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미추홀>미즈홀>미지홀>밎홀>밎골>빛골>빛땅. 미(彌)>미[密]의 고어 미[龍]

吾心竹--오심죽-- 2009. 8. 1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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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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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heram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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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단고기 전문1

전문 들어가기전;환단고기라 발음하지 한단고기가 아니다. 이는 임승국의 자의석 해석일 뿐이다. 우리는 광명, 빛을 "환"하다고 하지 "한"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환단고기 번역본은 가나출판사의 김은수 번역본과 대종교쪽의 강** 번역 및 임승국 번역본 그리고 단단학회 번역본이 있지만 현재 이를 인터넷상에 무료 공개한 책은 임승국 번역본인 한단고기이다. 따라서 한단고기가 아니라 환단고기임을 밝히고 그 내용을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어 이를 생각할 고대사 산책 아이디의 글을 송준희 coo2.net 게시판사이트에서 인용 게제한다.

고대사산책 올림(coo2.net게시판)
본    문

1. 桓의 발음

桓은 발음이 '환'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말 발음도 '환'이고 중국어 발음도 '환'이기 때문이다.

원래 발음이 '한'이라면 이에 해당하는 다른 한자로 썼어도 되는데 굳이 桓으로 하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2. 桓의 의미

뜻을 보면 자전에 훈이 여럿 있는데

1) 씩씩한 모습 2) 모감주나무 3) 표목 4) 笏 등 여럿 있는데 적당히 맞는 뜻이 없는 것 같고

『<조대기>에서 말하기를.....<중략>......桓은 全一이며 光明이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환은 전일, 광명의 뜻이 아무래도 맞을 것 같다.

태양신 숭배사상을 가졌던 고대인들은 '빛'을 完全, 全, 完, 窮極, 永遠 등의 의미를 부여했었다는 것은 고대지명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우리 고대 지명 중에 完山, 完達, 全州, 完州, 比自발, 比斯伐(推良火, 三良火, 미리벌, 밀발, 推火, 미추홀 등도 같은 계열 지명임) 등은 고어를 분석해보면 '빛땅'이란 뜻을 가진 지명들인데

完山, 完州, 全州, 完達 등은 빛이 상징하는 의미를 이용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빛땅'이란 발음을 이두표기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推', '三', '미추' 계열 지명은 '빛땅'이란 뜻인데 그 의미를 고대인의 聖數 '三'으로 치환하여 나타낸 지명들이다. 聖數 三은 完全, 全, 完, 窮極, 永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남의 三浪津, 密陽이나 충남 아산 인주면 密頭里는 '빛땅'이란 뜻을 가진 같은 계열 지명들인데 聖數 三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光州 같은 경우는 가장 직설적으로 표기한 사례다.

따라서 조대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환의 의미 全一, 光明은 곧 '빛'을 의미한다고 본다. 말을 바꾸면 '밝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桓의 의미는 '빛'이 상징하는 다른 비슷한 의미들로도 표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곧 桓 = 完, 全, 完全, 窮極, 永遠, 光明(=밝음), 全一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 王(=天子)은 고대인들이 至高의 가치를 부여했던 태양신의 아들로 보았다. 따라서 桓은 곧 태양신(=日神)을 상징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환인의 아들 환웅, 그 환웅의 아들 단군 하는 식으로 시조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고어에서 桓=天인 것은 정확한 기록이자 풀이라고 본다.

檀君의 檀도 박달나무라는 뜻이고 이 檀도 '밝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檀도 桓과 같은 의미의 光明을 뜻한다고 보면

桓檀은 '밝고 밝은'이란 의미가 되고 그보다 더 밝을 수 없는, 최고로 밝음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桓因시대부터 檀君시대까지'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조대기의 해석은 정확한 것 같다.

또 어쩌면 桓이란 한자도 '밝다'는 뜻을 가진 '환하다'라는 순수한 우리말을 이두표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빛땅'계열 지명들

지금의 창녕은 옛날엔 화왕군(火王郡)이었고 사기에 보면 그 이전에는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 비자발(比自 )이라 했고, 그에 속한 현효현은 그 이전의 지명이 추량화현(推良火縣, 三良火라고도 한다)이라고 했다.

