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화도(界火島) / 갯벌섬
글: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 간척사업으로 어촌 마을이 하루아침에...
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계화면의 궁안리 북쪽 약 6㎞ 갯벌 안에 있는 섬이었는데, 새만금 개발로 육지가 되었다.
본래 부안군 서도면의 지역으로써 갯벌 안에 있는 섬으로 지화도 또는 계화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상리, 중리, 하리를 병합하여 계화리라 하여 행안면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계화면. 위쪽 마을을 계상리(界上里)라 하고, 가운데 마을은 계중리(界中里), 아래쪽 마을은 계하리(界下里)라 한다.
1976년 9월 계화도(界火島)가 계화리가 되고, 행안면에 계화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승격하였다.
섬 중앙에는 해발 246.2m의 계화산이 있다.
계화도는 원래 면적 2.5㎢, 해안선길이 약 7,000m의 작은 섬이었으나, 1963년 시작된 동진강(東津江) 하구의 대규모 간척공사로 육지와 이어졌고, 지금은 새만금 개발 계획에 따라 완전히 육지 안으로 들어갔다. .
예부터 조수가 들어오면 배로서 드나들지만, 썰물 때에 조수가 빠지면 걸어서 개펄이 펼쳐져 걸어서 섬까지 갈 수도 있었다. 가거나 갯벌을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배로 갈 때는 창북리에서 하루 한 번씩 운행하는 배를 타고 들어갔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계화도는 그 어느 곳보다 갯벌이 잘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하구갯벌은 갖가지 어패류들이 알을 낳고 번식하기에 적합해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한다.
바다와 갯벌의 풍부한 수산자원은 땅이 귀한 섬 마을 사람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렇던 섬은 1960년대 말부터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계화 간척공사로 인해 개펄이 사라진 대신 새 농토(간척지)가 생기면서 낯선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새 마을이 여럿 생기면서 어촌 마을이 농촌 마을처럼 변해 갔다. 이 곳의 간척공사는 원래 섬진강 상류의 옥정리에 댐이 완공되어 운암호의 물이 불어나면서 발생한 수몰민 2768세대를 이주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닷가에 새 농토를 만들기 위해 1968년부터 벌여 온 간척공사는 10년이 넘는 탈염 및 개답 과정을 거쳐 총 3896ha의 갯벌을 농경지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섬에는 이주해 온 수몰민들과 토박이 주민들이 함께 살게 되었다. 241동의 이주민 주택이 들어서면서 섬에는 5개의 원주민 마을과 4개의 이주민 마을을 합친 총 9개 마을이 '계화리'라는 하나의 리(里) 단위를 형성하게 되었다.
섬의 토박이들 대부분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개펄에서 해산물을 채취하여 살아갔고, 정부로부터 간척농지를 분양받아 이주해 온 이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원주민들은 간척공사로 인해 삶터였던 마을 앞 갯벌이 간척지가 되어 생계에 타격을 받았지만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간척지 논 2필지(15마지기)와 주택을 제공받아 농사를 짓는 이주민들과 화합이 잘 되지 않았다.
1991년부터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원주민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더 깊어졌다. 계화리 주민들이 간척사업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갈려 분열된 것이다. 찬성측은 농사를 짓는 이주민이었고, 반대측은 어업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이었다. 이에 따라 1968년 계화 간척공사로 고통을 겪었던 계화도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두 번째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 개펄섬이 '계화도'란 이름이 되고
개펄 속의 섬이라 하여 '갯벌섬(갯불섬, 개펄섬)'이라 불리던 곳.
'개(개펄)+불(벌)+섬'에서, '개'가 '계(界)'로 , '불'이 '화(火)'로, '섬'이 '도(島)'로 대역되어 '계화도'란 이름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벌'이 '불'의 음과 유사하여 땅이름에서 한자로 '화(火)'로 된 예는 많다.
삼한시대 마한(馬韓) 소국의 하나였던 '불사분야(不斯邪國)'의 '분야'는 평야, 읍락의 뜻으로 백제의 '부리'나 신라의 '벌', '불' 등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불사분야국은 백제의 비사벌(比斯伐)로서 지금의 전북 전주시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불사분야를 백제의 부사현(夫沙縣)이었던 전남 순천시 낙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청동기문화와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한 이 소국은 4세기를 전후로 백제에 복속되었다.
비사벌은 낙동강 연안에 하안평야가 발달한 경남 창녕 일대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신라 비사벌의 중심지였던 이 곳의 비사벌은 문헌에 '비자화(比自火)',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自伐)' 등으로 나타난다.
대구(大邱)의 옛이름이 '달구벌'임은 거의 누구나 알고 있다.
대구는 본래 신라 전기의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했다. '달구화'는 바로 '달구벌'의 한자식 표기로, '산으로 둘러싸인 벌'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달'은 '산(山)'의 옛이름. 달구화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그 음이 비슷한 '대구(大邱)'로 바뀌었다. ///
(이 글은 군산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서 2008년 4월 3일 강의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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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소양호-춘천
travelevent.net 배우리 회장
□ 춘천시를 아늑히 싸안은 소양강
춘천시를 아늑히 싸안고 흐르는 소양강(昭陽江)은 내린천과 서화천을 합해 흐르는 하천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소양강에 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소양강은 춘천도호부의 북쪽 6리에 있다. 근원이 인제의 서화(瑞和)현에서 나와서 본 부(춘천)의 기린현의 물(내린천)과 합류하여 양구현의 남쪽에 이르러서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고, 또 부의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이 되며, 주연(舟淵), 적암탄(狄岩灘)이 되고, 소양강이 된다.'
