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2

[스크랩] 직산 부소산(458m), 위례성(523m) 탐방기

吾心竹--오심죽-- 2008. 12. 3. 17:00

<<< 부소산, 위례성---백제어 연구>>>

 

***직산 부소산(458m)<부소뫼<부소모이(백제어)...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북면 운용리//

 

<<< 국호 : 십제~백제~남부여의 도읍 변천사---백제(BC18~660년) : 678년간 >>>

 

1. 직산 위례성시대 (慰禮城 時代-직산)------BC18 (온조왕 계묘년)~BC5---------(13년)

2. 남한성 백제시대 (南漢城 時代-광주)--BC5 (온조14년 병진년1월)~AD371-------(366년)

3. 북한성 백제시대 (北漢城 時代)-----AD371 (제13대 근초고왕 신미년)~AD 475---(104년)

4. 웅진 백제시대 (熊津 時代-공주)----AD475 (제22대 문주왕 을미년)~AD 538-----(63년)

5. 사비 백제시대 (사비 時代-부여)----AD538(제26대 성왕)~660(의자왕20년)------(123년)

 

*** 직산 위례성에서 바라 본 부소산(扶蘇山--458m)--사진 중앙 //

***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 산21-3, 양대리 산15-1 //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산25, 산24, 산1번지 ///

 

 ***위례성 이정표...부수문이(백제어 부수모이의 변형)→부소모이(백제어)→부소뫼→부소산→송악(백제의 진산 )

 

  ***위례성---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산45, 양대리 산18 //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산81번지 ///

 

 

 

 ***직산 위례성 유물...수많은 기와 파편들...///

 

 ***직산 위례성 유물...반쪽은 산 밑에서 발견됨...///

 

 

 

 ***직산 위례성...성벽...///

 

 ***위례성에서 본 부소산(458m)---금북정맥 //

 

 ***직산 위례성에서 본 입장천/발원은 성거산, 위례산,부소산에서 발원하여 한천(안성천)을 거쳐

      진위천과 합수하여  인주 밀머리(밀두리) 서해의  아산만으로 흘러감 /

***온조왕 초기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입장천 상류인 입장면 흑암리 오리골(오릿골)로 추정하기도 함.

     한주의 풍납토성, 공주의 공산성, 사비 부여의 부소산 모두 공통적으로 북쪽에 강을 끼고 있슴.

     초기 백제의 모습은 목책을 둘러치고 산이나 강을 끼고 생활함.

 

 ***위례성에서 바라 본 직산현의 읍치와 진산인 사산성(176m)...우측능선이 사산의 능선인 용안치.

      용안치 제비당제에는 백제 개국공신이며, 온조와 더불어 남행한 10명의 신하중 1명인 

      직산군 조성(趙成)의 묘가 위례산을 바라보고 있슴.

 

***멀리 아산 인주의 밀두리와 서해대교...평택의 소사평, 안서평야, 아산만이 시원하게 조망됨.

     가히 위례산에 오르면 동거고악, 서조대해, 남망옥택, 북대한수의 천험지리요 난득지세임을 알 수 있다.

 

***좌청룡 우백호처럼 위례산 좌측으로 성거산성(579m)과 우측의 서운산성(545m)이 자리하며,

     위례산과 서운산성의 중간에 성벽의 치 처럼 한림봉이 길게 뻗어 양쪽을 협공하여 공수를 쉽게할 수 있다.

     입장면 양대리 입구와 서운산의 입구 모양이 병목처럼 좁아 이곳을 막으면 안쪽은 평안한 도성처럼

     백성이 편하게 안거할 수 있다.

