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2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연표,삼국사 연표

吾心竹--오심죽-- 2008. 12. 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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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연표


온조왕 재위년수 : 46년(BC18 ~ AD28)
1 < 2 < 3

년 대

왕 계

사 건 내 용

동 아 시 아 정 세

한 국

중 국

일 본

BC 18

온조왕 1
(溫祚王)

비류(沸流) 온조(溫祚) 형제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하함. 온조가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에 도읍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함. 5.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움. 9. 서(西)로 사냥나가 백장(白獐)을 얻음. 이무렵. 서울 구의동 고분 유적 형성

7. 다물후 송양(多勿侯 松讓)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고)

겨울. 황후 허씨(許氏)를 폐하고 조비연(趙飛燕) 자매를 총애함. 정궁(鄭躬) 등이 난을 일으킴.(한(漢))

 

BC 17
온조왕 2
1.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비를 강화함. 3.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아 군사업무를 맡김. 7. 골천에 이궁(離宮)을 지음.(고) 10. 왕비 송씨(松氏)가 죽음.(고) 이무렵. 유리왕이 황조가(黃鳥歌)를 지음. (고) 이해. 황하(黃河)의 물이 넘침. 조호(趙護)를 광한태수(廣漢太守)로 삼아서 정궁(鄭躬)을 토벌하여 평정함. (한)  
BC 16
온조왕 3 (溫祚王)
9.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입함. 10. 우뢰가 치고 때 아닌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핌.   6. 첩여(고급여관(女官)) 조씨(趙氏)를 황후로 세우고, 그 누이 합덕(合德)을 소의(昭儀, 최고급 여관(女官))로 삼음.(한(漢)) 이해. 태후의 아우의 아들 왕망(王莽)을 신도후(新都侯)로 봉함.(한)  
BC 15
온조왕 4
봄∼여름. 가뭄과 기근 전염병이 발생함. 8. 낙랑(樂浪)에 사신을 보내 수호(修好)함. 2.그믐. 일식.(신) 2. 별이 떨어지고 새소리가 비오는 것과 같음.(한) 겨울. 적방진(翟方進)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공광(孔光)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음.(한) 이해. 왕상(王商)을 대사마위장군(大司馬衛將軍)으로 삼음.(한)  
BC 14
온조왕 5
10. 왕이 북변(北邊)으로 순행하여 신록(神鹿)을 잡음. 12. 평양의 고상현묘(高常賢墓) 축조.(고) 이해. 무휼(無恤)을 태자로 삼음.(고) 11. 소령(蘇令) 등이 난을 일으켜서 주살됨.(한)  
BC 13
온조왕 6
7.그믐. 일식.   이해. 하무(何武)가 경조윤(京兆尹)이 됨.(한)  
BC 12
온조왕 7
    이해. 왕상(王商)이 죽음에 왕근(王根)을 대사마표기장군(大司馬驃騎將軍)으로 삼음. (한(漢))  
BC 11
온조왕 8
2.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한 말갈을 대부현(大斧峴)에서 격파함. 7.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움. 낙랑(樂浪)과의 화친이 깨짐.   이해. 중랑장(中郞將) 단회종(段會宗)을 보내어 오손(烏孫)의 태자 번구(番邱)를 주살함. (한)  
BC 10
온조왕 9
9. 왕이 사냥을 나가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냄. 10.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 함. 4. 선비(鮮卑)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냄. (고) 1. 민산(岷山)이 무너져서 강물이 막히어 강수가 고갈됨.(한)  

BC 9

온조왕 10

 

 

이해. 중산왕(中山王) 흥(興)·정도왕( 定陶王) 흔(欣)이 내조(來朝)함.(한)

 

년 대

왕 계

사 건 내 용

동 아 시 아 정 세

한 국

중 국

일 본

BC 8
온조왕 11
4.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함. 7.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木柵)을 쌓아 낙랑의 통로를 막음.   2. 정도왕(定陶王) 흔(欣)을 태자로 삼음.(한) 8. 중산왕(中山王) 흥(興)이 죽음.(한) 겨울. 왕망(王莽)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자사(刺史)를 없애고 주목(州牧)을 설치함.(한)  
BC 7
온조왕12
  1. 혜성이 나타남.(고) 3. 성제(成帝)가 죽음. 공광(孔光)을 승상(丞相)으로 삼음.(한(漢)) 4. 애제(哀帝)가 즉위함.(한) 가을. 왕망(王莽)을 파면하고 사단(師丹)을 대사마(大司馬)로 삼음.(한) 이해. 능히 물을 다스릴 자를 구함.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불조(不兆)의 종묘를 정함. 사단(師丹)을 대사공으로 삼음.(한) 11.조취부(鳥取部)·조양부(鳥養部)·예진부(譽津部)를 정함.

BC 6

온조왕 13

2. 왕의 어머니가 사망함. 왕도(王都)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城)안에 들어옴. 5. 왕이 한수(漢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 함. 7. 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를 옮김. 8.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마한과의 경계를 정함. 북 - 패하(浿河) 남 - 웅천(熊川) 서 - 대해(大海) 동 - 주양(走壤) 9. 궁성과 대궐을 세움.

1.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볼모를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음. (고) 11. 대소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 옴. (고)

이해. 부희(傅喜)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음. 주박(朱博)을 대사공(大司空)으로 삼음. 중산태후(中山太后)가 자살함. 유향(劉向)이 죽음. (한(漢))

11.조취부(鳥取部)·조양부(鳥養部)·예진부(譽津部)를 정함.

