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沸流百濟 溫祚百濟 仇台百濟 담로제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3:31

 

 

古記로 본 韓國古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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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쇄 : 1997. 8. 30.

발 행 : 1997. 9. 10.

재판인쇄 : 1979. 11. 20.

개정판 : 2004. 12. 1.

저 자 : 한 순 근

발행인 : 김 영 일

발행처 : 새암출판사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 4가 251

TEL (053) 423-4411, FAX 424-8586

출판등록번호 : 1-195

 

 

  槪說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1나라로 적혀 있지만 백제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구태(仇台)가 각 건국한 나라의 이름이다. 즉 "백제"라는 명칭을 가진 나라는 1나라가 아니고 3나라였다. 그런데 비류(沸流), 온조(溫祚), 구태(仇台)가 세운 나라는 "백제"라는 발음은 같지만 한자는 "伯帝" 百帝" "百濟"로 각 다르다. 그러나 본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 "百濟"로 적는다. 또 편의상 비류(沸流)가 건국한 나라는 비류백제(沸流百濟)로, 온조(溫祚)가 건국한 나라는 온조백제(溫祚百濟)로, 구태(仇台)가 건국한 나라는 구태백제(仇台百濟)로 각 부른다.

비류백제(沸流百濟)

소서노(召西弩)는 아버지 연타발(延陀勃)과 아들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같이 골본(忽本 일명 卒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심양(沈陽) 옆을 흐르는 비류수(沸流水` : 혼하)를 따라 하류(下流)로 내려와 패수(浿水:태자하)와 대수(帶水: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패(浿).대(帶) 지역에 정착하여 고기잡이와 소금장사 등으로 많은 재물을 모으고 B.C 31년부터 고주몽의 왕비(王妃)가 되어 고주몽을 섬겼다. [註 沸는 "불" 또는 "비"로 읽는다. 고대에 "불"은 천제 또는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

그 후 비류(沸流)는 고주몽이 자기를 태자(太子)로 삼지 않고 전에 고구려(高九黎 일명 북부여)에 있을 때 고구려(高九黎)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자신이 비록 적자(適子)는 아니지만 고주몽을 친부(親父)처럼 섬겼는데도 맏이(伯)인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데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임인년(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沸流)는 근거지인 패(浿).대(帶) 지역만 장악하였다.

그 후 A.D 14년에 고구려가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어 태자하(太子河) 중.상류 방면에 있던 양맥(梁貊)과 요양 서쪽 방면에 있던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하고 이어서 요동반도 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A.D 19년에 비류백제(沸流百濟) 지역인 패(浿).대(帶) 지역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고구려로 도망가므로써 패(浿).대(帶)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이에 비류(沸流)는 한반도에서 터전을 잡으려고 남은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미추골(彌鄒忽 :삼국유사에는 '今仁州'로 적혀 있다)에 일시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온조가 직산(稷山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멸망시키고 전의 마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비류(沸流)의 정착을 용납하지 않자 비류(沸流)는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다 위례성(慰禮城)으로 가서 온조(溫祚)에게 귀순하였다.

 

온조백제(溫祚百濟)

온조(溫祚)는 비류(沸流)가 B.C 19년에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한수(漢水)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溫)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祚)이라는 뜻인 온조(溫祚)라 칭하였다. 고대 말 온(百)은 100이라는 뜻 외에 아주 많다는 뜻이 있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한다. 따라서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 같은 뜻이다.[註 온조는 온 세상에 복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수도 명칭으로 천제(天帝)의 아들이 있는 성(城)이라는 뜻인 위례성(慰禮城)이라 칭하였다. 위(慰)는 하늘<위>에 있는 해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고대에는 "려"로 읽었는데, 부여(夫餘) 무리를 뜻한다. 즉 위례성은 천제(天帝)의 아들이 있는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온조는 천제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慰)" 자를 사용하였다. "위"는 "高"처럼 위(하늘)에 있는 천제를 뜻한다. 이때 온조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溫祚)라 칭한 것은 형 비류(沸流)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註 "慰禮"의 고대 발음은 "위례"가 아니고 "위려"이다. "위"는 "高"자와 같이 하늘에 있는 해(태양)를 가리키고, 려(禮)는 부여 부리를 가리킨다. 즉 "고려"와 같은 뜻이다.]

그후 B.C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온조(溫祚)의 모 소서노(召西弩)가 죽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온조는 한수(漢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온조는 당시 한수(漢水)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직산(稷山: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찾아가 마한으로부터 금마산(金馬山)에서 마한(馬韓)의 제후(諸侯)로 봉받고 마한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받아 그곳에 제후국(諸侯國)인 십제(十濟)를 세웠다. 이 십제는 10명이 강을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적은 숫자의 사람이 강을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고대 말 "십"은 10이라는 뜻 외에 적다, 부족하다는 뜻이 있다. 이는 온조가 마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일부러 자신을 낮춘 것이다. 그 뒤 온조는 힘을 길러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부터 다시 위례(慰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A.D 9년에 직산(稷山: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A.D 19년에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하자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온조백제는 A.D 205년에 구태백제(仇台百濟)에 점령당하여 구태백제의 1개 후국(侯國)으로 변하였다가 구이신왕(久辛王) 대(代)에 이르러 대가 끊어졌다.

구태백제(仇台百濟)

A.D 204년 10월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처남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후 다음 해 7월에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는데, 이 나라 이름은 부여(夫餘) 무리가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인 이국(伊國) 또는 부여(夫餘) 무리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라는 뜻인 남부여(南夫餘) 또는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인 백제(百濟)였다. 위구태(尉仇台)가 자신이 세운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부른 것은, 위구태의 입국(立國)을 도와준 공손씨(公孫氏)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태백제(仇台百濟)는 A.D 662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註 구태(仇台)는 누구인가? 이병도는 구태(仇台)와 고이왕(王:A.D 234~286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후한서에 구태(仇台)가 2~3세기에 걸쳐 존재한 인물로 나오고, 그 시기에 존재한 백제 임금 중 고이왕(王)이 구태(仇台)와 음이 비슷하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始祖)란에 구태(仇台) 때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고이왕(王) 때 나라 체계가 혁신되었으므로, 구태(仇台)와 고이왕(王)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백제가 4세기가 되어서야 강국으로 성장하였다는 일본 학자들의 학설에 대항하여 백제가 강국으로 성장한 시기를 앞당기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하였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또 일부 사학자는 구태(仇台)와 비류(沸流)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고기(古記)에 의하면 온조(溫祚)나 비류(沸流)의 건국시기는 기원전이고, 구태(仇台)의 건국시기는 대방군(帶方軍)이 설치된 A.D 204년 이후이므로, 구태(仇台)와 비류(沸流)는 전혀 다른 시대에 존재한 인물이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기(溫祚王紀)에 비류(沸流)는 온조왕 시대에 죽고 남은 무리는 온조왕에게 다 귀순하였다고 적혀 있으므로, 구태(仇台)와 고이왕(溫祚王)이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나 구태(仇台)와 비류(沸流)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은 사서(史書)와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근거없는 주장이다.]

 

 

 

 

 建國始祖

 

가. 비류백제(沸流百濟)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니 졸본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다음은 온조다.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年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찾아오자 세워서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더러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 대 2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 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0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三國史記 百濟本紀

 

나. 온조백제(溫祚百濟)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 혹은 주몽이라 한다.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서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적에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오간, 마려 등 열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떠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많아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로 거처를 정하려고 하니 10 신하가 간하는 말이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 보기 어려운 천험 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골로 가서 사니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 신하로 보필을 삼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 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 百濟始祖 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 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三國史記 百濟本紀

 

다. 구태백제(仇台百濟)

 

「북사 및 수서에도 "동명의 후손으로 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三國史記 百濟本紀

 

 

 

 沸流百濟

 

1).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註 고대에는 요하나 혼하를 구려하라 불렀다.)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장춘 방면)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註 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註 B.C 25년) 3월이다. 延陀勃 卒本人 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 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 後 率衆 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納穀五千石 移都訥見 而先自願納 招撫流亡 以勤王事 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歿 多勿三十四年丙寅 春三月也」[註 어떤이는 북 갈사수는 흑룡강으로, 남 갈사수는 요하로 보고 있으나, 환단고기 가섭원부여기에 대소왕의 동생이 압록곡에서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수 변두리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후 3세 47년만에 고구려에 항복했는데, 고구려는 갈사왕에게 두만강 인근에 있는 혼춘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남 갈사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기묘년(B.C 42년) 3월에 (소서노는)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註 혼하)에 이르고 西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 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 嘗言 曰若嫡子琉璃來 當封爲太子 召西弩 慮將不利於二子 歲己卯三月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 南奔至辰番之間 近海僻地而居之 十年 買田置庄 致富累萬 遠近聞風 來附者衆 北至帶水 西濱大海 半千里之土境 皆其有也 遣人致書于朱蒙帝 願以內附 帝甚悅而奬之 冊號召西弩 爲於瑕羅」 [註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중략..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는 문구는 소서노가 고주몽을 섬긴 이후의 상황을 적은 것인데 순서가 바뀌어 앞쪽에 적혀 있다.]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어하라)의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 壬寅 而薨太子沸流立 四境不附」 [註 어하라 13년이 B.C 19년이므로, 소서노가 어하라에 책봉된 해는 B.C 31년이다.]

 

위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문구에 의하면 비류(沸流)의 외조부(外祖父) 연타발(延陀勃)은 남북 갈사(曷思)를 오가며 많은 재물을 모아 고주몽을 도왔고, 비류(沸流)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겨 고주몽으로부터 패(浿).대(帶)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於瑕羅)에 책봉(冊封)받았다. 그런데도 고주몽이 비류(沸流)를 태자(太子)로 삼지 않고 고구려(高九黎 : 일명 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비류(沸流)는 고주몽이 죽고난 후 근거지인 패(浿).대(帶) 지역에서 즉위하였다.

고주몽이 창업(創業)에 공이 많은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 것은, 비류(沸流)가 친자(親子)가 아니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딸 예씨(禮氏)와 결혼한 후 B.C 58년 10월에 고무서 단군이 죽을 때 유언(遺言)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 일명 졸본)에 있던 하부여인(下夫餘人)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졸본천(卒本川)으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우고 분열된 고구려 무리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고무서 단군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비류(沸流)는 고주몽을 친부(親父)처럼 섬기며 입국(立國)을 도왔는데도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가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러나 모두가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가 장악한 지역은 근거지인 패(浿).대(帶)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때 비류가 사용한 비류라는 칭호는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며, "流"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 우리 민족은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부르고 하늘나라 임금이라 믿었는데, 지상의 "불"은 천제의 아들인 지상의 임금을 뜻하였다. [註  요사지리지에는 요나라의 정주(正州)는 백제 비류왕(沸流王)의 고지이고, 공손강의 영역이었으며, 비류수(沸流水)가 있고, 집안에서 서북으로 380리 떨어진 곳이라고 적혀 있다. 「正州 本沸流王故地 國為公孫康所並 渤海置沸流都有沸流水 戶五百 隸淥州 在西北三百八十里 統縣一」 遼史地里志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2).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니 졸본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다음은 온조다.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업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찾아오자 세워서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더러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 대 2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 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0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三國史記 百濟本紀

 

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를 정리해 본다.

 

비류(沸流)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고 다음이 온조(溫祚)였다.

고주몽은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부여(夫餘)에서 남으로 달아나 졸본(卒本)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王妃)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朱蒙)의 기업을 창업(創業)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內助)가 있었기 때문에 고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厚)하여 비류(沸流) 등을 대하는 것이 자기의 소생자(所生子)와 같았다.

그 후 고주몽(高朱蒙)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沸流)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2강을 건너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註 위에 나오는 미추골(彌鄒忽)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고 용(龍)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이때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다[三國遺事 第1卷 紀異 第1 未鄒王條 참조].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즉 미추골은 어떤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천제(天帝)의 아들이 있는 고을 즉 수도라는 뜻이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요동지역에 있던 비류백제의 수도는 패(浿).대(帶)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비류(沸流)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일시 수도로 사용한 미추골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조금 다르게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今)의 인주(仁州) 즉 인천(仁川)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에는 그냥 인주(仁州)로 적혀 있는데, 인주(仁州)가 인천(仁川)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아산만(牙山灣) 인주(仁州)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천부(仁川府)는 고려 인종(仁宗) 원년(元年)에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아산현(牙山縣)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주(仁州)는 고려 초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주(仁州)가 인천(仁川)이라고 적혀 있다.]

 

 

 

溫祚百濟

 

1).  건국지 및 수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온조(溫祚)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고, 수도는 위례성(慰禮城), 한산(漢山), 북한성(北漢城), 웅천(熊川) 순서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참고 : 온조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온조가 한수(漢水) 이북에 온조국(溫祚國)을 세웠다가 맥족(貊族) 5무리가 도성(都城)으로 들어오고, 소서노(召西奴)가 죽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 한수 이남으로 이동하여 마한(馬韓)의 제후국(諸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발흥하고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 昔馬韓先起 赫居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三國遺事

「고전기에 말하기를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B.C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온조왕 14년 병진(B.C 5년)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겨 389년이 지난 13대 근초고왕 함안 원년(A.D 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취하고 북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또 105년을 지나 22대 문주왕 즉위 원휘 3년(A.D 475년) 을묘에 이르러 웅천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酉 自卒本夫餘 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廣州)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 北漢城(今楊州)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卽位 元徽三年乙卯 移都熊川(今公州)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夫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一百二十年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三國遺事

「미추골은 인주이고,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다. 彌鄒忽仁州 尉禮城今稷山」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온조백제(溫祚百濟)가 도읍(都邑)을 옮긴 과정(過程)이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좀 더 상세하게 적혀 있다. 온조(溫祚)는 처음 한수(漢水)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수도(首都)를 위례성(慰禮城)이라 부르다가 온조왕(溫祚王) 13년 2월에 할멈으로 지칭된 여인(소서노)이 거느린 맥족(貊族) 5무리가 도성(都城) 안으로 들어오고 그 와중에 소서노(召西弩)가 죽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온조(溫祚)는 그해 7월 위례성(慰禮城)을 버리고 한수(漢水)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산(漢山)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백성들을 옮겼고, 온조왕(溫祚王) 14년 정월에 도읍을 옮겼고, 그뒤 근초고왕 때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온조왕(溫祚王) 13년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秋 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온조왕(溫祚王)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春 正月 遷都」

「근초고왕 26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移都漢山」

 

온조왕(溫祚王) 본기 13년 2월조와 5월조를 분석해 보면 온조(溫祚)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慰禮城)은 한강 북쪽에 있었고, 맥족 5무리가 도성으로 들어와 그 소동에 소서노가 죽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그해 7월 위례성을 버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십제국(十濟國)의 수도는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다"라는 삼국유사 문구와 온조에게 마한(馬韓)의 동북쪽 땅 1백리를 할양해 주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로 보아 직산(稷山) 방면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온조왕(溫祚王) 14년 정월부터 도읍지로 사용한 하남위례성(慰禮城)은 한강 남쪽에 있는 하남시 춘궁리 방면 또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방면으로 보인다.

