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

吾心竹--오심죽-- 2009. 8. 21. 15:10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1>
안성에서 발견된 마한 왕도는 어떤 국가인가?
안성신문
▲양성면의 한천. 고대의 왕도는 강과 하천으로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 \'한\'이라는 하천이름 주변에 왕도가 있었다.     © 안성신문

*글쓴이 주 : 지난해 안성시 양성면 한천 일대에서 발굴된 ‘마한 왕도(王都)’에 대해 총 4회에 걸쳐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고자 한다. <1> 안성에서 발견된 마한 왕도는 어떤 국가인가 <2> 역사기록에서 나타나는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3> 마한 왕도는 어떤 구조이며 고대 왕도와의 비교에서 유사점은 무엇인가 <4> 양성면 성하리를 왜 마한의 왕도라고 하는 가.

 
백제 초기 왕도 연구에서 마한 왕도의 실체를 가늠하게 되었다. 마한 왕이 백제 온조왕을 꾸짓기를 “일백 리 지역에 땅을 주었는데…”라는 기록과 같은 거리의 안성에서 마한의 왕도가 발견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명이 대한이라는 명칭도 삼한을 근거로 하였고 특히 마한은 한반도 전체를 다스렸다는 거대한 역사의 원류이자 고조선 역사와 통하는 오래된 왕도이다. 마한의 왕도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큰 맥의 줄기를 잊어버린 것과 같다.

1992년에 백제초기 2곳의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를 하는 동안 많은 의문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백제와 함께 존재하였던 마한의 왕도는 어느 곳일까, 지금까지 역사의 수수께끼가 되어 왔었다.

백제 신라 모두 초기에는 마한의 지배를 받았던 78개 소국의 맹주국이었다. 마한의 통제를 받아온 백제초기였고 중국의 사서에 마한에 대한 기록이 우리 사서보다 많을 만큼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국가였다.

지금까지 학설의 주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왜정시대부터 정설처럼 되어 있고, 또한 삼국초기는 부족국가라 하여 원삼국 시대라는 학설이 고착되어 있다. 이러한 학설에서 마한은 보잘 것 없는 국가라는 개념에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초기의 왕도를 찾아내고 보니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정확성이 있다는 것을 우선 알게 되었고 또한 마한이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라는 것도 점차 가늠하게 되었다.

삼한의 역사 연구가 앞서 있는 북한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마한, 진한, 변한의 전체를 다스린 국가가 진국(辰國)이며 삼한은 행정 명칭으로 보면서 마한이 진국의 주체가 되어 삼한 전체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 당시 중국에는 한(漢)나라라는 거대한 국가가 있었고 또한 한나라와 1년간 싸운 막강한 고조선이 요동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조선에서 한반도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대단위 정치적인 망명객이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진국의 실체가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중국의 문헌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함께 있었던 진국 마한의 왕도는 기원전 국가이기에 대부분 왜소하거나 위치도 분명하지 않기에 찾는다는 것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 전체를 다스린 국가이자 중국 지역의 세력을 견제할 만큼 강력한 힘도 있었다면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교차하고 있었다. 못 찾는다 할지라도 어떻게 찾으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과정도 역사 기록에서는 중요하다고 느꼈다. 마한의 왕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끝없이 멍에를 지고 갈 수밖에 없고 시급한 것은 개발관계로 한번 유실되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 왜곡을 당하고 있는 큰 문제 중에서도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평양에 중국의 군현인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420년간 한반도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바로 마한이 존재 하였던 시대로서 원삼국 학설과 함께 삼한 시대는 부족국가이며 한사군에 종속 되어 오랫동안 왜소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장기간 존재한 한사군의 군현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고 낙랑국과 대방국이라는 국가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바르게 규명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증이 될 수 있는 유적이 우선 확보되어야 진위를 가릴 수 있다.

