용단을 내려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고, 중론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백관의 윗자리에 임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옛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1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길 가에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므로, 한 되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을 풀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구제곡을 빌려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19년,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피난하여 귀순하는 한 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이 때가 한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고국천 언덕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천왕이라 하였다.



제10대 산상왕<山上王  197~227  재위기간 30년>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위궁이라고도 한다.]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는 "주몽의 후손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었는데 이가 태조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서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알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다는 말을 '위(位)'라고 하므로, 위궁으로 이름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처음 고국천왕이 별세하였을 때, 왕후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비밀로 하여 발표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의 집에 가서 말했다.
"왕이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왕의 뒤를 이어야겠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는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출입하는 것이 어찌 예절에 맞는다 하리오."
왕후가 부끄러워하며 곧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문에 나와 왕후를 맞아들여 자리에 앉히고 잔치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했다.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맏아우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되겠으나, 그는 나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례하고 오만하며 예절없이 대하였다. 이에 따라 아주버니에게 온 것이다."
이 때 연우는 예절을 더욱 극진히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왕후에게 고기를 베어주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왕후가 환궁하려 할 때 연우에게 "밤이 깊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가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대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연우가 그렇게 하였다. 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왕후가 선왕의 유명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군신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가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포위하고 외쳤다.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죄악이니 빨리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처자들까지 죽이겠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백성들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는 성사되기 어려움을 알고, 처자들과 함께 요동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 도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동복 아우이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다. 나는 이에 분개하여 상국으로 귀순하여 왔다. 원컨대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어 연우를 치게 하면, 고구려의 분란을 평정할 수 있겠다."
공손 도가 그 말을 들어 주었다. 연우가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에서 오는 군사를 막으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도망가는 군사를 추격하였다. 발기가 계수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감히 늙은 형을 죽이겠는가?"
계수가 형제간의 정의를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의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형이 일시의 분한 생각을 못이겨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무슨 뜻인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는가?"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이길 수 없어 배천으로 도주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계수가 슬피 울고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하고 돌아왔다. 왕은 슬퍼하면서도 일면 기뻐하며, 계수를 궐내로 불러 들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말했다.
"발기가 타국에 청병하여 국가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이제 그대가 이기고도, 발기를 풀어주어 죽이지 않은 것만 하여도 족한 일인데, 그가 자결한 것을 대단히 애통해하니, 그대는 도리어 나를 무도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닌가?"
계수가 서글프게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왕이 "무슨 말인가?"하고 물으니 계수가 말했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미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의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대왕의 미덕을 이루고자, 짐짓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대왕의 노여움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약 어진 마음을 베풀어 발기의 죄악을 잊어 버리고,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추어 장례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이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이미 이 말을 하였으니 죽음을 당하여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나아가 형리의 처형을 받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 앉으며, 따뜻한 표정으로 위로하여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구나. 너는 나를 탓하지 말라."
동생이 왕에게 절하고, 왕도 그에게 또한 절을 하여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가을 9월, 관리에게 명하여 발기의 상례를 지내되, 왕례로써 배령에 장사하게 하였다.
왕이 원래 우씨에 의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2년 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전국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3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7년 봄 3월, 왕이 아들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는데, 이 달 15일 밤 꿈에 하늘이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잠을 깨어 군신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하였는데,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을파소가 대답하였다. "천명이란 헤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소서."
가을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온 백성이 통곡하였다. 왕이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12년 겨울 11월, 교제에 잡을 돼지가 달아났다. 관리하는 자가 쫓아가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돼지가 이리저리 달뛰어 잡지 못하였다. 이 때 나이가 20세 가량 되고 얼굴이 아름다운 한 여자가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와 돼지를 잡아주어 쫓던 자가 돼지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그 여자가 보고 싶어 평복을 입고, 밤에 여자의 집에 갔다. 시종을 시켜 말하니, 그 집에서 왕이 온 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이 방으로 들어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려 하였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대왕의 명령을 감히 피할 수 없으니, 만약 아이가 있게되면 버리지 말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승낙하였다. 자정이 되자 왕이 일어나 환궁하였다.
13년 봄 3월, 왕이 주통촌 여자에게 갔던 사실을 왕후가 알고, 그 여자를 질투하여 남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그 여자가 이 소문을 듣고 남장을 하고 도주하였다. 병사들이 그 여자를 추격하여 죽이려 하니, 그 여자가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니, 이것이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이제 나의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이 아이는 왕의 혈육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좋으나 왕자도 죽일 것인가?"
병사들이 그 여자를 감히 죽이지 못하고 돌아와, 그 여자의 말을 보고하였다. 왕후가 노하여 기어코 죽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곧 다시 그 여자의 집에 가서 묻기를 "네가 지금 임신한 것이 누구의 아이냐?"라 하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생에 형제와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는데, 황차 성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했겠습니까? 지금 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진실로 대왕의 혈육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여자를 위로하고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곧 돌아와 왕후에게 말하니 왕후가 끝내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하였다.
가을 9월, 주통촌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후계자이다"라고 하였다. 교제에 잡을 돼지로 말미암아 그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교체라 하고, 아이의 어머니를 소후로 삼았다. 처음 소후의 어머니가 그녀를 배었을 때 무당이 점을 치고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으리라"하여 어머니가 기뻐하였고, 아이를 낳게 되자 후녀라고 이름지었었다.
겨울 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17년 봄 정월, 교체를 왕태자로 삼았다.
21년 가을 8월, 한 나라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호를 데리고 귀순해왔다. 왕이 그를 받아 들여 책성에 배치하였다. 겨울 10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23년 봄 그믐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24년 여름 4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28년, 왕의 손자 연불이 태어났다.
31년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산상릉에 장례지내고, 호를 산상왕이라 하였다.

 

 

제11대 동천왕<東川王  227~248  재위기간 21년>

 

동천왕[동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우위거이며, 아명은 교체이고,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사기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왕은 전왕 17년에 태자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정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잘랐다. 왕이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왕후가 또한 시종으로 하여금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왕은 역시 성내지 않았다.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4년 가을 7월, 국상 고우루가 죽었다. 우태 명림 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8년, 위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무당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조정에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10년 봄 2월, 오 나라의 왕인 손 권이 사신 호 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 나라에 전하였다.

11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가 개정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때가 경초 원년이었다.

