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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충렬왕(忠烈王,1274~1308재위34년)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57

제25대충렬왕(忠烈王,1274~1308재위34년)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거, 초명은 심(諶) 또는 춘이다.
그는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 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1272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풍속인 변발(辯髮)과 호복(胡服)을 하여 고려인들은 탄식, 우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1274년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충렬왕의 즉위는 고려의 왕실역사에서 많은 것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은 이번이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역대 권신들의발호에 억눌려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충렬왕은 철저한 친원정책을 표방하여 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즉위년 10월 일본정벌이 원세조의 강요로 실행되어 1차로 여원연합군이 합포(合浦)에서 출정, 대마도는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의 힘으로 무찔렀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정벌은 실패하였다. 1281년에 감행된 2차정벌도 폭풍을 만나 실패로 끝났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세조의 죽음으로 동정은 그쳤다. 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여당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와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할 것을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 이 싸움은 1년반 만에 원병의 협력으로 끝났는데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에까지 침입하였으며, 이때 원충갑(元沖甲)·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이 컸다.

  이밖에도 야인(野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 하였다. 원나라의 압력 밑에서도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여 최탄(崔坦)이 몽고에 반 부함으로써 생긴 동녕로(東寧路)를 원세조에게직접 환부요청을 하여 1290년 돌려받아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고,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고에 함락되어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 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다. 원나라의 간섭은 직접 행정에도 미쳐 관제가 분수에 넘친다고 고치기를 강요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 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치고 육부(六部)도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 그리고 조(祖)·종(宗) 대신에 왕(王)을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忠]자를 붙이게 되었으며, 선지(宣旨)도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또한, 일본정벌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어 내정을 간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밖에 몽고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으니 몽고식 기병이 야간순 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禿魯花)가 되었다가 순번제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은 홀지(忽赤, 忽只), 몽고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문관(通文官)등이 있고, 관직은 아니지만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私屬人)등이 있었다. 이곳 소속 관원들은 사전(賜田)의 특권을 누리고,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 당대 세력가들로 부상하여 부역에 시달려 도망하는 양민을 모아 농장(農 莊)을 경영하고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州縣)의 부세(賦稅)를 좀먹어 양민을 괴롭혔다. 또 특수임무를 띤 별감(別監)이 자주 주현에 파견됨으로써 지방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 시켰고 이로써 매를 관리하는 응방의 적폐는 특히 심하였다. 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 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이해 8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 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고, 부자간의 이간을 일삼는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의 무리에 귀기울여 왕위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동조하여 1305년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이 커 원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짐으로써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에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開城 소재)이다.
                                                                         서문출처:
미르나라


  충렬왕의 휘는 거요 옛 휘는 심 또는 춘이니 원종의 장자요 모는 순경태후 김씨이며 고종23년 병신 2월 계축에 탄생하였다. 46년 6월에 고종이 붕어하매 원종이 태자로서 원에 입근하였는데 왕이 그때 태손으로서 유서를 받아 국사를 권감
1)하였다. 원종 원년 8월에 태자로 책봉되고 13년에 원에 갔다 15년에 원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공주에게 장가들었으며 6월 계해에 원종이 붕어하매 갑자에 백관이 본궐에 모이어 멀리 존봉하여 왕을 삼았다. 무진에 리부원외랑 곽희빈과 낭장 조정통이 바둑을 잘둠으로 써 제의 소명을 받고 원에 갔다. 추 7월에 원이 동지상도류수사 장환을 보내어 왕으로 책봉하였다. 병수에 김방경이 정동선봉별초를 거느리고 먼저 길2)을 떠났다(계행). 임진에 추밀원사 박구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8월기유에 원이 일본정토도원수 홀돈을 보내와 경군 458인을 가발할 것을 명하였다. 무수에 왕이 원으로 부터 돌아오니 백관이 마천정에서 영접하였다. 반행한 원사가 조서를 받들어 먼저 입경하고 왕은 장전에 거동하여 백관의 배례를 받고 의장을 갖추어 먼저 제상궁에 나아가 빈전에 배알하였다. 기사에 편복과 급정으로 본궐에 행차하여 다시 포홀을 갖추고 조서를 강안전에서 받으니 그 조서에 이르기를 「국왕의 재세시에 여러번 세자가 가히 계승할만 하다 하므로 이제 세자를 명하여 국왕을 승습하여 관장케하니 무릇 소속에 있는 이는 함께 절제를 청종하라」고 하였다. 왕이 조서 받기를 마치자 경령전에 배알하고 강안전에 환어하여 황포를 입고 즉위하여 군신의 조하를 받고 인하여 조사를 향연하는데 조사가 왕이 부마임으로써 왕을 남향토록 추양하고 조사는 동향하며 달로화적은 서향하여 앉았다. 왕이 행주하매 조사가 절하며 받고 마신 뒤에 또 절하는데 달로화적은 서서 마시고 절하지 아니하거늘 조사가 말하기를 「왕은 천자의 부마인데 늙은 것(노자)이 어찌 감히 이와같이 하는가 우리들이 돌아가서 아뢰면 네가 무죄할 줄 아느냐」하니 답하기를「공주가 계시지 아니하고 또 이것은 선왕시의 예라」고 하였다. 경오에 소경 조유를 동녕부에 보내어 도망한 인물을 추쇄하였다. 제도의 하즉위 전을 제례케 하였다. 계유에 동정부원수 홍다구가 충청도의 초공3) 수수가 기일내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여 부부사대장군 최면을 장형하고 대부경 박휘로써 대치하였다. 이분성으로 추밀원집주를 삼았다.  9월 을해에 김련으로 참지정사를 이분희 김신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병자에 원사를 향연하였다. 임오에 왕이 대행왕의 빈전에 나아가 비로소 참쇠와 마질4)를 입고 군신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을유에 소릉에 장례하고 상복을 벗고 사판궁에 이어하였다. 무자에 왕이 재추를 인견하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현군은 반드시 충량을 힙입어 능히 평강을 이루는 것이니 아가의 안위는 다만 경등에게 있는지라 일의 가히 말할만한 것이 있거든 함
치 아니할 것이다」하였다. 을축에 추밀원부사 기온을 보내어 공주를 원에서 맞이하였다. 임진에 원에 들어갈 때의 시종한 신료에게 아울러 상사를 가하고 품질이 한정된 자도 허통하였다. 갑오에 친히 관정도장을 본궐에서 설하였다. 무수에 제안공 숙과 지추밀원사 정자여를 원에 보내어 (제녀의) 리강5)한 것과 습작한 것을 사하였다. 제상궁 중서성으로써 사관을 삼았는데 환도 이래로 사관을 경영치 못하여 실록을 받들어 본궐 불당고에 가장하였던 것이다. 동 10월 을사에 도독사 김방경으로 중군을 거느리게 하여 박지량 김흔으로 지병마사를 삼으며 임개로 부사를 삼고 김흔으로 좌군사를 삼고 위득유로 지병마사를 삼으며 손세정으로 부사를 삼고 김문비로 우군사를 삼고 라유와 박보로 지병마사를 삼으며 반부로 부사를 삼아 삼익군이라 이름하고 원의 도원수 홀돈과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류부향으로 더불어 몽한군 25000 아군 8000 초공 인해 수수 6700과 전함 900여소로써 일본을 정벌하는데 일기도에 이르러 1000여급을 격살하고 길을 나누어 써 나아가니 왜인이 달아나매 시체가 삼대같이 쓸어졌다. 일모에 이르러 늦추어주었더니 마침 밤에 큰 풍우가 있어 전함이 암애에 부딪쳐 많히 파손되고 김신은 익사하였다. 무신에 이분성으로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신해에 친히 본궐에서 삼계를 초제하였다. 대부주부 탁지기가 부장이 허갈하고 공비가 번중하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함으로써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무오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신유에 서북면에 행차하여 공주를 맞이하는데 순안공 종과 광평공 혜 대방공 징 한양후 현 평장사 유천우 지추밀원사 장일 지주사 이분희 승선 최문본 박항과 상장군 박성대, 지어사대사 이분성이 종행하였다. 왕은 분희 등이 개체6)치 아니한 것을 책하니 대답하기를 「신등이 개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례를 기다릴 뿐 입니다」라고 하였다. 몽고속에 두정을 깎아 전액에 이르게 하여 그 모양을 모나게 하고 털을 그 가운데 남겨두어 그것을「겁구아」라 하였는데 왕은 입조하였을 때에 이미 개체하였는데 국인은 하지아니 함으로 책한 것이다. 갑자에 이분성에게 명하여 경성에 돌아가 비빈과 및 모든 궁주와 재추부인으로 하여금 다 공주를 출영케 하라하고 종신을 용천역에 머물러 두고 홀로 개체한 자 대장군 박구 등으로 더불어 행차하니 승선 박항이 왕에게 말하기를 「사관은 인군의 동작을 기록하는 것이매 하루라도 없을 수 없다」라고 하니 이에 직사관 이원으로 하여금 종행케 하였다. 병인에 왕이 서경에 이르렀는데 그때 서경은 동녕부에 속하였는지라 왕이 은과 저포를 내어 량초를 바꿔 써 종신에게 급여하였다. 정묘에 왕이 공주를 숙주에서 만났는데 서경대흥부 록사 양수 등이 왕께 청하여 써 따라가거늘 최탄이 길을 막고 붙들어갔다. 11월 정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서울(개경)에 이르러 죽판궁에 입어하였다. 이에 앞서 유천우가 장일에게 말하기를 「왕이 만일 융복으로 성에 들어가면 국인이 놀래고 해괴하게 생각할 것이라」하여 이에 최문본 박항으로 하여금 왕에게 례복으로써 들어올 것을 청하고 또 강윤소 간유지로 하여금 두번째 청하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 하였다. 유지는 천한 종인데 배우로써 사랑을 얻어 랑장에 배한 것이다 재상과 백관이 국청사 문전에서 맞이하는데 윤소와 송분이 윤수 원경 정손기등을 사주하여 방맹이를 가지고 말을 달려 례복한 자를 쳐 쫓으니 시종은 차서를 잃고 분산하였다. 왕이 공주로 더불어 련를 같이하고 성에 들어오니 부노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100년 싸움(봉적)끝에 다시 태평시(절)을 보겠도다」라고 하였다. 갑신에 강수형으로 추밀원부사 판위위사사 상장군을 삼았다. 을유에 본궐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설하고 익일 대회하니 공주가 의봉누측에 장막을 치고 관람하였다. 정해에 변윤으로 지문하성사를 박구로 수사공 좌복사를 삼았다. 신묘에 홀적(몽고어의 호위병) 강윤소등이 왕과 공주를 향연하였다. 정유에 왕씨를 책봉하여 정화궁주로 왕녀를 정녕궁주로 삼았다. 기해에 동정의 군사가 합포에 돌아오거늘 동지추밀원사 장일을 보내어 위노하니 군사로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13500여인이었다. 12월 기사에 판합문사 이신손과 장군 고천백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고 또 별전을 부쳐서 아뢰기를 「소방이 자래로 주군수령을 분견하여 농상을 권과케 하고 또한 제도안찰사로 하여금 씨뿌리고 거두는 일을 독찰케 하였는데 근래에 해마다 관군을 공급하여 백성이 자못 조폐하거늘 이제 만일 상국이 또 제도권농사를 보낸다면 남은 백성이 원래의 공부를 공급할 자 얼마이며 권농의 명령을 응부할 자 얼마나 되겠는지 아직도 국명이 있으니 생각컨대 성의에는 이지경에 까지 이르지는 아니하리라고 여기실 것입니다 소한은 삼한의 땅이 한번 천안을 거치지 못하였음으로 신을 무망한다고 여기시면 바라옵건대 강명중실한 신하를 보내어 그 허실을 살피시와 권농하는 일은 일절 신에게 위임하여 신이 장차 백성을 타이르고 그 근태를 간정하여 써 성상의 우민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병오에 비 정순왕후를 추존하여 순경태후로 삼았다. 갑인에 원이 흑적을 보내와 달로화적7)을 삼았다. 을묘에 사판궁에 이어하였다. 정사에 재추가 의론하기를 「김시중이 만일 돌아오면 반드시 곧 개체할 것인즉 개체하기는 한가지인지라 어찌 먼저하지 아니하리오」하고 이에 송송례 곽자여가 개체하고 조회하니 다른 이는 다 본받는데 오직 초노 소유8) 전리는 다 옛것을 그대로 지켰다. 처음에 인공수가 항상 원종에게 원속을 본받아 외양을 고치고 의복을 바꾸기를 권하니 원종이 말하기를「나는 차마 일조에 조종의 가풍을 갑자기 변할 수 없으니 내가 죽은 후에 경 등은 맘대로 하라」고 하였다. 경신에 원종의 혼전의 료속과 국자감원 등에게 명하여 구복을 잉착케 하였다. 경오에 시중 김방경 등이 환군하니 홀돈은 포노한 동남여 200인을 왕과 공주에게 바치었다.

  해을 원년 춘 정월 계유 삭에 조하를 쉬고 군신을 거느려 멀리 정단을 하하고 서전에서 향연하였다. 병자에 동정원수 홀돈과 홍다구 류복형이 북으로 돌아갔다. 정축에 정화궁주가 공주를 향연하고 좌우환사에게 선물을 주었다(궤유9)). 무인에 공주를 책봉하여 원성공주로 삼았다. 경진에 시중 김방경과 대장군 인공수를 원에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소방이 근래 역적을 소제함으로 인하여 대군의 량향을 이미 해마다 매호에 거두고 게다가 왜민을 정토함으로써 전함을 수조하매 장정은 다 공역에 나아가고 노약이 겨우 경종하는데 일찌기 가물다가 늦게 큰물이 져서 화곡이 등장치 못하여 군국의 수요를 빈민에게 수감하여 한말 한되 까지 다 기울여 바치고 벌써  목실과 초엽을 캐어먹는 자가 있으니 백성의 조폐가 이때보다 더 심함이 없는데 하물며 군사는 상하고 물에 빠져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아 비록 유민이 있으나 가히 세월로써 그 소생을 기할 수 없음에 오리까 만일 다시 일본에 거사한다면 그 전함과 병량은 실로 소방의 능히 지판할 바가 못되고 나라가 이미 피폐하여 부지할 수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의 눈이 이르지 못하니 응당 말하기를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는고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애애한 정성을 부수하사 애애한 호소를 조금 량찰하소서」라고 하였다. 을유에 죽판궁에 이어하였다. 2월 기유에 부달노화적 주세창이 졸하였다. 병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시안공인이 졸하였다. 무진에 왕의 생일 수원절이라 하였다. 경오에 원이 만자군 1400인을 보내와 해주 염주 백주의 3주에 분처케 하였다. 3월 경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원이 선유일본사로 례부시랑 은세충과 병부랑중 하문저를 보내왔다. 무자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정동군의 체류한 자를 독촉하여 써 돌아갔다. 신묘에 왕과 공주가 북산 락산사에 행차하였다. 문하시중 김방경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그때 왕이 서경에 피서하기를 청하였더니 제가 허락하였다. 계사에 랑장 간유지 등을 서경에 보내어 피서할 땅을 보게 하였다. 을미에 친히 장경도장을 설하였다. 하 4월 기유에 왕과 공주가 현성사에 행차하여 제를 위해 복을 빌었다(축리). 임자에 원이 도적 100여인을 탐라에 류배하였다. 경신에 왕과 공주가 흥왕사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옴에 미쳐 재추가 약왕원 남봉에서 향연하였다. 5월 임신에 충청도안찰사 김응문이 왕의 뜻을 거스리매 파면되고 중랑장 엄수안으로써 대임하였다. 갑수에 왕이 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시신을 거느리고 시복으로 서문밖에서 맞이하니 (조사는) 곧 5명의 승려였다. 재신 홍록주에게 명하여 경령전에서 제사 일을 보게하였는데 제기(변두)가 결핍하므로 내전 정사색10)에 빌려 써 제하였다. 기묘에 좌복사 박#의 제택에 이어하였다. 서해도 도휘사가 상언하기를 「본도의 공부가 경오년으로부터 포흠이 많은 것은 안찰사와 및 수령의 죄이나 좌우창의 고정별감도 동죄이오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가 조금뒤에 좌우의 청으로 인하여 그 직에 복직케하였다. 임진에 달로화적 흑적이 사람의 궁시가지는 것을 금하였다. 6월 경자 삭에 일식하였다. 신축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원경 등 10인을 원에 보내어 매(응)를 바치었다. 경수에 랑장 장득청과 대정 곽빈기가 촉호사를 따라 다니며 세를 의지하여 뢰물을 받다가 가구소에 포수되었다. 득청과 빈기가 안찰사의 탄핵한 바 되어 법사가 율을 따져 단죄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내료와 결탁하고 스스로 포수을 청한 것인데 류방(류유11))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계축에 처음으로 선전소식12)을 마련하였다. 병진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로써 탐라의 적당으로 주현에 도익한 자를 사하였다. 무오에 원종의 목주를 혼전에 신어를 안화사에 봉안하였다. 갑자에 새로 독로화13)에게 3등을 뛰어(초) 직을 주도록 정하고 도교서승 한사기는 복사 강의 아들이오 추밀 이분희의 제인데 나이 20이 못되었는데도 8품을 초배하니 사람들이 많이 그르게(비) 여겼다. 정묘에 공주 생진이므로 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진에 외산기은별감을 충청 경상 전라 동계도에 분견하였다. 기사에 왕이 병환이 나매 이죄이하를 석방하고 섬에 귀양간 자는 이면하여 서울에 오게 하였다. 홍자번에게 명하여 지이산에 제사케 하였다. 추 7월 병자에 승덕부에 이어하였다. 갑오에 달로화적 흑적이 돌아갔다. 원종이 복위할적에 흑적이 조서를 받들고 왔는데 성질이 사휼하여 믿기가 어렵더니 달로화적이 됨에 미쳐서는 심히 거만하거늘 왕이 여러번 억제하매 감히 그 뜻을 방자히 하지 못하다가 이에 이르러 돌아감을 고하거늘 왕과 공주가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였다. 동지추밀원사 허공과 장군 조인규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케 하는데 공주가 흑적이 참소할가 두려워하여 식독아를 함께 보내어 그의 소위를 엿보게 하였다. 8월 계묘에 죽판궁에 이어하였다. 을사에 제상궁을 뜯어 오대사를 수리하였다. 정미에 제주 달로화적이 사자를 보내와 수졸을 감독하거늘 왕이 김광원 등에게 명하여 사령병을 조발할제 비록 근시를 겸한 자라도 모두 첨발하여 장군 양공적 등으로 하여금 령행하도록 하였다. 신해에 원경이 원으로 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흔도 등이 요자를 함부로 잡는 것을 금하고 다만 윤수 이정 원경으로 하여금 잡아 길러서 바치게 하니 왕이 이에 제도의 #자잡는 자를 금하였다. 무오에 왕과 공주가 현성사에 이어하였다. 임수에 공주가 병이 남으로 장군 고천백을 원에 보내어 의사를 청하였다. 9월 계유에 사판궁에 이어하였다. 정해에 대성에 명하여 각각 직언을 진주케 하였다. 무자에 원이 사신과 및 검공 고내를 보내왔는데 고내가 원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고려에는 일본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하였기 때문에 보낸 것이었다. 정유에 공주가 아들 원을 사판궁에서 낳았다. 동 10월 신축에 의춘후 해가 졸하였다. 강수에 원이 악탈연과 강수형을 보내오거늘 왕이 선의문외에 출영하였다. 조에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모든 왕씨가 동성을 취처하니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미 우리와 일가가 되었으니 스스로 더불어 통혼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찌 일가의 의리라 하랴 그리고 또 우리 태조황제가 13국을 정벌하매 그 왕들이 다투어 미녀 량마 진보를 바친 것은 너도 들은 바인 것이다 왕이 아직 왕이 되지 아니 하였을 때에 태자라 일컫지 아니하고 세자 일컬었으며 국왕의 명을 예전에는 성지라 하였던 바 이제는 선지라 하는데 관호로서 조정과 같은 자도 또한 그런 류인 것이다 또한 듣건대 왕과 공주가 하루에 미 2승을 먹는다하니 이것은 재상이 많아 스스로 전천하는 까닭일 것이다. 무릇 이것은 다 너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오 구태어 너로 하여금 자녀를 공납하고 관명을 고치고 재상을 감하라는 것은 아니다. 흑적이 와서 말한 너희 나라 일은 하나뿐 아니로되 모두 청허하지 아니하였으니 너는 알아둘지어다」라고 하였다. 임자에 장차 처녀를 원에 바칠 것이라 하여 국중의 혼가를 금 하였다. 병진에 최지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는데 때에 사고가 많았으므로 선화 가갈14)하는 것을 제거하였다. 임수에 관제를 개정하였다. 원이 장치 다시 일본을 정벌함으로써 김광원을 보내어 경상도 도지휘사를 삼아 전함을 수조케 하였다. 11월 계유에 관제를 고쳤음으로 종묘에 고하였다. 을해에 부도관세음보살상 12구를 그리고 법석을 궁중에 설하여 제를 위하여 축복하였다. 경진에 본궐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설하였다. 계미에 첨의찬성사 유천우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고 관제 고친 것을 고하고 처녀 10인을 바치었다. 계사에 부부사를 제도에 분견하였다. 원이 사신을 보내와 군기를 만드는데 기거랑 김제를 함께 경상 전라도에 보내어 민간의 전우와 족철을 거두게 하였다. 12월 기미에 혼전에 행차하여 칠우제14)를 거행하였다. 갑진에 장군 고천백과 식독아를 원에 보내어 명년에 친조할 것을 청하였다. 을사에 감찰사는 상장군 강윤소가 천예에서 기용된 것을 탄핵하여 파면케 하였다. 정미에 대방공 징을 보내어 의관자제 10인을 거느리고 원에 가 독로화가 되게하고경령전 5실의 백은찰기를 사하였다. 강신에 김방경으로 상주국을 삼고 기홍석으로 군부판서 응양군상장군을 삼았다. 이달에 원이 중서원외랑 석말천구를 보내어 부달로화적을 삼았다.

  병자 2년 춘 정월 정묘 삭에 군신이 왕께 하정할제 폐백을 쓰거늘 명하여 내탕의 은과 저포를 사하여 그 비용을 지변케 하고 해마다 상례로 하도록 하니 원수 흔도와 달로화적 석말천구도 각각 말을 바쳤다. 을해에 법석을 보제사에 베풀어 제를 위하여 축복하고 매양 성갑일15)이 될 때마다 거행하니 시인이 을해법석이라 일렀다. 병자에 제가 명하여 전함 및 전족만드는 것을 제거케 하였다. 정축에 원이 별고리를 보내와 역서를 반포하고 조해 이르기를 「사시가 어기지 아니하매 봉역16)을 추수하여 기년하고 만국이 같이하는 바인데 하물며 계림의 수삭17)이리오 구전을 상고하여 대화18)를 반포하노라 이제 지원 13년의 역일  1본을 사하노니 경은 그 농시를 경수하여 더욱 전정19)(의제)을 지킬지어다 그대의 번선20)의 힘을 빌어서 평질의 공21)을 도웁도록 하리라.  남무22)의 백성을 부지런하게 이끌어 유타함이 없도록하여 동수23)의 풍속으로 하여금 크게 변하여 화협케 되면 모든 공적이 이룩될 것이니 짐의 말을 폐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기묘에 원이 사신을 보내와 철을 요구하였다. 경인에 소윤 박서가 장차 안서도호부로 가려하는데 재추가 말하기를 「안서는 생권군24)이 모인 곳이라 수관이 적임이 아니면 능히 제어하지 못할가 합니다. 소윤 김감이 구변도 있고 또한 일찌기 김방경의 남정할 때 좌막이 되어 자못 몽한군의 실정과 거짓을 잘아니 청컨대 (박)서에 대신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청주가 조폐함으로써 판관을 임시로 파하였다. 임진에 왕과 공주가 달로화적으로 더불어 묘곶에서 사냥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을미에 흔도의 처가 왕을 향연하고 잉하여 량마를 바쳤다. 2월 병신 삭에 흔도의 처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임인에 유천우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전자에 바친 바 처녀는 다만 최전과 최지수의 딸만을 머물러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환하였다. 을사에 락을 궁문에서 사열하는데 왕이 공주로 더불어 보고 은과 포를 사하였다. 정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본궐에 행차하였다. 기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니 사녀가 거리를 메워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어찌 오늘에 다시 승평한 구의를 보리라 일렀으리오」하였다. 3월 기사에 흔도가 왕을 향연하였다. 신미에 승 2000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중랑장 장득정을 원에 보내어 철을 바쳤다. 갑수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랑장 이인을 원에 보내어 행궁의 량료를 청하고 또한 은을 가지고 초25)를 바꿨다. 정축에 우설이 내렸으므로 사하기를 「내가 부덕으로써 기업을 사수한지 우금 3년인데 장차 공주로 더불어 천자에게 조회하려는 바 하늘의 꾸지람이 자주 나타나니 감26)히 두렵지 아니하리오 재변을 없애고자 할진대 마땅히 수은을 베풀어야할 것이니 불충 불효외에 이죄이하는 다 사제하라」하였다. 무인에 왕과 공주가 승천부에 행차하여 조수를 관람하였다. 기미에 응방27) 사람이 세력에 기대어 백성을 사나웁게 다룸으로 중랑장 원경 등을 제도에 보내어 규치하였다. 갑신에 달로화적이 힐난해 말하기를 「선지라 칭하고 짐이라 칭하고 사라 칭하니 무슨 참월한 일이냐」하거늘 왕이 첨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으로 하여금 해명케 하기를 「감히 참월함이 아니라 다만 조종의 상전하는 구례를 따를 뿐이었던 바 감히 고치지 아니하리오」하고 이에 선지를「왕지」로 짐을「고」로 사를 「유」로 주를「정」으로 고치었다. 경인에 강안전에 행차하여 장경도장을 설하였다. 윤월 정유에 원이 림유간 및 회회인 아실미리를 보내와 진주를 탐라에서 채취하였다. 경자에 염전 1000여호가 불탔다. 갑진에  삼계대초를 강안전에 설하였다. 신해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천수사 남교에서 사냥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계축에 원이 전자에 바친바 독로화(질자)는 의관의 자제가 아니라하여 다 돌려보내었다. 을묘에 녕월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곡란과 같아서 조작이 맞고는 다 죽었다. 경신에 유사에게 명하여 하향을 종묘에 거행케 하였는데 왕이 장차 4월 4일에 경사에 조회함으로 써 이날을 택하여 쓴 것이었다. 갑자에 원이 양중신을 보내어 폐백을 가지고 오니 귀부군 500인의 빙처를 위함이었다. 왕은 과부 처녀 추고별감28) 정랑 김응문 등 5인을 제도에 보내었다. 이에 앞서 경상도 둔변관군 두목이 중서성에 상신하여 말하기를 「고려인이 무시로 역마를 타서 쇠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일 타변이 있으면 때에 미치지 못할가 걱정이라」하니 중서성이 이첩하여 금하거늘 비로소 답자색29)을 세웠던 바 응문 등은 각각 포마(마필의 배급)답자를 받아가게 되었다. 하 4월 경오에 귀화부곡 소복별감을 두었다. 신미에 기우제(우)를 지냈다. 계유에 왕과 공주가 도라산에 행차하였다. 탐라성주가 래조하거늘 명하여 4품의 아래에 서위케 하였다. 병자에 원이 귀부군에게 칙하여 그 반을 철귀케 하거늘 이에 김응문 등을 추환시켰다. 5월 정유에 지첨의부사로 치사한 장일이 졸하였다. 을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본궐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장군 고천백이 원으로 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친조를 정지토록 칙명하였다. 임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6월 을축에 왕이 봉원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대장군 윤수와 중랑장 박의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정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죽판궁에 행차하여 신궁의 기지를 보았다(상). 임신에 임유간이 진주를 탐라에서 캐다가 얻지 못하매 이에 백성이 소장한 100여매를 취하여 원에 돌아갔다. 원이 반오30)를 합포군에게 사하였는데 태송에 역마 153필을 사용하였다. 임오에 비를 제사에서 빌었다. 병수에 경령전의 인종진영을 령통사에 옮기고 원종진영을 경령전에 부하였다. 정해에 밀직부사 최문본이 졸하였다. 신묘에 비가 내렸다. 임진에 참문학사 유천우가 졸하였다. 추 7월 을미에 원종을 종묘에 부하고 평장사 이세재 채정으로써 배향하였다. 병신에 류경으로 첨의시랑 #성사 감수국사 판판도사사를 삼고 이분희로 지밀직사사를 삼았다. 정유에 장군 차신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에게 중금 70필을 사하였다. 원이 옥연생을 보내어 탐라의 인물을 추쇄하였는데 연생은 사도 정의 서자로서 진도가 패할 때에 원에 몰입한 자였다. 무수에 도병마사가 말하기를 「독로화(질) 자제로서 경사에 갔다가 청탁하여 돌아온 자는 청던대 모두 면관하고 반전31)의 은 저와 국신마를 추징하라 하거늘 왕이 허락하되 면관하는 것만은 면제하도록 하였다. 병오에 원이 사신을 보내와 금을 캐었다. 계축에 대장군 인공수 및 달로화적을 보내어 김을 홍주에서 캐었는데 다만 2전(중)을 얻었다. 중찬 금방경과 직사관 문연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왕이 중서성에 상서하기를 「일은 달로화적 경역 장국강은 명민하고 청평하여 백성이 덕을 보았는데 임기(과기32))가 이미 찼으니 빌건대 류임케 할 것이며 일은 소방의 칭제가 상국과 달라서 전자에 몽사한 16근평의 1연과 10근반의 등자(추) 1반과 3근2량의 등자 1분는 중외에 두루 쓰여지지 못하니 빌건대 다시 평자와 등자 각 500을 사하소서」하였다. 갑인에 원사가 달로화적인 석말천구의 소범을 문초하였는데 자복하지 아니하므로 포수하거늘 왕이 박구를 보내어 청하니 이에 석방하였다. 8월 갑자에 도병마사가 적향이었던 상주 청주 해양 진도 등주의 주호를 강하하고 또 적을 따라 탐라에 들어간 자를 금고토록 청하거늘 왕이 다만 금고만을 허하였다. 정묘에 장군 최유엄으로 인물추고별감을 삼아 장국강과 함께 합포에 가게 하였다. 강오에 내시좌랑 곽예에게 명하여 육운시로써 세자부시학공자를 시험하여 이익방 등을 뽑았다. 갑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덕수현 마제산에서 사냥하는데 왕이 홀적(전통을 멘 호위병-몽고어)과 응방을 거느리고 친히 궁전과 응요를 다루어(어) 종횡으로 달리니 부노로서 보는 자가 모두 탄식하였다. 기묘에 왕이 창락원에서 사냥하였다. 계미에 좌사의대부 이인성으로 선군별감을 삼았다. 원이 응방 미자리등 7인을 보내오거늘 왕이 사택과 및 노비를 사하였다. 정해에 승 1400을 구정에서 공양할제 왕과 공주가 친림하여 음식을 권하였으며 승 종오가 자리에 올라 설법하매 왕이 종오에게 은병 15개를 사하였다. 원이 탑자적을 보내어 탐라의 달로화적을 삼고 마 160필로써 와서 목축케 하였다. 기축에 동녕부 1000호 한신이 와서 인물을 추쇄하였다. 9월 임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본궐에 행차하여 장경도장을 설하였다. 신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갑진에 다시 세조 재궁33)을 창릉에 태조 재궁을 현릉에 장사하였다. 정미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무오에 제도에 순무사를 보내었다. 기미에 달로화적이 왕을 향연하였다. 경신에 원이 강회를 평정하였음으로 불화를 보내와 조하여 천하에 사하였다. 동 10월 임수 삭에 이익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해에 친히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갑자에 원이 홀자알를 보내어 왕과 공주에게 명년 5월로 입조할 것을 명하고 또한 라주의 말을 진도로 옮겨 방목케 하고 또 합포진변소의 초공수수를 파하고 또 서해도 귀부군으로 하여금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도록 하였다.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진에 김방경이 호두김패를 받고 잉하여 조서를 가지고 돌아오거늘 왕이 성을 나가서 맞이하였다. 기사에 소릉에 배알하였다. 을해에 친히 대묘에 협제34)하고 익책을 올리었다. 병자에 랑장 정복균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평자 300을 하사하였다. 무인에 교하여 이르기를 「선대 군왕은 이미 협례를 행하면 반드시 대은을 베풀었는데 근자에는 천자의 조서로써 이미 일절의 죄범을 사하였으나 그러나 기후에 범자가 있거든 다 가히 제사하고 국내 산천신지에게 마땅히 덕호를 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신에 왕이 적전의 남방에서 사냥하였다. 경인에 역자를 원에 보내어 일본률을 바치었다. 처음에 조량필이 일본률을 얻어서 의안현에 심었었는데 이제와서 결실한 것이다. 11월 갑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의봉루에 행차하여 반약도장을 행하였다. 을사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같았다. 무신에 중랑장 강지소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소가 인물을 추쇄하는 일로 원에 갔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계축에 중금지유 김부윤을 원에 보내어 황칠을 바치고 또한 명년에 입조하는데 포마와 초료를 청하였다. 남경사록 이익방이 팔관하전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이 사감으로써 견#를 통하여 참소하거늘 왕이 라장을 보내어 목에 칼을 씨워 붙들어 오게하였다. 갑인에 지첨의부사 정자여가 졸하였다. 병진에 달로화적이 방을 붙여 국인은 군사외에 궁전과 병기가지는 것을 금하였다. 판비서사사 주열과 장군 유홍신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2월 임수에 지를 재추에 전하여 이르기를 「근자에 성문이 자주 변하매 과인은 덕을 닦아 재를 가시게하고자 하노니 경등은 각각 시정의 득실을 말하되 기휘하는 바 없게 하라」하니 재추가 12사로써 상서하거늘 비밀히 하고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병자일 밤에 익명으로 투서한 사람이 있어 정화궁주가 공주를 주저한다 하고 또 제안공 숙과 김방경 등 43인이 반역(불궤)를 꾀한다고 무고하거늘 이에 정화궁주와 및 숙과 방경 등을 포수하니 류경이 울면서 력간하매 공주가 감오하여 모두 석방하였다. 갑신에 장군 고천백 및 홀자알을 원에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기를 「무고35)의 말이 허망하게 일어난 것은 성명의 거울로 실을 비치면 가히 아실 것이외다 이제 달로화적이 익명서를 가지고와 보이며 말하기를 40여인이 모아 다시 강화로 들어가기를 모의한다고 하니 만일 그 말이 진실로 혹 근거가 있다면 마땅히 면대하여 들어내놓고 고할 것인데 어찌 익명하여 가만히 투서하겠나이까 이것은 반드시 나라에 한을 품고 사람에게 원망이 있어 망녕되게 꾸며 한 것이외다. 기록된 바 40인중에는 죽은지 이미 5년이 지낸 자도 있으니 그 무망은 가히 증험됨직하외다. 빌건대 명단을 내리시와 이제로부터 익명서는 다 론치 말도록 하소서」하였다. 이해에 제도의 장정을 징발하여 나무를 교주도계에서 베어 경성으로 수송케 하니 얼고 굶주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

