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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화 흙 털던 바위덩어리, 알고보니 국보?

吾心竹--오심죽-- 2009. 3. 30. 12:05

등산화 흙 털던 바위덩어리, 알고보니 국보?

 

 

  
▲ 단양적성. 단양휴게소의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단양적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으며 곡선을 잘 살렸다.(사적 제265호)
ⓒ 송영대
단양적성

충북 단양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조령이라는 길은 예전부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신라는 이 조령의 확보를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조령은 신라의 사활을 거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결국 조령을 확보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단양에는 여러 산성이 있다. 개중에서도 눈여겨 볼 것은 온달산성과 단양적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유명한 장군인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다.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떨어지는 단양적성은 알고 보면 온달산성의 쌍둥이 산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 모습이 매우 흡사하며, 또한 온달산성의 성벽이나 단양적성의 성벽 위에 올라서 조망하면 두 성이 서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양적성은 단양휴게소에서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단양휴게소에서 바로 단양적성이 보이고, 휴게소 측에서도 일부러 단양적성을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단양휴게소로서도 고속도로 여행 중에 잠시 쉬면서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간단한 문화재 답사를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셈으로써, 휴게소의 방문객을 늘릴 수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일석이조라고 하겠다.

 

단양적성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온달산성에 비해서는 주변지대 때문인지 낮게 느껴지지만, 규모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단양적성의 둘레는 약 900m 정도였다고 하니 오히려 온달산성보다 더 큰 규모이다.

 

단양적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렵잖다. 등산로를 만들어놓아 일반인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양적성을 올라가면서, 우리는 국사교과서에서 듣던 한 비석을 볼 수 있다. 둥글한 모양새를 지녔으면서 윗부분이 소실된 비석. 즉 단양신라적성비를 만날 수 있다.

 

등산화 흙 털던 바위덩어리, 알고보니 국보?

 

  
▲ 단양적성비. 윗부분은 지금은 소실되었다. 오랜 세월 흙에 파묻혀 있어서 글자는 잘 남아있다.(국보 제198호)
ⓒ 송영대
단양적성비

단양신라적성비는 국보 제 198호에 해당되는 귀하신 몸이다. 하지만 이 비석은 그러한 귀하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30년 전에만 하더라도 단순한 돌덩어리 취급을 받아야했다.

 

이 단양신라적성비가 발견된 것은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서이다.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단양적성을 오르다가 등산객들이 자신의 등산화를 털고 닦는 바위를 보게 된다. 다듬어진 흔적이 잘 보이던 이 비석을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흙에 파묻힌 쪽을 확인해보니 글자가 쓰여 있다는 점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단양신라적성비가 발견된 건 늦은 시간, 결국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조사단은 재빨리 근처의 나무덤불과 이파리 등으로 단양신라적성비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올라가서 이를 확인하게 되고,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단양신라적성비는 이렇게 1400여 년 동안 잊혔던 존재였다. 정확히는 신라의 통일 이후부터라고 해야겠다. 신라시대,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구려와 신라의 날선 대립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이곳은 안전한 신라의 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무리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라고 할지라도, 이 칼을 쓰고, 또 갈지 않는다면 녹이 슬기 마련이다. 평화로운 시대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단양적성은 결국 잊혀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조선시대에 이 성은 단순히 고성(古城)이라고 불리게 되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단양신라적성비는 그러한 단순한 고성에 불과했던 단양적성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단양신라적성비의 내용을 보면,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의 척경, 즉 국경 개척에 큰 공을 세우고 충성을 다했던 적성사람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겐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고 하는 국가 정책의 포고내용이 담겨있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서 활발한 영토 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신라의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던 이때, 신라는 토착민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야이차는 진흥왕의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하였고, 이를 글로써 놓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 보면 주목 할 만한 사람들이 야이차 외에 더 있다. 바로 이사부와 김무력이다. 이사부는 울릉도를 신라에 복속시키고 대가야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한 진흥왕대의 명장이다. 그리고 김무력은 가야 출신의 장군으로서 백제 성왕과의 싸움인 관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그리고 신라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되기에 그의 존재가 이곳에 보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온달산성의 쌍둥이 산성, 단양적성

 

  
▲ 단양적성. 단양적성은 온달산성과 흡사한 점이 많다. 마치 쌍둥이 산성이라는 느낌마저 줄 정도이다.
ⓒ 송영대
단양적성

단양적성은 돌로 쌓아진 성이다. 산봉우리를 감싸는 형태라고 하여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고 부른다. 좁고 긴 모습을 하고 있는 단양적성이나 온달산성의 경우 마안형(馬鞍形)이라고 하여 말의 안장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단양적성 내에는 대정(大井), 즉 큰 우물이 있다고 한다.

