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신라 천년고도 경주

吾心竹--오심죽-- 2009. 1. 14. 13:15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어떻게 말살..
 
박병역 위원
▲  신라 진지왕때 화랑 미시랑이 당나라 군사에 맞서 신라를 지키고 당나라를 무찌르는 내용의 공연
 
7천만 대한민족이 신라 천년의 왕도로 굳게 믿었던 경북 경주(慶州)는 조국을 배신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엉터리로 지정한 가짜 도읍지(都邑地)로 명확히 입증(立證)되었습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마침내 9주를 두었다. 본국 국경 내에 3주를 두었는데, 왕성(王城:금성) 동북쪽의 당은포(唐恩浦) 항성(項城)으로 향하는 길목에 상주(尙州)를 설치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에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34 잡지3 지리1]

옛 백제국의 영토에 3주를 두었는데, 백제의 옛성 북쪽의 웅진(熊津)을 웅주(熊州:충남 공주)라 하고 서남쪽을 전주(全州:전남 전주)라 하고 다음에 남쪽을 무주(武州:전남 광주)를 설치했다.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서쪽으로부터 첫 번째가 한주(漢州:경기도 광주)이고 그 다음 동쪽이 삭주(朔州:강원도 춘천)이고 또 그 다음 동쪽이 명주(溟州:강능)이다.
신라는 9州(주)에 郡縣(군현)을 설치하여 관리한 곳이 무려 450현이었다. (지방의 향리와 部曲(부곡)등은 복잡하여 그 목록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의 지리는 광활하게 뻗어 실로 극찬 할만 하였으나 마침내 국력은 쇠약하자 정치는 황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그렇게 강활 했던 국토도 날로 쪼그라들어 마지막 신라왕인 金傅(김부)를 우리 고려 太祖(태조:왕건)께서 귀부시키고 慶州(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9주(九州)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다. 신라의 5소경제(五小京制)는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國原小京 ;충주)이 설치되고, 선덕왕 8년(639)에 북소경(北小京 ; 지금의 강릉)이 설치되었다. 신라 삼국통일시대는 아시촌 소경의 북소경은 폐지하고, 문무왕 20년 북원소경(北原小京:원주)과 금관소경(金官小京:김해)을 각각 설치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남원)을 설치하고 국원소경을 중원소경(中原小京)으로 개칭함으로써  비로소 5소경제가 완비되었다.

 <이병도가 지정한 9주 5소경의 현재지명>
 
 7천만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釋(주석)

신라 9주의 완전은 이미 신문왕 5년의 일이지만 경덕왕(742-764년)때에는 단지 그 명칭을 漢式化(한식화)한데 불과하며 또 그 九數(9수)란 것도 중국의 九州(9주)를 모방한 것이다. 9주중 尙,良,康(상,양,강)의 3주는 신라 및 伽倻(가야)의 地(지)에 漢,朔,溟(한,삭,명)의 3주는 옛 고구려의 남부에 熊,全,武(웅,전,무)의 3주는 백제 故地(고지)에 설치한 것이다. 라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왕에 충성한 이병도는 우리민족을 철저히 비하(卑下)했습니다.

1.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현행 국사의 신라

[신라의 건국과정(중학교 국사)]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있던 사로국에서 시작되었다(기원전 57). 신라는 박, 석, 김 3성의 시조 설화에서 보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적 통합이 늦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등 60쪽] :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당은]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하구의 기벌포(충남 서천군 장항)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당이 설치한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함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후략)

◈ 이병도의 엉터리 신라 3주(三州) 

상주에만 10군이 속했으나 경상북도에 10군이 있습니다.

(1). 상주(尙州) → 경상북도 상주(尙州)


 
(2). 良州(양주)  → 경상남도 김해(金海) 

▶양주의 경상남도에 대구시, 경산, 영천군이 속해 있습니다. (뒤죽 박죽 양주)

양주는 文武王(문무왕) 5년 上州(상주)와 下州(하주)의 지역을 할당하여 歃良州(삽양주)를 설치하고 神文王(신문왕) 7년 성을 쌓았는데 주위의 둘레가 1,260보 였으며 景德王(경덕왕)이 개명하여 良州(양주:梁州(양주:경남 양산군일대)이며 지금의 [경남] 金海(김해)이다.

