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삼국사기 신라본기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3:36

           삼국사기 신라본기
   

1.혁거세

 2. 남 해

 3. 유 리

 4. 탈 해

 5. 파 사

 6. 지 마

 7. 일 성

8.아달라

 9. 벌 휴

10.나 해

11.조 분

12.첨 해

13.미 추

14.유 례

15.기 림

16.흘 해

17.내 물

18.실 성

19.눌 지

20.자 비

21.소 지

22.지 증

23.법 흥

24.진 흥

25.진 지

26.진 평

27.선 덕

28.진 덕

29.무 열

30.문 무

31.신 문

32.효 소

33.성 덕

34.효 성

35.경 덕

36.혜 공

37.선 덕

38.원 성

39.소 성

40.애 장

41.헌 덕

42.흥 덕

43.희 강

44.민 애

45.신 무

46.문 성

47.헌 왕

48.경 문

49.헌 강

50.정 강

51.진 성

52.효 공

53.신 덕

54.경 명

55.경 애

56.경 순

 

 

 

 

* 왕의 호칭 1대: 거서간, 2대: 차차웅, 3~18대: 이사금, 19~22대: 마립간, 23~56대: 왕


 
1.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始祖, 朴赫居世  居西干  B.C57~5  재위기간 61년)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5년 봄 정월,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8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9년 봄 3월, 왕량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14년 여름 4월, 삼성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17년, 왕이 6부를 순행하며 위문하는 길에, 왕비 알영도 수행하였다.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24년 여름 6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32년 가을 8월 그믐 을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측근들이 간하여 이를 말리자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39년, 마한왕이 붕어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했다.
"서한왕이 이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43년, 봄 2월 그믐 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54년, 봄 2월 기유에 혜성이 하고 성좌에 나타났다.

56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59년, 가을 9월 그믐 무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60년,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 봄 3월, 거서간이 붕어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제2대 남해 차차웅 (南解 次次雄   5~24  재위기간 19년)

 

  남해 차차웅[차차웅을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충은 방언으로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혁거세의 적자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아루 부인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원년 가을 7월, 낙랑 군사가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이 측근에게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측근들이 "적은 우리 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3년, 봄 정월, 시조묘를 건립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5년, 봄 정월,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 가을 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이 우리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보고, 금성을 공격하여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 하며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6부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병이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13년, 가을 7월 그믐 무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15년,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19년,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20년, 가을, 금성이 태미 성좌에 들어 갔다.

21년, 가을 9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왕이 붕어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제3대 유리 이사금 (儒理 尼師今  24~57  재위기간 33년)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며,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한다.] 애초에 남해가 사망했을 때, 유리가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유리는 대보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왕위를 그에게 사양하였다. 탈해는 "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시험삼아 떡을 깨물어 보았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으므로 즉시 측근들과 함께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으니, 옛부터 전해오는 말이 이와 같았다. 김 대문은 "이사금은 방언이다"라고 말했다. '이사금'은 곧 '이의 자국'이란 말이다. 이전에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후에 김씨 성이 또한 흥기하였으므로, 세 성씨들 중에 나이많은 자를 선택하여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다.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5년, 겨울 11월, 왕이 국내를 순행하다가 어떤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았으나,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고 말하고,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현지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게 하고,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자들을 부양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오는 자들이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다. 이것이 노래 가사의 시작이었다.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1.이벌찬 2.이척찬(이찬이라고 도함)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소사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왕은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시 경에 끝냈다.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했는지를 심사하였으며,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길쌈을 많이 한 편에 사례하였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오락을 하였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 행사를 할 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래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

11년,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이 솟았다.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13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점령하였다.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17년, 가을 9월, 화려현·불내현의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 서쪽에서 요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19년,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31년, 봄 2월, 자미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33년,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4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붕어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제4대 탈해 이사금 (脫解 尼師今  57~80  재위기간 23년)

 

탈해 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터가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2년, 봄 정월,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 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여름 5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년,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7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년 가을 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 지진이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1년 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14년, 백제가 침범하였다.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우오가 전사하였다.

18년 가을 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2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

23년 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24년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제5대 파사 이사금 (婆娑 尼師今  80~112  재위기간 32년)

 

파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혹은 유리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이다. 그녀는 갈문왕 허루의 딸이다. 애초에 탈해가 죽었을 때 신하들은 유리의 태자 일성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성이 적자이기는 하지만 사람됨과 총명함이 파사만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이다. 파사는 절도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끼는 생활을 하였고,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주와 군을 순행하여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사형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석방토록 하였다.

3년 봄 정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나라 창고가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 졌다. 혹시라도 홍수나 가뭄 또는 변방에 변고가 생기면 이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의외의 상황에 대비토록 하라."

5년 봄 2월, 명선을 이찬으로, 윤량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고타 군주가 푸른 색의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하나의 보리 이삭에 여러 가닥이 생겨나 크게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6년 봄 정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 길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객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 갔다.

8년 가을 7월, 왕이 "내가 부덕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맡았다. 우리 나라는 서쪽으로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에 접하였으나,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였으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달에 두 곳, 즉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11년 가을 7월, 열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않거나 농토를 많이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면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토록 하였다.

14년 봄 정월, 윤량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고소부리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직접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15년 봄 2월,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 길원을 보냈다. 길원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가을 8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17년 가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18년 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 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19년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1년 가을 7월,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죽었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를 월성이라 이름지었다.
가을 7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23년 가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피었다.

25년 봄 정월,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가을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26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월, 서울에 석 자 깊이의 눈이 내렸다.

27년 봄 정월, 왕이 압독에 행차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3월에 압독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 마두성주에게 명령하여 가야를 정벌토록 하였다.

29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30년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 메뚜기 떼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붕어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제6대 지마 이사금 (祗摩 尼師今  112~134  재위기간 22년) 

지마 이사금[혹은 지미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인데, 그녀는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애초에 파사왕이 유찬 못가에 가서 사냥할 때 태자도 동행하였다. 사냥을 한 뒤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 기운이 무르익자 허루의 아내가 젊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의 부인도 역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 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말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리웠다.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3년 봄 3월 우박이 내려 보리싹이 상하였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4년 봄 2월,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9년 봄 2월,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3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0년 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대증산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렸다. 바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 온다는 헛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으며,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12년 봄 3월, 왜국과 강화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 금성 동쪽 민가가 내려 앉아 연못이 되었고, 그 곳에 연밥이 생겼다.

13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14년 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16년 가을 7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17년 가을 8월, 장성이 하늘 끝까지 뻗쳤다.
겨울 10월,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11월, 우레가 있었다.

18년,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20년 여름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물에 잠겼다.

21년 봄 2월, 궁궐 남문이 불탔다.

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왕이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제7대 일성 이사금 (逸聖 尼師今  134~154  재위기간 20년)

 

일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리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원년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정월,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근종이 일길찬이 되었다.

4년 봄 2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5년 봄 2월,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갔다. 겨울 10월,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우레가 심하게 울리자 물러갔다.

7년 봄 2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하였다.

8년 가을 9월 그믐 신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9년 가을 7월, 왕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말갈을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찬웅선이 "불가능하다"고 왕에게 말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10년 봄 2월, 궁실을 수리하였다.
여름 6월 을축에 화성이 토성을 범했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11년 봄 2월,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

13년 겨울 10월,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14년 가을 7월, 신하들에게 명하여 장수가 될만한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자를 각각 천거하게 하였다.

15년,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16년 봄 정월, 득훈을 사찬, 선충을 내마로 삼았다.
가을 8월, 혜성이 천시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7년, 여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18년 봄 2월,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3월, 우박이 내렸다.

20년 겨울 10월, 궁궐 대문에 불이 났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다.

21년 봄 2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尼師今  154~184  재위기간 30년)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성의 맏아들이다. 그는 키가 일곱 자였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얼굴 모양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이다. 그녀는 지마왕의 딸이다. 

원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에 길이 개통되었다.

4년 봄 2월,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5년 봄 3월, 죽령이 개통되었다. 왜인이 예방해왔다.

7년 여름 4월,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 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고, 바다 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9년, 왕이 사도성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를 위로하였다.

11년 봄 2월, 서울에 용이 나타났다.

12년 겨울 10월,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13년 봄 정월 초하루 신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14년 가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 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15년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17년 봄 2월, 시조묘를 중수하였다.
가을 7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였다.

18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19년 봄 정월, 구도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0년 여름 5월,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21년 봄 정월, 흙비가 내렸다.
2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31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9대 벌휴 이사금 (伐休 尼師今  184~196  재위기간 12년 )

 

벌휴[발휘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다. 그녀는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들 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2년 봄 정월,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3년 봄 정월, 왕이 주와 군을 순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여름 5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남신현에서 상서로운 벼를 진상하였다.

4년 봄 3월,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농사철에 토목 공사를 하지 않도록 하였다.
겨울 10월, 북부 지방에 큰 눈이 내려 한 장 깊이로 쌓였다.

5년 봄 2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파진찬 구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하였다.

6년 가을 7월,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5백여 명을 죽였다.

7년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였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왕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하여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였다.

8년 가을 9월, 치우기 별이 각성 성좌와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9년 봄 정월, 국량을 아찬에 임명하고, 술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월, 서울에 눈이 내렸는데 깊이가 석 자였다.
여름 5월, 홍수가 나서 산이 10여 군데 무너졌다.

10년 봄 정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한기부 여인이 한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 왜인 천여 명이 큰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

11년 여름 6월 그믐 을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1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대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붕어하였다.

 

 

제10대 나해 이사금 (奈解 尼師今  196~240  재위기간 34년)

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벌휴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다. 왕비 석씨는 조분왕의 누이이다. 왕은 용모와 풍채가 훌륭하였고 재주가 뛰어났다. 전 임금의 태자 골정과 둘째 아들 이매가 먼저 죽고 장손이 아직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나해 이사금이다. 이 해에 봄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던 날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즐거워 하며 경축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3년 여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수재를 당한 주와 현에 1년의 세금을 면제하였고, 가을 7월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4년 가을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5년 가을 7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6년 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3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자,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였다.

8년 겨울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0년 봄 2월, 진충을 일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12년 봄 정월, 왕의 아들 이음[혹은 나음이라고도 한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13년 봄 2월, 왕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4년 가을 7월,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일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16년, 봄 정월에 훤견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17년 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여름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19년 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가을 7월, 백제가 서쪽 지방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들은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겨울 12월, 우레가 있었다.

23년 가을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하였다.

25년 봄 3월,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27년 여름 4월,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달에 다시 살아났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 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하였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9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전투를 하였다. 그는 봉산 아래에서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였다.
8월, 봉산성을 쌓았다.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32년 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34년 여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0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35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1대 조분 이사금 (助賁 尼師今  230~247  재위기간 17년)

조분 이사금[제분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이 석씨이고,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갈문왕 골정[홀쟁이라고도 한다.]이다. 어머니는 김씨 옥모부인이다. 그녀는 갈문왕 구도의 딸이다. 왕비는 아이혜부인이다. 그녀는 나해왕의 딸이다. 전 임금이 죽음을 앞두고, 사위 조분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왕은 키가 크며 외모가 훌륭하고, 일이 생기면 명석한 판단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원년, 연충을 이찬에 임명하여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7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2년 가을 7월,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여 승리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3년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자 정예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4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기와가 날았다.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다. 그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6년 봄 정월, 왕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백성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7년 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왔다. 왕은 그들에게 집과 밭을 주어 편안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8년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11년,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3년 가을, 큰 풍년이 들었다. 고타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15년 봄 정월, 이찬 우로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16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수비하였다. 그 날 밤 날씨가 몹시 추워지자,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직접 장작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하여 주었다. 사졸들이 진심으로 감격하였다.

17년 겨울 10월, 동남방에 흰 기운이 한 필의 명주를 펴놓은 것처럼 뻗쳤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18년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2대 첨해 이사금 (沾解 尼師今  247~262  재위기간 15년 )

 

첨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왕의 동복 아우이다.

원년 가을 7월, 왕이 시조묘를 참배하였다. 그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했다.
저자의 견해 : 한 나라 선제가 즉위했을 때, 유사가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대를 잇는 자는, 자기에게 대를 물려준 그 사람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친부모를 낮추어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이는 황제의 조상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황제께서는 생부를 친(親)이라 부르시고, 시호는 도(悼)라 하며, 생모는 도후(悼后)라고 불러서, 제후나 왕의 지위와 같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경전의 뜻과 합치된다. 따라서 이것이 만세의 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한의 광무제와 송나라 영종은 이를 본받아 시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왕의 친족 신분으로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신의 생부를 왕으로 추봉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한 일도 있었다. 이는 예에 맞지 않으므로 절대로 법도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2년 봄 정월,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3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가을 7월, 남당[도당이라고도 한다.]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양부를 이찬에 임명하였다.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한기부 사람 부도란 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첨하는 일이 없고 글씨와 산수에 능하여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를 맡겼다.

7년 여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서는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조묘와 명산에 제사지내고 기원하였다. 곧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이 생겼다.

9년 가을 9월, 백제가 침범하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10년 봄 3월,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다. 그 길이는 세 발, 폭은 한 길 두 자였다.
겨울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13년 가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생겼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14년, 여름에 큰 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다.
가을 7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혜성은 25일만에 사라졌다.

15년 봄 2월,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2월 28일, 갑자기 병이 나서 왕이 붕어하였다.

 

 

제13대 미추 이사금 (味鄒 尼師今  262~283  재위기간 21년)

 

미추 이사금[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다. 그녀는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다. 그녀는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원년 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2년 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3년 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5년 가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11년 봄 2월,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피해를 주었다.
겨울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15년 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17년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9년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였다.

20년 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가을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22년 가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겨울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23년 봄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대릉[죽장릉이라고도 한다.]에 장사지냈다.

 

 

제14대 유례 이사금 (儒禮 尼師今  283~298  재위기간 15년)

유례 이사금[고기에는 제 3대, 제 14대의 두 왕의 이름을 똑같이 유리 혹은 유례라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씨이고, 갈문왕 나음의 딸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임신이 되었다. 유례를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2월, 이찬 홍권을 서불한에 임명하고 중요한 정무를 맡겼다.

3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4년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6년 여름 5월, 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

7년 여름 5월,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8년 봄 정월, 말구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았다. 왕은 자주 그를 찾아가서 정사의 요령을 물었다.

9년 여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날씨가 가물었다.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10년 봄 2월,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의 호민 80여 호를 옮겨 살도록 하였다.

11년, 여름에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12년, 봄에 왕이 신하에게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서불한 홍권이 "우리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모험삼아 원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 밖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백제는 사술이 많고, 항상 우리 나라를 병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옳다"고 말하였다.

14년, 봄 정월, 지량을 이찬에, 장흔을 일길찬에, 순선을 사찬에 임명하였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우리 나라가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이를 방어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았는데 우리 군사와 함께 적군을 쳐부수고 난 후에는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수만 개의 댓잎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우셨다"고 말하였다.

15년 봄 2월, 서울에 안개가 심하여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안개는 닷새 만에 개었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5대 기림 이사금 (基臨 尼師今  298~310  재위기간 12년)

 

기림[기립이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걸숙 이찬이다.[걸숙은 조분의 손자라고도 한다.] 그는 성격이 관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2년 봄 정월, 장흔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정월, 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2월, 왕이 비열홀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자와 가난한 자를 직접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

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7년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샘물이 솟아 올랐다.
9월, 서울에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0년, 국호를 다시 신라로 하였다.

13년 여름 5월, 왕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6대 흘해 이사금 (訖解 尼師今  310~356  재위기간 46년)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해왕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 때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라 하고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2년 봄 정월에 급리를 아찬으로 삼아 중요한 정사를 맡기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3년 봄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4년 가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특사를 보내 그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5년 봄 정월, 아찬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많이 석방하였다.

9년 봄 2월에 왕이 "지난 해에는 가뭄으로 농사가 잘 되지 못하였다. 이제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돌아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백성들을 노역시키는 일을 모두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1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28년 봄 2월 사신을 보내 백제를 예방하였다.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35년 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대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

36년 봄 정월, 강세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2월, 왜왕이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37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39년, 대궐 우물이 솟아 넘쳤다.

41년 봄 3월, 황새가 월성 모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여름 4월, 큰 비가 열흘 동안 내려 평지에 물이 서너 자씩 고이고, 관가와 민가가 유실되거나 물에 잠기고, 산이 열 세 군데 무너졌다.

47년 여름 4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7대 내물 이사금 (奈勿 尼師今  356~402  재위기간 46년)

 

내물[나밀이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 각간이며,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므로 내물이 그 뒤를 이었다.[말구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다.]
저자의 견해 : 부인을 얻을 때, 같은 성의 여인을 얻지 않는 것은 동성과 타성의 구별을 철저히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 사패와 정 자산은, 노공이 오나라 왕실에서 아내를 얻고, 진후가 성이 같은 네 명의 첩을 가진 것을 몹시 비방하였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이나, 고종, 이종 누이들까지도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과 우리 나라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예법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오랑캐들이 어미나 자식을 간음하는 것은 또한 이보다도 더욱 심한 경우이다.

2년 봄에 왕이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그들에게 각각 곡식 3곡 씩을 주었다. 특별히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자들에게는 직위를 한 급씩 주었다.

3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보랏빛 구름이 묘당 위에 감돌고 신기한 새가 시조묘의 뜰에 모였다.

7년 여름 4월, 시조묘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맞붙어 하나가 되었다.

9년 여름 4월,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다.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11년 봄 3월, 백제인이 와서 예방하였다.
여름 4월, 큰 홍수가 나서, 산이 열 세 군데 무너졌다.

13년 봄,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바쳤다.

17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자가 많이 생기자 왕은 특사를 보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8년,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 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은 "두 나라가 화목하여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왕은 우리 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왕은 "백성이란 항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왕이 그들을 돌보아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나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대왕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라고 대답하였다.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여름 5월, 서울에 비가 왔는데 물고기가 빗속에 섞여 떨어졌다.

21년 가을 7월, 부사군에서 뿔이 하나인 사슴을 진상하였다. 대풍년이 들었다.

24년 여름 4월, 양산에서 뱁새가 황새를 낳았다.

26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위두를 부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다.
"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했다.
"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 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33년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6월에 또 지진이 있었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았다.

34년 봄 정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월, 흙비가 내렸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겼다.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37년 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왔다.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38년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40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보내 실직 평야에서 그들을 대파하였다.

