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한성백제문화제’를 즈음하여

吾心竹--오심죽-- 2009. 3. 30. 15:31

고대백제 비밀의 문을 여는 역사 속으로

‘한성백제문화제’를 즈음하여

2008-11-05 11:53:01

[ 최정숙 기자 ]

서울 송파에 산 지 6년이다. 송파의 역사와 거리를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현대인의 바쁜 생활만큼이나 지척에 놓인 백제의 고토를 둘러보지 못한 무심함. 잠시 회한에 젖어본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따뜻한 가을, 무언가를 계획하기에 적당한 계절 9월. 이렇듯 거리도 가까운 서울 송파의 ‘한성백제문화제’를 들여다보며 2천 년 전 고대백제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강변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고대문화를 꽃피운 ‘한성백제문화제’가 처음 개최된 1994년도를 시작으로 제9회를 맞이했다. 금년에는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200여 개 축제를 심사하여 선정하는 ‘2008 문화관광축제’에 지정되었다. 특히 올해 축제에서는 백제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345~375년)에 초점이 맞춰져 올림픽공원 네거리에서 평화의 광장까지 1.5㎞ 구간에서 근초고왕 개선행렬이 펼쳐졌다.

연기자, 학생, 주민 등 2천여 명이 취타대, 호위대, 기마대, 풍물패로 나뉘어 백제의 건국, 승리, 중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으며 당시 복장은 물론 투석기 등 전쟁무기도 선보였다.

올해 축제에서는 볼거리뿐 아니라 백제시대 서민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는 숙영지 체험을 하는 군사이야기를 비롯해, 철기이야기(철기방 체험), 부리이야기(장터체험), 하늘이야기(소원빌기), 놀이이야기(백제언어, 기념화폐) 등 5개 백제마을 테마존이 펼쳐졌다.
ⓒ송파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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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따라 흐르는 백제이야기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강은 우리나라 강들 중에 가장 넓은 유역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선사시대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동에서 시작해 서해로 흘러가는 큰 강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다.

또한 바다를 통한 외부 세계와의 접촉도 편리하여 삼국시대에는 이곳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였다. 그래서 삼국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한강의 첫 주인공인 백제는 한강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삼국시대’라는 역사 무대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송파라는 지명은 경기도 광주군에 있었으나 큰 장마에 마을이 전부 떠내려 간 후, 송파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금의 석촌호수 남쪽 지대로 옮겨 살면서 다시 사용하게 된 이름이다. 송파는 조선시대 도성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한강 상류를 오르내리는 뱃길과 육로를 따라 각 지방 토산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따라서 날로 시장이 번창하게 되었고 송파장이 규모와 교역량이 큰 시장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송파장의 위치가 한강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석촌동 일대는 한강 본류가 흐르는 강의 남쪽 언덕으로 배들이 쉽게 닿을 수 있었고 지형이 원만하여 포구로서 적합하였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물품이 한양으로 갈 때나 함경도·평안도 등 북쪽 지방의 물품이 한양을 거치지 않고 삼남으로 내려갈 때에도 송파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한강을 건너는 대표적인 나루인 삼전도와 송파나루가 이곳에 있었다. 지금의 석촌호수가 그 흔적이다.
ⓒ송파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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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의 유래
백제는 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백제의 역사는 고구려와 마한에서부터 시작된다. 졸본에서 고구려가 건국된 후에 주몽(동명성왕)은 소서노와 결혼하여 온조와 비류 두 아들을 낳았다. 주몽이 부여에서 온 아들 유리를 후계자로 삼자 온조와 비류 두 형제는 건국을 위해 바쳤던 모든 공을 뒤로 하고 남하하여 지금의 서울 북부지역에 이른다.

온조는 한강 북쪽 위례성에 자리 잡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했다. 이때 송파지역이 백제의 수도가 되었고 BC 5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터전을 잡았다. 그후 위례성의 백성들이 풍요롭게 사는 모습을 본 비류는 부끄러워 탄식하다가 죽었고 온조가 그 백성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다.

온조가 세운 ‘십제’는 많은 백성과 고구려에서 가져온 철기 기술, 유리한 농사환경 덕분에 점점 국력이 강성하기 시작한다. 온조는 주변 지역으로 눈을 돌려 영토를 넓히고자 했다. 온조는 마한의 부족국 중 하나였던 백제국을 공격했다. 결국 백제국 땅을 차지하자 온조는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 백제는 ‘백성이 즐겁게 따른다’는 뜻이다.

백제는 점점 힘이 강성해져서 결국 마한의 땅을 다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청동검을 사용하고 있던 마한 사람들은 철검으로 무장한 백제의 군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근초고왕 시대는 한성백제 중 최대 전성기이자 최대의 국토 확장을 이룩한 시기이며, 백제의 역사상 가장 활발한 영토 전쟁과 체제 정비에 힘쓴 시대다. 근초고왕 시대의 백제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 요서지방과 산둥지방, 일본 규슈지방까지 진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백제 왕권은 굳건해졌다.