12년, 위 나라 태부 사마 선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손 연을 토벌했다. 왕이 주부 대가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16년,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

17년 봄 정월, 왕자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19년 봄 삼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다. 왕이 그를 후궁으로 맞이 하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 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 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 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위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 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 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 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 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이 전쟁 시에 위 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 나라 장수 관구 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 의가 공손 연을 치자, 고구려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 검이 와서 침노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 때의 사실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말한다.

22년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원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이라고 불렀다.

 

 

제12대 중천왕<中川王  248~270  재위기간 22년>

 

중천왕[혹은 중양이라고 한다.]의 이름은 연불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많았다. 동천왕 17년에 왕태자가 되었다. 22년 가을 9월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연씨를 왕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아우 예물·사구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3년 봄 2월, 왕이 국상 명림어수로 하여금 내외의 군사에 관한 사무를 동시에 맡아 보도록 명하였다.

4년 여름 4월,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원래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털의 길이가 9척이나 되어, 왕이 사랑하였고, 장차 소후를 삼으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걱정하여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서쪽 위 나라에서 긴 머리털을 천금을 주고 산다고 합니다. 옛적에 우리 선대 임금은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 병란을 당하여 쫓겨 다녔으며, 나라를 잃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하니 이제 왕께서는 위 나라가 원하는 대로 사신을 보내 머리털 긴 미인을 진상하면, 그들은 반드시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며, 다시는 침범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짐작하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이 이 말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까 겁을 내어 도리어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여 말했다.
"왕후가 항상 나를 욕하여 '시골 계집이 어찌 여기에 있느냐?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리라'라고 합니다. 대왕이 나가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후가 나를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어찌하오리까?"
그 후 왕이 기구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자, 관나부인이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와 왕을 맞이하며 울면서 말했다.
"왕후가 나를 여기에 담아 바다에 버리려 하니, 대왕께서 미천한 목숨을 돌보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이 이상 대왕을 옆에서 모시기를 감히 바라겠습니까?"
왕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노하여 부인에게 말했다.
"네가 바다에 들어 가기를 원하느냐?"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바다에 던지게 하였던 것이다.

7년 여름 4월, 국상 명림어수가 사망하자, 비류 패자 음우를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8년에 왕자 약로를 왕태자로 삼았다. 국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9년 겨울 11월, 연나부의 명림 홀도에게 공주를 주어 혼인시켜서, 부마도위를 삼았다.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2년 겨울 12월, 왕이 두눌곡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 나라 장수 울지해[이름이 장릉의 이름에 저촉되었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15년 가을 7월, 왕이 기구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23년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중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중천왕이라 하였다.

 

 

제13대 서천왕<西川王  270~292  재위기간 22년>

 

서천왕[혹은 서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약로[약우라고도 한다.]이며,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총명하고 어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아끼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에 태자가 되었고, 23년 겨울 10월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2년 봄 정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 국상 음우가 죽었다.
9월,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었다.
겨울 12월, 지진이 있었다.

3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6월, 큰 가뭄이 들었다.

4년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7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어떤 사람은 '신성은 동북 지방에 있는 큰 진(鎭)'이라고 말한다.]에 가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가을 8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9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였다.

11년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나, 나의 덕은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먼 곳에 떨치지 못하여, 인근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제 지략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외적을 부수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특출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왕의 아우 달가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만 합니다."
왕은 곧 달가를 보내 숙신을 치게 하였다. 달가가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하여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백 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7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17년 봄 2월, 왕의 아우인 일우·소발 등의 두 사람이 모반하여, 병을 핑계대며,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방종하게 놀며, 불온한 언사를 퍼뜨렸다. 왕이 국상을 시키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도착하자 왕이 역사를 시켜 죽였다.

19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에 갔다. 해곡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광채가 났다.
가을 8월, 왕이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9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1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23년, 왕이 붕어하였다. 서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서천왕이라 하였다.

 

 

제14대 봉상왕<烽上王  292~300  재위기간 8년>

 

봉상왕[치갈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상부[혹은 삽시루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의 태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 23년에 서천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원년 봄 3월, 왕이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으며 백성들이 존경하므로, 그를 의심하여 모살한 것이다. 백성들이 말했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환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며 서로 위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2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노하였다.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왕이 곡림에 이르렀을 때, 모용 외가 왕이 나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들이 거의 도달하려 하자 왕은 이를 두려워 하였다. 그 때 신성 태수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왕을 맞으러 나갔다가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렸다. 모용 외의 군사가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대형으로 높이고, 또한 곡림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9월, 왕이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주하였다.

3년 가을 9월,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올렸다.

5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입하여 고국원에 이르렀다. 그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 중에 갑자기 사망자가 생기고 또한 광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겁을 내어 곧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모용씨는 군대가 강력하여 우리 강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만약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모용 외는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다.

7년 가을 9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 왕이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게 궁실을 증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피로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신하들이 공사의 중단을 여러번 간하였다.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11월,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8년 가을 9월, 귀신이 봉산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흉년이 들었다.
8월, 왕이 국내의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식량의 결핍과 부역의 고통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유랑하였다.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였다.
"천재가 연속하여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계곡과 구렁텅이를 헤매고 있으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근신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이러한 사정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나무를 깎고 돌을 나르는 부역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대단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주위에는 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가 피폐한 기회를 이용하여 침범해 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위로 받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중함을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아마도 나를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자 하는 것 같구려."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간하지 않으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국상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이었으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이후로는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는 왕 앞에서 물러나와 군신들과 의논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봉산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봉상왕이라 하였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300~331  재위기간 31년>

 

미천왕[호양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은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을불로 하여금 밤마다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났다.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가량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이상 주기를 요청하였다. 을불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그를 미워하여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묻었다. 을불은 이를 모르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들고,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거짓으로 압록 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발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때린 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의복이 남루하여, 누구든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파견하여, 온 나라에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물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었는데 얼굴은 비록 초췌하였으나, 행동 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했다.
"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달리 알아 보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다. 조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그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왕손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6일간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12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16년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20년 겨울 12월, 진 나라 평주 자사 최 비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 비는 비밀리에 우리 나라·단씨·우문씨를 회유하여, 모용 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으로 진공하였다. 모용 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 외 사이에 남모르는 계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 대인 실독관이 말했다.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빼앗을 수 있다."
모용 외가 그의 아들 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 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 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 외가 군사를 옆에 세우고 도를 접견하였다. 도는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자복하였다. 모용 외는 곧 도를 돌려 보내면서 최 비에게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 모용 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랐다. 최 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모용 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 외는 그의 아들 인으로 하여금 요동 관부에 진을 치게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 외가 장군 장 통을 보내 습격하여 사로잡고, 주민 1천여 호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 외는 모용 한과 모용 인을 시켜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동맹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과 인이 바로 돌아갔다.