  정축 3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갑오에 김방경으로 세자사를 삼고 류경으로 전를 삼고 원부로 보를 삼고 김구로 이사를 삼고 허공 홍록주 이분희 한강으로 조호를 삼고 장위로 지첨사부사를 임익 설공검으로 좌우찬덕을 이신손 송분으로 좌우서윤을 삼고 기외 궁관도 모두 설치하였다. 병신에 박항으로써 밀직부사를 삼았다. 임인에 아들 원을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았다. 갑진에 왕이 장차 입조함으로 미리 연등을 설하였다. 갑인에 원의 추밀원이 달로화적에게 이첩하여 국인의 궁시 가짐을 금하니 대개 익명서를 믿은 것이었다. 2월 경신 삭에 친히 본궐에서 초제하였다. 임수에 달로화적 석말천구가 왕에게 말하기를 「왕은 어찌 현사를 소원히 하고 무뢰한 사람을 친히 하십니까」하니 왕이 묵연하였다. 정묘에 장순용을 원에 보내어 중서성에 상서하기를 「이제 성첩을 받잡건대 추밀원이 성지를 주봉하여 다구로 하여금 고려에 나아가 흔도와 더불어 같이 일본을 정벌하고 돌아온 3000군을 간판케 하였는 바 본원이 조회하기를 참군 200명과 환가둔전군 3000명은 활단적(사문인 몽고어)과 아울러 앞서 일본갈 때의 수목에 의하여 미량초료를 응부토록하라 하였나이다. 이 조회를 받고 보니 소방은 지원 7년 이래로 진도 탐라 일본을 정토한 대군의 량향은 다 백성에게서 수감하였고 이후 현재의 합포진변군과 탐라방호군과 염?백주의 귀부군 및 활단적에게 1년에 도합 지급할 인량이 18629석2두요 마우료가 32952석6두이니 이는 모두 한두(중국두량)로 계산한 것으로 또한 백성에게 과수하였으니 금자에 보낸 바 둔전군 3200 및 활단적 등의 량료는 다시 어디서 색출하리오 일찌기 지원 7년에 성지를 받들어 응부한 둔전군 2000인의 우척 농기 량종은 이제 수년을 지냈으니 반드시 저장한 것이 있을터인즉 청컨대 경략사의 수장하고 있는 곡식으로 지응케 하소서 또 마랑중의 저축한 바 병량은 오랜 세월에 조란되어 식용에 맞지 아니할가 하오니 지원 11년 성첩에 비추어 염주 합포 군마의 량료는 마랑중의 저축한 병량안에 합쳐 보광지급케 하소서 이제 이 군마의 량료도 또한 청컨대 장차 병량미로써 지응케 하여 소방잔민으로 하여금 거듭 곤핍함을 면케 하소서 또 첩을 승봉컨대 귀부군에 쓰일 바 우구도 소방에게 사들이게 하고 매가를 허여치 아니하려는 듯 한 바 살피건대 지원 13년의 귀부군의 회환자로서 처실을 구하는데 보내 온 필견을 달로화적에게 나누어 주어 수관케 하였던 바 청컨대 그 중에서 발취하여 지원 9년 종전군의 우구매가로 매두에 견 4필식의 구례에 의거하여 사들이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기사에 첨의부가 말하기를「공주의 겁령구36) 및 내료가 넓게 량전을 점령하여 산천으로써 표식하고 많이 사패(지)를 받아 조세를 바치지 아니하니 청컨대 사패를 환수하소서」하니 청허하지 아니하였다. 계유에 주열이 원으로 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승상 합백이 열에게 말하되 급난에 서로 돕는 것은 친척의 의인데 이제 북변(비)에 소란(경)이 있으니 마땅히 김방경의 아들 흔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에 나와 지휘를 받도록 하라」고 한다 하였다. 갑수에 왕륜사의 장육소상이 이룩되니 왕이 공주로 더불어 친히 법회를 설하였다. 을해에 중랑장 로영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홍다구가 군사를 끌고 장차 아경에 들어오려 하다가 제가 소환하고 또 귀부군 500인을 칙명으로 돌아가게 하였다하니 거국이 다 기뻐하였다. 3월 경자에 대부에 불이나 민가 800여호를 연소하였다. 갑인에 장군 조인규를 원에 보내어 입조하기를 청하였다. 을묘에 친종장군 김자정을 보내어 방수군을 탐라에 압송하였다. 자정은 본래 내료인데 림연이 김준을 죽일 때에 그 모의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써 허통되니 내료로서 출사한 것은 자정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탐라가 크게 기근이 들어서 백성이 문을 닫고 죽는 자가 있거늘 최석을 보내어 순시케 하였다. 정사에 원이 도적 40인을 덕주에 류배하였다. 하 4월 계해에 대묘에 체제하였다. 정묘에 원이 유홍홀노를 보내오거늘 왕이 이장무에게 명하여 함께 충주에 가서 환도 1000(병)을 주조케 하였다. 임신에 재추가 전라도 왕지별감 권굉이 백성을 할취하여 권귀에 아첨함으로 써 탄핵하여 파면시켰는데 굉이 내료에 청탁하여 복직하였다. 병자에 왕이 장차 입조하고 또 공주가 장차 면신37)할 것이므로 이죄이하를 유사하고 궁궐수리를 정지케 하니 감찰사가 상계하기를 「이죄를 원면하는 것이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청컨대 성명을 거두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경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군 장순용을 원에 보내어 북비정벌을 원조할 것을 청하였는데 표에 이르기를「가만히 보건대 소방의 서로군을 모두 돌아가도록 하였으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고 또 듣건대 북경로군을 적발하여 상거한다 하니 인하여 생각하건대 소방의 인민은 다만 뢰거를 익히고 궁도에 미숙하지만 혹시나 예총에 득청하면 가히 근위에 충당할가 하므로 많지 못한 군사를 뽑아서 이심이 없다는 충정을 밝히고자 함이외다」하였고 또 상표하여 말하기를 「근자에 수부가 추밀원의 차서를 봉승하여 삼별초군의 소략한 인구를 각각 본지로 돌려보내고 박망고알와 삼별초군 천호 유경창으로 하여금 총파에 충당케 하니 간절히 생각컨대 지원 8년에 소국이 성지를 받들어 환도할 때에 삼별초가 국인을 구략하여 진도로 도왕하여 감히 관군을 거역하고 탐라로 전입하여 힘을 다하여 명령을 거역하였으니 그 죄가 실로 큰지라 살 땅에 두는 것도 성은이 이미 크거늘 어찌 다시 평민에 치열하리오 그 인구는 이미 일찌기 신에게 붙여 불러모아서 군에 충당케 할 것입니다. 박망고알 등은 이것이 별적군관에 속한 것으로 가히 겸하여 관령케 하지 못할 것이니 빌건대 본래받든 성지에 의하여 그대로 신에게 삼별초를 거느려 군의 역사에 충당토록 허하소서 또 지원 13년에 김이 소국에서 산출된다고 고하는 사람이 있어 신과  달로화적이 관리를 보내어 도징하여 금 2전2분을 얻어 바치었던 바 야특고관인이 성지를 주봉하여 이곳에는 금을 급용할 것이 없으니 공주와 국왕 등 너희가 쓸 것이라 하였으며 또 성첩에 준컨대 이르기를 매년에 얻는 금(자)의 수목을 회시하라 하므로 곧 달로화적으로 더불어 관원을 먼저 차송하여 홍주 등처에 가서 도금케 하였는데 계70일에 인부 11446명을 써서 겨우 금 7량9분을 얻었으니 빌건대 야특고의 주전한 성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또 금년 4월에 소방의 기수 조윤통이 성지를 받들어 인삼을 채굴하였는데 살피건대 인삼은 오직 동북계에서 산출되고 기여지면에는 드물게 있는데 윤통이 함부로 각 도주현에 명령하여 산지에 가서 채굴 수납케 하니 신은 빌건대 소산처에 따라 시기를 맞추어 채납케 할 것이요 윤통으로 하여금 임의로 시끄러움(모)을 부리지 말도록 하소서」하였다. 인물추고도감록사 배열과 박장을 해도에 류배시켰다. 각도 주군의 리민이 경성에 와 숨어 권세에 기대어 병역을 피하거늘 열과 장이 재추의 통첩을 받들어 추심하여 강제로 송환하는데 정백지란 자가 있어 서림현의 비 2구를 숨겨놓고 제안공의 제택에 있다고 칭탁함으로 열과 장이 추심하기를 급히 하니 제안공이 비로소 백지가 자기를 속인 줄을 알고 곧 이비를 내보내어 도감에 부치(부)도록하였다. 도감이 곧 역리로 하여금 서림으로 체송케 하니 백지가 이에 이비로써 원성전직실사에 속케 하매 사가 도감에 통첩하여 이비를 소환하려 하였으나 이미 멀리 갔으므로 곧 오지 못하였다. 백지가 열과 장이 왕지를 좇지 아니한다고 참소하니 왕이 노하여 류배시킨 것이었다. 병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임진에 승 육연을 강화에 보내어 유리와를 굽게 하였는데 그 법에 황단이 많이 쓰이므로 이에 광주의 의안토를 취하여 구으니 품색이 남상의 파는 것 보다 나았다. 정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올제 적전남봉에 올라 달로화적을 맞아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무수에 원이 죄인 33인을 탐라에 류배시켰다. 경자에 친히 소재도장을 강안전에 설하였다. 임인에 감수국사 류경 수국사 원전 동수국사 김왕구

에게 명 하여 고종실록을 찬수케 하였다. 신해에 관가와 사가의 송첨을 금하였다. 매양 서월이 되면 궁궐도감이 침전에 송붕을 만들면 예에 의하여 은병 2개를 사하는데 (이제) 왕이 말하기를 「궁사의 송#을 금하였는데 내가 홀로 하는 것이 가하리요 편모로써 고치라」하니 당시사람들이 말하기를 「도감원이 두은병을 잃었도다」라고 하였다. 갑인에 장순용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중서성이 성지를 받들어 통첩하기를 「탈환팔도아가 살퇴되고 백성이 이미 편안하니 너희 군사는 올 것이 없다 하고 또 첩하기를 홍주 등처의 도김공역은 임시로 정파하고 농한기를 기다려 원첩에 의하여 시행하라」하였다. 6월 경신에 장군 차신을 원에 보내어 호피를 바쳤다. 장군 안적재로 합포방호사를 삼았다. 을유에 #도의 아들 기로 수사공을 삼았다. 기가 평안공의 딸을 취처하였으므로 종실의 례에 비겨 이 직을 제수하고 또 성은 붙이지 않고 이름만 쓰게 되었다. 추 7월 경인에 조성도감이 제왕과 재추와 각령군인에 이르기까지 정부를 내되 차등이 있게 하고 림목을 산에서 수운하는데 1일의 역을 궐한 자는 미 1석을 징수하였다. 갑오에 공주의 행차를 사람이 내려다 볼가하여 로방의 가루를 철거토록 명하였다. 병신에 지를 내려 이르기를 「백성의 응방에 속한 자 205호인데 그 102호를 제하라」하였다. 당시에 제민이 징감에 시달려 다투어 응방에 속하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205호라 하는 것은 망녕(망)된 것이다. 102호를 제하는 것은 구우에 일모38)를 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응방이 오히려 은저 위 포를 기인39)에게 수감하여 사사로 분취하니 당시사람들이 말하기를 「응을 먹이는 것이 육이 아니라 은 포가 만복하였다」고 하였다. 관후서가 말하기를 「삼가 도선밀기를 살피건대 산이 드물면 고루를 짓고 산이 많으면 평옥을 짓는 것이다. 다산은 양이 되고 희산은 음이 되며 고루는 양이 되고 평옥은 음이 된다. 아국은 다산인데 만일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쇠손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이래로 궐내에만 그 옥을 높이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민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조성도감이 상국의 규모를 써서 층루와 고옥을 짓고자 한다하니 이것은 도선의 말을 술하지 아니한 것이오 태조의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천지 강유의 덕이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실가창수의 도가 화하지 못하면 장차 불측의 재가 있을 것이니 가히 삼가하지 아니하오리까 옛적에 진헌공이 9층의 대를 짓고자 하매 순식이 박기 열두개를 포개고 다시 계란구개를 그 위에 포개놓고 써 간하기를 한번 실정하면 사직이 이것보다 더 위태하다 하매 드디어 그 대를 헐었다하니 오직 전하는 살피소서」하거늘 왕이 그 말을 가납하였다. 이날에 왕이 갑자기 병을 얻어 매우 극심하거늘 재추가 영선을 정지하고 응요를 놓아주기를 청하니 공주가 허락하였으며 왕이 금방경의 집에 피병하였다. 병오에 정인사에 이어하니 병이 조금 나았다. 정미에 밀직부사 박항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중서성에 상서하기를「소방의 구례에 세자가 습작하면 반드시 이름을 고치는데 신의 금명이 온당치 못하여 일찌기 신청하였으되 밝은 강지를 받지 못하였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잘 주달하소서」하고 또 마중랑의 병량으로써 탐라 합포둔수군에 지급하기를 청하고 또 주검과 채금과 공삼을 파해 줄것을 청하였다. 경수에 소재도장을 강안전에 설하였다. 왕이 궁을 희사하여 민천사라 하고 장차 액을 올리려 하니 백관은 다 하고자 아니하는데 배정이 상지에 아부하여 액을 다니(양) 사람들이 모두 그르게 여기었다. 갑인에 승덕부에 이어하고 또 금흔의 집에 이어하였다. 병진에 내견량선과 대수장 등이 고하기를「경창궁주가 그 아들 순안공 종으로 더불어 모의하고 맹승 종동을 시켜 주저한다」하거늘 상이 중찬 김방경에게 명하여 신문케 하였으나 불복하였다. 8월 정묘에 조인규와 인후를 원에 보내어 요자를 바치고 또 종의 주저한 일을 표주하였는데 대략말하기를「사람이 추문을 집안에서 들어내는 것은 비록 점덕이 있으나 친족이 혹시 자기에게 원수를 짓는데 능히 원심이 없사오리까 만약 윤허의 명론을 받자오면 적거에 따라 스스로 징계하도록 청하나이다」고 하였다. 경오에 지를 내려 연등을 명년부터 다시 정월15일을 쓰도록 하였다. 경진에 원이 죄인 40을 탐라에 류배시켰다. 9월 기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물방아(수애) 찧는 것을 구경하였다. 신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마제산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임인에 조인규와 인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경창궁주를 폐하여 서인을 삼고 종과 종동을 해도에 귀양보냈다. 계묘에 지진하였다. 정미에 궁에 돌아왔다. 경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보제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동10월 병진 삭에 일식하였다. 무오에 김백균으로 경상도 지휘사를 삼았다. 기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수에 탐라 달로화적 탑자적이 원에 갔다. 을유에 원이 랑가알을 보내와 골을 사하였다. 11월 을미에 밀직부사 이영이 졸하였다. 정유에 본궐에 이어하였다. 국자제주 김서와 랑장 윤만비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전라도 안렴부사 우천석이 임기가 만료되어 장차 돌아오는데 전주에 이르러 상자 4개를 봉하여 신임하는 관리에게 부쳐 말하기를「문부인데 조선에 부쳐 보내라」하였던 바 주수 송음이 열어보니 문부중에 주저를 섞어 두었거늘 음이 그것을 돌려 보내었다. 임자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이정의 집에 이어하였다. 임자에 본궐에 이어하였다. 갑인에 경상도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조세를 감하였다. 12월 병진에 남경부사 최자수와 사록 이익방을 해도에 류배시켰다. 원이 착호사 독가등 18인에 말 30필과 개 150을 보내왔다. 병인에 사판궁에 이어하였다. 정묘에 전 대장군 위득유와 중랑장 로진의 김복대 등이 김방경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거늘 찬성사 유경과 원부와 지밀직사 이분희 한강 승지 이습에게 명하여 흔도 천구로 더불어 잡문케 하였던 바 왕은 그 무망인줄 알고 석하였다. 이해에 전 군기주부 홍종로가 그 아들 인백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여 달로화적에게 말하기를「산금처를 많이 안다」하니 이에 국학직강 최석을 보내어 종로를 거느리고 금을 홍주 직산 정선에서 캐는데 역민  11446명이 70일에 겨우 7량 9분을 얻었다.