이를 보아서도 소양강은 휴전선 북쪽에서 흐르는 서화천이 본류가 되고, 내린천을 지류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8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소양강; 인제군 남면에서 시작하여 인제, 양구 춘천을 지나 춘천 신남면(新南面)과 서하면(西下面) 사이에서 북한강에 유입되는데, 길이는 166.150㎞(42.11리),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은 양구 군내면(郡內面), 춘천 북면외(北面外)까지이며, 그 길이는 43.2㎞이다.'
'소양강(昭陽江)'이란 이름은 정자 이름인 '소양정(昭陽亭)'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소양정을 빼 놓고는 소양강을 말할 수가 없다.
소양정 안내판에는 이런 말로 그 정자를 안내하고 있다.
'소양정; 이 정자는 애초에 '이요루(二樂樓)'라 하였으며, 그 위치는 지금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안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38년(1650) 홍수로 유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 부사 유희담이 재건하였고, 인조 25년(1617)에는 부사 엄황이 중수하면서 정자 동쪽에 선몽당이란 부속 건물을 세웠고, 정조 원년(1777)에 부사 이동형이 재건하였으나, 6 25 동란 때 소실되어 1966년 옛 터에서 위로 올려 현 위치인 봉의산 기슭에 증층 누각으로 재건하였다.'
□ 경치가 그만인 춘천 주변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쳐지고 주변의 여러 산들에 둘러싸인 춘천 분지 안에 춘천시(春川市)가 자리잡고 있다. 연꽃의 꽃술과 같은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을 중심으로 하여 의암(衣岩)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가 도시를 감싸고 있다.
선사인(先史人)들이 일찍이 살았음을 알게 해 주는 유적과 유물이 많고, 맥국(貊國)의 수도로서, 또 신라시대 이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서 인정되었던 춘천은 원래 '우수주(牛首州)', '수약주(首若州)', '조근내(鳥近乃)', '오근내(烏近乃)', '삭주(朔州)'로 통하다가 고려 태조 23년(942)에 '춘주(春州)'로 고쳤는데, 조선 태종 13년(1413)에 지금의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10년에 강원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1949년에 시(市)로 승격되었다.
최근의 경제 성장이 가져온 자연 환경 파손에도 아랑곳없이 사철 내내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천혜의 저공해(低公害) 도시이다.
□ 춘천 시가를 내려다보는 봉의산
상서로운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모습이라 해서 이름붙은 봉의산(鳳儀山) 정상에 오르면 도시 전체와 의암호(衣岩湖)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두평야(牛頭平野)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하고, 주변에 있는 큰 산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도시이면서도 농촌인 듯한 양면을 함께 지녀서 전원(田園)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의암(衣岩)댐, 춘천(春川)댐, 소양(昭陽)댐에 의해 생긴 넓은 인공 호수를 보면 바다 가운데 섬인 듯한 착각까지 들게 한다.
시 중앙의 봉의산은 겨레의 아픔도 함께 나눈 역사의 산이기도 하다.
몽고족이 쳐들어왔을 때 항몽(抗蒙) 과정에서 주민 모두가 전사를 했다는 봉의산성(鳳儀山城)이 남아 있고, 풍류의 현장 소양정(昭陽亭)이 산 뒤쪽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다. 가까이는 6 25 전란 초기 남침하는 적을 저지하여 아군의 철수를 도왔던 격전의 산이기도 해서 이 곳 사람들의 자부심을 불러 일으켜 주고도 있다. 봉의산 북쪽의 '우두산(牛頭山)' 즉 '소시머리'는 일제가 자기들 건국 신화와 억지로 결부시켰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도 하다.
춘천시는 봉의산 외에도 대룡산(大龍山), 삼악산(三岳山), 화악산(華岳山), 오봉산(五峰山), 팔봉산(八峰山) 등에 안겨 있어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하루 예정으로 다양한 맛의 등산을 즐길 수 있다. 가까운 곳에 3 개의 댐에 의한 호수와 등선폭포, 구곡폭포 등도 아울러 들러 볼 수 있다.
춘천을 얘기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춘천 막국수'와 '춘천 닭갈비'이다. 이 곳을 찾는 외지인들은 다른 값비싼 음식은 제쳐 두고 누구나 한 번씩은 맛보는 명물이다.
□ 눈을 놀라게 하는 소양호 주변
'호반(湖畔)의 도시 춘천'이란 이름을 낳게 한 소양호(昭陽湖)는 교통이 편리하고 볼거리가 많아 가족이나 연인끼리 늦가을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춘천 시내에서 북쪽으로 14㎞ 떨어진 곳, 북한강의 동북 상류인 소양강 하구에 자리잡은 소양강댐에서부터 소양호가 시작된다. 산업화 물결을 타고 지난 1973년에 완공된 이 댐이 만들어낸 거대한 인공 호수인 소양호는 강원도 춘천시 북사면에서 인제까지 장장 60㎞에 걸쳐 맑고 투명한 물결이 드넓게 펼쳐진다.
소양강댐과 인제 사이를 왕복하는 유람 여객선, 부채살같이 퍼지는 푸른 물결,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한 끝없는 절경, 이것이 소양호의 진수이다. 호수 주변엔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검붉게 타오르는 경관을 이루고 유려한 산세는 호수 특유의 잔물결과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소양호에는 선착장이 12곳이나 있다.
공기 부양선인 시속 50㎞로 질주하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 관광을 즐길 수 있다.