21년 겨울 12월,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 인이 항전하여 우리가 패배하였다.

31년,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

32년 봄 2월, 왕이 붕어하였다. 미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 하였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  재위기간 40년>

 

고국원왕[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사유[혹은 쇠(釗)라고도 한다.]이다. 미천왕 15년에 태자가 되었고, 32년 봄에 왕이 붕어하자, 왕위에 올랐다.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4년 가을 8월,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5년 봄 정월,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6년 봄 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9년, 연 나라 임금 황이 침입하여 그의 군사가 신성까지 이르렀다. 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10년, 왕이 연 나라 임금 황에게 세자를 보내 예방케 하였다.

12년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왔다.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 장군 한이 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우문씨를 멸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왕께서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로 가서 불의의 공격을 하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황은 이 말을 따랐다.
11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 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왕은 아우 무로 하여금 정예 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 때 모용 한 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의 대군이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 한 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단기로 단웅곡으로 도주하였다. 연 나라 장군 모여니가 따라와서 왕모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갔다. 이 때 연 나라 장군 왕 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왕을 불렀다. 왕은 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 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13년 봄 2월, 왕이 아우를 연 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 예방케 하고, 1천 건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 나라 임금 황이 곧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왕모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가을 7월,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 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
겨울 11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15년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모용 각으로 하여금 침공케 하여 남소를 함락시킨 후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19년, 왕이 이전의 동이 호군 송 황을 연 나라에 돌려 보냈다. 연 나라 임금 준이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이라고 고쳐서 중위로 임명하였다.

25년 봄 정월,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볼모와 공물을 바치고, 왕모를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연 나라 임금 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 장군 도 감으로 하여금 왕모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왕에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으로 봉하였으니, 이전과 동일하게 되었다.

39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40년, 진 나라 왕 맹이 연 나라를 격파하였다. 연 나라 태부 모용 평이 우리 나라로 쫓겨왔다. 왕이 이를 붙잡아 진 나라에 보냈다.

4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 달 23일에 왕이 붕어하였다. 고국 언덕에 장사지냈다.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  재위기간 13년>

 

소수림왕[소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구부이며,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그는 신체가 장대하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고국원왕 25년에 태자가 되었다. 41년에 왕이 붕어하자, 왕위에 올랐다.

2년 여름 6월, 진 나라 왕 부 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 왔다.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3년, 처음으로 법령을 반포하였다.

4년, 중 아도가 왔다.

5년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로 하여금 이 절을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로 하여금 이 절을 주관하게 하니,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가 되었다.
가을 7월,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6년 겨울 11월,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7년 겨울 10월, 눈이 오지 않았다. 우레가 있었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다. 백제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8년,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9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

13년 가을 9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14년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소수림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소수림왕이라 하였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384~392  재위기간 8년>

 

고국양왕의 이름은 이연[혹은 어지지라고 한다.]이며,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에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왕위에 올랐다.

2년 여름 6월, 왕이 군사 4만을 출동하여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 나라 임금 수가 대방 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 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남녀 1만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 나라 모용 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토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기주 등지의 유랑민 다수가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 농이 범양의 방연을 요동 태수로 삼아 그들을 무마하였다.
12월, 지진이 있었다.

3년 봄 정월, 왕자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두 개였다.

5년 여름 4월, 크게 가물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6년 봄, 기근이 들어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가을 9월, 백제가 침입하여 남쪽 변경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7년 가을 9월, 백제가 달솔 진가모를 시켜 도압성을 쳐부수고, 주민 2백 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9년 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약속하였다. 신라왕이 자기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보내왔다.
3월,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관리들에게 명하여 사직단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고국양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3  재위기간 21년>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다. 9년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생포하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점령하였다.

2년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쳤다. 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4년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백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베었다.

9년 봄 정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 나라 임금 성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 대장군 모용 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남소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 연 나라의 수비군을 공격하였다. 연 나라 평주 자사 모용 귀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13년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 나라를 공격하였다.

14년 봄 정월, 연 나라 임금 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 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침내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15년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 연 나라 임금 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경북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군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경병으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 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군사와 말이 피로하였다. 동사자가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을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6년 봄 2월,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17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북연의 임금 운이 시어사 이 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조부 고 화는 고구려의 방계인데, 자칭 고양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 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운이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 보가 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었다.

18년 여름 4월, 왕자 거연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제20대 장수왕<長壽王  413~492  재위기간 79년>

 

장수왕의 이름은 거연['連'을 '璉'이라고 쓰기도 한다.]이며,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광개토왕 18년에 태자가 되었다. 22년에 왕이 붕어하자, 왕위에 올랐다.

2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사천 벌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 서울에 눈이 다섯 자 내렸다.

7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왕이 사람을 보내 위문하였다.

12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왕이 그를 후하게 예우하였다.
가을 9월, 큰 풍년이 들자 왕이 궁중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23년 여름 6월 위 나라 사람들이 연 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 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잠시 의탁하며, 훗날을 도모하겠다"라고 말하고, 비밀리에 상서 양 이를 우리 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24년, 연 나라 임금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자를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 나라가 연 나라의 백낭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 나라 사신 양 이를 따라 화룡에 가서 연 나라 임금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 나라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 나라 무기고에 있는 정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 나라 임금이 용성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복판에 서게 하고, 양 이 등은 정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 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 상시 봉 발을 고구려에 보내 연 나라 임금을 압송하라고 하였다.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면서, 연 나라 임금 풍 홍과 함께 위 나라 임금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 나라 임금은 고구려 왕이 자기의 소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 혈·낙평·비 등이 간하여 이를 중지하였다.

