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2

[스크랩] 직산현의 서쪽 월경지...안중면, 외야곶면, 언리면 일대

吾心竹--오심죽-- 2009. 8. 13. 12:47

<<< 직산현의 서쪽 월경지...안중면, 외야곶면, 언리면 일대 >>>

 

 

 

 

 

 

 

 

 

 

 

 

 

 

 

 

 

  

  

  

  

 

 

<<< 직산고을 오심죽...2009.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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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읍 안중리
국도 교차하는 교통요충지로 시장 발달해 생긴 신흥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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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장 풍경

 

안중이란
원 지명 태생은
읍내가 아니라
황산리였다.

곡물과 가축시장
중심됐던 안중
도시 팽창으로
옛시장 빛바래

 

 

■ 직산현의 안중창이 있던 마을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아침저녁으로 선들선들해진 날씨는 답사객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런 날은 새색시 비단저고리 마냥 곱기만 한 설악산 단풍이나, 햅쌀밥에 넉넉한 인심까지 얹어 주던 전라도 아낙이 그립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안중을 답사하였다. 팽성대교를 넘어 안성천 강변을 달리는 길은 저습한 평야지대의 멋과 운치가 있다. 지난여름 뙤약볕에 누릇누릇 익어 가는 오성 들녘은 가슴을 넉넉하게 한다. 지나가던 농민은 올해는 일조량이 워낙 좋고 태풍도 없어서 대풍(大豊)이 될 거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풍요롭기는 강 건너 도두리벌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저 풍요로운 들판이 몇 년 안에 미군기지로 수용될 예정이란다. 기지를 이전해야 할 정부와 안정리 상인들의 입장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해방 전부터 자기 땅에서 쫓겨나기만 했던 불쌍한 농민들의 처지와 해방 전부터 외국군의 주둔으로 고통당하는 우리고장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안중은 평택 서부지역의 중심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수원부, 양성현, 직산현 등 여러 군현(郡縣)으로 나뉘어졌던 곳이다. 경제기반도 넉넉하지 않아서 몇 몇을 빼고는 내세울 만한 가문도 없었다.


19세기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서부지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만호리 대진(한진), 대안리 구진나루를 비롯하여 홍원목장, 포승면 원정리 봉수대 그리고 아산만의 어염(魚鹽)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 이후 홍원리, 원정리에 걸쳐 조선된 홍원목장은 군마(軍馬)와 궁궐이나 고위관료들이 소비하는 육우를 사육하던 국영목장으로 이 지역을 상징하는 요소였다.


안중이 서부 지역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38번과 39번 국도가 교차하는 도로교통의 이점과 직산현의 조창이었던 안중창, 그리고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조수(潮水) 때문이었다. 특히 안중창은 안중읍과 현덕면, 포승면 일대에 산재한 직산현의 조세를 모아 강 건너 팽성읍 노양리 경양창으로 운반했던 조창이었다. 조창이 있는 곳에는 창고와 나루, 시장과 주막이 들어서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벅적대면서 안중창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쪽에서는 곡물을 거래하고 대납하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창말은 점차 대처가 되어갔다.


본래 안중창이 있던 곳은 황산리였다. 황산리는 본래 바닷물이 호수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느늘미’라고 불렸다. 느늘미에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만 해도 창촌(倉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창촌 또는 창말은 조창이나 사창이 있었던 마을에 형성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중(安中)이라는 지명도 ‘안쪽 동네’라는 뜻이어서 의미에서는 ‘느늘미’와 별반 차이가 없다.


지금도 안중이라는 지명은 읍내가 아니라 황산리에 있다. 황산리의 상안중과 하안중 마을이 그것이다.

옛 지도를 보면 이 마을들은 바닷물이 계란의 노른자위처럼 들어온 지형에서도 밖으로 돌출된 곳이었다. 이와 같은 지형은 바닷바람에도 안전할 뿐 아니라 배가 접안하기에도 유리하여 나루나 조창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안중(安中)하면 안중장(安中場)


오늘날 안중을 있게 한 것은 안중장 때문이다. 안중장은 본래 황산리 직산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직산말은 ‘직산장터’로도 불려지고 있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부터 1백 년도 더 된 어느 시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짐작하기로는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택서부지역이 수원군으로 통폐합되고, 갑오, 을미개혁 후 조세제도의 금납화로 조창의 기능이 상실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된다.