 

2). 건국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건국경위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 혹은 주몽이라 한다.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서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적에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오간 마려 등 10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떠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많아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로 거처를 정하려고 하니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는 말이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 보기 어려운 천험.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골로 가서 사니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 신하로 보필을 삼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 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始祖 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百濟始祖 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註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온조(溫祚)가 한강 북쪽에 온조(溫祚)국을 세웠다가 괴멸된 후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십제국(十濟國)을 세운 과정 중 일부가 생략되어 있다.]

 

3). 온조백제(溫祚百濟) 역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溫祚)가 한반도로 온 경로가 적혀 있지 않으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배를 타고 마한(馬韓)으로 왔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1년조부터 13년 7월조까지는 온조(溫祚)가 한강 북쪽에 터를 잡고 있을 때의 역사이다. 이때 비류(沸流)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이 시기 비류는 요동의 패(浿).대(帶) 지역에서 비류백제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溫祚)가 한수(漢水) 북쪽에 세운 온조국(溫祚國) 역사, 그 뒤 온조가 직산(稷山 :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의 제후(諸侯)로 봉 받았을 때의 십제국(十濟國) 역사, 그 뒤 비류(沸流)가 죽은 후 개명한 백제국(百濟國) 역사, 그 뒤 위구태(尉仇台)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후 세운 구태백제 역사가 함께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온조백제의 역사를 살펴본다.

 

「온조왕 원년(B.C 18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元年 夏 五月 立東明王廟.」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姓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로 보아 위 동명왕(東明王)은 고구려(高九黎: 일명 북부여) 5세 단군 고두막(高豆莫) 즉 동명(東明)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B.C 18년에 온조(溫祚)가 나라를 세운 한강 북쪽 방면은 최리(崔理) 낙랑(樂浪)과 마한(馬韓) 사이에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공지(空地)였다. 이때 마한은 온조(溫祚) 무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마한이 한반도의 통치자를 자칭했지만 당시 한강 북쪽이 사실상 마한의 세력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한과는 달리 최리(崔理) 낙랑(樂浪)은 온조(溫祚)가 입국한 것을 안 후부터 말갈(靺鞨)을 보내어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온조왕 본기에 나오는 말갈(靺鞨)은 최리(崔理) 낙랑(樂浪) 지역 중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 함경도(咸鏡道), 강원도(江原道) 방면에 살고 있던 예(濊) 무리이다. 당시 대동강(大同江) 방면에 수도를 둔 최리(崔理) 낙랑(樂浪)의 영역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지방 등지였다. 이 낙랑(樂浪)은 A.D 32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평안도 지방, 함경도 지방 등이 점령당하고 남은 강원도(江原道) 지방도 A.D 37년에 고구려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온조(溫祚)는 입국한 후 바로 말갈(靺鞨)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온조왕 2년(B.C 17년) 봄 정월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그 사람들이 날래고 간사하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여 막고 지킬 계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3월 왕은 족부 을음이 지식과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의 직을 제수하고 병마를 위촉하였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온조왕 3년(B.C 16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므로 왕이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니 적은 크게 패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하나 둘이었다. 三年 秋 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온조왕 4년(B.C 15년)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았다. 四年 秋 八月 遣使樂浪修好」

 

말갈의 침범이 계속되자 온조왕(溫祚王)은 낙랑(樂浪)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았다. 이후 한동안 말갈은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지 않았다.

온조왕 8년 2월에 말갈(靺鞨)은 또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온조왕 8년(B.C 11년) 2월 말갈적 3천명이 위례성을 포위하니 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출전하지 아니하였다. 열흘이 지나서 적이 군량이 다 되어 돌아가므로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뒤를 쫓아 대부현에서 싸워 단번에 이기고 5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八年 春 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위 대부현(大斧峴)은 삼국사기 잡지(雜誌)에 미상 지명으로 나오나 평강 방면이고, 위 말갈은 낙랑(樂浪) 지역 중 강원도 방면에 거주하고 있던 예(濊) 무리이다.

말갈의 공격을 막아낸 온조국(溫祚國)은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낙랑(樂浪)과의 접경지대인 강원도 방면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온조왕 8년(B.C 11년)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웠다.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날에 서로 오가며 우호를 맺어 한 집안같이 지냈는데, 갑자기 우리 땅에 가까이 와서 성. 책을 세우니 혹시 침략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구의를 변치 아니하였다면 성을 헐고 책을 부숴 버린다면 의심을 할 바 없거니와 그렇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결단하자고 하니 왕은 회답하기를 "험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니 어찌 감히 이로써 우호에 변동이 있겠는가 마땅히 귀국은 의심하지 아니할 바다. 만약 귀국에서 강함을 믿고 군사를 출동한다면 소국도 대비할 계책이 서 있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더불어 평화를 손상케 되었다.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  舊好  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有   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위 낙랑태수(樂浪太守)는 한(漢) 나라 낙랑군 태수(太守)가 아니고 대동강 방면에 수도를 둔 최리(崔理) 낙랑(樂浪)의 태수(太守)이다. 당시 최리(崔理) 낙랑국(樂浪國)의 영역은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 함경도(咸鏡道), 강원도(江原道) 지방 등지로 추정되는데, 이 낙랑태수(樂浪太守)는 최리(崔理) 낙랑(樂浪)의 영역 중 강원도 지방을 다스린 태수를 말하는 것이다.

온조왕 10년에 말갈은 또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온조왕 10년(B.C 9년) 가을 9월 왕은 사냥을 나가 사슴을 잡아 마한에게 보내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니 왕은 군사 2백명을 보내어 곤미천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던 바 우리 군사가 패하게 되매 청목산에 의거하여 진을 확보하였다. 왕은 친히 기병 1백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가 구원하니 적은 보고 곧 돌아갔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

 

온조(溫祚)가 마한(馬韓)에게 사슴을 보내 준 것은 당시 한수(漢水)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마한(馬韓)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곤미천(昆彌川)은 개성 인근을 흐르는 강이고, 청목산(靑木山)은 송악산으로 추정된다.

온조왕(溫祚王) 11년 4월에 낙랑(樂浪)은 강원도 방면 말갈 무리를 시켜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말갈의 공격을 막아낸 온조국(溫祚國)은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해 7월 강원도 방면 낙랑(樂浪) 지역에 살고 있는 말갈 무리와의 접경지역에 독산, 구천 2책을 신설하여 낙랑(樂浪)의 통로를 막았다.

 

「온조왕 11년(B.C 8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쳐부수고 1백여 명을 죽였다. 가을 7월 독산, 구천 2책을 신설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拘川兩柵 以塞樂浪之路」

 

온조왕(溫祚王) 13년 2월에 내란이 일어나 할멈으로 지칭된 여인(소서노)이 거느린 맥족(貊族) 5무리가 위례성(慰禮城) 안으로 들어오는 소동이 일어나 그 와중에 소서노(召西弩)가 죽었다. 이 소동은 온조(溫祚)가 거느리고 있는 세력과 소서노(召西奴)가 요동(遼東)의 패(浿).대(帶) 지역에서 이끌고 온 세력과의 충돌로 보이는데, 맥족(貊族) 5무리가 위례성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온조가 건재한 것을 보면 이 소동은 온조 세력과 소서노 세력간의 오해(誤解)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왕 13년(B.C 6년) 봄 2월 서울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 왕모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  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위례성에서 궂은 일이 일어나자 온조(溫祚)는 무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 이남으로 이동하였다.

 

「온조왕 13년 여름 5월 왕은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는데, 하물며 궂은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하지 아니할 것 같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한강의 남쪽을 순시한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하여 장구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질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온조왕 13년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한수 이남으로 이동한 온조(溫祚)는 당시 한수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마한(馬韓)에게 사신을 보내어 천도한 사실을 알리고 강역을 정하였다.

 

「온조왕 13년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한 것을 알리고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 남으로 웅천, 서로 대해, 동으로 주양을 한계로 하였다.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  疆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위 문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전후 문구와 대비해 볼 때 백제의 사가(史家)들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溫祚)가 한수(漢水) 이북의 위례성(慰禮城)을 빼앗긴 후 한수 이남으로 이동하여 마한(馬韓)으로부터 금마산(金馬山)에서 마한의 제후(諸侯)로 봉 받고 마한의 동북땅 100리를 할양받아 십제국(十濟國)을 세웠는데, 온조가 일방적으로 마한에게 사신을 보내어 천도한 것을 알리고 사신과 마한간에 경계를 정했다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가는 바로 마한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위에 적혀 있는 강역(疆域)은 온조왕(溫祚王) 13년경의 십제국(十濟國) 강역이 아니고 온조왕(溫祚王) 38년 2월경의 백제국(百濟國) 강역으로 보인다.

 

「온조왕 13년 9월 성궐을 지었다. 九月 立城闕」

 

이때는 온조(溫祚)가 금마산에서 마한(馬韓)으로부터 제후로 봉 받고 마한의 동북 땅 1백리를 할양(割讓)받아 십제국(十濟國)을 세웠을 때이다.

다음해 정월 온조(溫祚)는 도읍을 옮기고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들을 나눠 살게 하였으며, 새로 궁궐을 지었다.

 

「온조왕 14년(B.C 5년) 봄 정월 도읍을 옮기었다. 2월 왕은 부락을 순시하여 농사를 권장하였다. 가을 7월 한강의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들을 나눠 살게 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온조왕 15년(B.C 4년) 봄 정월 새로 궁궐을 지었다. 十五年 春 正月 作新宮室,」

 

십제국(十濟國)이 한강(漢江).의 서북에 성(城)을 쌓는 등 다시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자 낙랑(樂浪)이 침략해 위례성(慰禮城)을 불살랐다. 이때 낙랑(樂浪)이 십제국(十濟國)의 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십제국과 낙랑 사이에는 완충세력이 없었다.

 

「온조왕 17년(B.C 2년) 봄 낙랑이 침략해 위례성을 불살랐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온조왕 17년조부터 다시 위례(慰禮)라는 칭호가 나온다. 고대에 복속국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玉", "日", "白", "桓", "不". "慰". "尉". "高". "古", "解". "奚" 자 등을 넣은 칭호를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온조(溫祚)가 위례라는 칭호를 다시 사용한 것을 보면 이때 십제국(十濟國)은 이미 마한(馬韓)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조왕 18년 10월에 말갈이 십제국(十濟國)을 공격하자 십제국은 말갈의 공격을 물리친 후 11월에 강원도 지방에 살고 있는 무리를 공격할 양으로 구곡(춘천 인근)에 당도하였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왔다.

 

「온조왕 18년(B.C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해 오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註 임진강)에서 마주쳐 싸워 그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구덩이에 넣고 묻어 버렸다. 11월 왕은 낙랑의 우두산성을 공격할 양으로 구곡에 당도하였다가 큰 눈을 만나 바로 돌아왔다.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온조왕 22년에 십제국은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여 고목 등 2성을 쌓았다.

 

「온조왕 22년(A.D 4년) 가을 8월 석두, 고목 2성을 쌓았다. 9월 왕은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적을 만나 단번에 싸워 이기고 싸로 잡아 장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위 부현(斧峴)은 평강지방이다.

석두(石頭), 고목(高木) 2성을 쌓아 말갈의 공격에 대비한 십제국(十濟國)은 마한(馬韓)에 대비하기 위하여 웅천(熊川)에 책(柵)을 만들었다가 마한이 책망하자 헐어버렸다.

 

「온조왕 24년(A.D 6년) 왕이 웅천에 책을 만드니 마한이 사자를 보내 책망하되, "왕이 당초 강을 건너 왔을 적에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백리 땅을 갈라 주어 안정케 하였으니, 왕에 대한 대접이 후하지 아니함이 아니니 마땅히 보답할 바를 생각해야 할 터인데, 지금 나라가 완전하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와 더불어 당적할 이 없다고 여겨 성지를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그러고도 의리가 있다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왕은 부끄럽게 여겨 그 책을 헐어 버렸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온조왕 25년경 십제국(十濟國)의 힘이 강성해졌다.

 

「온조왕 25년(A.D 7년) 봄 2월 대궐 안에 있는 우물이 갑자기 넘치고 서울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해석자가 말하기를 "우물이 갑자기 넘는 것은 대왕이 발흥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까닭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합병할 응보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 마한을 합병할 마음이 있었다. 二十五年 春 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발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並인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並呑辰.馬之心.」

 

위 문구는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고대 우리 민족은 바다, 강, 연못, 우물이 지하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를 해님(천제)의 아들인 용왕이나 하백신(河伯神)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대에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용(龍)이 궁성을 출입하는 통로인 우물이나 연못을 대궐 안 또는 옆에 두었는데, "대궐 안에 있는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라는 문구는 어떤 세력이 바다를 통하여 십제국(十濟國)으로 오므로서 십제국의 힘이 갑자기 강성해졌다는 뜻이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는 문구의 "말(馬)"은 마한(馬韓) 지역인 한반도를 가리키고, "소(牛)"는 머리에 소 뿔 모양을 한 농사의 신을 숭배한 만주 눈수, 송화강 방면의 농경지역 부여 무리(지도자 소마리,소시모리)를 가리키며, 말이 소를 낳았다는 것은 만주 눈수,송화강 방면의 부여 무리가 십제국(十濟國)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라는 것은 이때 부여 무리가 십제국으로 이주하므로서 온조(溫祚)는 본래 데리고 온 무리와 이때 이주한 부여 무리를 동시에 거느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여 무리의 십제국 이주로 십제국의 힘이 강성해지자 십제국은 온조왕 26년 10월에 마한을 습격하여 합병하였다.

 

「온조왕 26년(A.D 8년) 가을 7월 왕은 말하기를 "마한이 차차 약해 가고 상하가 마음이 이탈되니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하겠다. 혹시 다른 자에게 병합된다면 마치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한들 뭐하겠느냐 남을 앞서 빼앗아 뒤 곤난을 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二十六年 秋 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爲他所並 則唇亡齒寒 悔不可及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온조왕 26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표면으로는 사냥한다고 핑계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 금현 2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다음해 원산(圓山), 금현(錦峴) 2성이 항복하므로써 마한(馬韓)은 멸망하였다.

 

「온조왕 27년(A.D 9년) 4월에 2성이 항복하므로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 二十七年 夏 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십제국(十濟國)은 마한(馬韓)을 멸망시키고도 마한의 영역을 전부 십제국에 병합하지 못하였다. 이는 마한이 멸망한 후 금강(錦江) 이남의 소국들이 다시 뭉쳐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들었고, 또 보은, 청주 방면의 소국들도 마한(馬韓)이 멸망한 후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한을 멸망시킨 십제국은 마한의 구장(舊將) 주근(周勤)을 토벌하였다.