이 배를 타고 30분쯤 달리면 분단의 아픔을 전해 주는 38선 경계 표지판이 나오고, 호수 곳곳에 아기 주먹만하게 불쑥불쑥 솟아 있는 바위섬들이 절해(絶海)의 고도(孤島)처럼 다가온다. 한때 다람쥐가 서식했었다는 다람쥐섬도 있다. 바위 틈새로는 10여 군데의 가두리 자연 양식장에서 기르는, '이스라엘 잉어'라고 불리는 향어가 근처 횟집의 횟감으로 나간다. 호숫가 먼 곳으로 외딴 민가들이 흩어져 있어 단조로운 도시 생활에 찌든 현대인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간간이 눈발이라도 휘날리는 날이면 호수변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산세 좋고 해맑은 강원도의 깨끗한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소양호는 1천만 수도 서울 인구의 젖줄이다. 한강 저변에 공업용수, 생활용수,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20만kw의 전기까지 만들어 낸다. 소양감댐의 최대 저수량은 29억t. 서울 시민이 무려 석달 동안 생활용수로 쓸 수 있는 양이다. 1988년 올림픽 때는 속초, 양양, 고성을 지나온 올림픽 성화가 이 곳 인제 선착장에서 소양강댐을 지나 춘천으로 봉송되기도 했다.
다목적 댐의 건설로 경치를 즐길 호수가 생기고 생활용수를 얻게 된 점은 좋았으나, 산자락의 울창한 숲 일부와 고인돌 등 선사 유적지가 물에 잠기고 장수하늘소 등의 희귀 곤충이 사라진 것은 아쉬움을 안겨 준다.
춘천을 찾는 많은 사람들 중 소양호가 그 어느 곳보다도 사랑을 듬뿍 받는 이유는 뱃길로 인제까지 간 다음 곧바로 설악산 입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소양댐 부근 청평산(淸平山.부용산)에는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청평사(淸平寺)가 있고, 절 입구에는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성(九聲)폭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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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의 관문 과천과 남태령
travelevent.net 배우리 회장
□ 과천의 행정구역 변화
과천은 삼국시대애는 고구려의 '율목(栗木)' 또는 '동사흘(冬斯 )' 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이를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친 것을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쳤고, 8대 헌종 9년(1018)에 이를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3대 태종 13(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는데, 다음 해에 금천(衿川.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시흥시 일부)에 합쳐 '금과(衿果)'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복구되고, 7대 세조 때에 다시 금천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복구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인 고종 32년(1895)에 지방 관제 개편에 의해 군이 되었던 것을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에 편입되어 면(面)이 되었다.
1979년 4월 28일 경기도 조례에 의해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 사업소를 설치하였다가 1982년 6월 10일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였다. 출장소로 승격한 해부터 정부 과천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앉게 되었고, 1986년 1월 1일에는 시로 승격하였다.
현재 과천시와 군포시, 안양시, 서울의 강남구, 금천구, 관악구의 각 일부 지역이 옛날 과천군에 속했던 곳이다.
과천의 옛 땅이름 '율목(栗木)', '율진(栗津)'에서 율은 그대로 '밤(栗)'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율목'을 '밤나뭇골', '율진'을 '밤나룻골'의 뜻옮김으로 보기도 한다. '밤나뭇골'의 '율목'이 어떻게 해서 '밤나룻골'인 '율진'으로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엔 과천(율목) 영역이 남태령 너머 한강까지 미쳤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과천의 또 다른 옛 이름 '동사홀'은 이두식 풀이로 보면 '돗 ' 또는 '돗 골'이 된다.
이를 어떤 이들은 '돋골'에 해당한다며 '해 돋는 고을'이란 뜻으로 보기도 하나, 땅이름의 일반적인 정착 과정으로 볼 때 그런 의미의 땅이름이긴 어렵다.
'동사흘(冬斯 )'을 이두식으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동(冬)=도
사(斯)=ㅅ 또는 사
흘=홀 또는 골(고을)
>동사흘=도사골(돗아골. 돗골)
그러나, '돗골'이나 '도사골'을 '해가 돋는'의 '돋'으로 본 것까지는 무리가 없으나, 이것을 '해솟음'의 뜻으로 본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돗(돋)'은 '높은 지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산이 많아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풀어 가야 할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 평양 감사는 안 해고 과천 현감은 한다는데
조선시대에 과천은 남도 사람들에겐 꽤나 잘 알려진 고을이었다. 그것은 수도 한양의 남쪽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 지방의 길손들은 서울로 올라오려면 대개는 이 과천 땅을 지나야 했다. <대동여지도> 등의 옛 지도를 보면 천안 삼거리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직산, 진위(평택), 수원을 거쳐 이 과천 땅을 지나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역시 과천 땅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그만큼 과천은 예 사람들이 서울로 올 때, 또는 남으로 내려갈 때 대개 거쳐야 했던 중요 고읍(古邑)이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이 이 곳을 통과하자면 통과세(?)를 내야 지날 수 있어서 어지간히 신경을 쓰기도 했다.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
'현감이면 다 과천 현감이냐?'
옛 과천읍의 중심 마을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官門洞) 일대이다. 그래서, 전부터 이 곳을 '읍내(邑內)'라 했다.
과천 현감들은 곧잘 이 읍내를 지나는 길손들에게 돈을 받아 챙겼다. 그래서, 별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니꼽게 권세를 부릴 때 '과천 현감 행세하듯'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과천 현감도 무조건 그 통과세를 받아 낼 수는 없었던지 별별 구실을 다 붙여 길손들을 동헌 앞에 불러들여 돈을 내놓도록 했다. 관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느니, 말을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느니 하면서. 아전들은 심지어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트집을 잡아 문세를 물렸다. 이 문세 수탈로 인해서 길손들은 서울 문턱인 이 곳에서 적잖은 돈을 털려야 했다.
과천 읍내를 통과해도 서울로 가기까지는 또 돈을 털려야 할 곳이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과천 읍내 북쪽의 남태령이다.
이 남태령을 넘을 때는 길손들의 뜻과는 관계 없이 젊은이들이 고개 밑에서부터 달라 붙어 고갯길에서 도둑들부터 보호를 해 준답시고 동행을 하곤 꼭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고개넘잇돈' 즉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월치전을 받는 곳은 이 곳 말고도 서울 근처만 해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무악재였다.