26년 봄 3월, 처음,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 홍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왕을 꾸짖었다. 왕은 풍 홍을 평곽에 있게 하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북풍으로 옮겼다. 풍 홍은 원래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정치와 법제도와 상벌을 자기 나라와 동일하게 하려고 하였다. 왕은 곧 그의 시종을 빼앗고, 그의 태자 왕인을 볼모로 삼았다. 풍 홍이 이를 원망하여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자기를 맞아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태조가 사신 왕 백구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치송하게 하였다. 왕은 풍 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수 손 수·고 구 등으로 하여금 북풍에서 풍 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죽이도록 하였다. 송의 사신 왕 백구 등은 풍 홍이 지휘하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장수 손 수와 고 구를 습격하여, 고 구를 죽이고 손 수를 생포하였다. 왕은 왕 백구 등이 고 구를 마음대로 죽였다는 이유로, 그를 잡아 사신편에 송 나라로 보냈다. 송 태조는 먼 곳에 있는 나라인 고구려의 뜻을 어기지 않게 위하여 왕 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

28년, 신라인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42년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54년 봄 3월, 위 나라 문명 태후가 현조의 6궁이 미비하다 하여, 우리 왕에게 지시하여 왕의 딸을 바치라고 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다"고 말하고, 아우의 딸을 대신 바치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에서 이를 인정하고 곧 안락왕 진과 상서 이 부 등을 국경으로 파견하여 폐백을 보내왔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기를 "위 나라가 이전에 연 나라와 혼인한 후 얼마 안되어 연 나라를 쳤으니, 이는 사신들이 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조사해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머지않은 시기에 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위 나라에 편지를 보내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위 나라에서는 이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대리산기상시 정 준을 보내 엄중히 질책하여, "만약 딸이 정말 죽었다면, 다시 종실의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말했다. "만약 천자가 나의 전일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지시대로 따르겠다." 그 때 마침 현조가 죽었으므로 이 일은 중단되었다.

56년 봄 2월,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57년 가을 8월, 백제의 군사가 남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59년 가을 9월, 민노각 등이 위 나라에 도망가 항복하였다. 위 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주택을 주었다. 이 때가 위 고조 연흥 원년이었다.

63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66년,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였다.

72년 위 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이제 강성하다고 보고, 여러 나라 사신들의 사관을 둠에 있어서, 제 나라 사신을 첫번째, 우리 나라 사신을 두 번째에 두었다.

79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호산성을 점령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호를 장수왕이라 하였다. 위 나라 효문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흰 색의 위모관를 쓰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한 후, 알자 복야 이 안상을 보내와 왕을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492~519  재위기간 27년>

 

문자명왕[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나운이며,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아들 고추 대가 조다였다.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장손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에 붕어하자, 나운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년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 군사와 살수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 군사가 패배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백제에서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자 우리 군사가 퇴각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4년 봄 2월,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왕이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망제를 지내고 돌아왔다.
8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백제를 구원하게 하므로 우리 군사가 퇴각하였다.

가을 7월,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군사가 니하에서 반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6년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7년 봄 정월, 왕의 아들 흥안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금강사를 창건하였다.

8년, 백제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2천 명이 투항해왔다.

11년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겨울 10월, 지진으로 인하여 가옥이 쓰러졌다. 사망자도 있었다. 양 나라 고왕이 즉위하였다.
겨울 11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12년 겨울 11월, 백제가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15년 가을 8월, 왕이 용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겨울 11월, 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공격했으나, 큰 눈이 내리고 군사들에게 동상이 걸려 되돌아왔다.왕이 장수 고로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 아래에 주둔하였다. 백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마주 싸우자 곧 퇴각하였다.

21년 가을 9월,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원산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27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왕궁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28년,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문자명왕이라 하였다. 태후가 조정에 나와 황제의 정사를 대리하였다.

 

 

제22대 안장왕<安王  519~531  재위기간 12년>

 

 안장왕의 이름은 흥안이며, 문자명왕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이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28년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2년 2월, 위 나라 군사가 바다에서 양 나라 사신을 붙잡아 낙양으로 보냈다.

3년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읍의 가난한 자들에게 한 사람마다 곡식 한 섬씩을 주었다.

5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기근이 들자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1년 봄 3월, 왕이 황성 동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와 오곡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안장왕이라 하였다.[[양서]에는 '안장왕이 재위 8년, 보통 7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제23대 안원왕<安原王  531~545  재위기간 14년>

 

안원왕의 이름은 보연이며,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커서 안장왕이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보연이 왕위에 올랐다.

3년 봄 정월, 왕의 아들 평성을 태자로 삼았다.
여름 5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었다. 사망자가 2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6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사신을 보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7년 봄 3월,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었다. 왕이 순행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10년 가을 9월,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자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2년 봄 3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았다.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15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안원왕이라 하였다.

 

 

제24대 양원왕<陽原王  545~559  재위기간 14년>

 

양원왕[양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평성이며,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남달리 호방하였다. 안원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2년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가 있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3년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하였다.

4년 봄 정월,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이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가을 9월,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6년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8년, 장안성을 쌓았다.

10년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11년 겨울 10월, 호랑이가 도성 안에 들어와 생포하였다.
11월, 낮에 금성이 나타났다.

13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겨울 10월, 환도성의 간주리가 모반하여 처형되었다.

15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양원왕이라 하였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559~590  재위기간 31년>

 

평원왕[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양성이며, 양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양원왕 재위 1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 군의 죄수들 중에서 사형수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하였다.

3년 여름 4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여 들었다. 6월, 홍수가 났다.

5년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왕이 평시의 음식을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

7년 봄 정월, 왕자 원을 태자로 삼았다.
13년 가을 7월, 왕이 패하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8월, 궁실을 중수하는 도중에 메뚜기 떼가 생기고 날씨가 가물어 공사를 중단하였다.

23년 봄 2월 그믐날, 유성이 비오듯 떨어졌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겨울 10월,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왕이 순행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25년 봄 2월, 왕이 급하지 않은 부역을 줄이고, 군읍에 사신을 파견하여 농사와 양잠을 권장토록 하였다.