 

「온조왕 34년(A.D 16년) 마한의 구장 주근이 우곡성에 의거하여 배반하자 왕이 몸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아울러 그 처자까지 죽였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위 우곡성(牛谷城)은 다루왕 29년조를 보면 동부(東部)에 속해 있었다.

온조왕 36년에 십제국(十濟國)은 성(城)을 새로 쌓거나 수리하였다. 이는 남쪽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왕 36년(A.D 18년) 가을 7월에 탕정성(註 온양)을 쌓고 대두성(註 공주 두곡?)의 민가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 금현(註 금산) 2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위 문구를 보면 온조왕 36년에 십제국이 성(城)을 쌓은 지점은 금강(錦江) 이북이다. 이 무렵 금강 이남에는 익산(益山) 금마(金馬)를 수도로 한 마한(馬韓)이 있었다.

 

A.D 19년에 비류(沸流)가 죽어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한 후 온조(溫祚)는 나라 명칭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고쳤다.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 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영역을 확장하는데 성공한 온조(溫祚)는 지방을 순무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온조왕 38년(A.D 20년) 봄 2월 왕은 순무차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註 예성강)를 거쳐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사자를 보내어 농업을 권장하고 急하지 않는 일로서 백성을 소란케 하는 따위를 모조리 제거케 하였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이 온조백제에 귀순하였다.

 

「온조왕 43년(A.D 25년)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야호가 부양(註 평강)에 와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왕은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하였다. 四十三年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다루왕(多婁王) 36년부터 온조백제는 청주, 보은 방면에서 신라와 싸웠다.

 

「다루왕 36년(A.D 63년) 겨울 10월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註 청주)까지 미치고 사자를 신라에 보내어 모임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십육년 동 십월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다루왕 37년(A.D 64년) 왕은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와산성(註 보은)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옮기어 구양성을 공격하니 신라가 기병 2천명을 풀어 부딪쳐 싸워 쫓아 버렸다. 三十七年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移兵攻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A.D 205년 7월에 온조백제는 구태백제(仇台百濟)에 정복되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 十月 星孛于東井」

「초고왕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 七月 太白犯月」

 

위 "星孛于東井" 문구 중 "星孛"는 혜성이라는 뜻이나, 위 문구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대 무리라는 뜻이다. 또 "東"은 동쪽을 뜻하고, "井"은 역에서 남쪽을 뜻한다. 그리고 "우물에 나타났다"는 것은 바다를 통하여 온 세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星孛于東井" 문구는 대무리가 바다를 통하여 동남쪽에 있는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는 뜻이다. 이는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가 부여(夫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軍)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 "太白犯月" 문구 중 "太白(태백성은 금성(金星)을 가리키나 이 문구의 태백은 해를 가리킨다)"은 해가 하늘(위)에 있다고 하여 "위(尉)"자를 사용한 위구태를 가리키고, "月"은 월지(月支 : 달님의 아들 또는 마한이 다스린 지역을 뜻하는 용어) 즉 전의 직산(稷山 :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 지역에 건국된 온조백제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따라서 위 "太白犯月" 문구는 태백으로 지칭된 위구태가 월지로 지칭된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때부터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侯國)이 되었다.

온조백제(溫祚百濟)는 구태백제(仇台百濟)의 힘을 배경으로 A.D 371년에 고국원왕(故國原王)이 거느린 보기병 2만을 물리치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고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기었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A.D 371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었다. 移都漢山」

 

위 한산(漢山)을 일부 사학자는 황해도 재령(載寧)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에는 지금(今) 양주(楊州)라고 적혀 있다.

그 후 A.D 392년 7월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온조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진사왕(辰斯王)이 있던 곳은 아리수(한강) 남쪽에 있는 한성(漢城)이었다. 이로 보아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이 있기 전 궁성을 북한성(北漢城)에서 남한성(南漢城)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 진사왕(辰斯王)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 구태백제가 기각숙니(紀角宿禰) 등을 보내어 진사왕(辰斯王)을 죽이고 아신왕(阿莘王)을 세움으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A.D 396년에 온조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광개토왕에게 다시 항복한 후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阿莘王)은 태자(太子) 전지(腆支)를 일본에 피신해 있는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人質)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이는 A.D 396년 광개토왕의 구태백제 정벌 때 정벌당하지 않은 금강(錦江) 이남 구태백제 무리의 압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A.D 405년 3월에 온조백제 아신왕(阿莘王)이 암살당하자.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은 인질로 와 있던 아신왕(阿莘王)의 태자 전지(腆支)를 온조백제로 보내어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키고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註 아신왕 14년 3월조의 "백기가 대궐에서 서쪽으로 필련을 펴 놓은 것 같이 뻗혔다" 라는 문구는 왕이 암살당한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아신왕은 이때 암살당하였고, 같은 해 9월조에 "왕이 돌아갔다" 라고 적혀 있는 것은 왕위 공백기를 숨기기 위하여 아신왕의 사망시기를 실제보다 6개월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A.D 407년에 전지왕(腆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 임명하였다.

A.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이 상좌평(上佐平)에 앉아 백제의 군국정사를 모두 장악하였다.

A.D 416년경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이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의 장군으로 있다가 A.D 400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귀복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仇台百濟)에 도로 복속시기고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이 무렵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餘映)으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여영이 온조백제 전지왕(腆支王)이라고 적혀 있으나, 여영은 진서(晋書)에 의하면 A.D 416년에, 송서(宋書)에 의하면 A.D 420년과 424년에 각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A.D 4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A.D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餘映)은 전지왕(腆支王)이 아니다. 이를 보면 이 무렵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이 대외적으로 백제왕 행세를 하였고 온조백제 전지왕(腆支王)이나 구이신왕(久辛王)은 대외적으로 전혀 백제왕 행세를 하지 못하였다.

A.D 420년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이 전지왕(腆支王)과 구이신왕(久辛王)을 각 제거함으로써 온조백제는 대가 끊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久辛王)이 A.D 420년에 즉위하여 7년 후인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본기(久辛王本紀)에 구이신왕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420년에 전지왕(腆支王)이 제거될 때 함께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구이신왕의 사망시기가 실제보다 7년 정도 늦추어 젹혀 있는 것은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이 죽고 그뒤 비유왕(毘有王)이 즉위하였을 때 비유왕(毘有王)의 즉위년도에 맞추어 구이신왕의 사망년도를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온조백제의 대(代)가 끊어진 시기를 살펴보면,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영락(永樂) 6년조(A.D 396年)에 백잔(百殘)은 북쪽에 이잔(伊殘)은 남쪽에 있었는 것으로 적혀 있으므로, A.D 396년경은 아직 온조백제의 대(代)가 끊어지지 않았다. 진서(晋書)에는 여영(餘映) 다음 백제왕이 여비(餘毗)로 적혀 있고(七年百濟王餘毗復修貢職 以映爵號授之), 여비(餘毗) 다음 백제왕이 여경(餘慶 : 개로왕)으로 적혀 있다(毗死子慶代立). 즉 비유왕(毘有王), 개로왕(蓋鹵王)은 여영(餘映)의 뒤를 이은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이므로, 온조백제는 구이신왕을 마지막으로 대(代)가 끊어졌다.

 

 

 

仇台百濟(仇台百濟:일명 南夫餘 또는 伊國)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는 언제 건국되었고, 부여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우도록 공손씨(公孫氏)가 도운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구태백제가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된 배경은 무엇인가?]

 

1). 개설

 

구태백제는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가 부여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이다. 흠정만류원류고(欽定滿流原流考)에는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하여 백제는 본래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이고,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고구려에 패하자 백가(百家)를 이끌고 건너왔다고 하여 백제(百濟)라 부르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인용하여 구태(仇台)의 성(姓)이 위(尉)로 적혀 있고, 통고(通考)를 인용하여 백제(百濟)는 후한말(後漢末) 부여왕(夫餘王) 구태(仇台)가 세운 나라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지(三國志)나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에는 구태(仇台)가 후한(後漢) 말(末) 경의 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冊府元龜晉簡文帝咸安二年正月百濟遣使貢方物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按百濟爲夫餘王尉仇台之後故以夫餘爲姓.後略)

通考百濟卽後漢末夫餘王仇台之後..後略」

「唐會要 百濟本夫餘之别種 當馬韓之故地 其後有仇台者 為髙麗所破 以百家濟因號百濟 東北至新羅」欽定滿流原流考 卷三 部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 204년경에 지금의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이다. 일부 사학자는 이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북경 동쪽 계(薊) 동쪽 방면 또는 남만주(南滿洲) 금주(錦州) 방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태백제가 세워진 대방고지는 후한(後漢)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지금의 항해도 지방이지 계(薊) 동쪽 방면이나 남만주 금주 방면이 아니다.

위구태(尉仇台)가 세운 구태백제는 후에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중국의 사서에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구태백제이다.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와 구태백제를 혼동하여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으로 진출한 백제를 비류백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사(北史)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등에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2). 건국 경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구태백제(仇台百濟)에 관한 문구를 살펴본다.

 

「북사 및 수서에도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요동태수 공손탁이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위 문구에 의하면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구태(仇台)는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의 사위였다.

그렇다면 구태(仇台)는 어떤 인물인가?

중국의 사서(史書)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대비하면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구태(仇台)는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이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為東夷強國.」 北史 列傳第八十二 百濟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차츰 강성해져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東明之後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於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為東夷強國.」隋書 列傳第四十六 百濟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내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이 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 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三國志 魏志 東夷傳 卷30 夫餘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 수서(隋書), 북사(北史) 등에는 공손탁(公孫度)의 딸로 적혀 있고, 삼국지 부여전에는 공손탁의 종녀(宗女)로 적혀 있다.]

 

3) 구태백제(仇台百濟) 건국의 시대적 배경

 

그렇다면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는 왜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대방군(帶方軍)으로 이동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백제의 시조가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한(漢) 나라의 고구려 포위전략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A.D 44년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그곳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 몇 년 뒤 A.D 48년에 후한(後漢)은 고구려 북쪽에 있는 부여(夫餘)와 통교(通交)하여 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보복하여  A.D 49년에 선비(鮮卑)와 같이 후한(後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모본왕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동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가 고구려에 점령되므로써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및 청천강(淸川江) 이남 지방에 설치되었던 낙랑군(樂浪郡)은 모두 소멸되었다.

그후 A.D 104-106년경에 후한(後漢)은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지방을 다시 점령하여 한군현을 재건하였고, 고구려가 재건된 한군현을 공격하자 A.D 120년에 부여왕(夫餘王)은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후한(後漢)에 보내어 한(漢).부여(夫餘) 동맹(同盟)이 결성되었고, 부여(夫餘)는 이 동맹에 따라 고구려가 한군현(漢郡縣)을 공격하였을 때 왕자(王子) 위구태(尉仇台)와 군사 2만 명을 보내어 한(漢) 나라를 도왔다.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A.D 121년) 12월 왕이 마한, 예맥의 1만여 기병과 같이 현도을 포위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 한병과 합력하여 막아 싸워 왕군이 대패하였다. 十二月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위구태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그 뒤 A.D 136년에는 부여왕(夫餘王)이 후한(後漢)을 방문하여 동맹관계를 강화하였고, A.D 190년경에 공손탁(公孫度)이 요동(遼東)을 장악하였을 때 위구태(尉仇台)는 요동군(遼東郡)에 내속(內屬)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은 부여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손탁(公孫度)의 딸(종녀?)을 위구태(尉仇台)의 처(妻)로 주었다.

그후 후한(後漢)은  부여(夫餘)와 같이 고구려(高句麗)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후한(後漢)과 부여(夫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후한(後漢)은 강성해진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도 포위하기 위하여 A.D 204년에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지(荒地)를 점령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은 둔유현 이남 황지에 대방군을 두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후 왜와 한 (관련 업무는) 대방군에 속하였다.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 倭韓遂屬帶方」三國志 

 

이때 후한(後漢)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것은 한(韓)과 예(濊)가 강성(强盛)해져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소멸되고 없자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다시 포위(包圍)하기 위한 것이다.

공손강(公孫康)은 대방군(帶方郡)만으로는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包圍)하고 한(韓), 예(濊), 왜(倭)를 통제하는 것이 벅차자 위구태(尉仇台)가 거느린 부여(夫餘) 무리를 한반도로 이동시켜 부여 무리가 한반도를 장악하게 하므로서 부여 무리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고 한(韓), 예(濊), 왜(倭)를 통제하였다.

위구태(尉仇台)는 공손씨(公孫氏)의 지원을 받아 부여(夫餘) 무리를 이끌고 대방군(帶方郡 : 대방고지)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세우고,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구태백제가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위구태(尉仇台)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우고 온조백제와 마한을 정복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 十月 星孛于東井」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 七月 太白犯月」

 

온조백제 항(項)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초고왕(肖古王) 39년 10월조 문구는 위구태(尉仇台)가 부여(夫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동남쪽 방면 즉 공손강(公孫康)이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왔다는 뜻이고, 초고왕(肖古王) 40년 7월조 문구는 위구태(尉仇台)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다는 뜻이다.

구태백제(仇台百濟)의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仇台)가 처음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구태백제의 수도는 대방군(帶方郡)에 있지 않았다.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시조(始祖)가 구태(仇台)라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고마(固麻 : 웅진)에서 다스렸다고 적혀 있으며(治固麻城),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수도를 고마(固麻)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號所治所曰固麻). 이를 보면 구태백제의 수도는 웅진(熊津)에 있었다. [註 한원(翰苑) 소인(所引) 괄지지(括地志)에 "國東北六十里 有熊津城 一名 固麻城"이라 적혀 있다. 즉 웅진을 일명 고마성이라 불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태백제의 건국은 후한(後漢)의 고구려 포위 전략 및 한(韓), 왜(倭) 통제 정책과 관련이 있다.