한성백제 문화제의 하이라이트로 최대의 전성기를 누린 근초고왕의 개선행렬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당히 입성하는 백제의 병사들이 2,000년을 살아 온 듯했다. 백제 678년의 역사 가운데 온조왕에서 문주왕 원년(475년 도읍)까지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기 전 493년(BC 18~AD 475)간을 한성백제시대라 한다. 웅진백제시대(475~538)는 공주에 도읍을 정한 시기로 백제 중기에 해당된다. 공주에서도 따로 백제문화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사비백제시대(538~678)는 부여에 도읍한 시기로 백제 말기에 해당된다.
ⓒ송파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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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조 계보
백제시대는 온조왕부터 사비백제시대의 의자왕까지 678년의 역사다. 31대 백제왕조의 계보는 한성백제시대는 온조왕부터 21대 개로왕까지 493년간으로 온조왕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 초고왕 → 구수왕 → 사반왕 →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비류왕 → 계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이다.

웅진백제시대는 22대 문주왕부터 26대 성왕 16년까지 63년간으로,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523~538)이다.

사비백제시대는 26대 성왕 16년부터 31대 의자왕까지 122년간으로, 성왕(538~554년) →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 → 의자왕이다.

한성백제의 성곽
몽촌토성은 성내천과 함께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많은 송파 사람들의 조깅코스와 걷기코스로 각광받는다. 토성을 오르락내리락 걷다보면 토성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다. 그러나 이미 생활체육 장소로 변한 지 오래다. 이 역사물은 현대인들에게 쓰임을 받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보호 통제해야 되는지 언뜻 몽촌토성이 오래 밟힐수록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토성이다. 몽촌토성은 해발 45m 내외의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축조된 토성이다. 성의 규모는 남북 730m, 동서 540m로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성안은 다시 낮은 안부(鞍部)를 낀 구릉이 있어서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며 동북쪽으로 이어진 구릉에 작은 외성(外城)이 약 270m의 직선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자연 구릉을 그대로 이용하여 일부는 삭토(削土)하거나 성토(盛土)하여 쌓았으며 서북벽과 동북벽에는 바깥쪽에 1.8m 간격의 목책주혈(木柵柱穴)이 발견되었다. 성의 외곽에는 구릉 아래쪽을 따라 해자(垓字)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해자는 자연하천을 이용하여 일부를 개착(開鑿)해서 만들었다.

성의 북동쪽은 성내천이 휘감아 흘러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성안에서는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한성백제기의 시설물로는 지상 건물지 1기, 판축성토대지 1개소, 수혈주거지 9기와 저장구덩이 31기, 방형유구(方形遺構) 2기, 적심유구 7기, 연못지 2개소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3세기 중후반대에 출현하는 토기류, 수혈 주거지 일부에서 철도, 철촉 등의 철제 무기류가 소량 출토되었으며 저장혈에서 뼈로 만든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이 토성은 위치나 유물상(遺物狀) 등으로 보아 한성백제기에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요한 성곽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웃한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초기의 왕도(王都)를 구성하는 성터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한강변에 위치한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불리며 현재의 명칭은 1963년 사적지적 당시 행정구역이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원래의 토성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었으며 주위는 3.5km, 남북 2km, 동서 1km에 이르렀으나 한강 쪽의 서벽은 1925년 홍수로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km가량 남아있다. 성벽은 고운 모래를 한 층씩 다져 쌓은 폭40m, 높이 9~15m에 이르는 거대한 판축(板築)토성으로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 있다.

풍납토성은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초두, 과대금구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일제시대부터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등 주목을 받아 왔다. 해방 이후 1966년 서울대학교가 처음으로 시굴조사하면서 백제시대의 생활면 2개 층과 경질무문토기를 비롯한 기원 전후에서 5세기 대의 유물을 확인하였다. 이후 1997년 풍납토성의 성벽 실측조사를 실시하던 선문대학교에 의해 재건축공사현장에서 백제토기 등이 다수 출토된 사실이 알려져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긴급발굴조사를 하였다. 이후 3중의 환호유구와 평면형태 6각형에 20평 내외의 집자리 19기, 토기가마 1기, 다수의 수혈유구, 토기, 기와, 철기, ‘呂’자형의 대형 건물지인 44호 유구와 ‘大夫’명 토기 등이 조사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와 큰 강을 낀 입지적 조건, 그리고 주변에 고분군과 산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 아울러 당시의 인구 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고려해 볼 때,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되었다는 점은 풍납토성이 백제초기 왕성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송파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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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묻혀 있는 한성백제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전기 왕에게 드리는 전통제례의식을 재현하여 영원한 대한민국의 위상과 송파의 발전을 기렸다. 백제의 고분은 고구려나 신라의 그것과 비교할 때 훨씬 다양하고 독특하다. 백제초기 적석총은 백제초기부터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백제전기 고분군으로 백제의 매장풍습과 정치ㆍ사회ㆍ문화 등에 관한 백제사의 여러 가지 내용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표고 20m 정도의 남북 방향의 얕은 뚝 모양의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80기 이상의 고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1974년 최초 발굴조사 시에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3호·4호·5호분 뿐이었다. 그러나 83년 이후 조사에서 여러 기의 적석총(積石塚), 토광적석묘(土壙積石墓), 석곽묘(石槨墓), 옹관묘(甕棺墓), 토광묘(土壙墓) 등의 새로운 유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밖에 봉토분(封土墳)이나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화장(火葬)유구 등이 발견되었다. 적석총인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 남분은 적석총이며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 4호분 남쪽에 위치한 2호분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를 채운 내부에서 목관 1기가 조사되었다.