28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32년, 진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대단히 두려워 하였다. 왕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다. 수 나라 고조는 왕에게 조서를 보내 "비록 스스로 번방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그 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 인구가 진 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뜻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를 보고 황공하여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려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재위 32년 겨울 10월에 붕어하였다. 호를 평원왕이라 하였다.[이 때는 수 나라 문제 개황 10년이다. [수서]와 [통감]의 '고조가 개황 17년에 조서를 주었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제26대 영양왕<陽王  590~618  재위 28년>  

        
     
수문왕,양왕 부자의 대규모공격을 물리침
        대장군 강이식,을지문덕의 활약이 돋보임

영양왕[평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원[대원이라고도 한다.]이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9년, 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하였으나, 영주 총관 위 충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수 나라 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 세적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 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중의 대부분이 죽었다.

왕이 태학 박사 이 문진으로 하여금 옛 사기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다섯 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이것를 [유기]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14년, 왕이 장군 고 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다. 그 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하였다. 고 승이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18년, 초기 수 나라 양왕이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마침 계민에게 가 있었다. 계민이 우리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었다. 이 때 황문 시랑 배 구가 양왕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에게 봉하였던 땅이며, 한 나라와 진 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정벌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 량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불초하여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이니,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왕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왕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우 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명년에는 응당 탁군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입조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토벌하리라."
왕이 이 말을 듣고, 번방으로서의 예절을 하지 않았으므로, 양왕이 장차 토벌하러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 즉 추장이었다.
여름 5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항복받지 못하고, 군사를 석두성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19년 봄 2월,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월, 신라의 우명산성을 빼앗았다.

22년 봄 2월, 수 나라 양왕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여름 4월, 양왕이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23년 봄 정월 임오일에 양왕이 말했다.
"고구려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와 예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 나라와 위 나라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현토·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니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천도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나니,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왕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입조하는 의식에도 (왕이) 직접 오기를 꺼려 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천망에서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 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 술직하며, 해변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거늘, 고구려는 이 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내왕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에 나는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향할지니,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낙랑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군사의 총수는 1백13만 3천8백 명이였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 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지냈다. 양왕은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파송하되, 상호 거리가 40리씩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황제의 진영에는 12위·3대·5성·9시가 있는데, 내외·전후·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뻗쳤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이 없었다.
2월, 양왕이 졸개들을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졸이 모여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 군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 나라 병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왕이 공부 상서 우문 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1장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가 크게 공격하였다. 수 나라 병졸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하였으나, 우리 군사들은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 나라 병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 나라 장병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 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 사웅·맹 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 군대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왕이 다시 소부감 하 조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 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 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여름 5월, 수 나라 장수들이 동쪽으로 오는 초기에 양왕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사들의 진퇴를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때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 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왕은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무마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면, 성 안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들은 양왕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왕에게 보고를 띄웠다. 그러나 회보가 올 때마다 성의 방비가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왕은 끝내 알아채지를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6월 기미일에 양왕이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벼슬이 높다거나 또한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하려 하는가? 전일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그대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의 단점이 들어날까 두려워 한 것이로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행동을 보아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인데, 그대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그대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실색을 하고 무서워 떨었다. 양왕은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모든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 군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총관 주 법상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예병 수만 명을 선발하여 곧장 성밑까지 왔다. 이 때 우리 장수는 외성에 있는 빈 절간에 군사를 숨겨 놓고, 군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내호아가 성 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쳐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우리의 숨었던 군사들이 출동하니 내호아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우리 군사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 주 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며, 다시는 감히 다른 군사들과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좌익위 장군 우문 술은 부여로 출동하고, 우익위 장군 우 중문은 낙랑으로 출동하고, 좌효위 장군 형 원항은 요동으로 출동하고, 우익위 장군 설 세웅은 옥저로 출동하고,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은 현토로 출동하고, 우어위 장군 장 근은 양평으로 출동하고, 우무후 장군 조 효재는 갈석으로 출동하고, 탁군 태수 검교 좌무위 장군 최 홍승은 수성으로 출동하고, 검교 우어위 호분 낭장 위 문승은 증지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 술 등의 군사가 노하·회원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백일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짧은 창·긴 창·옷감·전투 기재·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군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 술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에 따라 겨우 중간 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 때 왕은 대신 을지 문덕을 수 나라 군영으로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실력 유무를 알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 중문은 양왕으로 부터 만일 고려왕이나 을지 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든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우 중문은 을지 문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위무사로 와있다가 강력히 이를 말렸다. 우 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 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우 중문은 곧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을지 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와도 좋다." 그러나 을지 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 중문과 우문 술 등은 을지 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우 중문이 우문 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우문 술이 강하게 말렸다. 중문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 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 양왕은 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하여, 모든 부대로 하여금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 술 등이 마지 못하여 우 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 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 문덕은 우문 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우문 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서 일곱 번을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번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 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우문 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 간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고 하였다. 우문 술은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다. 우문 술은 방진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그 때, 우리 군사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 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가을 7월, 우문 술의 군사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 나라 장군 천수 사람 왕 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 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퇴각하였다. 다만 위 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 7백명 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왕이 크게 노하여 우문 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왕은 백제로 하여금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이 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 나라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로 하여금 수 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양왕은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 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 나라에 협조한다는 것을 성명하였으나, 실제로는 양 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 번 싸움에서 수 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24년 봄 정월, 수 나라 양왕이 다시 전국 군사들을 탁군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왕이 근신들에게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국력이 바다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좌광록 대부 곽 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양왕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양왕은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 술과 양 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고, 왕 인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인공의 강병 1천여 명에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왕이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운제·지도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 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 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 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 보며 우리 군사와 단병으로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왕이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 대부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양왕은 1백여 만 개의 푸대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푸대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뚝길을 쌓게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높이가 성보다 훨씬 높은 팔륜누거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뚝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수 나라에서 양 현감이 반역하였다는 보고가 오자, 양왕은 크게 두려워 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현감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 때 수 나라 병부 시랑 곡 사정이 본래부터 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해왔다. 양왕은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후퇴를 명하였다. 군수 기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오히려 수 나라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9십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 군사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25년 봄 2월, 양왕이 백관들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수일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왕이 다시 전국 군사를 소집하여 모든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공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왕이 회원진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수 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군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피폐된 상태였다. 수 나라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나아가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을 돌려 보냈다. 양왕이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 가진 사절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왕이 회원진에서 군사를 거두었다.
겨울 10월, 양왕이 서경에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또한 우리 왕에게 수 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왕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왕이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29년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호를 영양왕이라 하였다.