특히 왕도는 그 당시 국력과 모든 함축된 역사자료가 결집되어 있고 특히 마한의 왕도는 민족사를 바르게 밝혀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거대한 왕도 유적이다. 그 중요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혼이 배어 있는 민족의 유산이다.
한종섭((사)백제문화연구회 회장)*
 
*글쓴이는 현 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으로, 1992년 제7회 전국 문화원 주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고 2000년 경기도 하남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근무한 바 있다. 2004년 양성면 성하리에서 진국 마한의 왕도 유적을 발굴하고, 올해 춘천시 신북면 발산리에서 매국 왕도 등 미발표 왕도 1개소를 비롯하여 1992년부터 총 5개의 왕도 유적을 찾아내었다. 저서로는 『위례성 백제사』2권(집문당) 등 다수가 있다.

 
 
기사입력: 2005/07/05 [20:33]  최종편집: ⓒ 안성신문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김한영 05/07/07 [20:28]
안녕하신지요? 글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신문에 안성 100년이라는 연재 글을 쓰고 있는 김한영이라고 합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안성에 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해 주셔서 안성시민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목지국이나 신분활국처럼 기존 학계에서 안성 일대에 읍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마한의 성읍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던 참에 선생님의 글을 접하고 보니 반가운 마음 그지 없습니다.
고고학적 리서치에 관심은 많지만 제 전공분야도 아닐 뿐더러, 특히 필드작업에 대한 전문적 식견도 일천한 제게 좋은 공부가 될 것으로 여겨서 자뭇 기대도 큽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까닭은, 양성에서의 발굴을 직접 접하지 못한 제 입장에서, 사진 아래 설명 중 "한이라는 하천 주변에 왕도를 두었다"는 전제에 의문이 생겨서 몇마디 여쭙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이 설명문이 선생님의 견해인지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표현인지요?) 선생님께서도 한천이라는 이름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이전의 명칭은 선원천이었지요. 잘 아시겠지만, 양성 관아 남방에 소재한 禪院이라는 역원에서 따온 이름이었지요.

인근의 지류나 본류로 見乃(川)나 弘慶川이라는 물줄기 이름이 사용되기는 했습니다만, 한자가 들어가는 강이나 천의 이름은 양성은 물론 안성에도 없지 않습니까? (일정 때 새로 지어진 한천이라는 이름은 제외하고)
그럴진대, 양성의 발굴지를 왕도로 추정하는 하나의 근거로 인근에 한자가 들어가는 하천을 들고 있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은 아닐런지요?

차후 다시 인사 드릴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저의 의문에 대해 좋은 가르침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김한영 배상. 수정 삭제
한종섭 05/07/08 [15:38]
한글 학회에서 발간한 지명총람 경기도 산천편에 보면 한천이 용인군 원삼면 병목산에서 발원하여 목신천, 사상천,고삼저수지를 지나 양성면 방축리를 지나 동항천 이 되고 공덕면 신두리를 지나 안성천으로 흘러 들어 간다고 자세하게 조사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하천의 이름은 시대와 위치에 따라 변화가 있지만 위와 같이 긴 하천을 근거 없이 최근에 한천이라고 이름 지었다고는 할수 없으며 옛이름이 있기에 그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인정이 있어야 하며 또한 새로이 조성한 하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가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양성의 북쪽의 진위천도 한내, 대천 이라고 하였으며 (지명총람 경기도편)그 위의 상류를 미리내 라고 합니다.
미리내는 잘 아시겠지만 고대의 우리말 은하수를 말하며 이와 같이 "한"이라는 뜻도 한나라 "한"자로 보편적으로 보고 있으나 원래는 은하수 "한"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은하수를 "은한" 이라고 하며 왕은 천자로서 왕이 사는 곳은 하늘과 같은 도시 구조로 조성 하는 사상에서 왕도 주변의 하천을 은하수로 비정하면서 한천, 한계, 또는 대천으로 변화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귀하의 알고자 하는 지적에 감사 드리며 한정된 원고에 많은 자료를 나열 할수는 없지만 미리내 한천 등이 어느때 지어진 이름인가의 명확한 기록에 없다고 하여 최근에 이름 지어진 하천 이름이 될수 없습니다.
5곳의 고대 왕도를 찾아내고 보니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며 단순한 한천만을 갖고 왕도라 하지 않습니다.(보다 자세한 자료는 위례성 백제사 2권에 한산,한성, 한수의 뜻을 참조해 주시길)
수정 삭제
김한영 05/07/08 [17:36]
선생님의 견해는 잘 읽었습니다. 제가 제기한 논점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 ‘한천’이라는 이름이 고대 성읍국가 시절 양성에 왕도(고대국가의 도읍지)가 있었다는 선생님의 가설을 뒷받침할 일반전제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이 점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은 1960-70년대에 나온 자료인데, 이를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뜻밖인데요. 이 문헌에서야 당시 시점에서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천’을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니까요.

