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2

직산현의 서쪽 월경지 외야곶면...대진나루....서해대교,평택항,만호리

吾心竹--오심죽-- 2009. 8. 8. 15:59

<<1872년...직산의 서쪽 끝 월경지 外也串面(외야곶/오야곶-吾也串-왜곶이...직산현의 서쪽 80리...수원부지도>>

 

***1872년 수원부의 고지도(규장각 한국학 연구소)...맨아래...주기에 의하면,

 

   대진나루(大津,한진나루--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일대, 평택항, 서해대교)는...

 

삼국시대  <<<백제  혜군(郡) 가리저(加里渚) 고을이며,  동쪽에 백제가 수군 창고(水軍倉)를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이후에  곡식을 쌓아 두고  숙(수)관(稤館 ) 이라하였다.

 당나라 대사신과 장사꾼(상인) 그리고 신라의 당나라 조공(朝貢) 또한 모두 숙(수)관에 나가 하였으므로 

 

이런 유래로 인하여 대진(大津,한진)나루의 지명이 생겼다고 기록함. 

 

<大津三國時百濟 / 郡之可里渚 / 東置水軍倉新羅

 平百濟置館積穀 / 稤館唐之使价 / 商賈皆就館羅人

 朝貢亦由此因名 / 大津 >

***직산현 월경지 외야곶면(外也串面), 양성현 월경지 외량동면(外良洞面) 괴태길곶 봉수대---유래 //

***직산의 외야곶은 지금의 만호리(신영리~서해대교~평택항~평택항 홍보관 부근으로 추정) //

***홰곶>왜곶이>오야곶>외야곶...횃대, 홰, 홰대기--어원... (횃불을 올리던 곳)

***한자로 홰곶이(괴곶,槐串) > 왜곶이(오야곶,吾也串) > 외야곶(外也串)

***횃대(횃불을 올리던 터) > 홰대기 > 한자로 괴태길(槐台吉-홰대기), 괴태길곶(槐台吉串)...

    양성현 홰대기곶 봉수대(현재의 평택항 포승공단의 해군 제2함대사령부 터)

***안중읍 동쪽엔 용성이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상홀현(上忽縣) 혹은 차성현(車城縣), 고려에서는 용성현(龍城縣)으로 불린 지역의 치소(治所 관청소재지)가 지금의 경기 평택시 안중면 용성리(龍城里) 소재 비파산성(琵琶山城)이었음. 비파산성 북쪽 약 100m 지점에 위치한 안중면 덕우리 자미산성(慈美山城. 둘레 582m, 면적 1만8천300㎡)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늬없는 토기를 필두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출토됐다.

이곳은 외야곶의 대진항의 입구이며, 비파산성의 용성 3리에는 커다란 고목의 홰나무 6~7그루가

괴태곶과의 지명을 대변하듯 당당히 버티고 서있다.

<1872년 수원부지도..직산의 월경지 외야곶면...대진나루가 뚜렸이 표시되었고, 대진나루의 유래가 주기로 적혔슴>

   

 < 대동여지도...직산현 외야곶면...왼쪽 상단...대진나루의 위치가 1872년 수원부  고지도와는 다르게 표현됨>

 

*청구도...직산현 월경지 외야곶면...지금의 괴태길곶..봉수대 옆..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신영리 일대...

 평택항, 서해대교---옛 안중장(安仲場...4일.9일...직산현지)

 

<대동방여전도...직산현 외야곶면...김정호의 지도에는 1872년 수원부의 고지도와는 다르게 표시됨 >

 

 < 조선팔도지도...외야곶면/ 오야곶(吾也串...왜곶이...세종실록지리지)...서해대교, 평택항...만호리 일대 >

 

<조선팔도지도의 양성현 괴태길곶(평택 해군함대  사령부)봉수대 옆의 직산의 월경지 외야곶면...>

 

 

 

 <<< 광여도 수원부...직산의 월경지 외야곶면(串內里,鹽村)...지금의 만호리,신영리 일대...대진...>>>

 

<1872년 직산현 고지도의 계양..망해산 봉수대...지금은 야구장으로 변하고...괴태길곶(홰대기곶)과 상응함> 

 

 

 

 

 

< 대동여지도...대진나루...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만호리 ...직산현 외야곶면--직산현 관아...80리 >

 

                        <<< 여지도...직산현 전도...외야곶면/ 吾也串 / 왜곶이, 안중면, 언리면 일대 >>>

 

 

 

 < 팔도분도...대진(한진나루)...직산현 외야곶면~홍주 신평 >

 

< 비변사 지도...직산현 >

 

<직산현 안중면 안중창...황산리(구안중)...직산장터 부근도...직산말(대반리)...직산 안중장날--4일,9일>

 

 

 

< 여지도 수원부지도--- 직산현의 월경지 외야곶>

 