  무인 4년 춘 정월 기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는데 기락을 제거하였다. 임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흔도와 다구로 더불어 방경과 및 그 아들 흔을 국문하였다. 신해에 참지정사 박송비가 졸하였다. 임자에 랑장 이인이 반역하는 조서를 가지고 원으로부터 돌아오거늘 왕이 성외에 출영하였다. 2월 병진에 왕이 흔도와 다구를 흥국사에 모아 방경을 국문하였는데 불복하거늘 방경을 대청도에 흔을 백령도에 류배시켰다. 경신에 친히 본궐에서 초제하였다. 계해에 장군 인후를 원에 보내어 방경의 류배를 아뢰었다. 정묘에 류경으로 판전리사사를 김구로 참문학사를 강수형으로 지첨의부사를 허공으로 판밀직사사를 이분희로 밀직사사를 한강 홍자번으로 지밀직사사를 박항으로 동지밀직사사를 기홍석 장위로 밀직부사를 삼고 또 위득유로 상장군을 로진의로 장군을 삼으니 다구가 청한 것이었다. 경오에 탐라 달로화적 탑자적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에게 해동청40)을 사하였다. 임신에 대부소윤 조유 등을 동녕부에 보내어 인물을 추쇄하였다. 계유에 경상도 군료별감 류현과 충청도 왕지사용별감 황수명과 전라도 안렴사 이홍의로 써 모두 그 도의 권농별감을 삼았다. 병자에 경내에 명령하여 다 상국의 의관을 입게 하였다. 기묘에 원이 활활알 등을 보내와 조서를 반포하였다. 계미에 제왕으로부텨 권무에 이르기 까지 하여금 환철장홀노의 주조한 바 환도를 거두게 하였다. 3월 정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진에 원에 참소하는 자가 모두 강화로 반입할 것이라고 빙자하므로 명하여 선병을 파케 하였다. 갑오에 인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홍다구를 소환하고 또한 왕의 입조를 명하였다. 무수에 왕지를 내리어 안동경산부 관내 군현의 공부는 대부 영송 소부 등고의 소납하는 것을 제한 외에는 다 원성전에 수송토록 하였다 다시 청주 판관 및 당성감무를 두었다. 위득유와 로진의가 다구에게 말하기를「국가의 담선법회는 써 상국을 주저하는 것이라」하니 다구가 사람을 보내어 중서성에 보고하였다. 기해에 장군 장순용과 중랑장 백거를 원에 보내어 입조할 것을 고하였다. 왕이 일찌기 대신에게 이르기를「조근하는 것은 제후가 향상하는 예이요 귀녕하는 것은 녀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예이니 사신을 보내어 공주로 더불어 입조할 것을 청하고 포마 70필로써 장차 행차하려는데 술가가 음양의 포기로써 고하므로 왕이 의심하여 정지하였더니 득유와 진의가 고변함에 미쳐서 바야흐로 후회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행장을 최촉하니 각도의 국신마가 아직 이르지 않은지라 주군의 사심관으로 하여금 마를 선납케 하니 마가가 용귀하였다. 하 4월 갑인 삭에 왕과 및 공주와 세자가 원에 행차하는데 원전 이분희 박항 송분 강윤소 등이 종행하였다. 기미에 랑사가 공은 없고 세누 있는 자가 많이 관직에 배함으로 고신41)에 서명하지 않거늘 왕이 여러번 서명하기를 명하되 좇지않는지라 왕이 노하여 홀적 최숭에게 명하여 사의대부 백문절을 체포하였다. 임수에 흔도와 다구가 각각 마로써 왕께 노자(신)로 바치고 조연42)을 베풀어 왕께 여쭙기를「제가 김시중(방경)일을 물으시면 왕의 아뢰는 바 여하에 매였읍니다」고 하였다. 을축에 왕지를 내려 이르기를 「행궁의 정반(정관의 지공)은 힘써 간편함을 좇을 것이다. 호종하는 인원이 너무 많으니 그 190인만 가게 하고 도감으로 부터 량료를 량급케 하라」하고 이에 은과 포로 써 쌀을 동녕부에 사게 하였다. 봉주둔전 1000호 박몽고대가 량마 1필과 탁1두로 써 와서 뵙거늘 왕이 은폐 5근과 저포 10필을 사하였다. 무진에 장순용과 백거가 원으로부터 돌아오다가 왕을 길에서 알현하고 말하기를「다구가 제에게 3000군을 더 보내기를 청하여 그 2500은 이미 압록강을 건넜으나 제가 왕의 소주를 윤허하여 다구를 파귀토록 명하였으며 또 전라도에 탈탈화손(교통요지의 역전관-몽고어) 두기를 청하였으나 제가 허락하지 아니하고 또 김방경 부자와 득유 진의등에게 #명하여 왕을 따라 입조하여 대변토록 하였읍니다」고 하였다. 경오에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에 배알하였다. 기미에 의주에 이르니 그때 서북제주가 모두 동녕부에 귀부하였는데 오직 의 정 린의 삼주가 귀부하지 아니하고 리민이 서로 이끌고 맞이하니 봉공이 타주보다 승하였다. 5월 병수에 료양총관 달로화적 등이 각각 마를 왕에게 바치었다. 정해에 합포 총관 유몽고대의 처가 그 아들과 더불어 북으로 돌아가면서 왕을 도중에서 알현하고 잉하여 마를 바치거늘 왕이 달하기를「총관의 군정이 청명하여 백성이 칭도하는데 불행히 죽었도다 이제 너희 모자를 보니 더욱 다시 비애하다」하였다. 원수 흔도가 야속탑아를 보내어 왕께 사뢰기를 내가 왕국에 산지 우금 7년인데 한가지의 선은 없고 악한 일이 이미 많았으니 오직 왕의 선주를 바랄 뿐입니다」고 하였다. 북경동지 강수형이 와서 마1필을 바치었다. 신묘에 영녕공 준의 아들 사공희와 옹이 와서 마를 바치었다. 계사에 흔도가 원에 돌아갔다. 갑오에 애두참에 이르니 왕총관이 탁타 1두와 마 6필을 바치었다. 정유에 의주에 이르니 료양의주의 두 달로화적이 마를 바치었다. 신축에 전 대장군 윤수를 보내어 마를 북경(내몽고-객나심부의 평천지방인듯)에서 사게 하였다. 임인에 북경 달로화적 강희민이 마를 바치었다. 기유에 북경 과요관에 이르니 행성우승 패로환 참정 장언택 첨성 아로정 총관 안찰 치중 등이 각각 마를 바치었다. 임자에 중서성이 가탑과 및 개평부 달로화적 장로 등을 보내와 맞이하였다. 6월 정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경신에 향아에 이르니 수림이 몽밀하여 금수가 서식하는 바라 황후가 두 궁빈을 보내와 맞이하니 주민들이 말하기를「이 곳은 천자의 유렵하는 땅인지라 비록 친왕이라도 사처(객관)하지 못하는데 국왕으로 하여금 지숙케 하니 후대(권우)를 가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유에 제는 황자 탈환을 보내고 황후는 황녀 망가알공주와 및 아이가적대왕비를 보내와 30리의 땅에서 맞이하고 또한 대궁려를 개평부동문 밖에 베풀어 대기하였다. 기사에 왕과 공주가 제를 알현하니 제가 연회를 베풀어 위노하였다. 정축에 흔도가 제에게 아뢰기를「고려재상이 많이 민호를 점익하여 부역을 면피하니 청컨대 금하소서」하고 또한 제령부를 파하여 군으로 할 것을 청하니 제가 이르기를「네가 국왕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아뢰는 것이냐」하매「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제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흔도가 왕을 보고 그 일을 의논하거늘 왕이 대답하지 아니하니 흔도가 자못 분에하였다. 무인에 왕이 도당에 상서하여 방경의 일과 및 담선법회를 변명하였다. 경진에 공주의 탄진임으로 황후가 탑자포를 사하였다. 이달에 참지정사 김련이 졸하였다. 추7월 갑신에 왕이 제께 알현하고 아뢰기를「전자에 차가가 북정함을 듣고 폐부를 모두 색출하여서 정토하는 것을 도우려 주청하였더니 폐하께서 땅이 멀다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이제 입조하여 몸소 융의를 갖추고 가(행) 써 성덕갚기를 청하나이다」하니 제가 웃으면서 이르기를「북방인이 좌계43)로서 변방을 요란케 하다가 이제 이미 분궤되었다」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일본은 한 도이인데 험한 것을 믿고 래조치 아니하고 감히 왕사를 항거하니 신이 스스로 생각컨대 써 보덕할 길이 없으니 원컨대 다시 배를 짓고 량곡을 쌓아 죄를 들쳐내어 토벌하면 성사치 못함이 없을 것이외다」한대 제가 이르기를 「왕은 돌아가 재상과 숙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아뢰라」하였다 또 아뢰기를「폐하가 공주를 내리시와 성은으로써 무육하시매 소방의 인민이 바야흐로 료생의 희망이 있아옵니다.  그러나 다구가 있으매 신이 나라일을 위함이 또한 어려울가 하나이다 다구와 같은 자는 다만 군사만을 이회함이 마땅하거늘 국가일에 이르기까지 다 천단코자 하오며 달로화적을 남방에 두는 것도 또한 신의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상국이 반드시 군사를 소방에 두고자 할진대 차라리 달단한아군44)으로 써 다소를 논할것 없이 보낼 것이오 다구의 군과 같음은 오직 소환하기를 바랍니다」하니 제가 이르기를「이것은 쉬운 일이다」하고 조금 있다가 이르기를「오직 요 순 우 탕이 능히 제왕의 도를 행하였으나 그 뒤로는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의식을 다 신하에게 청하였다 옛적에 한 임금이 양육을 즐기는데 그 신하가 주면 먹고 주지 아니하면 얻어먹지 못하였다 송나라 도종은 여기에 있는 유아45)의 아비인 바 매사도가 천권하여 도종으로 하여금 그 애첩을 축출케 하매 불득이 청종하였으니 어찌 군으로서 신하를 두려워 하여 그 총첩을 버리리오 왕의 부왕은 어찌 임연의 천립을 면치 못하였느냐 짐이 듣건대 왕도 또한 재상의 꾀임을 믿는다 하니 이리하여 능히 치국이 되면 진실로 좋거니와 그 만일 능히 하지못하면 가히 부끄럽지 아니하랴」하니 대답하기를「다구의 망언입니다」하니 제가 이르기를 「다구뿐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말하나니 너는 가히 재상으로 더불어 써 잘 지국할 자를 택하여 상량하여서 행하라」하거늘 왕이 아뢰되「이제 간인이 김방경으로써 모반한다 하여 흔도에게 고하니 흔도가 군사를 끌고 왕경에 들어와 잡아서 신문하였던 바 다른 것이 없고 오직 동정하던 장사가 군기를 관에 들이지 아니한 자가 있거늘 기직을 삭탈하고 장태하였나이다 방경은 비록 반장은 없으나 그때 총재46)가 되어서 군기를 불납한 자에게 검거는 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소만함을 죄로하여 해도에 류배시켰으나 그러나 이것도 감정 있는 자의 참소한 바입니다 뒤에 이와같은 불법한 자가 있으면 신은 청컨대 죄하겠나이다」하니 제가 이르기를「네가 알아서 할진저」하고 관인에게 이르기를「가히 빨리 다구를 소환하라」하고 또 묻기를「흔도는 어떠한가」하거늘 대답하되「흔도는 달단인이라 가하다면 가하지만 다구가 있게되면 고려군으로 더불어 망녕되히 시비를 일으키게 되며 그리되면 비록 흔도일지라도 능히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오니 바라건대 다구와 고려군으로 하여금 모두 조정에 돌아오게 하고 달단과 한아군으로 이에 대치토록하소서」하니 제가 말하기를「가하다」하였다. 왕이 합백평장에게 말하기를「왕경 달로화적이 임기만료가 되었는데 랑가알는 일찌기 소방에 왕래하였으니 만일 써 대신하면 가히 부리기를 이목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라」하니 합백이 제에게 아뢰매 제가 말하기를「어찌 달로화적을 쓰리오 그리고 랑가알은 어떠한(공마) 인물이냐」하고 인하여 강수형에게 묻기를「고려의 복색은 어떠하냐」하니 대답하기를「달단의모를 복용하고 조서를 맞이하거나 절일을 하례하는 등의 때에는 고려복으로써 일을 거행한다」하니 제가 이르기를「사람들이 짐이 고려복색을 금한다고 말하는데 어찌 그러하리오 너희 나라의 예를 어찌 갑자기 폐하리오」라고 하였다. 을유에 왕이 원에 체재하는데 합백평 장이 강수형과 조인규에게 이르기를「작일에 칙명이 있었으니 그 가히 백성을 안집할만한 것을 론의하여 래주케 하라」하거늘 왕이 드디어 재추와 3품 이상에 명하여 의논케 하니 다 말하기를「상하가 모두 처간을 철폐하고 부역에 맡김이 가하다」고 하였다. 처간이란 남의 전을 경작하여 조세를 그 주인에게 돌리고 관에 용과 조를 바치는 것으로 즉 전호인 것이다. 당시에 권귀가 많이 백성을 모아서「처간」이라 하여 써 삼세를 포탈하니 그 폐가 더욱 중하였다. 수형이 말하기를 「반드시 점호로써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해에 제가 내올타47)에 사연하였다. 중서성이 본국의 누조사적 및 신복한 일월과 제의 등극 이래의 사개의 명목과 국왕의 친조년월을 구록하여 써 바치게 하였는데 국사원의 통보에 인한 것이었다. 기축에 왕이 요자를 제와 동궁에 바쳤다. 임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외올타의 연회에 나아갔다. 왕이 중서성에 상서하기를「소방의 간녕한 사람이 숙감을 풀고자하여 말을 꾸며서 망녕되히 고하고 혹 익명문을 던져 모반한다고 까지 이르(위)매 관군관 달로화적이 인하여 고문하여 일국을 소요케 하니 금후에 만일 전과 같은 고소자가 있으면 청컨대 스스로 사유를 궁구하여 상사에 신복케 하고 관군으로 하여금 백성을 경동케 하지 말것이며 또 악인이 있어 국가의 요동을 꾀하여 매양 강화에 천도한다는 것으로써 입에 붙여 말을 품기니 청컨대 종전군으로 하여금 강화에 입처하여 써 참언의 길을막으소서 동정원수부가 전라도에 탈탈화손48)을 임의로 두고 또 상사에 신복하여 말하기를 고려인이 많이 차자없이 포마를 타고 주체를 난행며 또 선척을 타고 대를 지어 왕환하니 사단을 낼가 걱정이라 하여 이것때문에 관을 보내어 군사 400을 거느리고 탈탈화손에 보충하여 흉내당케 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소방이 일찌기 성지를 받들어 국내에 왕래하는 사람은 국왕에게 스스로 차자주는 것을 허락한지라. 이로부터 래왕하는 사개에게 반드시 차자를 주었으니 어찌 차자 없이 주체를 란행하는 자가 있아오리까 소방은 자래로 의례히 수로로써 왕경에 전조하고 기외에는 다만 고기 낚는 사람 뿐인데 어찌 배를 타고 대를 지어 왕래하는 자가 있아오리까 수부가 말을 꾸며 신복하고 조서를 기다리지 않고 탈탈화손을 차견하여 400군을 거느려 나가게 하였으며 또 탐라의 달로화적이 라주 해남 등지에 참적(역전)을 천치하니 이 무슨 체례입니까 바라건대 잘 아뢰어 명지를 내리도록 하소서 동녕부는 원래로 소방조종의 경도이요 최탄 등은 그 향관이 아닌데 빼앗아 처하여 조종의 사우와 제형이 다 폐지되었으니 바라건대 그 척토를 돌리어 효사를 닦게 하소서 일찌기 성지를 받들어 기미년 이래의 구략인이 방환되도록 허락되었으며 연전에 또 성지가 있어 북경 동경로 동녕부의 경오년 이래의 도유 로략인도 또한 추쇄하여 돌아오도록 되었는데 목금에 돌아온 자가 일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다시 추쇄케하되 그 누세로 거왕하여 이사에 불편한 자는 동경로 등지에 원취시켜 공주의 행이 시양의 역에 충당케 하소서 탐라와 진도를 공파할 때에 관군의 포로한 것 가운데에 도망한 자가 있으면 추쇄되어야 하는 것인데 공파한 뒤에도 취역하는 평민의 자를 로획이라 망칭하여 구역에 충당하니 심히 난편한지라 바라건대 금지해 주소서 소방은 도리가 료원하여 급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역마를 달려 주문하는 터인데 차자를 달로화적에 청한 뒤에 보내게 되면 혹 지오케 되나니 바라건대 부마의 반열에 의거하여 또한 차자를 자급하도록 허락하소서 서해도내 곡주 수안 량성이 왕년에 탑찰아대왕에게 투배하니 대왕이 길리알로 하여금 와서 민호를 점검하였는데 뒤이어 성지를 받자오니 이르기를 제왕의 투항한 것은 일방적으로 민호를 수습하지 못하는 것이어든 하물며 고려는 부속된 국토이니 수습할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제 최탄 등이 본국의 차견한 관원을 쫓아버리고 임의로 관령하였으니 만일 탄 등의 일방적 광사를 청취한다면 불합리한듯 하외다 서해도의 은율현이 일찌기 최탄에게 투배하지 아니하였는데 탄 등이 투배하였다고 망칭하여 17호를 쟁송하였으나 이미 성지를 받자와 본국에 복속케 되었던 바 금년 3월에 다시 여전히 다투어 17호 내에 또 여인으로 하여금 원취케 하여 가만히 점령하여 관령하니 이 무슨 체예입니까 소방은 제도가 비록 많으나 다 육지와 멀지 아니하니 상사께서 보낸 죄인도 이미 안치키 어렵거든 하물며 이제 탐라의 땅은 앞서 내친(원방) 죄수도 아울러 이치케 하려 함이리오 다만 둘 땅이 없을뿐 아니라 조석으로 타변이 생길가 걱정입니다 그 탐라의 원방죄도는 바라건대 전과같이 눌러있게 하고 그대로 관군으로 하여금 감수케 하소서 본국관사의 고장에 의거하면 대정이란 남자가 있어 5월14일에 순마소에 와서 말하기를 금월 초4일에 주장남으로 더불어 왕경의 성외에 나가 일모에 장차 돌아오려할제 량인에게 구로한 바 되어 경북의 산곡간에 이르니 다시 6인이 있어 동승 2개와 동남녀 합7인과 마 14필과 우 3두를 몰고 와서 소를 잡아먹고 산로를 따라 가는데 대정이 다행히 도망해 왔다 하거늘 순마가 사람을 보내어 대정을 데리고 로상을 추수하여 1인을 잡아 물으니 말하기를 본국의 정교의 가노로서 이름은 달달다화이오 동경지방에 거주하는데 사미채의 향로인 고루사와 백성 량탁 야오나 왕삼 곽상 고을마 등 6인으로 더불어 왕경 등처에 이르러 달를 잡기를 마치고 심곡간에 도망해 숨어서 인물과 우마를 구략하여가고자 모의하였다 하는데 그 말이 이와같으니 료양사람의 몰래 구로를 행하는 일이 항상 있으나 그 자취를 얻지 못하였다가 이제 다행히 달달다화를 잡았으니 진실로 이것은 천행인지라 바라건대 그 무리를 철저히 추구하여 중법으로 다스려서 써 후래를 경계하고 동경총관부에 하첩하여 노획한 인물을 모두 환본케 하고 뒤에도 이러한 악(알)인이 있으면 본국으로 하여금 법으로써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때에 달로화적이 몽고의 제도에 의하여 순마소를 두어 매야에 순행하면서 사람의 밤 동작을 금하였다. 계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제께 상수하고 익일에 또 황후께 상수하였다. 병신에 왕이 제께 알현하니 제가 추밀부사 패자로 하여금 관군소요의 일을 묻는데 흔도가 곁에 있어 말하기를「우리 군사가 백성을 소란케 하였다는 것을 왕이 알거든 이제 가히 말씀해 보소서」하니 왕이 말하기를「너희 휘하가 방경의 일로 인하여 오아의 집을 침범하거늘 붙들어 너에게 부쳤던 바 네가 곧 곤장질을 하였으니 오아의 집도 오히려 면치 못하였거던 하물며 백성이리오 너희들이 나를 소하되 능히 백성을 안집하지 못한다 하나 너희 소요가 이와같은데 내가 어찌 능히 안집할 수 있겠는가」하고 패자에게 일러 말하기를「내가 차마 이들과 함께 처할 수 없으니 제께서 신에게 1구의 땅을 주시면 신이 우리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힘을 상께 가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하니 패자가 말하기를「제께서는 다만 관군소요만을 물으셨는데 왕은 어찌 이같이 주달하기에 이르나이까」라고 하였다. 제가 왕과 공주에게 의복을 각 1습을 사하고 종신은 재추로부터 4품에 이르기까지 각각 김탑자표리를 사하고 기여에게는 각각 주사표리를 사하거늘 종신은 각각 백저포를 공주에게 바쳐 써 사례하였다. 무수에 원이 평장 합백과 부추 패자로 하여금 왕에게 유시하기를 「김방경을 고소한 자 2인이 다 죽었으니 가히 대송할 자 없는지라 짐이 이미 방경의 원억한 줄을 알고 사하였으며 또 명하여 흔도 다구군과 종전군과 합포진수군을 파하여 다 돌아오게 하였노라」고 하였다. 왕이 장차 퇴거하려 하매 다시 불러 앞에 이르게 하고 말하기를「짐은 글자를 모르는 거친 사람이오 너는 글자를 아는 정세한 사람이니 그 짐의 말을 들을지어다 성길사 황제가 일찌기 말씀하기를 사람이 진실로 조그마한 효심이라도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아는 것이다 하셨으니 네가 나를 먹이고자 할진대 너의 일병주와 일석미를 가지고 오는 것도 이 또한 효인 것이다」하거늘 왕이 아뢰기를「신이 일찌기 다구군을 소환하기를 주청하고 황공하옴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제 제군을 다 소환하시니 만수를 감축할 뿐입니다」하니 제가 말하기를「어찌 족히 두려우리오 가공할 것은 두가지가 있으니 망언과 및 위언이 이 것이다 네가 너의 백성을 선치하여 제국과 후세에 웃음 꺼리가 되지 아니하면 가한 것이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제군이 돌아갈 때에 량민을 구박할 자가 있을까 걱정이오니 청컨대 금하소서」하니 제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말을 하였는데 뉘 감히 너의 한 백성인들 잡아오리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원컨대 상의 친신하는 달단(몽고)인 한사람으로 달로화적을 삼아주소서」하니 제가 말하기를「어찌 꼭 달로화적을 두리요 너가 스스로 잘하도록하라」하였다. 왕이 말하기를「소방도 또한 상국법에 의하여 점호하기를 청하나이다」하고 또 합포진수군을 머물러두어 써 왜구에 비하기를 청하니 제가 말하기를「어찌 반드시 머물러두게 할 것이 있느냐 그 능히 너희 백성에게 해가 없겠느냐 너는 스스로 너희 국인을 써서 진수케 하라 왜구는 족히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점호같은 것은 가히 스스로 하여 보라」하고 또 이르기를「하늘이 점점 추워지고 말이 장차 여윌 것이니 미쳐 야초가 마르기 전에 돌아감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축에 합백과 패자가 흔도에게 이르기를 「너의 군사가 고려민을 처당이라 칭하여 끼고 오는 자가 있으니 너는 그 성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하고 또 왕에게 이르기를「진도와 탐라를 정벌할 때 관군이 로획한 자는 왕도 또한 쟁송하지 마소서」하였다. 임인에 제가 왕에게 해동청 일연과 부마 김인과 안마를 사하거늘 왕이 동궁에서 음전49)하였다. 계묘에 왕이 하직(사귀)하니 제가 겁설단 안독구로 하여금 호송하여 북경50)에 이르게 하고 또 탈탈아 등 3관인을 보내어 동문밖에서 조송51)하고 김방경에게 명하여 왕을 따라 환국케 하였으며 황태자도 또한 사람을 보내 전송할제 황자 탈환과 황녀 망가알가 모두 왔다. 제관인이 달달가무로 써 잔을 권하거늘  왕이 홀적(호위병)으로서 노래 잘하는 자로 하여금「감황은곡」을 노래케 하여 써 수응하였다. 정미에 김주정과 장순용을 서해도에 조인규와 인후를 경상도에 랑장 김천고를 전라도에 보내어 인물을 분간케 할제 명하기를「만일 제군이 인물을 협대하거던 부모와 허가한 처실을 제외하고는 기여는 다 내주지말라」하고 인하여 천고를 위촉하여 내시를 삼으니 설인으로서 내시가 된 것은 천고로부터 비롯하였다. 8월 정사에 별장 이봉을 원에 보내어 수안과 곡주를 돌려주도록 청하였다. 무오에 승지 송분을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임수에 지신사 이습이 시무10여조를 올리거늘 왕이 보기를 다하고 손으로 집어던지면서 또 재신에게 말하기를「일이 가히 먼저 행하여야할 것이 있거든 실봉하여 써 아뢰어라」하니 대답하기를「나라에 돌아가면 속의하여 써 아뢰리다」고 하였다. 계해에 태양가운데 흑자가 있어 크기가 계란같았다. 갑수에 홍다구가 원에 돌아가다가 왕을 도상에서 알현하고 마를 바치었다. 정축에 왕이 가주채를 지내다가 비를 만났는데 채인이 하북에 다리를 놓아 써 건느게 하거늘 독역 100호에게는 은반을 역도에게는 은1근을 하사하였다. 기묘에 왕이 동경(료양)에 이르니 홀아간 태자비가 마를 바치었다. 신사에 장군 박의를 원에 보내어 도당에 상서하기를「본국의 래문에 의하면 전라도 안렴사가 보고하기를 금춘에 상사가 보낸 죄도를 도내의 영암군 피면도에 분치하였더니 13명이 떼(부)를 타고 도망한 것을 추수하여 잡았고 보성군 내노도의 24명이 행인의 배를 빼앗아 도찬한 것은 아직 잡지 못하였다 하니 내가 상도에 있을 때 일찍 이일을 말하였거니와 본국은 비록 섬이 많으나 육지에서 먼 것이 적은지라 누차로 보낸 바 죄도도 이미 안치하기가 어려운데 이제 이배한 탐라죄수는 어느 땅에 두겠읍니까 전소로 돌려보내고 인하여 관군으로 하여금 진수케 하기를 빌었으나 명강(밝은 유시를 내림)을 입지 못하였나이다 지금 이도의 죄수가 도찬함이 이와 같음에 기외 제도 죄인이 누가 생심하지 아니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잘 아뢰어 써 명단을 내리소서」하였다. 9월 갑신에 오숙부를 동계에 보내어 해동청을 포획하였다.  병수에 달로화적경역 장국강이 원에 돌아가다가 왕을 도중에서 알현하고 말하기를「전자에 임기만료로 마땅히 돌아갈 것인데 왕이 상사에 보하여 만유하기로 우금 7년만에 달로화적원수와 및 관군이 다 돌아가게 되니 일국의 복이외다」하였다 국강은 처사가 청평하여 비익한 바가 많았다. 무자에 왕이 압록강을 건너니 제안공 숙과 대방공 징과 한양공 환과 대장군 공유 등이 래알하고 백저포를 바치었다. 기축에 달로화적 석말천구가 원에 돌아갈제 왕께 알현하고 서계를 청하여 포미를 가해 줄 것을 바라거늘 그는 일선도 없음으로 써 그 사를 략하였다. 신묘에 왕이 역자 교위 최기를 보내어 중서성에 상서하기를「전자에 성지를 받자와 관군을 다 돌아가게 하고 또 흔도에게 칙하여 군인이 처가족이라 지칭하여 끼고 오는 것을 네가 금하라 하셨는데 이제 관군이 청신하기를 즐기지 아니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특히 명문을 내리어 본국의 관사와 및 관군으로 하여금 같이 추쇄케 하소서」하였다. 정유에 지진하였다. 광평공 혜와 지밀직 한강과 좌승지 설공검 등 8인이 래알하고 백저포를 바쳤으며 홀적(전통을멘 호위병) 삼번도 또한 마필을 바치었다. 일관 문창유 오윤부 등에 명하여 서경에 복지케 하니 명년 피서의 곳을 삼으려 한 것이다. 찬성사 원전 등에 명하여 성용전과 동명 평양목멱묘에 제사케 하였다. 신축에 랑장 조감과 녹사 이구를 동녕부에 보내어 인물을 초쇄하였다. 장군 박의가 원으로 부터 돌아왔는데 중서성 첩에 이르기를「탐라 달로화적 탑자적이 탐라죄수를 고려의 험한 도서에 유체시킬 것을 아뢰었을 뿐이오 어찌 성지이리오 전자에 데려온 두 화아(엄인즉 화자?)가 도망하였는데 하나는 붙들고 하나는 붙들지 못하였다. 선례에 의하여 탐라에 입거케 할 것인 바 어찌 성지를 주봉하여 따로히 험한 도서에 방편적으로 입주케 하리오 그 편에서도 알아 두라」고 하였다. 기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원으로 부터 돌아오매 백관이 교에서 반열지어 맞이하였다. 이 행차에 무릇 국가의 소요사는 죄다 아뢰어 제거케 되니 국인이 덕을 송하고 감읍하였다. 정미에 참문학사 김구가 졸하였다. 동 10월 임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김방경으로 첨의중찬 상장군 판감찰사사를 삼고 은 10근을 사하였다. 조인규 인후를 경상도에 보내어 류민을 찾아내어 호적에 부치었다. 갑인에 김방경을 불러 밀의하고 이날 밤에 밀직사 이분희를 백령도에 그 아우 지신사 이습을 조홀도에 류배시키고 그 가산을 몰수하고 뒤이어 사람을 보내어 다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정사에 소윤 조유와 별장 이봉을 동녕부에 보내어 곡주 수안군 은율현의 인물을 추쇄하였다. 송상인 마화이 방물을 바치거늘 내정에서 사연하였다. 기미에 다구의 도당인 청주목사 손세정과 산원 장기와 및 녹사 지득용 유종 등 16인을 해도에 류배시켰다. 경신에 찬성사 판전리사사 유경이 사직하거늘 첨의중찬을 가질하여 그대로 치사케 하고 중찬 김방경으로 판전리사사를 박항으로 참문학사을 설공검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송분으로 밀직사 지신사를 박구로 우승지를 김주정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신유에 이죄이하를 유사하고 수종관리로 세누가 있는 자와 및 내료도 모두 허통하였다. 갑자에 랑장 김흥#로 경상도 각역 응방심검별감을 삼았다. 신미에 새로히 필도적52)과 및 신문색을 두었다. 계유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갑수에 중찬 김방경이 왕과 및 공주를 향연하였다. 정축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 하였다. 무인에 랑장 이봉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우리 곡주 수안 은율을 돌려 보내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기묘에 처모를 구타함으로써 랑장 김진을 해도에 류배하였는데 진은 본래 마안을 잘 지음으로 써 득행한 자이었다. 이달에 이궁을 마제산에 짓고 이름을 수강이라 하니 곧 초옥의 땅이었다. 11월 계미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자에 제주 달로화적이 왕을 향연하였다. 정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수강궁에 행차하여 사냥을 구경하고 인하여 랑가알의 전라행을 전송하였다. 제도에 계점사를 보내는데 삼사사 주열을 경상에 국자제주 권탄을 전라에 판소부사 최유를 충청에 전중 최유후를 동계교주에 판사 우준충을 서해에 파견하였다.

  경자에 이정의 가에 이어하였다. 갑진에 대묘지붕이 무너졌다. 윤월 계축에 대장군 조인규와 장군 로영을 원에 보내어 귀국한 것을 고하고 또 사은하였는데 표에 말하기를 「군친이 소방을 인애하는(자소) 은혜는 건곤이 복도함이오 신자의 향상하는 성간은 천일이 조임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후번을 각수하여 신소에 조알함이 막히었으며 구름을 바라보고 길을 신칙하니 멀리 관산이 조격하여이다. 기일을 획정하여 행장을 들치매 오히려 척척과 같나이다. 교에서의 맞이함이 락역하고 대궤53)가 더욱 풍부하였나이다. 참설이 허망을 일으켜 다선으로 저훼하였으나 정충을 그대로 명촉하사 모든 것을 탕제하시고 무릇 조진한 바는 모두 허가(함종)하셨아오며 하정의 다 피로치 못한 것까지 또한 다 먼저 조감하시와 안편에 나가도록 하시니 백성이 모두 살기를 얻고 삼한이 다 재조를 기뻐하나이다. 이것은 대개 엎드려 권고하심이 은하(은황)의 흐름에 주입하고 은혜가 동방(목역)의 봄에 돌아옴을 입음이오니 신이 온유하신 비상한 보사를 받자옴을 당하여 감히 효순을 잊으리까 평생토록 가진 힘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은련하심에 보답하오리다」하였고 또 아뢰기를「앞서 입조할 때에 면주하였거니와 금후에 만일 죄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이 죄주기를 청하여 제가를 얻었아옵니다. 이제 이분희 형제가 있는데 일찍 권신 김준을 부사하여 국병을 절롱하더니 도리어 림연으로 더불어 김준을 죽이고 전과 같이 천권하여 부왕의 폐립사에 이르러서도 수모하여 난을 일으켰고 또 로진의와 위득유로 더불어 교결하여 국가를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하거늘 그 정장을 추명하여 이미 전형을 바로 하였으므로 이에 써 문주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장군 박의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치었다. 을묘에 좌복사 치사 이주가 졸하였다. 임수에 공주가 병이 있으므로 죄수를 석방하였다. 병자에 장군 차신을 보내어 세자의 태를 안동부에 장치하였다. 무인에 국학대사성 곽여필과 장군 유홍진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2월 계미에 (원이)속로가를 보내와서 이분희 형제를 죽인 것과 지득용 등을 류배시킨 일과 및 종전진수군의 처부를 쇄취한 일을 물었다. 갑신에 재추가 친조를 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신묘에 경계수를 석방하였다. 왕이 원에 가는데 참문학사 박항과 지밀직사 홍자번과 우부승지 김주정 등이 종행하였다. 병신에 압록강을 건넜다. 정미에 원에 이르렀다. 이달에 속로가가 중찬 김방경과 판밀직 허공을 데리고 원에 돌아갔다.


기묘 5년 춘 정월에 왕이 원에 있었다. 신해에 제가 왕에게 망송의 보기 봉병 옥적 등 90종을 사하고 익일에 또 왕과 및 종신에게 채백을 사하였다. 을묘에 재추가 공주을 향연하였다. 교위 이응주와 강위성이 력을 반포하는 조서를 가지고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에 이르기를 ?짐이 천상을 맞추어 상고하고 인시를 경수하는 것은 일통을 크게 하고 민사를 중히 하는 바이다. 경은 세세로 번방을 지키고 해마다 공직을 닦으매 마땅히 신삭을 반하여 써 동문54)을 보이는 것이니 더욱 동작55)의 민을 몰아(구) 서성56)의 효를 힘써 거둘지어다?라고 하였다. 병인에 왕이 제를 알현하니 제가 어사대부 월열륜 추밀 패자 필도홀적(서기) 홀독가아 도올 등으로 하여금 왕에게 유시하기를 ?흔도 다구가 아뢰기를 진변종전군이 회래할 때에 처자가 다 관사에게 억류되어 보내어지지 아니한다 하니 과연 그러하냐?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지난 여름 성지를 받들어 나라에 돌아가 관인을 차견하여 수부로 더불어 관군처첩의 혼서 유무를 상고하여 예에 의하여 점쇄한 것이오 감히 천류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정묘에 왕이 장조전에서 시연하였다. 무진에 왕이 제를 알현하니 다구가 군인의 처자 128인으로써 청하매 다구의 아들이 패자의 말을 모는(집편)수자인지라 패자가 자못 다구를 돕거늘 왕이 말하기를 ?만일 군인의 처자를 분간함으로써 불법이라 한다면 군인을 놓아 량민자녀를 협박하여 강제로 취처하는 것은 가히 법받을 만한 일인가?하니 월예륜 등이 아뢰매 제가 이르기를 ?군인의 처로써 아식이 있는 자는 그 부에게 돌려보내고 국인의 고관자로서 죄가 있는 자는 신주한 후에 죄를 주라?하고 인하여 왕에게 명하여 귀국케 하였다. 공주가 신궁에 행차하여 역도를 위로하였다. 기사에 로영을 보내어 귀국케 하고 영접과 대접으로써 백성을 번요케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경오에 왕이 연경을 출발하였다. 2월 을해에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기축에 소윤 조유를 동령부에 보내어 기미 이래로 서해도의 백성으로서 망명한 자를 추쇄케 하였다. 신묘에 왕이 수강궁에서 응을 방양하였다. 갑진에 경원공 조가 졸하였다. 병오에 김방경으로 세자부를 허공으로 지첨의부사를 홍자번으로 판밀직사를 한강으로 밀직사를 기홍석으로 동지밀직사감찰제헌을 삼고 임익 송분 이존비로 모두 밀직부사를 삼았다. 3월 경술에 친히 안강전에서 초제하였다. 죽판동 인가 300여호를 철거하여 써 신궁을 짓는데 도역이 무릇 4000명이나 되었다. 갑인에 랑장 은홍순을 원에 보내어 화문대석을 바쳤다. 정사에 대방공 징을 보내어 독로화(질자)를 거느리고 원에 가는데 김방경이 아들 흔과 원부의 아들 정과 박항의 아들 원굉과 허공의 아들 평과 홍자번의 아들 순과 한강의 아들 사기와 설공검의 아들 지충과 이존비의 아들 우와 김주정의 아들 심 등 의관자제 범 25인에게 모두 3등을 뛰어(초)올려 직을 주어 보내었다. 기미에 윤수로 전라도 응방사를 삼고 원경을 경상에 이정을 충청에 박의를 서해에 보내었는데 칭호를 왕지사용별감이라 하였다. 임술에 왕과 및 공주가(친히) 마제산에서 사냥(렵)을 구경하였다. 병인에 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사람이 권세를 믿고 의리에 어두워 남의 전과 민을 천탈하는 자가 있다하고 또 권세에 의탁하여 관을 얻되 자품과 차서를 초월하는 자도 있다 하니 심히 말하수 없는 일이다. 만일 고치지 아니하면 그 사람뿐 아니라 부탁된 자도 또한 다 죄줄 것이다 그 원한을 품고 굴욕을 지닌 자는 귀천와 존비를 막론하고 마땅히 각기 가전에 상서할 것이다. 청송관이 천연하여 결단치 아니하면 반드시 벌하여 용서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묘에 왕 및 공주가 수강궁에 이어하였다. 경오에 홀적(호충군)3번이 왕을 향연하였다. 신미에 각도의 계점사를 정파하였다. 임신에 왕이 교에서 사냥하였다. 계유에 왕이 전민의 소송이 적년토록 미결됨으로써 금년 3월 이전이 일은 좌사의 권탄과 장군 최유엄 등 7인에게 명하여 별감57)을 삼고 4월 이후의 것은 감찰전법사에게 맡겨 추결하여 지체가 없도록 하였다. 도평의사에 전지하여 이르기를 ?제도에 사자를 보내어 왕년의 3세의 납부와 호구의 증모를 검찰할 것이오 금년으로부터 다시 세액을 정하고 아울러 염호를 점검하여 써 그 세를 징수토록 하라?하니 재추가 말하기를 ?3세의 납부는 각기 유사가 있으며 호구의 증모를 살핌은 농시에 행할 바가 아니라?하니 드디어 정지하였다. 하 4월 무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아압을 동천에 놓아(방)을 그것을 관람하였다. 신묘에 전지하기를 ?안동은 공주의 탕목읍58)인지라 부사 송유의로 그 홍정59)의 임을 띄게 하라?한대 유의가 3품으로써 미읍을 구하고 또 홍정을 청한 것으로 시의가 이를 기롱하였다. 을미에 왕자 자를 충청도 아주 동심사에 보내니 세자를 피함이었다. 신축에 중랑장 정공과 송현을 원에 보내어 이리간60) 두기를 청하였다. 계묘에 왕이 질환이 있거늘 신궁의 역도를 놓아(방) 제릉을 수리케 하였다. 갑진에 사나사에 이어하였다. 을사에 한재로 인하여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병오에 현성사에 이어하고 신궁의 역도를 복귀시켰다. 5월 병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죽판신궐을 관람하였다. 병인에 감찰시사 김홍미와 좌사간 이행검을 해도에 류배하였다. 정묘에 악으로써 신전의 취와를 사하였다. 무진에 공주가 질환이 있으므로 장군 이정의 집에 이어하고 또 수구 관음사에 이어하였다. 경오에 신궁의 역도를 놓아주었다. 신미에 장군 로영을 원에 보내어 의사를 청하였다. 이달에 원이 중서성첩에 이르기를 ?래문에 의거컨대 지원 12년에 사신 악도가 왕외랑의 전유한 성지로 인하여 본국 관명을 개혁하는 것이 이미 사신 악도로 더불어 상량하여 개혁하였거니와 제로관사의 왕래하는 문자는 첨의부를 지칭하게 되는데 본부에 인신이 없으므로 매양 이문을 행할 때 미쳐서 사세가 난편한 듯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인신과 및 제로에 행이하는 문자체례를 강급하소서 한 것은 도성이 주봉하여 인신을 주여하라는 성지를 받들어 삼가 예부에 보내어 예에 의하여 고려첨의부정4품의 동인 1과를 주하여 차래관 정귀 주석 등에게 부쳐 받아가지고 가도록 하노라?고 하였다. 6월 정축 삭에 좌사의대부 권단과 진주목부사 최참을 파면하였다. 경진에 장순용의 집에 이어하였다. 갑신에 경영궁을 개명하여 정화궁이라 하였다. 정해에 조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에 로영이 의사 2인으로 더불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동정원수부가 성지를 받들어 전함 900소를 지으라(조)고 하였다. 계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수강궁에 이어하였다. 도평의사가 성지에 의거하여 ?심주 료양사이에 이리간을 두어 제도의 부민 200호를 옮겨 살겨 하고 또 압록강내에 이리간 2소를 두되 소마다 각100호로하여 써 조빙의 역사에 공케 할 것?을 청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병오 삭에 이행검과 김홍미를 소환하였다. 무신에 경상도 안렴사가 아뢰기를 ?장사 조천이 일찌기 일선현령이 되어 밀성인으로 더불어 반역을 꾀하였으니 이제 비록 거죽은 변개되었다(혁면)하더라도 가히 조정에 서게 할수가 없아오니 청컨대 파직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기유에 승지 조인규와 인후를 원에 보내어 전함수조할 것을 주품하였다. 을묘에 각도 안렴 수령의 정월과 동지의 하상과 및 도계장을 바치는 것을 제거토록 하였다. 경자에 밀직부사 이존비와 장군 정인경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잉하여 도당에 상서하기를 ?전자에 조인규 등을 보내어 선즙의 수조사를 신계하였고 아울러 원수부로 하여금 감독케 하지 말 것을 청하였거니와 원수 다구는 우리와 틈이 있어 백성이 모두 원망하는 터이니 만일 감독케 하면 백성이 반드시 경의하여 도산할 것으로서 일을 쉽사리 이루지 못할 것이오니 바라건대 잘 천총에 주달하소서?라고 하였다. 8월에 병자 삭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신전에서 잔치하였다. 정축에 수강궁에 환어하였다. 신축에 장군 김백균이 원사 김종의로 더불어 경상도에 가 군기를 점검하였다. 이달에 객관을 지었다. 초공 상좌와 인해 일충 등 4인이 일본으로부터 도망해 돌아와 말하기를 ?지원 12년에 제가 사신을 일본에 보내고 우리는 설인(역관) 랑장 서찬과 및 초수 30인으로 하여금 그 나라에 보내었는데 사자와 및 찬 등은 모두 피살되었다?하거늘 왕이 랑장 지선을 보내어 상좌 등을 압송하여 원에 가 아뢰도록 하였다. 9월 병오에 왕이 응을 증산에서 날렸다(방) 기유에 신전에서 잔치하였다. 계축에 허공을 경상도에 홍자번을 전라도에 보내어 도지휘사를 삼아 전함을 수조케 하고 또 권탄을 충청에 보내어 도지휘사를 삼고 주열을 경상에 곽여필을 전라에 우준충을 서해에 최유후를 동계 교주에 보내어 모두 계점사를 삼았다. 병진에 장군 김윤부와 장순용을 원에 보내었다. 갑자에 응을 적전에서 날렸다(방). 중랑장 정공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에게 해청원패를 사하였다. 을축에 왕이 응을 묘곶에서 날리(방)기를 2일동안 하였다. 무진에 장군 장순용의 집에 이어하였다. 갑술에 세자 탄신이므로 신전에서 잔치하였다. 동 10월 정축에 승 500을 신궁에서 공양하였다. 원이

울단적(사문인)탑납과 필도적(서기) 합백나를 보내와 전함 짓는 것을 감독하였다. 무인에 원사를 신전에서 향연하였는데 이사가 계전에서 절하였다. 기묘에 원이 번윤을 보내와 참역을 점시하였다. 신사에 왕이 남교에서 사냥하여 사슴 한 마리와 노루 두 마리를 잡고 강윤소와 이지저를 불러 이르기를 ?대저 사냥이란 달리어 좇아 잡는 것이니 마땅히 험한 것 보기를 평지와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땅을 가려서 행하니 어찌 능히 많이 잡을 수 있으리오 이제로부터는 자주 사냥하여 써 익혀야 할 것이다?하였다. 임오에 목장제령이 왕을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계미에 광평공 혜를 보내어 탑납과 합백나와 함께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서 전함을 감독케 하였다. 기축에 친히 소재도장을 본궐에서 설하였다. 경인에 왕이 도원역에서 사냥하였다. 갑오에 사판궁에 이어하였다. 무술에 중랑장 정복균을 원에 보내어 인삼을 바치었다. 기해에 원이 랑가알를 보내어 마 150필을 수내에 방목케 하고 또 향마를 뽑아 바치라 하였다. 경자에 여러 회회61)가 왕을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신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신전에서 설하였다. 11월 병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랑가알를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계축에 화성이 달을 먹거늘 재추 대성에 명하여 시정의 득실을 논하되 실봉에 모두 기명치 않고 바치라 하였으며 이날에 조성역도를 놓아(방)주었다. 계해에 제주 달노화적이 왕을 향연하였다. 을축에 보현원에서 사냥하였다. 신미에 충청 서해의 계점사를 불러서 백성의 질고를 물었다. 임신에 제신의 수사한 관노비를 환수하여 도관에 속케 하였다. 강윤소와 김자정이 사패라 사칭하고 토전을 점령한 것을 신흥창에 몰입시켰다. 주군 창기의 자색과 기예있는 자를 뽑아 교방62)에 채우(충)도록 명하였다. 12월 갑술 삭에 대장군 유홍신과 소윤 김광취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신묘에 허공으로 동수국사를 설공검으로 지밀직사사를 삼고 송분 이존비로 모두 동지밀직사사를 삼고 박구로 밀직부사를 삼고 김백균 우준충으로 모두 삼사사를 삼고 감찰시승 최유엄을 대청도에 류배시켰다가 곧 소환하였다.