BC 5
온조왕 14
1.위례성(慰禮城)에서 한산(漢山)으로 천도함. 2. 왕이 순무(巡撫)하고 농사를 권장함. 7.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함. 7.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침. (신) 6. 태초원장원년(太初元將元年)으로 고치고 8월 다시 건평2년(建平二年)으로 칭함.(한(漢)) 8. 승상(丞相) 주박(朱博)이 죄가 있어서 자살함.(한) 12. 평당(平當)이 승상(丞相)이 됨.(한) 이해. 주박(朱博)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고 정명(丁明)을 대사마(大司馬)로 삼음. 주박(朱博)을 승상(丞相)으로 삼음. 주목(州牧)을 없애고 다시 자사(刺史)를 둠. 태후 정씨(太后 丁氏)가 죽음. (한) 3. 왜희명(倭姬命)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진좌지(鎭座地)를 구하여 근강(近江)·미농(美濃)을 돌아다니며 이세국(伊勢國)에 사(祠)를 세움.
BC 4
온조왕 15
1. 새 궁실을 세움. 2. 혜성이 나타남. (신) 4. 왕가(王嘉)를 승상(丞相)으로 삼음.(한)  
BC 3
온조왕 16
      8. 병기(兵器)를 제신사(諸神社)에 드리고, 신지(神地)·신호(神戶)를 정함. 이해. 둔창(屯倉)을 내목읍(來目邑)에 세움.
BC 2
온조왕 17
봄. 낙랑(樂浪)이 쳐들어와서 위례성(慰禮城)을 불태움. 4. 국모(國母)의 묘(廟)를 세우고 제사지냄. 1.1. 일식. (신) 7. 공광(孔光)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하무(何武)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삼고 팽선(彭宣)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음.(한(漢)) 12. 동현(董賢)을 대사마위장군(大司馬衛將軍)으로 삼음.(한)  
BC 1
온조왕 18
10. 말갈이 습격하여 칠중하(七重河)에서 이를 격퇴함. 11.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대설(大雪)로 귀환함. 8. 제사 지낼 희생(犧牲)을 상하게 한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죽임.(고) 6. 애제(哀帝)가 죽고 동현(董賢)이 죄로써 파면됨. 왕망(王莽)을 대사마영상서사(大司馬領尙書事)로 삼음.(한(漢)) 8. 효성조후(孝成趙后)가 효애부후(孝哀傅后)를 폐함. 팽선(彭宣)을 파면함.(한) 9. 평제(平帝)가 즉위함. (한) 이해. 공광(孔光)을 태부(太傅)로 삼음. 마궁(馬宮)을 사도(司徒)로 삼음.(한) 이무렵. 왜인(倭人)이 100여국으로 나누어졌는데 일부는 전한(前漢)의 낙랑군(樂浪郡)에 조공함.
A.D 1
온조왕 19
  1. 태자 도절(都切)이 죽음.(고) 2. 공광(孔光)을 태사(太師)로 삼음. 왕망(王莽)을 태부(太傅)로 삼음.(한)  

2

온조왕 20

2. 왕이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내니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왔음.

3. 설지(薛支)가 국내 위나암(尉那巖)으로 천도할 것을 권함.(고) 8. 지진발생 (고) 9.그믐. 일식. (고)

이해. 진풍(甄豊)을 대사공(大司空)으로 삼음. 종실 및 공신의 후손을 왕후로 봉한 자가 100여인에 달함. (한(漢))

 

 

백제 연표


온조왕 재위년수 : 46년(BC18 ~ A.D28)
1 < 2 < 3

년 대

왕 계

사 건 내 용

동 아 시 아 정 세

한 국

중 국

일 본

A.D3
온조왕 21
  9. 두 마리 용이 금성의 우물가운데 나타남.(신) 10.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위나암성(慰那巖城)을 쌓음. (고) 11. 왕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함. 대보(大輔) 협부(陜父)가 한(韓)으로 망명함.(고) 이해. 왕망(王莽)의 딸을 황후로 삼음. 왕망이 아뢰어 수레·옷·밭·학교의 제도를 정함. 왕망이 중산 효왕후가(中山 孝王后家)를 멸하고 하무(何武) 포선(鮑宣) 등 수백인을 살해함. 왕망이 아들 왕우(王宇)를 죽임.(한) 7. 황후(皇后) 일엽초원명(日葉酢媛命)의 장례에 즈음하여, 야견숙미(野見宿 )의 진언에 따라 순사(殉死)를 대신하여 치륜(埴輪)을 능묘(陵墓)에 세움.
4
온조왕 22
8.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을 쌓음. 9. 왕이 부현(斧峴)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을 만나 이를 격퇴시킴. 2.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太子)로 삼고 국내의 죄인을 사면함. (고) 3. 혁거세 거서간이 죽고 남해차차웅이즉위함. (신) 7. 수도를 습격한 낙랑군을 격퇴시킴. (신) 이해. 왕운(王 ) 등 8인(人)을 보내어 전국의 풍속을 관찰시킴. 능히 물을 다스릴 자를 구함. (한)  
5
온조왕 23
  9. 왕이 기산(箕山)에서 사냥함. (고) 12. 왕망(王莽)이 평제(平帝)와 태황태후(太皇太后)를 시해함. (한(漢)) 이해. 군국종사(郡國宗師)를 둠으로써 종실을 규합함. 마궁(馬宮)을 태사(太師)로 삼음. 마궁을 파면함. 평안(平晏)을 사도(司徒)로 삼음.(한)  
6
온조왕 24
7. 웅천책(熊川柵)을 세웠으나 마한(馬韓)의 사신이 와서 항의하여 곧 헐어버림. 1. 시조묘(始祖廟)를 세움. (신) 10.1. 일식. (신) 1. 왕망(王莽)이 남교(南郊)에 제사지냄. (한) 이해. 선제(宣帝)의 현손(玄孫) 영을 태자로 세우고 유자(孺子)로 호칭함. 왕망이 즉위하고 전화(錢貨)를 주조함. 유숭(劉崇)이 왕망을 공격하다가 죽음. (한)  
7
온조왕 25
2. 왕궁(王宮)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한성(漢城)의 민가(民家)에서 말이 소를 낳음.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뜻을 가짐. 이무렵. 왕근묘(王根墓)를 축조함. (낙) 9. 동군태수(東郡太守) 적의(翟義)가 군대를 일으켜 왕망(王莽)을 토벌하고 유신(劉信)을 천자로 세움. (한) 이해. 적의(翟義)가 패하여 죽고 유신(劉信)은 도주함. (한)  
8
온조왕 26
7. 마한 정복 문제 논의. 10. 마한을 습격하여 병합하였는데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은 항복하지 않음. 1. 왕의 장녀와 석탈해(昔脫解)가 혼인함. (신) 왕태자(王太子) 해명(解明)이 황룡국왕(黃龍國王)과 상견함. (고) 12. 애장(哀章)이 동궤를 만들어 왕망(王莽)에게 바침. 왕망이 스스로 신황제(新皇帝)로 칭함. 왕망이 신(新)을 건국함. (한(漢))  
9
온조왕 27
4. 원산성과 금현성이 항복하여 마한이 멸망함. 7. 대두산성(大豆山城) 쌓음. 3. 태자 해명이 자결하니 이를 위해 묘(廟)를 세움. (고) 8. 부여왕이 고구려에 항복을 권유함. (고) 여름. 유쾌(劉快)가 왕망(王莽)을 치다가 죽음. (신(新)) 가을. 오위장수(五威將帥) 반부(班符)를 보내어 인수(印綬)를 고침. (신) 이해. 관명(官名)을 고침. 왕망이 전(田)·택(宅)·노예(奴隸) 매매를 금지함. 고구려와 부여에 사신을 파견함. (신)  
10
온조왕 28
2. 다루(多婁)를 태자(太子)로 삼아 내외병사(內外兵事)를 맡김. 4.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침. 7. 두곡(豆谷)에 이궁(離宮)을 세움. (고) 탈해(脫解)를 좌보(左輔)로 삼아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김. (신) 이해. 유수(劉秀)의 말에 따라서 오균관(五均官)을 세움. (신)  