제가 아는 한, 적어도 용인시 원삼면 분지에서 발원하여 양성과 소사천을 지나 안성천(옛이름: 남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지금의 한천)의 실체야 과거에도 있었지만, 한천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최근에(아마도 일제가 편의주의적으로) 만들어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진대, 이 하천의 이름을 고대왕도설의 방증근거로 삼는 태도는 근거와 논리 양면에서 타당성을 얻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천의 실체를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언어학적 방법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묻고 있는 것이지요. 혹시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 하천을 ‘한’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부른 사례(문헌이나 자료)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진위천의 예도 열거하셨지만, 진위천은 마한이 50개 이상의 성읍국가들로 나뉘어 한정된 지역에 오밀조밀 들어서 있었으므로 그 생활반경을 고려할 때 양성왕도설의 근거로 언급할 하천은 아닐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아가, ‘한(漢)’과 ‘한[大]’은 언어계통상 갈래와 의미가 다른 말 아니겠습니까?

고고학도 하나의 과학(science)이라고 할 때, 목소리의 크기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학문적 보편타당성일 것이라는 사실은 선생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사실과 근거에 입각한 설득력은, 그 동안 이른바 ‘향토사학적 접근’의 아마추어리즘이 근거와 논리의 맹점을 적지않게 노정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필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막연한 추정이 아니라 기록과 문헌의 근거, 또는 실물자료나 발굴유물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고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고고학적 발굴작업이라는 게 디테일한 개개 사실(史實) 너머에 있는 역사의 본령을 꿰뚫어보는 직관능력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영역으로 알고는 있습니다만. 어쨌든, 선생님의 글에는 아직 양성에 과거의 읍치가 있었다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어떤 논거를 피력할 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

그런 연후 다시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요.
김한영.
수정 삭제
한종섭 05/07/10 [13:24]
역사학은 종합 학문이며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님니다.
마한의 규모를 너무 왜소하게 생각을 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무렵 중국에는 그 이전에도 거대한 진나라가 있었고 마한 멸망할 당시는 한나라라는 막강한 국가가 있었습니다 진위천이 양성의 왕도와 가까운 거리는 20리 밖에 안되며 그사이에 또다른 나라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잘못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남한 전채를 다스린 마한 관활 지역이 그렇게 협소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이 그러하였으니 당연한 생각입니다. 또한 행정명칭은 어느정도 변화된 시대를 알수 있지만 하천이나 강 이름에 대해서는 시대 구분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원래 부터 있었던 이름 있는 강이나 하천의 이름을 근거 없이 새로이 지어 낼수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없을 수도 있으며 기록과 발굴에 너무 의존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로서 하남시에서 백제 왕도를 20년간 발굴을 하고도 백제 왕도라 하거나 백제 유물이 많이 있다고 한 발굴단은 지금까지 없습니다.
문화일보 2003년 1월 2일 부터 3일간 연재한 내용을 보시면 모든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백제 왕도가 아닌 것을 대서 특필로 보도를 하였다면 우리나라 관료나 대학이 가만이 있을 것 같습니까 .
거대한 왕도를 찾아내고 발표하는 것은 개인과의 논쟁을 하는 것은 아니며 지금은 인터넷에 모든것이 기재 되는 만큼 법인 대표로서 함부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됨니다. 우라나라 고대사 전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만큼 평생을 학문에 바친 교수들의 심정과 천년동안 거론해온 실학자 들을 생각한다면 단순 질문으로 판단 하겠다는 의도는 문제가 있으며 현재도 책한권의 분량이 될 만큼 입증 자료가 있어야만 이러한 발표가 가능 합니다.
안성 신문 발표는 지면상 대중을 위하여 쉽고 간단하게 발표를 하는 만큼 보다 자세한 것은 언젠가 저서로 발표될 것입니다.
수정 삭제
김한영 05/07/10 [18:19]
일단, 저를 포함한 안성시민들은 지역에 왕도가 실재했다는 선생님의 견해(선생님이야 단정하셨지만 저는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역의 과거 역사를 밝히고 풍부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오지랖넓게 나서서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것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발표했다고 해서 곧 바로 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어떤 이론이나 학설이 진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관심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의 반증가능성이 완전히 잠재워져야 합니다. 물론, 선생님의 견해 또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한천이 문제제기의 매개가 되었기에 하는 말이지만, 언젠가 지역에서 온달장군이 이곳 한천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주장한 웃지못할 경우도 있었지요. ‘아단성’이 있던 ‘한수(漢水)’가 졸지에 양성면의 한천으로 둔갑한 것이지요. 이 내용은 그대로 안성시 홈페이지에도 등재되어 지역사랍시고 소개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개편되어 빠졌지만) 그런 주장을 한 이가 누구였다고 밝히지 못하는 것은 그 자료(『예향』)에는 글쓴 사람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실명으로,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웹 매체에 글을 내셨으니, 이렇게 문제제기라도 할 수 있지만, 『예향』의 경우는 그럴만한 사정도 못되었지요. 내로라하는 지역문화단체의 관계자들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러한 오류들을 바로 잡았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지경이지요.