 

4). 구태백제(仇台百濟) 역사

 

가. 대방고지(帶方故地)로 이동하여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馬韓) 정복

 

위구태(尉仇台)는 A.D 204년 10월에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항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 : 帶方故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溫祚百濟)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백제는 초고왕(肖古王)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高"나 "仇"가 들어가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 온조백제의 왕통(王統)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영락(永樂) 6년조에는 구태백제(仇台百濟)가 "伊殘(이잔)" 또는 "倭(왜)"로 비하(卑下)되어 적혀 있고, 百殘(백잔 : 온조백제 지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부여 무리의 대방군 이동

 

나.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형제(兄弟)의 나라가 됨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과 온조백제(溫祚百濟)를 정복한 구태백제(仇台百濟)는 온조백제 초고왕(肖古王)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본기(欽明天皇本紀) 2년조에는 임나(任那 : 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 구수왕(仇首王)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흠명천황 2년 가을 7월 백제는 안라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매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내통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의 한지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으로 알았다". 같이 천황을 섬겨 강적에게 항거하였다.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집안을 온전히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선조가 전의 한지와 화친할 때 한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은 바 있다. 이후 이웃과 화친을 닦아서 이웃나라에 후하게 하였다. 秋七月 百濟聞安羅日本府與新羅通計 遣前部奈率鼻利莫古 奈率宣文 中部奈率木리昧淳 紀臣奈率彌麻沙等(紀臣奈率者 盖是紀臣娶韓婦所生 因留百濟爲奈率者也 未詳其父 他皆效此也) 使于安羅 召到新羅任那執事 謨建任那 別以安羅日本府河內直 通計新羅 深責罵之(百濟本記云 加不至費直 阿賢移那斯 佐魯麻都等 未詳也) 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 與故旱岐等 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 共事天皇 俱距强敵 安國全家 至于今日 言念先祖 與舊旱岐 和親之詞 有如교日 自玆以降 勤修隣好 遂敦與國

 

야마대연맹과 형제의 나라가 됨

 

 

다. 7개 가야국(加耶國)을 평정하고 4읍(邑)을 항복 받음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49년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3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仇台百濟)는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온조백제 군사를 동원하여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邑)을 항복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은 A.D 249년이 되나, 이 사건은 초고왕 (~A.D 214년) 재위 시기에 일어났으므로, 실제 이 일이 일어난 시기는 A.D 208년경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 황전별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 등과 같이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때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칠 수 없다. 다시 사백과 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증가할 것을 청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原註 이 두 사람은 성을 알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과 개로와 함께 가게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가서 남만의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四九年 春 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火本.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奚津 屠南蠻 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 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3년(A.D 208년) 봄 2월 서방의 군.읍을 순시하고 열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飡利音 將兵拒之」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4년(A.D 209년) 가을 7월 포상팔국이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니 가라 왕자가 와 구원을 요청하므로 왕은 태자 우노와 이벌찬 이음을 시켜 육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포로 되었던 6천 명을 탈환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註 포상팔국은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勿稽子傳)에는 골포(骨浦 : 마산), 칠포(柒浦 : 칠원), 고사포(古史浦 : 고성?) 등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 물계자조(勿稽子條)에는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 고성), 사물국(史勿國 : 사천) 등으로 적혀 있다.]

 

A.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본기(神功皇后本紀) 49년조(A.D 249년)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가 왜(倭)가 백제 초고왕 , 구수왕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신공황후본기의 백제 관련 기사를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 신공황후본기에는 백제와 야마대연맹 연합군이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4개 읍을 항복받았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4년조에는 신라가 (아라)가라를 구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勿稽子傳)과 삼국유사 물계자조(勿稽子條)에도  적혀 있다. 이후 5세기 말까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 관련 기사가 사라진다. 이는 그 기간 동안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야 방면에서의 공격을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왜(倭)와 같은 세력인 구태백제를 멸시하여 왜인(倭人) 내지 왜병(倭炳)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가야국 복속시킴

 

 

라. 부여(夫餘)를 백제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古王) 5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A.D 238년에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夫餘)를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고이왕(古王) 5년(A.D 238년) 봄 2월 부산(註 부여)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古王 五年 春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 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위 부산(釜山)의 ‘부(釜)’는 부여(夫餘)를 뜻하는 고대말 불달(해님<天帝>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音)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산(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말 "달(達)"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산(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은유법으로 사용된 말이고,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辰(龍)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2월에 부여로 출병하여 50일만에 돌아왔고, 4월에 부여를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A.D 238년에 위구태(尉仇台)가 부여(夫餘)로 출병한 것은 위(魏) 나라의 사마의(司馬懿 : 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구태의 인척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구태는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로 출병하여 부여를 지킨 후 부여를 떼어 내어 구태백제(仇台百濟)의 분국(分國)으로 만들고 분국왕(分國王)으로 간위거(簡位居)를 즉위시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간위거는 이때 분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구태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分國)으로 만든 것은 그때까지 요동(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 구태백제가 동맹세력이었는데, 공손씨(公孫氏)가 위(魏) 나라에 토벌됨으로써 장춘 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부여를 구태백제왕이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을 두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A.D 246년에 부여의 간위거왕(簡位居王)은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軍糧米)를 공급하였다. A.D 238년부터 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簡位居王)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魏) 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 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에 넘어가 A.D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정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으로 만듬

 

마. 요서지방(遼西地方) 진출

 

A.D 313 - 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고 요서(遼西)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그 위치는 당(唐) 나라 재상(宰相)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에 당나라 때 유성군(柳城郡)과 북평군(北平郡) 사이라고 적혀 있다. [註 백제의 요서 진출은 모용씨의 고구려 포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서 한군현(漢郡縣) 장의'낙랑군과 대방군의 모용씨 영역으로 이동' 항 참조]

 

「그 나라는 본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에 군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당나라)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註 당의 북평군은 난하 방면이고, 유성군은 조양 방면이다.]

「백제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다.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 있던 곳이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현(晋平縣)은 진서(晉書)에 나오는데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 계림(桂林) 방면이다(鬱林郡秦置桂林郡 武帝更名 統縣九 戶六千 布山 阿林 新邑 晉平 始建 郁平 領方 武熙 安廣. 晉書 志第五 地理下). 광서장족자치구에 백제(百濟)라는 문자가 들어간 지명이 보이고 진평이라는 현 이름이 보인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살펴보건데 백제는 신라와 이웃하였다. 수서에는 백제가 남으로 신라와 접한다고 하고, 당회요에는 백제의 동북에 신라가 있다고 하여 모순을 보인다. 백제의 경계를 살펴보면 서북으로는 지금의 광녕현, 금현, 의현에서 남으로 바다 건너 동으로 조선의 항해도, 전라도, 충청도 등에 이른다.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다. 유성에서 북평까지 백제 땅에서 보면 신라는 그 동남에 있고, 경상도(서부경남 지칭)에서 웅진(공주)까지 백제 땅에서 보면 신라는 그 동북에 있다. 그 북쪽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한다. 謹案百濟與新羅壤地相錯隋書云南接新羅唐會要言東北至新羅考百濟之境西北自今廣寧綿義南踰海蓋東極朝鮮之黃海忠淸全羅等道東西狹而南北長自柳城北平計之則新羅在其東南自慶尙熊津計之則新羅在其東北其北亦與勿吉爲隣也.」 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

 

요서지방에 진출(A.D 313~314년)

 

바. 중국동해안지방 진평(晋平)에 진출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중국동해안지방 진평(晋平)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比流王) 1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비류왕 13년(A.D 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 比流王 十三年 春 早 大星西流 夏 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백제 대장군(大將軍)이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백제가 강성해졌다는 뜻이며, 검은(북쪽 지칭) 용(龍:후왕 지칭)이 왕도(王都)의 우물(井)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은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지방의 백제 대장군(大將軍)이 바다를 통하여 왕도(王都)로 와서 후왕(侯王)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A.D 316년)

 

사.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仇台百濟) 지배층이 일본으로 피신함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피하였으나 구태백제가 A.D 313-314년에 고구려의 적국(敵國)인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은 후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변하였다.

A.D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步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주둔하여 온조백제의 민가(民家)를 약탈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은 A.D 371년에 구태백제를 등에 업은 온조백제가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戰死)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백제가 승리하였다.

그후 A.D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은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10여 성을 빼앗고 같은 해 10월에 관미성을 빼앗았다.

 

「진사왕 8년(A.D 392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이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간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해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나,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조백제는 수도 방어의 요지인 관미성(關彌城)이 함락당한 후 고구려의 공격에 수도를 방어할 힘이 없었는데도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수도를 점령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이는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해 11월에 구태백제는 기각숙니(紀角宿禰) 등 장군을 온조백제로 보내어 진사왕(辰斯王)을 죽이고 아신왕(阿莘王)을 세우므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진사왕이 죽은 내용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상세히 적혀 있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이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石川宿禰 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일본서기 [註 일본서기 응신천황(應神天皇) 3년조에는 구태백제왕과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멸망한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대화왜(大和倭) 천황이 한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진사왕 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돌아갔다. 冬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자 광개토왕은 구태백제를 괴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금강하류(錦江下流)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수도(首都) 등지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보기병(步騎兵)으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받았다. 이때 수도 웅진(熊津) 등지가 점령당하자 구태백제 지배층은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倭)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0 以辛卯年倭來渡 破百殘00新羅 以爲臣民以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伊殘國 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 王威赫怒渡阿利水 遣刺迫城 00000便國城 百殘王困逼 獻0男女生九一千人細布千匹 殘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 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註 구태백제를 비하(卑下)하여 이잔(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응신조왜(應神朝倭)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왜(應神朝倭)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왜(倭)로 적혀 있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 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 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이때 광개토왕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水軍)이 점령한 지역은 구태백제의 수도가 있는 웅진(熊津 : 공주)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방이고, 금강(錦江) 이남 지방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때 구태백제 지배층은 일본으로 피신해 있다가 A.D 399년에 왜(倭)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가 점령당하고 이어서 구주왜(九州倭)와 대화왜(大和倭)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므로서 실패하였다. 그후 A.D 404년에 왜(倭)와 구태백제 잔존 무리들은 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광개토왕이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자 구태백제는 A.D 405년에 아신왕(阿莘王)을 암살하고 인질(人質)로 와 있던 전지(腆支)를 백제로 보내어 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광개토왕이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자 왜(倭) 지배층은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후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멸망하고 백제가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자 돌아갔다. 이 무렵 전라도 지방에 일본(日本) 천황가(天皇家)의 무덤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생겨난 것은 왜(倭) 지배층이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피신해 있었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8년조에도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패배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응신천황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제주도?), 현남, 지침, 곡나, 동한(가야 지역)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일본서기 [註 이때 광개토왕이 가야(加耶)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 차단과 남해(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온조백제는 A.D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으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阿莘王)이 아들 전지(腆支)를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아. 구태백제(仇台百濟)의 반격과 광개토왕의 재반격

 

영락 9년(A.D 399년)에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가 신라를 침범하였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와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A.D 396년에 고구려에 빼앗긴 남해(南海)의 제해권을 A.D 399년 이전에 도로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와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가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A.D 400년)에 보기병(步騎兵) 5만을 보내어 신라를 침범한 왜(倭)를 물리치고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영락 9年(A.D 399년) 기해 백잔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과 더불어 화통하였다. 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하는데, 마침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되 왜인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파괴하니 노객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아 뵙고 명을 청한다고 하였다. 九年 己亥 百殘違誓與倭密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0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000其忠00遣使環告以00」廣開土王碑文

「10년 경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관병이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가 가득하였다. 관병이 이르자 왜가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하였다. 안라인 수병이 신라성 0성을 점령해 있었다. 왜가 가득차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안라인 수병이 口口에 가득차 있었다. 왜가 록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口口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안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十年 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 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口其中官(兵)方至倭賊 退(제2면9행)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제2면10행)被我攻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록己呑卓淳 (제3면1행)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取卓淳而左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제3면2행)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제3면3행) 口口口口朝貢.」[註 파란색 글자는 비문징실로 보충한 것임]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양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伊, 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영락(永樂) 6년조, 9년조, 10년조 사실이 함께 뒤섞여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구태백제가 이(伊)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이 이(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仇台百濟系)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소국(小國)을 세우고 근국(根國)의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왜(倭)는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왜(倭)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그후 영락 14년(A.D 404년)에 구태백제(仇台百濟)는 왜(倭)를 동원하여 고구려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다.

 

「영락 14년(A.D 404년) 갑진 왜가 대방의 경내로 침입하여...석성... 배들이 줄을 이었다..인솔하여..평양..(왜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태왕이 군사들에게 왜구의 길을 막고 시살토록 하니 왜구는 궤패되었고 무수히 죽였다. 永樂 十四年 甲辰 以倭00 侵入帶方界 0000石城0聯船 000率000平壤000鋒相遇 王幢要截0刺 倭寇潰敗斬殺無數」[註 위에 나오는 대방(帶方)과 석성(石城)의 위치는 어디인지 불명이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대체로 항해도나 경기북부 지방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위서(魏書)에는 대방(帶方)과 석성(石城)이 모두 대릉하 방면에 있고, 대방(帶方)은 낙랑군(樂浪郡)에, 석성(石城)은 건덕군(建德郡)에 각 속해 있다. 이곳은 광개토왕에게 배앗긴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이 있던 곳이다.]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는 영락(永樂) 10년(A.D 400년)부터 임나연정(任那聯政)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A.D 404년에 왜(倭)가 고구려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임나연정의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쟁에서도 왜(倭)가 패배함으로써 구태백제와 광개토왕간의 10여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은 광개토왕의 승리로 끝이 났고, 광개토왕은 임나연정을 통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 지배층과 일본열도왜 지배층은 구태백제 지역 중 A.D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점령되지 않은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 참고:광개토왕 즉위 후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고구려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원인 -

A.D 392년 이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전술 때문이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전술 과 고구려의 전략.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步兵戰術)과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주전술(主戰術)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上陸戰術)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補助)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는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乘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倭)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주로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大艦)과 수군(水軍)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水軍)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水軍)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구려 수군(水軍)이 한강하류(漢江下流)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 성(城)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孤立)시킨 것, A.D 396년에 고구려 수군(水軍)이 금강하류(錦江下流)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熊津) 등지를 괴멸시킨 것, A.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한 왜(倭)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水軍)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水軍)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이 한반도 백제 지역 통치

 

A.D 396년에 있은 광개토왕의 구태백제 공격 이후 일본으로 피신한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은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기 위하여 A.D 405년 3월에 아신왕(阿莘王)을 암살한 후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와 있던 전지(腆支)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다.

A.D 407년에 전지왕(腆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 임명하였다.

A.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이 상좌평에 앉아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장악하였다.

A.D 416년경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이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으로 있다가 A.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귀복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기고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이 무렵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餘映)으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여영이 온조백제 전지왕(腆支王)이라고 적혀 있으나, 여영은 진서에 의하면 A.D 416년에, 송서에 의하면 A.D 420년과 424년에 각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A.D 4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A.D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은 전지왕이 아니다.

A.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은 전지왕과 구이신왕을 각 제거하여 온조백제의 대(代)를 끊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久辛王)이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본기(久辛王本紀)에 구이신왕(久辛王)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A.D 420년에 전지왕(腆支王)이 제거될 때 같이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毘有王) 29년조에 의하면 A.D 455년에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비유왕이 죽었다.

 

「비유왕(毘有王) 29년(A.D 455년) 봄 3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다. 잠간 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갔다. 毘有王 二十九年春三月 王獵於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진서(晋書), 송서(宋書), 남사(南史) 등에는 여영 다음 백제왕이 여비(餘毗)로 적혀 있으므로,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다.]