비자화, 비자발, 비사벌은 '빛벌'이라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다. 이것은 '빛벌'과 발음이 같은 '빚벌', '빗벌'에서 나온 말이다. '빚벌'의 '빚'에 명사형어미 '아'나 '이'를 붙여 읽으면 '비자', '비지'가 되고 그 중의 하나다. '빗벌'도 마찬가지 요령으로 하면 '비사', '비시'가 된다. 사(斯)나 자(自)는 고어로 시[斯], 지[自]로도 읽은 듯하다. 또 이것들은 역으로 오늘날 사이시옷과 같아서 받침을 붙여 읽을 때는 받침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면 추량화(推良火)가 삼량화(三良火)로 바뀌었다. 추량화(推良火)는 <삼국사기/이병도역주/을유문화사/하권211p>에 보면 미라(ㅂ+아래아+ㄹ)[推良火]이라고 나와 있는데 정확한 발음으로 보인다.

'밀 추(推)'의 훈 '밀'에서 리을이 탈락한 형태고 땅을 뜻하는 라[良]와, (ㅂ+아래아+ㄹ)은 '발( )', '벌(伐)', '불[火]'로 표기되는 것이다. (ㅂ+아래아+ㄹ)은 보통 같으면 '발'과'볼'이 되겠지만 이때는 '볼'이 가장 가까운 '벌'로 바뀌고 다시 벌>블이 되고 원순모음화에 의해 불로 변하여 그 이두표기 불[火]을 쓰게된 것이다.

그런데 '미[推]'가 열도발음 '미쯔[三]'로 대치되면서 '쯔'가 탈락한 것이 미라(ㅂ+아래아+ㄹ)[三良火]인 것이다. 열도발음이란 사실은 가라어(加羅語)를 바탕으로 한 말이다.

사기 지리지 신라 밀성군(密城郡)조에도 추화(推火)라고 나와 있어 같은 계열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밀(ㅂ+아래아+ㄹ)[推火]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밀 추(推)'에서 훈을 이두표기하여 밀(密)로 한자가 바뀌고 땅을 뜻하는 (ㅂ+아래아+ㄹ)이 역시 같은 뜻의 한자 성(城)으로 바뀐 것이다.

현대일본어의 근간은 고대 열도에 최초로 성립된 열도통일왕국 대화왕조 시대의 대화어(大和語)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어가 가야어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있다(박병식).

또 모 일간지에 연재된 '노래하는 역사(이영희)'에서 일본 고대의 만엽집이 우리 경상도사투리와 전라도사투리로 지어진 고대가요라고 밝힌 바 있다. 만엽집은 우리 고대 향가집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일종의 보조사서다.

겉으로는 남녀간의 사랑노래 또는 일반적인 테마이지만 그 이면에는 왕권쟁탈전, 정치적인 사건 등을 담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보조사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서는 전부 다섯 가지다. 일본서기, 고사기, 풍토기, 성씨록, 만엽집 등이 그것들이다.

미쯔[光]의 어원은 미쯔[三]

미쯔[光]의 발음이 미쯔[三]와 같다

일어에서 '출광(出光)'을 '이데미쯔'라고 발음한다. 즉 '빛[光]'을 '미쯔'로 발음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삼량(三良)'의 '삼(三)'을 수사(數詞)로 보면 '미쯔라[三良]'로 발음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면 여기서 '삼(三)'은 '빛[光]'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사가 아닌 '빛'의 이두표기인 것이다. 그러면 '빛'과 '미쯔>및'이 등치 된다. 지금의 일어는 가야어를 근간으로 백제어와 열도 토착어가 약간 섞인 말이다.

고대인은 빛[光]을 완전(完全)으로 인식

그런데 다시 사기 지리지에 보면 비자발(比自 ), 비사벌(比斯伐), 비자화(比自火)라고 불린 창녕은 통일신라시대에 한때 완산주(完山州)로 부른 적도 있다.

또 사기 지리지 백제 완산(完山)조를 보면 한때 비사벌(比斯伐), 비자화(比自火)라고 불린 적이 있다고 나온다.

뜻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다. 완산주(完山州), 전주(全州), 완주(完州), 완달(完達)등은 결국 '빛벌'이란 뜻을 갖고 있는 지명들이다. 고대기록에 고조선시대 완달산(完達山)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역시 '빛땅'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 것이다. 이것은 태양신(太陽神) 숭배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가야유물 중에서 파형문양(巴形紋樣)의 동기(銅器)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일장기도 가야문양일 가능성이 있다)

성수(聖數) 삼(三)도 완전(完全)을 상징

그런데 수사(數詞)로 보면 성수(聖數)로서 삼(三)은 완전(完全), 궁극(窮極), 영원(永遠)을 뜻하는 숫자다. 태양신(太陽神) 숭배사상에서 '빛'은 바로 완(完), 전(全)과 등치가 되고 성수(聖數) 삼(三)과도 등치되어 결국 미쯔[三]=미쯔[光]가 되는 것이다.