 

 

 

 ***부소산 부소령(扶蘇山 扶蘇嶺)---부소문이 고개, 부수문이 고개, 부소치 등으로 불림.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북면 운용리간 고갯길...// 

 

 ***직산현 부소산 부소령에서 바라 본 입장면 양대리...///

 

 ***직산현 부소산(458m) 정상...금북정맥...이 능선을 계속가면 한남정맥과 만남.

      부소산~서운산~칠장산~용인 부아산~광교산으로 이어짐---특히 <부아산>은 진위천/아산만의 상류이며

      경기도 광주 백제고읍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분수점이기도 함.  //

 

 ***천안시 북면/입장면/진천군 백곡면의 분기점인 만뢰지맥과 만남.

      사진 아래는 국보 제209호---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곡간리) 보협인 석탑 ///

 

 ***여지도...위례성과 부소문산(浮所門山)...//

 

 

 ***조선지도 목천현...안성경계에 부소산 부소령(扶蘇嶺) 부소치(扶蘇峙)....//

 

 ***위례성에서 본 직산현의 읍치...서해 아산만과 평택의 소사평, 안성평야, 양성의 한천과 진산이 한 눈에 조망됨.

 

岳의 뜻인 ’압‘(押)도 위 고구려 성명 중 ’거시압(居尸押), 골시압(骨尸押), 개시압홀(皆尸押忽)에서 발견되는데

 ‘부소압’(扶蘇押>松嶽) 등과 같이 중부지역까지 조밀하게 분포하였다.

銀의 뜻인 '소리홀'(召尸忽>木銀城)의 ‘소리’는 후대의 ’쇠‘로 이어진다. 이 ’소리‘(>쇠)는 한반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쓰였다.

그럴 뿐만 아니라 地ㆍ壤ㆍ川의 뜻인 동음어 '나'(那)가 또한 중부지역에 고루 분포하였다.

특히 '나'가 고구려어에서 壤ㆍ川의 뜻으로 쓰인 동음 이의어였던 사실을 고구려 왕호 및 5부족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첫째 도읍인 졸본에 흐르던 ’비류나‘(沸流那)의 별칭이 ’보술수(普述水)~송양(松壤)이니

壤ㆍ水의 뜻인 ‘나’가 고구려 초기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신라 초기에 '사라ㆍ서라'(斯羅ㆍ徐羅)와 같이 ‘라’로 나타나며,

川의 뜻인 '나'도 신라 인명 ‘소나’(素那=金川)에 들어 있다.

특히 고구려의 서울 ’평양‘의 별칭이 ’평나‘(平那)인바 이는 고구려어로 ’벌나‘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서울 이름이 신라의 ’서라벌‘에서 확인된다.

여기 ’나ㆍ라‘는 땅(壤ㆍ地)의 뜻이니 ’서라벌‘의 ’라벌‘과 ’벌나‘를 비교할 때 어순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동일하다.

이 ’나‘에서 ’나라‘가 파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 월성의 별칭인 ’재성‘(在城)은 ’견성‘(계신성)이다.

 

 

고구려 건국 수도 졸본의 배수이었던 비류나~보술수~송양(沸流那,普述水,松壤)에서

 ’보술:松‘, ’나:水ㆍ壤‘의 대응을 나타내므로 ’보술‘이 松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이 ’보술‘이 백제 첫째 수도 위례홀의 배산인 ’부사악‘(負兒岳)을 비롯하여 ’부소압‘(松嶽>개성),

’부소산‘(현 부여의 扶蘇山) 등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예가 있지만 생략키로 한다.

고구려 평양성의 별칭이 ’견성‘(畎城)이니 같은 말을 썼던 것이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고대 경기•충청과 호남의 언어 달라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백제어의 기원을 증언하는 횃불의 존재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앞에서 제시한 ‘위례홀’과 쌍벽을 이루는 ‘미추홀’의 별명이 ‘매소홀’(買召忽)인바,

이 별칭의 첫글자 ‘매(買)’가 ‘매홀(買忽=水城, 요즘의 수원)’ 등과 같이 ‘수(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부 지역의 남단인 청주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인데, ‘매(買)’가 어미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수 간만(干滿)의 이름에도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중부지역의 남단인 어청도에선 음력 초하루를 ‘일굽매’라고 부르는데,

남부지역의 북단인 흑산도에선 ‘일곱물’이라고 한다. 열이틀은 어청도에선 ‘세매’, 흑산도에선 ‘서물’이다.
이처럼 ‘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분포되었고 마한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어는 부여계어를 쓰던 ‘위례홀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백제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제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이른바

경기도 ‘한홀’(漢城) 시대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홀’(현재의 경기도 광주)은 백제 시대 전기•중기(BC 18~AB475년)의 중심이었다.