42년 가을 7월, 북쪽 변방 하슬라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 지방의 죄수를 특사하고, 1년 간의 세금을 면제하여 주었다.

44년 가을 7월, 날아 다니는 메뚜기 떼가 들을 뒤덮었다.

45년 가을 8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겨울 10월, 왕이 타고 다니던 궁중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

4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47년 봄 2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8대 실성 이사금 (實聖尼師今  402~417  재위기간 15년)

 

실성 이사금 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붕어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년 3월,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2년 봄 정월,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4년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5년 가을 7월, 서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6년 봄 3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여름 6월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백 명을 잡아갔다.

7년 봄 2월,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 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황차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 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11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12년 가을 8월, 낭산에 구름이 피어올라 누각처럼 보였고, 향기가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복스러운 땅이라고 하여, 그후로 이 곳에서 벌목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평양주 대교를 새로 축성하였다.

14년 가을 7월, 왕이 혈성 벌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또한 금성 남문에 행차하여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15년 봄 3월, 동해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고 수레에 가득 찰 만큼 컸다.
여름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세 길 높이로 솟아 올랐다.

16년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9대 눌지 마립간 (訥祗 麻立干  417~458  재위기간 41년)

 

눌지 마립간[김 대문은 "'마립'은 방언으로는 '말뚝'인데, 말뚝은 곧 함조를 뜻한다. 이는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즉, 왕 말뚝이 중심이 되고 신하 말뚝은 그 아래에 나열한다. 이를 빌어와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반부인[내례길포라고도 한다.]이며, 미추왕의 딸이다.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고나서 내물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 그는 내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와 은밀히 그에게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눌지를 가게하여 도중에서 그와 마주치도록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가 쾌활하고 정신이 고상하여 군자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참배하였다.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에서 내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왔다.

3년 여름 4월, 우곡에서 물이 솟아 올랐다.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심하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고 백성이 굶주려 자손을 파는 자가 있었다. 죄수를 재심사하여 석방하였다.

7년 여름 4월, 남당에서 노인들을 대접하였는데, 왕이 직접 음식을 집어 주고, 곡식과 비단을 등급에 따라 하사하였다.

8년 봄 2월,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하였다.

13년, 새로 시제를 축성하였는데, 둑의 길이가 2천1백7십보였다.

15년 여름 4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었다.

16년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소나무 껍질을 먹었다.

17년 여름 5월, 미사흔이 사망하자 그에게 서불한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으므로 이에 응하였다.

18년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왔다.
가을 9월, 백제왕이 다시 흰 매를 보내 왔다.
겨울 10월, 왕이 황금과 명주로 백제에 답례하였다.

19년 봄 정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 역대의 능원을 보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20년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22년 여름 4월, 우두군에서 산골물이 갑자기 불어나 50여 호가 떠내려 갔다. 서울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백성들에게 우차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24년,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25년 봄 2월, 사물현에서 흰빛깔의 꼬리가 긴 꿩을 진상하였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 현의 관리에게 곡식을 하사하였다.

28년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하였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34년 가을 7월,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 벌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군사를 보내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분노하여 사신을 보내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였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그들이 돌아갔다.

36년 가을 7월, 대산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3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이리떼가 시림에 들어 왔다.

38년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9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41년 봄 2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상하게 하였다.

42년 봄 2월, 지진이 발생하여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20대 자비 마립간 (慈悲 麻立干  458~479  재위기간 21년)

 

자비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눌지왕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이며, 실성왕의 딸이다.

2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여름 4월,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이어서 월성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왕성이 무너지지 않자 적은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군사를 보내 적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하였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4년 봄 2월, 왕이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다.

5년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6년 봄 2월,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벌지와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하였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은 변경의 두 곳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8년 여름 4월, 홍수가 나서 산이 열 일곱 군데 무너졌다.
5월, 사벌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10년 봄, 유사에게 명하여 전함을 수리하였다.
가을 9월, 하늘에 붉은 빛이 돌았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갔다.

11년 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 하슬라 사람으로서 15세 이상되는 자를 징발하여 니하[니하를 니천이라고도 한다.]에 성을 쌓았다.

12년 봄 정월, 서울의 방과 리의 이름을 정하였다.
여름 4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 가고 허물어졌다.
가을 7월, 왕이 수해를 당한 주와 군을 순행하여 위문하였다.

13년, 삼년산성[삼년이란 공사를 시작한지 삼년만에 끝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을 쌓았다.

14년 봄 2월, 모로성을 쌓았다.
3월,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갈라진 틈이 2장이고 혼탁한 물이 솟아 올랐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6년 봄 정월,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 장군에 임명하였다.
가을 7월, 명활성을 보수하였다.

17년, 일모·사시·광석·답달·구례·좌라 등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 고구려왕 거련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 경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어 구원토록 했는데,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었고 또한 경이 죽었다.

18년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19년 여름 6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그들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20년 여름 5월,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다섯 길로 들어와 침범했으나 결국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21년 봄 2월, 밤에 붉은 빛이 땅에서 하늘까지 뻗쳤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22년 봄 2월 3일, 왕이 붕어하였다.

 

 

제21대 소지 마립간 (炤知 麻立干  479~500  재위기간 21년)

 

소지[비처라고도 한다.]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며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는 선혜부인이며 내숙 이벌찬의 딸이다. 소지는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원년,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모든 관리들에게 벼슬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2년 봄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5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11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2월, 왕이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문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3월,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및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였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그들을 니하 서쪽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4년 봄 2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금성 남문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여름 4월, 오랫 동안 비가 내렸다. 왕이 중앙과 지방의 유사들에게 명령하여 죄수를 재심사하도록 하였다.
5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5년 여름 4월, 큰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났다.
겨울 10월, 왕이 일선 지방에 행차하여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의 정도에 따라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11월, 우레가 있었다.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6년 봄 정월, 오함을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3월, 토성이 달을 범하고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리 군사와 백제 군사가 모산성 아래에서 함께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7년 봄 2월, 구벌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묘지기 20호를 더 두었다.
5월, 백제가 예방해왔다.

8년 봄 정월,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일선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의 두 성을 개축하였다.
2월, 내숙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 낭산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는 큰 행사를 벌였다.

9년 봄 2월, 내을에 신궁을 설치하였다. 내을은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이다.
3월,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월성을 수리하였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10년 봄 정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
2월, 왕이 일선군에 행차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왕이 일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중의 주와 군의 죄수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여름 6월, 동양 지방에서 여섯 개의 눈을 가진 거북을 헌납하였다. 그 거북의 배에 글자가 있었다.
가을 7월, 도나성을 쌓았다.

11년 봄 정월,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농촌으로 돌려 보냈다.
가을 9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과현에 이르렀고, 겨울 10월에는 호산성을 점령하였다.

12년 봄 2월, 비라성을 다시 쌓았다.
3월, 추라정에 용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1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먹는 음식을 줄이도록 하였다.

15년 봄 3월,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 왕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
가을 7월, 임해, 장령의 두 진(鎭)을 설치하여 왜적을 방비하였다.

16년 여름 4월,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 벌에서 고구려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견아성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가 그들을 포위했다. 백제왕 모대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그들을 구원하였다.

17년 봄 정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궤멸하였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였다.

18년 봄 2월, 가야국이 꼬리의 길이가 다섯 자인 흰 꿩을 보내 왔다.
3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큰 비가 내리고 알천의 물이 불어 2백여 호가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가을 7월,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장군 실죽이 출동하여 니하에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8월, 왕이 남쪽 교외에 나가 농사를 시찰하였다.

19년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왕이 모든 관리들에게 명하여 지방관이 될만한 능력이 있는 자를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였다.
8월,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 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22대 지증 마립간 (智證 麻立干  500~514  재위기간 14년)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이다.[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라고도 한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 아우가 된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며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이며 등흔 이찬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 전 임금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왕 가운데 거서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이며, 차차웅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 이사금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열 여섯,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넷이다. 신라 말년의 명유 최 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이들을 모두 왕이라고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용어가 천박하여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길 것인가? [좌전]과 [한서]는 중국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오히려 초나라 용어인 '곡오도( 於 )'와 흉노 용어인 '탱리고도(撑梨孤塗)'라는 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제 신라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방언을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3년 봄 3월, 순장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순장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주주와 군주에게 일일이 명령하여 농사를 권장토록 하였다.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4년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한 채 사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는 신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를 살펴보면, 모두 '제(帝)'나 '왕'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방언으로 왕호를 삼았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이를 따랐다.

5년 여름 4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였다.
가을 9월, 일할 사람을 징발하여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의 열두 개 성을 쌓았다.

6년 봄 2월, 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겨울 11월, 처음으로 소관 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또한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 하였다.

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0년 봄 정월, 서울에 동시장을 설치하였다.
3월, 나무 울타리와 함정을 만들어 맹수의 피해를 없애도록 하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11년 여름 5월,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쓰러지고 사람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13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15년 봄 정월,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하여, 이 곳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제23대 법흥왕 (法興王  514~540  재위기간 26년 )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책부원귀]에는 성이 '모'이며, 이름은 '태'라고 되어 있다.]이며,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연제부인이다. 그의 왕비는 박씨이며 보도부인이다. 왕은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양산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다.

4년 여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5년 봄 2월, 주산성을 쌓았다.

7년 봄 정월, 법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하였다. 붉은 빛과 자줏빛으로 등급을 표시하였다.

9년 봄 3월,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

11년 가을 9월, 왕이 남쪽 국경을 순행하면서 국토를 개척하였다. 가야국왕이 와서 회견하였다.

12년 봄 2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임명하였다.

15년, 처음으로 불법이 시행 되었다. 처음 눌지왕 때, 중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왔었다. 그 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를 편히 모셨다. 이 때 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주었으나 임금이나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관리에게 향을 주어 여러 곳을 다니며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말해주면서 "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피어나고, 그 정성이 신성한 곳에 이르게 되오. 소위 신성이란 3보(三寶)를 일컫는 것이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요, 세째는 승가(僧伽)라오. 만일 이것을 태우며 원하는 바를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그 때 왕의 딸이 병으로 위독했었다.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태우며 서원하게 하였다. 왕녀의 병이 치유되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묵호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물러 나와 모례를 보고 예물을 주면서 "나는 지금 갈 데가 있어 작별코자 한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 때가 되어 아도['阿道'를 '我道'로 쓰기도 한다.] 화상이라는 사람이 시자 세 사람과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그는 몇 년 동안 살다가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그의 시자 세 사람이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가끔 불법을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 때에 이르러 왕도 역시 불교를 흥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않고 반대가 많았으므로 왕도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근신 이 차돈이[혹은 처도라고도 한다.] 왕에게 "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분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소서"라고 말했다. 왕은 "본래 불도를 흥하게 하려는 것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차돈은 "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요즈음 중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차돈은 홀로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하여 이를 꺾지 못하겠고,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형리로 하여금 그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의 영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이 기록은 김 대문의 [계림잡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한내마 김 용행이 지은 아도 화상비의 기록과는 현격하게 다르다.]

16년,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18년 봄 3월, 유사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 이찬 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벼슬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19년, 금관국주 김 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21년, 상대등 철부가 사망하였다.

23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 원년이라고 하였다.

25년 봄 정월, 외관들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해도 좋다는 교서를 내렸다.

27년 가을 7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제24대 진흥왕 (眞興王  540~576  재위기간 36년)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이다.[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 이 때 그의 나이 일곱살이었다. 그는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부인이며 법흥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원년 8월, 대사령을 내렸다. 문무관들에게 작위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2년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5년 봄 2월, 흥륜사가 준공되었다.
3월, 출가하여 중이 되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다.

6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9년 봄 2월,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은 장군 주령을 보냈다. 주령은 정병 3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주령은 포로를 많이 잡아 왔으며 죽인 자도 매우 많았다.

10년 봄, 양 나라가 사신과 유학승 각덕 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내 왔다. 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11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12년 봄 정월,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
3월, 왕이 순행 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초청하였다. 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에 앞서 가야국의 가실왕이 열 두 달을 음률로 상징하는 12현금을 만들고,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었다.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 나라로 귀순해왔었다.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고 하였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13년,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고는, "전일 낭성에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며, 후하게 상을 주었다.

14년 봄 2월, 왕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궁궐을 고쳐 절을 짓고,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백제 제27대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16년 봄 정월, 비사벌에 완산주를 신설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와 교서를 내려, 순행했던 주와 군에 1년 간의 납세를 면제해주고, 해당 지방 죄수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17년 가을 7월,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 사찬 성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18년,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 사찬 기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신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19년 봄 2월,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사하게하여 국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내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바쳤으므로, 이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

23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모반하였다.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26년 가을 8월, 아찬 춘부로 하여금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진 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중 명관을 보내와 예방하고, 불경 1천7백여 권을 보내 왔다.

27년 봄 2월, 지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준공되었다.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황룡사가 준공되었다.

29년,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설치하였다.

33년 봄 정월, 연호를 홍제로 고쳤다.
3월, 왕태자 동륜이 사망하였다.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사졸을 위하여, 지방에 있는 절에서 팔관 연회를 열어 7일 만에 끝냈다.

35년 봄 3월, 황룡사의 장륙상의 주조가 끝났다. 구리의 중량이 3만 5천7근이었으며, 도금한 금의 중량이 1만 1백9십8푼이었다.

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황룡사의 장륙상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발꿈치까지 내려왔다.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제도를 두었다.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 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선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였다.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에 그녀를 끌어 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였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 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 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집밖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의 일에 처하며, 不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 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홍 법사가 수 나라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서역의 중 비마라 등 두 명의 중과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가을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독실하게 불도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와서는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며 생애를 마쳤다. 왕비도 역시 이를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제25대 진지왕(眞智王  576~579  재위기간 3년)

 

진지왕(眞智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사륜[혹은 금륜이라고도 한다.]이며,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이다.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

원년,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국사를 맡겼다.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군을 침범하자, 이찬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세종은 일선 북쪽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3천7백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을 쌓았다.

3년 가을 7월, 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의 알야산성을 점령하였다.

4년 봄 2월,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산산성·마지현성·내리서성의 통로를 막았다.
가을 7월 17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제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  재위기간 53년 )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백정이며, 진흥왕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만내라고도 한다.]부인이며, 갈문왕 입종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이며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하였다.

원년 8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왕의 어머니의 동생인 백반을 진정 갈문왕에 봉하고, 국반을 진안 갈문왕에 봉했다.

2년 봄 2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3년 봄 정월,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지금의 이부(吏部)와 같다.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선부서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 각 한 명씩을 두었다.

6년 봄 2월, 연호를 건복으로 고쳤다.
3월, 조부령 한 명을 두어 납세와 부역에 관한 사무를 관창케하고, 승부령 한 명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7년 봄 3월, 가뭄이 들자 왕이 정전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를 직접 재심사하였다.
가을 7월, 고승 지명이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진 나라에 갔다.

8년 봄 정월, 예부령 두 명을 두었다.
여름 5월, 뇌성과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9년 가을 7월,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세는 내물왕의 7대손이며, 이찬 동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는 담수라는 중과 사귀면서 말했다. "신라 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의 고기가 산림의 크기를 모르고, 새장의 새가 바다의 넓음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 나라 월 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을 것이며,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천하의 신기한 노름이요,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다. 그는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다. 그는 곧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연못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자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구칠은 불끈 성을 내며 "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라고 말하였다.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만한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다. 구칠은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어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10년 겨울 12월,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11년 봄 3월, 원광 법사가 진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였다.
가을 7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다. 유실된 인가가 3만 3백6십호, 사망자가 2백여 명이었다. 왕이 사자를 보내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3년 봄 2월, 영객부령 두 명을 두었다.
가을 7월, 남산성을 쌓았다. 그 둘레가 2천8백5십4보였다.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개축하였다.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16년, 수 나라 황제가 조서를 주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배수하였다.

18년 봄 3월, 고승 담육이 수 나라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였다.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영흥사에 화자가 발생하여 3백50호가 연이어 불에 탔다. 왕이 직접 나가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19년, 삼랑사가 낙성되었다.

22년, 고승 원광이 조빙사 내마 제문과 대사 횡천을 따라 돌아왔다.

24년, 대내마 상군을 사신으로 수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병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9월, 고승 지명이 수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왕이 지명공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25년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범하였다. 왕이 직접 군사 1만을 이끌고 나아가 그들을 물리쳤다.

26년 가을 7월, 남천주를 없애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27년 봄 3월, 고승 담육이 수 나라에 사절로 갔던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30년, 왕은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 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왕은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요구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곧 글을 지어 올렸다.
2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점령하였다.

31년 봄 정월, 모지악 아래 땅에 불이 났다. 불탄자리의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다. 불은 10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꺼졌다.

33년, 왕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바쳤다. 수 양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군사를 동원한 사실은 [고구려기]에 실려 있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가잠성을 백일 동안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이 굳게 수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성은 함락되었다.

35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수 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를 초청하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36년 봄 2월, 사벌주를 폐지한 후 일선주를 설치하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훼손되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가 사망하였다.

37년 봄 2월, 왕이 큰 연회를 사흘 동안 베풀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38년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40년,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이에 종군하여 적과 만나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43년 가을 7월,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 단을 보내왔다.

44년 봄 정월, 왕이 직접 황룡사에 갔다.
2월,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즉위 7년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동시에 관창하게 한 것이다.

45년 봄 정월, 병부 대감 두 명을 두었다.
겨울 10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46년 봄 정월, 시위부 대감 6명과 상사서 대정 1명과 대도서 대정 1명을 두었다.
3월,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우리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가 봉잠·앵잠·기현 3성의 군사를 합하여 굳게 지키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47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48년 가을 7월, 당 고조가 주자사를 보내 고구려와 화친할 것을 권하였다.
8월,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였다. 주재성 성주 동소가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을 쌓았다.

49년 봄 3월,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다. 이러한 날씨가 닷새 동안 계속되었다.
가을 7월,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2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50년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를 파는 일이 있었다.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52년, 큰 대궐 뜰의 땅이 갈라졌다.

53년 봄 2월, 흰 개가 대궐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
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명을 바쳤다. 그러나 위징은 이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저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추운 고통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황차 가족을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의 처지야 어떻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 보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로 들어갔다. 토성이 달을 범했다.

54년 봄 정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보 벼슬을 추증하고, 비단 2백 필을 부조하였다.[고기에는 '정관 6년 임진봄 정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와 [자리통감]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틀린 것이 아닐까?]