경진 6년 춘  정월 갑진에 주열과 곽여필을 파면하였다. 기유에 성문이 자주 변하므로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계축에 본궐에 이어하였다. 경신에 대장군 인후와 장군 고천백을 보내어 탑납과 더불어 원에 가게 하였다. 임술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동지를 구경하고 드디어 관음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덕천사 주지 익장이 영춘현리를 격살하고 또 창기 옥진과 통하였음으로 해도에 류배시켰는데 익장은 원종 총희의 아들이다. 병인에 홀적이 왕을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사에 친종장군 박연과 중랑장 리인을 동녕부에 보내어 부장(장인)을 추쇄하였다. 2월 계유 삭에 홀적이 왕을 향연하고 을해에 또 향연하였다. 기묘에 교위 정지연을 원에 보내어 환도 378파를 바쳤다. 경진에 랑가알가 왕을 향연하였다. 임오에 응방이 왕을 향연하는데 합팔나 랑가알 등 여러 객사도 다 부연하였다. 병술에 중랑장 류거에 명하여 대부의 재화를 수색하여 내부에 들이도록 하였다. 무자에 수강궁에 이어하였다. 을미에 사판궁에 환어하였다. 병신에 밀직부사 이존비가 합백나와 함께 전함을 전라도에서 시찰하였다. 무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현화사에 행차하여 승지 렴승익에게 명하여 불전을 짓게 하였다. 3월 임인 삭에 대장군 인후와 장군 고천백이 탑납으로 더불어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탑납이 절령(자비령)참에 이르니 옹진 등 수현이 주식을 제공하게 되었던 바 사람이 탑납에게 고하기를 ?우리 고을 백성은 다 응방에 예속되었으니 외로이 남은(자유) 빈민으로 무엇으로써 공궤하리오 주기63)를 국가에 돌리고 죽음을 기다리고자 할 뿐이다?하매 탑납이 와서 재상을 꾸짖기를 ?동방백성은 홀로 천자의 적자가 아니냐 인고하기가 이에 이르러도 구휼하지 아니하니 조정이 한 사신을 보내어 물으면 무슨 말로서 대답하려 하는가?하는지라 재상이 왕께 사뢰어 응방의 폐를 제거하기를 청하니 왕이 노하여 회회(회흘)로서 제에게 신임을 받는 자를 청해와 제도의 응방을 분관케 하고 재상을 억제하여 감히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자 하거늘 조인규가 력간하고 공주도 또한 불가하다고 말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계묘에 검교대장군 오광찰을 불러 명인전시위장군을 삼고 홍정을 사하였다. 광찰은 나이 89세로 동복현에 살았는데 그 아들 승 조영이 임금의 총애가 있음으로 이 명령이 있었다. 갑진에 서해도의 기묘년의 전수미를 거둬 절령도의 각참에 주어 써 랑가알를 공궤케 하고 또 써 궁실 전함의 철가와 및 공장(부장)의 량곡을 지급케 하였다. 무신에 친히 3계를 본궐에서 초제하였다. 경술에 제왕과 재추가 왕을 신전에서 향연하는데 류경 황보기 최영 송송례 변윤 등 치사한 재추를 불러 시연케 하였다. 임자에 감찰사가 말하기를 ?전자 강도에 있을 때에는 공부가 겨우 족하더니 이제 좌우창의 수입이 갑자기 줄고 또 대방주 이외의 칠색과 안색과 아도역(목마인)등 각소의 사식이 다 우창에 앙급케 되었으니 청컨대 이를 제거하소서 또 궁실을 수축한지 이미 3년이나 되었는데 량반으로서 노복이 없는 자는 다만 록패를 팔아 고용하여 부역케 하고 혹은 몸소 스스로 집역하는 자도 있으니 또한 청컨대 이를 제거하여 써 농한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또 제도 안렴사 별감은 직분이 다스림을 살피고 민생의 고락을 방문함에 있거늘 이제 모두 상공을 빙적하여 백성으로부터 주저 피폐 포과 명표지 등을 거둬 권귀에게 뢰유하니 청컨대 모두 죄를 다스리소서?하니 왕은 다만 명표지를 제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을묘에 감찰사가 상언하여 시사를 논하니 왕이 대노하여 시사 심양을 숭문관에서 국문하고 잡단 진척와 시사 문응을 해도에 류배하고 전중시사 이승휴를 파면하고 장군 김일로 시승을 삼고 랑장 우천석으로 잡단을 삼고 좌랑 민훤으로 시사를 삼고 전 광주판관 리인연과 지후 민지로 전중시사를 삼았다. 병진에 본궐에 행차하여 장경도장을 설할제 전후에 두견화가 성개한 것을 보고 사운시 1편을 제하여 사신 백문절 반부 곽예 민지 등 18인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매 문절 등이 진언하여 심?이 의 죄를 유사할 것을 청하니 곧 명하여 석방하고 뒤어어 또 척 응 등을 석방하였다. 무오에 원이 만자(남중의인) 해아를 보내왔는데 제래으로 군국에 함방한 망군과 회회가 도재를 자행하는 것을 금하였다. 신유에 지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의 유사들은 다만 과거의 문만을 익히고 경사를 박통한 자가 없으니 그 일경과 일사 이상을 통한 자로 하여금 국자에 교수케 하라?하니 이에 사재윤 김제 정랑 최옹 좌사간 방유와 전통사사인 류연과 권지지후 설조와 전지후 리극 오한경으로 경사교수를 삼았다. 무진에 장군 조윤통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중서성이 다시 담선법회를 설할 것을 허하였다. 하 4월 계미에 서리가 내려 화묘를 죽이더니 갑신에 또 그러하였다. 병술에 중랑장 간유지를 보내어 원에 가는데 평장 아합마가 미녀를 구하거늘 홍원사진전직 장인경이 그 딸로써 가기를 청하니 유지가 데리고 갔다. 이에 인경에게 랑장을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가 딸을 팔아 관을 얻은 것을 기롱하더니 아합마는 그가 명족이 아니라 하여 받지 않았다. 경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길상사에 행차하여 박연을 관람하였다. 중랑장 지선을 동령부에 보내어 선대군왕의 릉묘 발굴한 것을 힐문하였다. 신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신궁에 이르니 장자가 왕께 사뢰기를 ?역도가 3년동안 1일의 휴식도 얻지 못하니 처아가 어떻게 살겠나이까 이제 농시를 당하였으니 놓아 돌려 보내주기를 비나이다?하거늘 듣지 아니하였다. 계사에 가뭄이 심함으로 사람의 선과 립을 쓰는 것을 금하였다. 을미에 이백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는데 가뭄으로 사화64)는 하지 않았다. 항시65)하였다. 5월 계묘에 시와 부로써 친히 문신을 시험하여 서적점록사 조간 등 9인을 뽑아 황패66)를 사하고 내시에 적하였다. 왜적이 고성 칠포에 들어와 어자를 붙들어 가거늘 대장군 한희유를 보내어 해도를 방수케 하고 또한 홀적 순마의 제령부 등 200인을 뽑아 경상 전라도를 분수케 하더니 왜적이 또 합포에 입구하여 어자 2인을 사로잡아 가거늘 이에 대장군 인후와 랑장 지선을 보내어 원에 고하였다. 을사에 홀적에게 명하여 구를 치게하고 왕이 공주로 더불어 량루에 거동하여 관람하였다. 임자에 우박이 내리거늘 맹승을 모아 비를 빌었다. 계해에 비가 내렸다. 을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문신과 전시급제를 불러 지은 바 사운시를 보이고 대촉을 그어놓고(각촉)화답해 올리게 하니 좌사간 반부와 대제 곽예가 후배로 더불어 같이 부하기를 부끄러워 하다가 좌우의 협박한 바가 되어 마지못하여 또한 지어 올렸다. 갑술에 류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래하여 본국 군졸로써 왜적을 방어토록 하였다. 이 달에 가물고 황재가 들었는데 원의 중서성이 첩하여 미 10000석을 더 들여오게 (가적)하였다. 6월 기묘에 랑장 지선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만자 해아는 조정에서 보낸 것이 아니니 마땅히 경사로 압송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사에 신궁이 이룩되니 이름을 응경이라 하고 루는 한벽 문은 태통이라 하였다. 장군 박의를 원에 보내어 요자를 바쳤다. 추 7월 계묘에 승지 강승익의 집에 이어하였다. 장군 원경을 원에 보내었다. 병오에 첨의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퇴직하기를 빌거늘 승지 정가신을 보내어 돈독히 유시하여 일어나 일하게(기) 하였다. 신해에 장군 박의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의 친조를 래명하였다. 갑자에 사판궁에 이어하였다. 을축에 서해도 계점사 우준충으로 도지휘사를 삼았다. 병인에 밀직부사 김주정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정묘에 중서성이 첩하여 이르기를 ?쌍성 민호는 한신 등 3호의 교부를 제한 외에 덕광 등 6호는 쌍성의 륵류로 말미암아 연첩아가 결정하였고 아울러 차관인 위문개가 결정하여 본국 전호 30과 척신 남녀 42명으로 더불어 방귀케 한 후에 덕광 등을 교부한 일은 도성이 이에 준하여 전항의 호계를 제하고 개원 등로 선위사에 차부하여 쌍성에 조감을 내려 도성에 정문케 하는 외에 이첩을 행하는 것이니 청컨대 조험하여 곧 덕광 등 6호의 교부된 것을 시행하라?하였다. 8월 신미에 왕이 장차 원에 가려하고 또 천변이 여러번 나타남으로 써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왕이 원으로 행차하였다. 계유에 원경이 원으로부터 성지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탐라의 달노화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의 철장으로 써 전함을 수조케 하였다. 병자에 원이 황자 애아적을 대청도에 류배하였다. 계미에 왕이 창의현에 이르니 영령공이 두 아들을 거느리고 와서 알현하였다. 신묘에 공주가 애아적을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왕이 상도(찰합이의 다륜현)에 이르렀는데 그 때에 제가 도간나올(찰 뇌아지방)에 있었으므로 왕이 드디어 행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제를 알현하니 제가 왕을 향연하고 인하여 종신에게 명하여 부연케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박의로 하여금 아뢰기를 ?동정하는 일은 신이 입조하여 성지를 품수코자 하나이다?하니 제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흔도 다구 범문호가 다 먼저 명령을 받은지라 다구가 말하기를 ?신이 만일 일본을 정벌하지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폐하를 뵈오리까?하니 이에 약속하기를 ?다구와 흔도는 몽려한의 40000군을 거느리고 합포에서 출발하고 범문호는 만군(남중의 군) 100000을 거느리고 강남에서 발하여 함께 일본 일기도에 모이어 량군이 다 모이거든 곧장 일본에 지적하면 기필코 파할 것이라?고 하는지라 왕은 7사로써 청하기를 ?(1)아군의 탐라를 진술하는 자로써 동정의 사에 보할 것 (2)려한군을 감하고 도리첩목아로 하여금 몽군을 더 발하여 써 나아갈 것 (3)홍다구에게 직임을 가하지 말고 그 성공을 기다려 상주고 또 도리첩목아와 신으로 하여금 동정성사를 관장케 할 것 (4)소국의 군관에게 모두 패면을 사할 것 (5)한지의 바닷가(빈해)사람을 아울러 초공 수수에 충당할 것 (6)안찰사를 보내어 백성의 질고를 렴문할 것 (7)신이 몸소 합포(마산)에 이르러 군마를 열송할 것?이라 하니 제가 이르기를 ?이미 아뢴 바를 령납하노라?고 하였다. 무술에 왕에게 래하여 나라에 돌아가게 하니 승상 안동의 모가 양마 1필을 바쳤다. 9월 기유에 왕이 북경(열하성평천)에 이르니 강수형이 왕을 그 집에서 향연하는데 동지 송정이란 사람이 있으니 유자인 지라 왕이 지은 바 9일시 2편으로 써 보이었다. 병진에 도리첩목아가 왕을 로상에서 맞이하고 마 3필을 바쳤다. 정동원수부 진무야속달이 두 관자67)를 가지고 왔는데 ?기일은 성지를 받들어 흔도 다구 범우승 이좌승에게 정수일본행중서성사를 위임하여 즉일로 군마를 조도케 하고 본국이 관리하는 량저와 선척과 초공 수수의 일체군 수를 안거하고 청컨대 조험을 거쳐 법과 같이 준비하여 구처 사용을 기다릴 것이오 림시에 실오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기일은 지나가는 곳에 공법을 겁내지 아니하는 사람이 불을 놓아 풀을 태울까 저어(공)하노니 일이 리해에 관계되는지라 청컨대 조험을 거켜 방을 내 붙이고 금약 하여야 할 것이니 만일 어기면 죄는 돌아갈 바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인에 왕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사판궁에 입어하였다. 정묘에 원이 야속달 최인저을 보내어 수달단68)의 개원 북경(내몽고의 객나심부) 료양로에 처한 자를 동령부에 옮겨두도록 하였는데 장차 정동하는데 나아가게 하고자 함이었다. 동 10월 신미에 경외병을 점열하였다. 정해에 각도 지휘사로 하여금 판관록사를 파하고 다만 도평의록사만을 류치케 하였다. 무자에 궁인으로 하여금 주악케하여 생소 가취의 소리가 밖에 들렸는데 국인은 동정하는 사유로 인하여 모두 이마를 찌프리는 차탄이 있었다. 기축에 감찰사가 제사의 근태를 검찰하였는데 아시감찰이라하여 항상 동하의 맹월로써 그것을 행하는 것이었다. 외방에 사고가 많음으로써 팔관과 정단과 동지의 하표를 제하도록 하였다. 경인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정유에 정동행성이 자모아란을 보내어 량향과 군기를 준비하고 사졸을 첨발하여 두목을 차정하였다. 무술에 중찬 김방경이 다시 로퇴할 것을 청하거늘 듣지 아니하였다. 이달에 원에 행중서성이 정동군사에 이첩하였는데 첩에 이르기를 ?성지를 흠봉하여 일본국을 정수하는 일을 회험하였더니 지원 15년에 받은 추밀원의 차부에 의하면 전위를 이루는 군인들 가운데 도망사고를 일을켜서 병역을 빠져나간 군인이 많았음으로 이를 상주하여 성지를 받들었는데 (성지에)이르기를 ?관리와 각로 오로69)(역참맡은)관리를 보내어서 함께 조사하여 만약 그 사이에 속이고 은폐하는 것이 있으면 오로관리들이 죄명을 정하고 파직을 시키면 인구와 재산을 처단 몰수할 일이다?하니 이렇게 엄중하게 처리하라 하였으므로 본추밀원이 맡아 본 바로는 전항의 도망사고 헐역군인들이 많은 것은 아마도 도강 이래로 군마를 여러 곳에 갈라서 배치하고 정달케 하였기 때문이며 그 지휘관이 군인들을 몸소 잘 관리하지 않고 마음을 써서 무휼하려고 하지 않은 때문이다 (지휘관들은) 강하고 부한 자를 지정해서 합필적발도아70)라는 이름을 붙여서 항상 점파하여 따로 두목관령의 일을 맡기며 이들에게는 군중의 차사를 시키지 않는다 친관두목은 도리어 부하의 관리를 하지않고 어쩌다 출정하는 일이 있으면 순초 등의 일체의 공역을 그 나머지 군인들에게만 시킨다 그러니 (군력이)점점 소모되고 혹 출군할 때 약간의 포로를 잡으면 또 지명해서 뺏아내고 군중에다가 구수해서 전물을 과수하고 군인의 좋은 말(마)은 군관들이 구실을 만들어 억지로 바꿔채고 군마의 량료를 감손시키면 군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돌보지 않고 이들을 관사의 공역에 자주 부리며 군력의 난이를 헤아리지 않는다 군인이 병들어도 고쳐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치유되면 곧 중로동을 시키며 로역에 못 견디어 죽든지 기갑십물이 손##되어도 미리 조감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서야 겨우 군을 동원하고 빚을 내어서 사서 채운다 이와 같이 폐단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에 도망과 헐역이 일어나며 진전에서 인품 물질의 조달에 잘못이 생기고 오로 안에서 기보하게 됨으로써 오로관리들로 하여금 인하여 작폐하여 소요불안하게 한다 이는 군대를 관리하는 관리들의 잘못인 것이다 만약에 긴절히 금지시키지 않는다면 징발된 군인들이 군전에 다달아서도 구폐에 젖어서 전과 같이 지명점파를 하고 존휼에 용심하지 않을까 두렵도다 또 핍박함에 미쳐서는 도망했다가 다시 오로안으로 돌아와서 충당이 되니 이로서 군호가 손괴된다 그래서 이런 사유를 상주했더니 성지가 내려왔는데 행성 행원 도원수 각위지휘사 초토만호 이하 대소 관군관 수령관 진무인 등에게 선유해서 추밀원으로 하여금 규정을 만들어 널리 시행시켜 이를 금치케 하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제형안찰사관으로 하여금 항상 용심하여 체찰케 하고 추밀원으로 하여금 동행성 행원과 함께 군관들의 공사처리를 대상으로 그 공과 과를 고찰 비교해서 분명히 주문하여 상벌을 행하게 하라 하였다 본성은 이제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출정할 적에 미리 성유하지 않는다든가 군관 군인들이 기에 림해서 실오를 저질러서 죄책을 진다든가 하는 일들을 조목대로 참상하여 본래 내려졌던 성지의 전문을 앞에 초록해 놓은 바이며 아울러 추밀원에서 결정지운 조획을 열거해 놓는다 바라건대 삼가 성지를 받드는 사의에 의거해서 구처할 것이며 다시 아래로 시행해서 마땅히 군인들이 둔주해 나가 있는 곳에 항상 분명하게 제시하여 엄격히 성유 시행할지어다. 1, 관군관들은 소관 군인들 가운데서 튼튼하고 능력있는 자 1명을 골라서 항상 충분히 무예를 사열하고 습련시키며 교련을 관숙케 하고 진세 진퇴의 법도는 각각 정예하도록 해야한다 이름을 빌린 노예나 연약한 자를 역에 충당시키는 것을 불허한다 뽑아서 조련시킨 정군을 함부로 교환해서는 안되며 또 아래로 차례로 내려 보내어서 다른 명목을 붙여서 군에서 방면하여 귀가시켜도 안된다 만약에 륜번교체로 한다면 반드시 교체하기에 합당한 자로 하여야 하며 관총사의 해당관으로 하여금 군에 충당될만한 자인가를 상험시킨 후에야 비로소 체환함을 허락한다 그러면 총사에서는 증명을 발급하고 방면하여 귀가토록 한다 체환될 군인으로서 한 번도 얼굴을 맞대어 본일도 없이 또 증명없이 순주한 자는 곧 도망군인이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군관 진무들은 한번 얼굴을 나타내었다고 증명을 발급해서 체환시켜서는 안 된다 시위친군은 차한에 부재한다. 만약에 불시에 관원을 파견하여 점검케 했을 때에 군인의 수가 모자라거나 혹은 이름만 빌린 노예 약자 등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추구해서 다스린다. 일, 대소의 관원들이 점거하고 있는 합필적발도아군인 주둔지는 항상 점파해서는 안되며 성지가 도달된 날로 모조리 본익의 친관두목관령에게 발부해야 하며 그 밖의 군인들은 같은 곳에서 륜번에서 충당되고 관용의 차역을 지게 할 것이다 만약에 출정할 때에는 반드시 합필적발도아를 쓸 것이며 그들이 도달된 날에 각익의 군수를 점검해서 골라 적발을 행한다 그리고 돌아온 날에는 본래대로 가가 본익에 귀속하게 한다 금후로 대소관원이 둔수하고 있는 곳에는 모두 예전처럼 항상 점파하지 않을 것이며 합필적발도아는 손감되지 않도록 한다 그 밖의 군인은 밤이 되면 수성군 안에서 머물게 하며 수숙에 륜차하고 관을 시켜 관령케 하여 처리에 대비한다 그리고 또 사사로이 군인을 시켜서 공역영운을 하지 못하게 하고 관군관원으로 하여금 정사를 차지하여 관리하거나 민호를 초수하는 등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신부군인으로서 량곡을 청하여 오는 자도 역시 이 례에 따르게 한다 군관 합필적의 인수는 양양부 때에 행성이 이미 각각 수목을 정한 바 있으니 이 인수를 제외하고는 이하 더 점거하지 못하게 한다 일, 출정시에 군인이 토득한 인구 가축및 기타 일체의 물품은 그들 토득한 사람이 주인이 될 것이며 그 군인을 관할하는 두목인 등이 지명해서 거두어 들여서는 안되며 또한 죄명을 씌워서 협박으로 강탈해서도 안된다. 일, 군인의 마필은 군관이 빌려도 안되고 바꿔져도 안되며 또 군인마필을 차역에 충당함으로서 여위고 약화되어 쓰러지게 하여 군인들을 강요하여 빚을 내어서 이를 사서 보충케 하여 고생을 받도록 해서는 안된다. 일, 군중에서 만약 병에 걸린 군인이 있으면 곧 고명한 의원으로 하여금 진찰케 하여 약을 쓰고 간호케 하여 명익에서 좋은 사람을 골라 시병토록 할 것이며 그럴 때는 본익으로부터 정원을 보충받게 되니 수령관은 그들이 본직에 구애됨이 없이 전적 병자 간호에 주력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병든 군인은 다시 회복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교대당번과 사역에 충당될 것을 허용해야 될 것이며 그럴 때에는 즉시로 그 사실을 본익에 보고해야 한다 만약에 검열한 때에는 병사한 군인의 수가 많고 적은가를 살펴서 사병관에 대한 상벌을 시행할 것이다. 일, 군인이 전장에서 대전하던가 진중에서 죽으면 그 직속 두목이 사실대로 보고하고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갖추어서 다시 상부로 보고하여 예에 따라 급상토록 한다 본호 군역은 구례에 비추어서 1년동안 원호하여 주고 병사군인에게도 또한 반년 동안 원호하여 주며 년한이 지나면 그 군호의 다음 차례의 장정으로 군역에 보충한다. 일, 성을 공격하거나 들에서 싸울 때에 적병과 상대하여 전사한 자에 대해서는 전에 용전하여 공을 세웠던 두목군인으로 하여금 여러 군병들에게 이 사실을 상세하고 명백하게 따져서 확인한 다음 종파군관이 그 이름과 세운 공적을 열거해서 보증하여 결정한다 그러면 행성과 행원에서는 예에 따라 상주하여 관상을 내려주게 한다 전공을 태만하였던 자에 대해서도 또한 증거를 가지고 사실을 따져서 변명의 여지없는 사실로 자복이 되면 상부로 보고해서 단죄하며 중간에서 (개인적인)은혜와 원수관계에 따라서 공과 과를 거짓 보고함으로써 위실과 착오가 나오지 못하도록 한다. 일, 매1000호마다 신실한 전량관 2명을 골라서 둔다 만약에 관에서 하급하는 상사가 있으면 이들에게 맡겨서 군인들에게 지불 급여해서 나누어 주도록 하며 본관두목인들이 중간에서 착복감손하지 못하도록 한다 만약에 파견되어 나갈 군인이 있으면 관련되는 금전물품을 관에서 수자를 대조해서 인수하며 저치하고 본군으로 돌아올 때에 급부한다 죽은 자에 대해서는 이를 가속에게 발부하여 침탈한다거나 은익함이 없도록 한다. 일, 군인 군마의 식량 사료를 지급할 일이 생기면 역시 이미 위임되었던 신실한 전량관으로 하여금 관리해서 지급케 하며 착복감손이 없도록 한다. 만약에 죽은 군인의 식량가 죽은 말의 사료로서 먹고 쓰고 해서 남은 것이 있으면 현재의 수목을 도로 바치게 한다 혹 파견되어 나간 군인 군마의 식량 사료는 회수해서 두었다가 그들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 급부하며 혹은 또 다음 달에 식량을 청구하는 군인들로 하여금 쓰게 하여 사사로이 랑비함이 없게 한다. 일, 갑옷 병기 및 군수의 물자들은 미리 점검해서 충분히 구비되어 있도록 하여 예측치 못할 일에 대비토록 한다 위급한 때에 임해서 모자라서 비로소 군인들을 독촉 강요하여 황급히 빚을 내어서 보매케 함으로써 군인들이 리은을 많이 내고 고생을 받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일, 군중에 아무런 소요가 없는데도 오히려 도망한 군인이 있으면 본관군관이 곧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그 군인이 속해 있는 오로의 관사에게 공문을 이행해서 사람을 보내어 공동심의해서 함께 모름지기 도망했던 본인을 찾아내어 체포하여 사실을 신문해내고 군전에서 이미 내렸던 황제의 성지에 비추어 죄명을 결정한 다음 여러 사람 앞에서 처벌을 한다 만약에 오로관이나 또는 방리정이나 향사나 또 이웃사람들로서 사실을 알면서도 조사하여 도망한 군인 본인을 잡지 아니한 자는 이미 정해진 죄명에 따라 처벌한다 만약에 군관이 사사로이 일면으로 관을 파견하여 오로 안에서 도망사고 군인을 보충했을 때에는 오로관은 황제 성지의 뜻에 따라 그 군관의 성명을 렬거해서 추밀원에 보고하여 심문의 증거로 삼는다. 일, 군인 군마가 주둔해 나간 곳에서는 모름지기 그 관할구역내에서 각 천호와 백호들이 부대단위로 한 곳에 둔주케 할 것이며 총파관원들은 관에 속한 관유건물에 유숙케 할 것이고 저자와 거리에서 신부한 관민의 택사를 점탈해서 사방에 흩어져서 자리잡음으로서 신부민호를 속이고 억압해서는 안된다. 일, 관군 군인에 성유하여 투강해 온 관민의 택사 점포 장산 전지 화과 송죽 채균과 일체의 림목을 강제적으로 점탈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이렇게 점탈하는 자가 있으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며 남의 집이나 분묘를 겁천하고 부수지 못하게 한다. 일, 군관 군인들은 새로 귀부한 주성에서 협세하여 타인의 처와 딸을 강취하지 못하게 하며 만약에 합의하여 결혼한 자라 할지라도 혹 친속이나 수종인구가 있던지 또는 고용인 등이 있으며 그들을 전매해서 빙가시킬 수 없다. 일, 관군관원들은 (다음과 같은 일을) 엄격히 금치를 가할 것이다 즉 각관군의 군마가 주둔하던지 또는 출정해서 경과하는 곳에서는 이미 가까운 지방에 대하여 성지로서 금치한 것을 제외하고서도 새로 귀부한 지방에서 가축을 몰수하거나 몰아내거나 해서 백성들의 전답곡식을 짓밟거나 화과상수를 따먹지 못하게 할 것이며 또 민가에서 주식을 취하고 돼지 닭 거위 오리 등을 잡아 먹고 백성들의 모든 재물을 칼로 위협해서 략탈하지 못하게 한다. 일, 관군관사와 여러 군인들에게 성유하여 다 염주세와 국등의 모든 금지물품에 관해서 위법이 없도록 하게 한다 만약에 위범하는 자가 있으면 정범인을 조문에 따라 처벌하는 외에 또 본관 두목으로서 단속에 실책이 있는 자도 또한 단죄를 한다. 일, 군관인들이 군인들에게 함부로 강제로 할당하여 돈이나 가축 및 기타 일체의 물품을 거두어 들이지 못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원의 행중서성이) 또 이첩하기를 ?삼가 성지 조획을 받들었는데 그 한 구절을 보면 대관원들이 차지하고 있는 합필적발도아군인들은 주둔해 나가 있는 곳에서 항상 점파해서는 안된다 성지가 도달되는 날로 모조리 본익에 발부해야 하고 친관두목을 그 나머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관리하여 교대로 관의 차역에 충당하여야 한다 출병할 때 반드시 합필적발도아군인을 사용할 경우에는 그들이 도착한 날로써 각익의 군수를 점검하여 선택 징발하여야 하며 돌아갈 때에는 각각 본익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 금후에는 대소관원들이 주둔해 나가 있는 곳에서 전처럼 항상 합필적발도아군을 점파함으로써 그 나머지 군인의 수를 감원케 해서는 안된다 현재 (이런 성지를) 비추어 상고컨대 출정할 날짜도 가까워졌는데 본 중서행성에서 의론하여 아래와 같이 각익의 관군관사의 정원수를 결정하려 한다 즉 합필적발도아군인을 만호로부터 그 이하 관군총관 및 천호 총파 등의 관원은 그들이 관할하는 군인의 수에 따라 정액대로 차지한다 만약에 군인수가 부족하면 반으로 감하여 점용할 수 있게 한다 이후에 관군관원들이 각각 본래 설정된 정원수에 의하지 않고 출정군인들을 더 많이 차지하여 사용했을 때에는 관사에서 이를 찰지하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의 고발로 사실을 확인하고서 원수 만호 총관으로부터 문초하여 중서성과 추밀원에 이자하여 상주하고 처리하는 외에 또 그 아래의 천호 총파 백호 등의 관원이 위범이 있으면 곧 그 직임을 혁파해 버린다 고발자에 대해서는 그가 직역을 가지고 있는 자이면 명분을 높혀주고 가해줄 것이며 산군이었을때에는 곧 임용한다 이에 의거하여 모름지기 다음과 같이 열거하여 이첩하니 청컨대 조험한 뒤 관군관원들에게 빨리 내려보내어서 위와 같이 시행하도록 하라 즉 관원으로 도원수 100명 좌우부원수 80명 사만호 50명 부만호 40명 총관소관군 1000명에 합필적군인의 정원이 총관 20명 부총관 10명이요 천호소관군 50명에 합필적군인의 정원이 천호 10명 부천호 5명이요 총파소관군 200명에 합필적군인의 정원이 4명이요 백호는 합필적군인의 정원이 2명이요 원수부 수령관은 경력 한 사람에 7명이요 지사 한 사람에 4명이요 령사 다섯 사람에게 각3명이며 역사는 3명을 차지하고 통사는 3명을 지인은 3명을 진무는 7명을 가각고관은 1명을 차지한다 진무소의 령사는 두 사람이 1명을 차지하고 만호부 수령관은 지사가 3명을 차지하고 령사 4명은 각각 2명을 차지하고 통사는 2명을 지인은 2명을 진무는 3명을 차지한다 총관소의 수령관으로는 제령안독의 명분으로만 설치되는데 제령안독은 3명을 차지하고 령사 3명은 합쳐서 2명을 차지하여 쓰며 지인은 1명을 탄압은 1명을 차지한다 천호소의 수령관은 지관이 1명은 지인탄압이 1명을 차지하여 쓰며 총파의 령사는 두 사람이 1명을 쓰고 백호소의 사리 탄압 등은 1명을 차지하며 쓴다?고 하였다. 11월 임인에 3관 5군을 사열하였다. 병오에 총랑 김원 장군 조윤번의 딸로써 (원의) 아합마에게 시집보냈다. 무신에 탑납 합백나를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유에 우승지 조인규 대장군 인후를 원에 보내어 중서성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소국이 이미 병선 900소와 초공 수수 15000명과 정군 10000명과 병량은 한두로 계산하여 110000석을 준비하였고 집물과 기계는 가히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되어 거의 힘을 다하여써 성덕을 보답할까 하나이다. 내가 예전에 조정에 있을 적에 일찌기 행성의 일을 관장할 것으로써 신소에 아뢰었으나 명강(밝은 강지)을 받잡지 못하였나이다. 그윽히 생각컨대 제후가 입상하는 것은 고래의 도리인데 요와 금 량국이 우리 조상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를 삼았고 내 또한 외람히 성권을 입어 일찌기 특진 상주국에 배하였으니 이로써 헤아려보면 제후로서 상국 재보의 직을 띄는 것은 고금에 예가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데 잘 아뢰어서 행성으로 하여금 무릇 대소군정과 공사는 반드시 나와 상량한 연후에 시행케 하고 사신을 차발하여 써 조정에 갈적에도 또한 반드시 천개로 더불어 같이 가게 하소서 이제 행성의 문자에 ?우자고려국왕?이란 것이있고 봉에는 ?도국왕개탁?이라 하였으니 그윽히 살피건데 중서성의 행래 문자는 글자가 근엄하고 종이가 두터운데 매첩에 ?청조험? ?근첩?이라 하였으니 아지못하게 행성의 문자가 이 무슨 체예인지 내가 헤아리건대 행성이 국왕에게 이미 의기가 없으니 비록 자관 차부71)라도 가할 것이외다 만일 모든 부마처에게 부득이한 행이 문자가 있을 때에는 마땅히 어떠한 체례를 써야 할지 예전에 독련가국왕은 우리 부왕에게 일찌기 직접으로 문자를 행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달노화적에게 내려서 행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데 피차에 왕환하는 문자의 격식을 작정하여 회시하소서 소국은 해를 이어 화곡이 부등하여 백성이 다 먹을것이 핍절하기 때문에 군량을 일찌기 뜻대로 수저하지 못하였나이다 현재의 병량 70727 한석을 제한 외에는 내외로 공사의 것이 함께 갈핍하여 이로써 대소관원의 월봉과 국용에 다반으로 부세를 다 수취하고 다시 중외에 호감하여 겨우 40000 한석을 준비하였는데 이를 초과하면 써 응부하기가 어렵나이다 정군 10000명의 1삭량을 계산하면 무릇 3000 한석인데 저 대군은 많으면 3~40000에 이르고 그 활단적(군속이 또한 적지 아니하며 또 초공과 수수가 15000명에 불하할것이외다 근자에 행성의 문자가 왔는데 이르기를 ?명년 춘수에 발정하여 온다? 하니 만일 제로관원이 합쳐 래도하면 청초시절을 기다리지 못하여 군량도 오히려 충족하지 못하겠거던 마료는 장차 어찌 지응하리까 또 듣건데 장차 5,6월로써 바다로 떠나간다 하니 우리 나라는 해마다 5,6월에는 매우(토우)가 그치지 아니하고 조금 서풍이 있으면 해도가 안개끼고 어둡게 되는데 혹시나 시일이 끌려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 가을에 대일 구량과 배에 실을 행량을 또 어찌 능히 지공하리까 오직 군민이 일시에 절식될까 걱정되나이다 정실로써 미리 먼저 신복치 아니하였다가 오착이 생기면 리해가 가볍지 아니할가 하니 청컨대 조험하여 시행하소서 탐라에 진수한 소국의 1000군은 전자 동정시에 본국의 5300군액에 계속되었던 것이온 바 그윽히 생각하건데 소방은 땅이 좁고 사람이 희소하여 군과 민이 분별이 없는데 다시 정토군 4700을 첨가한다면 수를 다하여 응부하기가 어려울까 깊이 걱정되나이다 원컨대 전항의 진수 1000군으로써 신첨하는 정토군액에 보충케 하소서 소국이 전일 달노화적이 있을 때에 내외인호에 쓰는 궁전은 타포호에 이르기까지 있는 것을 모조리 취하였으며 또 전일 동정시에 5300군이 가지고 간 의갑과 궁전은 기실한 것이 많은데 겨우 수습하여 부고에 쌓아둔 것이 지용에 불감하거던 하물며 이제 신첨한 4600군은 원래 일물도 없느지라 무엇으로써 몸을 막으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잘 아뢰어 의갑 5000과 궁 5000과 궁현 10000으로써 사하시와 그 기력을 돋우어 주소서 소국의 군민은 일찌기 진도 탐라 일본 3처에서 여러번 전공이 있으되 아직 관상을 입지 못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공을 추록하여 각각 패면을 사하여 써 장래의 공을 권하소서 매 1000군에 총관 천호가 각 1인 총파 각 2인으로서 이름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오니 청컨대 상장군 박지량 대장군 문수 라시곡 한희유 조규 친종장군 정수기 대장군 리신 박보 로정유 안사 등 10인으로 총관을 삼고 대장군 조변 장군 안적재 허홍재 김덕지 서정 임개 김신정 이정익 박익환 등 10인으로 천호를 삼고 중랑장 류보 김천록 리신백 신혁 최공절 려문취 안흥 이순 김복대 차공윤 이당공 랑장 박성진 고세화 중랑장 송인윤 랑장 옥환 계부 김천고 이정 서광순 함익심 등 20인으로 총파를 삼으소서 현금 뽑은 바 소방 군액은 경내가 2500 경상도가 2390 전라도가 1880 충청도가 1900 서해도가 1190 교주도가 160 동계가 480 총계 10000인이오 병선이 총900소인데 300소에 초공 수수 18000을 써야 할 것이외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국의 호구는 자래로 조폐한데 왕년 동정할 때에 대선 126소의 초공 수수도 오히려 충족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이제 300소를 무엇으로써 수를 채워 응부하리까 이로써 농민에게 까지 징발한 정장이 무릇 15000인데 그 충당치 못한 수수 3000을 어디에서 조발하리까 동령부가 소관하는 제성과 및 동경로의 연해주현에 초공 수수가 많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3000인을 발견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겠나이다 배신 중찬 김방경은 공직한 이래로 무릇 조정의 조명을 응봉하여 일심으로 힘을 다하였고 또 진도 탐라 일본 등 3처에서 관군을 따라 토벌하여 여러번 첩공이 있었으므로 호두패를 선수하여 장유하고 로고에 보답하옵소서 이제 다시 정군 10000과 수수 15000명을 관령하여 일본에 왕정케 되었는데 만일 군사에 참령하지 아니한다면 호령하기 어려워서 혹 위오케 될까 두렵나이다 방경의 년령은 비록 높으나 장심은 오히려 있어 다시 진력하여 써 천은에 보답하고자 하니 청컨대 잘 주달하와 원수부에 참여하여 공사를 맡아보도록 허락하소서 병량의 1년소수가 총계 16732석인데 왕년의 수저와 및 금년의 소수가 총계 70727한석이외다 소국의 첨기한 정군이 10000 수수군이 15000인데 중찬 김방경으로 두령을 삼아 외교를 맡게 하고 밀직부사 박구 김주정 등으로 만호에 기용하여 먼저 일본에 가게 하소서 내가 조정에 진예하였을 때 만호패면을 사해 주시기를 빌(걸)었으나 아직 명강을 받잡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잘 주달하여 박구 김주정 등에게도 또한 호두패를 사하여 써 래효를 권하시고 우승지 조인규는 몽한어에 통효하여 무릇 조정의 조지와 상사문자를 명백히 전역하여 위오됨이 없었으며 내가 석일에 천연에 뫼실 때 종시 수종하였고 또 공주의 측근에서 조석으로 각근히 일하여 공로가 적지 아니하니 또한 패면을 사하시와 써 왕경의 탈탈화손(역전관)겸 추고관 두목에 충당케 하소서 라고 하였다. 경술에 중서성이 회동관사 장헌과 리부주사 야선해아를 보내어 견 20000필을 가지고와 쌀을 사(시)서 병량에 충당케 하였다. 임자에 왕이 사판궁에 있으면서 팔관회를 설하였다. 을묘에 김방경이 다시 글을 올려 퇴관을 빌거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기미에 일관에게 명하여 이제로부터 동지 원정력을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경신에 중찬 김방경과 밀직부사 박구 김주정이 동정군사를 사열하였다. 병인에 중찬 김방경 장군 정인경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2월 계유에 허공으로 참문학사 세자보를 홍자번으로 지첨의부사 세자이사를 한강으로 좌상시를 삼고 송분 이존비로 모두 지밀직사사 세자원빈을 박구 김주정으로 모두 동지밀직사사를 김백균으로 밀직부사를 채인평으로 삼사사를 주열로 판도판서를 삼았다. 갑신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신묘에 조인규 인후가 원으로부터 돌아오거늘 왕이 조서를 성 서문외에서 맞이 하였다. 제가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를 삼아 인신을 사하고 또 김방경으로 중봉대부 관령고려군도원수를 지밀직사사 박구 김주정으로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을 삼아 모두 호두금패와 인신을 사하고 조인규로 선무장군 왕경단 사관 겸 탈탈화손을 삼아 금패 인신을 사하고 박지량 등 10인으로 무덕장군 관군천호를 삼아 금패 및 인을 사하고 조변 등 10인으로 소신교위 관군총파를 삼아 은패 및 인을 사하고 김중성 등 20인으로 충현교위 관군총파를 삼았다. 갑오에 신전에서 잔치하였다.