‘백제 역사=공주•부여시대’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이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 1-3 지명에 의거하여 그려진 삼국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황해•경기•강원 영서•충북) 지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475년) 이후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백제의 역사가 상당 부분 묵살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가 애써 감춘 사실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에 그 단초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의 전기•중기 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과 국내성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살수(청천강)였다.

따라서 백제의 중기 말(475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전•중기 판도를 그린 결과 중부지역이 오히려 백제의 소유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인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 언어는 백제어였음에 틀림없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 무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겨우 77년간만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토착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의 전기•중기어로 봄이 타당하다.


지명은 가장 보수성이 강한 언어다.

 

경기•충청지방의 지명들이 고구려어도, 마한어도 아닌 백제어(위례홀어)와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잠시 지명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고장이었던 ‘바빌론’을 비롯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우르크’, 아수르왕국의 수도 ‘아수르’ 등의 옛 지명이 5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라크 전역에서 지명으로

쓰이고 있어 얼마 전 이라크전쟁 보도 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백인들이 점령하기 이전 인디언 지명과 하와이 원주민의 지명이 그대로 쓰인다.


백제어와 일본어 매우 유사


백제어 중 수를 세는 어휘인 밀(3), 옻(5), 나는(7), 덕(10)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를 세는 단어가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일(1), 이(2), 삼(3) 등 중국의 수사체계를 빌려 쓰고 있음이 좋은 본보기이다.

 다만 우리는 고유의 수사체계를 아울러 쓰고 있지만 일본은 둘 다 차용하고 있음이 다르다.

 이처럼 고대 일본이 백제어의 수사체계를 차용할 정도였으니 다른 어휘의 차용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어가 현대 일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실증한다.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한홀⇒고마(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소부리(현재의 충남 부여)’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하였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언어는 상당기간 존속하는데, 백제어는 망국 후 적어도 1세기 남짓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어의 실질적인 존속기간을 약 800년 정도로 추산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본다.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전기 백제사회도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다.

 ‘달(達)’은 산(山), ‘단(旦)’은 계곡(谷), ‘매(買)’는 물(水), ‘파혜(波兮)’는 고개(嶺)를 뜻한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홀’이 ‘비리>부리’로, ‘달’이 ‘뫼’로, ‘단’이 ‘실(實)’로, ‘매’가 ‘믈(勿)’로,

‘파혜’가 ‘고개(古介)’로 달리 쓰였다.

고대 호남지방 언어인 ‘바달(波旦-현대의 바다)’에 해당하는 전기 백제어는 ‘나미’로 서로 달랐다.

바다를 뜻하는 현대 일본어는 ‘우미’다.
전기 백제어의 수사 체계는 독특했다.

 백제 지명에서 ‘밀’(密=3), ‘옻’(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과 같이 기본수 네 개가 발견된다.

 이 수사들은 ‘셋, 다섯, 일곱, 열’이라는 현대 한국어 단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오히려 일본어와 연결된다. 백제가 한반도 내의 전기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전기 백제어의 상당부분이

한반도에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신라어에 비해 백제어는 중기에 이르러 상당히 다르게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정치단위가 하나라고 해서 언어적인 면에서도 단일한 것은 아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두 국어로 쓰는 스위스가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사례를 중기 백제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언어였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알 수 있다.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 옮긴 도읍지 공주 시대로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어는 이 후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백제사 668년 중 185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하다.

 언어는 곧 문화발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발달한 문화는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특히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한 이후 122년간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발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졌더라면 백제 말기 언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 수준의 자료는 아니지만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단어들이 전•중기의 것들만큼이나 이 시기에도 남겨졌다.


백제어 억압한 통일신라


나라가 멸망한 후 백제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가 함락된 뒤 백제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다.

거의 100여 년이나 끈질기게 지속하였으니 그 저항정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항정신 속에 언어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소중한 우리말을 빼앗긴 적이 있다.

이후에 한국어는 되살아났지만, 백제어는 백제 멸망 100여 년 뒤 소멸되고 만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언어 통일을 위하여 전국의 고을 이름을 한자(漢字) 지명으로 개정했다.