완전을 뜻하는 미쯔[光]와 미쯔[三]는 같다

빛[光]의 열도발음 '미쯔'의 어원은 완전(完全), 완(完), 전(全), 궁극(窮極), 영원(永遠)을 뜻하는 우리 고대인의 성수(聖數) '미쯔[三]'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밀(密)은 음을 이용한 이두표기고 '밀 추(推)'는 훈을 이용한 이두표기인 것이다. 또 거꾸로 미쯔[三]의 어원이 빛>및>미쯔로 변하여 굳어졌을 수도 있다. 완전을 뜻하는 빛> 및> 완전을 뜻하는 성수[三]이기 때문이다.

'빛땅'계열 지명들

밀(密), 추(推), 삼(三), 전(全), 완(完) 자가 들어간 지명은 원래는 빛[光]이라는 뜻을 가지며 이두로 표기되거나 그 의미를 한자로 바꾸어 붙인 지명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지명들은 아침땅[新羅/朝鮮/阿斯達]이라는 뜻과도 통하는 같은 계열의 말로 보인다. 아침은 빛이 밝아온 어느 시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주(全州)는 그 뜻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광주(光州)도 같은 뜻을 가진 지명인데 이런 지명을 가라지역과 백제가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역시 백제(=비류계)와 변진(弁辰)의 후신인 가라는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추홀(彌鄒忽)의 어원

빛땅계열 지명 중에는 백제건국세력이 최초에 상륙했던 미추홀(彌鄒忽)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仁川)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인천이 인주(仁州)라고 불린 적이 있어 충남 아산의 인주면(仁州面)과 이름이 같아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는 지금의 충남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密頭里)가 바로 그곳이다.

미추홀은 역시 이두표기인데 미추홀(彌鄒忽)>미주홀[密頭忽]에서 홀(忽)이 '고을'을 뜻하므로 후대에 리(里)로 바뀌어 밀두리(密頭里)가 된 것이다. 기·기를 보면 두(頭)는 '즈[頭]', '즈[豆]'로 읽은 경우가 종종 나오고 이것이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킨 것이 추(주)다. 따라서 고어발음으로 미즈홀[密頭忽]이 되고 비자발(比自 )>빚발>빛벌이 되는 데서 보다시피 고어발음으로 '지[自]'는 현대어의 사이시옷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또 즈[頭]는 고어에서 '이'가 '으'와 교체되어 쓰였으므로 '지[自]'와 같은 말이다. 정리해 보면 미추홀>미즈홀>미지홀>밎홀>밎골>빛골>빛땅이다. 이 미(彌)>미[密]의 미추홀>미즈홀>미지홀>밎홀>밎골>빛골>빛땅이다. 이 미(彌)>미[密]의 고어가 미[龍]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아니다


이러한 어원추적을 통해서도 나타나다시피 백제의 비류와 십제의 온조가 상륙한 곳은 인천이 아니다.

밀양(密陽)과 삼랑진(三浪津)은 같은 뜻

오늘날 경남의 삼랑진(三浪津)과 밀양(密陽)은 원래는 같은 뜻을 가진 지명으로 보인다. 둘다 빛땅>빛골>미라[三良]에서 파생된 지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밀양의 고명 밀성(密城)의 성(城)은 라[良]와 같고 빛[光]=및[三]>미쯔[三]>미[三]>미[推]>밀[推]>밀(密)로 된 것이다.