안중장의 이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현재에도 안중2리 황금마을과 황산리에 대성(大姓)을 이루고 사는 경주 정씨들이 마을 옆에 시장이 있으니 온갖 시정잡배들이 모여들어 인심이 사나와지고 시끄럽다고 하여 강제로 옮기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경주 정씨하면 포승면의 함평 이씨와 함께 조선말에서 해방 전후까지 평택 서부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과거 이 집안의 위세는 안중오거리 우측 산록에 조성한 ‘경주 정씨 일가 효열정문’으로 짐작되는데, 이 정문의 특징은 전부 효(孝)와 관련되었다는 점과, 내용이 모두 부모가 죽은 뒤 시묘살이 한 것, 그리고 정표를 받은 시기가 1885년에서 1890년 사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경주 정씨 집안이 19세기 후반에 경제기반을 구축하여 새롭게 성장한 신향(新鄕)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어째든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 안중장이 황산리에서 안중리로 옮겨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옮겨진 안중장은 5일장이긴 했지만 상설시장처럼 평일에도 열렸다. 더구나 서부지역 5개 면 가운데는 숙성리에 오성장과 현곡리에 신포장이 있었지만 규모가 작았거나 금방 없어졌기 때문에 거래가 제대로 이뤄진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안중장의 거래품목에서 대표적인 것은 곡물과 가축이었다.


곡물 중에서는 쌀이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품목이었는데, 시장에서 싸전은 옛 차부(터미널)가 있었던 크로바 농약사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미곡은 규모가 커서 곡물시장에서 마되질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말감고도 있었다. 대안리 김학규(77세) 씨는 안중장 최후의 말감고로 박만복씨를 기억했는데, 됫박질 하는 솜씨가 대단해서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우시장은 새로 지은 천주교 성당 부근에 있었다. 우시장은 대체로 농사를 많이 짖는 평야지대에 크게 선다. 안중 우시장은 인근의 안성 우시장이나 충남 광천의 우시장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래서 장날이면 널다란 공터에는 소들로 꽉 들어찼고, 우시장 주변에는 소장수나 소를 사러 온 농민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주막들이 많았다.


이곳에는 바다 건너 당진이나 서산에서도 소를 사러 왔다. 이들은 당진 한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는데, 돌아갈 때에도 만호리 대진(한진)나루에서 배에 소떼를 싣고 건너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채소나 건어물, 돼지 등을 파는 점포들이 따로 있었다. 특히 돼지는 소와 함께 안중장에서 많이 거래되었던 품목이었다.

 

■ 시장 그리고 시장사람들


안중은 많이 변했다. 그리고 급속히 변해간다. 아이들이 컴퓨터나 핸드폰을 배우는 것처럼 변화의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이다. 평택지방의 어지간한 소로길까지 다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마져 몇 달 전에는 안중제일장로교회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메었던 적도 있다. 안중의 변화는 평택항과 포승국가공단의 개발이 큰 영향을 미쳤다.


유입인구가 늘면서 가장 먼저 식료품점, 식당, 병원, 옷가게가 들어섰고, 건너편 현화리 벌판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자리잡았다. 주변에 공장지대가 형성되면서 동남아 등 외국인 노동자들도 부쩍 많아졌다. 내가 시내를 한바퀴 도는 동안에도 친구들끼리 혹은 남녀가 다정히 손잡고 거리를 지나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인구도 늘었다. 해방 직후만 해도 100여 호였던 마을이 이제는 몇 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도시규모가 커지면서 위상도 높아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시장과 경찰지서, 초등학교 정도만 자리잡았던 이곳이, 1987년에는 오성면에서 독립하여 ‘안중면’이 되더니 2002년 말에는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성장하다 보면 몇 년 후 시(市)로 승격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시팽창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가 커지면서 슈퍼나 마트들이 많이 생겨나자 시장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잘 정비된 도로 주변 상가는 대부분 외지인들이 차지해버렸고, 새로 유입된 젊은층은 벅적대는 시장을 멀리하였다. 내가보기에도 시장은 새로 형성된 깨끗한 상가거리와, 옛 재래시장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재래시장에서 만난 아주머니(69) 한 분은 이 같은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했다. 자신은 시장에서만 30년 채소장사를 했지만 요즘처럼 경기가 나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장날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졌고, 자신은 자리에 앉아 있을 사이도 없어서 일년이면 신발이 몇 켤레씩 닳아 없어졌는데 지금은 앉아 있다가 가끔씩 물건을 팔 뿐이어서 신발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건너편 순대국밥집 아주머니와 흩어진 종이상자를 줍던 아주머니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머리고기 맛은 근동에서 최고라는 ‘시장순대’ 아주머니는 한창 때는 국밥 마는 손이 마비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는데 요즘은 통 손님이 없다며 특별히 홍보를 부탁하기도 했다.


현재보다 과거를 사는 사람들은 슬프다. 그것은 경제의 풍요보다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나오며 개발과 발전의 혜택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골고루 나눠지기를 기원하였다.

 




자료 한광중고등학교 김해규선생님

출처 : 오심죽(吾心竹) ☞ 역사문화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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