그런 점에서 지역신문이 있어 공론의 장 역할을 하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선생님도 선생님의 견해를 피력하고 검증할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각설하고, 선생님의 답글에 대해 몇 가지만 첨언하고자 합니다.

1. 문명사적으로 하천 인근에 취락이나 도시가 들어선 것은 수리의 목적, 곧 물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설혹 고대국가 시대에 양성에 읍치가 있었다해도 한천 바로 곁에 두었을 것이기 때문에 20리 이상의 거리를 사이에 둔 진위천은 직접적 근거가 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2. 사용하는 용어의 정확한 개념정의가 없어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왕도(王都)’가 무엇을 지칭하는 지 알 길이 없으나, 마한이 연맹체의 수장이었던 진왕(辰王)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장(君長)들이 통치했던 성읍(城邑) 형태의 소국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왕도라는 표현부터가 다소 과장된 듯한 어감을 풍깁니다. 왕도가 마한연맹체의 우두머리인 진왕이 거주한 지역이었음을 적시한 것인지, 아니면 54개(숫자에 약간의 차이를 두는 경우도 있지요)의 소국 중 하나가 들어선 곳이라는 것인지( 이 경우라면 ‘신분활국’을 말하는지), 기원후 2-3세기 무렵 십제에서 발전한 백제가 팽창하여 몇 개의 토착세력들이 한층 공고한 연맹체를 이루었을 때 그 연맹체 중 하나의 읍치(邑治)였다는 것인지(이때는 양성이 이미 백제의 영향권 하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호하기 때문이지요.

3. 왕도라는 표현에 ‘거대한’이라는 수사까지 덧붙이셨는데요, 당시 마한의 소국들이 대부분 몇 천 가(家), 가장 많은 경우도 1만 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양성에 있었다고 선생님께서 주장하는 ‘거대한’ ‘왕도’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4. 또한 마한이 남한 전체를 다스렸다면, 진한 변한도 마한의 속국이었다는 의미인지요?(물론, 일정한 시기, 마한의 소국들이 진한과 변한에 속한 일부 소국들에 영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5. 아울러, 품위와 격조를 갖춘 논쟁이 될 수 있도록, 가능한 초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나 스스로 학자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만, 한천이라는 이름과 양성왕도설과의 연관성에 관한 저의 문제제기가 “평생을 학문에 바친 교수들”과 “천년동안 거론해온 실학자들”과는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선생님 이외에도 양성에 왕도가 있었다거나 한천이 양성왕도설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교수들이나, 그 점을 천년 동안 거론해온 (실)학자들이 혹 있는지요?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한 차례 실린 『안성신문』의 기고문에서도, 이 논쟁글에서도 주변부만을 맴돌 뿐 아직 양성에 왕도가 있었다는 어떠한 직접적인 근거도 제시한 바 없습니다. 따라서 논쟁은 일단 여기서 접고, 계속될 기고문에서 어떤 근거와 실물자료를 제시하는 지 지켜볼 참입니다. 아무런 근거의 제시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저에게나, 선생님에게나, 이 글을 보고 있을 신문의 독자들에게나 도시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나 신뢰할만한 구체적인 발굴유물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연재가 다 끝난 이후에도 별도로 코멘트할 일도 없겠지만요.