 

신사 7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원이 왕통 등을 보내어 신성한 수시력을 반포하니 이것이 곧 허형 곽수경의 소찬이었다. 조에 이르기를 ?자고로 나라를 두고 백성을 다시리는 임금은 반드시 하늘을 공경하고 천시를 알려줌으로써 입리의 근본을 삼는 것인 바 황제와 요순으로 삼대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일관된 자는 다 대대로 그 업을 지켜서 때를 따라 고험하여 써 하늘로 더블어 력법을 자주 고치는 폐가 없었더니 진에 미쳐서 선성의 술이 없어지고 매양 윤월을 세종에 두니 고법이 더욱 폐하여졌으며 한으로부터 이하는 적년월일의 법을 세워 써 추보의 표준을 삼아 인하여 그대로 연습하여 이제까지 이르렀도다. 대저 천운은 류행하여 쉬지 아니하는데 일정한 법칙으로써 구속코자 할진대 오래되면 틀리지 않을 리가 없고 틀리면 반드시 고치는 것은 그 사세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이제 태사원에 명하여 령대72)를 짓고 의상73)을 만들어 날을 헤아리고 달을 실험하여 써 도수의 진을 고증하고 적년일의 법은 모두 취하지 아니한 바 거의 천운에 합치(문합)되어 길이 길이 폐가 없기를 바라며 이에 신력이 이루어짐에 역명을 수시력이라 사하여 지원 18년 정월 1일로부터 반행하고 원근방에 포고하여 모두 들어 알도록 하노라?고 하였다 통 등이 도일사에 머물으며 낮에는 일영을 측정하고 밤에는 천문을 관찰하면서 아국의 지도를 관람할 것을 요구하였다. 임인에 지밀직사사 한강을 충청 교주도에 보내어 써 군마의 초료를 준비케 하였다. 그 때 경상도 전수별감이 날을 한정해 놓고 비만74)을 독촉함이 심히 급하매 백성이 다 도망해 숨으니 고구현리가 기일이 늦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병오에 중외의 성황75)과 명산 대천으로 사전에 기재된 것에는 모두 덕호를 가하였다. 신해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개원로 동녕부의 왕 만호와 야선대왕이 모두 동정사로써 사신을 보내왔다. 경신에 지진하였다. 을축에 행성이 이첩하여 ?신첨군 15000인의 량료와 및 대군의 절령으로부터 합포에 이르기까지의 행정초료를 준비토록 하였다. 2월 기사에 재추가 왕을 수강궁에서 향연하여 써 선명76)을 축하하였다. 도적이 왕궁에 들어가 보옥을 절취하였다. 정축에 응방이 내료로 더불어 왕을 향연하거늘 미 백곡을 사하여 그 비용을 보조하였다. 신사에 합백나가 동계에 가서 녀진군을 사열하였다. 임자에 장군 리인을 원에 보내어 군마의 초료를 감하기를 청하였다. 계미에 승비77)를 200여인에게 내렸다 병술에 조성도감이 화재를 당하였다. 때에 원의 목장을 청하여 써 궁실을 수축한지 이미 3년인지라 백성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더니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재앙을 보이어 써 경계한 것이라?하였다. 경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세자부에 행차하였다. 내료 하예가 왕지를 칭탁하고 국신고의 금은과 세저를 취해서 내탕에 들이어 폐행에게 나누어 주니 이것은 모두 조근하는 려비(반전)로서 과감한 것인지라 원망이 교등하였다. 3월 기해에 저판교 인가 100여호가 불탔다. 계묘에 소재도장을 수강궁에 설하였다. 임자에 원수 김방경과 만호 박구 김주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로 향하였다. 갑인에 원이 정동행중서성 우승 흔도 다구를 보내왔는데 그때에 아 익조(조선태조의 증조 휘는 행리) 또한 조명으로써 동북면으로부터 왕을 래견하기 위해 재삼에 이르렀는데 더욱 공건하매 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래 사족인지라 어찌 근본을 잊어버리리요. 이제 경의 거지를 보니 족히 마음의 소재을 알겠도다?라고 하였다. 을묘에 장군 로영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부마왕국의 선명과 정동행중서성 인을 사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공주에게 장가들었으니 선명을 고쳐서 부마 2자를 더하기를 빕(걸)니다?하였더니 제가 그것을 허한 것이었다. 병진에 왕이 흔도와 다구로 더불어 일을 의론하는데 왕은 남면하고 흔도 등을 동면하였다. 사대한 이래로 왕은 사자로 더불어 동서로 상대하였는데 이제 흔도가 감히 항례(대등의 예)치 못하니 국인이 크게 기뻐하였다. 흔도 등이 합포로 갔다. 무오에 황후 홍길자씨의 부고가 오거늘 공주가 중랑장 정공을 원에 보내어 분상하기를 청하였다. 이 달에 림 천호가 귀부민 15000을 데리고 왔다. 하 4월 병인 삭에 합포에 행차하는데 우부승지 정가신이 호종하였다. 경진에 왕이 합포에 이르렀다. 계미에 합포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경인에 공주가 원에 갔다. 5월에 무술에 흔도 다구 및 김방경 박구 김주정 등이 주사로써 일본을 치러 갔다. 무술에 오래 가뭄으로써 갓쓰고 부채 가짐을 금하였다. 갑인에 비가 왔다. 계해에 행성의 총파가 보하기를 ?이달 26일에 제군이 일기도에 향하는데 홀로물탑(군호의 이름인듯)의 선군 113인과 초공 36인이 바람을 만나 그 간 바를 잃게 되었으므로 랑장 류비를 보내어 원에 고하였다. 6월 임신에 김방경 등이 일본과 싸워 300여급을 베고 익일에 다시 싸웠는데 다구군이 패전하였고 범문호가 또한 전함 3500소와 만자군(중국의 강남군) 십여만으로 써 오다가 마침 대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하였다. 계미에 왕이 경주에 이르러 승비를 내리는데 승배들이 릉라로써 좌우에 뢰물을 주어 직을 얻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라선사? ?릉수좌?라 하였는데 취처하여 거실한 자가 반이었다. 병술에 원이 군사 300기를 보내와서 합포를 진수하였다. 추 7월 계묘에 랑장 류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탐라의 진수군 50명에게 육지로 나와 경종할 것을 허하였다. 을사에 공주가 의주(요양로?순안현지방)에 이르니 제가 환국하기를 래하거늘 정미에 돌아왔다. 기유에 왕이 합포로부터 이르렀다. 갑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수강궁에서 잔치하였다. 원수 김방경이 중랑장 박수명으로 하여금 아뢰기를 ?제군이 태재부에 이르러 여러번 싸우다가 서로 물러나 퇴군하였는데 만선 50소가 따라와서 다시 그 성으로 향하였다?하고 인하여 소획한 갑주 궁시 안마 등물을 바치거늘 수명을 배하여 섭장군을 삼았다. 무오에 지밀직사사 한강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8월 정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경상도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장군 원경이 야선불화와 함께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탑납을 경상도에 탑자적을 전라도에 야선불화를 충청도에 래하여 모두 탈탈화손(역전관)을 삼았다. 임신에 별장 강세를 보내어 행중서성의 표를 가지고 원에 가서 성절을 하케하였다. 왕이 공주로 더불어 용안역(충주)에 이르러 음죽(현) 감무 김이의 정적이 뛰어남을 듣고 특차하여 도평의안독원을 삼았다. 병자에 순안현에 도착하니 경상도 안렴사 민훤이 신원에서 설연하였다. 정축에 보주(예천)에 도착하매 부사 박린이 내(천)에 걸쳐 모정을 지어 설연하거늘 좌우가 다 칭찬하였다. 안동부에 이차하매 부사 김군은 채붕을 맺아 악을 벌리어 써 맞이하는데 판관 리회는 민력을 아껴서 랑비 덜기를 힘쓰고 또 진퇴에 졸렬하니 내료가 모두 헐어 말하거늘 이에 회를 보주로 린을 안동으로 옮기었다. 기묘에 별장 김홍주가 합포로부터 행궁에 이르러 동정군이 패하고 원수 등이 합포로 돌아왔음을 고하였다. 임오에 장군 리인을 원에 보냈다. 을유에 찬성사 박항이 졸하였다. 윤월 갑오에 김방경 등이 행궁에 래알하였다. 계축에 지진하였다. 병진에 좌사의 반부를 보내어 흔도 다구 범문호를 위로하였다. 경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경상도로부터 돌아왔다. 이달에 흔도 다구 범문호 등이 원에 돌아갔는데 관군이 돌아가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유여이었다. 9월 을해에 중랑장 정공과 랑장 류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래하여 이르기를 ?왕은 군사에 로고하니 래조하지 말라?하였다. 계미에 중랑장 정복균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첨의부를 승진하여 종3품을 삼고 주인을 사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원이 칙령으로 본국의 금주(김해) 등처에 진변만호부를 두고 인후로써 소용대장군 진변만호를 삼아 호부와 인을 사하고 장순룡으로 선무장군 진변관군총관을 삼았다. 기미에 룡문창의 병량을 발하여 령부에 지급하였다. 11월 계해에 교를 내려 매월 초8일 15일 23일과 및 제의 본명일78)에는 도살을 금하고 또 관아를 쉬게 하였다. 을축에 원이 황자 애아적을 소환하매 경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벽란도(예성강하류)에서 전송하였다. 임오에 각도 안렴사가 계하기를 ?동정군 9960명과 초공 수수 17029에 그 생환자가 19397이라?하였다. 12월 임진에 대장군 김자정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경술에 지를 내려 이르기를 ?과인이 일찌기 세자가 되어 경사에 입조할적에 라유 지윤보 김응문 정인경 차득규 김부윤 이지저 황룡 김의광 량저 주석 김위량 등이 시종의 로고가 있었고 옛날 적신 림유무가 군사를 강도에 끼고 써 제명을 항거할적에 찬성사로 치사한 송송례와 전추밀원부사 홍문계 지밀직사사 송분 대장군 김지저가 의를 분발하여 소탕한 것은 공이 사직에 있으니 그 아울러 상전을 론의하라?하였다. 이 해에 봄으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중외에 역려(류행병)가 크게 일어나서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임오 8년 춘 정월 을해 원이 도자태 몽고불화를 보내어 탐라방수군의 군량과 초량의 1년지출의 수를 물었다(문). 정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상장군 인후와 장순용 등이 응방으로 더불어 왕을 죽판궁에서 향연하였다. 이달에 원이 정동행중서성을 파하였다. 2월 계사에 홀적(숙위)이 왕을 죽판궁에서 향연하였다. 원이 몽한군 1400을 보내와 탐라를 위수하였다. 을미에 왕이 서교에서 사냥하였다. 무술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갑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는데 기회를 제거하였다. 을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3월 신유 삭에 판삼사사 한강과 밀직부사 김백균으로 재추소 사존을 삼았다. 갑자에 본궐에서 초제하였다. 기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친히 소재도장을 신전에 설하였다. 하 4월에 경성 니첩의 불복장리에 맹아가 있는데 그 부모는 함께 질병으로 죽고 아이가 홀로 한 마리 흰개와 더불어 사는 바 아이가 개 꼬리를 잡고 길에 나오면 사람이 밥을 주어도 개가 감히 먼저 핥(지)지 아니하며 아이가 목이 마르다 하면 개가 끌고 우물에 가서 물을 마시게 하고 다시 끌고 돌아오곤 하였다 아이가 말하기룰 ?내가 부모를 잃고 개를 힘입어 산다?하니 보는 사람이 가련하게 여기고 의견이라고 불렀다. 무술에 원이 불팔사와 풍원길를 보내어 병량을 감안하여 또 동정군이 패하였으므로 군사 340을 보내어 합포를 진수하고 육십(인명)으로 왕경을 지키게하여 써 불우의 환에 대비하였다. 병오에 동지밀직사사 박구를 보내어 합포를 진수하였다. 무신에 좌랑 리행검을 원에 보내어 황칠을 바치었다. 기유에 가뭄(한)으로써 시를 옮기고 삿갓을 쓰며 부채가지는 것을 금하였다. 을묘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본궐에 행차하여 백좌법석을 설하였다. 정사에 주군에 명하여 전견(렵견)을 바치게 하였다. 5월 경신에 교하여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여 국보가 다간하고 하늘 꾸지람이 서로 잇달아 한재가 해를 연하므로 마땅히 계신하여 덕을 닦아 재변을 소멸시켜야 할 것이니 그 이죄 이하는 모두 다 유면하고 송악 및 경내 명산 대천에 덕호를 가하고 조성 이하 열조에게는 존호를 가상하고 도선국사와 문창후 홍유후에게는 아울러 봉작을 가하고 문 무 정 잡으로 무릇 직에 있는 자는 차제로 동 정(직)을 가하고 기사년79) 동으로 돌아와 파사부에 이르러 변을 듣고 환조할 때에 시종 보좌한 장군 정오부 정인경 차득규 이지저 대부윤 김응문 랑장 김의광으로 1등공신을 삼고 대장군 라유 지윤보 장군 림비 총랑 이승연 장군 김부윤 중랑장 황취 랑장 섭주석 량저 백좌명 랑장 전우 금위량은 2등공신을 삼아 각각 전민을 사하고 그 나머지 종신들은 갑술년 선지에 의하여 자손을 록용하고 별장 김심백 류복화 전전승지 최중경은 비록 다 상식인 7품이지만 수종에 공이 있으니 5품으로 허통하고 중랑장 정승오는 다시 입조에 수종하였으니 그 아들에게는 5품에 한하여 허한다?고 하였다. 신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량루에 거동하여 홀적(숙위)과 응방으로 하여금 짝을 나누어 격구케 하고 이기는 자에게는 은병으로 써 상주었다. 임술에 재추가 왕을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병인에 왕이 금교에서 사냥하였다. 갑술에 대옥을 금원에 지어 장공과 이평으로 하여금 매(응)를 기르게 하고 왕이 날마다 반드시 두번씩 행차하는데 2인은 성중의 계구를 헤아릴 수 없이 죽였다. 계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적석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장군 박의 등 25인을 원에 보내어 응을 바치었다. 6월 기축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만군 총파 심총 등 6인이 일본으로 부터 도망해와서 말하기를 ?본래 명주인인데 지원 18년 6월 18일에 갈자알만호를 따라 배를 타고 일본에 이르러 악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매 중군이 13~4만이 같이 한 산에 있다가 10월 초8일에 일본군이 이르거늘 아군이 굶주리어 능히 싸우지 못하고 모두 항복하니 일본이 공장과 농사지을 줄 아는 자만을 가려서 유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다 죽였다?하거늘 왕이 상장군 인후와 랑장 류비를 보내어 총등을 원에 압송하였다. 을사에 우수하였다. 기유에 왕이 공주가 질환이 있음으로 써 왕륜사에 행차하였다가 익일에 신효사에 이어하였다. 계축에 또 죄수를 석방하였다. 병진에 참문학사 허공의 집에 이어하였다. 추 7월에 무술 삭에 일식하였다. 경신에 산원 고세를 원에 보내어 의와 무를 청하였다. 신유에 공주의 병으로 법화도장을 설하였다. 갑자에 제안후의 집에 이어하더니 이로부터 여러 사제와 사원에 이행하여 혹 하루에 두 번씩 이어하기도 하였다. 경오에 대부사가 갈(랍)거를 지공하지 못하거늘 감찰사 곽응과 내시별감 강지원을 순마소에 가두었다. 신사에 밀직부사 김백균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이달에 공주의 병이 오래 됨으로써 응방에서 소잡는 것을 금하였다. 8월 병술 삭에 고세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이르기를 ?병은 무인이 능히 그치게 할 바가 아니며 의는 전일에 이미 련덕신을 보냈으니 어찌 반드시 다른 의사여야 하리오?하고 다만 약물만을 사하였다. 갑오에 만군 5인이 일본으로부터 도망해 왔다. 을미에 대장군 인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내료 고종수로 순마천호를 삼고 인하여 금패를 사하니 왕이 종수를 총폐하여 표청하였던 까닭이다. 병오에 왕이 저탄(우봉지방)에서 사냥하였다. 9월 정축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왕이 공주와 세자로 더불어 길상사에 행차하여 500성재를 설하였다. 랑장 류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에게 부마국왕의 금인을 사하였다. 병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무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충청도에서 사냥하였다. 홍자한으로 탐라방호부사를 삼았다. 응방 패로한 등을 원에 보내어 응을 바치었다. 친종장군 정인경을 료심에 보내고 중랑장 정복균을 동령부에 보내어 인물을 추쇄하였다. 행종도감이 유밀과를 금하고 또 원도수령의 래알을 금하였다. 정축에 공암을 지나 안남에 이르렀다. 경진에 충청도 안렴국성윤이 왕을 향연하였다. 임오에 화렵을 하는데 백성이 벼를 태운 자가 있으면 그 값을 주었다. 동 10월 계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충청도로부터 돌아왔다. 갑오에 장군 장순용 집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승 견명을 내전에 맞이하였다. 정미에 독로화(질자) 상장군 김흔을 원에 보내었다. 기유에 인왕도장을 숭경당에 설하고 왕이 공주로 더불어 행향하였다. 11월 무오에 최백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진에 원이 독혼과 하중겸을 보내어 전함을 수리하였다. 병술에 지밀직사사 송분을 경상도에 동지밀직사사 김백균을 전라도에 밀직부사 우준충을 충청도에 판사재 김지경을 서해도에 분견하여 써 전함을 수리케 하였다. 12월 기축에 상장군 유홍신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을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광명사에 행차하여 승 견명을 방문하였다. 병신에 상장군 인후를 원에 보냈다. 동정시에 봉성(파주) 땅의 백성이 왜에 몰입되었다가 도망하여 원의 명주에 이르렀더니 제가 이름을 ?갱생?이라 사하고 백호(벼슬)를 주어 돌려보냈다. 을사에 역자 정지연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지를 내리기를 ?탐라 진수군은 너희 나라에서 관을 차견하여 관령하라?하였다. 임자에 려수하였다. 무오에 장군 이영주를 보내어 주군을 순역하여 관리의 현 불초를 살펴서 써 상문케 한 바 상주 사록을 권만기와 안동 사록 임운과 진도현령 조득주를 파면하였다.

계미 9년 춘 정월 병진 삭에 일관이 주하기를 ?일식할 것이라?고 하므로 연회를 정지하였다. 정사에 신전에서 잔치하였다. 경신에 세자가 잔치를 베풀었다. 계해에 원이 백자개를 보내와 탐라의 향장목을 구하였다. 임신에 신전에서 잔치하는데 왕은 병환이 있었다. 계유에 소재도장을 본궐에서 설하였다. 갑술에 재추가 왕의 질환으로써 법회를 광명사에서 설하였다. 을해에 랑장 구천수를 원에 보내어 동정할 것의 완급을 엿보게 하였더니 평만주에 이르러 전함을 수조하는 것을 보고 이에 돌아왔다. 병자에 중찬 김방경의 집에 이어하였다. 2월 갑오에 수강궁에 행차하니 재추가 왕을 향연하였다. 경자에 삼번홀적(숙위)에게 기현전을 사하고 방목소라 이름하였다. 정미에 왕이 응을 승천부에서 방(렵)하였다. 무신에 원이 속간 리량무를 보내와 저강(지폐)3000정을 보내어 수함의 비용을 삼게 하였다. 3월 을묘 삭에 중랑장 류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강남군을 징발하여 장차 8월에 일본을 동정할 것이라?고 하였다. 정사에 대장군 정인경과 별장 정량을 료양 북경(견상)에 보내어 류민을 추쇄하였다. 무오에 곡주 수안현에 이르른 류민을 신은현(신계)에 이처시켜 존휼을 가하게 하였다. 기미에 중랑장 조감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포마차자 오통(도)을 사하였다. 경신에 야선대왕이 사자를 보내와 해동청(응)을 바치었다. 신유에 마를 의주에서 샀(시)다. 임술에 부부사를 제도에 보냈다. 계해에 중랑장 지선을 원에 보냈다. 갑자에 친히 3계를 본궐로 초제하였다. 경오에 승 견명으로 국승을 삼았다. 사신을 제도에 보내어 병량을 준비하고 군기를 제조하고 전선을 수리케 하였다. 갑술에 부지밀직사사 조인규를 원에 보내어 군량을 감하기를 청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응을 동계에서 잡았다. 신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왕이 동교에서 사냥하였다. 하 4월 을유에 판밀직 김주정에게 명하여 연등도감에서 열군하였다. 무자에 사신을 제도에 보내어 수함 부장으로 하여금 3분의 1을 감하여 귀농케 하였다. 신묘에 삼번홀적이 왕을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원이 탑납아패독자를 보내와 전함수조를 감독하였다. 동계 간성인 송번이 원에 고하기를 ?고려 동서계가 조정에 돌아왔으나 그 전이 아직 국인의 소유가 되어있어 그 무를 계산하면 가히 40000석을 얻을 수 있으니 청컨대 동정군량에 충당하소서?하니 중서성이 사람을 보내어 징삭하거늘 왕이 재추에게 묻기를 ?조정이 송번의 말로 써 우리로 하여금 군량 40000석을 더 발하게 하니 어찌하겠는가?하매 대답하기를 ?전자 유주가 200000석을 부과할 것을 청하여 집집마다 거두어도 겨우 4분의 1을 얻었으므로 조인규를 보내어 그 수를 감하기를 청하였는데 만일 40000석을 증가하면 무엇으로서 판출하리까 마땅히 다시 사람을 보내어 실정으로써 고하소서?하였다. 기해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탑납아패독자를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정미에 호군 조윤통과 산원 위수전이 원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조인규가 개평에 도착하여 병량 감하기를 아뢰니 제가 ?사람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족히 200000석을 준비할 수 있다 하는데 만일 진실로 불능하거던 힘을 헤아려서 하는 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였다고 하였다. 무신일에 밤에 물상이 있어 붉기가 불같고 크기가 말(두)만 하다가 점점 넓어져 방석(석)만 하더니 순창궁에 떨어지매 유성이 잇달아 떨어졌다 조금 있다가 바람이 갑자기 불어 불이 궁중에서 일어나니 다 타버리고 남음이 없었다. 신해에 주 부 군 현의 사심관을 림시로 파하였다. 5월 무오에 량루에서 잔치하고 격구를 구경하였다. 신유에 가뭄으로써 재추에게 명하여 각각 시정의 득실을 말하게 하고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기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정인경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동정의 론의를 중지하였다?하니 왕이 명하여 수함 조병 등사를 파하게 하였다. 6월 임진에 왕에게 고하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량반과 백성은 병량을 수송하는 것이 이미 다 필하였는데 재추와 및 권세있는 자는 홀로 하지 아니한다?하니 왕이 노하여 ?군량별감에게 명하여 그 이름을 모두 기록하여 써 아뢰어라?하였다. 계미에 조인규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을 책봉하여 정동중서성좌승상을 삼고 부마고려국왕은 전과 같으며 아탑해로 더불어 일을 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기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효신사에 행차하여 화불을 관람하였다. 경술에 공주 생일이므로 신전에서 잔치하는데 왕이 공주로 더불어 각각 군신에게 대종을 사하여 마시기를 다투게 하고 지는 자는 두잔(?)을 벌로 마시게 하였다. 을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추 7월 무오에 응방도감을 두어 김주정으로 사를 삼고 원경과 박의로 부사를 삼았다. 렴승익과 공유에게 명하여 현화사를 수리케 하고 또 남계원과 왕륜사 석탑을 수리케 하였다. 탑납이 원에 돌아갔다 기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공주가 병환이 있으므로 왕이 더불어 신자사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랑장 남유정이 원에 보내어 응을 바쳤다. 신미에 지밀직사사 박구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8월 계미에 왕제 순안공 종 구음도에서 소환하였다. 무자에 제안공의 집에 이어하였다. 병신에 애아적대왕이 사자를 보내어 폐를 바쳤다. 정유에 왕이 백주에서 사냥하였다. 신축에 의관자제를 뽑아서 세자부의 숙위에 충당하였다. 을사에 원의 창우남녀가 오거늘 왕이 미 3석을 사하였다. 병오에 왕이 공불한다 칭탁하고 사람을 보내어 삼각산에 길을 닦았는데 기실은 사냥하기 위함이었다. 기유에 대전에서 잔치하는데 원의 우인이 백희를 정연하거늘 백은 3척을 사하였다. 9월이 갑인에 왕자 자를 소환하니 공주가 의물을 사하였다. 병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승도를 금자대장원에서 공양하였다. 경신에 호군 박수와 최원로를 보내어 탐라를 진수하였다. 친히 본궐에서 초제하였다. 원이 실자지를 대청도에 류배하였다. 을축에 탐라 달노화적 탑자적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신미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임신에 탑자적이 왕을 향연하고 마 2필을 바쳐 구혼하거늘 내시 정부의 딸로 써 처를 삼아 주었다. 갑술에 정랑 위문개 랑장 김위량을 개원로에 보내어 인물을 초쇄하였다. 동 10월 계미에 호군 김부윤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중서성이 각도에 권농사를 차견하였다. 갑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남경(지금서울지방)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신유에 대장군 조변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2월 신축에 중찬 김방경이 퇴관하기를 빌(걸)거늘 상락공으로써 치사케 하고 강윤소도 또한 판삼사사로써 치사케 하였다.

갑신 10년 춘 정월 계축에 함평선위사가 중서호부첩을 가지고 와서 본국인구로 쌍성 도입한 자를 추쇄하였다. 왕이 또한 일찌기 위문개와 김위량을 보내어 추쇄하기를 심히 자상히 하니 쌍성인이 말(마)로써 뢰물하되 위량이 받지 아니하고 돌아오니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마 2필을 사하였다. 기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재추로서 만호를 겸할만한 자에게 명하여 동변을 진수케 하였다. 계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신효사로부터 제안공의 집에 돌아왔다가 2월 계미에 또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부지밀직사사 렴승익으로 경상 전라 충청도의 도순문사를 삼았다. 경인에 궁에 돌아와 승을 궁중에서 공양하였다. 병신에 조변이 표를 가지고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존호를 받고 대사하였다. 정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제안공의 집에 이어하였다. 기해에 원이 제주 달노화적을 보내왔다. 신축에 지밀직사사 송분과 호군 장순용을 원에 보내어 존호 가상함을 축하하였다. 기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길상사에 행차하여 500라한을 재하였다. 3월 정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친히 3계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을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경인에 왕 및 공주와 세자가 원에 가는데 호종하는 신료가 1200여인이오 은 630여근과 저포 2440여필과 지폐 1800여정을 가지고 갔다. 무오에 중화현에 이르니 원의 촉응사 랑가알와 동녕부 달노화적 등이 와서 응과 마를 바쳤다. 기해에 동녕부에 이르러 랑가알와 달노화적 등에게 은과 저를 사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계묘에 지진하였다. 갑진에 대방공 징 등이 독로화(질자)로 원에 갔다. 무신에 룡주에 이르니 동경(료양) 달노화적이 와서 맞이하고 마를 바쳤다. 5월 경술에 판밀직 김주정으로 진변만호를 삼았다. 무오에 동녕총관 홍중희가 와서 마를 바쳤다. 기미에 동경에 들어가니 총관 강수형과 동경관료 등이 향연 하여 위로하고 각각 양마를 바쳤다. 경신에 랑장 고세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군기를 면제할 것과 종전군을 파견치 아니할 것을 허하였다. 윤월 신사에 소재도장을 대내에서 설하였다. 병술에 헌응사 40인이 원에 갔다. 신축에 원이 촉응사 고자 등 6인을 보내왔다. 6월 경오에 원이 도리첩목아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제주에 래수하였다. 병자에 감수국사 원부와 수국사 한강등이 고금록을 찬수하여 10월에 이르러 이루었다 정해에 동지밀직 채인평이 졸하였다. 추 7월 갑오에 전법판서 김서가 졸하였다. 기해에 부밀직사사 공유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9월 갑신에 왕 및 공주와 세자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기해에 김주정으로 문한학사 승지를 이존비로 감찰대부를 공유로 전법판서를 정가신으로 밀직학사를 최수황으로 우부승지를 삼았으며 렴수정은 총신 승익의 형임으로 갑자기 소부윤 지제고가 되었다. 동 10월 갑오에 친히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정사에 왕이 평주에서 사냥하였다. 갑자에 조선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을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숭경당에서 잔치하였다. 11월 무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법화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원이 감후 장중량을 보내와 역서를 반포하였다. 갑신에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계사에 중도의 정부를 징발하여 죽판궁 대전을 영조하였다. 을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왕이 도라산에서 사냥하였다. 12월 갑진에 밀직학사 정가신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병오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여 화엄법회를 설하였다. 갑인에 인후로 진변만호를 삼았다. 정사에 조변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무진에 홍자번으로 첨의찬성사를 김주정으로 지도첨의사를 삼았다.