□ 과천의 여러 마을들
지금은 과천시가 시가지 형태를 이루었지만, 4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곳은 지방의 여느 시골과 별반 다름이 없던 곳이었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의 좁은 들 사이로 양재천의 상류가 지나고 있었고, 들 양쪽의 언덕 곳곳에 초가집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던 곳이 개발로 인해 많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이름높던 그 과천 고을이 옛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별로 그 옛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과천에 옛날에 있었던 마을들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관문골(官門洞), 읍내
전에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과천 군청의 문이 있어서 '관문골'이라 했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그 옆의 '안점말(內店洞)'을 합해서 '관문리'라 했다.
이 마을에서 서쪽인 새술막으로 가는 길에 군수나 현감의 선정비들이 세워진 '비석거리'가 있었다. 그 비석들은 1972년 길을 넓히기 위해 중앙동 동사무소 옆으로 모두 옮겨 놓았다.
종앙동 동사무소 위에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부친(사도세자)의 능으로 참배하러 갈 때 쉬던 객사인 온온사(溫溫舍)가 있다.
·향교말(鄕校洞, 校洞)
지금의 문원동 관악산 입구쪽에 있던 한 마을로, 향교가 있어서 '향교말'이다. 발음 변화로 '생겻말', '생짓말' 등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개발로 인해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문원(文原)'이란 이름은 향교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새술막(新酒幕. 外店)
길가에 있던, 문원동의 한 마을로, 옛날에 길손들이 잘 쉬었다 가는 곳이어서 새로운 술막 거리가 형성되었고, 그 때문에 '새술막'이다. 읍내 바깥쪽으로, 주점이 있던 곳이어서 한자로 '외점(外店)'이라고도 했다. 전국의 옛 도로 가에는 새술막 또는 '신주막(新酒幕)'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많은데, 이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많은 길손들이 지나다녔던 곳이다.
·홍촌말(洪村)
문원동의 한 마을로, 남양홍씨가 많이 살아 '홍촌(洪村)' 또는 '홍촌말'이다. 개발에 밀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정부 과천청사가 들어섰다.
·구리안(九里內)
골짜기 안에 있어 '굴(골)의 안'이란 뜻의 말이 이런 땅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관문동이나 문원동쪽에서 보면 완전히 골 안쪽으로 보이는데, 개발로 인해 이 마을도 없어졌다.
·다락터(樓基)
'다락'이 있어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산골 마을에 많이 붙는 '달(산)' 관계의 땅이름이 확실하다.
달+터>달 터>다 터>다락터
이 밖에도 과천시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마을이 있었다.
바바
·가는골(細谷) 문원동. 좁은 골짜기의 마을
·사기말(沙器幕)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나……
·새터말 '사기말'과 '베레이' 사이의 새로 된 마을
·두집메 두 집밖에 없었으나, 나중엔 네 집이나……
·베레이(別陽洞) 청계산 골짜기 안의 벼랑쪽의 마을. '배랭이'
·한내(漢溪) 과천동. 옛날에 하리(下里) 지역. '큰 내'의 뜻. 큰 내(양재천)가 지나……
·삼거리(三巨里) 과천 읍내에서 올라와 두 길로 갈라지는 세 갈래의 길
·남태령(南泰嶺) 남태령고개의 과천쪽 마을.
·안골(內谷) 골짜기 안쪽 마을
·선바위(立岩) 산등성이에 바위가 서 있어. 지금 그 곳에 지하철역이 있다.
·뒷골(後谷) 골짜기 안 마을
·줄바위(注岩) 주암동. 원래 과천군 동면의 지역.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어서. '죽바위'.
·돌무개(石浦) 돌이 많아
·삼부굴(三浦) 산밭골>삼붓골>삼부굴. 그 아래엔 '아래삼부굴'
·맑으내(맑내,淸溪) 막개동. '맑개'. 청계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내가…. '청계산'이란 이름의 바탕
·가루개(葛峴) 갈현동. 본래 과천군 군내면 지역. 옛날 과천과 수원 땅의 경계. 수계(水界)
·찬우물(冷井) 찬 우물이 있어서. 과것길 길손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가일(佳日) '가루개' 서쪽 마을. '가장자리 마을'의 뜻.
·제비울 제비가 집을 많이 지어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좁은 골짜기'의 뜻
·샛말 등성이 가운데에 박힌 마을. 사이의 마을의 뜻.
·옥탑골 '오탓골'이란 이름이 변한 듯. '외진 터의 마을'이란 의미 지녔을 듯
·자경골(自耕) '자긍골'이 원이름일 듯. '작은마을'의 뜻을 지닌 듯
□ 남태령
이 고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워낙 고개가 높아 예부터 많은 도둑들이 들끓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 고개 밑에는 행인들이 고개를 잘 넘을 수 있도록해 준다며 장정들이 대기해 있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전에는 여우가 많아 '여우고개'라 하기도 했었다
정조 임금도 수원을 오고갈 때 이 고개를 주로 넘었는데, 그 때까지도 이 고개를 대개 '여싯고개' 또는 '여우고개'라고만 불러 왔었다. 한자로는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으로 씌어 왔다.
학자들 중에는 '여우'의 비표준어로 '여시' 또는 '야시'가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높은 재'가 아닌 '낮은 고개'라 해서 '얕은 고개'의 표현인 '야지고개' 또는 '야시고개', '여시고개', '여우고개'가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어떻든, '여우고개'가 한자로 뜻옮김된 것이 '호현'이고, '여시고개'의 '여시'가 소리옮김으로 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땐가 정조 임금이 이 고개를 넘다가 근처 토박이 사람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가 그 요사스런 짐승 이름이 들어간 고개의 이름을 바르게 댈 수 없다면서 서울 남쪽의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南泰嶺)'이란 이름으로 얼렁뚱땅 대답을 한 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태령'이란 이름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이미 있음이 문헌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전설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
남태령은 또 고개가 너무 후미지고 도둑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웬만한 장정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혼자서 넘질 않았다. 이를 악용해 남태령 밑의 '한내'라고 하는 곳에서는 행인들의 돈을 뜯어 먹는 얌체 '고개넘이꾼'이 있었다. 이들은 도둑들로부터 행인을 보호해 준답시고 함께 동행을 하여 고개를 넘겨 주고는 돈을 요구했다. 이른바 '고개넘잇돈' 한자로는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이 과천을 거쳐 지금의 과천동 '삼거리'라는 곳에 이르면 남태령길로 질러 가느냐 조금 돌더라도 말죽거리쪽으로 돌아가느냐를 결정하느라 망서리곤 했었다.