삼가, 건승을 빕니다. 김한영.


덧붙여 : 개인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퍽 실망스러운 견해이십니다. 잘 아시겠지만 학문은 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종사하시는 인문학은 더욱 그러합니다. 학문활동은 그 속성상 처절하리만치 고독하고,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숙명을 지닌 ‘개인적인’ 작업입니다. 단체의 대표이신 선생님도 학문의 지평에서는 한 개인 연구자일 뿐입니다. 저도 대학과 예술철학 관련 학회에 몸담고 있습니다만, 연구소나 대학, 또는 단체가 학문을 대신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학자로써의 개인이 진실을 밝혀 다른 학자들과 대중의 공감을 얻음으로써 학문적 권위가 생기는 것이지, 학술단체나 법인체가 누군가 주장한 사실에 권위와 설득력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2>

- 역사 기록에서 본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한종섭
▲거대한 건물지로서 산과 강으로 어우러진 천혜의 고대도시 마한 왕도     ©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진국 마한은 78개의 소국을 거느린 맹주국
∙고조선 시대 한반도의 토착왕국은 진국(辰國) 마한(馬韓)이었다.
 
 
안성에서 발견된 마한 왕도에 대한 문헌기록은 어떠한가. 중국 측의 사서에 의하면 마한 54개국, 진한 12개국, 변한 12개국의 연맹체로서 나라 이름과 함께 생활상의 내용까지 자세하게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삼한을 모두 마한이 다스린 것으로 통합 전체의 나라 이름은 진(辰)국이라 하였다. 자세한 내용으로는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한(韓)전에는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기록이 되어 있고, 『후한서 한전』에는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전체의 국토가 사방 4천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제일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립을 하는데, 삼한의 제국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위의 내용에서 『삼국지』는 월지국이라 하였고 『후한서』에는 목지국이라 기록되었는데 자료의 신뢰도와 월지국이라는 기록이 두 곳에 나타나는 『삼국지』의 월지국이 신뢰성이 높은 기록이 되고 있다.(‘月’자가 ‘目’자로 오기될 소지가 높다는 것이 주류이다).

월지국을 진왕(辰王)이 통치하였고, 또한 진왕이 삼한 전체를 다스린 막강한 세력권으로 기록된 국가이다. 또한 마한 왕을 진왕이라고 하여 삼한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토착적인 진국(辰國)의 전통을 이어온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이나 북한의 연구에 의하면 삼한 분립 이전의 압록강 이남은 모두 진국이 다스렸으며 중심지는 곧 마한의 월지국이라는 내용의 삼국지 동이전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의 기록에서는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마한 왕에게 천도와 강역을 알리고, 전쟁 포로와 사냥한 신록을 바치는 관계로서 백제 초기는 마한의 지배를 받는 속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본기(新羅本記)의 기록에는 신라 사신이 마한에 오자 마한 왕은 분노하여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속국인데 근래에 와서는 공물을 바치지 않아 예의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의 사신을 죽이려고 하자 이를 만류 하여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에서도 마한은 삼한의 맹주국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마한 왕도의 위치를 천안의 직산 또는 익산이나 영산강 유역으로 보아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에서 본다면 백제와 마한과의 거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온조왕 24년(서기6년) “왕이 웅천책을 설치하니 마한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는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 일백 리 땅을 갈라주어 편히 살게 하고…’ 하면서 책망을 하는 기록과 온조왕 26년에는 사냥을 한다고 말하고 왕은 군사를 내어 마한을 기습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이다.