11

온조왕 29

 

 

이해. 흉노가 변방에 침입함. 백성이 징발에 괴로워해 유망하여 도적이 됨. 주군(州郡)의 병사가 일어남. (신(新))

 

12

온조왕 30

 

이해. 신(新)이 고구려군을 흉노정벌에 동원하고자함에 불응하고, 신(新)의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을 죽임. 신(新)이 고구려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강등한다고 포고해옴. (고)

이해. 낙양(洛陽)을 동도(東都)로 하고 장안(長安)을 서도(西都)로 함. 서남이(西南夷)가 일어나 장가대윤(  大尹)을 살해함. 맥인( 人)이 일어나 변방을 침범함. (신)

 

년 대

왕 계

사 건 내 용

동 아 시 아 정 세

한 국

중 국

일 본

A.D13
온조왕 31
1. 국내 민호(民戶)를 남 북의 2부(部)로 나눔. 4. 우박이 내림. 5. 지진 발생. 6. 지진 발생. 11. 부여(扶餘)가 침공함에 왕자 무휼(無恤)이 학반령(鶴盤嶺)에서 격퇴함. (고) 이해. 태황태후 왕씨가 죽음. 언기도호(焉耆都護) 단흠(但欽)을 살해하여 서역이 마침내 와해됨. 흉노 오주유선우(烏珠留單于)가 죽고 오누약제(烏累若 )가 즉위함. (신)  
14
온조왕 32
  1. 태자 무휼(無恤)에게 군정을 맡김. (고) 8. 양맥(梁貊)을 멸하고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격함. (고) 이해. 병선 100여척으로 해변의 민호(民戶)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함. 낙랑이 금성(金城)을 습격해 옴. (신) 가을. 만국(萬國)을 둠. (신(新)) 이해. 북방에 크게 흉년 들어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 일이 생김. 흉노와 화친함.화포(貨布)·화천(貨泉)을 만듦. (신)  
15
온조왕 33
봄·여름. 크게 가물고 기근이 들어 도적이 많아짐. 8. 동부(東部)와 서부(西部)를 증설함.   이해. 오원대군(五原代郡)이 군대를 일으킴. (신)  
16
온조왕 34
10. 마한(馬韓)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친히 이를 토벌함. 7.그믐. 일식. (신) 이해. 다시 군대를 일으켜 흉노를 침. 왕준(王駿)을 보내어 서역에 나가 언기(焉耆)를 습격하여 죽임. 처음으로 공경(公卿) 이하에 봉록을 줌. (신)  
17
온조왕 35
    6. 봉토를 제후에게 줌. (신) 이해. 녹림군(綠林軍)이 거병함. (신)  
18
온조왕 36
7.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함. 8.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음 4. 왕자 여진(如津)이 익사함. (고) 7. 기근이 발생함.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함. (신) 10. 유리왕이 죽고.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즉위함. (고) 이해. 고구려에 속해있던 7개 소국이 신라에 병합됨. (신) 이해. 대부(大夫) 양웅(揚雄)이 죽음. 적미(赤眉)의 농민 반란이 발생함. (신(新))  
19
온조왕 37
3. 크기가 달걀만한 큰 우박이 내림. 4. 가물었으나, 6월에 비가 옴. 한수 동북지역의 일천여호(戶)가 고구려로 도망감. 1. 왕도(王都)에 지진 발생. (고) 2.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얻은 예왕인(濊王印)을 신라왕에게 바침. (신) 이해. 죄인을 사면해 줌. (고) 이해. 육세일개원(六歲一改元)으로 정함. 크게 모병하여 흉노를 침. 관동(關東)이 가물어 흉년이 듦. (신)  
20
온조왕 38
2. 왕이 주양(走壤)과 패수(浿水) 등 북쪽 경계를 순행함. 3. 농사와 잠업을 권장함. 10. 천지(天地)에 제사지냄. 3.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움. (고) 9. 왕이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 신마(神馬)를 얻음. (고) 10.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와 교역함. (고) 이해. 왕망(王莽)이 9묘(廟)를 세움. 법을 어긴 자를 목베어 용서하지 않음. 마적구(馬適求) 등이 왕망을 주살할 것을 도모하다가 패하여 죽음. (신)  
21
온조왕 39
  12.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을 개시함. (고) 이해. 한고조묘(漢高祖廟)를 훼철함. 왕망(王莽)의 아들 임(臨)이 왕망을 살해하려다가 발각되어 자살함. 남군(南郡)의 진풍(秦豊)이 군대를 일으키고, 평원(平原) 지소평(遲昭平)이 군대를 일으킴. (신(新))  
22
온조왕 40
9.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옴. 11. 말갈이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해 옴. 2. 부여국(扶餘國)을 공격하여 부여왕 대소(帶素)를 죽임. (고) 7.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1만여명을 이끌고 항복해 옴. (고) 11. 물이 얼지 않음. (신) 이해. 전염병이 있어 많은 사람이 죽음. (신) 가을. 형주(荊州) 평림(平林)의 진목(陳牧) 등이 군대를 일으켜 평림군(平林軍)이라 자칭함. 한(漢)의 종실(宗室) 유연(劉縯) 및 동생 유수(劉秀)가 춘릉(春陵)에서 군대를 일으킴. 유현(劉玄)이 유연(劉縯)을 죽이고 낙양(洛陽)에 도읍함. (신) 이해. 번숭(樊崇)의 군대가 적미군(赤眉軍)을 자칭하고 산동(山東) 및 강회(江淮) 사이에 횡행함. (신)  
백제 연표