제27대 선덕왕(善德王  632~647  재위기간 15년)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 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덕만은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 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원년 2월,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자 비가 왔다.
겨울 10월, 특사를 보내 국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하였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정월,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분황사가 낙성되었다.
3월, 크기가 밤알 정도 되는 우박이 내렸다.

4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가 낙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5년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왕에게 병환이 났으나 약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강의하고, 중 1백 명에게 도첩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 있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자장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6년 봄 정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7년 봄 3월, 칠중성 남쪽에 있던 큰 돌이 저절로 35보 거리를 이동하였다.
가을 9월, 노랑 색의 꽃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하였다. 백성들이 놀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안심시켜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8년 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만들었다. 사찬 진주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붉게 변하고 더워져서 고기가 죽었다.

9년 여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태종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학관으로 임명하고, 국자감에 자주 가서 그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으며, 학생들 가운데 [예기]나 [춘추좌씨전] 가운데 한 가지 이상 능통한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고, 학사 1천 2백 간을 증축하고, 학생을 3천 2백 60명으로 증원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서울로 모였다. 이 때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11년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 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 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 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12년 3월, 당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폐국을 침공하여 수십개의 성이 누차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들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필히 빼앗고자, 이번 9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사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오니, 일부의 군대라도 빌려 주어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가 두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 진실로 애통하다. 그렇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있다. 이는 너희 나라를 빼앗고 너희 나라를 나누어 갖자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는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사신이 말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말갈과 함께 곧장 요동을 치면, 너희 나라에 대한 포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군사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을 것을 그들이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다. 이리되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지고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 나라에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 벌을 주고, 고구려 백제의 두 나라 군사가 올 때 이것을 벌려 세워 놓아라. 그리하면 저들은 이를 우리 나라 군대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주할 것이다. 이것이 두번 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한 요새를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은 채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바로 그 나라를 습격할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번 째 계책이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아라."
사신은 다만 "예"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군사를 요청하고 급한 상황을 호소할 만한 인재가 못됨을 개탄하였다.

1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주어 고구려에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너희 나라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곧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만약 또 다시 신라를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는 틀림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너희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개소문은 현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빠진지 이미 오래이다. 과거 수 나라가 침범하였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여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은 "지나간 일을 어찌 따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개소문은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14년 봄 정월,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도모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 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
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제28대 진덕왕(眞德王  647~654  재위기간 7년)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승만이며,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 국반[국분이라고도 한다.]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었고, 팔을 늘이고 있으면 그 길이가 무릎을 넘었다.

원년 봄 정월 17일, 비담을 목베어 처벌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임명하였다. 당 태종이 지절사를 보내 전왕을 광록대부로 추증했다. 그리고 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8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나고, 또한 별 무리가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의 3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하였다. 그들은 악전고투로 기운이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와 그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가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용감하게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2년, 봄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요거 등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이를 걱정하여 압독주 도독 유신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신이 군사들을 격려하여 작전을 시작하려 하자 의직이 저항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주하였다. 유신은 도망가는 백제 군사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왕이 기뻐하면서 군사들에게 공훈에 따라 상을 주었다.
겨울, 감질허를 당 나라에 보내 조회하도록 하였다. 태종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를 사용하는가?" 질허는 "일찌기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였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이 이를 수긍하였다. 이찬 김 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조회케 하였다. 태종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 맞이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태종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늠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는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 및 진사비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를 주었다. 태종이 하루는 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락하였다. 춘추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이에 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춘추와 수행원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춘추를 특진에, 문왕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하였다. 춘추가 귀국할 때, 태종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춘추는 황제에게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태종은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 (원문 2자 결자)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춘추가 귀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춘추의 시종인 온 군해가 큰 모자를 쓰고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은 그를 춘추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3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왕은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백제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 밑에 진을 쳤다. 유신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정탐을 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모르는 체 하고, 절대로 누구인가를 묻지 말라!" 유신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중을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결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온 후에 결전을 하겠다."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증원병이 온다고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진격하여 적을 크게 쳐부수고, 장령 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졸 8천 9백 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만필을 얻었다. 노획한 병기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4년 여름 4월,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현직에 있는 자는 상아홀(笏)을 들게 하였다.
6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이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은 비단에 5언시 태평송을 써서, 이를 춘추의 아들 법민으로 하여금 당 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질음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
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 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였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2월,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로 임명하여 기밀 사무를 관창하게 하였다.(원문 3자 결자) 파진찬 김 인문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이어서 숙위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를 좌리 방부령으로 삼았다.
3월,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왕궁의 남문이 이유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대상승 장문수를 사절로 삼아,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조문케하였으며, 왕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부의로 주었다.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대 왕을 성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이라고 불렀다. 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  재위기간 7년)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춘추이며,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니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이며 각찬 서현의 딸이다. 왕은 풍모가 영명하고 당당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그는 진덕왕을 섬겨 이찬의 직위를 지냈으며, 당 나라 황제가 특진을 제수하였다. 진덕왕이 붕어하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알천은 굳이 사양하며 "나는 늙었고 이렇다 할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원년 여름 4월, 작고한 왕의 부친을 문흥대왕, 어머니를 문정 태후로 추증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렸다.
5월, 이방부령 양수 등으로 하여금 법령을 상세히 검토하게 하여 이방부의 법령 60여 조를 정리 보완하였다. 당 나라에서 지절사를 보내와 예절을 갖추어 왕을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2년 봄 정월,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3개소의 성을 빼앗았다. 왕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3월에 당 나라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우고, 서자인 문왕을 이찬, 노차를 해찬, 인태를 각찬,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진상하였다. 그 돼지의 머리는 하나, 몸체는 둘, 발이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월성 안에 고루를 세웠다.

3년, 김 인문이 당 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로 임명하여 장산성의 축조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아들 우무위 장군 문왕으로 하여금 당 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다.

4년 가을 7월, 일선군에 큰 홍수가 났다. 이 홍수로 3백여 명이 익사하였다. 동쪽 토함산에서 땅에 불이 났다. 그 불은 3년이 지난 후에야 꺼졌다. 흥륜사의 대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원문 3자 결자) 북쪽의 바위가 산산이 무너져 쌀로 변했다. 그 쌀을 먹어 보니 창고의 묵은 쌀과 같았다.

5년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 이찬으로 바꾸고, 문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왕이, 하슬라는 지역적으로 말갈과 연이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경을 폐지하여 주로 만들고, 도독을 두어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실직을 북진으로 만들었다.

6년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 아찬 진주를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 공주 기군강에서 큰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그 고기의 길이가 1백 자였는데, 이를 먹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겨울 10월, 왕이 조정에 앉아서, 당 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한 회보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다. 그는 선대의 신하 장춘과 파랑 같아 보였다. 그는 "제가 비록 몸은 백골로 변하였으나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기에, 어제 당 나라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서 당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내년 5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치도록 명령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므로 미리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 두 집안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곧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한산주에 장의사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7년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 김 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 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 장군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칙명을 내려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춘을 순이라고도 한다.]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벌로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하였다. 그러자 장군 흠순이 그의 아들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굴이 대답하기를 "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곧 적진으로 달려 들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관장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나이 겨우 열 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관창은 "예!"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 자루를 들고 적진에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적군에게 생포되어 계백 앞에 서게 되었다.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계백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관창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빨을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관창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나아가 힘차게 싸웠다. 계백은 그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그는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삼군의 군사들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하였으며,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날 정방이 부총관 김 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와 마주쳤다. 그는 백제병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유신 등이 당 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 문영['潁'을 '永'으로도 쓴다.]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로 하여금 글을 당 나라 장군에게 보내 철군할 것을 애걸하였다. 12일, 당과 신라 군사가 (원문 3자 결자)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기 위하여 소부리 벌로 진격하였다. 정방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진격하지 않았다. 유신이 이를 달래어 신라와 당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방향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음식과 많은 선물을 보냈으나 정방은 이를 받지 않았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방은 이를 뿌리쳤다. 13일,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의자왕의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융은 땅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8일, 의자는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하여, 제감 천복을 보내 당 나라에 전공을 보고하였다.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청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의자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에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참수하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가서 대야성의 금일과 공모하여 신라의 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므로 참수한 것이다. 또한 금일을 잡아 죄를 일일이 따져가며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함께 공모하여, 백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창고를 불질러 없앴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 식량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를 당하였다. 이것이 첫번 째 죄이다. 네가 품석의 부처를 협박하여 죽였으니, 이것이 두번 째 죄이다. 네가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번 째 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지를 찟고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적병이 남잠, 정현(원문 3자 결자)성에 웅거하였다.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 산에 진을 치고, 당과 신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26일, 임존의 대책을 공격했으나, 적병이 많고 지세가 험준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소책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진을 쳤다.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가 군사 7천명으로 그를 도왔다. 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배에 태우고 사비로부터 당 나라로 돌아갔다. 김 인문이 사찬 유 돈, 대내마 중지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23일, 백제의 잔적들이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사람들을 약탈하려 했다. 유수 유인원이 당 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출동시켜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의 남령에 올라가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주둔하면서 기회를 노려 성읍을 약탈하였다. 백제의 20여 성이 신라를 배반하고,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여 보냈다. 28일, 문도가 삼년산성에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당 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후, 문도가 황제의 선물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문도의 시종들이 대신하여 의식을 마무리 하였다.
10월 9일, 왕이 태자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례성을 공격하였다. 18일, 그 성을 점령하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 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 사비 남령군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5일,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7일 만에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7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을 논하여, 계금의 군졸 선복을 급찬,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관직을 주었다. 백제 사람도 재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임용하였다.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위품과 총관의 직위를 주었으며, 은솔 무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대감의 관직을 주었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제감의 관직을 주었다.

8년 봄 2월, 백제의 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으로 임명하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또한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고, 아찬 진왕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 무훌 욱천 등을 남천 대감, 문품을 서당 장군, 의광을 낭당 장군으로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중도에 이르자 품일이 자기 군사의 일부를 나누어 두량윤['윤'을 '이'라고도 한다.]성 남쪽에 먼저 가서 진지를 만들 곳을 살펴 보도록 하였다. 백제 사람들은 우리 진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급습을 해왔다. 우리 군사들이 놀라 패주하였다. 12일, 대군이 고사비성 밖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철수하면서 대당과 서당을 먼저 보내고, 하주의 군사를 뒤따라 오게 하였다. 그들이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사망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상당히 많이 잃었다. 상주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나 공격하여 승리하고, 마침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은 군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제사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가시혜진에 도착했을 때, 적군이 가소천까지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다.
5월 9일[11일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군사를 합쳐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포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보냈다. 그 돌에 맞은 담장과 집은 번번히 무너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성 밖에 마름쇠를 던져 놓아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양사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가져다가 성 안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굵은 밧줄로 그물을 얽고,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매고, 그 안 쪽에 노포를 설치하여 성을 지켰다. 이 당시 성안의 남녀가 2천 8백 명 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힘 못 쓰는 자들까지도 격려하여 20여 일 동안이나 강한 적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 때 돌연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우레가 울리고 비가 오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적들은 겁이 나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고 대내마로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다.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당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661~681  재위기간 20년)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 왕후이며,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고, 유신의 누이였다. 유신의 맏누이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두루 펴졌다. 그녀는 꿈을 깨고난 후에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동생은 장난 삼아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라고 말하고,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우리 집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고 말하고, 춘추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는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맏누이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그녀의 수수한 화장과 경쾌한 의복, 그리고 어여쁜 얼굴은 눈이 부시는듯하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곧 혼인을 청하여 혼인식을 올렸다. 그녀는 바로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를 법민이라 하였다. 왕비는 자의왕후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 초에 당 나라에 갔을 때, 고종이 대부경 벼슬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 5년에 태종이 당 나라 장수 소 정방과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원년 6월,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과 유돈 등이 돌아왔다. 그들은 왕에게 "황제가 이미 소 정방으로 하여금 35도의 수륙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면서, 마침내 왕께도 군사를 파견하여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상중일지라도 황제의 칙명을 어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을 7월 17일, 김 유신을 대장군, 인문·진주·흠돌을 대당 장군, 천존·죽지·천품을 귀당 총관, 품일·충상·의복을 상주 총관, 진흠·중신·자간을 하주 총관, 군관·수세·고순을 남천주 총관, 술실·달관·문영을 수약주 총관, 문훈·진순을 하서주 총관, 진복을 서당 총관, 의광을 낭당 총관, 위지를 계금 대감으로 임명하였다.
8월, 대왕이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원문 1자 결자) 어떤 사람이 와서 "백제의 잔적이 옹산성에 웅거하여 길을 막고 있으니, 앞으로 전진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대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을 타일렀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9월 19일, 대왕이 웅현정에 진주하여, 모든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 놓고 직접 훈계하였다.
25일, 군사를 진군시켜 옹산성을 포위했다. 27일,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목베어 죽이고, 마침내 그들을 항복시켰다. 왕이 공로를 평가하여 각간이나 이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칼을 주고, 잡찬이나 파진찬 또는 대아찬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을 주고, 그 이하에게는 각각 위 1품씩을 올려 주었다. 웅현성을 쌓았다.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1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백성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조복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어 고타야군 태수를 삼고, 파가에게는 급찬을 주고, 그들 둘 모두에게 밭과 집과 옷을 주었다.
겨울 10월 29일, 대왕이 당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당 나라 사신이 조의와 위로의 뜻을 표하고, 동시에 황제의 조칙에 따라 이전 임금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채색 비단 5백 필을 부조하였다.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함자도 총관 유 덕민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 황제의 칙지를 전하였다.

2년 봄 정월, 당 나라 사신이 객사에 머물고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찬 문훈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왕이 유신·인문·양도 등 아홉 장군에게 수레 2천여 채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18일, 풍수촌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길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에 실었다. 23일,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등이 이현에서 적병을 만나 이들을 죽였다.
2월 1일, 유신 등이 장새에 도착했는데, 이 곳에서 평양까지는 3만 6천 보 거리였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15인을 당 나라 군영에 보냈다. 이 날은 바람과 눈으로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다수 얼어 죽었다. 6일, 양오에 도착하여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 군량을 전달하고, 정방에게는 은 5천 7백 푼, 가는 베 30필, 머리털 30량, 우황 19량을 선물하였다. 정방은 군량을 얻고는 곧 전투를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의 군사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되돌려 과천을 건넜다. 이 때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오자 군사를 되돌려 대적하여 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고, 병기를 무수히 노획하였다. 전공을 평가하면서 본피궁의 재물과 전장과 노복을 절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
영묘사에 불이 났다.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률'을 '진'이라고도 한다.]이 항복해왔다. 탐라국은 무덕 이래로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관직명을 삼았었는데, 이 때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3월, 대사령을 내렸다.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왕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큰 연회를 베풀게 하였다.
가을 7월, 이찬 김 인문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 백제의 잔적이 내사지성에 모여 반란을 도모하자 흠순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대당 총관 진주와 남천주 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고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목을 베고 동시에 그 일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사찬 여동이 그의 어머니를 때리자,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고 비가 내리다가 벼락이 그에게 떨어져 사망하였다. 그의 몸에 "수주당"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3년 봄 정월, 남산신성에 길다란 창고를 지었다. 부산성을 쌓았다.
2월,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7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한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케 하였으며, 덕안성을 쳐서 1천 70명의 머리를 베었다.
여름 4월, 당 나라가 우리 나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
5월,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군 복신과 중 도침이 예전 임금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세우고, 유진 낭장 유 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 황제는 인궤에게 검교대방주자사를 시켜 전 도독 왕문도의 무리를 통솔하고 우리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싸울 때마다 진지를 점령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은 인원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임존성을 수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후에 그의 무리를 병합하고, 또한 그를 배반하고 도망했던 자들을 불러 모아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유 인궤는 유 인원과 군사를 합친 후,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대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는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 인사로 하여금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왕은 김 유신 등 28명[30명이라고도 한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쳐서 두릉['릉'을 '량'이라고도 한다.]윤성·주류성 등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도주하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그러나 지수신만은 혼자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는 회군하여 설['설'을 '후'라고도 한다.]리정으로 왔다. 공훈의 정도에 따라 논공행상을 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진에 머물고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 의복을 만들어 주었다.

4년 봄 정월, 김 유신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게 하였다.
2월, 유사에게 명하여 역대의 왕릉에 능을 지킬 백성 20호씩을 이사시켰다. 각간 김 인문과 이찬 천존이 당 나라 칙사 유 인원, 백제의 부여융과 웅진에서 맹약을 맺었다.
3월, 백제의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웅주 도독이 군사를 보내 이를 격파하였다. 지진이 있었다.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웅진부성에 보내 당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장군 인문·품일·군관·문영 등에게 명령하여 일선주와 한산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부성의 군사와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케하여 그들을 격멸하였다.
8월 14일,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무너졌다.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백성들이 재물과 토지를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5년 봄 2월, 중시 문훈이 은퇴하자 이찬 진복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이찬 문왕이 사망하자 왕자의 예식으로 장사지냈다. 당 황제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동시에 자주옷 한 벌과 허리띠 한 벌, 채색 능직 비단 1백 필, 생초 2백 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 나라 사자에게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다.
가을 8월, 왕이 칙사 유 인원·웅진 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화친을 맹서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의 부여장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으면서부터 자주 우리의 국토를 침범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는 연이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병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었다. 또한 소 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 당으로 돌아가자 백제의 잔당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진수사 유 인원·유 인궤 등과 함께 수년간 이들을 정벌하여 점점 평정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당 고종은 부여융에게 조서를 내려 그로 하여금 신라로 오게하여 잔당들을 무마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화친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때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는데,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그리고 강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 순서로 입에 피를 발랐다. 그 서약문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날 백제의 전 임금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낼 줄 모르고,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면서,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내통하여, 그들과 함께 포악한 행동으로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약탈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리가 험하며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대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는 토벌을 결행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 번의 전투로 완전히 평정되었다. 사정이 이러한 즉 마땅히 궁실과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이후의 세대에 경계심을 주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순한 자를 받아 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며, 망한 것을 다시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지난 날 성인들의 공통된 규범이었다. '모든 일은 옛날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 역사서에 전해져 온다. 이에 따라 전 백제의 대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자기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의 옛 고장을 보전케 할 것이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의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서로 화친하여, 모두가 당의 조칙을 받들고, 영원히 당의 번방으로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노성현공 유 인원을 보내 직접 권유하고 황제의 뜻을 상세하게 선포한다. 두 나라는 혼인으로써 약조를 맺어 맹세를 다졌으며, 짐승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화목하며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환난을 구제하며, 형제와 같이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삼가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마친 뒤에는 모두 함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맹세를 저버리고 행동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리를 움직이거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신명이 굽어 볼 것이요, 수 없는 재앙이 내릴 것이며, 자손을 기르지 못할 것이요,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제사가 끊어질 것이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금서철권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두고, 자손 만대를 통하여 감히 어기거나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신령이여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시고 복을 베푸소서."
이 맹약문은 유 인궤의 글이다. 입에 피를 바르는 절차를 마치고, 제물은 제단의 북쪽 땅에 묻었으며, 문서는 우리 종묘에 보관하였다. 이 때 유 인궤는 우리 사신과 백제·탐라·왜 등의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에, 일선·거열 2주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하서주로 운반하였다. 예전에는 명주와 베 열 발을 한 필이라고 했는데, 이를 고쳐서 길이 일곱 보 넓이 두 자를 한 필로 정하였다.