 

위 문구는 온조백제계(溫祚百濟系) 장군들이 그 해 3월에 수도 한산(漢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커서 비유왕이 진압하지 못하자 그해 9월에 흑룡(黑龍 : 요서분국장군 지칭)이 출동하여 한강을 통하여 수도로 와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때 비유왕이 반란군의 의하여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온조백제계 장군들은 개로왕기(蓋鹵王紀) 21년조에 나오는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 등으로 보이며, 이들은 비유왕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그후 A.D 475년에 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여 개로왕을 죽였다.

A.D 458년에 개로왕은 백제본국의 군사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보내었다. 이때부터 A.D 463년 사이에 백제는 난하(灤河) 서쪽 요서지방(遼西地方)을 다시 수복(收復)하여 A.D 465년에 그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광양태수(廣陽太守) 등을 두었다.

 

차.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김

 

A.D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점령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당하자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A.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동성왕은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다음해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을 세운 후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대화왜( 大和倭) 군사를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으로 보내어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당항한 고구려는 일년에 한번 보내던 북위(北魏) 사신을 이 해부터 A.D 495년까지 일년에 2-3번씩 보내며 북위(北魏)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참고 : 북위에 사신을 보낸 회수(回數) : 장수왕 76년(A.D 488년)  2월, 4월, 윤8월(3회). 77년(A.D 489년) 2월, 6월, 10월(3회). 78년(A.D 490년) 7월, 9월(2회). 79년(A.D 491년) 5월, 9월(2회). 문자명왕(文咨明王) 원년(A.D 492년) 6월, 8월, 10월(3회). 3년(A.D 494) 정월, 7월(2회). 4년(A.D 495년) 2월, 5월(2회).]

 

 카. 중국동해안지방 확장

 

백제는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고 그 해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대화왜(大和倭) 군사를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으로 보내어 백제의 군사력을 강화한 후 북위(北魏)를 물리치고 산동성(山東省) 방면에 성양태수(城陽太守)와 청하태수(靑河太守)를 강소성(江蘇省) 방면에 광릉태수(廣陵太守) 등을 각 두었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건위장군 광양태수를 장사 고달이 겸하게 하고, 건위장군 조선태수를 사마 양무가 겸하게 하고, 선위장군을 참군 회매가 겸하게 하였으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관작을 내려주십시오..중략...고달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 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도 내렸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 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 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裡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效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 詔可 竝賜軍號, 除太守..後略」 南齊書 百濟傳  [註 광양태수는 계 방면이다. 廣陽國 高帝燕國 昭帝元鳳元年為廣陽郡 宣帝本始元年更為國 縣四 薊..方城,廣陽,陰鄉. 漢書]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중략..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臣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고구려 연합군을 비하한 말)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흉리의)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중략..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에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에,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에, 목간나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용양장군 낙랑태수를 장사 모유가 겸하게 하고, 건무장군 성양태수를 사마 왕무가 겸하게 하고, 진무장군에 조선태수 장새를, 양무장군에 진명을..중략..각 임명하였으니 성조(남제)에서도 임명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克攘列辟 往姐瑾等並蒙光除 臣庶鹹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殭屍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並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타.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 상실

 

A.D 501년에 반란이 일어나 왜(倭)가 지원한 무령왕(武寧王)이 승리하여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정변으로 동성왕(東城王)이 죽고, 동성왕계(東城王系)인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 출신들은 몰락하였다. 이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써 백제는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상실하였다.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至 是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상해 서남), 회계(강소성 소주),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四曰左越 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천감시대(A.D 502년~)에 백제가 고구려에 공파(攻破)되어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다고 적혀 있어 고기(古記) 내용과 부합한다.

 

天監元年(A.D 502년) 進太號征東將軍 尋為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梁書 百濟傳

 

이로 인하여 백제의 국력이 약화되어  백제의 위상(位相)은  낮아지고 대화왜(大和倭)의 위상은 높아져,  백제는 대화왜의 종주국(宗主國) 위치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위상이 역전되었다.

 

하.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김

 

성왕 16년(538년)에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 뒤 무왕(武王) 때 백제는 일시적으로 익산(益山)을 임시수도 또는 별궁(別宮)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註 익산에 "王宮址""王城址""王陵" 둥의 유적이 있고, 王宮坪에서 백제 5부 중 중부를 상징(象徵)하는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일본의 "觀世音應驗記"에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枳慕密地"는 익산으로 추정된다.]

의자왕(義慈王) 20년(A.D 660년)에 백제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담로제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구태백제(仇台百濟)에는 담로제(擔魯制)라는 지방통치제도가 있었다. 이 담로제는 지방을 구태백제왕의 자제(子弟), 종친(宗親)들에게 분봉(分封)하여 다스린 지방통치제도이다.

 

「왕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일컬어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 백제에는 22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나 종친으로 분거하였다.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也」

 

위 문구는 한반도 구태백제 지역의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내용이다. [註 온조백제는 정복지의 토착소국들을 해체하고 정복지를 직할통치하였는데, 온조왕 31년에 남.북 2부를, 온조왕 33년에 동.서 2부를 더 두고, 부(部)에 성(城), 주(州), 군(郡)을 두어 직할통치하였다. 마한(馬韓), 온조백제(溫祚百濟), 구태백제(仇台百濟)의 지방통치제도 차이점을 살펴보면, 마한은 마한연맹 내 소국(小國)의 신지(臣智)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아 통치하였고, 온조백제는 정복지의 토착소국들을 해체하고 직할통치 하였으며, 구태백제는 정복지의 토착소국들을 해체하지 않고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항복을 받은 후 자제(子弟), 종친(宗親)에게 일정한 영역을 분봉하여  다스렸다. 그 때문에 토착소국들은 구태백제가 담로제를 5방으로 개편하여 직할통치를 실시한 6세기 초~중순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일부 사학자는 위 문구에 왕성(王城)을 고마(固麻)라 불렀다는 문구에 담로(擔魯)에 관한 내용이 나오자 담로제는 백제가 고마(固麻)를 수도로 사용한 A.D 475~538년경에 시행된 지방통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반도 백제 지역에 온조백제 하나만 있었는 것으로 보고, 온조백제가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A.D 475년부터 사비(泗沘)로 천도한 A.D 538년 사이에 담로제가 시행되었다고 본 것이다.

고기(古記)나 광개토왕비문을 분석해 보면 한반도 백제지역에는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공존하였고, 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국성(國城)에 짓고 일년에 4번 제사지낸다(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는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건국하여 온조백제와 마한을 정복한 A.D 205년경에 수도를 고마(固麻)에 두고 그때부터 담로제를 시행하였다.

그렇다면 담로제는 언제 폐지되었을까?

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수도가 고마(固麻 : 공주)로 적혀 있고, 지방제도로 5방이 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담로제는 구태백제가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기기(A.D 538년) 이전에 이미 폐지되었다.

구태백제는 한반도 구태백제 지역 외에 일본열도나 중국 방면에도 담로(擔魯)를 두었다.

 

1). 일본열도 방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52년조에는 백제가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신공황후(神功皇后)에게 준 내용이 나오고,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에는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준 내용이 나온다.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은 A,D 247년 신공황후 사망 후 일어난 내란으로 와해(瓦解)되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신공황후가 실제 사망한 A.D 247년부터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실제 즉위한 A.D 390년까지 120년간의 천황공백기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47년조부터 69년조 사이에 적혀 있고, 그 내용 중에 근초고왕(近肖古王), 근구수왕(近仇首王), 침류왕(枕流王), 진사왕(辰斯王)의 즉위와 사망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로 보아 신공황후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 때까지 140여년 간의 천황공백기 중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재위 시기는 백제왕이 일본열도의 백제계(百濟系) 소국(小國)을 직할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구태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는 백제계 소국에 구태백제왕의 자제나 종친을 담로(擔魯)로 보냈을 것이다.

그 후 A.D 390년에 대화(大和) 지방에 세워진 응신조(應神朝)나 A.D 488년에 세워진 인현조(仁賢朝)도 백제의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하여 세워진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이때도 구태백제는 구태백제왕의 자제, 종친을 군(君) 등의 이름으로 일본에 담로(擔魯)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에서 곤지(昆支)나 사마(斯麻) 또는 군(君)을 일본열도에 보내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구태백제가 일본에 구태백제왕의 자제나 종친을 담로로 보낸 것은 천황(天皇)을 견제하고, 또 일본열도에 흩어져 있는 백제계 소국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중국 방면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중국의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에도 담로(擔魯)를 보냈다. 그런데 중국에 보낸 담로(擔魯)는 여씨(餘氏)가 아닌 사람도 보이는데, 이는 임무의 특성상 구태백제왕의 자제(子弟)나 종친(宗親)보다는 유능한 장수(將帥)들을 많이 보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담로(擔魯)들의 직명(職名)을 보면, 왕(王)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면중왕(面中王)이고, 후(侯)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불사후(弗斯侯), 불중후(弗中侯), 팔중후(八中侯)이고, 태수(太守)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광양태수(廣陽太守), 조선태수(朝鮮太守), 대방태수(帶方太守), 광릉태수(廣陵太守), 청하태수(淸河太守), 성양태수(城陽太守), 낙랑태수(樂浪太守) 등이다.

 

 

百濟의 海外分國 變動狀況

 

1). A.D 396년부터 송(宋) 건국 시 까지 백제분국(百濟分國) 상황

 

A.D 396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仇台百濟)의 수도 등지가 점령되고 온조백제(溫祚百濟)가 항복한 후 A.D 400년에 대마도왜(對馬島倭)와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과 요서분국(遼西分國)의 백제장군들이 광개토왕에게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였다.

그 후 A.D 416년에 동진(東晋)의 안제(安帝)는 백제왕 여영(餘映)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에 책봉하였다.

 

「전지(腆支王) 12년(A.D 416년)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 十二年 東晉安帝遣使冊命王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저자는 양서(梁書) 문구를 보고 구태백제왕 여영(餘映)과 온조백제 전지왕(腆支王)을 같은 인물로 착각하여 전지왕(腆支王) 본기(本紀)에 적었다.]

 

동진(東晋)은 A.D 386년에 백제왕 여휘(餘暉)를 "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에 책봉(冊封)한 후 한동안 백제왕을 책봉하지 않다가 A.D 416년에 여영(餘映)을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동진(東晋)이 한동안 백제왕을 책봉하지 않은 것은 백제가 A.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중국동해안지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위 책봉(冊封)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동진(東晋)과 백제가 우호관계에 있다는 것과 백제가 동진의 동쪽 중국동해안지방 즉 강좌(江左) 방면을 영유하고 있다는 것을 동진 황제가 확인한 것이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仇台百濟)는 A.D 400년에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함으로써 상실한 중국동해안지방을 광개토왕이 죽은 후 전의 중국동해안분국 백제장군들을 다시 백제에 복속시킴으로써 수복하였다. 그러나 전의 요서분국은 아직 수복하지 못하였다.

 

A.D 416년경 중국동해안 방면 백제분국

 

2). 송(宋) 나라 때 백제분국 상황

 

송(宋)은 백제계(百濟系) 출신으로 추정되는 유유(劉裕)가 동진(東晋)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로서, 입국하고부터 백제와 우호관계가 계속되었다. [註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5 도이(島夷) 유유전(劉裕傳)에는 유유를 도이로 적었는데, 이 도이는 왜(倭) 또는 백제를 의미한다.]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송(宋) 고조(高祖)는 의희 12년(A.D 420년)에 구태백제왕(仇台百濟王) 여영(餘映)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이 봉책명(封冊名)은 여영이 A.D 416년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받은 "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보다 1 품(品)이 높은 2 품(品)이다. 

위 책봉(冊封)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송(宋)과 백제가 우호관계에 있다는 것과 백제가 강좌(江左)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영유하고 있다는 것을 송(宋) 황제가 확인한 것이다.

 

「의희(義熙) 12년 고조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 여영을 진동대장군에 책봉하였다. 義熙十二年 以百濟王餘映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高祖踐阼進號進東大將軍」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경평(景平) 2년(A.D 424년)에 구태백제왕 여영은 송(宋) 나라에 사자를 보내었고, 다음해 원가(元嘉) 2년(A.D 425년)에 송(宋) 문제(文帝) 의융(義隆)도 구태백제왕 여영에게 답례 사자(使者)를 보내었다.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에 여영이 장사 장위를 보내어 조공하고 공물을 바쳤다. 少帝景平二年 映遣長使張威詣闕貢獻」

「원가(元嘉) 2년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황제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알린다. (백제)는 누대로 충순하고 바다를 건너 정성을 바치고.후략" 元嘉二年 太祖詔之曰 皇帝問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累葉忠順 越海效誠.後略」

 

A.D 458년에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송(宋) 나라에 이미 파견한 여기(餘紀), 여곤(餘昆) 등 11명의 백제장군들을 재임명하고 이를 송(宋)에 통보하여 백제왕이 임명한 직위 그대로 송(宋)에서도 재임명하게 하였다. 이때 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 중에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송(宋)과 백제(百濟) 연합군의 주임무(主任務)는 북위(北魏) 정벌을 담당하는 것이었고, 백제 장군들을 송(宋) 장군으로 다시 임명한 것은 연합군에 편성된 백제장군들이 송(宋)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백제의 직위대로 송(宋) 장군으로 겸직 임명한 것이다.

 

「대명(大明)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臣)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정로장군 여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 여예를 보국장군에, 용양장군 목금, 여작을 용양장군에, 영삭장군 여류, 미귀를 영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 여루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二年 慶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 行征虜將軍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 餘爵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 麋貴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 並為建武將軍」宋書 百濟傳 [註 위 문구 중에 "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이전에 임명받아 재직 중인데 백제국이 지방장관을 3년마다 한번씩 교대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이때 다시 재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위 표문(表文)은 백제왕이 임명한대로 송(宋) 황제도 그대로 임명하라는 백제왕의 통보서 성격을 띈 표문(表文)이다. 송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송 나라의 관작(官爵)을 백제왕이 미리 마음대로 제수(除授)하고 송 황제보고 그대로 관작(官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되는데, 그런데도 송 황제는 백제왕이 요청한 그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이때 겸직(兼職) 임명된 백제장군들은 여씨(餘氏) 성(姓)을 가진 백제의 왕족이거나 우씨(于氏), 목씨(沐氏) 등 성(姓)을 가진 백제의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직위(職位)는 제일 우두머리인 관군장군(冠軍將軍)을 비롯하여 북위(北魏) 정벌을 담당하는 정로장군(征虜將軍)과 그외 보국장군(輔國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영삭장군(寧朔將軍), 건무장군(建武將軍) 등이다.