>* 환단고기에서의 桓의 음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
>환단고기가 '한단고기'라고 일반인들 사이에 알려져 있는 것은 정신세계사에서 출판한 <한단고기>의 역자 임승국의 영향이 크다. 桓을 '한'이라 읽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고어에서의 '天曰桓'과 <조대기>의 구절을 이용하여 그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
>하지만 이것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桓이 天의 의미로 쓰였다고 해도 '한'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확실치 않고, 임승국이 주장을 합리화하는데 언급했던 <조대기>에 이와 대립되는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통용되는 한자음을 불러주는 것이 기본인데 이것마저 무시하고 있다.
>
>그가 역주한 정신세계사 <한단고기>의 표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
>『桓은 하늘이란 뜻이담긴 '한'으로 읽어야 한다. 고어에 '天曰桓'이라 했고, <조대기>에 이르기를 '옛적에 桓因이 계셨나니 하늘에 내려오시사 天山에 사시면서...'했으니 桓因은 곧 우리 민족 고유의 영원한 神稱인 하느님이다. 민족사의 출발점을 하느님 나라로 인식하는 민족적 긍지가 듬뿍 깃든 깊은 의미는 모두 버리고 字音만을 고집해서 '환'이라 읽는 것은 잘못이다......<후략> 』
>
>고어에 '天曰桓'했다고 桓이 꼭 '한'이란 발음이 되라는 법은 없다. 임승국은 桓이 '한'으로 발음되었다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조대기>를 들어 '하늘'로 풀이해서 '한'이라 읽어야 된다고 한다. 하지만 <환단고기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따르면 <조대기>의 내용에 임승국의 주장과 대립되는 구절이 있다.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조대기>에서 말하기를.....<중략>......桓은 全一이며 光明이라...』
>
>임승국은 결국 제멋대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임승국은 그 부분에 대해 註를 달아 부정하고 있다. <조대기>에 따라서 그의 주장이 틀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부분을 부정했고, <조대기>의 다른 부분을 이용해 주장을 합리화시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조대기>의 내용조차 '桓의 音은 한'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될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 부분에는 근거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한자음에 관해서 말하지만 표준음을 쓰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표준음을 쓰지 않고 제멋대로의 해석을 해서 음을 갖다붙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 임승국이 모든 사서에 의미를 부여해 음을 제멋대로 고쳐보아라. 이것은 왜곡이다.
>
><조대기>의 내용을 언급해서 桓의 발음과 뜻에 대해 설명하자면 당연히 桓은 '환하다'라는 뜻이며, 발음상 '환'이 되어야 옳다.
>
>임승국의 제멋대로식의 말장난같은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파장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을 읽고있는 독자들이 더 잘 알것이기 때문이다.






한단고기


한단고기 범례

고기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의 <삼국유사>로부터라 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등을 한 책으로 묶어 <한단고기>라 이름하였다.
<삼성기>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씨가 찬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 <삼성기 전 상편>이라 하고 원동중씨가 찬하고 태천의 백진사 관묵씨로부터 얻은 것을 이제 <삼성지 전 하편>으로 하여 통틀어 <삼성기 전>이라 한다.
<단군세기>는 흥생촌의 노인이 엮은 것으로 행촌선생 문정공이 전한 책이다. 이 책도 역시 백진사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의 집은 글로써 전통이 알려졌던 오래된 가문으로 본래 많은 책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제 두 종류의 사서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함은 어찌 다만 백 사람의 벗이 주는 선물에 비길 수 있을 건가? 조국에 만장의 광채를 비춤이라 할 것이다.
<북부여기 상하>는 휴애거사 범장이 찬한 것이다. 본래 <단군세기합편>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었던 바 삭주의 이동 이진사형식의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는 백진사가 간직했던 것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도 없다.  이제 또 별본이 있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있지만, 이는 그 내용이 앞의 책과는 매우 다른바가 있을 뿐만아니라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태백일사>는 일십당 주인 이맥이 펴낸 것으로 해학 이기 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대저 한단 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 경문을 모두 사용한 전거가 한번 보아도 뚜렷한 것들이다. 또 저 <천부경>과 <삼일신고>두책의 전문이 함께 편중에 있어 실로 낭가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대학 중용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오호라! 한단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심법은 참으로 이책에 있는 바, 모름지기 태백진교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되지 않을 것인가? 손도 저절로 춤을 추고 발도 저절로 춤추고  흥겨워 소리지르고 싶으니, 기쁨에 미칠 지경이로다.
<한단고기>  모두 해학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 근면을 다하여 옮겨 쓴 것이다. 또 홍범도 오동진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하나는 자아인간의 주성발견으로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민족문화의 표출이념이 됨으로써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세계 인류의 대합 공존으로써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신시개천 5808년,즉 광무15년의 신해 5월 광개절에 태백의 유도 선천의 계연수인경이 묘향산 단굴암에서쓰다.


삼성기 전 상편
三聖記 全 上篇
안함로 지음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시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철인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루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장려케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해제때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의 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의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 임승국님의 주해 한단고기중 에서 ---
--- 이글은 개선 2벌식글판으로 입력한 것입니다.---


삼성기 전 하편
三聖記 全 下扁
원동중 지음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이 무리는 모두가 고의 후손이다.