6년 봄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영묘사에 불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이 모두 내마로서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가 되었다. 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하고자 당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겨울 12월, 당 나라가 이적을 요동방면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륙과 학 처준을 보좌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대신 연 정토가 12성, 7백 63호, 3천 5백 43명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정토와 종관 24명에게 의복·식량·주택을 주어 서울과 부주에 안주시켰다. 그 중 8개 성이 완성되자 군사를 파견하여 수비토록 하였다.

7년 가을 7월, 사흘 동안 큰 연회를 베풀었다.
당 황제가 칙령으로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 전투에 참전하게 하자, 왕은 즉시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황제가 대아찬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임명하는 칙령을 보내니, 왕은 일원에게 대궐 뜰에서 그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를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고종은 유 인원·김 인태를 비열도로 가게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해곡의 두 길을 경유하여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대각간 김 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9월, 한성정에 도착하여 영공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 영공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영공은 그 곳에서 이동혜 촌주 대내마 강심으로 하여금 거란 기병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경유하여 한성에 이르러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그 편지는 군사의 동원 기일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대왕이 이에 응하였다.
11월 11일, 왕이 장새에 도착하여 영공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따라 왕의 군대도 역시 돌아왔다. 강심에게 급찬의 작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다.
12월, 중시 문훈이 사망하였다. 당 나라 유진장군 유 인원이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는 천자의 칙명을 전달하고, 왕에게 대장군정절을 주었다.

8년, 봄에 아마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와 정토를 당 나라에 보냈다. 정토는 당 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는 돌아왔다.
이후로는 여자를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황제의 칙명이 있었다.
3월,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비열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천선 성좌에 나타났다.
6월 12일, 요동방면 안무부대사 요동행군 부대총관 겸 웅진 방면 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태자 좌중호 상주국 낙성현 개국남 유 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 사찬 김 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 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우로 그를 맞게 하였다. 이 날, 우상 유 인궤는 약속을 끝내고 천강으로 떠났다.
21일, 대각간 김 유신을 대당 대총관, 각간 김 인문·흠순·천존·문충과 잡찬 진복·파진찬 지경·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 이찬 진순['순'을 '춘'이라고도 한다.]·죽지를 경정 총관, 이찬 품일·잡찬 문훈·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 잡찬 군관·대아찬 도유·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 총관, 잡찬 숭신·대아찬 문영·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 총관, 파진찬 선광·아찬 장순, 순장으로 하서주 행군 총관, 파진찬 의복과 아찬 천광을 서당 총관을 삼고, 아찬 일원과 흥원으로 계금당 총관을 임명하였다.
22일, 부성의 유 인원이 귀간 미흘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성·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하여 귀순한 것을 보고하였다. 왕이 일길찬 진공을 보내 이를 치하하였다. 인문·천존·도유 등이 일선주 등 7군과 한성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영으로 갔다.
27일, 왕이 서울을 떠나 당 나라 군영으로 갔다.
29일, 각도의 총관들이 출발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풍병을 앓았으므로 왕이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인문 등이 영공을 만나 영류산 아래[영류산은 지금 서경 북쪽 20리에 있다.]로 진군하였다.
가을 7월 16일, 왕이 한성주에 행차하여 모든 총관들에게 가서 당 나라 군대와 연합하도록 지시하였다. 문영 등이 사천 벌에서 고구려 군사와 마주쳐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9월 21일, 당 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우선 천 남산 등을 보내 영공을 방문하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영공이 왕 보장과 왕의 아들 복남·덕남과 대신 등 20여만 명을 당 나라로 보냈다. 각간 김 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 돌아가고,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도 그들을 수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 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평정하려 했을 때, 왕은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다가 흘차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당 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귀국하였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
겨울 10월 22일, 유신에게 태대각간, 인문에게 대각간의 직위를 주고, 이 밖에 이찬·장군 등은 모두 각간의 직위를 주었으며,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위품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 대당소감 본득은 사천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 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흑악령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벼 1천 석을 주었다. 서당 당주 김 둔산은 평양 군영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사찬의 직위와 벼 7백 석을 주었다. 군사 남한산 사람 북거는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술간의 직위와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군사 부양 사람 구기는 평양 남교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술간의 직위와 곡식 7백 석을 주었다. 가군사 비열홀 사람 세활은 평양 소성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고간의 직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다. 한산주 소감 김 상경은 사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일길찬의 직위와 벼 1천 석을 주었다. 아술 사찬 구율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없이 임의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으므로, 전공은 비록 제일 높았으나 공신록에 등록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분하게 여겨 목매어 죽으려 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25일, 왕이 귀국하는 길에 욕돌역에서 묵었다. 그 때, 국원의 지방관인 대아찬 용장이 개인적으로 연회를 열어 왕과 여러 시종들을 접대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내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나이 15세로서 가야의 춤을 추었다. 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정하고도 고운 것을 보고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면서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을 후하게 주었다.
11월 5일, 왕이 고구려 포로 7천 명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6일, 왕이 문무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고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삼가 선왕의 뜻을 이어서 대당과 함께 정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묻고 그 괴수를 처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국운이 태평하여졌기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여 들으소서."
18일, 전쟁 중의 전사자에게 폐백을 내렸다. 소감 이상은 십(원문 2자 결자)필, 종자에게는 20필씩을 주었다.
12월, 영묘사에 불이 났다.

9년, 봄 정월에 신혜 법사를 정관 대서성에 임명하였다. 당 나라 중 법안이 와서 자석을 구해보라는 천자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2월 21일,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예전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하여,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서쪽에서 쳐들어와 잠시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사의 백골은 벌판에 쌓였으며, 몸과 머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상을 불쌍히 여겨 천승지국의 왕이라는 신분도 잊으시고, 바다 건너 당 나라의 조정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그 본래의 뜻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원히 전쟁을 없애고, 누대에 쌓인 깊은 원한을 갚자는 것이었으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비록 평정되었으나 고구려는 미쳐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왕께서 평정하신 유업을 과인이 계승하여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태평하여졌으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는 모두 상을 주었고, 전사한 영혼에게는 명자를 추증하였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쓴 채 새 세상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생각하면 자고 먹는 사이에도 편안하지 않으니,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함이 옳을 것이다. 총장 2년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죄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를 범한 자들로서 현재 옥에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석방할 것이며, 이전의 대사령으로 석방된 이후에 죄를 범하여 벼슬을 빼앗긴 자는 모두 복직시키고,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배상할 재물이 없는 자는 한도액까지 배상하지는 않도록 할 것이며,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려 먹은 자로서 작황이 좋지 않은 곳에 사는 자는 본곡과 이자를 반드시 갚지는 않아도 되게 할 것이며, 만약 작황이 좋은 곳에 산다면 금년 추수 후에 본곡만 갚고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이 달 30일 안으로 해당 관청이 집행하라."
여름 5월, 천정·비열홀·각연 등 3군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급찬 지진산 등을 당 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한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 나라에 보내 사죄하였다.
겨울, 당 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고,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인 사찬 구 진천을 데리고 갔다. 당 황제가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 만든 후에 화살을 쏘아보니 3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 보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자는 사신을 보내 목재를 요구하였고, 곧바로 대내마 복한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황제는 즉시 쇠뇌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조한 후에 쏘아보니 6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구 진천은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 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자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중죄를 준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말을 기르는 우리 174개소를 지어 주었다. 말 우리를 관리하는 관청에 22개소, 궁중에 10개소, 태대각간 유신에게 6개소, 태각간 인문에게 5개소, 각간 7인에게 각 3개소, 이찬 5인에게 각 2개소, 소판 4인에게 각 2개소, 파진찬 6인과 대아찬 12인에게 각 1개소를 지어주고, 나머지 74개 소는 적당하게 나누어 지어주었다.

10년, 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가두었다. 그는 결국 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들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황제가 노하였고, 이에 따라 사신을 억류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3월, 사찬 설 오유가 고구려의 태대형 고 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다. (원문 3자 결자) 말갈 군사가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 말갈 군사와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참획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계속하여 도착하자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을 지켰다.
6월, 고구려 수림성 사람 대형 모잠이 고구려의 유민을 모았다. 그는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도착하여 당 나라 관리와 중 법안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오는 도중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 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났다. 그들은 안승을 한성으로 맞아 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리고 소형 다식 등을 우리에게 보내 애소하기르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대를 잇는 것은 천하의 공의이니, 오직 대국이 이를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신라의 속국이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애소하였다. 왕은 그들을 서쪽 지방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
한기부 여자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녀에게 곡식 2백 석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은 백제의 유민들이 배반할 것을 걱정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 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도독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곧 사마칭의 군사를 보내 우리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왕이 우리를 해치려는 그들의 음모를 알고는 사마칭의 군사를 억류한 채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 등이 63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곳 사람들을 내지로 옮겨 살게 하였다. 천존·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적의 머리 2천 개를 베었으며, 군관·문영은 열 두 성을 빼앗고 적병을 공격하여 머리 7천 개를 베었고, 말과 병기를 매우 많이 노획하였다. 왕이 돌아와 중신·의관·달관·흥원 등이 (원문 3자 결자)...사영에 퇴각한 일이 있으므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나 죄를 사면하여 면직만 시켰다. 창길우 (4자 결자)…일에게 각각 급찬의 작위를 주고, 공훈의 정도에 따라 벼를 주었다.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하였다. 그 책명문은 다음과 같다.
"함형 원년 세차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명을 보낸다. 공의 태조 중모왕이 북쪽 땅에 덕을 쌓고, 남해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가 현토를 덮었다. 자손이 뒤를 잇고, 본계와 지계가 끊이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가 되고 역사가 8백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남건·남산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란이 일어나 골육이 갈라지고, 집안과 나라가 망하고, 종묘와 사직이 사라졌으니, 백성들이 동요하여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공은 산야에서 위난을 피하다가 홀로 이웃 나라에 귀순하였으니, 그 유랑의 고통은 진 문공의 행적과 같고,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니 이는 위 선공의 행적과 같다고 할 것이다. 무릇 백성이란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나니, 선왕의 정통 후계자도 오직 공일 뿐이요, 제사를 주관할 사람도 또한 공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제 삼가 일길찬 김 수미산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책명을 전하고, 공을 고구려왕으로 명하노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위로하여 안정시키고 옛 전통을 일으킬 것이며, 길이 선린이 되어 형제와 같이 우리를 공경하고 섬겨야할 것이다. 이에 멥쌀 2천 석, 무장마 한 필, 능직 비단 다섯 필, 견직과 베 각 열 필, 면화 열다섯 칭을 보내니 왕은 이를 받으라!"
12월, 토성이 달에 들어가고,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중시 지경이 퇴직하였다.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 '해돋는 곳과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원문 6자 결자)...나라를...약취하여, 그 곳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왕이 대아찬 진주를 보내 그의 목을 베었다.[주석 부분은 빠진 자가 많아서 의미를 알 수 없다.]