온조왕 재위년수 : 46년(BC18 ~ A.D28)
1 < 2 < 3

년 대

왕 계

사 건 내 용

동 아 시 아 정 세

한 국

중 국

일 본

23
온조왕 41
1.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해루(解婁)를 우보(右輔)로 삼음. 2.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함. 가을. 혜성이 나타남. (신) 1. 한(漢)의 군대가 신(新)의 군대를 격파함. (후한(後漢)) 2. 신시(新市) 평림(平林)의 제장(諸將)이 유현(劉玄)을 황제(皇帝)로 세움. (후한) 6.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의 군대를 곤양(昆陽)에서 크게 격파함. (후한) 9. 왕망(王莽)을 점대(漸臺)에서 주살함. (신(新) 멸망) (후한)  
24
온조왕 42
  9. 누리가 발생함. 남해차차웅이 죽고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즉위함. (신) 2. 장안(長安)으로 천도함. 유수(劉秀)를 소왕(蕭王)으로 세움.(후한)  
25
온조왕 43
8. 아산(牙山)에서 사냥함. 9. 기러기 100여마리가 왕궁에 모임. 10.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함. 2. 을두지(乙豆智)를 보(右輔)로 아 군국의 사무를 맡김. (고) 왕이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죄인을 사면함. (신) 6. 유수(劉秀)가 호남에서 광무제(光武帝)로 즉위함. 대사면을 행하고 건무(建武)로 개원함. (후한(後漢)) 10. 광무제(光武帝)가 국도(國都)를 낙양(洛陽)으로 정함. (후한) 12. 적미(赤眉)가 유현(劉玄)을 살해함. (후한)  
26
온조왕 44
  10. 개마국(蓋馬國)을 멸함. (고) 12. 구다국왕(句茶國王)이 투항해 옴. (고) 1. 여러 공신을 열후(列侯)로 봉함. 종묘교사(宗廟郊社)를 낙양에 세움. (후한) 6. 곽씨(郭氏)를 황후(皇后)로 세우고 아들 강(彊)을 태자(太子)로 삼음. (후한)  
27
온조왕 45
봄∼여름. 큰 가뭄 발생. 10. 지진 발생. 1. 을두지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삼음. (고) 이해. 낙랑을 멸함. (고) 1. 사친묘(四親廟)를 낙양(洛陽)에 세움. (후한) 윤1. 풍이(馮異)가 적미(赤眉)를 효저( 底)에서 크게 격파함. (후한) 겨울. 이헌(李憲)이 9성(城)에 의거하여 황제를 호칭함. (후한)  
28
온조왕 46 다루왕 1 (多婁王)
2. 온조왕이 죽고, 다루왕(多婁王)이 즉위함. 7.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위나암성(慰那巖城)을 공격해옴. (고) 11. 왕이 순행함. (신) 8. 마성(馬成)을 보내어 이헌(李憲)을 공격함. (후한) 12. 주우(朱祐)를 보내 진풍을 포위하고, 잠팽(岑彭)을 보내 전융(田戎)을 공격함. (후한)  
1 < 2 < 3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피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따르는 많은 백성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온조왕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으니 이 지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천험지리(天險地利)로서 참으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또 다른 곳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漢水) 남쪽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였기에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하남 위례(慰禮)성의 도읍에 돌아와 보니

백성들이 안정되고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다 위례에 돌아와 귀부(歸附)하였는데 처음 따라올 때처럼 백성(百姓)들이 즐거워하였다.

그 후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백제의 왕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부여(扶餘) 계통의 씨족(氏族)들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 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을 총애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 등을 자기 친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돌아오자 태자로 삼고 왕위까지 계승시키자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오자

우리 어머니의 재산으로 나라를 세워 많은 도움을 주시고 온 정성을 다해 노력했으나 대왕은 세상을 싫어하시자

[하느님이 용을 내려 보내 하늘로 승천]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 붙어 있어도 혹처럼 될 것이니 답답할 뿐입니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 보다 못할 것입니다.

드디어 [비류]는 동생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던 것이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왕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구태(仇台)는 처음 옛 대방(帶方)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마침내 동이(東夷) 백제는 강국(强國)이 되었다.

[조국을 배신했던 이병도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라고 조작해서 믿지 못하게 했다.]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 국경의 북쪽에 말갈(靺鞨)이 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말갈을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 3월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들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뿐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 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을 하였는데 신비한 사슴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성책(城柵)을 세웠다.  

[신라]의 사자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친선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을 만들어 목책을 세우는 것은 혹시 우리 영토를 쳐들어올 계략이 있지 않는가?

만약에 옛 우호를 저버리고 성을 허물지 않거나 목책을 깨뜨려 버리지 않고, 시기하고 혹 의심한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고하였다. 

온조왕이 회답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것은 아닌 것 같소.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오.”