신라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백제어 억압 정책’은 백제어의 소멸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외세에 의해 언어탄압을 받지 않은 일본의 언어에 고대 백제어의 잔재가 매우 많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백제어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역사 자료를 토대로 후기 백제어 단어들을 정밀 분석해보자 

 

 

 고구려와 백제는 언어적으로도 ‘부여’라는 한 뿌리에서 갈라진 나라다.

‘햇빛(日光)’의 의미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왕명에 고루 들어 있음도 깊이 새겨볼 일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신라어로 ‘누리(밝은누리)’로 불렸다.

‘삼국유사’는 ‘누리’를 ‘블구내(弗矩內)’로 음차표기하고

그 뜻을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言光明理世也)”로 한역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름을 지을 때 자연현상이나 사람의 기능과 행동을 소재로 삼은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면 ‘비류(비류국, 비류강에서 유래)’ ‘온조(온세상)’ ‘주몽·활보(명사수)’

‘뱀보(뱀처럼 기어다님)’ ‘거칠부(荒宗)’ ‘이사부(苔宗)’ 등이 그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제16대)의 이름은 쇠(斯由∼劉)이다.

이것은 신라 진지왕의 이름 쇠돌이(舍輪∼金輪)의 ‘쇠’와 같다.

궁예가 창건한 후고구려의 수도는 ‘쇠벌(鐵原)’로 불렸다.

신라의 인명에도 ‘쇠나(素那=金川)’라는 어휘가 나온다.

‘쇠(金·銀◇·鐵)’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보편적인 성명, 지명으로 쓰였다.

부여 왕 이름에 ‘해부루(解夫婁)’라는 것이 있다.

고구려에는 ‘해애루, 삽시루, 모두루, 미구루, 해루(解愛婁, 歃矢婁, 牟頭婁, 味仇婁, 解婁)’ 등의

이름이 나타난다.

백제에서도 ‘다루, 긔루, 개루, 근개루(多婁, 己婁, 蓋婁, 近蓋婁)’ 등의 성명이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모두 인명에서 돌림자 ‘루(婁)’를 즐겨 사용했다.

고구려 왕명에선 대무신(大武神)왕, 대해주류(大解朱留)왕, 대조대(大祖大)왕, 차대(次大)왕,

신대(新大)왕처럼 ‘대(大)’를 관형어로 썼다.

또한 관직명에도 대가(大加), 고추대가(古鄒大加), 대대로(大對盧)와 같이 ‘대’를 썼다.

백제의 경우는 건길지(鞬吉支), 근귀수(近貴首), 근개루(近蓋婁)처럼 ‘건’ 또는 ‘근’을 사용했는데

이는 ‘大’를 음차 표기한 것이다.

신라의 관직명에서도 대사(大舍) 〔=한사(韓舍)〕, 대나마(大奈麻) 〔=한나마(韓奈麻)의 표기가

발견된다. 고유어인 ‘한’은 ‘大’를 뜻한다.

고구려어 ‘홀’은 백제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백제의 지명인 ‘위례홀, 미추홀’ 등이 그것이다.

현재의 수원을 백제인들은 ‘매홀(買忽)’이라고 불렀고, 음성(陰城)은 ‘잉홀(仍忽)’로 불렀다.

‘홀’은 한반도 서남단까지 남하했는데 현재의 전남 보성은 백제시대엔 ‘복홀(伏忽)’이었다.

압록강 이북 고구려 영토 내 32개 지역명 중 7개에서 ‘홀’이 나타난다.

이는 상당히 조밀한 분포라고 할 수 있다.

 고대 한국어 ‘홀’은 고구려, 백제의 지명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됐으며 현대 한국어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岳(악)의 뜻인 ‘압(押)’도 고구려 지명 중 ‘거시압(居尸押)’ ‘골시압(骨尸押)’ ‘개시압홀(皆尸押忽)’

등에서 널리 발견되는데 이 역시 ‘부소압(扶蘇押>松嶽)’ 등과 같이 한반도 중부지역에까지

조밀하게 퍼져 있었다.

銀(은)의 뜻인 고구려어 ‘소리’는 ‘소리홀(召尸忽>木銀城)’등의 지명에서 나타난다.

‘소리’는 후대의 ‘쇠’로 이어지는데 한반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쓰였다.