11년 봄 정월에 이찬 예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웅진 남쪽의 전투에서 당주 부과가 전사하였다.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 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원문 4자 결자)을 보내 옹포를 수비하게 하였다.
백어가…에 뛰어 들었는데(원문 열 자 결자)…한 치 였다.
여름 4월,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 장군 죽지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그 때 마침 당 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5천 3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백제 장군 두 사람과 당 나라 과의(果毅) 여섯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가을 7월 26일, 대당총관 설 인귀가 임륜 법사를 시켜 신라왕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행군 총관 설 인귀는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육로 만리 해로 삼천리를 지나 본인은 황제의 명령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은 사심이 발동하여, 변경에 무력을 배치한다 하오니, 이는 자유(子由)의 한마디 말을 버린 것이요, 후생(侯生)의 한번 약속을 버린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었으며, 꽃과 꽃받침의 그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의 달빛만 헛되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려 하니 실로 더욱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선왕 개부는 통일을 도모하여 온갖 성을 전전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노를 염려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약탈을 경계하였습니다. 사방 천리 땅 도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누에 치는 여인들은 뽕 따는 시기를 놓쳤고, 김 매는 농부들은 밭갈이 할 시기를 잃었습니다. 선왕은 나이 60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도 뱃길의 위험을 감내하고 파도를 넘어 와서, 중국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황제의 대문에 머리 숙이며 어려운 상황을 고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상황을 호소하는 말에 진정이 묻어 나왔으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픈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태종 문황제는 기품이 천하에 제일이었으며, 정신은 우주에 군림하였으니, 반고의 아홉번 변화나 거령(巨靈)의 손과 같이, 쓰러지는 자를 부축해주고 약한 자를 구원하기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선왕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요청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 주셨으며, 가벼운 수레와 빠른 말, 좋은 의복과 훌륭한 약품을 하루에도 여러번 주어 특별히 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으며, 군사에 관한 토의를 하게 되니, 그들의 약속은 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며, 쇠와 돌에 새긴 것 보다 더 분명하였습니다. 두 분은 찬란한 대궐과 번화한 수도에서 주연을 벌였으며, 궁정의 연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군사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일시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를 벌렸습니다. 그 때는 변방의 잡초에 꽃잎이 매달리고,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필 전투에는 문제가 직접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니, 이는 매우 정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산과 바다가 형상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 황제는 무기를 놓으셨고 왕도 역시 선왕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위와 칡이 서로 의지하듯 함께 토벌군을 일으켰고, 병기와 말을 정비하여 선대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후로 수십년이 흘러 중국은 국세가 흥성치 못하였으나 때때로 창고를 열어 일용할 물자를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신라를 위하여 중국의 군사를 일으키니, 중국에 유익한 일은 적고, 쓸 데 없는 일은 많았습니다. 이를 중지할 줄을 어찌 몰랐으리오마는, 선왕의 신의를 저버릴까 염려하여 그만 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강했던 적들이 이미 숙청되었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었으며, 그 병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마땅히 정신과 육체를 헛되이 쓰지 말고, 안팎이 서로 도와 병기를 녹이고 허욕에 눈뜨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정에 알맞는 일입니다. 후손에게 좋은 국책을 전해 주어, 그들을 평안하니 돕는다면, 역사는 이를 칭찬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여,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의 말씀을 어기며, 천시(天時)를 업신여기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면서, 한 구석의 궁벽한 작은 땅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 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나아가 싸우려해도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얻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며,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요, 크고 작은 것이 짝맞지 아니하고, 순리
와 역리가 차례를 잃은 격이니, 이는 또한 활을 가지고 닭을 잡으러 가다가 마른 우물에 빠지는 위험을 못 보는 것과 같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다 참새가 자기를 덮치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이는 왕이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한 탓입니다. 만약 선왕이 살아 계실 때, 일찍부터 황제의 은혜를 입고도 음험한 생각을 품고, 거짓 예절로 정성을 내보이며,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황제의 큰 공을 차지하려 하고, 앞에서는 구차하게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 반역을 도모했다면, 이는 선왕의 단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맹세는 반드시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질 때까지 지켜질 것이며, 의리와 명분은 추상같이 엄정해야 할 것이니,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충성이 아니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왕은 충성과 배반의 두 가지를 한 몸에 지녔으니,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과 지금의 당신이 하루 아침에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은, 모두 황제의 염려가 멀리 미쳤고, 그 위력이 서로를 협조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와 군이 이어져 마침내 기반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선왕과 그대 왕이 번갈아 책명을 받았고, 스스로 신하임을 일컬어 왔던 것입니다. 왕은 앉아서는 경서를 읽고, 시와 예를 상세히 알면서도, 정의를 들으면 따르지 않고, 선을 보고도 경멸하며, 권모술수에 귀기울이니, 이는 눈과 귀가 어두운 것이며, 고귀한 가문의 기반을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필경 귀신이 엿보는 결과를 맞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성대한 업적을 받들면서도 다른 뜻을 품고, 안으로는 충신을 없애고 밖으로는 강적을 불러 들이니, 이를 어찌 슬기롭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고구려의 안승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 인귀의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외부의 원조를 믿고 나와 대적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된 잘못 입니까! 황제의 은덕은 끝이 없고, 어진 교화는 멀리 미치며, 사랑은 햇볕처럼 따스하여 봄날의 꽃잎 같이 밝게 비치나니, 멀리서 신라와 고구려가 꾸미는 일을 듣고도, 이를 염려할지언정 믿지 아니하고, 마침내 본인에게 명령하여 이 곳에 와서 자세한 사유를 알아 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본인이 온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았으며, 마침내 군사를 언덕 밑에 숨기거나, 병기를 강 어구에 감추거나, 병사들을 숲속으로 숨어 다니게 하며, 풀이 무성한 언덕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게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해칠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돕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 나라의 대군이 출동하기 전에, 유격대가 먼저 대열을 정비하여 바다로 출동하니, 물고기는 놀라고 새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왕은 사람의 도리로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아, 망령된 행위를 요행스럽게나마 그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큰 일을 하려는 자는 적은 이익을 탐하지 않으며, 높은 절개를 가진 자는 영명해야 합니다. 선량한 나라와 사귀지 못하면 적국이 엿보게 되는 법입니다. 고장군이 거느렸던 한 나라 기병이나 이 근행이 거느렸던 번병, 오 나라 초 나라의 용감한 수군들과 북방의 사나운 군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병선을 열지어 내려가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될 수 없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이 만약 전쟁에 지친 병사들로 하여금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잘못된 일도 단번에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왕은 사유를 모두 말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명백히 말씀하십시오! 본인 설 인귀는 일찌기 황제의 행차를 수행했을 때, 직접 황제로부터 위임을 받았으니, 이제 보고문을 기록하여 황제에게 상주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모든 일이 밝게 해결될 것인데, 왕은 왜 그리 초조하여, 스스로 복잡하게 소동을 부립니까? 슬픈 일입니다. 옛날에는 충의를 다하다가, 이제는 역신이 되었으니, 처음의 좋은 관계가 나중에 와서 나빠진 것이 유감이며, 근본은 같았는데 말단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차며, 나뭇잎은 떨어져 한 해가 슬프게 흘러 가는데, 산자락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니 가슴 아픈 회포가 떠오릅니다. 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원칙으로 돌아가 당 나라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제향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정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이제 왕의 휘하에 있는 스님 임윤에게 편지를 맡겨, 몇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대왕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선왕께서 정관 22년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의 동원 기일을 정하여 주었다. 신라 백성들이 모두 이 은혜로운 조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동원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대업이 끝나기도 전에 문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황제가 위에 오르자, 선대 황제의 은혜가 이어져, 지난 날보다 더욱 자주 은덕을 입었다. 나의 형제와 아들이 귀한 선물과 관직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총애는 지극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키는 일을 다하려 하였으며, 비록 우리의 간과 뇌가 평원을 덮더라도, 은혜의 만분지 일이나마 보답코자 하였다. 현경 5년에 황제는 선대 황제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으니, 전일에 남겨 둔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함을 띄우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대부대의 수군을 동원하였다. 당시 무열왕은 늙고 힘이 없어 행군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예전의 은혜를 추모하는 감정으로, 억지로 국경까지 나왔으며, 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귀국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였다. 동서가 호응하며 수륙 양군이 함께 진격하여, 수군이 겨우 강 어구에 들어올 즈음 육군은 이미 대부대의 적군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군사가 함께 백제의 수도에 이르러 백제 전국을 평정하였다. 평정 후에 선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뒷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당 나라 군사 1만을 머물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에게 군사 7천을 주어, 그들과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적의 신하 복신이 강의 서쪽 지방에서 봉기하여 백제의 유민을 모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를 부수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상황이 되었다. 또한 부성(사비성) 부근 네 곳에 성을 쌓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한 채 수비하고 있으므로 부성(사비성)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 때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의 성을 한꺼번에 모두 격파하여, 우선 그들의 위급함을 구원하였고, 다시 군량을 수송하여 마침내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범의 아가리에 든 위험을 면하게 하였으며, 그 곳에 남아 수비하던 굶주린 군사들로 하여금 자식을 바꾸어 잡아 먹는 참상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증가하여 강의 동쪽 땅을 침탈하였으므로, 웅진의 당 나라 군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격파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웅진으로부터 구원병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 당시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애타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파견하여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와 공격하여, 우리의 군마는 크게 손상 당했고, 결국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가는 길이 즉시 차단되어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으므로,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다른 길로 몰래 소금을 보내 곤핍해진 그들을 구원하였다.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겨우 끝냈는데, 상복도 미쳐 벗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를 웅진으로 보내지 못하였던 바, 황제의 칙서가 내려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 등이 왔는데, 그들은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게
 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이 때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부성(사비성)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는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유 총관이 나와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 길이 차단될 것이오, 웅진 길이 차단된다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 나라 군사가 바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 갈 것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 총관은 드디어 나와 동행하여 우선 옹산성을 공격하였다. 옹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진에 성을 쌓고, 웅진 길을 개통시켰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러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칙령을 어긴다는 문제가 있었고,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군량이 끊길 것이 염려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노약자를 시켜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고, 건장한 장병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웅진으로의 군량 수송 도중에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모두 죽어서 백 명에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용삭 2년 정월, 유 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 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 때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으로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동상을 입어 군량을 전할 수 없었다. 평양의 당 나라 군사들은 귀국을 원했다. 신라 군사들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귀환하였다.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행군이 호로하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오래도록 피곤한 상황이었으나, 적이 멀리까지 따라 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는데, 선봉대가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이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 온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는 여러 차례 곡식을 요청하였다. 이 때 앞뒤에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이었다. 이와 같이 소국 신라가 남으로는 웅진, 북으로는 평양으로 소국 신라가 두 군데나 공급을 하고 보니, 인력은 극도로 피로하고 소와 말은 모두 죽었으며, 농사 지을 시기를 놓쳐서 흉년이 들고, 저축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두 지역의 수송으로 모두 없어졌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에게는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에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는 식량이 남아 돌았다. 또한 진에 주둔하는 당 나라 군사들은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헤어져 몸에 걸칠 성한 의복이 없었다.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철에 맞는 의복을 지어 보냈다. 도호 유 인원은 멀리 고립된 성을 수비하는데,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포위를 당하였으므로 언제나 신라의 구원을 받았다.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가 4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유 인원 이하 모든 병사들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 땅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었다. 당 나라의 은택이 비록 대단하다고 하지만, 신라가 바친 충성도 또한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용삭 3년에 이르러 총관 손 인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참여하여 행군이 주류성에 이르렀었다. 이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돕게 되어, 왜선 일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수비하고 있었다.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당 나라 군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사기를 잃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방을 치는데 임존성 한 곳이 미욱하게도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두 군대가 협력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수비하고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었다.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두대부가 '칙령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모두가 함께 맹약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임존성 하나가 비록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한 평정' 이후에 맹약의 회합을 가져야 하며, 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신라는 또한, 백제는 모든 행동이 간사하여 향후의 행동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모여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므로,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인덕 원년에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사신을 웅령으로 파견하여 제단을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을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행사는 비록 우리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어 행한 것이었다. 또한 다시 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 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산하를 두고 맹약하였는데, 맹약의 내용은 경계를 확정하고 봉토를 쌓아서 이를 영원한 국토로 삼아, 백성들이 거주하고 저마다 생업을 경영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건봉 2년에, 대총관 영국공이 요동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에 갔으며, 그 곳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3회에 걸쳐 정탐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보내 당 나라 군사의 상황을 알아 보았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당 나라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공격하여 길을 열어 놓고, 당 나라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영공의 사자인 강심이 와서 '신라 군사가 반드시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평양으로 조속히 군대를 파견하여 병기와 군량을 공급하라는 대총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명령을 내려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에 당도하자, 당 나라 군사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되어 신라 군사도 그 곳을 즉시 빠져 나왔다.
건봉 3년, 대감 김 보가를 시켜 해로를 통하여 요동에 들어가 영공의 명령을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그는 신라 군사를 평양에 집합시키라는 분부를 받아 왔다. 5월에 이르러 유 우상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다. 나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이 때 번군 한군 모두가 사수에 집결하니, 남건도 출병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그후 영공이 다시 신라의 정예 기병 5백 명을 선발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신라 군사들이 모두 '정벌을 시작한지 9년이 이미 지나 인력은 소진되었으나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누대에 걸친 소망을 오늘에야 이루었으니,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은 것이요, 백성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영공이 '신라가 이전에 군사의 동원 기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반드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어,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 나라 서울에 전달되었는데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 장군들이 돌아오자 백성들의 공포심이 더하였다. 또한 비열성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은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회복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관리를 두어 수비했으나, 당 나라는 이 성을 다시 빼앗아 고구려에 돌려 주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할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가 있기에 하루 아침에 이렇게 신라를 저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라는 비록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배반할 마음은 없었다. 총장 원년에 백제는 앞서 모여 맹약하였던 곳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전지를 침탈하였으며, 우리의 노비들을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내지로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한 '당 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 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또한 백제 여자를 데려다가 신라의 한성 도독 박 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어떤 한 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일이 발각되어 즉시 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함형 원년 6월, 고구려가 모반하여 당 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반드시 함께 흉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상호 토론해야할 문제이니, 청컨대 관인을 이 곳에 파견하여 함께 토벌을 계획하여 보자'라고 하였는데, 백제의 사마 니군이 이 곳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군사를 동원한 뒤에 서로가 의심할 수 있으니, 응당 신라와 백제의 두 편 관인을 상호 인질로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 유돈과 부성의 백제 주부 수미, 장귀 등을 부로 파견하여, 인질 교환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는 인질의 교환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공격을 했다.
7월에 당 나라에 갔던 사신 김 흠순 등이 귀국하여,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 의하여 백제의 옛 국토를 조사하여, 백제의 국토는 백제로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이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라는 원래 당 나라의 한 지방이므로 두 나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원컨대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년 9월에 이러한 사정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역시 당 나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바람이 차고 풍랑이 심하여 결국 상주를 올리지 못했다. 백제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고 상주하였다. 신라는, 앞으로는 당 나라 고관의 심정적 후원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어떻게 행동하든 언제나 질책만 당하였으므로 충성심을 보일 길이 없었다. 황제는 이와 같은 참소를 날마다 들었으므로, 변함 없는 충성을 한 번도 황제에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자 임 윤이 전하는 편지를 보니,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서 왔다하므로, 도리상 사신을 교외에 파견하여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올려야만 할 것이나, 다른 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영접을 못 한 것이니, 청컨대 크게 탓하지 말라. 총관의 편지를 보면 전적으로 신라가 반역을 한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는 본심이 아니었으니, 걱정스럽고 놀랍고 두려운 심정이다. 우리가 기울인 노력을 조목 조목 말하면 욕된 꾸지람이나 들을까 걱정되어 입을 다물고 질책을 받으려 하였으나, 이리하면 또한 사정을 모르는 당 나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므로, 이제 억울한 사정을 대략이라도 설명하여 우리가 반역할 뜻이 없었음을 상세하게 글로 쓰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 나라는 사신 한 명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의 터전을 뒤엎고자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였으니, 병선은 창해를 덮어 배의 수미가 강 어구에 줄을 이었고, 저들 웅진을 독촉하여 우리 신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아아!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 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의 상을 받고, 당 나라에 희생 당한 신라는 이미 정공의 죽음을 당하였도다. 태양이 비치지 않건마는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총관은 영웅의 기상을 받고 태어났으며,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기를 갖추었고, 일곱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며, 아홉가지 종류의 학술을 섭렵하였는데, 삼가 천벌을 주는 데 있어 함부로 죄없는 자에게 죄를 주려 하는가? 황제의 군대가 출동하기 이전에 그대는 먼저 그 근본 이유를 물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보내는 편지를 계기로 우리가 배반하지 않은 사정을 설명하노니, 청컨대 총관은 깊이 생각하여 실상을 정리하여 황제께 상주하라.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왕김법민이 말하노라."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9월, 당 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대방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6일, 당 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 당천의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직위를 주었다.

12년 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2월에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와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8월에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으로부터 5백여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그들과 격전을 벌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석문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대아찬 효천·사찬 의문·사찬 산세·아찬 능신·아찬 두선·일길찬 안나함·일길찬 양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였다.
9월,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다.
얼마 전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빌려 우리를 침략하자, 왕은 사세가 급박하여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출병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내마 변산과 억류했던 병선낭장 겸이대후·내주 사마 왕예·본열주 장사 왕익·웅주 도독부 사마 니군·증산 사마 법총과 군사 1백 70명을 당 나라에 보내면서 청죄하는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저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예전에 제가 위급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을 때, 먼 곳에서 와서 구원해주어 제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러하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그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가 부족할 것이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더라도 어찌 그 자비의 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철천지 원수 백제는 우리의 변경을 핍박하고, 황제에게 청병하여 우리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파멸이 두려워 우리의 생존을 추구하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취급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저지른 의도를 말하지 않은 채 먼저 형벌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명령을 거역한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배반한 귀신이 될까 염려되어,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 들어 주시고 근본적인 사유를 밝게 살펴주기를 원합니다. 저는 선대 이래로 조공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근자에 백제 때문에 두 번 조공을 하지 않아 마침내 황제의 조정에 의론을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저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죽은 후에도 받아야 할 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를 만드는데 부족할 것이니, 종묘와 사직을 연못으로 만들고, 저를 죽여 몸을 찢어 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나서 친히 판단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받겠습니다. 저는 부왕의 관과 상여를 옆에 두고, 머리의 진흙이 마르지 않은 채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며 삼가 형벌에 관한 명령을 듣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의 밝음이 해와 달 같아서 그 광명이 세상 어느 곳이나 골고루 비치며, 덕은 천지와 같아서 동식물이 모두 그 덕으로 자라나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도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하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로 변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어려우나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옵자니 황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글을 올려 사죄하며,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황송하고 황송하여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13년 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하였다.
2월,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사망하였다.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 나라에 붙으려다가,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처자는 천인에 편입되었다.
8월,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9월, 국원성[예전의 난완성]·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의 주양성[혹은 질암성]·달함군의 주잠성·거열주의 만흥사산성·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호로·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당 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
겨울에 당 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거란과 말갈 군사가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멸망시켰다.
처음으로 주에 2인, 군에 1인의 외사정을 두었다. 애초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하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던 것을 이 때 다시 두게 되었다.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갔던 숙위 대내마 덕복전이 역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 때까지 사용하던 역법을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당 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왕이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리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없애고, 당 나라에 있던 왕의 아우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 동중서문하 3품 유 인궤를 계림 방면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 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 근행을 부관으로 삼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왔다.
2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 큰 바람이 불어서 황룡사 불전이 훼손되었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10년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두 번째 봉하였으니, 보덕이라는 이름이 귀명 등과 같이 불교적 용어인지 아니면 지명인지 알 수 없다.]
왕이 영묘사 앞길에 나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 수진의 육진 병법을 관람하였다.

15년 봄 정월,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다.
2월, 유 인궤가 우리 나라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 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귀국하던 김 인문이 당 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 설 인귀가 숙위 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 진주가 본국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하여, 그것을 빌미로하여 풍훈을 향도로 삼아 천성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 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매, 우리는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29일, 이 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만 3백 80필의 전마와 그 이외에 이에 상당하는 병기도 얻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를 따라 관문과 성을 건설하고 또한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당 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 필의 전마를 얻었다.

16년 봄 2월,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 혜성이 북하와 적수 두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 가량 되었다.
당 나라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수군을 이끌고 설 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나, 다시 크고 작은 20번의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재상 진순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17년 봄 3월, 강무전 남문에서 왕이 활 쏘기를 구경하였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설치하였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18년 봄 정월, 선부령 한 명을 두어 선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좌우 이방부경 각 1명을 증원하였다. 북원을 소경으로 하고, 대아찬 오기로 하여금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3월,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5월, 북원에서 이상한 모양의 새를 바쳤는데, 깃털에 무늬가 있고 정강이에 털이 나 있었다.

19년 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자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여름 4월, 화성이 우림을 지키고, 6월에 금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가을 8월,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각간 천존이 사망하였다. 동궁을 처음으로 짓고 안팎의 모든 문의 현판 이름을 지었다.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21년 봄 정월 초하루, 날씨가 종일 밤처럼 캄캄하게 어두었다. 사찬 무선이 정병 3천을 거느리고 비열홀을 지켰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6월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왕이 서울을 새로 꾸미고자하여 중 의상에게 물으니, 의상이 "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지라도 바른 도를 실천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오래 갈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사람을 고생시켜 성을 만든다 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1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 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뭇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681~692  재위기간 11년)

신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이며[명지의 자는 일조이다.], 문무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의(儀)를 의(義)로 쓰기도 한다.]왕후이다. 왕비는 김씨이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 그녀를 맞았으나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문무왕 5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의 관작을 이어 받았다.

원년 8월,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8일, 소판 김 흠돌·파진찬 흥원·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13일, 보덕왕이 사신 소형 수덕개를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치하하였다.
16일,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예전 성인들의 좋은 법도이며,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 또한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다. 과인이 못나고 박덕한 몸으로 숭고한 왕업을 이었기에, 식사를 잊고 새벽에 일어나고 밤 늦게 잠을 자면서, 충복 대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였으니, 상중에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반란의 괴수 흠돌·흥원·진공 등은 그들의 재능이 훌륭하여 작위에 오른 것이 아니며, 관직도 실은 은전에 의하여 오른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여 부귀를 보전해야 했으나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은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행복이나 위세를 마음대로 만들어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상하를 기만하였으며, 한없이 탐욕스런 생각을 함부로 내보이고 포학한 마음을 휘둘렀으며,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 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하였다. 그 화란이 안팎으로 통하여 악의 무리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 조상의 도움을 받아, 쌓이고 쌓인 흠돌 등의 음모가 탄로되었으니, 이는 곧 사람과 귀신이 모두 취하지 않는 행위요,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니, 정의를 범하고 기풍에 상처냄이 이보다 더 심한것이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를 모아 흉악한 무리들을 무찌르니 더러는 산골로 도망하고, 혹은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잔당들은 모두 체포하여 이미 처형하였고, 향후 3,4일 사이에 괴수들도 모두 소탕할 것이다. 이는 부득이한 조치였으나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여러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백성을 걱정하고 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는가!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원근에 걱정이 없어졌으므로, 소집하였던 병마를 조속히 돌려 보낼 것이니, 이를 사방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알도록 하라!"
28일, 이찬 군관을 목 베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임금을 섬기는 법도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요, 관직에 있는 의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임금을 정성껏 보좌하지 못하고, 결백한 절조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며, 임금의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어 버릴 줄 모르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표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신 흠돌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미리 고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고, 더욱 공공의 질서를 따를 뜻이 없는 것이니, 어찌 다시 재상의 직무를 맡겨 국가의 헌장을 흐리게 할 것인가? 마땅히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후진들에게 경계를 삼게 하리라. 군관과 그의 맏아들 한 명을 자살하여 죽게 하고, 원근에 포고하여 모두가 알도록 하라."
겨울 10월,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 6인을 두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 위화부령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맡게 하였다.
5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6월, 국학을 세우고 경 1인을 두었다. 또한 공장 부감 1인과 채전감 1인을 두었다.

3년 봄 2월, 순지를 중시로 임명하였다. 일길찬 김 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 납채를 하였는데, 폐백이 열다섯 수레,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식혜가 1백 35수레, 벼가 1백 50수레였다.
여름 4월, 평지에 눈이 한 자 쌓였다.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김 흠운의 집에 보내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손문과 아찬 좌야·길숙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과 이 밖에 양과 사량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하녀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 왔다.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서울에 머물게 하였으며, 좋은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혜성이 오거 성좌에 나타났다.

4년 겨울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11월, 안승의 조카뻘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잔적들이 대문의 처형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한 채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 전투 중에 당주 핍실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그 곳을 금마군으로 만들었다.[대문을 혹은 실복이라고도 한다.]

5년 봄,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를 두니, 처음으로 구주가 되었다. 대아찬 복세를 총관으로 삼았다.
3월, 남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남원소경을 두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봉성사가 낙성되었다.
여름 4월, 망덕사가 낙성되었다.

