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대한민국 考古學의 증인' 조유전

吾心竹--오심죽-- 2009. 4. 4. 10:29

 

 

'대한민국 考古學의 증인' 조유전

"서울 2~3m만 파면 漢城의 역사가 숨쉬어… 땅은 거짓말 안합니다"
천마총·안압지·황룡사터 등 40년 제 '삽질'로 벗겨냈죠
11시간만에 발굴한 무령왕릉 도굴꾼보다도 못한 졸속
호미날 서툴러 흠집 생기면 그건 올바른 발굴 아닙니다

조유전(趙由典·67) 경기문화재연구원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한국 고고학의 증인'이다. 40년 가까운 그의 이력(履歷) 자체가 그대로 한국의 발굴사(發掘史)다. 1971년 신출내기 문화재관리국 직원 시절 그가 참여했던 발굴이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이었다.

그 후 경북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경기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에 참여했으며 전북 익산 미륵사 터와 경주 황룡사 터, 감은사 터, 불국사, 풍납토성 발굴이 그의 주도로 이뤄졌다. 한국 고대사의 미스터리들이 그의 '삽질' 아래 실마리를 드러낸 것이다.

두주불사(斗酒不辭)에 늘 웃는 얼굴이지만 그는 타고난 완벽주의자다. 그는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이 한 점이라도 없어진다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한 연구자는 "그가 참여하는 논문 심사는 속사포같은 질문의 연속이어서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소를 그만둔 뒤 동아대 초빙교수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장을 지냈던 그는 3월16일 발굴기관으로 복귀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원장 겸 남한산성 운영위원장이 된 것이다. 이 '돌아온 장고'는 "남한산성이 치욕의 성이 아니라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호국의 성지(聖地)라는 것을 알리겠다"고 했다.


조유전은 경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4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농사 짓던 아버지는 일제 말 마산으로 가 일본인이 운영하던 간장공장에 취직했다. 좁은 방 3개뿐인 한옥에서 동생들과 함께 아옹다옹하며 자랐지만 그런 환경도 그의 수집벽(蒐集癖)을 누르지 못했다.

간장병, 약병 같은 폐품을 물에 불린 뒤 상표를 떼어내 모아 뒀다. 언젠가 역사를 증언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6·25 때는 땅 위에 흩어진 실탄을 찾아내 친구들과 터뜨리면서 놀았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라고 회상했다.

그는 삼수(三修)를 했다. 첫해는 서울법대, 두 번째 해에는 서울사대를 낙방했다. 1961년 '안 되면 군대 가자'는 생각으로 그 해 초에 새로 생긴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학교 선생님조차 "그게 무슨 과(科)냐?"고 어리둥절해할 정도로 생소한 전공이었다.

1962년에 그는 대학에 입학했다. 6·3 사태의 회오리를 맞은 대학가는 공부에 전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고고학'이란 학문을 비로소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졸업 논문을 코앞에 둔 1965년의 일이었다. 스승인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1922~1993)이 특이한 논문 주제를 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가 선사시대라고 가정해 보게.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았던 흔적을 발견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그럼 그 결론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럼 저희가 어디를 발굴해야 되는 겁니까, 선생님?" 스승은 말했다. "쓰레기장일세!"

그는 스승의 인솔하에 동료 학생 20명과 함께 경기도 부천 소사의 한 종교마을 쓰레기장을 '발굴'했다. "1957년 형성된 이래 계속 쓰레기가 쌓이고 있는 곳일세. 발굴하기 아주 좋은 곳이야!" 30도에 가까운 한여름,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떼가 윙윙대는 곳에서 그들은 발굴을 시작했다.

이듬해 1월 그는 결론을 내렸다. "선생님, 쓰레기 내용이 실제 의·식·주 생활과 일치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탄생한 한국 최초의 '쓰레기 고고학' 논문은 해외 유명 고고학 잡지에까지 소개됐다.

학군 장교로 임관해 1968년 제대한 조유전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가슴 한 구석에는 계속 삽을 들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보험 세일즈맨이 되려고 했다. '언젠가 경제가 발전하면 승부를 걸 수 있는 직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보험업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주변 사람들은 "왜 사기꾼 소굴에 들어가려느냐"고 뜯어말렸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운명은 갈렸다. 1969년 1월, 문화재관리국 관리계 연구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의 촉탁직원이 된 것이다.