옛날 한(桓)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고 또 많았다. 처음 한임(桓因)께서 천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서  오래 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한임 고시리한임 주우양한임 석제임한임 구을리한임에 전하고 지위리한임에 이르더라. 한임은 혹은 단임(檀仁)이라고 말한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혹은 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혹은   白多國) 사납아국 선비국(혹은     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개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라고 하셨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일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일러 제견(諸 )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때에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찌기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대 신계의 한 무리가 되어지이다'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 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 놓았으니 즉 쑥 한다발과 마늘 스무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대 '너희들 이를 먹고 햇빛을 백일 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 두 무리가 모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동안 기 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자 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매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바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박달나무밑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었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한(桓)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에 실리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시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한은 모두 삼시을 모두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고 하나로 뭉쳐 화백하였다. 이에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에 통솔되고 나라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

<<밀기 >>에서 말한다. '한국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르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 때부터 스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이 때에 무리의 이름은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무리였다. 범무리의 성질은 잔인한 것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지는 오래 돌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찌기 서로 도울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곰무리의 여추장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 '원컨대 한굴에서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 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桓)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대를 지나서 자오지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하려고 했으나 이룰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휭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일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이마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라고 했다.

신시역대기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 뒤에 청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1세를 한웅천왕이라 하며 또 거발한(居發桓)이라 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 사셨다.
2세는 거불리한웅이니 재위 86년에 102세까지 사셨다.
3세는 우야고한웅이니 재위 99년에 135세까지 사셨다.
4세는 모사라한웅이니 재위 107년에 129세까지 사셨다.
5세는 태우의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6세는 다의발한웅이니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7세는 거련한웅이니 재위 81년에 140세까지 사셨다.
8세는 안부련한웅이니 재위 73년에 94세까지 사셨다.
9세는 양운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39세까지 사셨다.
10세는 갈고한웅 또는 독로한이란 하니 재위 100년에 125세까지 사셨다.
11세는 거야발한웅이니 재위 92년에 149세까지 사셨다.
12세는 주무신한웅이니 재위 105년에 123세까지 사셨다.
13세는 사와라한웅이니 재위 67년에 100세까지 사셨다.
14세는 자오지한웅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15세는 치액특한웅이니 재위 89년에 118세까지 사셨다.
16세는 죽다리한웅이니 재위 56년에 99세까지 사셨다.
17세는 혁다세한웅이니 재위 72년에 97세까지 사셨다.
18세는 거불단한웅 혹은 단웅이라 하는데 재위 48년에  82세까지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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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드보락호환 두벌식으로 입력한 것입니다. //


단군세기 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일까?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칠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 무릇 옳바른 역사학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니, 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 백성이 생긴 지도 오래되어 세상이 열린 이래의 여러가지 질서도 많이 변화하였다. 나라와 역사는 나란히 이어지며 사람과 다스림도 따로 나누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모두가 한 개인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해야 됨이라.
아아! 다스린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사람은 오로지 바른 길을 생각해야 되나니, 사람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 어찌 바른 길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겠는가?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얼이 깃들어 있을진대, 모습이 어찌 얼을 잃고도 모습만으로 우쭐댈 수 있다고 할까? 바른길을 바로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모습과 얼을 함께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일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에 있음이라. 그런데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알아야 될까?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性)을 이루고, 가르침의 신은 내려와 나의 삶(命)을 이루고, 다스림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신(精)을 이룬다.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저.
무릇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은 신의 뿌리다. 그렇지만 신이 성품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해서 성품이 바로 신 그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가 밝게 빛나며 어둡고 더럽지 않을때 비로소 참성품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은 기를 떠날수 없는 것이며, 기도 또한 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신의 성품과 기가 잘 조화되어 합쳐진 후에 스스로 성품이나 삶을 알 수 있는 것이리라.
성품은 삶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삶도 성품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의 성품과 삶이 잘 어울린 뒤에야, 이몸이 신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기운 넘치는 삶에서 비롯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품을 깨닫게 됨은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고, 그 삶이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신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하는 것이다. 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뀌지 않을때 <참 나>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을 때 신이라고 하나니 참된 나는 신이 머무르는 바른 곳이다. 이 참된 근원을 알고 올바르게 수련한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리라. 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렸을 때 이로부터 세가지 신의 성품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라는 것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어울리고, 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도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 식 촉 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桓因) 그대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즐거우며,하늘 땅 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라.