< 직산현 봉수대...계양의 망해산~괴태길곶(홰대기곶) 봉수대...외야곶면, 안중면, 언리면 일대 >

 

 

<비변사 방안지도...직산현...안중창...서해대교, 평택항의 외야곶면(外也串面) >

 

< 호서지도 >

 

 ***직산현의 서쪽 월경지...외야곶면(縣西 80리, 일명 오야곶...왜곶이)... 한진나루(大津)의 서해대교...//

 

 

 

  

  ***용성(비파산성)

 

 

***용성 3리의 홰나무(槐木)...회화나무...학자목(學者木)...//

 

 

 

***평택항 만호리...한진나루(대진)...//

 

 

<<< 구글 위성사진...아산만...대진(만호리)...용성,비파산성,자미산성,덕목성 부근 >>>

 

 

 

 

 

 

 

 

 

 

 

 

 

<<< 해동지도...직산현 월경지...외야곶면, 안중면, 언리면 >>> 

 

*外也串面(외야곶면)... 串內里(곶내리), 鹽村(염촌) /

*堰里面(언리면)..........高秋院(고추원),可羅串(가라곶),化串(화곶),仁浦里(인포리),宮堰里(궁언리), 塔峴(탑현) /

*安仲面(안중면)..........황산리,창리,백석동, 송산,소당리(송당리) ---<호서읍지, 직산현지...稷山縣誌>

 

 

 

                     < 호서지도 직산현...왼쪽 상단 (외야곶면...곶내리, 염촌)...직산현 80리 >

 

 

 

                        <<<직산고을   吾心竹...200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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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창간 48주년 기획 마을&삶]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거대 항구로 변한 나루터… '돈' 널려있던 갯벌도 사라져…
2008년 10월 31일 (금)  지면보기 경인일보webmaster@kyeongin.com
   
▲ 만호리와 평택항 전경.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가 나루로서 시작한 것은 고려말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만호가 주둔하면서 만호리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조선말과 일제때에는 충청도 서북부와 경기남부를 연결하는 어항과 상업창구의 번성기도 구가했다. 1980년대에는 생선회와 굴을 즐기는 관광객이 포구를 가득 메웠으나 1991년도에 갯벌매립과 함께 평택항의 출범속에 지금은 몇몇 횟집만이 예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 조선시대 군항(軍港)으로 출발

바다가 가깝고 하천이 발달하였던 평택지방은 예로부터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 큰 나루만도 현덕면의 계두진과 구진, 포승읍의 신전포와 한나루, 안중읍의 호구포, 청북면의 옹포, 팽성읍의 경양포 등 수십 개가 넘는다. 만호리에 항구가 조성된 것은 여말선초다. 지형이 자궁 모양이어서 나루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초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겪으면서 도만호가 설치됐다. 도만호는 나중에 수군첨절제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만호리라는 지명은 도만호에서 왔다. 도만호가 주둔했던 곳은 만호4리 원터다. 원터마을에는 아직도 옛 건물지의 흔적과 기와편이 무수하다. 만호리에서 만난 이원길(77)씨는 원터마을의 황장군 전설을 이야기했다. 옛날 출중한 무예와 신출귀몰한 능력을 갖춘 황장군이 있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고 왜적을 무찔렀다는 이야기. 어쩌면 황장군은 원터마을에 상주하였던 수군첨사일 가능성도 있다. 만호리 앞바다의 영웅바위 전설도 왜구와 관련 있다. 바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영웅바위는 조선 전기만 해도 높이가 100척이 넘었다고 한다. 어느 해 왜적이 바다로 침입했다. 그러자 영웅바위는 장군으로 변하였고 주변의 작은 바위는 병사들로 바뀌었다. 갑자기 나타난 군대에 혼비백산한 왜적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 1984년 평택 만호리포구 모습


# 서평택지역의 상업창구로 번성

나루는 만호5리 솔개바위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진(大津)이라는 좋은 이름을 두고도 솔개바위나루라고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진의 넓이가 10여리를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호리에서 이웃마을 신전포까지가 모두 나루였다는 말이다. 대진은 조선전기 군항(軍港)으로서의 기능이 중단되면서 충청도 서북부와 경기 남부를 연결하는 해로교통의 요충이 됐다. 조선 후기에는 아산만의 어선들이 입항하는 어항이었고, 안중장과 당진·서산을 연결하는 상업창구 역할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8번 국도가 가설됐다. 만호리에서 출발해 강원도 삼척까지 이어진 38번 국도는 아산만의 해산물과 서산·당진·태안의 물산을 안중장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서산·당진의 소장수들이 소떼를 배에 싣고 아산만을 건너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묵직한 현금을 허리춤에 감춘 소장수들이 오가면서 대진에는 주막이 번창했다. 주막집에는 색시들도 있었고 투전판도 열렸다. 소장수들은 색시들의 꼬드김에 꼭꼭 숨겼던 돈주머니를 열었고, 투전판에 잘못 끼어들어 소 판돈을 모두 잃기도 하였다.