지금도 잊지 못할 '꿈 같은 발굴'은 그로부터 2년 뒤에 일어났다. 조사단의 막내 학예연구사로서 백제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한 것이다. 갓 결혼한 새신랑이었지만 늘 남의 무덤을 파느라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는, 1971년 7월 8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 오후 벽돌을 걷어낸 발굴단이 무덤 속으로 들어갔을 때 석판에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적힌 글자가 쓰여 있었다. '사마'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25대 왕의 이름이었다.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사마왕? 아아… 바로 무령왕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한 고대 임금의 무덤이 처음으로 발굴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덤 내부는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돼 있었고, 금제 관 장식,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는 돌 짐승), 목침 같은 수많은 유물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엄청난 현장 앞에서 다들 너무 흥분했지요. 2~3년이라도 모자랐을 대 발굴인데 11시간 만에 후다닥 끝내 버렸습니다." 조유전은 훗날 그 일에 대해 두고두고 '고백성사'를 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우리 발굴단은 도굴꾼만도 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졸속 발굴이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때 발굴단이 갖춘 촬영기구는 일제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 1대뿐이었는데 사용 방법을 몰라 플래시를 터뜨리지도 못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사진기자들에게 촬영을 허락한 것이 부족한 기록을 보충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무렵 무덤 발굴을 둘러싼 온갖 소문이 돌았다. 입구를 파헤치자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고 무덤 문을 열자 오색무지개가 뜨면서 바깥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 유물이 순식간에 썩고 부서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소문의 진상에 대해 설명했다.

"비는 왕릉 입구를 완전히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오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벽돌을 뜯어냈을 때 자동차 에어컨처럼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천 수백 년 묵은 안쪽 찬 공기가 따뜻한 공기와 만나면서 생긴 일시적인 결로(結露·이슬맺힘) 현상이었을 뿐이죠. 나머지는 다 지어낸 이야깁니다."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온갖 액운(厄運)에 휩싸였다. 무령왕릉 유물을 서울로 옮기던 운전사가 휴게소에서 미끄러져 다쳤다. 다음달 문화재과장의 운전사가 동대문 근처에서 어린이를 치었다. 다음해엔 발굴단장이 갑자기 빚에 몰려 집까지 처분했다. '큰 무덤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말 때문일까?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운 일화들도 당시 전국의 여러 발굴현장에선 숱하게 일어났다. 포항종합제철공단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 댐 때문에 경주 안계리 일대가 수몰 위기에 처했는데, 이곳 청소년들이 야산의 신라 고분들을 파헤쳐 유물들을 행상에게 팔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1970년 5월, 조유전은 이곳 발굴의 현장책임자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현장 인부들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나도 좀 마셔 보자!" "우리 어머니 갖다 드려야 돼!" 알고 보니 무덤 속 토기 항아리 안에 물이 가득 고여 있었는데 인부들은 이것이 말로만 듣던 천년수(千年水)가 틀림없다며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소병에 그렇게 좋다는 천 년 된 물이야!"

그는 "내가 먼저 마셔보고 1시간 동안 별 이상이 없으면 마셔도 좋다"고 했다. 보릿대를 하나 꺾어 물속에 담그고 한 모금 빤 뒤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꿀꺽 삼켰다. 그는 "지금까지도 별 이상은 없지만, 아직도 왜 땅 속에 묻힌 항아리에 물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번은 인부들이 '힘 좀 내시라'며 뭔가를 들고 왔다. 자세히 보니 갓 발굴한 신라토기 속에 펄펄 끓인 탕을 담아 온 것이었다. "이게 뭔가요?" "아 글쎄, 구덩이에 어린아이보다도 키가 큰 능구렁이가 잡혔지 뭡니까. 그걸 그대로 끓여 왔습죠. 어서 드세요."

그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지만 사람들을 통솔하는 입장에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숟가락 들어 보니 의외로 닭백숙 국물 맛 같아서 단숨에 들이켜고 입가심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끝냈다.

그는 "1000년 넘은 신라 토기가 아직도 뱀 탕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것을 입증한 '실험 고고학'이었던 셈"이라고 담담한 목소리로 회고했다. 물론 두 번 다시 그런 '실험'은 하지 않았다. 모두 당시의 고고학 여건이 얼마나 낙후돼 있었는가를 이야기해 주는 추억들이다.

불확실한 제보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감은사 터를 발굴하던 1982년 9월, 난데없는 지시가 내려왔다. "동해 바다 속에 묻혀 있다는 대종(大鐘)을 찾아라!" 대왕암 주변 마을에 사는 촌로가 '감은사 종을 왜구가 약탈해 가다 빠뜨렸다는 전설이 있으니 어서 찾으라'고 제보했던 것이다.

앤서니 퀸과 외모가 비슷한 한 마을 주민은 TV 인터뷰에서 '날씨가 흐릴 때는 바다속에서 종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는 말까지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t급 동력선과 스쿠버 다이버를 동원해 2주 동안 샅샅이 탐사한 끝에 찾아낸 것은 얼마 전 태풍으로 쓸려 간 의자와 솥단지들뿐이었다.

지금까지 발굴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 중 하나로 그는 197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을 맡은 직후인 1978년의 황룡사 발굴을 회고했다. 조사를 위해선 황룡사 9층 목탑터의 가장 중심 초석인 심초석(心礎石)을 들어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심초석이란 게 만만치 않았다.