이런 까닭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하고, 그 모습을 뒤집어 바꾸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없는 것에서부터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알아나가는 단하나의 길인저!
오호라, 슬프도다! 부여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한 족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버렸고, 고려는 고려대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 몽고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나라사람은 자기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얼마전에는 잠이나 청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 남생이나 발귀따위들과 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 바른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 버린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인들 도대채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지금 다른 나라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 나와같은 나라의 기둥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만 있을 뿐, 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이졌기 때문이라.
한 벼슬아치의 힘으로는 조금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바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 바를 찾을 때에 나라를 구함은 어디에 그 중요함이 있을까?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에는 역사가 있어야만 되고 그 모습을 가지려면 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라.
신시에 하늘을 여니 이로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 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기쁘게 단군님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효경대왕12년 계묘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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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
檀君世紀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BC 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BC 2333)년 제요도당 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무진 원년 바햐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하늘을 보게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이런 까닭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수 있으리라. 다른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 뜻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잘 쓰일 수가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르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되고 효도함이니라.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나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헤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뜻지 말고 서로 도울지어넝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여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앗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사랑할지니라. 너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가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너희가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쁜 것을 감추지 말 것이며,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로써 끝 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

이에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짖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맞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BC 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께서는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에 그 비석이 있다.
무오 51년(BC 2283) 임금께서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짖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이 바로 그것이다.
갑술 67년(BC 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와 영주 두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희대지방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 93년(BC 2241) 단군께서 버들궁전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저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박달나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이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에까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갔다.
이에 천하의 따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2세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 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 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제순유우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쫒아내시고, 동무와 도라들을 그곳의 제후로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시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와하였으며 신인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끊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임인 2년 단제께서는 소련 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루었으니, 사흘동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석달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해가 지났을때까지 슬퍼 애통하였으며 삼년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써 알려졌으니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수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이익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계묘 3년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경술 10년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랄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 12년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8년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이 새로 즉위했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BC 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듯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 , 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글은 다음과 같았다.
ㆍ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X ∋
ㅇ ㄱ ∪ ㅁ ㄴ △ ㅈ ㅊ ∧ ∧ ㆆ ∧ M
                                ㅁ  ∪
ㅣ⊃  ㄹ ㅐ ㅒ ㅡ ㅡ ㆍ ∧ ㄱ ㅜ ㅠ ㆍ
             △ ㄱ ㅈ ∧ ㆍ  ㅡ ㅡ ㅍ

신축 3년 실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주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이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 때 이후 신선 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무자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하여 람藍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 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다.
정축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환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사 곧 붕어하시나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무진 원년(BC 2083)
임자 35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요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녁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 신들이 환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에 우 뚝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희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은 나라안을 진압하고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그릇과 같으니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은 일어났다가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
고 하였다.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
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
계축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갑인 원년(BC 2047)  
정미 54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하였다.
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신해 4년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궁궐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고쳤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을묘 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슬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슬 재위 35년
병진 원년(BC 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리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신묘 원년(BC 1950)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이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크게 기뻐했다.
병오 16년 동문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을 두었다.
기축 5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재위 57년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의 가장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 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리
모든 것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글을 새겼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지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이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하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무인 52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홀달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기묘 원년(BC 1782)
갑오 16년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 소도를 만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후 우가인 고불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BC 1721)
을유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
'하늘이 크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수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이었다.
기묘 60년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 51년
경진 원년(BC 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경오 5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가 위나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BC 1610)
무술 28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지금으로치면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신 5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1552)
갑신 52년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찰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BC 1484)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 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BC 1435)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일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짓다.
경신 5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신유 원년(BC 1380)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릴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BC 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
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시다. 이에 삼랑 홍윤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이 된 후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 '옳은 말인지고'라 하다.
기유 59년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기묘 원년(BC 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계미 65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경술 원년(BC 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시다.
경신 11년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불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축 28년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30년
정해 원년(BC 874)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 원년(BC 849)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BC 819)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맹세하여 올린글이 있으니,
'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시오며 삼신의 덕은 성인에 의해 더욱 크시어라. 빈 것과 큰 것은 한 몸이라 하겠고, 하나는 또 모두와 한가지로 같음이라.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 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 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 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
라고 하였다.
을사 2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 원년(BC 795) 이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772)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BC 704)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 원년(BC 646)
경오 56년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신미 원년(BC 590)
을묘 4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이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병진 원년(BC 545)
신묘 3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이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 원년(BC 509)
기유 1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 원년(BC 471)
기묘 1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 즉위하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BC 461)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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