남태령은 그만큼 예부터 넘기가 거북한 고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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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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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儒達山)은 다도해 관광권의 중심인 전라남도 목포시의 해안 가까이 있다. 죽교동, 유달동, 대반동, 온금동, 북교동 지역에 걸쳐 있는 이 산은 높이 229미터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기암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다. 산마루의 일등암(一等巖)에 오르면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산마루에는 2 개의 봉수대가 있는데, 조선시대에 바다를 통해 침투하는 외적을 경계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
이 산에는 대학루(待鶴樓), 달성각, 유선각(儒仙閣), 관운각(觀雲閣), 소요정(逍遙亭) 등의 정자가 있다.
달성각은 1958년 광복 13돌을 맞아 세웠고, 유선각은 1932년 10월 목포 개항 35주년을 맞아 세운 것으로, 나중에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였다.
산 중턱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 230평이 어린이 놀이터와 4 19기념탑과 충혼탑(忠魂塔) 등이 있다. 유달사(儒達寺), 관음사(觀音寺), 수도사(修道寺) 등의 절이 있고, 활쏘기 연습을 하던 궁터도 있다.
달성각(達成閣)에서 100미터쯤 내려오면, 오포대(午砲臺)가 있는데, 옛날에 정오(正午)를 알리던 곳이다. 근처에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을 쌓아 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인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노적봉 남쪽 기슭의 해안을 매축하여 신시가지를 만들었는데, 지금의 만호동과 무안동이 그 지역에 해당한다.
유달산 북동쪽 기슭에 조성된 조각공원은 목포 시민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근처에는 그리 넓지 않은 난공원(蘭公園)이 있다.
산의 서쪽 비탈은 경사가 심해 도시화가 덜 된 편이다. 해안에는 유달산해수욕장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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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과 팔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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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의 남문인 '숭례문(崇禮門)'을 모르고 서울을 얘기할 수 없듯이 수원성의 남대문인 '팔달문(八達門)'을 빼고 수원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수원의 상징이랄 수도 있는 팔달문은 수원 시민이건 이 곳을 들른 외지인이건 거의 지나쳐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문의 정확한 위치는 장안구 팔달로 2가로 대체로 보아서 수원시의 중심이 된다.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대문이다.
문루의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장엄하다. 더욱이 2층 누각의 조각과 색채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이 문은 과학적 설계로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누문의 설계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각종 재료의 규격과 수량이 정확히 기록돼 있다.
이 문은 너비가 25m, 높이가 9m로 서울 남대문보다도 크다. 문의 누각 위에 올라서면 수원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마다 10월 중순경에는 정조 임금의 효심을 이어 받은 효원(孝園) 도시임을 자부하는 수원 시민들이 이 문을 중심으로 화홍(華紅)문화제를 연다.
이 문과 가까운 곳에는 팔달산(八達山)이 있다.
이 산은 원래 탑산(塔山)이었는데,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팔달산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고려말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이고(李皐)는 혼돈한 정치에 염증을 느껴 탑산에 은거하였다. 뒤에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뒤 입조(入朝)하기를 누차 권했으나, 그 때마다 '진세(塵世)에 몸을 담느니 차라리 사문(四門)이 팔달(八達)한 산 속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거절하고 계속 이 산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그 산을 그림으로 그려 보내라 하고 그림을 받아보니 과연 산 모습이 그러하여 '팔달산'이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국어 학자들은 팔달산이 원래 두산(頭山), 즉 '머리산'의 뜻을 가진 산이라고 주장한다.
남대문인 '팔달문(八達門)'
팔달산에서 '팔(八)'을 숫자의 '여덟'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발'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발'은 '받'에서 나온 말로 이것은 옛날에 '머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의 말에 '박치기'란 말이 있는데 이것도 '머리로 친다(받는다)'는 뜻의 '받치기'가 원말이다. '팔달'에사 '달'은 '산(山)'의 뜻이므로 '팔달산'은 원래 '받달'이고 이 말은 '머리산', 즉 '고을 중심의 산'의 뜻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받(頭) + 달(山) = 받달
받달>발달>팔달>팔달산
팔달산과 이 산에 위치한 팔달공원은 수원시민의 가장 친근한 휴식처로, 호젓한 산책로와 함께 정상에까지 차도가 나 있다. 팔달공원은 수원성 보수와 때를 같이하여 지정되었다.
팔달산 산마루에 오르면 탁 트인 조망이 시원함을 안겨 주고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길은 연인들의 산책로로도 알맞다.
정상인 서장대(西將臺)에서 도청쪽으로 내려오면 3 1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둘 서 있고, 그 옆길로 내려오면 용담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옆엔 한국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너비 1.5m, 높이 3m의 화강암으로 된 비의 상부에는 난파의 동판 초상화가, 아래엔 '고향의 봄' 노래판과 악보가 새겨져 있다. 이 노래비는 수원이 고향인 난파의 공적을 추모키 위해 1968년 10월, 탄생 70년을 맞아 화홍문화제 때 세운 것이다.
휴게소 근처엔 고려 명장 강감찬의 기마상이 있다. 팔달산의 높은 기슭을 뒤로하고 손을 높이 들고 달리는 모습이 너무도 믿음직스럽다.