을유 12년 춘 정월 병자에 원이 이부낭중 철자아를 보내와 조하기를 「다시 안동으로서 우승상을 삼았다」고 하였다. 계미에 동녕부 천호 최탄 등이 와서 왕을 향연하였다. 을유에 왕이 공주와 세자로 더불어 평주 온정에서 사냥하는데 공억(공궤)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에 권귀는 민전을 침탈하고 간맹들은 권세에 붙어 많이 부역을 면하니 무릇 모든 징감에 평민이 괴롭게 여겼다. 정유에 왕이 평주로부터 돌아오니 채붕과 잡희를 베풀어 써 맞이하였다. 2월 무신에 제주 달노화적을 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법화사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려수하였다. 계축에 지진하였다. 갑인에 재추가 왕을 향연하였다. 을묘에 우백갑지유 손공여를 해도에 유배하였다. 공여가 일찍이 역적에 투항하여 왕을 향하여 말이 많이 불손하였는데 외람히 이 직을 받았기 때문에 재추가 아뢰어 류배시킨 것이었다. 정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는데 기락을 제거하였다. 경신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계해에 충청도 안렴사 이천유가 민을 징발하여 사사로이 옥재를 벌착하거늘 감찰사가 안핵하여 파면시켰다. 3월 기묘에 친히 삼계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무자에 상악 시의 설경성을 원에 보냈는바 원이 양의를 구함으로 보낸 것이다. 기축에 가뭄으로 려수하였다. 원의 단사관 및 요동 선위사가 사자를 동진 북면에 보내어 본국의 도통한 인구를 쇄출하였다. 신묘에 지를 내렸는데 「일은 유이한 향리는 연한에 불포하고 이미 일찍이 본지에 돌아갔는 바 이제 백성의 유이한 자도 또한 마땅히 쇄환시킬 것이다. 그러나 유이한 자가 이미 오래되어 안심하고 토착한 자를 만일 다 본지로 돌리게 되면 피차 옮기는데에 반드시 농업을 잃을 것이니 전자 경오년 이상의 예에 의하여 이미 환본해 버린 사람 이외는 모두 다 움직이지 말고 생업에 안정케 하도록 하라. 일은 매월의 상선 및 별선을 진공할 때에 잔민에게 가중히 거두어 써 사용을 삼는 것은 통렬히 금지하라.」하였다. 하 4월 병오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경수에 판삼사사로 치사한 문창유가 졸하였다. 왕 및 공주가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가뭄으로 항시하고 립과 선을 금하였다. 경신에 경죄를 석방하였다. 정묘에 감시로서 윤신걸 등을 선취하니 왕이 하시를 지어 사하였다. 오월 기해에 비가 내렸다. 기유에 왕 및 공주가 신효사에 이어하였다. 계사에 왕이 금교에서 사냥하였다. 중랑장 지선과 산원 정지연이 원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제가 기미년 이래로 중조에 도입한 인구를 모두 본국에 쇄환토록 명하였다.」고 하였다. 육월 계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장군 이□ 등 28인을 원에 보내어 응을 바쳤다. 기유에 원이 이희재를 보내와 조하기를 「법물인 종경과 동경 고동병 정과 숙동기물을 제한 외에 그 남은 것으로 모든 동전과 생동기물이 있을 것이니 성지의 도달로부터 백일을 한하여 모두 소재관에 납입하라.」고 하더니 뒤 이어 그만둘 것을 명하였다. 을축에 귀산사에 행차하여 구재80)의 하과를 시찰하니 제생이 가요를 올리거늘 과주를 사하였다. 추 7월 경진에 장군 원경과 환자 낭장 최세연을 원에 보내어 응을 바쳤다. 계미에 신효사에 행차하여 우난재81)를 설하였다. 을미에 지밀직사사 우준충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경자에 문하평장사로 치사한 황보기가 졸하였다. 8월 을유에 왕이 선조가 망월대에 노는 것을 꿈꾸고 이에 명하여 악을 대에서 주하였다. 을축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진에 원경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사하였다. 내수 상장군 김자연으로 동경(경주)부사를 삼았다. 9월 경오 삭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응방인에게 녹을 주지 아니함으로써 좌창별감 배서를 순마소에 가두었다. 계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과 공주가 남경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신축에 광평공 혜가 졸하였다. 을묘에 김주정으로 충청 전라 경상도 계점도지휘사를 삼고 계점사 및 별감을 제도에 분유하였다. 을축에 곽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12월 기사 삭에 일식하였다. 정축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행차하여 경찬회를 설하고 행향사 홍자번에게 홍정을 사하였다. 을축에 평주 온천에 행차하였다. 병수에 동녕부가 우리의 수안과 곡주를 다툼으로써 원이 단사관 소독해를 보내와 시찰하고 겸하여 동정할 조선을 감독케 하였다. 12월 기해에 대장군 고천백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신축에 원의 중서성이 사람을 보내와 조선을 독촉하고 또한 군병과 초공과 수수의 명목을 신보케 하였다. 계묘에 동지밀직사사 송분으로 경상도 조선 도지휘사를 삼고 또 사신을 제도에 보내어 조선하는 것을 독촉하고 군량을 부하였다. 갑인에 원이 전장 십인을 보내왔다. 병진에 왕 및 공주가 흥왕사에 행차하여 금탑에 배례하고 드디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원의 중서성이 첩하여 군량 십만석을 조발하였다.

병술 12년 춘 정월 경오에 상장군 인후를 원에 보내어 친조하기를 청하였다. 신미에 원이 우리에게 수안과 곡주를 돌려주었다. 갑신에 왕 및 공주가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병수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조하여 대사하고 동정을 정지하였다. 정유에 원이 교위 주불대를 보내와 왕에게 내조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2월 무신에 충청도 탈탈화손(역전관) 이영주가 보하기를 「강윤명이 난을 지어 영월현령 이순을 죽였다.」하거늘 시사 윤해를 보내어 가서 국문케 하였다. 신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왕이 승천부에서 사냥하였다. 정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원사를 대전에서 향연하였다. 정묘에 왕이 신궁에 입어하였다. 삼월 계유에 경내를 유사하였다. 정축에 친히 삼계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기인에 판삼사사 김응문이 졸하였다. 임오에 지신사 김흔으로 삼사사를 좌승지 채모로 지신사를 상장군 김운으로 좌승지를 상장군 인후로 응양군 상장군을 삼았다. 을유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김흔으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경인에 왕이 장경도장에서 행향하였다. 하 사월 정유 삭에 우박이 내리고 얼음 얼기를 무릇 팔일이었다. 갑진에 서리가 내렸다. 원이 사신을 보내어 상인의 세전을 산계하였다. 오월 정인 삭에 일식하였다. 경오에 제안공 숙과 상장군 인후를 원에 보내어 황태자 진금의 상을 조하였다. 정축에 왕이 서해도에 사냥하니 재상이 합문에 엎드려 간하기를 ?새끼(#)를 잡지 아니하고 알(란)품는 것을 잡지 아니하는 것은 성인의 훈계이오 또 오랜 가뭄을 만나 기근이 거듭 이르니 진실로 행락할 때가 아니외다. 또 농사가 바야흐로 성하여 백성이 다 남무에 돌아가는데 차가가 한번 지나가면 김 매는데에 방해될까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가을을 기다려 사냥하소서?한데 듣지 아니하였다. 을유에 군신을 향연하는데 술이 취하며 군신이 다 극히 즐겨 춤추다가(거수)82) 밤이 깊어서 이에 파하였다. 육월 정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묘연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장군 원경 등을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을인에 감찰사 박민으로 충주 판관을 삼았더니 전장과 제택을 관내에 일으키고 왕지를 꾸며서 관미를 도둑하고 또 관기를 끼고 오거늘 감찰사가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추 칠월 계유에 요동부 총관 육십이 조서를 받들어 여진으로 돌아가거늘 왕이 서교에 출영하였다. 갑술에 제안공 숙 등이 원에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조하여 ?쌍성의 류민을 추쇄하라?하였다. 경진에 지밀직사사 조인규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임진에 세자가 국학에 입학하여 육경83)을 강하였다. 팔월 무술에 부지밀직사사 김흔을 동진에 보내어 류민을 추쇄하였다. 영동정 마백기가 본국을 원에 참소하니 제가 그 무고인줄 알고 목에 칼을 씌워 보내거늘 왕이 허공 등에 명하여 국문하고 원도에 류배시켰다. 신해에 일본인 십구명이 왔다. 계축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신유에 조인규로 지밀직사사 겸 감찰대부를 삼고 채모로 삼사사를 나유로 지신사를 삼았다. 구월 갑술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을해에 중랑장 지선을 보내어 일본인을 원에 압송하여 가게 하였다. 신사에 원이 호림침 등을 보내와 조골 잡는 것을 독촉하였다. 임진에 가뭄으로 술을 금하였다. 동 십월 갑자에 국자생 이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십일월 갑자에 친히 영빈도장을 강안전에 설하였다. 경오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연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직사관 오양우등에게 명하여 국사를 수찬케 하니 장차 써 원에 바치려 함이었다. 무인에 궁전배장군 허평과 낭장 김심 설지충 왕유소 등 구인을 보내어 원에 가게 하였다. 을유에 평주 온천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갑오에 원이 랑가알을 보내와 응을 잡았다. 정유에 대장군 정인경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경자에 국자사업 최옹을 불러 통감을 강케 하였다. 을유에 인후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정해 십삼년 춘 정월 갑자에 부지밀직사사 염승익이 왕을 향연하였다. 무진에 동판밀직사사 이존#가 졸하였다. 신미에 박지량으로 부지밀직사사를 김운으로 삼사사를 삼았다. 기유에 경범을 석방하였다. 이월 경자 에 첨의중찬 원부가 졸하였다. 연등으로 강안전에 이어하였다. 기미에 군신을 향연하였다. 경신에 송분으로 지도첨의사를 조인규로 삼사사를 삼고 공유로 동판밀직사사를 김운 안전으로 모두 부지밀직사사를 유승 임정기로 좌우부승지를 삼았다. 윤월 무진에 가뭄으로 술을 금하였다. 경오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인에 친히 소재도장을 대전에 설하였다. 삼월 임진 삭에 친히 삼계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경자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장군 장순용 등을 보내어 이인춘의 딸을 원에 바치고 인하여 공주의 진주의를 구매케 하였다. 을미에 원이 형부시랑 육십을 보내와 동령부의 일을 변리케 하였다. 갑인에 비를 빌었다. 병진에 사년84)의 수종한 공신에게 각각 장획85) 이구와 전 백결86)을 사하였는데 그 사이에는 내료요로서 일찌기 수종하지 아니하였는데 함부로 참여한 자도 있었다. 경신에 합포의 수군이 원에 돌아갔다. 하 사월에 가뭄으로 려수하였다. 무진에 왕 및 공주가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가뭄으로 항시하였다. 경오에 비를 빌었다. 계유에 왕 및 공주가 서해도에서 사냥하였는데 엽기가 일천오백이나 되는지라 재상이 간하기를 ?가뭄이 이미 너무 심하고 백성은 바야흐로 밭을 매는데 그윽히 저어하건대 이 행차가 민원을 소감할까 하오며 또 금수가 바야흐로 태잉할때이오니 사냥함이 가치 않습니다? 한대 왕이 노하여 듣지 아니하였다. 왕이 ?수가하는 군사에게 미리 녹을 주라?고 명하거늘 어사가 변박하니 왕이 노하여 어사를 순마소에 가두었다. 을해에 여우가 낮에 대전에 들어왔다. 경진에 서리가 삼일간 내렸다. 계미에 재추가 사재를 시사하여 비를 보현사에서 빌었다. 무자에 왕이 서해도로부터 돌아왔는데 여우의 괴변으로 써 신효사에 입어하였다. 오월 신유 삭에 우제하였다. 큰 비가 내렸다. 을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양루에 앉아 격구를 관람하였다. 임인에 왕이 내안대왕의 반하였다는 말을 듣고 장군 유비를 원에 보내어 군사를 들어 토벌을 도울 것을 청하였는데 그때에 내안이 본국의 반인 수초를 시켜 와서 도군을 추감하더니 초가 내안의 반함을 듣고 도망하여 금교에 이르거늘 사람을 보내어 잡아 베었다. 육월 임술에 유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조병을 허락하였다. 계해에 열병하였다. 채모로 부지밀직사사를 유백정으로 삼사사를 삼았다. 갑자에 정가신을 경상에 채모를 전라에 안전을 충청도에 보내어 모두 안무사를 삼고 김주정을 폄하여 청주목사를 삼았다. 병인에 최유□으로 전법총랑 우부승지를 삼았다. 정묘에 조인규로 지도첨의사사를 삼고 공유로 판삼사사를 나유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기사에 열병을 마치고 친히 □기를 궁문에서 제사하고 김주정의 호두패로써 박지량에게 사하여 좌익만호를 삼고 박구의 호두패로서 나유에게 사하여 중익부만호를 삼았다. 그때에 대정 이보 이성의 형제가 모두 군목에 있었는데 그의 모가 있음으로써 형은 아우를 머무르게 하여 시양하기를 빌고 아우는 또한 형을 머물러 주기를 빌거늘 왕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함께 머물러 시양하기를 허하였다. 왕이 장차 친히 정토를 도우려하니 계유에 공주가 왕을 양루에서 전향하고 겸하여 부정하는 장사를 위로하는데 박지량이 늦게 잔치에 오면서 왕이 루에 좌어한 줄을 모르고 말을 타고 곧장 루하에 이르거늘 왕이 노하여 그 직을 삭하고 호두패를 빼앗아 한희유에게 사하여 좌익만호를 삼고 지량으로 부만호를 삼았다. 갑술에 한희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기묘에 감악산신의 제이자를 봉하여 도만호를 삼아 써 출정에 음조하기를 빌었다. 병자에 양부가 왕을 양루에서 전송하였다. 무인에 역어 김인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내안의 성을 공발하였다?하거늘 공주가 기뻐하여 금선과 견 각 일필을 사하고 대위를 제수하니 성중의 듣는 자가 모두 기뻐하여 일중에(한낮에)저자(시)를 파하였다. 임오에 유경 시위군을 조발하였다. 추 칠월 경인에 왕이 친히 전군을 통솔하고 인후로 중군만호를 삼아 개성 란산에 출차할 때 왕이 잠연히 눈물을 흘리니 군신이 모두 낯을 가리고 울었다. 임인에 동경총관 강수형과 요동선위사 등이 사람을 보내와 말하기를 ?왕이 만일 능히 속히 부전하지 못하겠거던 마땅히 먼저 정병 일천을 보내라?하니 왕이 이에 장군 유비와 중랑장 오인영을 원에 보내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발정하였다고 주달케 하였다.

경술에 신종에게 존호를 가상하고 또 경내 산천의 신지에 호를 가하였다. 팔월 정묘에 유비와 오인영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친정하여 내안을 사로잡고 그 성을 빼었(발)으며 차가가 연경에 돌아가 제로병을 파하고 또 왕에게 역마를 타고 들어와 절일을 하하라?한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비를 배하여 대장군을 삼고 인영으로 장군을 삼았다. 무진에 공주가 유비를 원에 보내어 왕을 따라 입조하기를 청하였다. 경진에 동령부 역어 중랑장 구천수가 쌍성의 첩인 홀도알와 덕산 등을 잡아왔다. 신사에 조변으로 부지밀직사사를 권단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을유에 낭장 정지연을 원에 보내어 쌍성의 첩인을 잡은 것을 고하였다. 구월 경자에 동진 골유국 만호 첩목아가 만군 일천인을 거느리고 변수을 파하고 원에 돌아갈제 와서 공주를 알현하였다. 갑인에 왕이 연경에 있으면서 공주와 세자를 불러 입조케 하였다. 동 십월 무오 삭에 일식하는데 비가 내려 보이지 아니하였다. 경오에 공주와 세자가 차신의 제에 이어하였다. 무인에 공주와 세자가 원에 갔다. 십일월 계미에 원이 탑자아를 보내와 탐라 달로화적을 삼았다. 을미에 공주가 서경에 이르러 함평부(요동의 개원현 서북)에 적이 일어나서 길이 막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돌아왔다. 임자에 대장군 기관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지도첨의부사로 치사한 주열이 졸하였다. 십이월 병인에 왕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염승익으로 첨의평리를 정가신으로 판삼사사를 김흔으로 동판밀직사사를 한희유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기사에 지를 내려 ?량가처녀는 먼저 관에 고한 뒤에 출가케 하되 위반한 자는 죄하라?하고 인하여 허공 등에 명하여 동녀를 뽑게 하였다. 계미에 허공으로 참의중찬을 홍자번 한강으로 모두 첨의찬성사를 조인규 염승익으로 모두 지도첨의사사사를 박지량으로 판삼사사를 인후로 판밀직사사를 나유로 동지밀직사사를 임정기 김지숙 김운 채모로 모두 부지밀직사사를 권#으로 밀직학사를 삼고 정가신으로 감찰대부를 삼고 이혼으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무자 십사년 춘 정월 을축에 안향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경인에 한강으로 첨의시랑찬성사를 삼고 조인규로 첨의찬성사를 삼고 지도첨의 염승익이 사임하거늘 인후로써 이에 대하였다. 기해에 애가적대왕이 사자를 보내와 마를 구하였다. 임인에 내전에서 연회하는데 왕이 자주 춤을 추니 공주가 말려(지)도 듣지 아니하였다. 계묘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행차하는데 환자 장군 최세연과 김의광 등이 채붕을 설하고 잡희를 벌렸(장)다. 병오에 제가 만호 천호 백호에게 금은패를 사하니 쌍주금패 네개는 박지량 나유 한희유 장순룡에게 분사하고 은패는 백호 이하의 군사에게 분사하였다. 갑인에 지도첨의 인후가 사임하거늘 김운으로 써 이에 대하고 안전으로 지밀직사사를 한희유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이월 병진 삭에 최세연이 왕과 공주를 향연할제 찬품이 너무 사치하므로 받지 아니하였다. 정미에 원이 패라계 등을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신유에 장군 오인영을 원에 보냈다. 그때 북적이 반란하매 아국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조전하여야 할터인데 왕이 그것을 어렵게 여겨 인영을 보내어 입주하기를 ?이제 동비(변)가 편안하지 못하니 청컨대 친히 정북병을 거느리고 쌍성에 이진케 하소서?하였다. 임술에 안적재로 회원(창원지방) 방호사를 삼았다. 여러 만호 및 군사들이 왕 및 공주를 대전에서 향연하였다. 정축에 왕이 도라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인에 중랑장 정지연이 금은패를 가지고 원으로부터 돌아오니 당시 세론에 ?본국에 백성은 있어서 군사는 없는데 만호 천호의 금은패를 많이 청하였으니 만일 조정(원)에 일이 있어 패수로 써 징병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갑신에 친히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삼월 정해에 좌우익 만호 나유 한희유 장순룡 등이 왕을 내전에서 향연하는데 술이 취하매 왕이 일어나 춤추고 손벽을 치며 스스로 노래하였다. 신묘에 왕륜 현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경상도 권농사의 세마포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 신축에 최충소로 회원 방호사를 삼았다. 임인에 장군 오인영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내안 여당이 다시 반함으로써 군사를 발하여 친정하고 아국군으로 써 동번을 진수하려 한다?고 하였다. 무신에 사신을 제도에 보내어 염을 도고(각)87) 하였다. 하 사월 을묘 삭에 낭장 금정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여 왕으로 써 정동행상서성 좌승상을 삼았다. 계해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정묘에 판삼사사 박지량으로 동북면 병마사를 삼고 대장군 김덕지로 지병마사를 삼았다. 경오에 원의 우승 탑출

이 사람을 보내어 군사 오천 및 군량을 발하여 건주에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앞서 왕이 정북병으로 써 쌍성에 이진하기를 청하여 제가 이미 허락하였음으로 중서성이 제지를 받들어 탑출에게 유시하여 이르기를 ?동번을 진수하는 일은 마땅히 고려왕으로 더불어 함께 론의하라? 하니 탑출이 이로써 군사와 군량을 청하였으나 건주가 본국과 거리가 삼천여리나 되고 산천이 험조하여 향도가 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또 근년(비년)에 적축이 탄갈되어 계책이 생기지 못하매 왕이 대신을 불러 논의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대로 좇으려면 힘이 능히 감당할 수 없고 어기면 전주의 뜻을 저버릴까 저어하오니 군사를 발하여 조전한다 고 성언하여 써 운량하는 것을 늦추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니 이에 다시 오인영 등으로 하여금 토물을 많이 싸 가지고 원에 가서 아뢰게 하였다. 무인에 궁중의 꽃이 성개하거늘 군신을 향각에서 향연할제 술이 취하매 왕이 전리정랑 민지와 국학직강 조간에게 명하여 신곡을 제작케 하매 좌부승지 안향이 또한 시를 지어 바쳤다.  기묘에 열병하였다. 오월 신묘에 복령사에 행차하고 또 영통사에 행차하여 백은 십량과 미 일백석을 사하였다. 기해에 첨의찬성사 조인규가 장전 만호를 사하거늘 부지밀직사사 한희유로 써 이에 대하였다. 신축에 만호 동지밀직사사 나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발정하였다. 경술에 왕 및 공주가 금경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오인영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명하기를 ?건주에 운량하는 것을 면제하고 조정병으로써 철령에 이수케 하고 국왕은 마땅히 본국에 유진하라?고 하였다.  육월 을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대장군 박의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원이 대왕 활활알를 대청도에 류배하였다. 쌍성 달로화적이 왔다. 경오에 첨의찬성사 한강이 치사하거늘 다시 인후로 써 이에 대하였다. 을해에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추 칠월 정해에 원이 총관 김지무를 보내와 병기를 검열하였다. 병인에 왕 및 공주가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임진에 정가신으로 판밀직사사를 삼고 이익배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아 치사케 하였다. 을미에 전법판서 원정을 파면하고 김흔으로 써 이에 대하였는데 그때 환관 내료가 용사하여 법사 십여원이 비죄로써 동시에 파직되었다. 경자에 지밀직사사 안전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임인에 행성이 중랑장 송현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지밀직사사 조변이 졸하였다. 환자 장군 최세연과 낭장 도성기를 해도에 류배하였다. 새로 군기고를 사판궁에 지었다. 무신에 송 상인 고개와 육청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팔월 정사에 만군이 쌍성으로부터 왔는데 남녀로약이 다 적라로서 몸을 점으로 써 둘렀(과)거늘 홍자번이 옷 이백령을 주었다. 임술에 차신의 집에 이어하였다. 계해에 외군의 응방을 파하였다. 기사에 다시 응방을 두었다. 구월 갑신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건성 왕륜 이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제가 왕 및 공주의 입조를 명하였다. 계묘에 윤선좌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신에 대장군 유비를 원에 보내어 왕의 친조를 아뢰었다. 기유에 사신을 제도에 보내어 공부를 주정하였다. 임자에 왕이 세자의 생일이므로 군신을 향연하는데 상장군 정인경은 주유희(난장이 놀이)를 하고 장군 간홍은 창우희(광대놀이)를 하니 왕도 또한 손벽을 치며 일어 서서 춤을 추었다. 동 십월 병진에 부지밀직사사 감찰대부 임정기가 사하였다. 무오에 친히 영빈도장을 강안전에 설하였다. 경오에 제가 왕에게 입조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계유에 도둑이 의릉을 발굴하여 은기를 가져갔다. 십일월 을유에 도둑이 공릉을 발굴하였다. 정해에 전 추밀원 부사 홍문계를 해도에 류배하였다. 갑오에 크게 뇌전하여 낮이 어둡고 사람을 벼락 쳤다. 경자에 상장군 차신을 원에 보내어 처녀를 바쳤다. 왕이 평주 온천에서 사냥하였다. 십일월 임자에 찬성사 조인규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병진에 구요당88)에 행차하여 십일요89)를 초제하였다. 신미에 장군 이#을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병자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기축 십오년 춘 정월 무자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찬성사 강수형과 중찬으로 치사한 송송례가 졸하였다. 이월 임자에 세자가 관례하고 서원후 영의 딸로써 세자비를 삼았다. 무오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행차하였다. 임술에 원이 감찰 아로온을 보내와 은을 캐었다(채). 병인에 원이 호광 등로의 행상서성 참지정사 장수지와 한림직학사 이천영 등을 보내와 조하여 이르기를 ?상서성의 주에 의거하면 거세에 요동은 군마의 조견으로 인민이 요란함을 입어 전화를 거두지 못하고 대개 모두 궐식되어 있는 바 강남은 험하고 멀어서 배로 운반하는 량곡을 널리 급산할 수 없으며 요동이 고려로 더불어 접경하였으니 빌건대 본처로 하여금 량곡 십만석을 조판하여 보내와 접제케 하소서하므로 이제 장수지 등을 보내어 가게 하노니 상건량수를 힘을 다하여 판집하고 관을 보내어 보고하고 내춘까지 체송하여 용도를 접제케 하라?고 하였다. 정축에 왕이 병환에 걸리매 공주와 세자로 더불어 효신사에 이어하였다. 삼월 경진 삭에 일식하였다. 정해에 장군 오인영을 원에 보내어 군량수를 보고하였다. 경인에 원의 아고대가 진주의 이령으로써 와서 공주에게 바치니 장순룡의 매입한 것이다. 왕이 공주로 더불어 아고대를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신묘에 감찰사승 여문취와 직사관 진과 등을 보내어 배 사백팔십삼소와 운반인 일천삼백십사명으로써 미 육만사천석을 개주(요녕의 개평현)에 운송하는데 충청도 지휘사 대장군 임비와 전라도 지휘사 좌사의대부 최알이 군량수송의 기한이 늦었으므로 모두 직을 삭탈하고 이에 지밀직사사 나유로 충청도 도순문사를 판삼사사 박지량으로 경상 전라도 도순문사를 삼아 써 군량을 독려하였다. 홍문계를 소환하였다. 기해에 내고미 사천석을 내어 써 병양을 보충하였다. 하 사월 기유 삭에 제가 왕에게 금옹을 사하였다. 경술에 서리가 내렸다. 무오에 왕이 목촌에서 사냥하였다.  정묘에 장수지 이천영 등이 돌아가는데 수지가 사사로히 라 십필과 마 이십필 및 세포를 청하여 돌아갔다. 을해에 거둔 바 군량을 각품에 돌려 주었다. 가뭄으로 술을 금하였다. 오월 경진에 가뭄으로 항시하였다. 신사에 우박과 미설이 내렸다. 계미에 왕 및 공주가 단오이므로 양루에서 잔치하고 격구하는 것을 관람하는데 그때에 목단화가 다 떨어졌으므로 채랍으로 써 꽃을 만들어 지조에 철하였다. 을유에 지밀직사사 나유를 보내어 군량을 개주에 수송하였다. 신묘에 무를 모아 비를 빌었다. 갑자에 비를 원구에 빌었다. 육월 경술에 대장군 유비를 원에 보내어 저포를 바치고 장군 남정은 요를 바쳤다. 추 칠월 임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고 계미에는 또한 그러하였다.  원이 아로혼 이성 등을 보내와 은을 캐었다(채). 을유에 유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에게 옥대를 공주에게 금포를 사하였다. 기축에 공주가 병환이 났다. 갑오에 왕이 서해도에서 사냥하였다. 무술에 판삼사사 박지량을 원에 보내어 절일을 축하하였다. 계묘에 제가 해도의 병이 변방을 침범함으로 장차 친정하고자 할새 아단불화를 보내와 징병하였다. 팔월 무신에 홍자번 조인규 등에게 명하여 봉은사에 모아 군정을 첨록케 하고 또 제도의 병정을 징발하였다. 신해에 찬성사 박구가 졸하였다. 을묘에 인후 김흔에게 명하여 군정을 통구에서 점검케 하였다. 대장군 장순룡을 보내어 동지밀직사사 채인규의 딸을 원에 바쳤다. 정사에 친히 소재도장을 외원에서 설하였다.  무오에 탐라 안무사 홀도탑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중서성이 첩을 보내어 청사로 된 옹과 분과 병을 구하였다. 임술에 만호 김흔을 보내어 조정군을 거느리고 요양행성에 나아가게 하였다.  구월 정축 삭에 왕이 서해도에서 사냥하는데 그때에 환관 및 권귀가 다 사전을 받아 많은 것은 이삼천결에 이르고 각각 량민을 점유하여 모두 부역을 견감하니 무릇 왕의 출렵에 안렴과 권농이 각각 연회를 베풀어 공궤하는데 그 혹은 백성을 안타깝게 여겨 행하지 아니한 자도 있지만 혹은 채쭉질 하여 앞을 다투어 침해하니 백성이 해독을 입음이 심하였다. 경진에 원이 대왕 석열흘을 인물도에 야리비를 원에 보내었다. 을사에 대장군 양공적으로써 합포에 출진케 하였다. 병오에 찬성사로 치사한 신은전이 졸하였다. 이달에 원이 고려국 유학제거사를 두니 질은 종오품이었다.  동 십월 정미 삭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오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경신에 제가 명하여 조정군을 파케 하였다. 임술에 대장군 원경을 원에 보내어 입조하기를 청하였다. 을축에 나유가 개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운조선의 부서진 것이 사십사요 바람을 만나 유실된 것이 구요 미의 침몰된 것이 오천삼백오석이요 곡식이 떨어져 도둑하여 먹은 것이 구백팔석사두이오 사람의 익사한 자가 일백십구요 병사한 자가 사요 도망한 자가 육십칠이요 행방불명한 자가 팔십육이라? 하였다. 윤월 을유에 금자원에 행차하여 대장경을 경찬하였다. 기축에 원 상서성과 추밀원이 관리를 보내와 일본을 동정할 때의 합포병기를 검열하였다. 신축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이어하였다 십일월 병오 삭에 장군 백정인을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정미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유경이 졸하였다. 임자에 왕 및 공주와 세자가 원에 가는데 조인규 인후 염승익 안향 등이 따라갔다. 이 행차의 호종으로 써 공을 요구하려 하는 자가 많아서 증감을 정하지 못하매 이에 사관은 일에 관계가 없다하여 호가를 허하지 아니하였는 바 사신으로서 종행치 못한 것이 이에 비롯하였다. 십이월 경인에 궁전배인 중원후 □이 원에 갔는데 대장군 박의는 곡육을 바쳤다. 계사에 지밀직사사 김흔과 동지밀직사사 나유를 보내어 동계 방수군을 조열하였다. 무술에 왜선이 연화 저전 이도에 내박하였다.