 

 

제27대 영류왕<榮留王  618~642  재위기간 24년>

 

영류왕의 이름은 건무[무를 성이라고도 한다.]이며, 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붕어하자,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 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5년, 당 나라 고왕이 수 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 붙잡혀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지·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니,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번방의 자격으로 중국의 정삭을 받들며, 오랜 동안 술직과 조공의 직무를 수행하여, 사신을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보여왔으니, 이를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니,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길이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 나라 말년에 연이어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의 땅에는 어디에나 유랑민이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니, 우리의 정의는 동일하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 보내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넒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 돌려 보냈다.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고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7년 봄 2월,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 심 숙안을 보내 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의 화상과 도교를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8년,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노자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니 당왕이 허락하였다.

9년, 신라와 백제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라고 말하였다. 당 나라 왕이 산기 시랑 주 자사에게 당왕의 신임표를 주어 보내며,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백제 두 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11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이 돌궐의 힐리 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를 올렸다.

12년 가을 8월, 신라 장군 김 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9월.

14년, 당 나라에서 광주 사마 장 손사를 보내 수 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 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동남 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21년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에 있는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우리와 싸웠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23년 왕이 당 나라에 자제들을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햇빛이 없어졌다가 사흘 후에 다시 밝아졌다.

24년, 당 나라 임금이 우리 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 낭중 진 대덕을 보내 왔다. 대덕이 우리 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니,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나라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으로서 수 나라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왕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 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 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당태종이 기뻐하였다. 대덕은 당태종에게 "고구려는, 고창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 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의 주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25년 봄 정월 왕이 서부 대인 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 당 나라 태종은 왕이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중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3백 단의 폐백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지절사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제28대  보장왕<寶藏王(上)  642~668  재위기간 26년>