팔달산은 수원의 중심부에 위치애서 이름 그대로 팔방(八方)으로 길이 이어지는 산이다. 또 우리말 이름 '받달' 그대로 수원시의 머리(으뜸)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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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산과 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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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읍에서 진천읍쪽으로 15㎞ 가다가 보면 '청룡 저수지'라는 작은 저수지가 하나 나온다. 여기서 왼쪽길로 들어서서 1㎞쯤 가면 청룡리 마을이 나오고, 조금 더 들어가면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자리잡은 산 하나, 서운산(瑞雲山)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청룡산은 달리 '청룡산(靑龍山)' 또는 '좌산성(座山城)'이라고도 한다. 높이 547m로, 봉우리의 북쪽은 안성시의 금광면(金光面)이고, 남쪽은 충북 진천군의 백곡면(白谷面)이다.
한산 세모시,
잔주름 곱게 갈아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 한 예인 처녀의 한이 서린 곳
서운산은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민족혼과 가락을 흥겨운 풍악으로 승화시켰던 남사당패의 발원지이다. 뜨거운 의로움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선 의병들의 숨결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괘자를 걸친 졸아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된다. ---
-노천명의 시 '남사당' 중에서
남사당패는 화가 김병종의 말처럼 화인(火印) 맞은 듯 저희들끼리 숨어살다 사라져 갔던 예인(藝人)들이다. 삼동(三冬) 시린 세월에도 오히려 찬물 끼얹어 제 몸의 불길을 다스려야 했던 신명의 생애를 지닌 이들이다.
안성 남사당패라면 우선 바우덕이를 잊을 수 없다.
원화(源花)의 환생, 국자랑(國子郞)이 후예로 불렸던, 짓밟히고 능멸 당하면서도 고통의 절규마저 예(藝)로 승화시켰던 사람. 민중 예인의 삶을 살았던 그는 스물 세 살의 처녀로 죽어 관(棺)도 없이 눈 속에 묻혔단다. 그 서러운 죽음을 어찌 잊을쏜가?
□ 남사당패의 발원지 청룡마을
남사당패의 본거지는 서운산 불당골의 청룡마을이다. 불당골은 남사당 최후의 은거지로, '팔사당골'이라고도 불려 왔다. 그 골짜기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 고찰이 바로 청룡사(靑龍寺)이다.
절의 이름은 공민왕 13년(1364), 나옹선사가 하늘에서 푸른 용 한 마리가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전한다. 풍수지리로 보아 이 일대가 청룡(靑龍) 형상이어서 절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설도 있다.
불사(佛事) 때면 남사당패들이 내려와 일손을 거들곤 했다는 이 절에는 보물 824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3층 석탑이 있다.
남사당이 풍악을 익혔던 청룡사(靑龍寺)의 앞마당은 현재는 채소밭이고, 일부는 잡초에 뒤덮여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이런 노래말로 치장된 남사당 풍물놀이의 리듬을 타면 누구라도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이 노래는 안성 고장에 구전되고 있다.
'바우덕'은 '박우덕'을 일컫는다. 박우덕은 청룡사의 100여 m 아래쪽에 있는 불당(佛堂)부락 사람으로 전해진다. 조선 제일의 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었다는 남사당패를 이끈 이 박우덕은 유랑 집단의 뭇 기예인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소문났었다.
박우덕 처녀는 팔도에서 유명해 조선 고종 때에 대원군의 명으로, 1805년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세울 때도 불려 나갔다. 여기서 박우덕은 일꾼들의 위문을 위해 각지에서 모인 유랑 집단 기예인 중에서 <판놀음>으로 출중한 기량을 보였단다. 이를 본 대원군이 당상관 옥관자(玉貫子)를 하사하기까지 했다니 그의 재주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장을 했어도 도화(桃花)같은 미녀였던 데다 조선 유랑 집단 사이에 하늘이 내린 재주로 불렸다고 한다. 염불은 물론, 소고춤에 풍물, 꼭두각시놀음, 덧배기놀음, 줄타기 등등 못하는 것이 없었단다. 바우덕이 국판 벌리는 장터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는 사실로도 그의 재능을 능히 짐작하게 된다.
안성장은 남사당패의 주무대이다. 또, <허생전(許生傳)>에 나올 만큼 장터로도 유명한 곳이다.
안성은 '기호(畿湖) 삼남지교(三南之交)의 교차로'로 팔도의 물산과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놋그릇이 유명해 '안성유기('安城鍮器)'로 소문난 이 곳엔 꽃신, 갓 등도 장날이면 많은 이들이 찾는 상품이었다. 장날이면 넉넉한 상품들과 함께 장거리에서 몸재주와 풍물 등 판굿놀이가 풍성했다. 바우덕이패의 남사당 풍물놀이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달했다.
□ 젊은 나이로 혼자 죽은 바우덕이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다. '암덕(岩德)'은 '바우덕'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러나, 바우덕이의 출생지나 난 해나 죽은 해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안성 남사당패의 전설적 명인으로, 갖가지 기예에 뛰어나 여러 가지 일화만 남긴다. 그가 전성을 누리던 이후로는 안성에 복만이패, 원윤덕패 등의 남사당패가 그 뒤를 이어 안성은 풍물 고장이 된다. 바우덕이의 혼은 아직도 이어지는 것인가.
그러나, 이처럼 혼을 불태워 살았던 박우덕 처녀도 말년은 너무 허무했다.
팔사당골에 마지막까지 남아 길 떠나는 남사당패를 쓸쓸히 전송하곤 하다가 병이 들어 버린다. 그 병이 깊어져 결국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홀로 죽는다. 그런 데다가 천한 신분이라 하여 관도 없이 누군가 가마니에 둘둘 말아 근처 어느 골짜기에 묻고 말았단다.