그 후 송(宋).백제(百濟) 연합군은 북위(北魏)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점령하였고, A.D 465년경에 백제는 그 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광양태수(廣陽太守) 등을 두었다. 이후 백제와 송은 불화관계에 빠졌는데, 이는 송.백제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에 백제가 단독으로 군현(郡縣)을 설치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송과 백제 간의 불화는 그뒤 A.D 471년경에 고구려가 송과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을 포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건위장군 광양태수를 장사 고달이 겸하게 하고, 건위장군 조선태수를 사마 양무가 겸하게 하고, 선위장군을 참군 회매가 겸하게 하였으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後略」 南齊書 百濟傳  [註 혹자는 위 "比使宋朝" 문구를 보고 고달, 양무, 회매 3인이 태시(泰始 : A.D 465-471년) 중에 송에 외교사신으로 갔다고 해석하나, 위 문구는 위 3인이 단순히 외교사신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고, 태시(泰始) 중에 백제왕의 사자(使者)로 장군(將軍), 태수(太守) 등 직위를 가지고 송나라에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서(宋書)에는 고달, 양무 등이 송으로부터 장군이나 태수 등 관작을 받은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백제가 남제(南齊)에 보낸 표문(表文)에 고달의 직위가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장사(長史), 양무의 직위가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 회매의 직위가 선위장군(宣威將軍) 겸 참군(參軍)으로 적혀 있는 것은 A.D 463년경 백제, 송 연합군이 빼앗은 난하 서쪽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백제가 송(宋) 황제(皇帝)의 재가(裁可)를 받음이 없이 단독으로 군현을 두고 고달(高達), 양무(楊茂), 회매(會邁) 3인을 태수(太守) 등에 임명하였음을 의미한다.]

 

A.D 465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 방면 백제분국

 

백제가 난하 서쪽 요서지방(遼西地方)에 요서분국(遼西分國)을 설치하므로서 백제와 송이 불화(不和)에 빠지자 고구려는 A.D 471년경에 남쪽으로 송(宋), 서쪽으로 북위(北魏), 북쪽으로 유유(蠕蠕)와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3). 남제(南齊) 때 백제분국 상황

 

남제(南齊)는 백제계(百濟系) 장군인 소도성(蕭道成)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소도성(蕭道成)은 북위(北魏) 정벌에 공훈(功勳)을 세운 장군이다. 남제(南齊)는 입국하고부터 백제와 우호관계에 있었다. [註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6 도이(島夷) 소도성전(蕭道成傳)에는 소도성이 도이로 적혀 있다.]

 

백제는 A.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국력을 다시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對馬島)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운 후, 같은 해 백제군의 주력과 왜(倭) 군사를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으로 보내었다. 백제군이 증강되자 A.D 488년부터 489년 사이에 남제(南齊).백제(百濟) 연합군과 북위(北魏).고구려(高句麗)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東城王 十年(A.D 488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三國史紀 百濟本紀

「永明六年(A.D 488年)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資治通鑑

「太和十二年(A.D 488年) 夏 四月 高麗吐谷渾國並遣使朝貢 蕭賾將陳顯達等寇邊」北魏書

「太和十三年(A.D 489年) 春 正月 戊辰 蕭賾遣衆寇邊」北魏書

 

이 전쟁에서 남제.백제 연합군북위.고구려 연합군을 패배시키고, 백제는 강소성(江蘇城)과 산동성(山東城)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점령하여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확장하였다. 후 A.D 490년에 백제왕 모대(牟大)는 남제에 표문(表文)을 올려 A.D 488-489년 전쟁의 공훈장령(功勳將令)들에 대하여 남제에서도 선례(先例)대로 백제왕이 임시로 임명한대로 관작(官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장사(長史) 고달(高達)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관작을,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사마(司馬) 양무(楊茂)는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 관작을, 선위장군(宣威將軍) 참군(參軍) 회매(會邁)는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 관작을 남제로부터 각 제수받았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건위장군 광양태수를 장사 고달이 겸하게 하고, 건위장군 조선태수를 사마 양무가 겸하게 하고, 선위장군을 참군 회매가 겸하게 하였으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임시로 직을 내렸습니다. 또 천자의 은혜는 신령하고 아름다워 온 세상이 바라는 바 입니다. 하물며 몸소 천자의 뜰을 밟고 있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오니 하늘이 살피듯 우리를 특히 가엽게 여겨 정식으로 관직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달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 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도 내렸다.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 복야 손부를 시켜 책명을 내려 죽은 조부 모도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았다. 말하기를 "아 아! 그대들은 대대로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이어받아 성실한 마음을 멀리까지 들어내었도다. 바닷길이 차갑지만 조공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규정에 따른 법을 잘 지키고 내리는 명령을 잘 받들지어다. 조서를 내려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는 이제 죽은 조부 모도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는다. 즉위 글과 인수 등과 옥,구리,범,대나무 4 부신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절하고 받아라.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했다.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 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裡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效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 茂志行清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武將軍 清河太守 詔可 並賜軍號 除太守 為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 使兼竭者僕射孫副 策命 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 曰 於戲!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滄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彝典 用纂顯命 往欽哉!其敬膺休業 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 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 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 王其拜受 不亦休乎!」 南齊書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 百濟傳

 

A.D 490년에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의 반격을 받아 다시 패배하였다. 그 후 A.D 495년에 모대(牟大)는 공훈장령(功勳將令)들에 대한 관작(官爵) 제수(除授)를 요청하는 표문(表文)을 또 올려 공훈장령들이 남제로부터 장군(將軍), 태수(太守) 등 관작를 각 받았다.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중략..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와 고구려 연합군을 비하한 말)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흉리의)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중략..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에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에,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에, 목간나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용양장군 낙랑태수를 장사 모유가 겸하게 하고, 건무장군 성양태수를 사마 왕무가 겸하게 하고, 진무장군에 조선태수 장새를, 양무장군에 진명을..중략..각 임명하였으니 성조(남제)에서도 임명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克攘列辟 往姐瑾等並蒙光除 臣庶鹹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殭屍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並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註 그 전까지 양무가 조선태수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때 장새를 조선태수에 임명하였다.]

 

A.D 490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 방면 백제분국

 

4). 양(梁) 나라 때 백제분국 상황

 

양(梁) 나라 역시 백제계(百濟系) 장군 출신인 소연(蕭衍)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註 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6  도이(島夷) 소연전(蕭衍傳)에는 소연이 도이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양(梁) 나라가 백제장군들을 양(梁) 나라 장군으로 임명한 내용이 나오지 않고, 또 동성왕(東城王)이 죽은 후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의 태수나 장군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송서(宋書)나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백제분국(百濟分國) 장군들에 대한 관작(官爵) 수여(授與)는 백제왕이 중국 황제에게 공적(功積)을 기록한 표문(表文)을 올려 재가(裁可)를 받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양서(梁書)에는 양(梁) 황제가 백제분국의 장군들에게 관작을 내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백제가 양(梁) 나라 초기에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모두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A.D 502-503년에 백제가 고구려에게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 노, 오, 월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불진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至 是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상해 서남), 회계(강소성 소주),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四曰左越 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양(梁) 나라 초기에 백제가 고구려에게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빼앗긴 것은 무령왕(武寧王)이 정변을 일으켜 동성왕과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들을 제거하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이에 반발하여 백제에서 이탈(離脫)하여 고구려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천감원년(天監元年 : A.D 502년)에 백제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다고 적혀 있다. 이는 고기(古記)) 내용과 일치한다.

 

「天監元年(A.D 502年) 進太號征東將軍 尋為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梁書 百濟傳

 

A.D 502-503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 방면

 

5). 북제(北齊), 수(隋), 당(唐) 때 백제분국 상황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威德王) 17년조와 1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A.D 570-571년경에 북제(北齊)로부터 대방(帶方)과 동청주(東靑州) 지방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위덕왕 17년(A.D 570년) 고제 후주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시중차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 十七年 高齊後主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위덕왕 18년(A.D 571년) 고제 후주가 또 왕을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十八年 高齊後主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위에 나온 대방(帶方)은 계(薊) 동쪽 방면이고, 동청주(東靑州)는 산동반도 방면이다.

 

A.D 570-571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 방면 백제분국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威德王) 2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A.D 581년에 수(隋) 나라로부터 대방(帶方)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이때 백제가 수(隋) 나라로부터 영유를 인정받은 곳은 대방(帶方) 뿐이므로, 백제는 A.D 581년 이전에 동청주(東靑州) 지방을 상실하였다.

 

「위덕왕(威德王) 28년(A.D 581년) 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수 고조가 조서로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으로 봉하였다.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위덕왕(威德王) 45년(A.D 598년) 가을 9월 왕은 수나라가 요동의 역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장사 왕변나를 수나라에 보내어 표를 올려 군도가 되기를 청하니..후략..秋九月 王聞隋遼東之役遣 使長史王辯那入隋奉表請爲軍道.後略」

 

A.D 598년에 백제가 수(隋)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군도(軍道)가 되겠다고 표(表)를 올린 것을 보면, 백제는 A.D 598년경에도 대방((帶方) : 계 동쪽)을 영유하고 있었다.

 

A.D 581년경 요서 방면 백제분국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25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당(唐) 나라로부터도 대방(帶方)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무왕 25년(A.D 624년) 봄 정월 대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고조는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대방군왕백제왕"을 삼았다.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唐高祖嘉其誠款遣使就冊王爲帶方郡王百濟王」

「동쪽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마한의 추장 제시영발는 하늘의 뜻을 거슬리고 옛 고죽국 땅을 도둑질하여 신에게 죄를 지어 오다가 신이 노하여 위기에 처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와 항복하였다. 馬韓尊長鯷是英髮分義景於扶桑數種天厭竊封疆於孤竹自貽神怒臨危轉禍率衆來降」 冊府元龜 [註 백제를 무시하기 위하여 마한(馬韓)이라 적고, 백제인을 무시하기 위하여 "鯷(메기)"로, 백제장군을 무시하여 英髮(털난 짐승)"으로 각 비하(卑下)하였고, 부유(扶桑)은 해 돋는 곳 즉 동쪽에 위치한 백제를 가리킨다.]

 

당(唐) 나라는 백제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는 백제의 대방(帶方) 영유를 인정해주었다. 이는 소위(所謂)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통전(通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그 곳에 남은 무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성 부근에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수가 약해지자 흩어져서 돌궐이나 말갈에 투항하였고, 그 군장인 부여숭은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城傍餘衆 後漸寡弱散 投突厥及靺鞨 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

 

 

百濟分國과 北魏.高句麗間의 戰爭狀況

 

고구려는 A.D 416년경에 광개토왕(廣開土王) 때 백제(百濟)로부터 빼앗은 중국동해안지방을 도로 백제에 빼앗긴 후 A.D 425년에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고 그 때부터 북위와 동맹세력이 되었다.

A.D 458년에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송(宋) 나라에 파견된 여기(餘紀), 여곤(餘昆) 등 11명의 백제장군들을 재임명하고, 이를 송(宋) 나라에 통보하여 백제왕이 임명한 직위 그대로 송나라에서도 재임명하게 하였다. 이때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는 관군장군(冠軍將軍), 정로장군(征虜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영삭장군(寧朔將軍), 건무장군(建武將軍) 등이다. 그리고 이때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 중에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송(宋)과 백제(百濟) 연합군의 주임무(主任務)는 북위(北魏) 정벌을 담당하는 것이고, 백제 장군들을 송 장군으로 다시 임명한 것은 연합군에 편성된 백제 장군들이 송 나라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백제의 직위대로 송(宋) 장군으로 겸직 임명한 것이다.

 

「대명(大明)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정로장군 여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 여예를 보국장군에, 용양장군 목금, 여작을 용양장군에, 녕삭장군 여류, 미귀를 녕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 여루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二年 慶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 行征虜將軍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 餘爵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 麋貴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 並為建武將軍」宋書 百濟傳

 

그 후 송.백제 연합군은 북위(北魏)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灤河) 서쪽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수복하였다. 이로서 백제는 A.D 416년경에 강좌(江左)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한데 이어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까지 수복하였다.

그 2년 후 A.D 465년에 백제는 송.백제 연합군이 점령한 난하 서쪽 요서지방에 요서분국(遼西分國)을 두고 고달(高達)을 광양태수(廣陽太守)에, 양무(楊茂)를 조선태수(朝鮮太守)에 각 임명하였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건위장군 광양태수를 장사 고달이 겸하게 하고, 건위장군 조선태수를 사마 양무가 겸하게 하고, 선위장군을 참군 회매가 겸하게 하였으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後略」 南齊書 百濟傳  [註 위 "比使宋朝" 문구는 태시(註 A.D 465-471년) 중에 단순히 송(宋)에 외교 사신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고, 백제왕이 임명한 장군(將軍), 태수(太守) 등 직위를 가지고 송(宋)에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A.D 465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백제분국

 

A.D 471년경에 고구려는 백제와 송(宋)이 불화관계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북위(北魏)와 같이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을 남(南)으로 송(宋), 북(北)으로 유유(蠕蠕), 서(西)로 북위(北魏), 동(東)으로 고구려(高句麗) 사방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이 포위되자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여태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북위(北魏)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치려고  사신을 북위(北魏)에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렸으나 북위가 불응하여 실패하였다.

 

「개로왕(蓋鹵王) 18년(A.D 472년) 왕은  사신을 북위에 보내어 조회하고 표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길은 승낭이와 이리(고구려 지칭)에 막혀 비록 대대로 신령의 교화는 받았으나, 번방의 예를 닦을 길이 없었으매, 운궐을 쳐다 볼수록 쏠리는 정이 그지없사옵니다. 황제 폐하께옵서는 천명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심정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배를 띄우고 아득한 바닷길을 더듬으며 목숨을 자연의 운에 맡기고 만분지 일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과 땅 신이 감응하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펴서 (사자가)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소식을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표에서 또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세 때는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 : 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나라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으므로 신의 할아버지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보아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고구려 지칭)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신의 나라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신의 나라는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이 멀리 미친다면 속히 장수 한명을 신의 나라에 보내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치의 땅도 한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말하기를 "지금 련(璉 : 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를 스스로 으깨어, 대신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를 마다하지 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 때입니다. 또 풍족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듯 황제 폐하께 솔리는 정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의 제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매 황위가 한번 거동하면 성토만 있을 뿐이요 싸움은 없을 것이며 신도 비록 불민하오나 갖은 힘을 다하여 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람을 받아 향응할 생각입니다. 고구려의 불의와 반역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번국으로 받드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마음을 품어, 혹은 남으로 유씨(유송)와 통하고 혹은 유유와 약속하여 함께 입술과 이 마냥으로 되어 왕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성인이었지만 단수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진 사람이라 일컬어지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체하지 않았습니다. 시냇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 이후에 신의 나라 서쪽 경계 소석산 북국 해중에서 10여명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기와 안륵을 주워 살펴 본 결과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들은 즉 바로 왕사가 신의 나라로 찾아오는데 도둑이 길을 가로막고. 큰 뱀(고구려 지칭)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인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  力竭 轉自孱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 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  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 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 後略」三國史記 百濟本紀 蓋鹵王紀

 

백제는 요서분국(遼西分國)이 고구려 등에게 포위됨으로써 국력이 약해졌다. 고구려는 그 기회를 틈타서 A.D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하였다.