위와 같은 기록에서 마한과 백제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지금까지 마한과 관련된 연구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삼국지』한(韓)전에는 『위략(魏略)』을 인용한 글에는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속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천호의 백성들과 함께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고조선이 요동에 있을 때에 역계경이라는 조선의 관리가 우거왕에게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국으로 망명을 갔다는 것으로 그 당시는 한(漢) 나라와 고조선, 진국 등이 서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갈 정도였다면 힘이 약한 국가가 아닌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망명은 힘이 약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당시 고조선은 한(漢)나라와 1년간 치열하게 싸운 국가이며 고조선에서 진국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강대한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한의 연맹체가 진국이며 진국의 중심이 마한 의 왕도이며 마한의 왕도가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백제의 왕도에서 일백 리 거리에 속하는 안성에서 왕궁지와 함께 고대 도시가 발견이 된 것이다.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기사입력: 2005/07/12 [21:28]  최종편집: ⓒ 안성신문

 

 

 

 

 

 

 

 

<특별기고>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3>

고대 도시 구조에서 찾게 된 안성의 마한 왕도
한종섭

당진의 한진 나루와 평택의 방축리 일대의 토성에서 마한 왕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백제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왕도 구조에 대한 축적된 학술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막상 마한의 왕도를 찾고자 할 때는 조사 범위가 넓고 불분명하여 어느 곳부터 조사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평택시 고덕면 방축리 일대의 토성 

지금까지 마한의 왕도로 지적되어온 위치로는 인천, 익산(益山), 직산(稷山), 또는 영산강 유역의 나주(羅州) 지역으로 비정되어왔었고 대부분 제천 청주이남 지역이 마한의 중심이라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또한 마한의 멸망 시기가 백제 온조왕 때의 기원 전후가 아니라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서 백제 왕도와의 거리를 가늠하는 데 많은 혼란이 되어왔었다.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여 충청과 전라 지역을 마한의 왕도가 있었던 지역으로 비정하여왔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타나는 현상과 많은 차이가 있기에 오랫동안 의문이 되었고 마한의 왕도를 찾고자 한다면 위치에 대한 혼란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제로 상태에서 기초부터 점검 조사하는 방향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선적으로 경기와 충남 지역으로 연결되는 강과 연결되는 해안 지대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의 큰 왕도는 강과 하천으로 연결된 위치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필자의 그동안 연구 결과에 의하여 실마리를 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한은 해양 통로를 이용하여 해외로 왕래한 기록과 또한 마한이 관할하는 지역은 육로보다 해양 통로를 이용하기에 좋은 서해와 남해안 지역의 영토를 주로 관장하였기에 포구나 항구의 이용도가 높았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서해안의 강과 연결된 해변 지역 몇 곳을 조사하기로 하면서 우선적으로 당진의 옛 나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진은 중국으로 왕래하였던 나루로서 이보다 앞선 원래의 이름은 ‘한진’이며 당진의 한진 나루와 주변 유적을 조사하면서 내포 지역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고대로부터 사용된 큰 나루였다는 것을 가늠하게 되었다.

한진으로 통하는 강과 연결된 곳은 삽교천, 진위천, 안성천 등이며 이 일대 전체를 조사하기로 하면서 여러 곳을 답사하게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되었던 유적은 평택의 고덕면 방축리 일대에서 거대한 토성을 찾아내고 조사한 결과 삼한 시대의 유물이 많이 분포되어 있기에 점차 의심을 갖게 되었다.

삼한시대에 사용한 거대한 토성이 왜 이곳에 축조되었는가에 대한 의심에서 우선 규모 면에서 삼한 시대 거대한 세력과 연결된 위치의 성이라는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고덕면 방축리 토성은 진위천과 안성천으로 연결이 되면서 바다로 통하는 삼거리의 수로를 지키는 중요한 위치의 거점 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유적으로는 백제 왕도의 입구를 지키는 한강변 풍납토성은 한강 본류와 남한강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의 길목 입구를 장악할 수 있는 백제 왕도의 문전성이라는 점에서 비교가 되었다. 고대 수상 교통과 관련된 당진과 평택의 유적에서 마한의 왕도가 강으로 연결된 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의 실마리가 되었다.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특별기고>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4)