경인 십육년 춘 정월에 왕이 원에 있었다. 정미에 대장군 원경을 원에 보내어 일본이 변방을 침범한 것을 주하였다. 갑자에 장군 오인영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내안의 여당 합단적이 장차 우리 동비(변)을 침범하리라?고 하였다. 을축에 참의찬성사 홍자번과 판밀직사 정가신 등이 군사를 병부에서 훈련하고 안전으로 경상도 도지휘사를 삼고 김지숙으로 전라도 도지휘사를 삼았다. 무진에 첨의참리 송분으로 충청도 도지휘사를 삼았다. 이월 을해에 중군 만호 정수기를 보내어 금기산동에 둔케 하고 좌군 만호 박지량으로 이천에 둔케 하고 한희유로 쌍성에 둔케 하고 우군 만호 김흔으로 환#(고성지방)에 둔케 하고 나유로 통천에 둔케 하여 써 단적에 대비하였다. 삼월 임자에 도이첩목아가 사람을 보내와 쌍성에 둔수하였다. 경신에 제가 김자경을 사함으로 써 글씨 잘 쓰는 중을 부르거늘 이에 승 삼십오인을 원에 보냈다. 병인에 전 지첨의부사 김주정이 졸하였다. 정묘에 왕 및 공주와 세자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제가 조하여 동녕부를 파하고 다시 우리 서북제성을 돌리거늘 왕이 그의 총관 한신과 계문비를 배하여 대장군을 삼고 현원열로 대복윤을 삼고 나공언과 이한으로 장군을 삼았다. 하 사월 정유에 사경승 육십오인을 원에 보냈다. 오월 계묘 삭에 가뭄으로써 항시하였다. 갑신에 최함일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오에 왕이 술을 베풀어(치) 서북제성인으로서 본국에 환부한 자로 하여금 모두 시연케 하였다. 무신에 김흔 나유 정수기 등이 치보하기를 ?합단이 해양계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을묘에 병정을 점검하였다. 무오에 장군 김연수를 원에 보내어 합단의 입구를 아뢰었다. 육월 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대장군 한신에게 명하여 서경병을 거느리고 합단을 동계에서 방어케 하였다. 병오에 장군 김흥예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무인에 제가 조하기를 ?토벌군이 고려에 가려하면 도로가 돌고 머니 마땅히 함평부(개원)로부터 남경(간도지방) 해양(함북길주)으로 나와 적도를 절단케 하라?고 하였다. 계사에 송분 등에 명하여 경병을 점열케 하였다. 추 칠월 임인 삭에 다시 서북제성의 수령을 두고 장군 정복균으로 서경 유수를 삼았다. 계묘에 원의 개원로 달로화적 팔독만이 사자를 보내와 군량을 구색하였다. 경신에 부지밀직사사 정인경으로 서북면 도지휘사를 삼아 서경을 유수케 하였다. 임술에 지첨의부사 김운을 원에 보내어 절일을 축하하였다. 팔월 신미 삭에 일식하였다. 계유에 장군 조감을 보내어 사경승을 원에 데리고 가게 하였다. 병자에 왕 및 공주와 세자가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임오에 왕과 공주가 안국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한희유로 판밀직사사를 삼았다. 경인에 대장군 유비를 원에 보내어 원군을 빌고 또 강화에서 적을 피할 것을 아뢰었다. 계미에 전 추밀원 부사 홍문계의 딸로 써 세자비를 삼았다. 구월 정미에 왕 및 공주가 도라산에서 사냥하였다. 계축에 위위부윤이 민훤으로 전라도 지휘사를 삼고 판사재사사 엄수안으로 충청도 지휘사를 삼았다. 원이 사신을 보내어 장경을 수보하였다. 기미에 유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는 아뢴 바를 모두 청종하였다. 경신에 왕이 독기를 수강궁에서 제사하니 대개 장차 동정하려는 것이었다. 무진에 상장군 차신을 보내어 처녀 십칠인을 데리고 가 원에 바치게 하였다. 동 십월 임신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사를 반포하였다. 무자에 왕 및 공주와 세자가 왕륜사에 이어하고 경인에 또 묘연사에 옮겼다. 병신에 적기가 남경 해양(요령성)계에 이르렀다. 무술에 귀인과 로약을 강화에 옮기고 주군으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에 입보케 하였다. 십일월 갑진에 국사 및 보문각 비서사의 문적을 강화로 옮겼다. 정미에 대장군 유비를 원에 보내어 합단이 쌍성에 들어온 것을 아뢰었다. 무신에 궁인을 강화에 옮겼다. 경술에 태조 소상을 강화에 봉천하였다. 신해에 원이 평장사 도이첩목아를 보내와 합단토벌을 돕게 하였는데 도이첩목아는 사람을 보내와 고하기를 ?국왕은 마땅히 경성에 머물러 우리 군사를 호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묘에 세자를 원에 보내는데 정당문학 정가신과 예빈윤 민지 등이 종행하였다. 세자가 동경(요양)으로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행성로의 주관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노문함이 연달았고 경(연경-대도)에 이르러서는 동첨추밀원사 홍군상의 제택에 사관(관)하니 제가 여러번 안마와 의대를 사하여 써 총애하였다. 제가 조인규로 고려국왕부 단사관을 삼고 김호부를 사하였다. 십이월에 안전으로 충청도 도지휘사를 삼았다. 합단병 수만이 화(영흥) 등(안변) 이주를 함락시키고, 사람을 죽여 량식을 삼는데 부녀를 얻어 만나면 취우90)하고 그것을 포뜨거늘 만호 인후를 보내어 방어하였다. 계유에 원의 평장사 설도간과 도이첩목아와 우승 탑출 등이 보기 일만삼천인을 거느리고 왔다. 정해에 왕이 병을 강화에 피하여 선원사에 어거하며 지도첨의사사 송#(빈)에게 명하여 왕경을 유수케 하였더니 무자에 □(빈)이 경성을 버리고 강화로 분입하고 정인경이 또한 서경으로부터 도망하여 왔다.

신묘 십칠년 춘 정월 기미에 합단91)이 철령을 넘어 교주도에 란입하여 양근성을 공함하였다.  갑인에 합단이 원주에 둔치거늘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이 쳐서 그것을 패케 하였다. 계해에 세자가 제께 알현하고 합단 토벌을 청하니 제가 나만알대왕에게 명하여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토벌케 하였다. 이월 정해에 세자가 장군 오인영으로 하여금 제에게 아뢰기를 ?합단이 북계 제성을 함락시켰나이다?하니 제가 말하기를 ?너의 나라는 당태종이 친정하였어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고 또 아조 초의 아직 귀부치 아니 하였을 적에 아조가 정벌하여도 또한 쉽게 이기지 못하였거늘 이제 이 적은 도둑을 어찌 두려워 함이 심하느냐?하매 인영이 아뢰기를 ?고금의 성쇠가 같지 아니하나이다?하니 제가 야전으로 써 효시(유)하였다. 삼월 무오에 대장군 송화를 보내어 개경의 궁궐을 지키게 하였는데 화가 단적 십여기를 만나 삼급을 베고 일인을 사로잡았다. 이천인 신비가 합단의 첩인으로 더불어 동모하고 용강인 김철이 또한 적에 투항하고 길을 인도하여 경성에 들어오거늘 모두 시에서 베었다. 하 사월 무진 삭에 순마소 남리의 백여호가 불탔다. 계유에 홍문계로 첨의찬성사를 삼아 치사케 하고 한희유로 판삼사사를 김흔으로 판밀직사사를 최유엄으로 부지밀직사사 감찰대부를 백거로 좌승지를 삼았다. 원주산성 방호별감 복규가 포로 오십팔인을 바쳤다.  병자에 곡주 별장 강평기 등이 로획한 바 적의 마 안 등물을 바쳤다. 충주산성 별감이 적을 격파하고 괵92) 사십급을 바쳤다. 신사에 왕이 원병을 람도 북교에 출영하고 하서국왕과 경중군왕과 설도간과 도이첩목아와 평장 탑출과 좌승 백첩목아를 향연하는데 설도간이 왕에게 이르기를 ?이제 강남의 조운이 이르지 못하였으니 만일 적에 임하여 량식이 떨어지면 어찌하리까?하고 또 찬성사 홍자번에게 이르기를 ?네가 상국이 되어 전곡은 다 네가 알 것이니 마땅히 곳을 따라 지급하라?하거늘 왕이 어렵게 여기면서 이르기를 ?내고의 소저를 발하면 가히 지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오에 선원사에 환어하였다. 군량을 거두었다(감). 무자에 왕이 나만알대왕과 탑해원사를 산예(개경방근의 역명)에서 맞이하여 연위하는데 나만알가 왕에게 이르기를 ?왕도 또한 친히 나가 적을 방어하여야 한다?고 하거늘 왕이 로병으로써 사하매 나만알가 말하기를 ?적이 실에 들어왔는데 어찌 로병으로써 스스로 편안히 있으리요? 하니 왕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기축에 왕이 선원사에 돌아오니 나만알가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이르기를 ?작일에 욕되게 왕림하여 노위하여 준 것은 깊이 감하하지 아니하리오마는 다만 적을 방어하는 일에는 답하지 아니하고 퇴거하였으니 나는 실로 의혹하나이다 이웃 사람의 실화에도 오히려 가서 구하는 것이어던 하물며 이 자가의 일인데 그 가히 앉아서 볼수만 있겠읍니까?하고 인하여 공주에게 안 일부를 바치거늘 공주도 또한 안마로써 답하였다. 갑신에 중익만호 인후와 좌익만호 한희유와 우익만호 김흔에게 명하여 출사케 하였다. 임진에 설도간의 대군이 금령역(용인)에 이르렀다. 갑오에 장군 오인영을 원에 보내어 합단이 왕경에 침입한 것을 아뢰었다. 오월 정유 삭에 단적이 연기현에 주둔하거늘 설도간의 대군 및 우리 삼군이 정좌산하에 이르러 합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기해에 교주(회양)산성 별감이 보하기를 ?합단의 뒤미쳐 오는 삼천기가 철령을 지내어 교주에 둔하였다?고 하였다. 계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장봉신궁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만호 박지량과 정수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면서 거둔 바 미로써 경기 팔현과 및 동계의 군인에게 나눠 주었다. 갑진에 합단이 군사를 정돈하여 다시 와서 대진하거늘 아군이 들이쳐 크게 패배시키니 합단 노적 부자가 이천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도망하였다. 을사에 인후와 한희유와 김흔이 사람을 보내어 전첩을 고하고 또 사로잡은 바 부녀 팔인을 바쳤다. 병오에 설도간이 또한 사자를 보내어 전첩을 고하고 또 적괴가 도망하여 탈출한 것을 고하였다. 정미에 왕이 장전군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나와 토적한다는 것을 성언하였다. 무신에 공주의 병환으로써 장봉신궁에 돌아왔다. 기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선원사에 환어하였다. 경술에 첩자가 와서 ?적 일천이 고동주(철원)에 이르렀다가 관군이 적을 연기에서 격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돌아갈제 철령을 지나갔다?고 보고하였다. 계축에 평양인이 적 이백을 쳐서 사인을 생금하여 왔다. 정사에 승천부에 행차하여 관군을 호괴(호)하였다. 신유에 공주가 강을 건너 개경에 행차하였다. 찬성사로 치사한 김연이 졸하였다. 계해에 개경에 행차하니 설도간이 공주에게 배알하고 사로잡은 바 남녀 오십구와 양마 오필을 바쳤다. 도간의 군령이 엄숙하여 사졸이 떨고 겁내어 지나는 곳에 추호도 범하지 아니하였다. 적이 연기에 둔취한 것을 듣고 날을 곱해서 행군하여 그의 불의에 나와 두번 싸와서 파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을축에 설도간이 돌아가는 데 왕이 맞아들여 향연코자 하니 설도간이 말하기를 ?명을 받아 일을 마쳤으니 가히 유하지 못하겠나이다?하고 드디어 길에 올랐다. 병인에 나만알 등이 모두 돌아갔다. 이달에 황재가 있었다. 육월 정묘 삭에 왕 및 공주가 강화로 돌아갔다. 김흔을 죽전(서흥)에 한희유를 충청에 나유를 교주도에 보내어 합단의 여적을 쫓아 잡게 하였다. 신미에 한희유가 보하기를 ?단적 오백팔십인이 항복하고 노적이 군사를 끌고 평양으로 달아나거늘 나유는 이것을 막아 낭장 이무가 분전하니 목베인 것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하고 하였다. 임신에 유홍신으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계유에 낭장 고세를 원에 보내어 친히 성절을 하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개경에 복도할 것을 아뢰었다. 갑신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강남미 십만석을 운반하여 와 구휼하였다. 을미에 칠품 이하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추 칠월 무술에 구급 별감을 충청도 서해도에 분견하였다. 임인에 민훤으로 좌승지를 삼았다. 정미에 제가 왕에게 십월에 입조할 것을 허하고 또 환도의 청을 윤허하였다. 임자에 정당문학 정가신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계축에 원이 절서 영전사 대탑 등을 보내와 사령과 및 상서성을 파하여 다시 중서성을 세운 것과 초법을 정리한 것 등사를 반포하였다. 병진에 서원후 영이 졸하였다. 정사에 안전으로 서북면 도지휘사를 삼았다. 팔월 임신에 첨의중찬 허공이 졸하였다. 을묘에 장군 금위량을 원의 동경 번주 등처에 보내어 인물을 추쇄하였다. 을유에 이덕손으로 서북면 지휘사를 삼았다. 신묘에 근시낭장 김용#(검)을 보내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소복별감을 삼았다 주군이 피적한 남어지에 백성이 곤모하고 원망과 비방이 아울러 비등함으로 장차 관리의 선악을 안문하여 써 상벌을 행하려 함이었다. 구월 을미에 홍자번으로 판전이사사 세자사를 삼고 조인규로 판군부사사 세자부를 삼고 염승익으로 판판도사사 세자보를 삼고 정가신으로 첨의찬성사 세자이사를 삼고 김흔으로 판밀직사사를 삼았다. 판삼사사 한희유와 지밀직사사 유승에게 명하여 강도에 유진케 하고 병화를 입은 주군에 조세를 면제토록 명하였다. 기해에 원이 홍중경을 보내어 왕을 제수하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을 삼고 인후로 진변만호부 달로화적을 삼고 송분으로 선무장군 진변만호를 삼고 유석으로 충현교위 관군천호를 삼아 모두 금패를 사하였다. 병오에 왕이 원에 행차하였다.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청주부사 김승우의 아들이 세계로 사로가 통하지 못하였다가 여# 찬성사 강수사가 보좌의 공이 있음으로 오품을 허통하였다. 정미에 왕이 흥의역에 이르렀더니 낭장 미미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제가 왕에게 명하여 입조를 정지케 하였다. 무신에 궁에 돌아왔다. 계축에 인후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이달에 제가 세자에게 특진 상주국 고려국왕세자를 제수하고 김인을 사하며 제하기를 ?세사에 너 같은 적이 있으니 친으로는 나의 외손(생)이 된다 이에 입고의 성근을 가상히 여기어 써 번국의 부군으로 세우노라 능히 너의 직에 공봉하여 국은 갑기를 생각하라?하고 잉하여 수정배와 서각 련엽잔과 옥배와 진미를 사하여 써 총애하였다. 동 십월 정묘에 제가 왕에게 하정의 입조를 명하였다. 임신에 도지휘사 송분을 경상도에 한희유를 동북면에 김지숙을 서북면에 분견하였다.  십일월 무오에 왕이 안남(부평)에서 사냥하였다. 경신에 지밀직사사 나유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십이월 기묘에 상장군 유비와 장군 허평을 원에 보내어 세자의 환국을 청하였다. 을유에 박의로 우부승지를 삼고 이혼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는데 무릇 직명에 좌우가 있는 것은 우로 써 상을 삼았다. 계미에 미 육천구백육십사석으로써 백은 일백일십일근과 은병 오십칠구와 저포 일천사백오십필을 바꾸고 또 영송고와 대부의 백저포 각 일백오십필을 내어 써 여비(반묵)에 충당하였다.

임진 십팔년 춘 정월 갑오 삭에 일식하였다. 정유에 원경을 보내어 원의 요양로에 가서 기미년 이래 포로된 인물을 추쇄케 하였다. 계묘에 서경 유수 엄수안으로 서북면 지휘사를 겸하게 하였다. 병진에 원이 초(화폐) 일천정을 사하였는데 도이첩목아가 돌아갈 때에 제역의 우를 취하여 갔음으로 제가 듣고 초를 주어 그것을 보상케 하였다. 정사에 선대 실록을 선원사에 옮겨 두었다.  경신에 개경에 복도하였다. 이월 병인에 종묘와 사직을 개경에 돌아오게 하였다. 기축에 복규로 지서경 유수를 삼았다. 삼월 정유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계묘에 지선으로 서경 유수를 삼았다. 정미에 나유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본국 서경의 역신 한신 등으로 써 세자에게 부탁하고 명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너희 나라를 배반하였으나 조정에 향하여는 분호(미세)의 심이 있으니 너는 크게 책하지 말라?고 하였다. 무오에 원이 합단의 례하인 아리독대왕을 잉분도(홍도)에 유배하였다. 임술에 좌승 아철이 와서 탐라 달로화적의 죄를 안문하였다. 하 사월 계해에 친히 삼계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전 판삼사사 박지량이 졸하였다. 원이 적당 탑야속을 백령도에 도길출을 대청도에 첩역속을 오야도에 류배하였다. 경오에 원이 합단의 례하인 대왕을 영흥(남양) 조월 이도에 류배하였다. 정축에 장군 김연수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세자가 이미 금월 사일에 길에 올라 환국하나이다?하고 또 세자의 말이라 하여 왕에게 사뢰어 말하기를 ?들으매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린다 하오니 차가의 행차하는 곳에 공억(공궤)이 적지 아니할 터이온즉 원컨대 상께서는 경상에 출영치 마소서 하물며 부는 가히 자를 위하여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궁료의 출영해야 할 자도 서보통(개경 서편의 역명)을 지나 나오지 말 것입니다?하니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세자의 말이 마땅하지 않음이 이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경인에 왕이 세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마천의 서쪽에 출렵하고 신묘에 드디어 평주 온천에 사냥하였다. 오월 을미에 부지밀직으로 치사한 이익배가 졸하였다. 무술에 세자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계축에 왕 및 공주가 세자를 향연하였다. 정사에 세자가 미음(장)을 가시에 베풀어 아자에게 시혜하기를 삼일동안 하였다.  육월 계유에 세자가 양궁에 축수의 잔을 올릴새(상수) 제왕과 양부 기로가 득연하고 세자가 일어나 춤을 추니 왕 및 공주가 기쁨을 극히 하고 파하였다. 정축에 동지밀직사사 나유가 졸하였다.  윤월 신묘에 하늘의 꾸지람(천견-천재)과 백성의 주림으로써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원이 만호 서흥조를 보내어 강남미 십만석을 운래하여 기민을 구휼하였다. 신해에 김운으로 첨의참리 세자 이부를 삼고 한희유로 지첨의부사 세자 이보를 김흔으로 판삼사사를 정인경 유승 최유엄으로 모두 동지밀직사사를 이혼 장순룡으로 모두 부지밀직사사를 박의 정#로 좌우승지를 민지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을묘에 서흥조가 앵무와 공작 각 두마리(핵)를 바쳤다. 무진에 조인규의 딸로 세자비를 삼았다. 갑술에 진변만호 송분이 면직되고 첨의부사 한희유로 이에 가름하였다. 기미에 판도총랑 홍훤으로 사공을 삼았다. 계미에 홍훤으로 사도를 삼았다. 병술에 세자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로 치사한 최옹이 졸하였다. 팔월 정미에 랑군 진양필을 보내어 주인과 무녀를 압송하여 원에 가니 제가 불렀기 때문이다. 정미에 세자가 제를 자단전에서 알현할새 정가신과 유비 등이 따라 들어갔더니 정우승이란 자가 있어 아뢰기를 ?강남 전선이 크기는 크지만 부디치면 깨어지니 이것이 전일에 실패한 까닭입니다 만일 고려로 하여금 배를 짓게 하여 다시 치면 일본을 가히 취할 것이외다.? 하거늘 제가 일본 치는 일을 물으니 홍군상이 나와 말하기를 ?군사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고려에 물은 연후에 행하소서?하니 제가 그렇게 여겼다. 구월 기미에 왕륜 건성 이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대방공 징이 졸하였다. 을해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원이 홍군상을 보내와 우리에게 명하여 일본인을 호송하여 그 나라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군상이 제지로써 일본정벌하는 일을 묻거늘 왕이 대답하기를 ?신이 이미 부정93)의 속과 이웃하였으니 마땅히 몸소 토벌하여 써 보잘것 없는 로고나마 다 할가 한다?하니 군상이 마를 바치거늘 드디어 향각에서 향연하였다. 무자에 군상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이달에 제가 자단전에 거동하여 세자를 인견할새 주인과 무녀 등으로 하여금 전에 들게 하여 제의 수족을 잡고 주축을 하게 하니 제가 웃었다. 동 십월 경인에 대복윤 김유성으로 호송 일본인 공역서령을 삼고 곽린으로 서상관을 삼아 인하여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소방이 귀국으로 더불어 바다를 격하여 이웃이 되고 있다 석일에 귀국 상인이 때로 혹 김해에 래왕하매 나라에서는 인하여 교호하고 일찌기 혐의가 없었는데 금년 오월에 귀국 상선이 탐라주저에 내박한 바 탐라가 성질이 완힐하여 그 배를 쏘아서 쫓고 이명을 잡아 보내거늘 소방이 대원국에 신보하였더니 황제가 조하여 그 이유를 묻고 명하여 본국에 호송케 하니 생각컨대 량지하리라 량국이 이미 이웃이 되었으니 무릇 흥망과 휴척에 감히 서로 구휼하지 아니하리오 또 귀국을 위하여 헤아려 보건대 장차 리해의 량단이 있으니 진술하지 않을 수 없도다 아국이 원래 조선으로부터 대원(국)을 신사하여옴이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우리 부왕은 두번 천정에 조근하여 문득 성장을 입어 국가를 안보하며 후도94)를 각근히 하였고 내가 세자가 되었을 때에 부왕을 이어 친조하매 황제가 특히 총악을 내려 공주를 허가하와 책하여 부마를 삼고 종기를 승습케 하며 국호를 잃지 아니하고 군신 사직과 예악 문물이며 의관 명분을 일절 전대로 하게 하여 백성이 안도하여 업을 즐기고 생을 편안히 하게 된 것은 실로 정성을 다하여 대국을 섬긴 까닭인 것이다 또 송조의 군민이 많지 아니한 것이 아니며 금탕95)이 견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당우(요순)의 대통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큰 체하여 섬기지 아니(부정)하다가 황제가 친정하여 천병이 문득 이르매 송의 군신은 창졸히 거조를 잃어 사신을 보내어 애청하기를 ?만일 회군을 허하신다면 대대로 조공을 닦고 해마다 방물을 바치겠나이다 하매 황제가 가벼히 자애를 베풀어 군사를 물리치고 한림학사 학경을 보내어 선유하기를 심히 돈독히 하였더니 송국이 미혹에 빠져 개전치 아니하고 명을 어겨 조회하지 아니하였다 황제가 진노하사 크게 왕사를 발하여 실기함을 토벌하매 병위가 가하는 곳에 돌로써 알(란)을 누르는 것과 같아 국호가 진멸되고 구묘96)가 실타되었으며 백관이 괴훼하여 다시 군신의 예가 없어져 삼백년 적루의 기운이 일단에 경복되었다 이에 명하여 관을 설하고 성을 두어 유민을 완호한 것은 또한 귀국도 들어 아는 바이니 은감97)이 멀지 않도다 고전에 이르기를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강창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항형98)함은 화가 되고 화목함은 호가 된다?하였으니 가히 경계하지 아니하랴 이제 우리 대원국 황제폐하는 천재의 기회에 응하여 신성하고 문명하며 공덕이 겸하여 풍성하고 인자하고 관후하며 생을 좋아하고 살을 싫어하여 덕이 군생에 흡족하니 보천의 밑에서 덕을 느끼지 아니함이 없고 제항99)이 복주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하도다 귀국은 아국의 보전된 것을 생각하고 송국의 망한 것을 징계하여 일개의 사신을 보내어 일척의 서를 받들어 대원에 조회하면 금일에 손이 없을 것이오 후일에 익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귀국 사직의 복이리라 만일 대양의 막힌 것을 믿고 조회하지 아니하면 존망의 기틀을 가히 아지 못할 것이며 만일 불측의 환이 있으면 후회(서제)100)한들 어찌 미칠소냐 예로부터 험을 믿고 능히 국가를 보전한 자는 없는 것이다 소방이 이에 구도에 처하매 그 세가 약하기 쉬운데 오히려 또한 용서하는 바 있어 일시동인으로 토착의 편안함이 허락된 것은 위에서 구진한 바와 같거니와 귀국은 멀리 해외에 있으니 다만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면 결코 후환이 없을 것이다 바라건대 진퇴를 상작하라 앞서 신사년에 변장의 소주로 인하여 군을 발하여 가서 정벌하다가 전함이 풍도의 파양으로 인하여 간혹 수중에 잃어버렸으며 군졸이 유루되어 돌아오지 못한 자가 있더니 이제 탐라의 보낸 바 상인의 말을 듣건대 귀국이 모두 수호 처양하여 호생의 성덕을 따르는(순) 듯하니 이것이 한가지 행이로다 만일 귀국의 사직이 영이 있어 불곡(부초)의 말로써 가히 취할만 하다 하여 화친을 청하고 귀조한다면 반드시 성택을 입어 추호의 잃음이 없을 것이며 반석과 같은 편안이 있을 것이오 내 또한 중간에 처하여 명□을 보전하고 황은을 인도(도패)하여 써 백세의 안녕을 끼쳐 줄 것이니 불곡의 말은 뒤에 가야 바야흐로 믿게 될 것이다 나의 구구히 말하는 것은 다만 피차를 위하여 허물을 없게 할 따름이니 엎드려 생각컨대 경조하라 이만 주린다?라고 하였다. 임진에 지를 내리기를 ?장군 여문취가 석일 경인의 병역에(충열왕십육년 합단적의 침구) 죽전(서흥)에서 전사하였으니 그 자□는 등급을 초월하여 서용하라?하였다. 병신에 교주도가 적의(합단적을 말함) 표략을 겪어 민물이 조잔함으로 제군의 팔관과 정단 동지의 진봉을 정지케 하였다. 을사에 홍군상이 돌아가거늘 장군 홍선을 보내어 군상과 함께 원에 가서 향차와 목과 등물을 바치게 하였다. 기유에 승 혜영을 책하여 국존101)을 삼았다. 십일월 무오에 왕 및 공주가 묘연사에 이어하였다. 계유에 왕이 질환으로 미행102)하여 밀직 안향의 집에 이어하였다. 을유에 전 찬성사 송분과 동지밀직사사 정인경을 해도에 류배하였다. 십이월 경인에 찬성사 조인규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무술에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정미에 원이 태의 요생을 보내왔다.

계사 십구년 춘 정월 계미에 경상도 안렴사 유호가 정리 임대에게 피살되었다. 호가 일찌기 림대의 백금 이근을 몰입하였더니 대가 심히 원망하였고 호가 또 영고를 검열코자 하니 영리 허반과 김언이 죄를 얻을까 두려워 하여 림대에게 고하고 말로써 낚아서(이) 밤을 타서 찔러 죽이게 한 것이다. 총랑 김원구를 보내어 가서 국문케 하였더니 언은 원구의 예전부터 아는 이속인지라 원구가 가만히 언을 끌어 화와 복으로서 달래니 언이 실정으로써 고하거늘 이에 대와 언과 반 등을 베었다. 삼월 정사 삭에 왕이 도라산에서 사냥하였다. 병인에 공주가 병환이 있거늘 밀직 안향의 집에 이어하였다. 감찰사가 남해현령 서원의 장물을 몰수하였다. 을유에 제가 칙하여 이르기를 ?경은 대대로 왕작을 지키고 우리 집에 뽑히어 장가들었으니 곧 번병의 공을 양하여 마땅히 포가의 총을 보일 것이다 추충선력정원공신의 호를 사하는 것이니 더욱 그 공을 성케 하여 휴명을 대양하라?하고 또 첨의사사를 개칭하여 도첨의사사라 하고 승급하여 종이품으로 하고 양대의 은인 일과를 사하였다. 하 사월 정해 삭에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우박이 내렸다. 정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수녕궁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대전에서 잔치하고 공신호를 하하는데 안향이 시를 지어 써 하하거늘 미 오십석을 사하였다. 오월 경신에 재추가 왕을 향연하였다 요양행성이 사람을 보내어 견과 마를 바쳤다. 육월 병술에 내료별장 김여로 순마지휘를 삼았는데 내료가 순마를 겸한 것은 이에서 비롯하였다. 정해에 구요당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원이 강남 천호 진용 등을 보내어 미 이십소를 실어왔는데 또 앵무 일쌍과 기타 토물을 바친 것이 심히 많았다. 갑오에 장군 남정을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갑인에 원이 조인규로 가의대부 왕부 단사관을 삼고 이지저로 봉직대부 합포등처진변만호부 부만호 행중서성 부진무를 삼고 김연수로 무덕장군 서경등처관수수만호부 부만호를 삼아 모두 호부를 사하였다. 을묘에 원이 만호 윤세주를 보내어 탐라의 인물을 추쇄하였다. 추 칠월 신미에 인후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하하고 또 사은하였다. 갑술에 행중서성이 도첨의사사에 차부하되 ?추밀원의 자문에 의하건대 고려국왕의 자문에 본국이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 나올 때에 진도 백성을 나누어 또한 육지에 옮기매 본지(진도)가 공한하였다가 그 후 탐라가 다시 인민을 적입하여 종전케 하였다 현금(목금)에 합단적군으로 인하여 육지에서 종양하기가 불능하니 만일 탐라인호(진도에 적입하였던 인호)를 탐라에 환입케 하고 라주부근의 백성을 진도에 이입케 하여 농사를 지어 자생케 하는 것이 편할 듯 하다 하기로 황지를 주봉하노니 이것이 진실이냐 탐라의 원전지는 본래에 그 전지가 왕의 백성이 경종하던 것이냐 황지를 흠의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정축에 진변만호 한희유가 바람에 표류된 왜인 팔인을 잡아 왔다. 팔월에 원이 만호 홍파두아를 보내와 조선하는 것과 보전고를 관령케 하고 부사 첨사정으로 군량을 관령케 하니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파두아는 곧 홍군상의 형 태삼의 아들인데 왕궁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비록 금의를 입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직분이 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매 부끄러울 일이다?하고 재상을 예우함이 심히 공손하며 왕궁을 지낼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 도지휘사 판밀직 김지숙을 충청도에 지밀직 최유엄을 전라도에 도첨의참리 김운을 경상도에 분견하여 써 선과 양미를 갖추(비)게 하였다. 계미에 지진하였다. 낭장 송영을 원에 보내어 친조하여 일본정벌의 사의를 아뢸 것을 청하였다. 무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구월 계축에 평주온천에 행차하였는데 술자가 암방을 삼소지103)라 하므로 일관에 명하여 택지를 보(상)게 하고 행차한 것이다. 을축에 원이 탐라 달로화적을 교지에 류배하고 좌승 아철로 이에 가름하였다. 갑술에 왕 및 공주가 구요당과 및 외원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동 십월 계사에 친히 영보도장을 강안전에서 설하였다. 기해에 왕 및 공주가 원에 행차하는데 량가녀 삼인을 뽑아 데리고 갔다. 조인규 염승익 인후 민지 원경 등 문무 팔십인이 종행하였고 제안공 숙과 첨의찬성사 홍자번 등에게 명하여 왕경을 유수케 하였다. 왕이 김교에 이르러 서해도 안렴사 수서와 개성부사 양주를 장하니 그의 공억(공궤)이 태만하기 때문이었다. 신축에 김운으로 경상도 도지휘사를 삼았다. 갑진에 지진하였다. 대장군 홍선을 원에 보내어 인삼을 바쳤다. 을사에 왕이 봉주에 이르매 안염 수서가 왕을 향연하거늘 왕이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였다. 무신에 혜성이 대미성의 좌액문에 나타났다.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에 배알하고 사람을 분견하여 평양군사와 동명왕 및 목□묘에 제하였다. 십일월 갑인에 경상도 안렴사 유원개가 이십승104) 마포 삼십필을 바쳤다. 계해에 원이 직성 사인 철팔아독과 공부시랑 미리화자 등을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병자에 혜성이 자미(성)를 범하고 또 북두(성)를 범하였다. 좌간의 김단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경진에 왕이 대보□에 이르니 중서성이 성지를 주봉하여 고려국왕의 조근시에는 오백여마필의 초료를 비급하라고 하였다. 십이월 무자에 송분으로 탐라도지휘사를 삼았다. 신묘에 왕이 무녕현에 이르니 세자가 장군 유비를 보내어 자위구 일령과 난모 이정을 바쳤다. 무술에 왕이 소주에 이르니 세자가 길에서 맞아 배알하고 안마 및 철봉 사매와 장검 사구를 바치고 제는 세자에게 주육을 사하여 왕을 대접케 하고 태자비는 사람으로 하여금 양주로써 맞아 위로케 하였으며 연도의 각 만호와 총관과 달로화적과 대왕 등은 모두 양주 혹은 마와 락타를 바치니 왕도 또한 은과 포로써 사례하였다. 신축에 왕이 연경에 이르러 첨서 중추원사 홍군상의 집에 사관(사)하니 제의 병환이 위독하여 접견치는 못하였으나 총뢰의 후하기는 제왕과 부마가운데에 비할 자가 없었다. 임인에 이혼으로 서북면 도지휘사를 삼았다. 을사에 왕과 공주가 황태자 진금의 비(자)(자는 연문) 활활진의 전에 나아가서 금종과 금우 각 일사와 백은만루도금대잔 일쌍과 백은만루병 일사와 은종구사와 은우 이십사와 호표피 각 구령과 수달피 이십칠령과 세저포 사십오필과 흑응 골 각 일핵을 증여하였다. 이해에 왕이 거라 개명하였다.
 