1990년까지 그의 묘는 돌보는 이 하나 없이 잡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 '안성 남사당'이 제30회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안성 지방의 예능을 주도했던 바우덕이의 넋을 기려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 마침내 서운산 밤나무골 양지바른 언덕(청룡리 산1번지)에 묘를 단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의 묘 앞에 이르면 그가 신나게 내뱉었던 소리가 들려 오고, 온몸을 던져 연출했던 그의 몸짓 바람이 새어 나오는 듯하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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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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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놉더니마는
믜운거시 안개로다.
텬왕 뎨일봉을 일시에 가리와다.
두어라,
해 퍼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고산 윤선도는 호남의 소금강 월출산의 안개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침 안개의 노래'라는 뜻의 '조무요(朝霧謠)'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낭림 태백의 등성이를 타고 남으로 흘러내리다가 소백산맥을 거쳐 남서쪽으로 굽이치다 영암과 강진의 경계에서 큰 머리를 불끈 솟아 올렸으니, 이 산이 '달 뜨는 산'이란 뜻의 월출산(月出山)이다.
이 산은 지리산, 내장산, 천관산, 변산 등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산이름도 역사에 따라 바뀌어서 삼국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또는 '월나악(月奈嶽)'이라 했고,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렸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월출산'으로 개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은 '호남에 제일가는 그림같은 산'이라고 극찬했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대단히 맑고 뛰어나 이른바 화성조천(火星祖天)의 지세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월출산은 보통 '영암 월출산'이라고 하듯이 '영암(靈巖)'이라는 고을 이름과 관계가 깊다. 영암의 옛이름이 월나군(月奈郡) 또는 월생군(月生郡)이었으니 월출산의 옛이름인 월나산, 월생산과 같은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월나 - 월출'에서 '월'은 같은데, '나'가 '출(出)'로만 바뀌었다. 여기서 '나'를 '나다(生, 出)'의 뜻으로 보면 월나, 월출의 두 이름임이 결국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월(月)은 '달'이므로 월출산은 '달나뫼'의 순 우리말 이름의 한자식 전음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월출산이 '얼배'나 '얼바위' 또는 '얼나'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1988년 6월 12일 국립공원 제20호로 지정된 월출산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갖가지 형상을 빚어내고 가을이면 고운 단풍으로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해낸다. 어떻게 보면 우락부락하고 심술궂게 보일 정도로 험하고 예리한 산인데, 그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는 무등산이, 남으로는 해남 대흥사와 두륜산이, 서로는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산을 오를 때 느끼는 감정은 그저 가파르고 험하다는 것인데, 청명한 날에 정상에 일단 오르면 남해안의 다도해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인 천황봉은 날카롭게 솟아 있어서 그 누구의 접근도 거부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데, 바위 틈을 비집고 오르면 주위의 많은 바위들이 마치 머리를 숙이고 엎드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월출산 능선에는 향로봉과 침봉이 있고 그 너머로는 미왕재가 도갑재가 있다. 능선이 북동과 남서를 가로지르며 이어지는데, 영암쪽으로는 도갑사가, 강진 쪽으로는 무위사가 있다. 두 사찰 모두 고색창연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특히 도갑사의 해탈문과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월출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양의 차나무가 야생하며, 6 25 전까지만 해도 제다법(차를 달이는 법)이 끊기지 않고 전수된 곳이다. 무위사를 창건했다고 하는 원효대사나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모두 차를 즐겨 마신 다승(茶僧)들이었다.
도갑사 계곡에서 나는 차는 품질이 뛰어나서 예부터 많은 이들에게 애음돼 왔는데, 조선 세조 때 도갑사를 중수한 수미왕사(守眉王師)는 이 절에서 난 차를 신숙주에게 선물한 일이 있었다. 차를 받은 신숙주는 이에 답해 <도갑산계 작설차>(道岬山溪雀舌茶)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고 한다.
'도갑사의 작설차와
옹촌 울타리 아래 설매화는
옹당 내 고향 생각하는 뜻 알게 하니
남쪽의 지나간 많은 일 말해 주려무나.'
이처럼 영암 월출산은 산세도 아름답고 이름난 사찰도 안고 있는 데다 예부터 차의 주산지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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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00년 4월 7일 방송 0505(15분) 땅방 KBS 2R 언제나청춘 길 따라 지명 따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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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전북 장수읍 수분리의 신무산에서 발원, 전북과 충남 북의 여러 곳을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돌아 군산과 장항 사이의 하구를 통해 황해로 들어간다, 그 길이 약 1천 리.
길이가 긴 만큼 줄기 곳곳에 백마강(白馬江), 새여울(신탄.新灘), 지프내(심천.深川), 곰나루(웅진.熊津) 등 여러 이름들을 낳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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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의 눈에 비쳐진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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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아 많은 이들의 시심(詩心)을 끌어당긴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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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우거진 금강변에
봉기운 가득한데,
나그네는 터벅터벅
홀로 쪽배에 올라 옛 자취를 찾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새들은 창공을 울며 나는구나.
조선 명종 때의 김상용(金常容)의 시이다.
한시를 번역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 없는 청산, 창공을 나는 새들,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서 쪽배를 타고 자연에 취해 버렸을 옛 선인의 마음 속에 우리 마음도 함께 용해시켜 준다.
금강 중에서도 잘 알려진 곳이 부여 근처의 백마강이다.
옛날 장터로 유명했던 강경 읍내가 근처에 있어서 많은 배들이 모여들던 곳이어서 예부터 많은 이들의 발길을 글었다.
1930년대 중절모의 신사 채만식(蔡萬植)은 그의 대표작 <탁류(濁流)>의 첫머리에서 금강 이야기부터 꺼내 놓고 있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줄기가 중둥깨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중략) …이렇게 어렵사리 서로 만나 합수진 한 줄기의 물은 게서부터 고개를 서남으로 돌려 공주(公州)를 끼고 계룡산(鷄龍山)을 바라보면서 우줄거리고 부여로…. 부여를 한 바퀴 휘돌려 가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뫼(논산.論山) 강경이(강경.江景)가지 들이닫는다. 여기가지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안 한 처녓적이라고 하겠다.'