신라어 ‘쇠잣(金城)’과 중세국어(용비어천가)의 ‘쇠잣(金城)’ ‘쇠재(鐵峴)’ 등이 그 확증이다.

땅과 내(壤·川)의 뜻인 ‘나(那)’도 고구려 영토와 한반도 전역에 고루 분포했다. ‘

나’가 양(壤)·천(川)의 뜻으로 쓰인 동음이의어였던 사실은 고구려 왕호 및 5부족 명에서 확인된다.

고구려 첫 수도인 졸본 주변을 흐르던 강은 ‘비류나(沸流那)’로 불렸다.

이 강은 또한 송양(松壤)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나’는 신라 초기 ‘사라·서라(斯羅·徐羅)’와 같이 ‘라’로 나타났으며 川의 뜻인 ‘나’도 신라 인명

‘소나(素那=金川)’ ‘침나(沈那=煌川)’에 들어 있었다.

특히 고구려의 서울 ‘평양(平壤)’의 별칭은 ‘평나(平那)’였는데 이는 고구려어로는 ‘벌나’였다.

신라의 서울은 서라벌로 불렸다.

서라벌의 ‘라’는 ‘나’에서 변한 것이고 ‘나’ ‘라’는 모두 ‘땅(壤·地)’을 뜻한다.

결국 신라의 서울 ‘서라벌’의 ‘라벌’과 고구려의 서울 ‘벌나’를 비교하면 순서만 바뀌었을 뿐

뜻과 음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나’ ‘라’가 합쳐져 현대의 순 한국어인 ‘나라(國)’가 파생됐다.

 

‘코리아’라는 국호

한자어 ‘재(在)’는 고대 한국어에서 ‘견’으로 발음됐다.

신라 월성(月城)의 별칭인 ‘재성(在城)’을 추독하면 ‘견성’이 된다.

‘(왕이) 계신 성’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평양성을 한자로 ‘견성(킛城)’으로도 기록했는데

고구려와 신라의 단어가 일치한다. ‘

압록(鴨綠)강’을 한역한 것이 ‘청하(靑河)’이다. ‘청하’는 고구려어로 ‘살하수(薩賀水)’라 불렸다.

청천(靑川)강은 고구려어로 ‘살수(薩水)’라 했다. ‘靑’의 뜻을 갖는 고구려어는 ‘살’이었다.

충북 괴산 청천(靑川)면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였다.

 

그리고 고구려 건국 수도 졸본의 강은 비류나, 보술수, 송양(沸流那,普述水,松壤)으로 불렸다.

여기서 ‘보술’이 ‘소나무(松)’를 뜻함을 알 수 있다.

‘보술’은 이후 ‘부사’ ‘부소’로 변화하였는데 백제의 첫 번째 수도 위례홀의 배산은

‘부사악(負兒岳)’으로 불렸다.

개성시의 옛이름은 ‘부소압(扶蘇押)’이었다.

이후 소나무의 한자어가 이름에 들어가 ‘송악(松嶽)’이 됐다.

부여엔 현재도 ‘부소산(扶蘇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지명 중 가장 역사적 정통성이 강한 것은 바로 국명이다. 백제는 한때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로 고쳤다.

백제 수도였던 ‘소부리(所夫里)’를 신라 경덕왕(757)이 ‘부여(扶餘)’로 고친 것도

백제의 뿌리가 부여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 뿌리에서 발원한 나라다.

후삼국 중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백제와 고구려를 이은 나라란 뜻이다.

후고구려를 줄여 국명으로 삼은 나라가 고려다.

고려는 분명 고구려의 후계국이다.

고려의 국호가 세계에 퍼져 현재 한국의 영문 국호인 ‘코리아(Korea)’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도 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을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이 코리아로 불리게 된 것은 ‘한국사’가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변천해온 역사라는 사실을

세계인들로부터 인정받은 결과라 할 것이다.

중국측의 주장대로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속하지 않는다면 ‘코리아’라는 국호 자체가 근거를 잃는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현재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고권도 크게 퇴색된다.

백제의 성격도 모호해진다.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은 한국의 정체성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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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심죽(吾心竹) ☞ 역사문화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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