그 후 A.D 477년에 백제는 고구려 등의 포위를 뚫고 백제본국(百濟本國)으로 온 요서분국(遼西分國) 군사의 도움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고 일본열도를 다시 백제의 후국(侯國)으로 만들었다.

인현천황(仁賢天皇)을 세운 백제는 그 해 백제 군사와 왜(倭) 군사의 주력(主力)을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으로 이동시켰다. 왜(倭) 군사(軍士)와 백제 군사의 주력이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이동하자 이에 당황(唐慌)한 고구려는 일년에 한번씩 보내던 북위(北魏) 사신(使臣)을 이 해부터 일년에 3번 보내며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  [註 : A.D 488년부터 495년까지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회수. 장수왕 때인 A.D 488년에 2월, 4월, 윤8월(3회). A.D 489년에 2월, 6월, 10월(3회). A.D 490년에 7월, 9월(2회). A.D 491년에 5월, 9월(2회). 문자명왕(文咨明王) 때인 A.D 492년에 6월, 8월, 10월(3회). A.D 494년에 정월, 7월(2회). A.D 495년에 2월, 5월(2회) 각 보냈다.]

같은 해 북위(北魏)는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패(敗)하였다.

 

「永明六年(A.D 488年)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資治通鑑

 

북위(北魏)의 공격을 물리친 남제(南齊).백제(百濟) 연합군은 다음해 A.D 489년에 북위의 변두리 지역을 공격하였다.

 

「太和十三年(A.D 489年) 春 正月 戊辰 蕭賾遣衆軍寇邊」北魏書

 

이 전쟁 후 A.D 490년에 백제왕 모대(牟大)는 남제(南齊)에 표문(表文)을 올려 A.D 488-489년 전쟁의 공훈장령(功勳將令)들에 대하여 남제에서도 선례(先例)대로 백제왕이 임시(臨時)로 임명한대로 관작(官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장사(長史) 고달(高達)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관작(官爵),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사마(司馬) 양무(楊茂)는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 관작(官爵), 선위장군(宣威將軍) 참군(參軍) 회매(會邁)는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 관작(官爵)을 각 남제로부터 제수받았다. 이로 보아 백제는 488-489년 전쟁에서 북위(北魏)로부터 광릉, 청하 등 중국동해안지방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건위장군 광양태수를 장사 고달이 겸하게 하고, 건위장군 조선태수를 사마 양무가 겸하게 하고, 선위장군을 참군 회매가 겸하게 하였으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임시로 직을 내렸습니다. 또 천자의 은혜는 신령하고 아름다워 온 세상이 바라는 바 입니다. 하물며 몸소 천자의 뜰을 밟고 있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오니 하늘이 살피듯 우리를 특히 가엽게 여겨 정식으로 관직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달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 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도 내렸다.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 복야 손부를 시켜 책명을 내려 죽은 조부 모도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았다. 말하기를 "아 아! 그대들은 대대로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이어받아 성실한 마음을 멀리까지 들어내었도다. 바닷길이 차갑지만 조공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규정에 따른 법을 잘 지키고 내리는 명령을 잘 받들지어다. 조서를 내려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는 이제 죽은 조부 모도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는다. 즉위 글과 인수 등과 옥,구리,범,대나무 4 부신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절하고 받아라.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했다.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 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裡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效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 帶方太守 茂志行清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武將軍 清河太守 詔可 並賜軍號 除太守 為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 使兼竭者僕射孫副 策命 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 曰 於戲!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滄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彝典 用纂顯命 往欽哉!其敬膺休業 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 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 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 王其拜受 不亦休乎!」 南齊書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 百濟傳

 

A.D 490년에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백제의 영지(領地)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무참히 패배하였다.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중략..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와 고구려 연합군을 비하한 말)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흉리의)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중략..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에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에,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에, 목간나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용양장군 낙랑태수를 장사 모유가 겸하게 하고, 건무장군 성양태수를 사마 왕무가 겸하게 하고, 진무장군에 조선태수 장새를, 양무장군에 진명을..중략..각 임명하였으니 성조(남제)에서도 임명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克攘列辟 往姐瑾等並蒙光除 臣庶鹹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殭屍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並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남제서(南齊書)에는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험윤(獫狁) 또는 흉리(匈梨)로 비하(卑下)되어 적혀 있다.

일부 사학자는 북위서(北魏書)에 백제와 북위가 싸운 내용이 없으므로, A.D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싸웠다는 남제서(南齊書) 문구는 믿을 수 없고, 또 백제가 싸운 상대는 북위가 아니고 고구려이며, 싸운 장소도 한반도이지 요서(遼西)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와 북위(北魏)가 A.D 488년에 싸웠다고 적혀 있는 것은 자치통감(資治通鑒) 내용을 취하였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A.D 49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싸웠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북위와 고구려 간의 외교관계, A.D 488년에 백제가 일본열도 왜를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운 후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일본열도 왜의 주력(主力)을 요서분국(遼西分國)으로 보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A.D 490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 방면 백제분국

 

 

梁나라 때 百濟의 中國東海岸分國과 遼西分國 喪失

[백제는 6세기 초 왜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여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는가?]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과 요서분국(遼西分國)을 고구려에 상실하였다.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김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불진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 至是 國疆漸大 」

「전략.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郡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그렇다면 백제(百濟)는 A.D 502-503년에 왜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과 요서분국(遼西分國)을 상실하였을까? 백제가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그 당시 백제왕실(百濟王室)에서 일어난 궁중암투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구태백제는 A.D 205년에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입국한 후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연맹(馬韓聯盟)을 정복하고, 이어서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가야(加耶)를 복속시켰으며, 그 뒤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다 A.D 392년과 A.D 396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온조백제(溫祚百濟)가 항복하고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궤멸되자 구태백제(仇台百濟) 지배층(支配層)은 일본으로 피신하였고, 한반도 백제지역은 온조백제(溫祚百濟)가 관장하게 되었다. 다음해 A.D 397년 5월 온조백제 아신왕(阿莘王)이 태자 전지(腆支)를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는 왜왕(倭王 : 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人質)로 보냄으로서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게 되었다. 그뒤 A.D 399년에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이 왜(倭)를 동원하여 신라(新羅)와 가야(加耶) 지역을 침범하였으나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대마도가 점령당하고 구주왜(九州倭)와 대화왜(大和倭)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므로서 실패하였다.

그뒤 A.D 404년에 구태백제 잔존세력과 왜(倭)는 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를 공격하였으나 또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대방계(帶方界) 공격이 실패한 후 광개토왕이 임나연정(任那聯政)을 통하여 왜(倭) 통제를 강화하자 구태백제는 A.D 405년에 아신왕(阿莘王)을 암살하고 인질(人質)로 와 있던 전지(腆支)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한 후 구태백제 지배층과 왜(倭) 지배층은 구태백제 지역 중 아직 고구려의 공격을 받지 않은 금강(錦江) 이남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註 이때 금강 이남 지방으로 이동한 왜(倭) 지배층은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멸망하자 백제와 같이 A.D 487년에 대마도를,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각 평정하고 인현조(仁賢朝)를 세웠다. 인현조(仁賢朝)가 세워진 후 금강(錦江) 이남 지방에 있던 왜(倭) 지배층(支配層)은 대부분 일본(日本)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백제는 A.D 416년에 중국동해안지방의 전의 백제분국 장군들을 도로 백제에 복귀(復歸)시킴으로써 중국동해안분국을 회복하였고, 그 뒤 A.D 463-465년경에 요서분국마저 회복하여 다시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성해졌다. 이때부터 백제본국(百濟本國)은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근거지로 한 세력이 득세하였다. 그 후 개로왕(蓋鹵王)의 외교(外交) 실패로 송(宋)이 백제에 등을 돌리므로써 백제의 요서분국이 고구려 등에 의하여 포위.고립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힘이 급격히 약화(弱化)되어  A.D 475년에 고구려에게 한성(漢城)을 점령당하고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A.D 476년 8월 해구(解仇)가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승진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한 후 임금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법을 문란케 하자 다음해 4월 문주왕(文周王)은 해구(解仇)를 견제하기 위하여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다음 해 A.D 477년 5월에 흑룡(黑龍)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이는 요서분국(遼西分國)의 장군 모도(牟都 : 일명 餘都)가 해구(解仇)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서분국 군사를 이끌고 백제본국으로 온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모도(牟都)가 이끄는 요서분국 군사가 백제본국으로 오자 해구는 그 해 9월 문주왕을 죽이고 허수아비 삼근왕(三斤王)을 세운 후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같이 대두성(大豆城)을 근거 삼아 배반하였으나, A.D 478년 봄에 진남(眞男)과 진노(眞老)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는 요서분국 세력이 백제본국 세력을 누르고 백제본국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도(牟都)가 이끌고 온 요서분국 군사는 백제본국을 장악한 후 A.D 479년에 해구(解仇)의 반란에 이용당한 삼근왕(三斤王)을 죽이고 모대(牟大)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무령(武寧)의 나이가 18세이고, 모대(牟大)는 무령(武寧)보다 더 어렸는데도 불구하고 모대(牟大)가 왕위(王位)에 오른 것은 모도(牟都)가 이끌고 온 요서분국 군사의 지원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모도(牟都)는 병관좌평(兵官佐平)과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직하여 백제의 군권(軍權)을 장악하였고, A.D 480년에 남제(南齊)로부터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는 요서분국 출신 세력이 백제본국의 모든 군권(軍權)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뒤 A.D 497년에 진노(眞老)가 죽고 웅진(熊津)을 근거지로 한 토착세력으로 추정되는 연돌(燕突)이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되었다. 이는 A.D 501년에 일어난 내란(內亂) 때 동성왕계(東城王系)가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A.D 501년 10월 일본(日本)을 근거지로 한 무령왕계(武寧王系)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그해 12월 동성왕을 죽이고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근거지로 한 동성왕계(東城王系) 세력을 몰락시켰다.

 

「동성왕 23년(A.D 501년) 봄 정월 왕도에서 늙은 할멈이 여우가 되어 사라졌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남산에서 싸웠는데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 비가 오지 않았는데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의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보다 앞서 왕이 백가로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다. 백가는 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왕을 원망하였는데 이때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 12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  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백加鎭之 冬十月 王獵於泗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비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王以백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怨王 至是使人刺王 至 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三國史記 百濟本紀

 

위 할멈 또는 여우는 동성왕(東城王)의 모(母)를, 호랑이 2마리는 동성왕과 무령왕(武寧王)을 지칭한 것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A.D 501년 10월에 무령왕계(武寧王系)가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과 싸웠고, 싸운 장소는 부여(夫餘(와 공주(公州) 부근이며, 그 결과 무령왕이 승리하여 12월에 동성왕이 죽었다는 뜻이다. 위 문구에는 동성왕계(東城王系)인 백가가 동성왕을 죽인 것처럼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 무열천황기(武列天皇紀) 4년조에는 국인(國人)이 같이 동성왕을 제거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동성왕을 죽인 사람은 동성왕계(東城王系)인 백가가 아니라 무령왕계(武寧王系) 반란군이다. 

당시 백제왕실(百濟王室)에서 일어난 내분(內紛)을 이해하기 위하여 개로왕(蓋鹵王), 문주왕(文周王), 곤지(昆支), 무령왕(武寧王), 모도(牟都), 모대(牟大) 간의 관계를 살펴본다.

 

「백제왕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중략..모대를 책봉하여 조부 모도를 이어받아 백제왕으로 삼았다. 牟大又表曰..牟大以大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南齊書 百濟傳 

「무열천황 4년(A.D 502년) 여름 4월..이 해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같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같이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이다. 이는 곤지 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의 바다 속에 주도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主島)라 이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 왕자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而立島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 時至筑紫島 生斯麻王 自島還送 不之於京 産於島 故因名焉 今各羅海中有主島 王所産島 故百濟人號爲主島 今案 島王是蓋鹵王之子也 末多王是琨支王子之子也 此曰 異母兄未詳也]」日本書紀 武列天皇紀 4年條 

「웅략천황 21년(A.D 477년) 전략..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이다. 일본서기에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 한다. 아마 이는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汶洲王蓋鹵王母弟也 日本書紀云 以久麻那利 賜末多王 蓋是誤也 久麻那利者 任那國下呼唎縣之別邑也」日本書紀 雄略天皇紀 21年條

「웅략천황 5년(A.D 461년) 여름 4월 백제의 가수리군(개로왕)은..중략..아우 군군(곤지)에 고하여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말하였다. 군군이 대답하여 " 상군(개로왕)의 명에 어긋날 수는 없습니다. 원컨데 상군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 후에 나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장가들여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서 출산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하여라" 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헤어져 조정에 보냈다. 6월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이라 하였다. 그래서 군군은 배 1척을 마련하여 도군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에 돌려보냈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인은 이 섬을 주도라 하였다. 가을 7월 군군이 경에서 돌아왔다. 이미 5인의 자가 있었다. [백제신찬에 말하였다. 신축년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내보내어 대왜(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하였다. 형왕(兄王)의 수호를 닦았다.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中略..乃告其弟軍君(琨支也) 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軍君對曰 上君之命不可奉違 願賜君婦 而後奉遣 加須利君則以孕婦 嫁與軍君曰 我之孕婦 旣當産月 若於路産 冀載一船 隨至何處 速今送國 遂與辭訣 奉遣於朝 六月 孕婦果如加須利君言 於筑紫各羅島産兒 仍名此兒曰島君 於是 軍君卽以一船 送島君於國 是爲武寧王 百濟人呼此島曰主島也 秋七月 軍君入京 旣而有五子[百濟新撰云 辛丑年蓋鹵王遣弟琨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日本書紀 雄略天皇紀 5年條

「웅략천황 23년(A.D 479년)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훙하였다. 천황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 말다왕이 젊고 총명하므로 칙하여 궁중에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이르심이 은근하여 그 나라의 왕으로 하였다. 무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의 군사 500인을 보내 백제국까지 호송하였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 二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王以琨支王五子中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日本書紀 雄略天皇紀 23年條

 

문주왕(文周王)과 개로왕(蓋鹵王)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천황본기(雄略天皇本紀) 21년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모제(母弟)로 적혀 있다. 백제신찬(百濟新撰)을 보고 지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대로 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母弟)로 보인다.