6년 봄 정월, 이찬 대장[장(莊)을 장(將)으로도 쓴다.]을 중시로 삼았다. 예작부에 경 두 사람을 두었다.
2월, 석산·마산·고산·사평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 사비주를 군으로, 웅천군을 주로 만들었다. 발라주를 군으로, 무진군을 주로 만들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예기]와 여러 문장을 요청하니, 측천무후가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길흉요례]을 베껴주고, 또한 [문관사림] 중에서 준칙에 관한 글을 선택하여 50권을 만들어 주었다.

7년 봄 2월, 원자가 출생하였다. 이 날 날씨가 음침하여 어둡고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다.
3월, 일선주를 폐지하고, 다시 사벌주를 두었다. 파진찬 관창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음성서의 장을 경으로 바꾸었다.
대신을 시켜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제문은 다음과 같았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삼가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 영전에 아뢰나이다. 저는 천박한 자질로 숭고한 유업을 이어받아, 자나깨나 걱정하고 노력하여 편안하게 지낼 틈이 없었으나, 종묘의 돌보심과 천지가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락하며, 이역의 내빈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며, 형정이 공평하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매,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관 모를 시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살아 계신 신령 앞에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사 이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해주시며, 5사의 성과를 틀리지 말게 하시며, 농사가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중외가 평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남겨주고,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룁니다."
5월, 교서를 내려 문무 관료들에게 직급에 따라 밭을 주었다.
가을에 사벌과 삽량 두 주의 성을 쌓았다.

8년 봄 정월, 중시 대장(大莊 사람이름)이 죽고 이찬 원사(사람이름)가 중시가 되었다.
2월, 선부에 경 한 사람을 증원하였다.

9년 봄 정월, 왕이 하교하여, 서울과 지방 관리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직급에 따라 벼를 주는 것으로 상례를 삼도록 하였다.
가을 윤 9월 26일, 왕이 장산성에 갔다. 서원경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0년 봄 2월, 중시 원사가 병으로 사직하자, 아찬 선원으로 중시를 삼았다.
겨울 10월,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

11년 봄 3월 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봉하였다. 13일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남원성을 쌓았다.

12년 봄, 대나무가 말랐다.
당 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명을 전했다.
"우리 태종 문황제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선왕 김 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한 후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 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교칙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을 다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황제에게 복명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
그 후에 다시는 이에 관한 다른 칙명이 없었다.
가을 7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692~702  재위기간 10년)

 

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홍'을 '공(恭)'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신목왕후이며, 일길찬 김 흠운['金欽運'을 '金欽雲'이라고 하기도 한다.]의 딸이다. 당의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신라왕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으로 책봉하였다.
좌우리방부를 좌우의방부로 고쳤는데, 이는 '리'자가 왕의 이름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원년 8월, 대아찬 원선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고승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쳤다.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김 인문이 당 나라에서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겨울에 송악과 우잠 두 성을 쌓았다.

4년, 자월을 정월로 삼았다.
개원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중시 원선이 연로하여 사직하였다.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다.

5년 봄 정월, 이찬 당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서쪽 지방이 가물었다.

6년 가을 7월, 완산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밭고랑에서 난 벼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다.
9월, 임해전에서 모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년 봄 정월, 이찬 체원을 우두주 총관으로 삼았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중시 당원이 연로하여 사직하자, 대아찬 순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났다.

8년 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뻗쳤고, 동쪽에 혜성이 나타났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 만에 회복되었다.
9월,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그 소리가 서울까지 들렸다. 병기고에서 북과 나팔이 저절로 울었다.
신촌 사람 미흘이 무게 백 푼되는 황금 한 개를 주워서 바쳤으므로, 그에게 남변 제일의 위품과 벼 1백 석을 주었다.

9년, 다시 인월로 정월을 삼았다.
여름 5월, 이찬 경영['영'을 '현(玄)'이라고도 한다.]이 모반하다가 처형되고,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6월, 세성이 달에 들어 갔다.

10년 봄 2월, 혜성이 달에 들어갔다.
여름 5월, 영암군 태수 일길찬 제일이 공익을 위배하고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므로, 곤장 1백을 때려 섬으로 귀양보냈다.

11년 가을 7월에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제33대 성덕왕(聖德王  702~737  재위기간 35년)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 연간에 고쳤다.[[당서]에는 김 지성이라 하였다.] 그는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복 동생이다. 효소왕이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 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기 위하여, 2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는 동시에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장군도독이라는 형의 칭호를 이어받게 하였다.

원년 9월,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관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 아찬 원훈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삽량주에서 상수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7월, 영묘사에 불이 났다. 서울에 홍수가 나서 익사자가 많았다.
중시 원훈이 사직하자 아찬 원문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총 인원이 204인이었다. 아찬 김 사양을 당 나라에 입조시켰다.

3년 봄 정월, 웅천주에서 금지를 진상하였다.
3월, 견당사 김 사양이 돌아와서 [최승왕경]을 바쳤다.
여름 5월, 승부령 소판 김 원태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4년 봄 정월, 중시 원문이 죽었으므로 아찬 신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하사하였다.
9월, 살생을 금하는 교서를 내렸다.
겨울 10월, 동쪽 지방의 주와 군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많이 유랑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구제하였다.

5년 봄 정월, 이찬 인품이 상대등이 되었다. 나라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3월,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가을 8월, 중시 신정이 병으로 사직하자, 대아찬 문량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겨울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6년 봄 정월, 백성 가운데 아사자가 늘어나자, 한 사람에게 하루 조 3되를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
2월,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백성들에게 5곡의 종자를 정도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7년 봄 정월, 사벌주에서 서지를 진상하였다.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8년 봄 3월, 청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9년 봄 정월, 삼랑사 북쪽에 천구가 떨어졌다. 지진이 있었고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10년 봄 3월, 큰 눈이 내렸다.
여름 5월, 가축의 도살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다. 중시 문량이 사망하였다.
11월, 왕이 백관잠을 지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11년 봄 3월, 이찬 위문으로 중시를 삼았다. 당 나라에서 사신 노원민을 보내와 칙명으로 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온천에 행차하였다.
가을 8월, 김 유신의 아내를 부인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천 석을 주기로 하였다.

12년 봄 2월, 전사서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당 나라에 갔던 사신 김 정종이 귀국할 때,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상주국악랑군공신라왕'으로 봉하였다.
겨울 10월, 중시 위문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은퇴를 요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개성을 쌓았다.

13년 봄 정월, 이찬 효정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를 통문 박사로 고치고, 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왕자 김 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케 하니, 현종이 그를 총애하여 집과 비단을 주고, 조당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윤 2월, 급찬 박 유를 당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는데, 그에게 조산대부원외봉어의 직을 주어 돌려 보냈다.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다.
가을에 삽량주 산의 상수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겨울 10월, 당 현종이 내전에서 우리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재상과 신하 및 4품 이상의 청관들에게 이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다.

14년 여름 4월, 청주에서 흰 참새를 진상하였다.
5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큰 가뭄이 들자, 왕이 하서주 용명악에 사는 거사 이효를 불러 임천사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곧 비가 열흘 동안이나 계속 내렸다.
가을 9월, 금성이 서자성을 가렸다.
겨울 10월, 유성이 자미성을 범하였다.
12월, 유성이 천창으로부터 태미성좌로 들어 갔다.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하였다.

15년 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하자 달이 빛을 잃었다.
3월,왕이 성정[엄정이라고도 한다.]왕후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 5백 필·밭 2백 결·벼 1만 석·저택 한 구역을 주었다. 그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이었는데 이를 사준 것이다.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으며, 숭례전이 무너졌다. 당 나라에 갔던 하정사 김 풍후가 귀국하려 하니, 당 황제가 그에게 원외랑 벼슬을 주어 돌려 보냈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어 다시 거사 이효를 불러 기도하게 하니, 곧 비가 왔다.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16년 봄 2월, 의박사와 산박사 각 한 명씩을 두었다.
3월, 새로 대궐을 지었다.
여름 4월, 지진이 있었다.
6월, 태자 중경이 죽으니 시호를 효상이라 하였다.
가을 9월, 당에 갔던 대감 수충이 돌아와 문선왕·10철·72제자의 화상을 바치자, 이를 곧 태학에 안치하였다.

17년 봄 정월, 중시 효정이 은퇴하고, 파진찬 사공이 중시가 되었다.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 위무하여, 나이 많은 사람·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직접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3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수중낭장 벼슬을 주어 돌려 보냈다.
겨울 10월, 유성이 묘성으로부터 규성으로 들어가자,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따라 들어갔고, 천구가 동북방에 떨어졌다.
한산주 도독 관내 여러 곳에 성을 쌓았다.

18년 가을 9월,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

1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상대등 인품이 사방하자, 대아찬 배 부가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이찬 순원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 큰 비가 내려 산이 열세 곳이나 무너졌다. 우박이 내려 볏모를 해쳤다.
5월, 유사에게 명령하여 해골을 묻게 하였다.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6월, 왕비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중시 사공이 은퇴하고, 파진찬 문림이 중시가 되었다.

20년 가을 7월에 하슬라도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1년 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이찬 선종이 중시가 되었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을 주었다.
겨울 10월, 대내마 김 인일을 당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로를 막았다.

22년 봄 3월,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미인 두 명을 바쳤다. 한 명은 포정이라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내마 천승이었으며, 한 명은 정완이라는 여자로서 아버지는 대사 충훈이었다. 두 여자가 떠날 때 왕이 의복과 기구와 노비와 수레와 말을 주어, 예장을 갖추어 보냈다. 현종은 "너희들이 모두 왕의 내종 자매들로서, 친척과 이별하고 고국을 떠나 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게 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 보냈다. 정완의 비석에는 "효성 6년 즉 천보 원년에 당 나라에 가다"라고 되어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여름 4월, 지진이 있었다.

23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웅천주에서 서지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소덕 왕비가 사망하였다.

24년 봄 정월,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중시 선종이 은퇴하자 이찬 윤충이 중시가 되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여름 4월, 일길찬 위 원을 대아찬, 급찬 대양을 사찬에 임명하였다.
겨울 12월, 영창궁을 수리하였다.
상대등 배 부가 연로하여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7년 가을 7월, 왕의 아우 김 사종을 당에 보내 자제들의 국학 입학을 요청하였다. 이를 허가하도록 황제가 명하였다. 황제가 사종에게 과의 벼슬을 주고, 숙위로 머무르게 하였다.
상대등 배 부가 연로하여 은퇴를 요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찬 사공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0년 여름 4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일본국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와 동쪽 변경을 습격하므로, 왕이 장병을  출동시켜 대파하였다.
가을 9월, 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적문에 모이게 하여, 그들과 함께 거노의 사격술을 관람하였다.

31년 겨울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윤충·사인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32년 가을 7월, 발해에 소속된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범하므로,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 김 사란을 귀국시키면서, 동시에 왕에게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김 사란에게 군사를 주어 말갈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한길 넘게 내려 산길이 막혔고,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김 사란은 원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 나라 조회에 참여하였을 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므로 숙위로 머물도록 하였는데, 이 시기에 당 나라의 대외 임무를 맡긴 것이다.

33년 봄 정월, 백관들이 직접 북문으로 들어와 상주를 올리거나 왕과 마주 대하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34년 봄 정월,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2월, 부사 김 영이 당에서 사망하자, 광록소경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귀국할 때 황제는 신라에 패강 이남의 땅을 주라는 조칙을 내렸다.

겨울 11월, 이찬·윤충·사인·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조사하였다.
개가 재성 고루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36년 봄 2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

 

 


제34대 효성왕(孝成王  737~742  재위기간 5년)

 

효성왕(孝成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경이며,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사정부의 승과 좌우 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고쳤다. 이찬 정종을 상대등, 아찬 의충을 중시에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9월, 유성이 태미 성좌에 들어 갔다.

2년 봄 2월, 당 현종은 성덕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좌찬선 대부 형도를 홍려소경의 자격으로 파견하여 조문케하고, 태자태보의 관작을 추증하였으며, 또한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형도가 당 나라를 출발하려 할 때, 황제가 시의 서문을 짓고, 태자 이하 백관들이 모두 시를 지어 보냈다. 황제가 형도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불리우나니 책과 글에 조예가 사당히 깊어서 우리 중국과 비슷하다. 그대는 돈유한 선비이므로 나의 신임표를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경서의 뜻을 강의하여, 대국에 유교가 성한 것을 알게 하라"고 하였다. 황제는 또한 우리 백성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 솔부병조참군 양계응에게 조칙을 내려 부관으로 동행케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바둑 고수들이 모두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이 때 왕이 형도 등에게 금·보물·약물 등을 후하게 주었다. 당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려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여름 4월, 당 나라 사신 형도가 노자 [도덕경] 등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소부리군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3년 봄 정월, 왕이 조부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중시 의충이 사망하자, 이찬 신충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선천궁이 낙성되었다. 형도에게 황금 30냥과 베 50필, 인삼 100근을 주었다.
2월, 왕의 아우 헌영을 파진찬에 임명하였다.
3월, 이찬 순원의 딸 혜명을 왕비로 맞았다.
여름 5월, 파진찬 헌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가을 9월,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여우가 월성궁에서 울었는데, 그것을 개가 물어 죽였다.

4년 봄 3월, 당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부인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여름 5월, 토성이 헌원 성좌의 큰 별을 범하였다.
가을 7월, 붉은 옷을 입은 여자 한 명이 예교 밑에서 나와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다가, 효신공의 대문을 지나간 후로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8월, 파진찬 영종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이보다 앞서 영종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들어오자, 왕이 그를 몹시 사랑하여 은총이 날로 심하였다. 왕비는 이를 질투하여 자기 친척과 함께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이리하여 영종이 왕비와 그의 친척 무리들에게 원한을 갖게 되어 반역을 한 것이다.

5년 여름 4월, 대신 정종·사인으로 하여금 쇠뇌를 쏘는 군사들을 검열하게 하였다.

6년 봄 2월, 동북쪽에서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여름 5월,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다. 유언에 따라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불에 태우고,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742~765  재위기간 23년)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이며, 효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한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다.

원년 겨울 10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2년 봄 3월, 주력공의 집에서 소가 한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여름 4월, 서불한 김 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3년 봄 정월, 이찬 유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겨울에 이상한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말들이 그릇만 하였다. 이 별은 열흘 만에 사라졌다.

4년 봄 정월, 이찬 김 사인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그 크기가 달걀 정도였다.
5월, 가뭄이 들었다.
중시 유정이 퇴직하자, 이찬 대정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 동궁을 수리하고, 또한 사정부와 소년감전과 예궁전을 설치하였다.

5년 여름 4월, 죄수들을 대사하고, 백성들을 위한 큰 연회를 베풀었다.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6년 봄 정월,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고,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3월,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뭄이 들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사방에 특사를 보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위로하였다.

7년 봄 정월,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처음으로 정찰 한 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여 바로 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 등을 파견하여 북쪽 변경을 시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8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 박사 한 명과 누각 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9년 봄 정월, 시중 대정이 사직하자, 이찬 조량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어룡성에 봉어 두 명을 두었다.

11년 봄 3월,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 동궁아관을 두었다.
겨울 10월, 창부에 사 3명을 더 두었다.

12년 가을 8월,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그가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13년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 정도였다.
5월, 성덕왕의 비석을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를 바쳤다.
가을 7월, 왕이 관원을 시켜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였다.
8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시중 조량이 퇴직하였다.

14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그 아버지를 봉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후히 주고, 동시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신라가 당 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두 탑은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 해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을 7월,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이·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이찬 김 기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15년 봄 2월, 상대등 김 사인이, 해마다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난 사실을 들어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시국 정치의 옳고 그름을 극렬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 들였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 제일의 직위를 주었다.

16년 봄 정월, 상대등 김 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신충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서울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
가을 7월, 영창궁을 중수하였다.
8월, 조부에 사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를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다.['良州'는 '梁州'로 쓰기도 한다.]

17년 봄 정월, 시중 김 기가 죽자, 이찬 염 상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이 교서를 내려서,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휴가를 만 60일 이상 얻은 자는 해직으로 인정하였다.
여름 4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자를 선발하여, 내공봉을 맡도록 하였다. 율령 박사 두 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 왕자가 탄생하였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고, 16곳의 절에 벼락이 쳤다.

18년 봄 정월,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조부·예부·승부·선부·영객부·좌우의방부·사정부·위화부·예작전·태학감·대도서·영창궁 등의 대사를 주부로 개칭하였으며, 상사서·전사서·음성서·공장부·채전 등의 대사를 주서로 개칭하였다.
2월,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사의로,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3월, 혜성이 나타났다. 이 혜성은 가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19년 봄 정월, 서울 동쪽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이를 귀신이 치는 북 소리라고 말하였다.
2월, 대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또한 대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춘양교의 두 다리를 놓았다.
여름 4월, 시중 염 상이 퇴직하고, 이찬 김 옹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7월,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20년 봄 정월 초하룻날,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고 햇무리가 보였다.
여름 4월, 혜성이 나타났다.

21년 여름 5월, 오곡·휴암·한성·장새·지성·덕곡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2년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혔다.
8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 옹이 퇴직하였다. 대내마 이 순은 왕의 총신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 갔는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그 후 왕이 풍악을 즐긴다는 말을 듣고 그는 즉시 대궐문으로 찾아갔다. 그는 왕에게 "제가 듣건대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황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로 인하여 정치가 문란하고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앞에 가는 수레 바퀴가 엎어지면 뒷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 하여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허물을 고치고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소서"라고 간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게 하고, 그를 큰 방으로 인도하여 도리의 오묘함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며칠 동안이나 들었다.

23년 봄 정월, 이찬 만종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이 시중이 되었다.
3월, 혜성이 동남쪽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 밑에 나타났다가 얼마 안되어 날아갔다.
겨울 12월 11일, 크고 작은 유성이 나타났는데, 이를 본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24년 여름 4월, 지진이 있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 벼슬을 주었다.
6월, 유성이 심성을 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영태 원년 을사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와 [지리통감]에는 모두 '대력 2년에 신라왕 헌영이 사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765~780  재위기간 15년)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건운이며, 경덕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월부인이며 서불한 의충의 딸이다. 왕이 즉위했을 때 나이가 여덟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하였다.

원년에 죄수들을 대사하고, 왕이 태학에 행차하여 박사에게 상서를 강의하게 하였다.