이로 말미암아 낙랑(신라)과 백제는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한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강가에서 막아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구]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백제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자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백제는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요하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서기전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서기전 2) 봄에 [신라]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 소서노에게 제사지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이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온조왕이 큰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 왔다.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빼앗은 가구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우리나라 [기준왕]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나

우리나라 왕이 어찌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마땅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라고 말하자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인 것 같습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아랫 윗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다.

그때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36년(서기 18) 가을 7월 탕정성(湯井城)과 대두성(大豆城)을 쌓아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쌓았는데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이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와 공작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호수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년(서기 20) 봄 2월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온조왕이 큰 제단(祭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식견[神識]이 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漢水)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을 상징합니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귀순해 오자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온조왕이 죽었다. [본문 끝]

 

 

 

<<< 백제초도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제 의견들 >>>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은 지금 廣州(광주)의 春宮里(춘궁리)와 南漢山城(남한산성)을 포함한 일대이다.

그러나 처음의 都城(도성)이 하남위례성에 있었음은 뒤에 河南(하남)으로 移都(이도)하였다는 기록이 나옴으로서

알 수가 있다.

[온조왕 13년 및 14년조] 그러면 상기 기록은 河南遷都時(하남천도시)의 사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見後). 

河北慰禮城(하북위례성) (이 위례)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인 漢城(한성)에 대칭하여 후에 北漢城(북한성)으로

개칭한 듯 한데)은 그 위치가 漢水(한수) 이북인 것은 틀림없다.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은 慰禮(위례)를 지금 서울의 동북방(지금 정능동. 삼양동. 부근)에 해당한 양으로 말했으나

 (彊域考券三 慰禮考(강역권3 위례고) 그 방면에는 백제시대의 유물 유적은 물론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고구려 및 신라)의 그 것 조차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산 계곡에 있어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의 유적(특히 신라시대)이 집중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은

彰義門(창의문) 밖인 洗劍洞(세검동) 일대를 내 놓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碑峰上(비봉상)의 眞興王碑(현재보관상 박물관내로 移置)를 비릇하여 文殊庵(문수암)의 석굴 僧伽寺(승가사) 및

新營洞(신영동)의 藏義寺址(장의사지)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상기와 같이 백제의 수도 위치를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본문에서 지금 경기도의 하남위례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없다.

오직 서울 洗劍洞(세검동) 계곡 일대로 추정한 지명일 뿐이다. 

그러나 [일왕의 칙명을 받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 대륙에 소재했던 백제의 수도 河南省(하남성)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하고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어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조선사: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증서(考證書)도 없이 이병도 독단적 추정으로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어찌 경기도 하남이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있는가?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소재한 몽촌토성으로 비정한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된다.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 지배층의 일반적 거주지인 구릉지토성이라는 점과

그 인근의 석촌동에는 왕릉급 고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하남위례성에 관한 기사와도 부합된다.

특히 한성 말기 백제 왕성에 관하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만들어 장려함이 극에 달했다"라고 했는데, 토성이라는 점에서 몽촌토성과 부합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몽촌토성이 왕성임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및 조경지(造景池)로 추정되는 연못지의 흔적이 밝혀져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 등의 유물과 더불어 왕성의 가능성을 증대시켜주고 있다.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결과 정약용, 이병도, 천관우, 윤무병, 김용국 등은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정학, 이형구 등은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이기백, 김원룡, 성주탁, 최몽룡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의 결과 몽촌토성은 3세기에서 5세기의 백제 성으로,

광주 고읍에 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판정함으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설이 우세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추정해서 오늘날까지 백제의 수도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작태인가?]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後漢書(후한서)에서 이르기를 三韓(삼한)은 무릇 78국으로서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 이다.

 北史(북사)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며 서남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漢江(한강)이며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하고 그 외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通典(통전)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남쪽은 신라와 접해 있고 북쪽은 고구려이며 서쪽은 큰 바다가 경계였다.   

  
居拔(거발)과 固麻(고마)는 고마의 借音(차음)으로 熊津(웅진:고마나루), 즉 지금의 公州(공주)를 지칭한 것이니

이것이 백제의 熊津都邑(웅진도읍)시대에 관한 기사임은 再言(재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그 중의 北際漢江(북제한강)은 원문에는 없는 말로 史記撰者(사기찬자)의 潤筆(윤필)에 불과한 것이어니와

사실 그때 백제의 北界(북계)가 漢江(한강)에 다달았다.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강유역은 그 당시 엄연한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北史(북사) 원문에는 處小海南(처소해남)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이른바 小海(소해)는 西海岸(서해안)의 沈入灣(심입만)인 牙山灣(아산만)을 가르켜 말한 듯 하므로

그것이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하겠다. 라고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말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舊唐書(구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은 越州(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倭(왜)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고

 백제왕은 동서 양쪽 城(성)에서 거처 하셨다. 新唐書(신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西界(서계)는 越州(월주)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倭(왜)에 이르고 다 깨우쳐 주었다. 하고 북쪽은 고구려라 하였다. 
  .
  

   고구려의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은 41년(371) 겨울 10월 백제 개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양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다. 고구려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리고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하였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겨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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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삼국시대)

기원 후

3년   고구려,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4년   신라, 혁거세거서간 죽고(BC 69~),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즉위.

8년   백제, 마한(馬韓)을 멸하고 병합.

14년  고구려, 양맥(梁貊)을 멸하고, 한(漢)의 고구려현을 공격. 신라, 병선 100여 척으로 왜구 격퇴.

15년  백제, 봄~여름에 대기근 발생.

18년  백제, 탕정성(湯井城)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축조. 고구려, 유리왕 죽고(?~), 대무신왕(大武神王) 즉위.</A>

22년  고구려,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임. 부여, 대소왕의 동생을 옹립하여 갈사국(曷思國)을 건국.

24년  신라, 남해차차웅 죽고(?~),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즉위.

26년  고구려, 개마국(蓋馬國)을 멸함.

27년  고구려, 낙랑을 멸함.

28년  백제, 온조왕 죽고(?~), 다루왕(多婁王) 즉위.

37년  백제, 후한의 낙랑군을 멸함.

42년  변진구야(弁辰狗耶)의 9간(九干)이 수로(首露)를 추대하여 금관가야(金官伽倻)를 건국. 신라, 이서국(伊西國)을 병합.