채만식은 이 부분의 다음에선 금강의 물이 강경 다음부터 착한 모습으로 나타냄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 풍부한 양의 물을 보고는 '그득하니 벅차다'면서 만족함을 토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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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 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밋밋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潮水)까지 섭슬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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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1960년대의 시인 신동엽(申東燁)은 그의 대서사시 '금강'을 한국 현대시사에 도도히 흘려보내 민중의 흙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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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로 용을 잡았다 해서 '백마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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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중에서도 부여군을 휘감아도는 16 km정도의 물줄기를 따로 '백마강'이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 강을 '백강(白江)' 또는 '사비하(泗 河)'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마강'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치러 왔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지키는 강 속의 용을 백마(白馬)를 미끼로 잡아올려 나온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마(馬)'라는 말은 백제에서 '크다'는 뜻으로 씌었기 때문에 '큰 백강(白江)'이란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하지만, '큰 백강'의 뜻이라면 차라리 '마백강(馬白江)'이 되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이론엔 대답이 궁색해진다.
'백마'에서 '마'는 '큰'의 뜻이 아니라 '물'의 뜻이 아닌가 한다. '마'나 '매'는 '물'을 뜻하는 옛말이었다. 고구려나 백제 지명에서 매홀(買忽: 수원), 마홀(馬忽: 양주) 등은 모두 '물의 고을'의 뜻일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말의 '장마'의 '마'도 '물'의 뜻이다. 따라서, '백마(白馬)'는 '백강(白江)' 또는 '백하(白河)'와 같은 뜻의 이름일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의 '백(白)'은 '밝'의 음차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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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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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해도 산천은 그대로였다. 이를 한자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 했다. 봄이면 푸른 산, 역시 나라 잃은 산천도 봄이면 푸르러 갔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시절, 우리 겨레는 그 한을 노래로 풀어 냈다.
망국의 시대, 민족의 비원은 옛 왕국의 고도에서도 절절이 가슴에 사무쳤다. 이 시절에 나온 우리 대중가요 중엔 쓸쓸한 옛 도읍지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 많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로 시작되는, 백마강을 노래한 가요 '꿈꾸는 백마강'도 그 대표적인 애창곡의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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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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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산줄기와 소백산줄기 사이의 너른 벌을 훑어 흐르는 금강, 그 금강의 한 허리인 백마강,… 이 백마강은 오늘도 갖가지 전설을 흘리고, 또 생각 많은 이들 가슴에 시심을 안겨 주며 천천히 서해로 흘러들고 있다.
'고란사 종 소리 사무친 옛날,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누나.…'
백마강의 남안엔 높이 106미터의 부소산이 솟아 있다. 부여의 진산으로서 백제 시대엔 왕궁의 궁원(宮苑) 구실을 한 곳.
이 산에 그 유명한 낙화암(落花岩)이 있다. 백제 패망 당시의 삼천 궁녀의 전설이 서린 곳. 그 벼랑 한켠에 산비탈을 깎아 내고 지은 고란사가 늙은 소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다. 고란초 잎새가 비탈을 용트림하고 기어오른는 사이사이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고란사 자리는 원래 백제 왕실의 정자가 있던 곳이었으나, 고려 초에 들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의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서 절을 짓게 된 것이라고 한다.
낙화암을 보면 백제의 패망을 생각하게 되고, 이에 곁들여 근세사에서의 '한일병탄'을 떠올리게 된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일 무렵, 우리 겨레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 무렵, 우리 겨레는 그 한을 노래로 풀어 낸 것이다. 이 무렵에 태어난 노래들이 애조를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하던 1941년의 어느 가을날, 작사가인 김용호(金容浩)는 지방 공연차 부여를 지나다가 낙화암 절벽 아래서 겨레가 겪는 슬픔과 서글픔을 글로 써 나갔다. 당시 그는 트럼본 연주가이기도 했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뱃사공에 몸을 맡긴 채 낙화암 절벽 아래를 천천히 돌았다.
날은 저물어 이지러진 달이 강에 빠져들고, 물새들은 소리내어 울며 배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경치에 취했고, 이어서 나라 잃은 슬픔에 빠져 들었다. 그의 감정은 이쯤에서 붓을 휘둘러 노래를 써 나가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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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갈 달밤에 물새가 울어…'
김용호의 감정 담긴 글은 노랫말로 살아나 그 다음해인 1942년 OK레코드사에서 임근식(林根植)이 곡을 붙여 이인권의 노래로 취입이 되었다. 그 유명한 '꿈꾸는 백마강'은 이렇게 태어났다. 이 노래는 우리 겨레의 가슴 속으로 급히 파고들어 널리 메아리쳐 나갔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 풍기는 민족적 체취와 저항정신 때문에 얼마 후 일본 경찰의 압력을 받아 '불온가요'처럼 취급되어 그 확산이 저지되었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지만, 이 노래는 계속 생명을 이어 나갔다.
백마강도 많이 변했다. 유유히 떠가던 황포돛대도 이젠 없고, 낙화암 아래 우거졌다던 뫼버들 숲도 사라졌다. 외국의 고위 사신들만 드나들었다던 사비 도성의 구드래 나루터엔 매운탕을 파는 식당들만 가득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 곳을 무대로 한 노래의 가사는 처음이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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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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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이 흐르는 물엔 백제의 한을 실은 고란사 종 소리도 배었고, 구곡간장(九曲肝腸)을 올올이 찢는 옛 사람들의 슬픈 마음도 담았을 테지만, 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백마강은 언제 보아도 '서글픔'의 강으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온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