안성시 양성면을 왜 마한의 왕도라고 하는가
한종섭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고대의 왕도는 도시 운영 유지를 위하여 일정한 기준에 맞지 않으면 왕도가 될 수 없다. 그동안 여러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한 결과 공통적인 입지와 시설은 다음과 같은 도시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1) 고대의 규모가 큰 왕도는 강이나 하천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2) 산성과 도성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고 왕궁에서 산성으로 이어지는 퇴로가 조성되어 있다.
(3) 지형과 구조에서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지형과 인위적인 군사시설이 밀집 조성되어 있다.
(4) 가까운 위치에는 농경을 할 수 있는 넓은 평야 지대가 있다.
(5) 왕도 주변은 장성(長城)이 에워싸고 보호 시설이 여러 겹으로 조성되어 있고 왕도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길목에 군사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6) 그 당시에 해당하는 유물 분포 면적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
(7) 땔감의 공급이 원활한 지역이어야 한다.
(8) 왕궁지는 독립된 위치에 보호 시설이 잘 되어 있다.
(9) 왕도와 관련된 땅 이름의 흔적과 도시 구조에서 연계성이 남아 있다.
(10) 왕도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산재되어 있다.
(11) 왕도는 단일성이 아니며 복합적인 도시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12) 고대의 건물은 신분과 관련이 있기에 규모와 구조에서 왕궁의 특성이  있어야 한다. 왕도를 찾아내었을 때는 이보다 더 많은 항목으로 조사 검토를 하지만 찾아내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을 고려해야 한다.


위의 내용은 발굴을 하지 않고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대부분 발굴만이 전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대한 왕도는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유물과 유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은 방대한 면적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유물은 왕궁 건물지에서 삼한시대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 건물에 기와를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은 종교적인 신전, 왕궁, 관부 세 곳에만 사용되었다.
삼한 시대는 불교가 유입되지 않아 사찰이 없었고 규모와 위치 구조에서 신전, 관부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왕궁임이 입증된다.


기와 토기의 시대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백제 왕궁지 발굴에서 맨 아래 층위에서 출토되는 백제 초기의 유물과 같은 기와, 토기 유물이 성하리 건물지 일대에서 대량 발견되고 있다.
또한 왕궁지를 찾아내고 알게 된 것은 인근 반제리에서 고속도로 조성 구간에서 발굴된 환호 군사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적 중에서 보다 특이한 군사 유적이 발굴이 된 것이다.


매봉산 중 상단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초기 철기 시대의 군사 환호(環濠) 유적과 74기의 대규모 주거지가 가파른 산 위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시대와 위치 규모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성이 있는 유적이다.  반제리 군사유적은 보다 가까운 곳에 보호해야 할 중요한 유적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왕궁지는 길이 150m 폭 80m의 거대한 건물지로서 인근 반제리 매봉산 정상의 군사유적과 연결된 산줄기이며 같은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또한 마한은 토착 세력 집단이기에 양성면, 공도읍, 원곡면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의 밀집도가 높고 많은 무문토기가 출토됨으로써 마한의 건국 세력 기반을 입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의 기록과 곳곳마다 나타나는 유적과 유물, 왕도의 구조와 거대한 건물지, 지면상 밝히지 못한 여러가지 입증 자료에서 마한의 왕도임이 밝혀진 것이다.


반제리와 용두리의 주변 유적이 발굴되기 전에 마한의 왕도를 발견하였다면 하남시의 유적처럼 반발이 심할 수 있어 은폐 가능성이 있지만 주변 발굴과 함께 동시에 왕궁지를 찾아내어 더 이상 의문이 될 수 없었다.


마한 왕도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가가치 높은 문화 자산으로서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기에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민족의 혼이 배어 있고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 자산이기에 애향심으로는 결코 소홀히 하거나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고대의 왕도는 지상의 신(神)이 사는 곳으로 함축된 사상이 내재되어 있고 보다 많은 관련 유적이 산재되어 있기에 파괴되기 전에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작은 고분의 유적은 발굴을 해야만 알 수 있지만 거대한 도시 구조와 유적을 찾아내는 것은 현장학술 조사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잘못된 인식으로는 발굴만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유물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유동성이 많기에 낮은 안목의 발상으로 함정이 될 수 있다. 


지역 신문을 통하여 간략하나마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주신 안성신문에 감사드리는 바이다.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기사입력: 2005/08/27 [11:51]  최종편집: ⓒ 안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