44년  고구려, 대무신왕 죽고(4~), 민중왕(閔中王) 즉위(?~48).

48년  고구려, 민중왕 죽고(?~), 모본왕(慕本王) 즉위(?~53).

49년  부여, 왕호(王號)를 사용, 후한과 수교.

53년  고구려, 모본왕이 살해되고(?~), 태조왕(太祖王)이 즉위(~145).

57년  신라, 유리이사금 죽고(?~), 탈해이사금 즉위.

65년  신라,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개칭. 신라, 김알지(金閼智) 탄생.

77년  신라, 가야와 싸워 대승. 백제, 다루왕 죽고(?~), 기루왕(己婁王) 즉위(?~128).

80년  신라, 우시산국(于尸山國)˙거칠산국(居漆山國)을 멸함.

105년 고구려, 한의 요동 6현을 공략하였다가 패퇴.

108년 신라, 비지국(比只國)˙초인국(草人國)˙다벌국(多伐國)을 병합.

111년 고구려, 예맥과 함께 현도를 공격.

112년 신라, 파사이사금 죽고(?~),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즉위(?~134).

128년 백제, 기루왕 죽고(?~), 개루왕(蓋婁王) 즉위(?~165).

132년 백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

134년 신라, 지마이사금 죽고(?~),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즉위(~154).

146년 고구려, 태조왕이 아우 차대왕(次大王)에게 선위(禪位).

154년 신라, 일성이사금 죽고(?~),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즉위(~184).

166년 백제, 개루왕 죽고(?~), 초고왕(肖古王) 즉위(~214).

179년 고구려, 신대왕 죽고(?~), 고국천왕(故國川王) 즉위(~197).

184년 신라, 아달라이사금 죽고(?~),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즉위(~196).

194년 고구려, 진대법(賑貸法) 실시.

196년 신라, 벌휴이사금 죽고(?~),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즉위(~230).

197년 고구려, 고국천왕 죽고(?~), 산상왕(山上王) 즉위(~227).

199년 가야, 수로왕 죽고(42~), 거등왕(居登王) 즉위(~253).

209년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

214년 백제, 초고왕 죽고(?~), 구수왕(仇首王) 즉위(~234).

227년 고구려, 산상왕 죽고(?~), 동천왕(東川王) 즉위(~234).

230년 신라, 내해이사금 죽고(?~),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즉위(~247)

234년 백제, 구수왕 죽고(?~),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였다가 폐위되고 고이왕(古爾王)이 즉위(~286).

244년 고구려, 위(魏)의 관구검이 침공.

247년 신라, 조분이사금 죽고(?~),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즉위(~262).

248년 고구려, 동천왕 죽고(209~), 중천왕 즉위(~270).

261년 신라, 첨해이사금 죽고(?~),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즉위(~284).

270년 고구려, 중천왕 죽고(224~), 서천왕(西川王) 즉위(~292).

284년 신라, 미추이사금 죽고(?~),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즉위(~298).

286년 백제, 고이왕 죽고(?~), 책계왕(責稽王) 즉위(~298).

292년 고구려, 서천왕 죽고(?~), 봉상왕(烽上王) 즉위(~300).

298년 백제, 책계왕 죽고(?~), 분서왕(汾西王) 즉위(~304). 신라, 유례이사금 죽고(?~),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즉위.

300년 고구려, 봉상왕을 폐하고 미천왕(美川王)을 세움. 봉상왕 자살(?~).

307년 신라, 국호를 계림에서 신라로 고침.

310년 신라, 기림이사금 죽고(?~),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즉위(~356).

331년 고구려, 미천왕 죽고(?~), 고국원왕(故國原王) 즉위(~371).

342년 고구려,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침공, 환도성 함락.

344년 백제 비류왕 죽고(?~), 계왕(契王) 즉위(~346).

346년 백제, 계왕 죽고(?~), 근초고왕(近肖古王) 즉위(~375).

356년 신라, 흘해이사금 죽고(?~),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즉위(~402).

371년 고구려, 백제군과 싸워 근초고왕 전사(?~), 소수림왕(小獸林王) 즉위(~384). 백제, 한산(漢山)으로 천도.

375년 고구려, 불교를 공인(公認). 백제, 근초고왕 죽고(?~).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384).

384년 백제, 근구수왕 죽고(?~), 침류왕(枕流王) 즉위(~385).

385년 백제, 침류왕 죽고(?~), 진사왕(辰斯王) 즉위(~392).

391년 고구려, 고국양왕 죽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즉위(~413).

392년 백제, 진사왕 죽고(?~), 아신왕(阿辛王) 즉위(~405).

400년 고구려,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격파.

402년 신라, 내물마립간 죽고(?~),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즉위(~417).

405년 백제, 아신왕 죽고(?~), 전지왕 즉위(~420).

407년 가야, 이시품왕 죽고(?~), 좌지왕(坐知王) 즉위(~421).

413년 고구려, 광개토왕 죽고(374~), 장수왕(長壽王) 즉위(~492).

414년 고구려, 광개토왕비 세움. 장군총(將軍塚) 축성.

417년 신라, 눌지(訥祗)가 실성마립간을 죽이고(?~) 즉위(~458).

420년 백제, 전지왕 죽고(?~), 구이신왕(久爾辛王) 즉위(~427).

427년 백제, 구이신왕 죽고(?~), 비유왕(毗有王) 즉위(~455). 고구려, 평양으로 천도. 안학궁(安鶴宮) 건립.

455년 백제, 비유왕 죽고(?~), 개로왕(蓋鹵王) 즉위(~475).

458년 신라, 눌지마립간 죽고(?~),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즉위(~479).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 전파.

475년 고구려,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 개로왕 죽고(?~), 문주왕(文周王) 즉위(~479). 웅진(熊津)으로 천도.

477년 백제,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살해(?~), 삼근왕(三斤王) 즉위(~479).

479년 자비마립간 죽고(?~),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즉위(~500). 백제, 삼근왕 죽고(?~), 동성왕(東城王) 즉위(~501).