 

산성에는 으레 이렇게 우물이나 샘물, 그도 없으면 집수시설이라고 하여 인위적으로 물을 보관한다. 이는 적들과의 전쟁에서 물의 확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성의 규모와 그 속에 있는 이러한 집수시설의 크기와 개수에 따라 방어하는 측에서는 장기전을 갈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에서는 필수시설로서 이러한 집수시설 등이 존재하였다.

 

성벽은 곡선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돌로 촘촘하게 쌓아 올렸는데, 그 모습이 견고하다. 온달산성과 느낌은 비슷하지만 돌을 쓰는 방식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다. 온달산성은 자연석 중에서 깨진 돌을 최대한 이용함에 비하여, 단양적성은 가공한 돌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둘 다 견고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신라인들의 건축술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 수성전에 쓰였던 돌. 당시 성에서의 싸움에서 돌은 가장 유용하면서도 널리 쓰인 무기였다.
ⓒ 송영대
단양적성

성벽 한쪽에는 돌들을 여럿 모아놓았다. 다들 한손, 혹은 두 손으로 던지기 좋은 것들로서 이들은 무기로 쓰였던 것이다. 산성에서의 전투에서 가장 널리 쓰인 무기 중 하나가 바로 돌멩이이다. 행주대첩의 마지막을 장식한 게 여인들이 행주치마에 싸온 돌멩이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돌은 인류 최초의 무기이면서도 가장 널리 쓰인 것 중에서 하나이다. 이러한 돌들 중에서 특히 강돌 같이 한손에 쏙 들어가는 무기들이 산성에서 더러 보이는데, 이들이 바로 그때 전투에 쓰기 위해 모아놓은 돌들이다.

 

단양적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러한 돌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성문 쪽에 놓여있는데, 공성전에서 공격 1순위가 되는 곳이 바로 성문이다. 그러한 점 때문에 방어와 공격이 이쪽에 몰리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일부러 성문 쪽에 돌들을 많이 가져다놓은 것이라 하겠다. 단양적성의 돌들이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은 보호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양적성은 남한강에 임해있다. 이곳에서는 남한강을 바라볼 수 있기에, 그 건립목적이 바로 이쪽의 물길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백제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또한 효과적으로 견제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강의 상류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도 해석되는데, 단양적성은 그러한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마주보는 두 산성. 단양적성과 온달산성

 

  
▲ 단양적성에서 바라본 남한강. 단양적성은 남한강에 임해있어 이쪽의 수로 장악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미하게 온달산성이 보인다.
ⓒ 송영대
단양적성

단양적성에서 재미있는 것은 멀리 온달산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남한강 너머로 살펴보면 희미하게 온달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두 성 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 정도의 거리로는 봉화 등을 통하여 연락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성들은 이렇게 서로 마주볼 수 있는 거리에 있곤 하였다. 성은 행정의 거점이기도 하였지만 방어가 주목적이었다. 이러한 방어라는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성의 내구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인접한 성과의 연락이 수시로 되고, 또한 유사시 공동작전을 수행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단양적성과 온달산성은 연계하여 방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며 둘 다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서 작용하였으리라 어렵잖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단양적성의 실체를 알려 준 것은 바로 하찮게만 보였던 하나의 바위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을 보면 이런 식으로 단순히 지나쳐 버릴 만하다가 발견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 그리고 이를 쉽게 지나치지 않은 사람에 의하여 그동안 감춰지고 볼 수 없었던 역사가 다시 밝혀지곤 한다. 단순한 돌 하나라도 유심히 본다면 우리의 조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여 우리의 주위에도 잊힌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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