왕의 이름은 장[혹은 보장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그는 건무왕의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에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김 춘추를 보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2년 봄 정월, 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3월,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술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하건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겨 당 나라에 이 뜻을 알렸다. 태종이 도사 숙달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 도덕경을 주었다. 왕이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윤 6월, 당 나라 태종이 물었다.
"개소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휘두르고 있으니, 이는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소문은 자기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토죄할가 두려워 견고한 수비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그는 방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반드시 교만하고 나태해져서 그의 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연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당태종은 "옳다"라고 대답하고, 지절사를 보내 예를 갖추어 왕을 책봉하는 조칙을 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방을 포섭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며, 세대를 계승케 하는 것은 역대의 오래된 규칙이다. 고구려 국왕 장은 사람됨이 밝고 명민하며, 식견이 상세하고 바르며, 일찍부터 예교를 배워 덕망과 의리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제 처음으로 번방의 왕위를 계승하여, 성실과 정성이 이미 드러나고 있으니, 마땅히 작위를 주어야 할 것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상주국 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봉함이 가할 것이다."
가을 9월, 신라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점령하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하여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한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5일, 밤이 밝기는 하였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뭇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3년 당태종이 사농승 상리 현장을 보내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신라는 인질을 보낸 나라이며 조공을 계속하는 나라이다. 그대와 백제는 군사를 철수하여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칠 것이다."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사자를 보내 개소문을 소환하자, 그가 돌아왔다. 현장이 개소문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권유하자,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했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 날 수 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그 기회를 노려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고,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했다.
"지난 일을 어찌 재론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고구려만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그러나 막리지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귀국하여 이러한 실정을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이제는 또한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그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 당 나라 태종 이세민은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요주·강주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 도독 장 검 등을 파견하여 유주·영주의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해·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대리경 위 정을 궤수사로 삼아서 하북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하에 두고, 그로 하여금 명령없이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경 소예에게 명령하여 하남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해로로 들어오게 하였다.
9월, 막리지가 당 나라에 백금을 바쳤다. 저 수량이 말했다.
"막리지가 자기 임금을 시해한 죄는 동방의 모든 오랑캐들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를 토벌하려 하면서 금을 받는다면, 이는 곡정( 鼎)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당태종이 그의 말을 따랐다. 고구려의 사신이 또한 "막리지가 관리 50명을 궁중 숙위로 보내려 한다"고 말하였다. 당태종이 노하여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모두 고구려의 건무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 막리지가 임금을 죽여도 복수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함으로써 대국을 속이려 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당태종은 말을 마치고 사신들을 모두 형관에게 맡겼다.
겨울 10월, 평양에 붉은 색의 눈이 내렸다.
당 나라 왕 이세민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며 말했다.
"요동은 옛날 중국의 국토이고, 또한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죽였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 따라서 그대들에게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 종군하는 자손들은 내가 잘 위무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
이세민은 그들에게 옷감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당태종이 원정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세민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향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세 가지는 모두 상서로운 행위가 아니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죽였고, 또한 대신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있으니, 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가지 않기를 권하는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케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에 군량을 비축하였다.
11월, 당왕이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 정 천숙은 이미 관직을 물러나 있었다. 당왕은그가 이전에 수 양왕을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하여, 불러 상황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조기에 항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세민이 말했다.
"지금은 수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이세민은는 형부상서 장 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회·영·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하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도록 계획하였다. 두 부대는 합세하여 유주에 대대적으로 집합하였다. 이세민은 행군총관 강 행본과 소감 구 행엄으로 하여금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운제와 충거를 만들게 하였다. 이 때 원근의 용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모였으며, 성곽 공격용 기자재를 바치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세민 이 전투 기자재들을 직접 살피고, 그 중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이를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이제 유주·계주 등지를 순행하며,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물으려 하나니, 행군 도중의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조서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수 양왕은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고구려왕은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이는, 반란을 도모하는 군대를 거느려 평화로운 무리를 공격한 격이므로 수 양왕이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필승의 조건이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며,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며, 세째는 정돈된 나라로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며, 네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쁨에 충만된 군사로 원한에 쌓인 군사와 맞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이에 모든 숙소, 공급과 설비에 따르는 도구를 절반이나 삭감하였다. 모든 군단과 신라·백제·해·거란 등에 명하여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4년 봄 정월, 이 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이세민이 정주에 도착하여 시신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국토인데, 수 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죽은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이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여력을 빌어 이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세민이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기 손으로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는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여름 4월, 이 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토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에서는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고, 절충도위 조 삼량은 기병 10여 명을 데리고 직접 성문을 위압하였다. 성 안 사람들이 놀라서 감히 나오려는 자가 없었다.
영주 도독 장 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 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고, 1만 명을 생포하였으며,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장 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 때 정 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이 세적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이세민은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 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강하왕 도종은 4천 명의 기병으로 이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모두 병력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왕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군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고 있으나, 그들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이므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왕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어찌하여 왕 앞에 적을 넘겨 드리려 하는가?"
도위 마 문거가 말했다.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사의 능력을 드러내겠느냐?"
그는 말을 마치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공격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이에 당 나라 군사들의 마음이 약간 안정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행군 총관 장 군예가 퇴주하고 당 나라 군사가 패배하였다. 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섰다. 그는 우리 군대의 진영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어 돌격해왔다. 그 때 이 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협공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니,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이세민은 요수를 건넌 다음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당왕은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 문거를 몇 급 올려 중랑장으로 삼고, 장 군예의 목을 베었다. 이세민은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이세민은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기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이 세적은 밤낮없이 12일 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이세민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 세적에게 와서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였다.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이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녕되게도 이전 연 나라 시대에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 태세가 긴박해지자,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이세민 이 세적과 만나자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왕 이세민이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이세민은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로 개칭하였다. 이 세적은 백암성 서남 쪽을 공격하고, 이세민은 서북쪽으로 갔다. 백암성 성주 손 대음이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에 나와 칼과 도끼를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삼겠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당 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틀림없이 항복하겠으면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고 하였다. 대음이 그 깃발을 세우니 성 안 사람들은 당 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모두 손 대음을 따라 항복하였다.이세민은 요동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을 때,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는 후회하였다. 이세민은그들의 변심을 보고 노하여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을 빼앗으면 마땅히 빼앗은 사람과 물건을 모두 전사들에게 상으로 주리라."
이 때 이 세적은 이세민이 백암성의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알아채고, 갑병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이세민에게 말했다.
"사졸들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합니까?"
이세민은 말에서 내려와 사과하며 말했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함부로 풀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가 차마 저지를 수 없는 행위이다. 장군의 부하로서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내가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다. 장군으로 인하여 이 성이 속죄받기를 원한다."
세적은 물러나와 성 안의 남녀 1만여 명을 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런 후에 곧 먹을 것을 주고, 80세의 노인에게는 정도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와있던 자들은 전부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요동성 장사가 부하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 성의 성사 한 사람이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해왔었다. 이세민은 그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로 개칭하고, 손 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애초에 막리지는 가시성의 군사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이 세적은 그들을 모두 생포하였다. 그들은 당 나라 군사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이세민이 말했다.
"너희들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싸우게 되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기 위하여 한 집안을 멸망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이세민은 그들에게 모두 곡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이세민은 안시성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자, 북부 욕살 고 연수와 남부 욕살 고 혜진은 우리 군사와 말갈군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이세민은 근신들에게 말했다.
"지금 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 째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항복받을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늪지가 장애가 될 것이므로, 우리 군사들은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상책이다. 둘 째는, 성 안의 군사를 데리고 야간 도주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책이다. 셋 째는,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필히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 때,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노 고 정의가 연수에게 말했다.
"진왕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제도하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이에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연수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밖 40리까지 진군하였다. 이세민은 연수가 주저하고 진군해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 두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 나라 군사가 패주하는 척하자, 연수는 "다루기가 쉽구나"라고 말하며, 앞을 다투어 진격하였다. 그는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러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이세민은 여러 장수들을 전부 불러 놓고 계책을 물으니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적을 만나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들의 심정을 살펴야 한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여러 병영을 다니는데,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달면서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승리할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면류관을 벗어놓고 직접 진지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거듭한 것은, 모두 위로 폐하의 책략을 받들어 모든 장수들이 성공을 이루어낸 것 뿐입니다. 오늘 일도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이세민은 웃으며 말했다.
"제공들이 이 일을 나에게 사양하니, 내가 제공들을 위하여 방법을 구상하겠노라."
이세민은 곧 무기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기병을 데리고 고지에 올라 산천의 형세 가운데 복병시킬 수 있는 곳과 병력의 출입이 가능한 곳을 관찰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는 말갈군과 연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진의 길이는 40리에 달했다.이세민이 이를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강하왕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전력을 다하여 천자의 군대를 방어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평양의 수비에는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정예군 5천 명을 주시어, 그들의 근본을 뒤엎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싸우지 않고도 수십만 군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세민은 이를 듣지 않고, 사신을 보내 연수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마초와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반드시 돌려 줄 것이다."
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수비 태세를 더 갖추지 않았다. 이세민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 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 무기와 우 진달에게 정예군 1만 1천 명을 주어 기습병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공격하게 하고, 이세민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이세민은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공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관리에게는 항복받을 장막을 조회당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날 밤, 유성이 연수의 병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연수 등은 이 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려 하였다.이세민은 무기의 부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연수 등은 두려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영은 이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당 나라 용문 사람 설 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리의 진영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어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당 나라의 대군이 이 때를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는 큰 혼란에 빠지고, 3만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이세민은 멀리서 인귀를 바라보다가 그를 유격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연수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자체 수비를 강화하였다.이세민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 군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 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 군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연수와 혜진은 자기 군사 3만 6천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 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세민은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말 5만필·소 5만두·명광 갑옷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노획하였다.이세민이 갔던 산의 명칭을 주필산으로 개명하고, 고 연수를 홍려경, 고 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이세민이 백암성을 공격하여 승리했을 때, 이 세적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용맹스러워,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안성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미도 적다. 따라서 만약 불시에 그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항복하면 안시성은 이미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 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를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이 항복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이세민이 말했다.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계책을 따르지 않겠느냐? 부디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
세적은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당나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당왕이 분노하였다. 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 연수·고 혜진 등이 이세민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실할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며, 도중에 있는 여타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또 말했다.
"장 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 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장 량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
이세민이 이 말을 따르려 하자 장손 무기가 홀로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르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취한 후에 군사를 먼 곳으로 진군시키는 것이 옳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장손 무기의 말을 듣고 이세민은 곧 앞서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안시성을 급히 공격하였다. 이세민이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한지 오래되어, 성 안에는 밥짓는 연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니, 이는 틀림없이 군사들을 잘 먹인 후에 야습하려는 것이다. 군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하라."
이날 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이세민이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 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이세민이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 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바로 이 때, 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이세민이 노하여 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왕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이세민이 말했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이세민은,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지므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을 것이므로,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두 주의 주민을 선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이세민은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면서,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하였다. 이세민은 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이세민은 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왕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이세민이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이세민은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군사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등 10개 성을 철폐하고, 요주·개주·암주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으로 옮겨 갔다. 고 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 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신성·건안성·주필산의 세 차례의 큰 싸움에서 우리 군대와 당 나라 군사 중에 사망자가 많았으며, 마필도 아주 많이 죽었다. 이세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라고 말하였다.