491년 고구려, 장수왕 죽음(394~).

492년 고구려, 문자명왕(文咨明王) 즉위(~514)..

494년 부여,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

500년 신라, 소지마립간 죽고(?~), 지증왕(智證王) 즉위(~514).

501년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가 동성왕 살해(?~), 무령왕(武寧王) 즉위(~523).

503년 신라, 국호를 신라(新羅), 존호를 왕(王)이라 함.

512년 신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침.

514년 신라,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519년 고구려, 문자명왕 죽고(?~), 안장왕(安藏王) 즉위(~531).

520년 신라, 율령(律令) 반포.

521년 가야, 겸지왕 죽고(?~), 구형왕(仇衡王) 즉위(~532).

523년 백제, 무령왕 죽고(462~), 성왕(聖王) 즉위(~554).

527년 신라, 이차돈(異次頓) 순교.

531년 고구려, 안장왕 죽고(?~), 안원왕(安原王) 즉위(~545).

532년 금관가야,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

536년 신라,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세워 건원(建元)이라 함.

538년 백제, 사비성(泗侁城으로 천도.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함.

540년 신라, 법흥왕 죽고(?~), 진흥왕(眞興王) 즉위(~576).

545년 고구려, 안원왕 죽고(?~), 양원왕(陽原王) 즉위(~559).

551년 신라, 개국(開國)이라 개원(改元). 백제˙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

552년 백제, 불상과 경론(經論)을 왜에 보냄.

553년 신라,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566).

554년 백제, 성왕 죽고(?~), 위덕왕(威德王) 즉위(~598).

555년 신라왕,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건립.

559년 고구려, 양원왕 죽고(?~), 평원왕 즉위(~590).

561년 신라, 창녕신라진흥왕순수비 건립.

562년 신라, 대가야(大伽倻)를 멸함.

568년 신라, 황초령(黃草嶺)신라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摩雲嶺)신라진흥왕순수비 건립.

576년 신라, 원화(源花)제도 시작. 진흥왕 죽고(534~), 진지왕(眞智王) 즉위(~579).

579년 신라, 진지왕 죽고(?~), 진평왕(眞平王) 즉위(~584).

584년 신라,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

586년 고구려, 평양의 대성산(大城山)에서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

590년 고구려, 평원왕 죽고(?~), 영양왕 즉위(~618).

598년 고구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해 옴. 고구려, 이를 격파. 백제, 위덕왕 죽고(525~). 혜왕(惠王)

즉위(~599).

599년 백제, 혜왕 죽고(?~), 법왕(法王) 즉위(~600).

600년 백제, 법왕 죽고(?~), 무왕(武王) 즉위(~641).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만듦.

602년 백제, 승려 관근(觀勤)이 왜에 천문˙지리˙역서˙방술서 등을 전함.

612년 수나라의 제1차 고구려 침공.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수군을 섬멸(살수대첩).

613년 고구려, 수나라 양제(煬帝)의 요동성 공격을 물리침(제2차 공격).

618년 고구려, 영양왕 죽고(?~), 영류왕(榮留王) 즉위(~642).

632년 신라, 진평왕 죽고(?~), 선덕여왕(善德女王) 즉위(~647).

634년 신라, 인평(仁平)으로 개원(改元).

641년 백제, 무왕 죽고(?~), 의자왕(義慈王) 즉위(~660).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 죽이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647).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군사

요청.

645년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10만 대군으로 고구려 공격을 개시.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한 당나라 군대를 격퇴. 신라, 당나

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공격. 백제, 신라의 7성을 공략.

646년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 완성.

647년 신라, 경주 첨성대(瞻星臺) 건립. 선덕여왕 죽고(?~), 진덕여왕(眞德女王) 즉위(~654).

648년 백제, 신라의 10여 성을 점령. 신라, 백제의 21성 공략.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김인문(金仁門)이 당나라에 가서 백

제협공을 요청.

654년 신라, 진덕여왕 죽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즉위(~661).

660년 신라왕, 백제 공격을 위해 출병. 신라˙백제, 황산벌전투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전사(?~), 의자왕 항복.

661년 백제부흥군,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부흥운동 전개. 당나라 군대 고구려를 공격. 압록강에서 격전. 신라, 태종무열왕

죽고(?~), 문무왕(文武王) 즉위(~681). 신라왕이 고구려 정벌에 나섬.

662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사수(蛇水)에서 당나라군을 대파. 당나라군 평양성을 포위. 신라, 백제부흥군 토벌.

663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 백강(百江)에서 일본 구원군을 대파. 부여 풍(扶餘豊)은 고구려로 망명.

666년 고구려, 연개소문 죽고(?~), 맏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莫離支)가 됨. 남생, 당나라로 망명하고 아우 남건(男建)이 막

리지가 됨.

667년 신라, 문무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고구려, 당나라의 공격 받음.

668년 신라,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 포위. 고구려의 보장왕 항복함으로써 고구려 멸망.

669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670년 고구려 유민 검모잠(劍茅岑)이 한성에서 안승(安勝)을 추대하고 부흥운동 전개.

672년 신라, 고구려병과 합세하여 백수성(白水城) 근처에서 당군 격파.

673년 신라, 김유신 죽음(575~). 당군이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 공략.

674년 당나라가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대총관(鷄林大總管)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

675년 신라, 옛 고구려 남쪽지역에 주군(州郡) 설치. 설인귀(薛仁貴)의 당군 대파.

676년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 창건.</A>

681년 신라, 문무왕 죽고(?~), 신문왕(神文王) 즉위(~692). 대왕암(大王巖)에 문무왕릉 조성.

682년 신라, 국학(國學)을 개편.

687년 신라,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으로 편성.

692년 신라, 신문왕 죽고(?~), 효소왕(孝昭王) 즉위(~702).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696년 발해(渤海),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을 통합.

698년 발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진(震)을 건국.

702년 신라, 효소왕 죽고(?~), 성덕왕(聖德王) 즉위(~737).

713년 발해, 국호 진(震)을 발해로 고침.