양주는 義安郡(의안군), 密城郡(밀성군), 火王郡(화왕군), 壽昌郡(수창군:大邱), 獐山郡(장산군), 臨皐郡(임고군), 東萊郡(동래군), 東安郡(동안군), 臨關郡(임관군), 義昌郡(의창군)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이 있고, 김해소경과 12郡(군)을 良州(양주)라 하였다.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慶州)가 경상남도에 있습니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 경주(慶州)는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에 있습니다.

<大城郡>, 本仇刀城>境內, 率伊山城․茄山縣>[一云驚山城.]․烏刀山城等三城, 今合屬 <淸道郡>. 約章縣, 本惡支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東畿停, 本毛只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34卷-志3-地理1-26
 
大城郡(대성군)은 본래 仇刀城(구도성)이며 境內(경내)에 率伊山城(솔이산성)과 茄山縣(가산현:일명 驚山山城(경산산성)과 烏刀山城(오도산성)의 三城(3성)을 합한 군인데 지금은 淸道郡(청도군)에 속한다. 約章縣(약장현)은 본래 惡支縣(악지현)이였으나 景德王(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合屬(합속)시켰다.東畿停(동기정)은 본래 毛只停(모지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의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商城郡>, 本西兄山郡,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南畿停, 本道品兮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中畿停, 本根乃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西畿停, 本豆良彌知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北畿停, 本雨谷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莫耶停, 本官阿良支停[一云北阿良],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商城郡(상성군)은 본래 西兄山郡(서형산군)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의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南畿停(남기정)은 본래 道品兮停(도품혜정)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中畿停(중기정)은 본래 根乃停(근내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의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西畿停(서기정)은 본래 豆良彌知停(두량미지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北畿停(북기정)은 본래 雨谷停(우곡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莫耶停(막야정)은 본래 官阿良支停(관아양지정:일명 북아량)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상기 본문에서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에 신라 천년의 慶州(경주)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월성군의 慶州(경주)가 어찌하여 경상남도의 良州(양주)에 속해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경남 金海(김해)]에 12군 중에 壽昌郡(수창군:지금의 大邱(대구)이 속해 있습니다.
7천만 대한민족이 오늘날 까지 신라의 천년 王京(왕경)으로 굳게 믿었던 慶州(경주)는 조국을 배신하고 죽을 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충견(忠犬:똥개) 이병도가 엉터리로 지정한 가짜 王都(왕도)로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서가 필요하겠습니까? 
   
(3).  康州(강주) → 경남 진주(晋州)

신라는 경상남도에 晋州(진주), 良州(양주) 2주와 金海(김해) 소경이 있습니다. 더구나 [경남 강주에 경상북도의 고령군(대가야국),칠곡군, 성주군이 속해있습니다] 
 

62년간 왜독에 넋을 잃은 7천만 동포여...!

개가 하늘을 향해 멍멍 짖으며 슬피 통곡하고, 저~ 소가 대한민족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비웃고 있습니다. 정녕 참과 거짓의 역사도 분별 할 수 없는 얼빠진 민족인가? 다음의 3주 지방 연혁을 탐독하시고 한 번만 생각하시면 고질적 왜독(倭毒)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 상주(尙州)의 연혁

[삼국시대] :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상주에 사벌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중략)
사벌국은 백제와 신라의 영토확장에 눌러 서기 249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첨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된 사벌국은 법흥왕 12년(525년)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여 이등(伊登)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는 지방구획을 5州로 나누고 지방장관을 군주라 했다. 이

때부터 신라에 편입되어 5개州의 하나가 되었다.(중략)

[통일신라시대] : 신문왕 5년(685년) 지방행정을 개편하면서 전국을 9州 5小京으로 편성하였는데 상주는 9州에 속하여 주치소(州治所)가 설치되었다. 신문왕 7년(687년)에 상주성을 축조하였다.(중략) 경덕왕은 757년에 사벌주를 오늘날의 尙州로 개칭하였다.(중략)