무령왕(武寧王)과 동성왕(東城王) 간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인용(引用)하여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천황기(雄略天皇紀) 5년 4월조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 동생 군군(軍君 : 곤지)의 요청에 따라 임신한 자기 부인을 군군에게 주었고, 그 부인이 군군과 함께 일본으로 가다가 축자(筑紫)의 각라도(各羅島)에서 도군(島君 : 무령왕)을 낳았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은 호적상으로는 곤지(琨支)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개로왕의 아들이다. 즉 무령왕과 동성왕과의 관계는 호적상으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지만 실제는 사촌(四寸)간이다.

모도(牟都)와 모대(牟大) 간의 관계는 남제서(南齊書)에는 모도가 모대의 조부(祖父)로 적혀 있으나, 양서(梁書)에는 부(父)로 적혀 있다. 동성왕(東城王)의 부(父)는 곤지(琨支)이고, 곤지(琨支)는 개로왕, 문주왕과 형제이므로, 곤지(琨支)의 부(父)는 비유왕(毗有王)이다. 그러나 모도(牟都)와 곤지 또는 모도와 비유왕은 동일인물이 아니므로, 모도는 동성왕의 부(父)나 조부(祖父)가 아니다.

일부 사학자는 모도(牟都)를 문주왕(文周王)이라고 주장하나, 모도는 A.D 480년에 남제(南齊)로부터 2品인 "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관작을 수여받았고, 문주왕(文周王)은 A.D 477년에 일어난 해구(解仇)의 반란(叛亂) 때 피살(被殺)되었으므로, 모도와 문주왕은 동일인물이 아니다.

모도(牟都)의 다른 이름은 진노(眞老)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동성왕이 즉위한 후 처음 한 일은 동성왕 4년(A.D 482년)에 진노(眞老)를 병관좌평(兵官佐平)과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에 임명하여 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업무(業務)를 맡긴 것이다. 그런데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동성왕이 처음 한 일은 A.D 480년에 남제(南齊)에 표문(表文)을 올려 모도(牟都)에게 "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관작(官爵)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남제서(南齊書)를 대비하면 동성왕이 즉위한 후 백제의 군권(軍權)을 장악한 사람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노(眞老)이고, 남제서에 의하면 모도(牟都)이다. 따라서 모도와 진노는 동일인물이므로 모도는 진노의 다른 이름이다.

곤지(琨支), 모대(牟大), 문주왕(文周王), 개로왕(蓋鹵王), 무령왕(武寧王)과의관계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동성왕과 무령왕 세계>

       여영 

       ↕부자 

       비유왕 

       ↕부자 

       곤지 → 형제←개로왕→형제←문주왕 

       ↕부자             ↕부자             ↕부자

       동성왕→사촌←무령왕→사촌←삼근왕 

       [참고 : 동성왕=모대, 모도=진로]

 

앞에 나온 일본서기(日本書紀) 무열천황기(武列天皇紀) 4년조 문구를 보면 무령왕(武寧王)은 축자도(紫島)에서 출생하여 후국(侯國)인 일본에서 자랐다. 그 때문에 무령왕계(武寧王系)의 세력 근거지는 일본이었다. 당시 백제본국에 있던 무령왕계 세력들은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등에 업은 동성왕계(東城王系) 세력에 눌려 지내다 A.D 501년 10월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東城王)을 제거하였다.

무령왕계와 동성왕계의 싸움에서 동성왕계가 패배하고 동성왕이 죽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에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였다.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至 是國疆漸大 」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상해 서남), 회계(강소성 소주),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四曰左越 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천감원년(天監元年 : A.D 502년)에 백제(百濟)가 고구려에 공파당하여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다고 적혀 있어 고기(古記) 내용과 일치한다.

 

「天監元年(A.D 502年) 進太號征東將軍 尋為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梁書 百濟傳

 

이로 인하여 백제의 국력이 갑자기 약화(弱化)되므로써 백제의 위상은  낮아지고 대화왜(大和倭)의 위상은  높아져, 백제는 대화왜(大和倭)의 종주국(宗主國)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위상이 추락하였다.

 

 

慰禮城은 어디인가?

 

온조(溫祚)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慰禮城)의 위치에 대하여 한강 이북이라는 설과 한강 이남이라는 설로 견해가 갈린다.

고려 때부터 조선후기까지는 한강 이남이라는 설 그 중에서도 직산(稷山)에 있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직산현은 옛 명칭이 위례성이고, 온떠?남하하여 이곳에 도읍하였다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는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다(彌鄒忽仁州尉禮城今稷山)"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분석해 보면 온조는 재위 13년에 한수 이남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재위 13년 이전에는 온조가 수도로 사용한 위례성은 한수 이북에 있었다.

위례성의 의미를 살펴본다.

위례성의 위(慰.尉)는 하늘(위=上.高)에 있는 해를 가리킨다.

고대에 독립국의 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하였는데, 이들은 해님을 뜻하는 “不”, “高”, “尉”, “白”, “解” 등 글자나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辰(龍)” 등 글자를 넣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복속국의 왕은 “馬”, “蛙” 등 글자를 넣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온조가 사용한 "위"는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글자로서 달님의 아들을 뜻하는 마한(馬韓)이나 월지(月支)보다 상위에 있는 글자이다. 그리고 “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즉 위례는 천제의 아들이 있는 무리를 뜻한다.

온조는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위"자를 사용하므로써, 한수 이남의 마한(馬韓)이나 한수 이북의 낙랑(樂浪)과 동등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祚:天子의 자리)이라는 뜻의 "온조(溫祚)"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온조는 백제(百帝)와 같은 맥락의 칭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는 재위 13년에 모 소서노가 죽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한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온조가 한수 이남으로 이동한 후 도읍지를 둔 곳에 대하여 삼국유사에는 직산으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마한의 동북땅이라고 적혀 있다.

직산이 마한의 동북땅이라면 당시 마한의 도읍지인 금마산은 직산의 서남 방면인 예산이나 홍성 금마 방면이 된다. 그러나 이병도씨는 마한(馬韓)이 있었는 금마산(金馬山)이 직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직산 위례성은 사실은 온조가 사용한 궁성이 아니고 마한이 사용한 궁성이라고 주장하고, 직산 부근에 궁 명칭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는 것을 그 방증으로 들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는 마한으로부터 동북땅 백리를 봉 받고 직산에 궁성을 두었으나 다음해 한강 남쪽으로 궁성을 옮겼다. 조선시대는 그곳을 하남시 방면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방면으로 보고 있다.

 

 

 

온조왕 시대에 나오는 낙랑과 말갈

 

1. 최리 낙랑국의 영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조에 나오는 최리 낙랑국의 영역은 평안도 방면과 함경도 방면이 포함되었다.

대무신왕 4년조를 살펴본다.

 

「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 때 낙랑왕 최리가 그곳을 순행하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4년조

 

최리가 동옥저를 순행하다가 호동을 만났고, 고구려를 북국(北國)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위 문구에 나오는 옥저는 요녕지방의 옥저는 아니고 동옥저가 분명하다. 또 최리가 자기 영역도 아닌데 순행을 했을리 만무하므로, 이 무렵 함경도 방면도 최리 낙랑의 영역에 속해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리 낙랑의 치소는 함경도 방면이 아니다. 대무신왕 4년조 문구에 의하면 최리는 호동을 사위삼기 위하여 옥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은 최리 낙랑의 치소가 있는 대동강 평양 방면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평안도 지방 외에 강원도 지방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는 아래에 나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를 보면, 백제의 동쪽에 낙랑 이라는 이름이 여러차례 나오고, 신라의 북쪽에도 낙랑이라는 이름이 여러차레 나온다.

 

「혁거세 30년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남해차차웅 원년 가을 7월, 낙랑 군사가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남해차차웅 11년 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이 우리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보고, 금성을 공격하여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 하며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6부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병이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유리이사금 13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점령하였다.

유리이사금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유리이사금 17년, 가을 9월, 화려현·불내현의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 서쪽에서 요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위에 나오는 낙랑은 신라의 북쪽에 있고, A.D 37년 고구려 습격으로 멸망하였다. A.D 37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낙랑이 멸망한 이후는 낙랑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고 불내, 화려라는 현국(縣國) 이름이 나온다. 당시 평안도 지방과 함경도 지방을 영역으로 가지고 있던 최리 낙랑이 강원도 지방도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강원도 지방 낙랑은 최리 낙랑과 별개의 낙랑인지 알 수 없지만, 백제의 북쪽 내지 동북 방면에서 침범한 말갈의 공격이 있는 후 백제가 강원도 방면 낙랑과의 통로에 성책을 쌓은 것으로 보아 같은세력으로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최리 낙랑은 평안도 지방과 함경도 지방 뿐만 아니라 강원도 지방, 심지어는 경상도 북부 일부 지방까지 최리 낙랑의 영역으로 가지고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최리 낙랑은 A.D 32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고구려에 점령되지 않은 함경도 지방과 강원도 지방은 동옥저 또는 낙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함경도 지방 동옥저는 A.D 56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고, 강원도 지방 낙랑은 A.D 37년에 고구려의 습격으로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2. 낙랑과 말갈의 의미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본기에 나오는 낙랑과 말갈은 아래에 나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로 보아 말갈은 만주 동부에서 낙랑 지역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는 무리를, 낙랑은 최리 낙랑을 지칭한 것이다.

 

3. 낙랑과 말갈과의 관계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조를 보면 백제는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고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 강원도 지방 낙랑과의 접경지대에 마수성을 쌓는다. 말갈이 공격해 왔다면 당연히 말갈과의 접경지대에 성책을 쌓아야지 엉뚱하게도 강원도 지방 낙랑과의 접경지대에 성책을 쌓았다는 것은 말갈과 낙랑이 동일세력이 아니라면 도저해 이해할 수 없다.

낙랑과 말갈과의 관계는 온조왕 11년 4월조에 잘 나타난다. 동 조문에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백제의 병산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아 갔다"고 적혀 있고, 이에 대하여 백제는 그해 7월 강원도 지방 낙랑과의 접경지대인 독산,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이를 보면 이 무렵 나오는 말갈은 만주 동부에서 낙랑 지역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고 있는 부족 무리이고, 당시 낙랑에 복속하고 있었다.

온조왕 18년에도 말갈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말갈을 칠중하에서 물리치고는 그해 11월 춘천 방면에 있는 낙랑의 우두산성을 공격하러 간다. 이것도 같은 경우이다.

 

3. 낙랑과 말갈이 나타나는 방향

 

아래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를 보면 말갈이 나타나는 방향은 북쪽에만 한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 동북쪽, 동쪽 여러 방면에서 백제를 침범하였다.

 

온조왕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북쪽

온조왕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북쪽

「온조왕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평강)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백제 동부에 있음. 다루왕 3년조 참조)을 쌓고 병산(낙랑과의 통로에 있으므로 역시 동부에 있다.)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점점 차지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내보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동북쪽

온조왕 10년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미천(개성 인근에 있는 예성강으로 추정)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개성)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백제의 북부에 있다)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북쪽

온조왕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동쪽

온조왕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북쪽

온조왕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춘천 방면)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춘천 못 미친 지점)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동쪽

온조왕 22년 가을 8월, 석두·고목(둘다 백제의 동부에 있지만 마수성보다는 서쪽에 있다. 무령왕 3년조 참조)의 2성을 쌓았다. 9월, 왕이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평강)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적을 만나 단번에 물리쳤다. 이 때 잡은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동북쪽

온조왕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한탄강 방면)을 침공하였다.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평강)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동북쪽

다루왕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백제의 동부에 있다.)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동쪽

다루왕 4년 가을 8월, 고목성(백제의 동부에 있다.)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동쪽

다루왕 7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백제 동부에 있다.)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낙랑과의 통로에 있으므로 역시 동부에 있다.)을 습격하였다.」 동쪽

다루왕 28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북쪽

다루왕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백제의 동쪽에 있다)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동쪽

다루왕 32년 가을 7월, 말갈(신라의 북쪽이고 백제의 동쪽에 있다.)이 우곡(백제의 동쪽에 있다.)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동쪽

다루왕 49년, 신라가 말갈(신라 북쪽에 있는 말갈이다.)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다루왕 45년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백제의 북쪽에 있다. 진사왕 7년조 참조)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북쪽

다루왕 49년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북부에 있으므로, 백제의 북쪽에 있다.)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충남 회덕)에 이르렀다.」 북쪽, 동쪽

구수왕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백제의 북쪽에 있다. 진사왕 7년조 참조)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북쪽

구수왕 7년 겨울 10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방어하였다.」 북쪽

구수왕 16년 겨울 10월,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백제의 동쪽에 있다.)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동쪽

진사왕 7년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백제의 북부에 있다.)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북쪽

무령왕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백제의 동부에 있다.)을 소각하고 고목성(백제의 동부에 있다.)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동쪽

 

그렇다면 온조왕은 왜 신하들에게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하였을까?

위에 나오는 문구로 보아 당시 말갈 무리는 낙랑 지역에 거주하면서 낙랑에 복속하고 있었음이 틀림없고, 말갈이라는 별개의 나라가 없었다. 그렇다면 "북쪽에도 낙랑이 있고, 동쪽에도 낙랑이 있다" 이렇게 말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동쪽에는 낙랑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래 낙랑은 어느 특정나라를 가리키는 고유명칭이 아니다. 고대말 나(那)와 라(羅), 야(耶)는 어느 지방을 뜻하는 것으로 합쳐서 "나라"가 되면 여러 지방을 합친 대국(大國) 또는 연맹국(聯盟國), 종주국(宗主國)을 뜻한다. 그런데 고대에는 큰 나라를 "나라"로 부르고 이를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樂浪"로 적었는데, 후에 이를 읽으면서 고대 발음인 "나라"로 읽지 않고 "낙랑"으로 읽고 있다.

온조가 동쪽에 "樂浪"이 있다고 말한 것은 만주 동쪽에서 한반도로 이주하여 낙랑에 복속하고 있는 백제의 북쪽, 북동쪽, 동쪽에 거주하고 있는 무리 중 동쪽은 백제가 직접 접촉한 강원도 방면 낙랑이 있어 이를 낙랑이라 부르고, 백제의 북쪽내지 북동쪽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낙랑에 복속하고 있는 무리들은 부족 개념으로 말갈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보듯이 말갈은 백제의 복쪽, 북동쪽, 동쪽 방향에서 침범해 왔으므로, 말갈이라 부른 이주민 무리는 백제의 북쪽, 북동쪽, 동쪽이 되는 낙랑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낙랑에 복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이 멸망한 후는 소규모 촌락국(村落國) 또는 현국(縣國) 형태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古記로 본 韓國古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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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쇄 : 1997. 8. 30.

발 행 : 1997. 9. 10.

재판인쇄 : 1979. 11. 20.

개정판 : 2004. 12. 1.

저 자 : 한 순 근

발행인 : 김 영 일

발행처 : 새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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