719년 발해, 고왕 죽고(?~), 무왕(武王) 즉위(~737).

723년 신라, 처음으로 왜국에 사신을 보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733년 신라, 당나라의 패강(浿江) 이남 영유를 승인.

737년 신라, 성덕왕 죽고(?~), 효성왕 즉위(~765). 발해, 무왕 죽고(?~), 문왕 즉위(~793).

742년 신라, 효성왕 죽고(?~), 경덕왕 즉위(~765).

751년 신라,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756년 발해, 돈화(敦化) 동모산(東牟山)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

759년 신라 국학을 대학감(大學監)으로 개칭.

765년 신라, 경덕왕 죽고(?~), 혜공왕(惠恭王) 즉위(~780).

768년 신라, 대공(大恭)의 난 발생. 5도(五道) 주군(州郡)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싸움. 대공 피살.

770년 신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780년 신라, 김지정(金志貞)의 반란. 혜공왕과 왕후 살해됨. 김양상(金襄相)이 김지정을 죽이고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785)

785년 신라, 선덕왕 죽고(?~), 원성왕(元聖王) 즉위(~799). 9주(州)의 총관(總管)을 도독(都督)으로 고침.

788년 신라,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793년 발해, 문왕 죽고(?~), 대원의(大元義) 즉위(~794).

794년 발해, 대원의 피살되고(?~), 성왕(成王) 즉위(~795). 국도를 동경(東京)에서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김.

795년 발해, 성왕 죽고(?~), 강왕(康王)이 즉위(~809).

798년 신라, 원성왕 `죽음(?~).

799년 신라, 소성왕(昭聖王) 즉위(~800).

800년 신라, 소성왕 죽고(?~), 애장왕(哀莊王) 즉위(~809).

801년 신라, 5묘(五廟)의 제(制)를 개정. 탐라국(耽羅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

802년 신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창건. 3층석탑 건립.

804년 신라, 왜국의 국사(國使) 와서 황금 3백량을 바침.

805년 신라, ‘공식(公式) 20여조(條)’를 반포.

809년 신라,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788~), 헌덕왕(憲德王) 즉위(~825). 발해, 강왕 죽고(?~), 정왕(定王) 즉위(~813).

813년 발해, 정왕 죽고(?~), 희왕(僖王) 즉위(~817).

817년 발해, 희왕 죽고(?~), 간왕(簡王) 즉위(~818). 연호를 태시(太始)로 함.

818년 발해, 간왕 `죽고(?~), 선왕(宣王) 즉위(~830).

819년 신라, 사방에서 초적(草賊)이 일어남. 당나라에 군사를 보내어 이사도(李師道)의 난 평정을 지원.

822년 신라, 김헌창(金憲昌)의 난 일어남. 실패하여 김헌창 자살.

826년 신라, 헌덕왕 죽고(?~), 흥덕왕(興德王) 즉위(~836).

828년 신라,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靑海鎭)을 일으켜 대사(大使)에 임명됨.

830년 발해, 선왕 죽고(?~), 대이진(大彛震) 즉위(~858).

836년 흥덕왕 죽고(?~), 희강왕(僖康王) 즉위(~837).

838년 희강왕 자살하고 민애왕(閔哀王) 즉위(~839). 김양(金陽)이 청해진에서 반란.

839년 신라, 민애왕 피살되고(?~), 신무왕(神武王) 즉위. 신무왕 죽고(?~), 문성왕 즉위(~857). 장보고를 청해진장군으로 삼음.

846년 신라의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

857년 신라, 문성왕 죽고(?~), 헌안왕(憲安王) 즉위(~861).

858년 발해, 대이진 죽고(?~), 대건황(大虔晃) 즉위(~871).

861년 신라, 헌안왕 죽고(?~), 경문왕(景文王) 즉위(~875).

871년 발해, 대건황 죽고(?~), 대현석(大玄錫) 즉위(~892).

875년 신라, 경문왕 죽고(?~), 헌강왕(憲康王) 즉위(~886).

877년 고려의 태조 탄생.

886년 신라, 헌강왕 죽고(?~), 정강왕(定康王) 즉위(~897).

889년 신라,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일어남.

892년 견훤, 무진주(武珍州)에서 스스로 왕이 되어 후백제를 건국.

893년 발해, 대현석 죽고(?~), 대위해(大瑋E) 즉위(~906).

897년 신라, 진성여왕이 효공왕(孝恭王)에게 선위(禪位).

898년 궁예, 송악부(松岳部)로 본거를 옮김.

899년 북원(北原)의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다가 대패.

901년 궁예, 왕을 칭하고, 국호를 고려라 일컬음.

903년 후고구려의 왕건(王建), 금성(錦城) 등 10여 성을 공략함.

904년 궁예, 백관을 설치,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칭함.

905년 마진, 국도를 철원(鐵圓)에 옮김.

906년 마진, 왕건을 보내어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을 대파. 발해, 대위해 죽고(?~), 대인찬 즉위(~926).

909년 마진, 왕건이 진도(珍島)˙고이도(皐夷島)를 점령,

911년 마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침.

912년 신라, 효공왕 죽고(?~), 신덕왕(神德王) 즉위(~917).

914년 태봉의 왕건, 백선장군(百船將軍)이 되어 나주에 출진(出鎭).

917년 신라, 신덕왕 죽고(?~), 경명왕(景明王) 즉위(~924).

918년 왕건이 고려(高麗)를 건국.

919년 고려, 송악(松岳)으로 천도. 3성(省) 등 관제를 정함. 평양성을 축성.

924년 신라, 경명왕 죽고(?~), 경애왕(景哀王) 즉위(~927).

926년 발해의 103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왕궁에 침입.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움. 견훤이 고려에 국서(國書)를 보내어 강화를

청함.

934년 고려, 운주(運州)에서 후백제군을 격파. 웅진(熊津) 이북 30여 성이 항복.

935년 후백제, 신검(神劍)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왕이 됨. 견훤이 나주(羅州)로 도망하여 고려에 항복. 경순왕(

敬順王)이 고려에 투항, 신라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