고려시대의 현종 1012년 상주에 안동대도호부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였고 1014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경주로 옮기고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8道 지방제도는 폐지되어 23府 331郡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하여 전국 23府를 13道로 정비하였다. 대한제국 고종 1905년 전국을 8도로 개편하고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전국은 13道 3,335面, 경상북도는 41郡 507面으로 정비되었고, 상주군은 당초 31面에서 21面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단동·단서·단남·단북의 4면은 비안군(比安郡:지금 의성군)에 영순·산동· 산서·산남·산북의 5面은 문경시에 넘겨주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 9월 30일 도의 관찰사를 장관으로 개칭하고 府에 부윤, 郡에 군수, 面에 면장을 두었다. 1912년 시가지 및 도로정비 명목으로 상주성(尙州城)이 훼철되고 1924년 최종 남아있던 南門마저 없어 졌다.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은 12府 218郡 2,517面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함창군 7面이 3面으로 개편되어 상주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 22面은 15面으로 개편되어 상주군은 18個面으로 정비되었다.

1917년 6월에는 面制가 공포되어 面에서는 교육사무를 제외한 관내의 모든 공공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道의 장관을 도지사(道知事)로 개칭하고 경찰권을 행사하였다.[허허 참 신라의 경덕왕 16년(757년)에 사벌주를 오늘날의 尙州로 개칭하고 혜공왕 12년(776년)에 1州 10郡 30현을 관할했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1931년 4월 1일 읍면제(邑面制)실시로 상주面이➜ 邑으로 승격하여 상주군은 1邑 17面을 관할하였다.]

1945년 이후 우리지역은 정치·경제·군사 등의 중심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우리지역을 비켜가게 되었고, 낙동강을 이용한 水運 역시 그 역할을 철도에 넘겨주었으며, 상공업 발달에 따른 농업지역으로서 남게 된 것이 낙후의 요인이었다.1949년 7월 4일 법률 제32호로 공포되어 같은 해 8월 15일 시행된 지방자치법에 의거 지방행정조직은 특별시, 도, 시, 군, 읍,면, 리, 동으로 하였다.

1966년 7월 1일 모서면 서부출장소등 5개 출장소가 설치되고,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가 문경시 가은읍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상주읍에 중부 등 4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1월 1일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89 년 1월 1일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윤직 2리)가 점촌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4월 1일 화북면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1일 市·郡이 도농복합시로 통합되어 1읍 17면 7동이 되었다. 1998년 10월 12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앙동이 동문동으로 편입되어 1읍 17면 6동이 되었다. [상주시 연혁 참조]

상주시민 여러분...! 신라의 3주 중의 상주가 1979년 5월 1일 상주읍이 되었습니다. 

[2]. 진주(강주)의 연혁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이며, 신라 3국통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 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市長)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주시 연혁 참조]

[3]. 경주시(慶州市) 연혁

경주시 주변의 산곡은 석기시대부터 우리조상들의 주거지로 일찍부터 6촌이 있었다.
수도를 금성(金城)으로 칭하기도 했으나 국명과 수도명을 동일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경도중에 178,9367호가 1,360坊에 나뉘어 살고 있었으며 35체의 금입택, 4절유택의 호화주택지가 있었다. 성중(城中)에는 한 채의 초가집도 없었으며, 기와집이 서로 처마를 이었고, 노래와 피리소리가 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태조 18년(935) 신라가 고려에 병합 되던 해 경주로 개칭하였다.
목종 5년(1002) [경주]를 안동금주대도호부(安東金州大都護府)로 개칭하였다. 목종 11년(1008) 주군현에 별칭을 사용할 때 낙랑군(樂浪郡)이라고 칭하였다. 고려 현종 21년(1030) 3경제도를 실시하여 경주는 동경(東京)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태종8년(1408) 경상도감영을 상주(尙州)로 이동 좌우병영만 남았다. 태종 1413년 계림부(鷄林府)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다. 고종 32년(1895)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할 때 경주군으로 개칭하고 이듬해 경상북도 경주군으로 되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 11호로 부군면 폐합에 따라 장기군의 양북(陽北), 양남 2개면이 편입되었다(13면) 1931년 4월1일 부령(府令) 제 130호로 읍면제 실시에 따라 [이때 비로소] ☞ 경주면(慶州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후략)
경주시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2001년 288,915명이었다. [경주시 연혁 참조함]

경주시민 여러분...! 신라의 5소경에도 없는 경주가 어찌 왕도가 될 수 있습니까?