"무게가 자그마치 30t으로 추산됐어요. 만약 잘못 옮기다 삐끗해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1300년 넘게 견뎌 온 돌이 부서지는 거잖아요." 논의 끝에 "중량의 3배 이상을 들 수 있는 100t급 크레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그 정도의 크레인은 부산에 2대, 인천에 1대로 국내에 단 3대가 있었다. 그런데 부산 것은 자체 작업량이 많아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다. 이를 어쩐다? 그런데 기막힌 천운(天運)이 일어났다. 인천에 있던 크레인이 특수물품 하역을 위해 마침 가까운 포항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강도 시험 같은 안전 진단을 미처 하지 못했어요. 참 무모한 일이었죠. 와이어 로프로 돌을 감아서 올리는데… 조금이라도 긁힌다면 마치 내 살을 베는 느낌이겠구나 싶었어요." 다행히 결과는 '안전하게 옮겼음'이었다.

그는 "발굴이란 근본적으로 파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라"고 후학들에게 말한다. "학술적 필요나 개발을 위해 어쩔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발굴이다. 파편 하나라도 나오면 그 자체로 온전하게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서툴게 호미 날을 휘둘러 흠집 하나라도 생긴다면 그건 올바른 발굴이 아니다."

'미리 예측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역시 그의 신조다. 어설픈 기록을 믿고 '여기에 뭐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꿈을 꿔서 '여기를 파 보면 나온다'는 말을 듣고 파 보니 나왔다는 일을 저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땅 밑에 뭐가 있는지는 파 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어요." 예를 들어 1973년 7월 시험적인 성격의 발굴이었던 천마총 발굴 때 금관이 출토된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1987년 동아대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미술공예연구실장과 유적조사연구실장, 소장(1999~2002)을 지냈고, 국립민속박물관장(1994~1998)을 맡았다. 1980년대 경복궁 서문 안쪽 국립문화재연구소 건물 5층에 있던 연구실은 늘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력이 없어서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그렇게 한다면 후학들은 모두 도망가고 말 것"이라며 웃었다. 그가 현장으로 돌아온 2009년의 상황은 처음 삽을 들었던 1971년과는 크게 다르다.

"예전에는 지하철을 놓을 때 옛 유적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팠지요.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로 개발하는 땅에는 지표조사와 시굴(試掘)조사부터 하게 돼 있습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된 것이지요."

그는 "문화유산의 존재가 개발의 걸림돌인 것처럼 보는 시각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깟 별 가치도 없는 돌멩이 몇 개 가지고 사업을 지연시킨다'며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지난해 4월에는 충남 당진의 한 회사 대표가 조사단원들이 보는 앞에서 굴착기를 동원해 현장을 깡그리 갈아엎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죠.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 자체가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잘 몰라서 생긴 일입니다." 그는 '우리가 개발 때문에 땅을 파는 죄를 짓고 있으니까 충분한 학술적 자료를 확보한 뒤에 그나마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발굴 시작 전에 반드시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개토제(開土祭)를 연다. '죄'를 짓기에 앞서 땅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다.

"천마총(天馬塚)을 왜 천마총이라고 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건 분명히 5세기 신라 왕의 무덤이에요. 거기서 나온 천마도(天馬圖), 기린 그림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걸 가지고 무덤 이름을 붙였습니다. 도대체 어느 왕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 무덤에 대한 기록이 지금 소상히 남아 있다면 발굴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다. 황룡사만 해도 실제로 그 절의 위치가 어디이고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는 직접 발굴을 해 봄으로써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나마 땅을 파 보고 조사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과거사는 그대로 암흑처럼 남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장구한 삶의 뿌리와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세계화 시대에 지구는 하나라고 해서 태극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는 "서울 시내만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땅속 2~3m 아래에 조선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고 더 올라가면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500년이나 이어진 한성 백제의 역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땅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실체를 갖춘 문화유산 없이 책에서만 떠든다면 그것은 단지 상상의 역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파트 짓고 길 내서 신나고 좋은 것 같지요? 그것 때문에 문화유산을 다 깔아뭉갠다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오게 됩니다. 개발을 하더라도 먼저 발굴을 해서 기록만이라도 후세에 남겨야 합니다."

40년 '현장 체질'의 건강 관리 비결은 무엇일까. "뱀탕요? 허허, 그건 그때 이후로 쳐다본 적도 없어요. 천년수를 마신 게 지금도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헬스클럽도 가지 않고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는다. 골프장은 딱 한 번 가 봤는데 몇 번 클럽을 흔들어 보고는 그 다음 날 파스를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건강에 가장 좋다"라고 말했다. "내가 왜 이런 삽질을 하고 있느냐, 이런 생각만 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우주 전체에 그 유물은 오직 그 자리에만 있고, 내가 그걸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발굴이라는 일을 새롭고 즐겁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고고학자들에게 우리나라 땅은 그야말로 천혜의 복 받은 땅이라는 말도 그는 잊지 않았다. "이 땅은 역사적으로 단절된 순간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살기가 좋지 않았거나 불모지가 됐더라면 그런 게 땅 속에 남아있지 않았을 게 아닙니까? 한국 고고학자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