30~40년 전만 해도 대진에는 여객선도 들어왔다. 여객선은 당진의 한진을 거쳐 인천까지 갔다. 당시만 해도 서산·당진은 충청남도의 오지여서 자동차보다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했다. 자동차로 가려면 아산과 예산을 돌아 한나절을 달려야 했지만 여객선은 30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들물식당

# 농사지으며 고기 잡으며 한평생을 살다

만호리에는 윗느지·아랫느지·대정·원터·솔개바위와 같은 마을이 있다. 솔개바위는 어업을 하였지만 나머지는 반농반어의 생활이었다. 경작지는 대부분 근대 전후에 간척되었다. 바다가 가깝고 농업용수가 부족한 간척지는 수확량이 매우 낮았다. 때때로 바닷가 제방이 터져 염해(鹽害)로 한 해 농사를 망칠 때도 많았다.

흉년에 주민들을 살린 것은 바다였다. 아산만에는 꽃게·새우·숭어가 지천이었고, 썰물에 조개를 캐고 굴만 따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솔개바위 사람들은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했다. 주민 지경엽(64)씨에 따르면 어민들은 정치망으로 고기를 잡았다고 하였다. 정치망은 본래 작은 새우를 잡는 그물이어서 온갖 고기가 다 잡혔다. 잡힌 고기는 지게에 지고 동네를 돌거나 안중장에 내다 팔아 곡식과 바꿔 먹었다. 조개를 캐거나 굴을 따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조개는 여름에도 캤지만 굴을 따는 일은 농한기에 많이 했다.

겨울철 아산만은 거칠고 위험했다. 파도도 거칠었고 수심이 낮아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속도가 느리게 보이다가도 물이 차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높아졌다. 그래서 몇 차례 대형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은 60년전에 있었던 멍거니 익사사건과 50여년 전 영암(영웅바위) 근처 익사사건이다. 두 사건으로 만호리 뿐 아니라 원정리 범바위 주민 100명이 이승을 떠났다. 부지불식간에 십수명씩 죽어나가면서 동네 전체가 초상집이 되었다. 노인회장 이경칠(77)씨는 "익사사건으로 만호리·원정리 남자들은 모두 홀아비가 됐다"며 웃었다.

   
▲ 전망대횟집과 예전 나루거리

# 평택항 개발의 빛과 어두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진은 접안시설과 드넓은 갯벌을 앞에 둔 항구마을이었다. 38번 국도가 시작되는 솔개바위 들물식당에서 만도아파트 방면으로 뻗은 일직선상의 길 좌우에는 수많은 횟집과 식당이 즐비하였고, 나루터가 바라보이는 산모퉁이에는 포장마차가 성업중이었다. 나루터에는 3~ 4에서 10 내외의 어선 수십 척이 떠있는 것도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정치망과 삼중망으로 새우·꽃게·우어·숭어 등을 가득 잡은 어선들은 바닷가에 고기를 퍼내리기 바빴다. 겨울에는 함지박과 망태기에 굴과 조개를 가득 담은 아주머니들이 배에서 내렸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주말이면 마을 입구부터 바닷가까지 자동차가 늘어섰고, 거리에는 횟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경엽씨는 어선수리업을 하러 마을에 들어온 이다. 당시에는 어선만 50척이 넘어서 돈벌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부인이 횟집을 열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전망대횟집이다. 어선을 갖고 있던 이웃집들도 횟집을 열었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초에는 스물여섯 집이나 되었다.

   
▲ 평택 서해대교

대진의 상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86년 평택·당진항이 개항하면서부터다. 1990년대초 갯벌을 매립하고 본격적인 항만공사가 시작되면서는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어업활동도 중단되었고 어항이 갖고 있던 자연경관도 변하였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고깃배에서 내려 항만청에 입사하였다. 초기에는 거친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만족해했다. 하지만 평생 거친 파도와 싸웠던 사람들이 회사생활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어민들은 IMF가 닥치면서 회사측에서 내민 1억5천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회사를 나왔다. 생업이 중단되자 보상금은 금방 없어졌다. 돈도 잃고 생업도 잃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다.

   

나루터의 경관이 변하면서 관광객이 감소했다. 바다와 갯벌을 보며 생선회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평택항으로 가로막힌 들물식당·전망대횟집은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들물식당을 운영하는 장영실씨도 그것을 답답해했다. 관광객이 감소하면서 한때 스물여섯집이나 되었던 횟집들도 하나 둘 문을 닫고 타지로 떠났다. 그래서인지 한창 사람으로 붐벼야할 주말 나루터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식당 주인은 콩을 까느라 여념이 없었다.

   
   
▲ 김해규 (평택한광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