★ 신라의 5소경(五小京)

1. 국원소경(國原小京 : 충주 (中原)
2. 북원소경(北原小京 : 원주 (北京)
3. 금관소경(金官小京 : 김해 (東京)
4. 서원소경(西原小京 : 청주 (西京)
5. 남원소경(南原小京 : 남원 (南京) 입니다.
경주(慶州)는 신라 천년의 도읍지가 아닙니다.


7천만 대한민족에게 알립니다.

[문헌상] 신라 천년의 도읍지 경주(慶州)는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에 기록돼 있으며 경상남도에 있습니다. 한반도 속의 경주는 신라 천년의 가짜 왕도로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한편 신라 3주의 상주, 강주(진주), 양주(김해)의 연혁(沿革)에서 일제식민지시대에 읍면(邑面)의 인구도 충족되지 못한 3주 지역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과 대륙 속의 신라 대국을 한반도 속으로 억지로 얽어 맞추기 위해 일제식민지시대에 모든 지명을 개명(改名)한 사실이 명백히 밝혀 졌습니다.

[삼국사기의 신라 지리(地理)의 고증(考證)]을 입증하여 가짜 왕도로 밝혀졌다면 더 이상 무슨 증서가 필요하겠습니까? 본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은 한(韓), 중(中), 일(日) 3국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정통사서의 삼국사기의 문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공사중인 천년의 빛을 상징하는 경주 타워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신라 천년의 가짜 도읍지로 지정한 경주는 지금 ‘천년의 빛, 천년의 창’을 주제로 9월 7일부터 10월 26일까지 50일 동안 영상, 공연, 체험, 참여, 전시 등 4개 부문 20여 행사로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이 펼쳐진다. 고 보도했습니다.

지금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시 신평동 보문관광단지 내 5만4000여 평에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을 조성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명소로 건설 중에 있습니다. 지금 신라 천년의 왕국 화려한 부활를 주제로 한 대규모 역사테마 신라밀레니엄파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입습니다. 신라 천년의 가짜 왕도로 밝혀진 경주는 오늘로서 죽었습니다.

경주시민은 9월 7일부터 10월 26일까지 50일 동안 축제분위기 보다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자숙(自肅)하며, 조곡(弔哭)의 북소리를 하늘 높이 울려퍼지게 하고, 신라를 지극히 사랑하신 하느님에게 제천의례(祭天儀禮)부터 행해야 새로운 경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경주를 문화관광 명소로 조성 한 후에 경주를 찾아오는 세계의 모든 관광객들에게 나라를 잃고 한반도 속으로 쫓겨 온 [비운의 대한민족 역사]를 홍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금일 진실을 밝히는 뉴스 http://pluskorea.net/ 연재를 통해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어떻게 말살, 왜곡, 변조한 우리역사의 질곡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나라는 환국의 환인, 배달국의 환웅, 고조선 삼한의 단군왕검과 북부여의 해모수는 천제(天帝)입니다. 그리고 삼한 중 변한의 기자(箕子)와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과 가락국의 김수로왕 등은 모두다 神人聖者(신인성자)이며, 우리나라는 모두 다 천제와 성군(聖君:天子(천자)이 개국한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매년 국왕이 친히 삼신(하느님)에게 제사(祭祀)를 주제하는 장손국의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오직 천자(天子)만이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主祭)할 수 있으며, 곧 황제(皇帝)입니다.
 
다음은 [제사장의 신라는 황제국이다] 가 연재됩니다.
 
박 병 역  위원 프로필
 
△ 종합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역사문제 자문위원
△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 한국 고대사 탐구원 원장
△ 국가원로위원회 자문위원
△ 정통국사편찬회 집현전 대표
△ 국사편찬위원회 주최 초청강연 
[[전남조은신문/pluskorea]]
기사입력: 2007/05/11 [17:47]  최종편집: ⓒ 뉴스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