2년 봄 정월,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양리공 집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이었다. 다리 하나는 위로 향하였다.
강주에서 땅이 내려앉아 연못이 되었는데, 넓이가 50여 척이고 검푸른 물빛이었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북소리 같았다.

3년 여름 6월, 지진이 있었다.
별 세 개가 대궐에 떨어져 서로 부딪쳤다. 그 빛이 불같이 솟아 올랐다가 흩어졌다.
9월, 김포현에서 벼 이삭이 모두 쌀로 변하였다.

4년 봄,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여름 5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서울에 벼락이 치고 우박이 내려 초목이 상하였다.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그 소리가 벼락 소리 같았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다.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다.
가을 7월,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반도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포위하였다. 왕의 군사가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모두 처형하였다.
9월,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이찬 신유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김 은거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5년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메뚜기 떼가 생겼다. 가뭄이 들었다. 왕이 백관들에게 각자 아는 인물을 천거하게 하였다.
겨울 11월, 치악현에서 쥐 8천여 마리가 평양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6년 봄 정월, 왕이 서원경에 행차하였는데, 도중의 주와 현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3월, 흙비가 내렸다.
4월, 왕이 서원에서 돌아왔다.
5월 11일, 혜성이 오거성좌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에 사라졌다.
29일, 호랑이가 집사성에 들어왔으므로 잡아 죽였다.
가을 8월, 대아찬 김 융이 반역하다가 사형당하였다.
겨울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12월, 시중 은거가 퇴직하자 이찬 정문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9월, 이찬 양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11년 봄 3월, 이찬 김 순으로 시중을 삼았다.
여름 6월, 이찬 김 은거가 반역하다가 처형당하였다.
가을 8월, 이찬 염 상이 시중 정문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12년 봄 정월, 왕이 교서를 내려 백관들의 관직 이름을 모두 이전대로 복구하였다.
왕이 감은사에 행차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2월, 왕이 국학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3월, 창부에 사 8명을 더 두었다.

13년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지진이 다시 발생하였다.
상대등 양상이 상소하여 시국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겨울 10월, 이찬 주원이 시중이 되었다.

15년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백좌 법회를 열었다.

16년 봄 정월, 누런 안개가 끼었다.
2월, 흙비가 내렸다.
왕이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들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 아무 때나 법도를 잃고 놀러 다니며, 기강이 문란하여 재난과 이변이 자주 발생하였으므로, 인심이 이반되고 사직이 위태로웠다. 이찬 지정이 반란을 일으키고 반도를 모아 대궐을 포위하여 침범하였다.
여름 4월, 상대등 김 양상이 이찬 경신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지정 등을 죽였다. 왕과 왕비는 이 난리 중에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양상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왕이라 하였다. 대비 신보왕후는 이찬 유성의 딸이고, 다음 왕비는 이찬 김 장의 딸이었는데, 역사서에는 두 왕비가 궁에 들어온 시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제37대 선덕왕(宣德王  780~785  재위기간 5년)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고, 내물왕의 10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해찬 효방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조부인이며 성덕왕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이며 각간 양품의 딸이다.[아찬 의공의 딸이라고도 한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아버지를 개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의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어룡성의 봉어를 경으로 고쳤다가 경을 다시 감으로 고쳤다.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가을 7월, 왕이 사신을 보내 패강 남쪽의 주와 군을 위무하였다.

3년 봄 2월, 왕이 한산주를 순행하고 주민들을 패강진으로 옮겼다.
가을 7월, 시림 벌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4년 봄 정월, 아찬 체신을 대곡진 군주로 임명하였다.
2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5년 여름 4월, 왕이 왕위를 물러나려 했다. 여러 신하들이 세 번이나 표를 올려 간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6년 봄 정월, 당 덕종이 호부낭중 개 훈을 지절사로 보내 왕을 '검교대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달에 왕이 병으로 누웠고,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과인은 본래 재능이 없고 덕이 적어 왕위에 오를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를 피할 수 없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이래 해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백성의 일상 생활이 곤궁하여졌으니, 이는 모두 과인의 덕성이 백성들의 소망에 부합되니 아니하고, 정치가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과인은 항상 왕위를 물러나 궁궐 밖에 살고자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이 그 때마다 지성으로 말렸기 때문에, 매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었다. 이제 갑자기 병이 나서 다시 회복이 어렵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과인이 죽은 후에는 불교의 법식 대로 화장할 것이며, 유골을 동해에 뿌리도록 하라."
13일에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 785~799  재위기간 14년)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이 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 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현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조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묘당을 헐고, 시조대왕과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 흥평대왕과 부 명덕대왕을 5묘로 정하였다.
문무 백관에게 작위를 한 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가, 제공이 퇴직하자,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3월, 전 왕비 구족왕후를 외궁으로 내보내고, 벼 3만 4천 석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을 고쳐 도독이라 하였다.

2년 여름 4월,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9월, 서울에 기근이 들어 곡식 3만 3천 2백 40석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에도, 곡식 3만 3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3년 봄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4년 봄, 처음으로 독서 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었다.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서 그 뜻을 능히 알고, 이와 동시에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등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5경, 3사,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하였다. 예전에는 활 쏘기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바꾼 것이다.
가을,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무하였다.

5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임명하였는데, 집사사 모초가 반박하여 "자옥은 학문을 잘하여 등용된 것이 아니므로 지방 장관의 관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중이 "비록 학문을 잘하여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일찌기 당 나라에 가서 학생이 된 적이 있으니, 역시 등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왕은 시중의 말을 따랐다.
저자의 견해 : 오직 학문을 닦은 연후에 도리를 알게 되고, 도리를 알고난 이후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을 연마한 뒤에 벼슬을 하는 자는, 사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것을 먼저 바르게 처리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물의 벼리 하나를 들면, 만 개의 그물코가 바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문을 연마하지 않은 자는 이와 반대이니, 사물에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구하게 정신을 지엽적인 것에만 빼앗기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이익을 삼기도 하고, 백성을 까다롭게 규찰하는 것으로 높은 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할지라도 도리어 해가 된다. 그러므로 [학기]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상서]에도 또한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며, 오직 번거롭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으니, 집사 모초의 한 마디는 만대의 모범이 될 만하다.

6년 봄 정월, 종기를 시중에 임명하였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이 공사를 하였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금성과 진성이 동정성좌에 모였다.
5월, 한산·웅천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7년 봄 정월, 왕태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반역하다가 처형 당했다.
웅천주 대사 향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리고 사람이 얼어 죽었다.
시중 종기가 퇴직하자, 대아찬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내성 시랑 김언이 3중 아찬이 되었다.

8년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미인 김 정란을 바쳤다. 그녀는 국색으로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 왕자 의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9년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내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

10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태자 의영이 사망하자 시호를 헌평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망은루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11년 봄 정월,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형량을 낮추어 주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12년 봄,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시중 언승이 병부령이 되고, 이찬 지원이 시중이 되었다.

13년 가을 9월, 동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하여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사직하였다. 아찬 김 삼조가 시중이 되었다.

14년 봄 3월, 대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 대사 석남오의 아내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당서]에는 '정원 14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

 

 

제39대 소성왕(昭聖 王 또는 昭成王  799~800  재위기간 1년)

 

소성왕['昭聖'을 '昭成'으로도 쓴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준옹이며,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이며 대아찬 숙명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그의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7년에 죽었으므로 원성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원성은 5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고, 6년에 파진찬으로 재상이 되었고, 7년에는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고, 11년에는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왕이 붕어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원년 봄 3월, 청주의 거노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정하였다.
냉정현령 염 철이 흰 사슴을 진상하였다.
여름 5월, 왕의 아버지인 혜충 태자를 혜충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우두주 도독이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했다.
"소와 비슷한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그 짐승의 몸체는 길고 크며, 꼬리 길이가 석 자 쯤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데, 현성천에서 오식양을 향하여 갔습니다."
가을 7월, 길이가 아홉 자인 인삼을 얻었다.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서 사신에게 주어 당 나라에 바쳤다. 덕종은 인삼이 아니라하여 받지 않았다.
8월,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로 추봉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2년 봄 정월, 왕비 김씨를 왕후로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렸다. 서란전에 쳤던 발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6월,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소성이라 하였다.

 

 

제40대 애장왕(哀莊王  800~809  재위기간 9년)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청명이며, 소성왕의 태자이었다.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이다.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하였다.
앞서 원성왕이 붕어하였을 때, 당 나라 덕종이 사봉낭중겸어사중승 위 단을 지절사로 보내 조문하게 하고, 또한 왕 준옹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위 단이 운주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왕이 또 붕어하였다는 말을 듣고 돌아 갔다.
가을 7월, 왕이 이름을 중희로 고쳤다.
8월, 당 나라에 가서 숙위했던 학생 양열에게 두힐소수 벼슬을 주었다. 예전에 당 나라 덕종이 봉천으로 피난갔을 때, 양열이 난리 중에 공을 세웠다 하여, 황제가 우찬선대부 벼슬을 주어 귀국시켰기 때문에 왕이 그를 발탁한 것이다.

2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두 묘는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 및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대왕, 조부 혜충대왕, 아버지 소성대왕을 5묘로 정했다.
병부령 언승을 어룡성 사신으로 임명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초하루 임술일에 꼭 있어야 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 화성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고, 우두주에서는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날씨가 아주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아찬 김 주벽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8월,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고, 거짓 왕자로 꾸며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이를 사양하였다.

4년 여름 4월, 왕이 남쪽 교외로 행차하여 보리 농사를 시찰하였다.
가을 7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5년 봄 정월, 이찬 수승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냥을 바쳤다.
가을 7월, 알천 강가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임해전을 중수하고,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 있던 돌이 일어났다. 웅천주 소대현 부포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9월, 망해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6년 봄 정월, 왕의 어머니 김씨를 태왕후로 봉하고, 왕비 박씨를 왕후로 봉하였다. 이 해에 당 나라 덕종이 사망하자, 새로운 황제 순종이 병부낭중겸어사대부 원 계방을 보내 부고를 전하고, 또한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 어머니 숙씨를 대비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하였다.
가을 8월,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겨울 11월, 지진이 있었다.

7년 봄 3월, 일본국 사신이 오자,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새로 절을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또한 불교행사에 고급 비단을 사용하지 못하며, 금은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담당자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당 나라 헌종이, 숙위하던 왕자 김 헌충을 귀국하게 하고, 그에게 시비서감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8년 봄 정월, 이찬 김 헌창['昌'을 '貞'이라고도 한다.]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이 숭례전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였다.
가을 8월, 큰 눈이 내렸다.

9년 봄 2월, 일본국 사신이 오자 왕이 후대하였다.
김 역기를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역기가 황제에게 "정원 16년에 조서로 신라의 전 임금 김 준옹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왕모 신씨를 대비로 책봉하고, 왕의 아내 숙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책봉사신 위 단이 도중에서 왕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현재 그 책문이 중서성에 있사오니, 청컨대 지금 제가 귀국하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황제는, "김 준옹 등의 책문은 응당 홍려시가 중서성에서 수령해와서 김 역기에게 주어 그가 가지고 귀국하도록 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이어 왕의 숙부 언승과 그의 아우 중공 등에게 문극을 하사하고, 이를 신라가 그들의 기준과 예규에 따라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왕이 12도에 특사를 보내 모든 군과 읍의 경계를 획정하였다.
가을 7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10년 봄 정월, 달이 필성 성좌를 범하였다.
여름 6월, 서형산성 소금 창고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벽사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날씨가 크게 가물었다.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 이찬 제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왕의 아우 체명이 왕을 시위하고 있다가 함께 살해당했다. 왕의 시호를 애장으로 추증하였다.

 

 

제41대 헌덕왕(憲德王  809~826  재위기간 17년)

 

헌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왕은 이보다 앞서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작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이 때에 와서 즉위한 것이다. 왕비는 귀승부인이니 각간 예영의 딸이다.
이찬 김 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 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다. 당 헌종은 직방원외랑섭어사중승 최 정을 정사로, 인질로 가있던 김 사신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새로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 숭빈 등 3명에게 문극을 주었다.

2년 봄 정월,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왕자 김 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 갔다.

3년 봄 정월, 시중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이찬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4년 봄,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가을 9월,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5년 봄 정월,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불이 났다.

6년 봄 3월,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가을 8월,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낮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대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7년 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다. 헌종이 그를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여름 5월, 눈이 내렸다.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큰 별이 익성 성좌와 진성 성좌 사이에 나타나서 서쪽을 향하였다. 그 빛이 길이는 6척 정도였고, 폭은 두 치 가량이었다.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척, 넓이 8척, 높이 3척 5촌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하였다.
여름 6월,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9년 봄 정월, 이찬 김 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다. 가을 7월이 되자 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왕자 김 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10년 여름 6월 초하루 계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11년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상대등 김 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 수종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초적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 운주 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 공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 웅원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12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다.
여름 4월,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다. 청주 도독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가을 7월, 패강 남천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다.
겨울 12월 29일, 큰 우레가 있었다.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수종을 수승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 18일, 완산주 장사 최 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주해와서 변고를 알렸다. 왕은 곧 최 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8명을 파견하여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 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 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다. 성이 점령되자 그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하였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지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그 키는 다섯 자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은 닷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았다.
패강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그 싹은 하룻밤에 높이가 열 세 자, 둘레가 넉 자 일곱 치나 자랐다.
여름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가을 7월 12일,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겨울 12월,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5년 봄 정월 5일, 서원경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9일에는 흰 색·검은 색·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다.
원순·평원 두 각간이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고자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쳤다.
여름 4월 12일, 유성이 천시 성좌에서 나와 제좌를 범하고, 천시 성좌 동북쪽의 원 성좌, 직녀 성좌, 왕량 성좌를 지나 각도성에 이르러 셋으로 나뉘었는데, 북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가을 7월, 눈이 내렸다.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평양은 지금의 양주인데, 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 명산'이라는 글귀가 있다.]
3월,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름 5월, 왕자 김 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 이정·김 숙정·박 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 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 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 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18년 가을 7월, 우잠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재위 18년 보력 2년 병오 4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장경 보력 연간에 신라왕 언승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과 [구당서]에는 모두 태화 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42대 흥덕왕(興德王  826~836  재위기간 10년)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수종이지만, 그 후에 경휘로 바꾸었다. 그는 헌덕왕의 동복 아우이다.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이 별세하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 들이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말했다.
"짝을 잃은 새에게도 자기의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나서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 뿐이었다.[장화의 성은 김씨이고, 소성왕의 딸이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 문종은 헌덕왕이 붕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 원적을 지절사로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이어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 고구려의 중 구덕이 당 나라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오자, 왕이 여러 절의 중을 소집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8월, 금성이 낮에 나타나고,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이 퇴직하였다.

3년 봄 정월, 대아찬 김 우징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눈이 석자나 내렸다.
여름 4월, 청해대사 궁복은 성이 장씨였다.[일명 보고이다.] 그는 당 나라 서주에 건너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청해는 지금의 완도이다.]를 수비하게 되었다.
한산주 표천현에 사는 요망스러운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술수가 있다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미혹되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옳지 않은 방도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 그 자를 먼 섬으로 쫓아 버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문종이 인덕전에서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4년 봄 2월,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바꾸고, 사찬 극정을 파견하여 이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5년 여름 4월,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되자,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시중 우징이 퇴직하고, 이찬 윤분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자 김 능유와 중 아홉 명을 당 나라에 보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갔던 진봉사 능유 등 일행이 귀국하다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7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땅의 빛깔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가을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8년 봄, 나라에 대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11월, 시중 윤분이 사직하였다.

9년 봄 정월,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왕이 서형산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10년 봄 2월, 아찬 김 균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 명이 시중을 맡았다.

11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 의종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아울러 숙위를 들게 하였다.
여름 6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흥덕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

 

 

제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  재위기간 2년)

 

희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제융[제옹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손자 이찬 헌정[초노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이다. 왕비는 문목부인이니, 갈문왕 충공의 딸이다.
이전에 흥덕왕이 붕어했을 때, 그의 종제 균정과 종제의 아들 제융이 모두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이 때 시중 김 명과 아찬 이홍과 아찬 배 훤백 등은 제융을 지지하였고, 아찬 우징은 조카 예징 및 김 양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균정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동시에 대궐로 들어가 서로 싸웠다. 김 양은 화살에 맞아 우징 등과 함께 도주하였고, 균정은 죽었다. 이에 따라 후에 제융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2년 봄 정월, 사형수 이외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아버지를 익성대왕,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로 추봉하였다. 시중 김 명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중으로 삼았다.
여름 4월, 당 문종은 숙위하던 왕자 김 의종을 돌려 보냈다.
아찬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원망에 찬 말을 하고 다니자, 김 명과 이홍 등이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5월, 우징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그의 처자와 함께 황산진 어구로 도주하여, 배를 타고 가서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의탁하였다.
6월, 균정의 매부 아찬 예징이 아찬 양순과 함께 도주하여 우징에게 투항하였다.
당 나라 문종이 숙위 김 충신 등에게 등급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3년 봄 정월, 상대등 김 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하고, 왕의 측근들을 죽였다. 왕은 자신도 무사할 수 없음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시호를 희강이라 하고 소산에 장사지냈다.

 

 

제4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  재위기간 1년)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던 바, 시중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추존하여 선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은 선의태후라 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라 하였으며, 이찬 김 귀를 상대등으로, 그리고 아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 김 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났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서 김 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했다.
"김 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비를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궁복은 "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대답하고, 마침내 군사 5천을 그의 친구인 정 년에게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김 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 장·장 변·정 년·낙 금·장 건영·이 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 민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에 김 양이 낙 금과 이 순행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돌격케 하여, 거의 모두를 섬멸하였다.

2년 봄 윤정월, 김 양의 군사가 주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에 도착하였다. 왕은 김 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의훈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김 양의 군사가 다시 한번 싸워 대승하였다. 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 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제45대 신무왕(神武王  839  )

 

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우징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며, 희강왕의 종제이다. 예징 등이 이미 궁중을 숙청하고, 예절을 갖추어 그를 맞이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의 조부 이찬 예영[효진이라고도 한다.]을 추존하여 혜강대왕이라 하고, 아버지를 성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을 헌목태후라 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을 감의 군사로 삼는 동시에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이홍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처자를 버리고 산림으로 도주하였으나, 왕이 기병을 보내 추격시켜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들이 당 나라로 가는 도중에 치청의 절도사에게 노비를 주었다. 황제가 이를 듣고 먼 지방 사람이라고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귀국시키게 하였다.
왕이 병으로 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왕의 등에 활을 쏘았다. 왕이 잠을 깨어 보니 등에 종기가 났다. 이 달 23일에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신무라 하고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저자의 견해 : 구양자는 "노 환공은 은공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선공은 자적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이며, 정 여공은 세자 홀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위공 손표는 그의 임금 간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이다. 공자가 [춘추]에 그들이 임금된 것을 하나도 빼지 아니하고 일일이 사실대로 전한 것은, 후인들로 하여금 이를 알고 믿게하기 위함이다. 위의 네 왕의 죄는 귀를 가려도 들릴 수 밖에 없는 사실이므로, 이제 사람들의 악행이 거의 없어질만도 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신라의 언승은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김 명은 희강왕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우징은 민애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지금 그 사실을 모두 기록하는 것도 또한 [춘추]의 의도와 동일하다.