5년 봄 2월, 태종 이세민이 서울로 돌아가서 이 정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정이 대답했다.
"이는 도종이 풀어드릴 것입니다."
이세민은 도종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평양이 빈 틈을 이용하여 그 곳을 점령하자고 한 말을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이세민은 한탄하며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정신이 없었기에 생각 나지 않는다."며 후회했다.

6년, 당 나라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 앞서 왕이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세민이 이에 따라, 좌무위 대장군 우 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 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케 하고, 또한 태자 첨사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 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 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 등의 몇 성을 지났는데, 그 성이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므로, 세적이 이들을 격파하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 진달·이 해안 등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그러나 이 해안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사망한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은 송주 자사 왕 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로 하여금 당 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당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우무위 대장군 설 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그를 보좌케 하여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 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다. 그는 우리의 보병, 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우리 군사를 이겼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하여 패배하였다. 태종은 우리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에 붙였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수 나라 말기에 검남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 번의 요동 정벌 때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해야할 것이다.'
태종이 이 말을 따랐다.
가을 7월, 서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 강 위를 검남도에 파견하여, 나무를 베어 선박을 만들게 하였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 척, 넓이가 오십 척이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배들은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로를 통하여 무협에서 강남과 양주를 거쳐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고, 이리도 떼를 지어 사흘 동안 서쪽으로 갔다.
태종이 장군 설 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 문이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태종이 또한 내주 자사 이 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장차 대정벌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8년 여름 4월, 당 나라 태종이 사망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처음에 태종이 요동 원정을 할 때,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만약 위 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사공 방 현령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했다.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만 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처형할 때도 언제나 필히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 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터인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 것만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차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으며, 우리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하니, 이야말로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창파에 띄운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중국에는 경사가 깃들고, 오랑캐들은 우리를 믿을 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
양공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이와 같이 간곡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유 공권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니,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작 못하였네.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 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9년 여름 6월, 반룡사의 보덕 화상은,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 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해가 미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13년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마령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 한이 없으니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장수 안고로 하여금 말갈군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 도독 이 굴가가 대항하여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대패시켰다.

14년 봄 정월, 이보다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당 나라 고종이 영주 도독 정 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 정방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 오자, 우리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 명진 등은 우리를 맹공하여 크게 이기고, 우리 군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17년 여름 6월, 당 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 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 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소 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좌효위 장군 유 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 포주 자사 정 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했다.

20년 봄 정월, 당 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의 67개 주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4만 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 하고, 또한 홍려경 소 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제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임 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 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 사업과 모든 오랑캐 군사 35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 때 당고종이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 하였다. 울주 자사 이 군구가 말했다.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 때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오,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또한 무후도 말렸으므로 당고종이 중지하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뇌 음신으로 하여금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어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의 병영에 떨어지고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뇌 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퇴각하였다.
가을 8월, 소 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에게 정병 수만 명을 주어 압록강을 수비케 하였다. 당 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설필 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패주하였다. 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즈음, 당 나라에서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 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 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리하여 당 나라는 전후의 정벌에서 매번 큰 성과없이 물러갔다.

25년,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하였다.]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의 봉선에 참가케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조정에 남아 뒷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당신들을 처치하려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남몰래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웅거하면서, 그의 아들 헌성을 당 나라에 보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6월,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남생은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9월,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 대사로 특진시키고,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 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육과 학 처준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 동선과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인 두 의적·독고 경운·곽 대봉 등은 모두 이 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26년 가을 9월, 이 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 적이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방 동선과 고 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좌무위 장군 설 인귀가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고 간이 금산으로 나와서 우리 군사와 싸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승세를 타고 패배한 군사를 추격하였다. 설 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등 3성을 함락시킨 후, 천 남생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곽 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하여 평양으로 왔다. 이 적은 별장 풍사본을 파견하여 곽 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공급케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약속 기일을 놓쳤으므로 대봉의 진영에서 군사들이 굶주렸다. 이에 따라 그가 이 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만일의 경우 적에게 발견되어 내부의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합시를 지어서 이 적에게 보냈다. 이 적이 이를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필히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행군 관기 통사 사인 원 만경이 그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다. 이 적은 그 때서야 다시 군량과 병기를 대봉에게 보냈다. 만경이 격문을 써서 말하기를 "압록의 요충지를 지킬 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천 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다"라 하고, 즉시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쳤다. 이에 따라 당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학 처준은 안시성 아래에 있었다. 그가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우리 군사 3만 명이 엄습하니 그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27년 봄 정월, 당 나라 고종은 우상 유 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 처준과 김 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 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설 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군사 3천 명을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편 군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가 또한 부여성을 점령하자,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시어사 이 언충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고종은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선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항상 수탈을 당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천 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냈는데, 설하수에서 이 적 등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적은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 나라 허 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이 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도로 출동하였던 제군이 모두 이 적과 만나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 적 등에게 패배하였고, 이 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연이었다. 설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 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 장이 천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 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배하였다. 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 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 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 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 10월, 이 적이 귀국하려 하자,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왕 등을 소릉에 인사시킨 후,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와 다시 태묘에 인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 남산은 사재 소경, 승려 신성은 은청 광록대부, 천 남생은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정도에 따라 주었다. 천 남건은 검주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 대장군 설 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케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2년 기사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함형 원년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있다.]을 임금으로 세웠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 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2년 신미 가을 7월, 고 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군사를 격파하였다.
3년 임신 12월, 고 간이 우리의 남은 군사와 백빙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고 간이 이를 다시 격파하여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4년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 이 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의봉 2년 정축 봄 2월,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에 도착하여 당 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하였다.
개요 원년, 왕이 앙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붕어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영구를 서울로 오게 하여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수공 2년,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 초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구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저자의 견해 :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삼국사기(13권~22권)  고구려 본기 끝>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