1986년에는 3호분 동쪽 지구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상층의 토광묘·옹관묘들과 그 아래층에서 대형토광묘 등이 발굴되었다. 이 중 대형토광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무덤양식으로 제일 아래층에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8기의 목관을 안치한 특이한 구조의 무덤이다.

각 목관에서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칠해진 칠기를 비롯하여 토기와 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석촌동 적석총의 상한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적석총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

방이동백제고분은 본래 농업에 종사하는 자연부락 뒤 야산에 생성된 것으로 규모는 크나 거의 평평하게 뭉긋한 형태를 하고 있어 간혹 말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기도 했다. 1975년과 1976년 현장 확인 당시에도 민간인 무덤이 30여 기나 뒤섞여 있고 그 중에는 고려와 조선조의 묘지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확인된 8기를 중심으로 9천여 평을 보호지역으로 공원화하고 내부를 복원해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자연석으로 벽면을 쌓고 천정 또한 아치형으로 처리했으며 벽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부장품도 거의 없어졌다. 다만 기원전 5세기부터 백제 말기까지 계속되는 묘제를 따랐고 규모도 크니 백제계의 왕이나 왕실에 가까운 상류층의 분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일대에서 선사시대 주거지에서나 볼 수 있는 노지(爐地)가 나오고, 석상, 석검의 파편, 백제시대 토기 등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랜 동안 문화의 터전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횡혈식 석실분인 제1호분은 백제중기의 도읍지였던 공주 송산리 제5호분과 그 구조형식이 흡사하여 방이동 고분군의 구조형식이 공주고분으로 이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 고분군은 가락동, 석촌동 고분과 함께 한성백제의 풍습을 알 수 있는 문화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유적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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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리 (고대백제어로 마을을 뜻한다)이야기
백제동전을 지니고, 백제옷을 입고, 백제언어를 배우는 순간, 백제인이 되어 고대 백제의 백성들과 군사들의 일상속으로 체험여행을 떠난다. 삼국시대 사신의 왕래나 교류 시에 통역관이 등장하지 않은 것과 전쟁이나 협상 시에도 서로 별 무리 없이 대화가 오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시대 사람들은 말이 통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문서는 중국과 같은 한자를 사용해 교류한 문서가 남아 있다.

백제 사람들의 이름은 2자, 3자, 4자, 많게는 5자다. 백제시대에는 이름과 더불어 성씨가 출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회다. 일반 백성들은 성을 가질 수도 없었지만 귀족들도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 받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고흥, 왕인, 아좌, 아직기, 단양이, 귀실집사, 억례복류, 부여복신, 노리사치게 등 현대와는 다르게 재미와 멋이 느껴진다.

백제 사람들이 실제 옷을 입은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있어 문화제에서 재현하여 백제의 옷을 입어볼 수도 있었다. 중국에 남아 있는 <양직공도>와 대만에 남아 있는 <왕희도>에는 백제사신이 그려져 있는데 긴 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머리에는 가죽이나 배로 만들어진 관모를 쓰고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한성), 공주(웅진), 부여(사비)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그릇은 모두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세발토기는 백제의 대표적인 그릇 모양이다. 토기로 백제의 그릇을 만들며 실용적인 실생활에 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사람들은 커다란 항아리에 사람을 묻기도 했다. 이것을 독무덤이라고 한다. 독무덤은 두 개의 항아리를 마주 보게 하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다음 이음 부분을 진흙으로 발라 만든 무덤이다.

기와는 백제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무늬 대부분이 여덟 개의 연꽃잎으로 되어 있으며 한가운데는 연꽃 씨가 도드라져 있다. 기와의 원형을 탁본해 보며 백제의 생활 속 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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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근초고왕은 왜왕에게 사신과 예물을 보냈는데 문명국인 백제와 교류한 것을 하늘이 베푼 큰 은혜로 여겼음이 일본의 역사기록에 남아 있다. 이 때 일본에 보낸 칠지도 한 자루와 여러 가지 보물들은 지금까지 남아 일본에 잘 보관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철기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백제의 철기문화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백제에 온 사신이 돌아갈 때 철판 40장을 받았고 이후에도 칼과 거울을 왜에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성백제의 유적과 올림픽 공원 내의 백제부리(마을) 체험을 통해 백제의 모습은 현 시대에도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백제이야기는 백제를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살아있는 백제로서, 가까이 느껴본 백제로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