 

 


제46대 문성왕(文聖王  839~857  재위기간 18년)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응이다. 그는 신무왕의 태자이며, 그의 어머니는 정계부인이다.[정종 태후라고도 한다.]
8월, 왕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대적을 격멸하였으니, 그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교서를 내리며, 곧 궁복을 진해 장군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장복을 하사하였다.

2년 봄 정월, 예징을 상대등, 의종을 시중, 양순을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 문종이 홍려시에 조서를 내려, 인질 및 기한이 되어 귀국하게 된 학생 총 105명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3년 봄,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일길찬 홍필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그는 일이 발각되자 섬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무종이 신라에 귀국할 관리를 선발하는데, 이전에 신라에 갔던 선위부사충연주도독부사마사비어대 김 운경으로 결정하였다. 무종은 그에게 치주 장사의 직위를 주어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신라의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녕해제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칙명을 전하도록 하였다.

4년 봄 3월, 이찬 위흔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5년 봄 정월, 시중 의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양순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7월, 호랑이 다섯 마리가 신궁의 정원에 들어 왔다.

6년 봄 2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금성이 토성을 범하였다.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시중 양순이 퇴직하자, 대아찬 김 여가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혈구진을 설치하고, 아찬 계홍을 진두로 임명하였다.

7년 봄 3월,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고자 했다. 조정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간의 도는 사람이 지켜야할 큰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하 나라는 도산을 얻어 흥성하였고, 은 나라는 신씨를 얻어 번창하였으며, 주 나라는 포사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진 나라는 여희로 인하여 혼란하였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 사람인데 그의 딸을 어떻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따랐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2월 초하룻날, 해가 세 개 나란히 나타났다.

8년 봄, 청해진의 궁복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지 않는다고 하여 왕을 원망하며, 청해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를 토벌하자니 예기하지 못한 후환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처리할 바를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무주 사람 염장이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군사 한 명도 필요없이 빈 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평소 힘센 사람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가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9년 봄 2월,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였다.
가을 8월, 세자를 왕태자로 봉하였다. 시중 김 여가 사망하자, 이찬 위흔이 시중이 되었다.

10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시중 위흔이 퇴직하자, 파진찬 김 계명이 시중이 되었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11년 봄 정월, 상대등 예징이 사망하자,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었다.
가을 9월, 이찬 김식·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고, 대아찬 흔린이 이에 연루되었으므로 역시 처벌되었다.

12년 봄 정월,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비가 내렸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13년 봄 2월, 청해진을 없애고, 그 지방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당 나라에 갔던 사신인 아찬 원홍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왔다. 왕이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았었다.

14년 봄 2월, 파진찬 진량이 웅주 도독이 되었다.
조부에 불이 났다.
가을 7월, 명학루를 중수하였다.
겨울 11월, 왕태자가 죽었다.

15년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서남 지방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17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서남 지방의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겨울 12월, 진각성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 갔다.

19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들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밤낮으로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 전전긍긍하면서도, 세 명의 재상과 여러 신하들의 보좌에 의지하여 왕위를 유지해왔다. 이제 나는 갑자기 병에 걸린지 열흘이 지났으니, 정신이 혼몽하여 아침 이슬 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폐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서불한 의정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래도록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기를 만하다. 이에 나는 무거운 책무에서 벗어나,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그것을 맡기려 하는 바, 그것을 부탁할 적임자를 얻었으니,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살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위대한 기약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 부여하는 정해진 몫이다. 세상을 뜨는 자는 하늘의 이치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에 남는 자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지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혹시라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 나라 전체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왕이 7일 만에 붕어하였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제47대 헌안왕(憲安王  857~861  재위기간 4년)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우정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무왕의 이복 아우이다. 그의 어머니는 조명부인이니 선강왕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 김 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 남쪽 강변에서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 넓이가 6척이었다.

3년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특사를 보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왕이 교서를 내려, 제방을 축수하고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모았을 때, 왕족 응렴이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생각을 알고자 하여 갑자기 "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가?"라고 물었다. 그는 "제가 일찌기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어떤 행위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 말로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라고 말하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 보고 말했다. "그대는 자중자애하라. 내가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왕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은 금년에 스무살이요, 동생은 열 아홉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의 부모는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형이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그 중은 "형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가지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응렴이 곧 "제가 감히 마음 대로 결정을 못하겠사오니, 다만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아뢰니, 이에 왕이 맏딸을 시집 보냈다.

5년 봄 정월,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했다. "과인이 불행하게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전에 선덕·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61~875  재위기간 14년)

 

경문왕<景文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응렴['응(膺)'을 '의(疑)'라고도 한다.]이며,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계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광화['광의'라고도 한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영화부인이다.

원년 3월, 왕이 무평문에 나아가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정월, 이찬 김 정을 상대등,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 입당사인 아찬 부량 등의 일행이 익사하였다.

3년 봄 2월, 왕이 국학에 가서, 박사 이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경서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1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의 아우를 둘째 왕비로 삼았다. 그 후 왕이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대사가 전에 말했던 세 가지 이익이란 무엇인가?" 중이 대답하였다. "형과 결혼하면 그것이 당시에 왕과 왕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왕과 왕비가 기뻐하여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째 이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둘째 이익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세째 이익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4년 봄 2월, 왕이 감은사에 가서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일본국 사신이 왔다.

5년 여름 4월, 당 의종이 정사 태자우유덕어사중승 호 귀후와 부사 광록주부겸감찰어사 배 광 등을 보내 선왕을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비단 1천 필을 부의로 주고,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관직을 임명하는 문건 한 통·황제의 신임표 한 벌·비단 5백 필·옷 두 벌·금 은 그릇 일곱 개를 주고, 왕비에게는 비단 50필·옷 한 벌·은 그릇 두 개를 주고, 왕태자에게는 비단 4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고, 대재상에게는 비단 3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고, 다음 재상에게는 비단 2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었다.

6년 봄 정월, 왕의 선친을 의공대왕으로 봉하고, 어머니 박씨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로 봉하고, 부인 김 씨를 문의 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왕태자로 삼았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겨울 10월, 이찬 윤흥이 아우 숙흥·계흥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으로 도주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그들을 붙잡아 참수하고, 삼족을 처형하였다.

7년 봄 정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홍수가 나고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겨울 10월, 사신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2월, 객성이 금성을 범하였다.

8년 봄 정월, 이찬 김 예·김 현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가을 8월, 조원전을 중수하였다.

9년 가을 7월, 왕자인 소판 김 윤 등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동시에 말 2 필·부금 1백 냥·은 2백 냥·우황 15냥·인삼 1백 근·대화어아금 10 필·소화어아금 10 필·조하금 20필·마흔새 흰 세모직 40필·설흔새모시 40필·넉자 5치 짜리 머리털 150냥, 석자 다섯치 짜리 머리털 3백 냥·금비녀·오색 댕기·반흉 각 10개·응금쇄선자병분삽홍도 20개·신양응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응은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응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요자금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요자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요자은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요자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금화응삽령자 2백 과·금화요자령자 2백 과·금루응미통 50 쌍·금루요자미통 50 쌍·은루응미통 50 쌍·은루요자미통 50 쌍·계응비힐피 1백 쌍·계요자비힐피 1백 쌍·슬슬전금침통 30 구·금화은침통 30 구·바늘 1천5백개를 바쳤다. 또한 학생 이 동 등 세 사람으로 하여금 진봉 사신 김 윤을 수행케 하여 당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고, 그들에게 책값으로 은 3백 냥을 주었다.

10년 봄 2월, 사찬 김 인을 당 나라에 보내 숙위를 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왕비가 죽었다.
가을 7월, 홍수가 났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11년 봄 정월, 왕이 관리에게 명령하여, 황룡사 탑을 개축하게 하였다.
2월, 월상루를 중수하였다.

1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국내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9월, 황룡사 탑이 낙성되었는데, 9층으로 되어 있고, 높이가 스물 두 장이었다.

14년 봄 정월, 상대등 김 정이 죽으니, 시중 위진을 상대등, 인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와 황제의 말을 선포하였다.
5월, 이찬 근종이 모반하여 대궐을 침범하므로, 대궐 지키는 군사를 출동시켜 격파하였다. 근종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 밖으로 도주하는 것을 추격 체포하여 수레에 매어 찢어 죽였다.
가을 9월, 월정당을 중수하였다.
최 치원이 당 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15년 봄 2월, 서울과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
여름 5월, 용이 왕궁의 우물에 나타났는데, 잠시 후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 들면서 날아 갔다.
가을 7월 8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6  재위기간 11년)

 

헌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정이며,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문의왕후이며, 왕비는 의명부인이다. 왕은 성품이 명민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찬 위홍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2월, 황룡사에서 모든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이 직접 가서 들었다.
3년 봄 정월, 고려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4년 여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의 난이 일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중지하였다.
8월,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5년 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다.
3월, 왕이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이라고 하였다.[고기에는 이 사건이 왕위에 오른 첫해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여름 6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준례문에 행차하여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11월, 왕이 혈성 벌에서 사냥을 하였다.

6년 봄 2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시중 예겸이 사직하자, 이찬 민공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쳐 왔다.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 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찌기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7년 봄 3월,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8년 여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10 개를 바쳤다.
겨울 12월, 고미현 여자가 한번에 삼형제를 낳았다.

9년 봄 2월, 왕이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11년 봄 2월,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다.
3월, 최 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12년 봄, 북쪽 진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쪽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상주하면서, 그것을 가져다 바쳤다. 그 판자쪽에는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 다섯 글자가 씌여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병으로 편치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가을 7월 5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제50대 정강왕(定康王886~887  재위기간 1년)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황이며,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8월,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하였다.

2년 봄 정월,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강론을 들었다.
한주 이찬 김 요가 모반하므로, 군사를 보내 그를 처형하였다.
여름 5월, 왕이 병들자 시중 준흥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 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을 7월 5일,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제51대 진성왕(眞聖王  887~897  재위기간 10년)

진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만이며, 헌강왕의 누이 동생이다.[최 치원 문집 제2권 사추증표에는 "신하 탄은 말합니다. 삼가 하명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비 응을 태사로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을 태부로 추증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납정절표에는 "저의 맏형인 국왕 정이 지난 광계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는 태어난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경문왕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한 정강왕 황은 광계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년 봄 2월, 소양리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원래부터 각간 위 홍과 간통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궁중에 들어 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대구 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게 하였는데, 이를 삼대목이라고 불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왕은 젊은 미남자 두 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에 따라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 때 누군가가 이름을 감추고 시정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그를 수색케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누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에 숨어 사는 거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체포하여 서울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왔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옛 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없이 푸를 뿐인가.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왕이 이를 두려워하여 거인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들어 편치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중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왕의 병이 곧 나았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3년,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 때 원종·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내마 영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가 반도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자, 촌주 우연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참수하고, 나이가 10여 세인 우연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4년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였다.

5년 겨울 10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이 그의 부하 궁예로 하여금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 주천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하였다.

6년, 완산의 도적 견훤이 주에 웅거하여 후백제라고 자칭하였다. 무주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7년, 병부 시랑 김 처회를 당 나라에 보내 정절을 바치게 했는데, 그는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8년 봄 2월, 최 치원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을 작성하여 바쳤다. 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 들이고, 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그는 장군이라고 자칭하였다.

9년 가을 8월, 궁예가 저족·성천의 두 군을 탈취하고, 또한 한주 관내의 부약·철원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였다.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왔다. 왕이 마음 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뒷수레에 태우고, 행재소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바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므로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에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10년, 도적들이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남들과 구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인가를 위협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11년 여름 6월, 왕이 측근들에게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 되었노라"라고 말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선양하였다. 이에 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했다.
"신하 아무게는 아룁니다. 희중의 관직에 처하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이가 열댓 살이 되었고, 종실을 흥성케할 자질이 있기에, 인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국가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



제52대 효공왕(孝恭王  897~912  재위기간 15년)

 

효공왕<孝恭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요이며, 헌강왕의 서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다.

2년 봄 정월, 왕의 어머니 김씨를 의명 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군에 도읍을 정하였다.

3년 봄 3월,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가을 7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은, 궁예가 자기를 배반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함께 그를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비뇌성 아래까지 진군하였으나, 양길의 군사가 패하여 도주하였다.

4년 겨울 10월, 국원·청주·괴양의 도적 두목 청길과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5년, 궁예가 왕을 자칭하였다.
가을 8월, 후백제왕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금성 남쪽으로 군사를 옮기면서 부근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6년 봄 3월, 서리가 내렸다.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7년, 궁예가 도읍을 옮기기 위하여, 철원과 부양에 와서 산수를 둘러 보았다.

8년, 궁예가 백관을 두어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제정한 관직 칭호는 비록 신라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신라의 제도와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 원년이라 하였다.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9년 봄 2월, 별이 비 오듯 떨어졌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8월, 궁예가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면서, 죽령 동북 지역까지 이르렀다. 왕이 국토가 나날이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으나,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모든 성주들에게 명령하여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게 수비하도록 하였다.

10년 봄 정월, 파진찬 김 성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이전에 당 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김 문울의 관직이 공부원외랑기왕부자의참군에 이르렀는데, 그가 책명사가 되어 돌아왔다.
여름 4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11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일선군 이남 10여 성을 전부 견훤에게 빼앗겼다.

12년 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월, 서리가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13년 여름 6월, 궁예가, 장수들이 병선을 거느리고 와서 진도군의 항복을 받고, 또한 고이도성을 격파하도록 명령하였다.

14년,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나주성을 포위하여 열흘동안 풀지 않았다. 궁예가 수군을 출동시켜 그를 습격하니,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1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첩에게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이 충간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은영은 그 첩을 죽여 버렸다.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 만세라 하였다.

16년 여름 4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효공이라 하고,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기간 5년)

 

신덕왕<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예겸(銳謙)'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다. 그는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원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2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지진이 있었다.

3년 봄 3월, 서리가 내렸다.
궁예가 연호 수덕 만세를 정개로 고쳤다. 이 해가 정개 원년이다.

4년 여름 6월,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맞부딪쳐서, 물결 높이가 20장 가량 솟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멈추었다.

5년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는데 우레같은 소리가 났다.

6년 봄 정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가을 7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기간 7년)

 

경명왕<景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승영이며, 신덕왕의 태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의성왕후이다.

원년 8월, 왕의 아우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년 봄 2월, 일길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되었다.
여름 6월,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가을 7월, 상주의 도적 두목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년, 사천왕사의 소상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상대등 김 성을 각찬, 시중 언옹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년 봄 정월, 왕이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다.
2월, 강주 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진례로 진군하였다. 왕이 아찬 김 율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다.

5년 봄 정월, 김 율이 왕에게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과 9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황룡사에 중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다. 그가 말하였다. "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 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일찌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을 정하여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저자의 견해 : 옛날 명당에 앉아서 나라를 이어받는 옥새를 쥐고, 아홉개의 솥을 진열하여 놓는 것, 그것이 마치 제왕들의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한퇴지가 평론하기를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태평 성세의 기초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세 가지 기물을 소중하다고 한 것은, 과장된 자의 말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라의 소위 세 가지 보물은 또한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이들이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 [맹자]에는 "제후의 보배가 세 가지이니, 곧 토지·백성·정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초서]에는 "초 나라에는 보물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고, 오직 선을 보배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선은, 국내에서 실천하면 족히 한 나라를 선하게 할 것이며, 국외로 실천하면, 족히 천하에 은혜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니, 이밖에 또 무엇을 보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전설을 듣고 물었을 뿐이며, 그것을 숭상할만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2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태조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6년 봄 정월, 하지성 장군 원봉과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 성을 순주라 하였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다. 이 달에 진보성 장군 홍 술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7년 가을 7월, 왕이 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하여 태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왕이 창부 시랑 김 낙과 녹사 참군 김 유경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8년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 절도사 왕 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6월, 왕이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 악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다.
가을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  924~927  재위기간 3년)

 

경애왕<景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위응이며, 경명왕의 동복 아우이다.

원년 9월,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겨울 10월,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 보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태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3년 여름 4월,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까지 진군하였다. 태조가 모든 성에 명령하여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조는 사신에게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4년 봄 정월,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다.
2월, 병부 시랑 장 분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후당에서는 장 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인 병부 낭중 박 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판관인 창부 원외랑 이 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하였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직접 가서 근암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 봉규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지강주사 왕 봉규가 사자 임 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다.
강주 관하의 돌산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 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 갔다. 견훤은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

 

 

제56대 경순왕(敬順王  927~935  재위기간 8년 )

 

경순왕<敬順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이다. 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원년 11월, 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에 침입하여,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2년 봄 정월, 고려 장수 김 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여름 5월,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의 장군 왕 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하였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년 여름 6월, 천축국의 삼장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 봄 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예전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 태조는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5년 봄 2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주었다.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 시랑 김 불, 부사로 사빈경 이 유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8년 가을 9월, 남극성이 나타났다.
운주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 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나의 백부 잡간 억렴이 지대야군사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곧 현종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으로 봉하였다. 공이 송 나라 흥국 4년 무인에 붕어하니, 호를 경순[효애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신라 시조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는 금궤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하강하였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 연간에 우리 나라에서 상서 이 자량을 송 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 부식은 글 쓰는 임무를 맡아 보좌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우신관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숙소에서 접대를 맡은 학사 왕 보가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곧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영원히 선도산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화상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송 나라 사신 왕 양이 지은 동신성모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 노릇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이제 다만 이러한 전설이 생긴 시초를 고찰해 본 것이다.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히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받았기 때문에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신라는 중국 군사의 위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와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 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 여화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할 것이다. 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국토를 송 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 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1권~12권)   신라본기 끝>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