갑오 21년 춘  정월 임자 삭에 왕이 원에 있었다. 왕이 공주로 더불어 활활진비전에 나아가 백마9필을 바쳤다 계유에 세조황제가 붕하거늘 왕이 공주로 더불어 양 10두와 마 1필로 써 빈전에 제하는데 그 문에 이르기를 [접허105)가 막원하온데  명폐106)를 첨앙하여서 래빈하였더니 룡어107)가 문득 돌아가시매 어찌 정호의 애모를 다하리까 꿈인가 생시인가 엎어지고 자빠지도다 애오라지 비박한 전의를 닦으오니 흠용의 사를 내려 주심을 바라나이다]고 하였다 장차 찬성사 정가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읽게 하려 하니 제대신이 저지하여 말하기를 [어찌 제후의 예를 써서 마땅히 천자에게 제하리오] 하거늘 드디어 읽지는 아니하였으나 왕의 존천의 예와 애모의 성은 다 그 극에 이르렀다 원조의 상제에는 국인이 아니면 감히 접근치 못하는데 오직 고려만은 참여할 수 있으므로 왕의 종신은 비록 여□의 천인이라도 출입에 금함이 없었다. 전선 만들기를 파하였다 때에 왕이 입조하여 동정의 불편함을 진언코자 하였고 또 갑수(충렬왕즉위년의 동정) 신사(충렬왕7년의동정) 량년의 병역으로서 수변의 재목은 작벌하여 거의 다 되매 조함하기가 진실로 어려움으로 그 기한을 늦출 것을 바랬더니 마침 제가 붕어(안가)하매 홍군상이 승상 완택에게 사뢰어(백) 드디어 동정을 중지하였다. 병자에 중랑장 라윤재로 장군을 삼았는데 세자가 세조를 배장할 때에 말이 놀래어 다리 밑에 떨어지매 윤재가 붙들어 구출하였음으로 이 명이 있었다. 하 4월 신묘에 동지밀직 안향으로 동남도 병마사를 삼아 합포에 출진케 하였다. 계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상도(찰합이의 다륜현)에 가 황태자를 맞이하였다. 갑오에 황태자가 황제위에 나아가니 이가 성종이다 왕이 공주로 더불어 금잔과 은루규화잔 각 1부 금병 금루은존 호 탕병 주병 각 1사와 반루은존 호병 각 1사와 은우 81사와 은은종 18사와 자라 9필과 세저 86필과 표피 18령과 수달피 81령을 바쳐서 공물에 충당하고 하례를 표하기를 마치매 제가 왕에게 명하여 부연케 하였다 떄에 제왕과 부마가 다 모였는데 왕이 제7위에 좌하였다. 이튿날 또 표를 올려 이르기를 [알고 말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실로 신직이요 례로서 드는(거) 바가 있으며 간택은 제심에 있는 것입니다 공유컨대 폐하는 하늘이 신모를 품부하사 날로 성경(의 성)에 오르셨나이다 하 민이 계108)에게 돌아오매 다투어 명덕을 널리 펴는 것을 노래하였고 문모109)가 주에 있으매 함께 지인의 빛난 효도를 기뻐하였나이다 바야흐로 때를 헤아려서 일을 일으키려 하매 진실로 고사를 상고하여서 가유를 밝힐 것입니다 신이 삼가 전사를 안찰하건데 아들이 천자가 되매 모가 태후가 되는 것은 진막 이래로 산개치 못할 법전입니다 아아 이 법전의 크게 창명되는 것은 아마 성조의 급한 바입니다 군신이 마땅히 의논할 것인데 천견을 가지고 먼저 진술함이 부끄러우나 미성을 감추기가 어려우니 바라건데 겸청하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을까 하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큰 도양을 널리 돌리시와 우충을 수납하시어 빨리 건극의 이은을 내리시고 일찌기 곤□의 의호를 정하시면 3왕의 보도를 회복하여 교화가 바람같이 행할 것이며 만국의 환심을 얻어 원근이 크게 경앙하리이다]라고 하였다. 무수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왔다. 기해에 제가 왕의 공이 크고 년령이 높음으로써 조하여 출입할 적에 소거를 타고 전문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을사에 제가 왕에게 은 3만량을 사하였다. 5월 경수 삭에 또한 그와 같았다. 탐라인 곡겁대 몽고대 탑홀발도 등이 원에 가서 마 400필을 바쳤다. 왕이 네가지 일로서 제에게 아뢰니 1은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고 2는 포로된 인민을 돌려 보내기를 청하고 3은 공주를 책봉해 주기를 청하고 4는 작명을 가해 주기를 청하였다 제가 명하기를 [탐라는 고려에 환례케 할 것이며 기미년 이래의 피로 및 류도인은 가히 사신을 보내어 료양행성으로 더불어 분간하여 돌려 보낼 것이며 공주의 책명은 의논하여 아뢸 것이며 국왕의 작명은 이미 여러번 내렸으니 또한 래년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제가 일찌기 한림학사 살자만으로 하여금 고려의 귀부한 년월을 묻거늘 왕이 정가신으로 하여금 글을 올려 대답하기를 [태조 성무황제가 일찌기 삭방에서 흥기 하매 때에 여러나라들은 정벌을 돕고(조)있는데 금국은 공을 믿고 교만하여 제명을 받들지 아니하더니 금산왕자란 자가 있어 그 국호를 고쳐 스스로 [대료]라 칭하고 중도 등처의 자녀와 옥백을 략탈하여 동으로 강동성에 달아나와 거수하거늘 조정이 합진과 찰자를 보내어 추토하였나이다 그때 눈이 깊이 쌓이고 길이 험하여 량향이 계속되지 못하거늘 고왕(고종)이 듣고 조충과 금취려를 보내어 군대를 증파하고 군사를 풀어먹여 그 추로를 섬멸하고 인하여 표를 받들어 동번되기를 청하였던 바 태조가 경도호사를 보내어 우조로써 답하고 크게 칭상을 가한 것이 이제 76년이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경신에 태조(성)이 낮에 나타났다. 기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상도를 출발하였다. 6월 경진 삭에 일식하였다. 무신에 왕이 심주(심양)에 이르니 제가 공주를 책봉하여 안평공주를 삼았다. 추 7월 무오에 대장군 오인영으로 전라도 지휘자를 삼아 탐라에 가게 하였다. 정묘에 대장군 류석으로 동남도 병마사를 삼아 합포에 출진케 하였다. 을해에 원이 흘절사팔 팔합사를 보내어 사문(승려)을 보호하라는 조서를 가지고 오거늘 백관이 포와 홀을 갖추고 승도를 거느리고 출영하여 숙릉사에 머물게(□)하였는데 육이 아니면 먹지 아니하였다. 흘절사팔이란 번승의 이름이요 팔합사란 번사의 칭호이다 사는 본래 진도군인으로서 신미년(종12년 진도 공함의 해)남적을 토벌할 때에 포로가 되어 서로 가서 드디어 제사에 투탁하여 머리를 깍았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매 부모의 존몰을 몰랐다가 이에 이르러 서재현에서 찾았으나 가난하여 능히 자존하지 못하고 남의 집 고용이 되였는지라 왕이 미와 전을 주어 교동현에 집을 두게 하고 그 족속을 모아 살게 하고 그 역을 면제(복)하였다. 병자에 동지밀직사사 류승과 직사#(관) 권막공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8월 을유에 왕이 원으로부터 이르렀다. 정유에 원이 세조에게 유종이란 존익을 가상함으로써 달로화적 걸석열 60등을 보내와 조서를 반포하였다. 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신유에 장군 민보를 원에 보내어 □를 바쳤다. 동 10월 갑신에 윤안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수에 원의 의주(심양부근) 호천관 도사 현진대사 한지온이 그의 무리 이도실 이도화 윤도명으로 더불어 오거늘 왕이 지온에게는 원명통도동현진인도실에게는 정지현명강경대사라는 호를 사하고 가택 1구를 사하니 (이들은) 앞서 왕이 불렀던 것이다. 경자에 왕이 동교에서 사냥하고 드디어 수강궁에 행차하였다.11월 경수에 탐라왕자 문창유와 성주 고인차에게 홍□과 아홀과 □ 개 정 각 1사를 사하였는데 탐라가 이제 우리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이 사물이 있었다 그러나 마를 원에 바치는 것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을묘에 탐라 달로화적에게 직금의 2습을 사하였다. 계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뢰방에 행차하였다. 12월 경진에 우승지 류비와 직보문서 류인명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갑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뢰방으로부터 온천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경인에 원이 중서사인 애아적을 보내왔는데 이에 앞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강남미 10만석을 운수하여 강화도에 두었더니 이제 료양과 심양이 기아를 고함으로 제가 조하여 5만석으로 써 진휼케 하였다. 좌□사 박의로 서북면 도지휘사를 삼았다. 무수에 랑장 백견을 원에 보내어 곡육을 바쳤는데 곡조가 하양 영주 등지에 많이 나므로 해마다 사자를 보내어 그것을 잡으니 1방을 소요케 하여 백성이 심히 괴로워 하였다. 신축에 원이 원정이라 개원하였으므로 홀도해 등을 보내와 조서를 반포하였다. 홍자번으로 첨의중찬을 삼고 인후로 첨의찬성사를 삼고 김지숙으로 판밀직사사를 삼고 차신으로 밀직사를 삼고 안향으로 지밀직사사를 장□룡으로 동지밀직사사를 삼았다.

을미 21년 춘 정월 갑인에 홍자번으로 첨의령을 삼고 조인규로 첨의중찬을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에게 첨의령을 가하였다.을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고 신유에 드디어 신효사에 행차하니 다 선제의 □복을 함이였다. 무진에 판감찰사사 렴승익이 병으로 면관하였다. 기사에 정가신으로 첨의시랑찬성사를 삼고 인후로 세자□사를 삼고 김흔으로 지도첨의사사를 김지숙으로 판삼사사를 안향으로 밀직사사를 차신으로 세자원보을 류승으로 지밀직사사를 최유□ 이지저로 좌우상시를 삼고 이혼으로 동지밀직사사를 류비 민청로 좌우승지를 삼고 원경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임신에 원이 몽고자 교수 이망고대를 보내왔다. 갑수에 관자 장군 도성기에게 내부의 홍□을 사하였다. 2월 무자에 연등으로 왕이 공주로 더불어 강안전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중랑장 송영을 원에 보내어 운량을 감하기를 청하였더니 제가 청종하지 아니하였다. 갑오에 대장군 오인영을 원에 보내어 황자 탄생한 것을 축하하였다. 무수에 왕이 동교에 사냥하고 드디어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장군 최숙천을 원에 보내어 개원한 것을 축하하였다. 갑진에 친히 삼계를 강안전에서 초제하였다. 3월 무신에 지첨의부사로 치사한 지윤보가 졸하였다. 정사에 친히 소재도장을 외원에서 설하였다.동수국사로 치사한 임익의 사□수찬관 김□에게 명하여 선제의 사적을 찬수케 하였다. 장군 지단 등을 보내어 선 73□(소)로써 미 1만석을 실어 료양에 수송하였다. 경오에 원이 백첩목아를 보내와 마를 탐라에서 취하였다. 신미에 친히 □경을 강안전에서 전독하였다. 하 4월 무인에 원의 료양성이 제지를 받들어 강남의 운미 3천석으로서 쌍성을 구휼하였다. 기묘에 장군 김영손을 보내어 선 90□(소)로써 미 12180석을 실어 료양에 수송하였다. 을유에 서리가 내려서 □와 □을 죽이기를 무릇 4일이나 하였다. 갑오에 상화연을 향각에 설하고 각후에 따로히 장전을 개설하여 크게 여악을 베풀었는데 중랑장 문만수가 물을 끌어 유희를 하고 청□견을 오려(전) 파초를 만드니 왕이 기뻐하여 백금 3근을 사하였다. 을미에 대장군 류복화와 지후 금지겸을 보내어 은폐를 세자에게 보내었다. 계묘에 장군 류온을 원에 보내어 료양에의 운량을 감할 것을 청하니 제가 허하여 2만석을 감하였다. 윤월 기유에 원이 왕경과 탑실불화를 보내어 향폐를 가지고 와서 장경을 보독하니 왕경은 본국의 종성이였다. 계축에 판비서성사 최서로 제주목사를 삼았다.  기미에 원이 소운실불화를 보내왔는데 조에 이르기를 [□활태(태종)황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매하는 사람들이 관전을 대출하여 리전으로써 환납하지 않고 피차에 은닉하는 자가 많았다 그 내외관원은 매매인을 찾아 잡아서 리전을 수취하여 수에 의하여 천부사에 교납케 하라 만일 매매인에 은닉한 것을 보고 먼저 고하는 자가 있으면 상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오에 중랑장 조침을 원에 보내어 제주의 방물 저포 100필과 목의 40엽과 포 6롱과 □피 76령 야묘피 83령 황묘피 200령 □피 400령 안□5부를 바쳤다. 계유에 장군 서광순 등을 보내어 선 65□로서 미 8568석을 실어 료양에 수송하였다. 5월 신미에 승 경의으로 국존110)을 삼았다. 정해에 찬성사 인후를 원에 보내어 세자의 혼인을 청하고 또 좌승지 류비를 보내어 왕에게 태사 중서령을 가할 것과 공주의 인장을 강급할 것과 세자의 인장을 고칠 것을 청하니 제가 다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기축에 홍군상으로 3한벽상공신 3중대광 익성후를 삼았다. 추 7월 을해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장□가 졸하였다. 임우에 감세별감을 경상도 전라도에 보냈다. 을해에 판3사사 김지숙을 원에 보내어 성절 축하하였다. 8월 갑진에 정동행성이 원외랑 우정신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계축에 민지로 밀직학사를 삼았다. 무오에 세자가 원으로부터 이르렀다. 경신에 세자로 판도첨의 밀직감찰사사를 삼고 홍자심으로 지도첨의사사를 삼고 홍군상으로 도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세자사임안공을 삼았다. 임무에 만호 지도첨의사사 한희유를 조월도에 류배하였다. 을축에 제안공 숙으로 록3사사를 삼았다. 기사에 금방경에게 상락군개국공의 작을 사하였다. 9월 임신 삭에 홍자번으로 첨의중찬을 삼아 치사케 하였다. 갑수에 원이 겁설석첩리 등을 보내와 조서를 반포하였다. 을해에 현성사에 행차하는데 차가가 전법사의 문에 이르러 죄수를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병자에 성절이므로 크게 잔치하였다. 갑신에 세자가 도첨의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드디어 수강궁에 나아가거늘 왕이 공주로 더불어 루에 올라 관찰하였다. 임진에 세자로 판중군사를 삼았다. 을미에 밀직학사 민청가 파면되고 금□으로 이에 가름하고 홍문계에게 첨의중찬을 가하여 치사케 하니 세자가 이를 청함이었다. 동 10월 임수에 장군 류온을 원에 보내어 선제의 사적을 바쳤다. 계해에 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자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조인규의 딸로 세자비를 삼았다. 병인에 지진하였다. 11월 정축에 세자가 왕께 조근할새 사서인이 길을 막아 마를 붙들고 상서하여 원한을 호소하니 말이 앞을 나가지 못하였는데 세자가 다 이것을 받아주었다 대개 호세가가 남의 전민을 양탈하여도 유사가 능히 청단치 못한 까닭이었다. 갑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임인에 홍문계 금광취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고 행성은 통체문저후 조□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상락공 금방경에게 식읍 3000석에 식실봉 300석를 사하였는데 세자가 이를 청함이었다. 계묘에 세자가 원에 갔다. 갑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기를 3일이나 하였다. 을묘에 감찰시사허유전을 순마소에 가두었다. 갑자에 외원에 행차하였다.

병신 202년 춘 정월 임신에 부지밀직사 류비를 원에 보내어 세자의 혼인을 청하였다. 갑신에 이죄 이하를 유사하고 또 지를 내리기를 [선조의 묘예에게는 초인사를 허하고 력대공신의 분묘에는 초목을 금하여 제사를 지내고 외공111)을 면제하기를 3년동안 할 것이며 경사 교수도감을 두어 일경을 통하고 일예를 습한 자는 우대하여 탁용을 가할 것이며 무릇 진사 생도는 모두 방수를 면케하고 계사 갑오년(충렬왕19 20년의 원나라행차)에 종행한 신료는 직사등을 초수하고 남반과112) 내료는 사로를 허통하되 차등이 있게 하고 합단을 포토하여 공이 있는 장졸은 특별히 서용을 행하고 빈민이 조세로 인하여 자식을 판 자는 관에서 속환해 주라] 하니 그때에 왕의 나이 61세인데 술자에 환갑이 액년이란 설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추시하여 사유한 것이었다. 을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자에 선제(원세조)의 대상113)으로 신효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기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무수에 관에 돌아오는데 관자 장군 도성기가 채붕을 맺고 기악을 성히 하여 잔을 가전에 올리니 왕이 공주로 더불어 기쁨을 극히 하고 파하였다. 2월 갑진에 금지숙으로 지도첨의사사를 삼고 안향으로 삼사좌사를 삼고 금□과 이덕손으로 함께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동부밀직사사 이혼이 파직되었다. 임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원이 탐라의 목축사로 단사관 목올적을 보내어 왔다. 병인에 왕이 서교에사냥하니 국사승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전하의 환갑년이니 마땅히 소심으로 덕을 닦을 것이며 가히 놀이와 사냥하는데 탐닉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고 하였는데 기실인즉 공주의 □□을 꺼리어 사냥으로 인하여 나와서 □첩을 사교하려는 것이었다. 3월 기묘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역을 정리하였다. 금광취가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왕에게 직금 홍견 각 4필을 사하고 태후가 포도주 2기를 사하고 아울러 력일을 사하였으며 중서성은 선릉 홍초 각 5필을 보내어 왔다. 무자에 도둑이 최우의 총을 발굴하매 유사에게 명하여 그것을 수리케 하였다. 하 4월 임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대장군 유복화를 보내어 전폐를 세자에게 송치하니 혼례 떄문이었다. 경무에 궁에 돌아와 상화연을 향각에 설하니 대학사 정가신이 시를 지어 써 축하하였다. 갑인에 어떤 사람이 내지를 전한다 하고 전법사에 돌입하거는 민시가 그 무례함으로써 그 이유도 결문하지 않고 가두(수)니 왕이 노하여 시를 자연도(인천)에 유배하였다. 을축에 도첨의랑사와 금내육관114) 및 학관에게 명하여 정가신의 상화 내연시를 화답케 하고 각각 미 20석을 사하였다. 병인에 향각에서 잔치하고 정묘에 또 그리하였다. 5월 기사에 원경으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경오에 향각에서 야연을 하는데 왕이 벽상의 당현종야연도를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과인이 비록 소국에 군임하였으나 그 유연에 있어서는 어찌 가히 명황에게 미치지 못하리오]하고 이로부터 밤으로써 이어 기교와 □기한 짓이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었다. 신미에 홍자번으로 상의도첨의사를 삼았다. 계주에 국진고의 라견 20필로써 순마소에 부쳐 내연일에 이르(지)면 화개개를 미포하고 오래되면 바꾸게 하였다. 갑무에 가뭄으로 술을 금하였다. 병자에 홍자번으로 우중찬을 삼고 조인규로 좌중찬을 삼았다. 기묘에 장군 이연송을 원에 보내어 탐라의 피화를 바쳤다. 병무에 우부승지 오인영을 보내어 저포를 바쳤다. 경인에 신효사에 행차하고 임진에 공주가 또 이 절에 행차하여 연등하였는데 다 주옥으로써 짜서 등롱을 만드니 교묘하고 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사에 원이 저란탐수로를 보내어 관역을 점시하였다. 갑오에 대장군 남정을 원에 보내어 탐라마를 바쳤다. 6월 경자에 최세정을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갑진에 중찬 홍자번이 글을 올려 백성을 편케 할 18사를 조진하니 왕이 가납하였다. 기유에  부지밀직사사 김의광이 죽었(사)다. 무오에 부지밀직사사 김지경이 졸하였는데 사능115)으로써 승진되어 렴직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을축에 공주 생일이므로 2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추 7월 신사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광명사에 행차하여 우란분□116)를 설하였다. 갑신에 장군 이무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을미에 중찬 정가신을 원에 성절을 하하고 상장군 김정수를 보내어 입조를 청하였다.병신에 원이 첩본아를 보내어 쌍성의 인물을 추쇄하였다. 8월 을해에 행성이 중랑장 변신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무오에 김정수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세자의 혼기와 제가 왕의 입근을 최촉함을 보하였다. 9월 을해에 외원에 행차하였다. 임오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원에 가는데 종신이 200필13인이오 렴종이 590인이오 마가 990필이었다. 동 10월 무신에 왕이 영주(의주)에 이르니 료양성과 중서성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압록강에서 맞이하였다. 무오에 왕이 심주(심양)에 이르니 총관 박인재와 지사 박순□이 나와 맞이하지 아니하거늘 왕이 노하여 그 목에 칼을 씨웠다. 11월 경오에 행성이 상장군 김정수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경진에 왕이 령두아에 이르니 세자가 와서 맞이하였다. 임오에 왕이 연경에 이르러 홍군상의 집에 사관(관)하니 황태후는 사신을 보내어 노문하고 제왕과 공주와 공경 주부는 다투어 래알하였다. 갑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제께 알현하고 방물로서 금병 금종 2사와 루은□ 은양병 각 1사와 은전 1부와 은호병 은대종 각 1사와 반루은호병 2사와 은대종 1사 은우 50사와 호 표피 각 13령 수달피 76령과 자라 10필 백저포 100필과 대창초자 10을 바치고 드디어 장조전에서 시연하는데 제왕이 자리에 가득한데 왕이 제7위에 거하였으며 공주의 우편에는 감히 앉는 자가 없었다. 을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태후를 강복궁에서 알현하였다. 기축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장조전에서 시연하고 익일에도 또한 그리하였다.임진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궐에 나아가니 세자는 백마로써 제께 납폐117)하고 그 진왕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날 연회에는 다 본국의 유밀과를 썼다 제왕과 공주와 및 대신이 다 시연하여 늦게까지 이르러 술이 취하매 본국 락궁으로 하여금 감황은의 조를 아뢰었다 이윽고 파하였다. 계사에 세자가 백마로써 태후께 바치니 태후가 양과 주로서 세자를 향연하는데 제는 태후로 더불어 평대(헌)에 임어하고 제왕과 공주와 백관이 시연하였다. 갑오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장조전에서 시연하는데 세자는 백마로써 진왕에게 바치고 잉하여 주와 양으로써 잔치하였다. 12월 을해에 왕이 세자로 더불어 장조전에서 시연하고 을사에 또한 그러하였다. 금단 18필과 □ 종에게 목면견 각 411필을 사하였다. 임자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장조전에서 시연하였다. 갑인에 중서성이 왕을 향연하였다. 을묘에 제가 왕에게 궁실 및 검을 사하고 종신에게 궁 39와 실 500을 사하였다. 경신에 제가 왕 및 공주를 향연하고 신유에 태후가 또 강복궁에서 향연하였다. 정유 23년 춘 정월 갑자 삭에 왕이 원에 있어 하정하고 예가 마치매 전에 올라 시연하였다. 을축에 왕이 공주와 세자로 더불어 만세산 광한전에서 시연하였다. 병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강복궁에서 시연하였다. 임신에 왕이 공주와 세자로 더불어 만세산 광한전에 나아가 시연하였다. 을해에 제가 왕에게 어안을 사하고 또 종신 18에게 사람마다 1안을 사하였다. 임오에 랑장 황서를 원에 보내어 김화옹기와 야치 및 탐라 우육을 바쳤다. 2월 갑오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진왕을 교에서 전송하였다. 기해에 제가 성남에 행차하여 사냥하는 것을 관현하는데 왕이 호종하여 아뢰기를[신의 선신 식(원종)이 몽가황제(원의 헌종) 기미세에 세자로서 입관하였을 때에 세조황제가 남정으로부터 돌아오거늘 선신이 포홀을 갖추고 변양의 고□(거)에서 영배하니 세조가 가한□하여 총권함이 날로 높아지고 소신에 이르러 공주를 □강하여 대대로 동번이 되었으니 비(걸)옵건데 을미년(고종46년) 이래로 포로된 자 및 류민으로서 료 심에 있는 자를 모두 귀국케 하소서]하니 제가 이 원이 대덕이라 개원하고 천하에 □하였다. 태후가 왕의 □일이라 하여 양 40두와 곡 10수를 사하고 아울러 내□을 사하니 제왕과 공경이 모두 와서 하례하였다. 3월 갑자에 혜성이 나타났다. 을축에 태후가 왕 및 공주를 강복궁에서 □송하고 잉하여 김□의를 사하고 종신의 3품이상 20인에게 김□의 각각 한벌씩을 사하고 익일에 또 종신에게 김□ 100필과 □□ 800필을 사하였다. 무진에 왕이 궐에 나아가니 제가 포도주를 사하였다. 경오에 태후가 왕 및 공주에게 안마를 사하였다. 신미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경을 발출하였다. 하 4월 계사 삭에 일식하였다. 경자에 원이 사신을 료양로에 보내어 기미년 이후의 포로된 자 및 류민을 □□하여 돌려보내니 무릇 350호이었다. 경수에 서리가 내렸다. 5월 정묘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원으로부터 이르러 드디어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공주가 병□이 나니 법□을 설하고 왕이 연비118)하였다. 계유에 왕이 공주로 더불어 현성사에 행차하여 내□미 100석을 내어 궁민에게 사하고 공주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을해에 중랑장 주량필를 원에 보내어 의를 청하였다. 임오에 공주가 현성사에서 □거하거늘 왕이 첨의부에 이어하였다. 계미에 부지밀도사사 원경을 원에 보내어 공주상을 고하였다. 병수에 김방경의 집에 이어하였는데 이로부터 이신하는 것이 한곳 뿐이 아니었다. 6월 정유에 우박이 내렸다. 무수에 지를 내려 [종행한 신료는 4등을 뛰어 (초) 록용하리라] 하였다. 계묘에 사람에게 무두 장빙119)할 수 있도록 허하였다. 원이 태의 왕득중과 곽경을 보내왔다. 병오에 세자가 원으로부터 와서 분상120)하였다. 임자에 원이 화노홀손을 보내와 공주상을 적문하였는데 태후는 부의로 저폐121)를 사하고 전장122)하여 명복을 견□사하였다. 추 7월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기사에 신효사에 행차하여 공주를 천복하였다. 신미에 복지밀직사사 박의를 원에 보내어 적위를 사하였다. 병무에 행성이 좌우사도사를 원에 보내어 성절 및 개원한 것을 축하하였다. 무자에 세자는 공주의 훙거가 무비로 녹유한 것이라 하여 이를 죽이고 또 엄인(관자) 도성기 최세정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을 죽이고 그 당 40여인을 유배하였다. 8월 신묘 삭에 동지밀직사사 최유□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계미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사경승을 징소하였다. 신축에 인후로 제첨의시랑찬성사 판군박감제사사로 삼고 김□로 시랑찬성사 판도사사를 삼고 차신으로 찬성사 세자이사를 삼고 김□로 부지밀직사사를 삼고 설경성으로 3사우사를 삼고 장석로 군박판서를 삼고 류욱로 전법판서를 삼았다. 계묘에 공주의 진영이 원으로부터 이르거늘 백관이 기락으로써 교에서 맞이하였다. 을사에 세자가 고 진사 최문의 처 김씨가 □색이 있음으로써 왕에게 바쳤는데 대개 무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위해코자 함이었다. 병오에 세자가 성복123)하였다. 기미에 안평공주를 고릉에 장사하였다. 9월 정해에 장순룡의 집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신묘에 정가신으로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를 삼고 홍규로 판3사사를 삼고 이지저로 3사좌사를 삼고 박의로 지밀직]사사 세자원빈을 삼고 류비로 동지밀직사사 감제대부를 삼고 최충소 허평으로 모두 복지밀직사사를 최참로 우상시를 민종유로 지신사를 삼았다. 계사에 세자가 원에 갔다. 병신에 조인규 인후 류비를 원에 보내어 황자 □생한 것을 하하고 또 출곡할 것을 고하고 전위를 청하는 표에 [성덕이 일월의 밝음과 같음에 유원한데까지 비치지 아니함이 없고 비정에 사호의 숨김이 없으니 사고가 있으면 반드시 진백케 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적은 멀리 동방을 지키지만 마음은 오로지 북진124)에 공하나이다 일찌기 지원 6년 기사에 신이 세자가 되어 8조하였다가 돌아와 파□부(9련성)에 이르러 권신 임□이 폐입을 단행하였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도로 돌아가 정상을 진고하였던 바 드디어 관군으로 더불어 와서 구도를 회복하였나이다 8년 신미에 숙위에 입첨하여 여러 세월을 겪어 리강(공주의 하가)을 입음에 이르러 더욱 번직을 근수하였나이다 18년 신사에 관군이 일본을 출정하매 무릇 선함과 미량으로 군졸과 초수에 이르기까지 1절 물건을 모두 다 힘을 다하여 응부하였고 24년 정해에 차가(천자를 가르킴)가 내안을 친정한다는 말을 듣고 몸소 5천군을 거느리고 가서 정토를 도우려는 도중에 조서가 대첩을 전하고 잉하여 환군을 명하셨나이다. 28년 신묘에 내안의 여종인 합단적군이 우리 동비에 들어오매 신이 내만석 설도천 등으로 더불어 심력을 같이하여 탕멸해서 남음이 없게 하니 신을 노효가 있다 하여 공신의 명분을 가하셨나이까. 30년 계사에 공주로 더불어 입조하여 친히 성인의 거동을 보고 제일 먼저 경하하는 모임에 나아가매 특별히 총악을 받자왔나이다 이미 특수한 권고를 얻었으매 한결같이 정성을 바치려 하였아온데 이에 규실이 서로 별리함으로 인하여 애상이 심함이 있고 이에 덕붙여 춘추가 바야흐로  쇠□(모)하고 질양이 서로 침공하니 만일 일조에 엎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 서무의 결재를 누구에게 맡기겠읍니까 그윽히 보건데 신의 세자 □은 간국125)이 숙성하여 궐정에 입위하여 은혜를 입어 이미 황지에 배필이 되었고 일에 익숙하여(음) 종사를 이을만하니 신이 장차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물러나 섭생하면 거의 우근을 면하여 천균의 무거운 짐을 벗게 될 것이오며 천식을 연장하여 사해의 태평을 볼 것입니다 이에 간절히 호소하오니 금찰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을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11월 무인에 상장군 김연수를 원에 보내어 인참 및 탐라 소유126)를 바쳤다. 을축에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12월 무수에 내견 김원려가 관인 시거를 사통하였음으로 모두 임진강에 투살하였다. 경자에 활활석대왕이 대청도에서 사거하였다. 임인에 김지숙으로 첨의삼리 세자이사를 삼고 안향으로 첨의참리 세자이보을 최유□으로 판밀직사사를 삼고 장석으로 군박판서를 삼고 전승으로 우부승지를 삼고 오인영으로 좌승지를 삼고 김순으로 좌부승지를 삼고  조서로 우승지를 삼고 오한경 이진으로 모두 좌우사의대부를 삼았다. 갑진에 첨의참리 장순룡이 죽(사)었다. 무오에 대장군 송□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고 윤월에 행성이 록리(관속) 조진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을축에 원익로 동지밀직사사를 원경으로 부지밀직사사를 삼았다. 부지밀직사사 최충소가 세자의 명으로 수창궁기에 나아가 크게 공역을 일으키니 장차 공주의 궁노127)를 설하려는 것이었다. 무수 24년 춘 정월 병신에 세자가 원으로부터 이르렀다. 경자에 세자비 보탑실련 공주가 오거늘 왕이 금교에 행차하고 백관이 교에서 맞이하는데 의장과 #(지)락이 왕을 맞이하는 예와 같았으며 제가 아목□태자와 □길자석 승상으로 하여금 호행하여 오게 하였다. 신축에 공주 및 아목□ 등을 수령궁에서 향연하였다. 임인에 순마소에 명하여 양가의 딸을 뽑아 장차 제소 및 사신에게 바치려 할제 백료로 하여금 가만히 유녀가를 적어 주사에 투서케 하니 이에□128)□의 원이 있는 자는 비록 딸이 없어도 또한 지목하여서 소동을 일으키니 #(계)견도 편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가만히 납□하는 자도  자못 많았다. 계묘에 교하여서 소동을 일으키니 고(짐)가 #(랑)덕으로써 □구(대위)를 □승한지 25년인지라 이제 또한 늙었으며 그 위에 거세에 상배로 인하여 과#(동)함을 깨닫지 못하였더니 질양이 이에 따라 청정에 게을리 하게 되었도다 오직 너 세자는 영명하고 지용함이 중인의 다 아는 바이니 마땅히 번직을 이어 종사를 공경히 받들지어이다  고도 또한 후궁에 퇴거하여 여□을 안온히 보낼 것이다 충하고 효하는 것은 이 일거에 있도다]하니 세자가 □을 올려 □양하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갑진에 원이 성령후 왕유를 보내어 국인에게 조□하기를 [근래에 고려국왕 왕단는 표를 올려 말하기를 춘추가 바야흐로 노쇠하고 우양이 함께 침노하매 서무의 번노를 염려하여 무거운 짐 멘 것(왕위)을 쉬고자 하여 세자 원으로 하여금 □□케하기를 빌(걸)었도다 짐이 생각컨데 왕은 동사를 □수한지가 30년에 가까웠는데 여러번 충근을 나타내어 훈벌이 성하게 나타났도다 그의 성근을 가□히 여겨 실히 윤허를 사하여 세자에게 개부의동삼사 대위 부마 상주국 일수왕을 가수하여 써 우숭의 뜻을 보이노라 나라에 중무가 있으면 바라건대 모름지기 훈려하여 오직 성취에 이르게 하라] 하고 또 왕에게 조하여 이르기를 [경은 번한에 격거하여 훈공을 성하게 드러냈고 우리 국가에  선력하여 해가 지낸지 오래인데 근자에 쇠질을 진술하여 번로를 벗기를 바라며 모름지기 사작하는 은혜를 빌어 장차 편히 늙기를 꾀하니 곧 충간을 생각하여 마땅히 윤종함을 사할 것이다 경이 비록 기년이나 나라의 중무는 오히려 훈도에 자뢰하여 마침내 써 성취함이 있게 하라 아- 처음을 잘하고 끝을 잘 맺아 이미 수상한 권고를 입었고 오직 충하며 오직 효하여 힘써 보효의 근을 생각하라 공경히 총광에 복□하여 더욱 복리를 편히 하라] 하였다 유는 본국의 종실로써 원조에 벼슬하여 총관이 되었다. 병오에 강안전에 행차하여 세자에 전위하고 장□룡의 집에 퇴거하여 덕자궁이라 호하였다 세자가 강안전에서 즉위하니 이가 충선왕이다. 을묘에 덕자궁에 나아가 전을 받들어 존호를 올려 광문선덕태상왕이라 하였다 왕이 전국한 뒤 왕이 복위하기까지 무릇 7월인 바 충선왕 세가에 실려 있다. 추 8월 갑자에 원이 패노올를 보내와 충선의 팔조를 재촉하거늘 신미에 충선왕이 원에 가는데 임신에 왕이 김교에서 전송하더니 술이 취하매 패노올이 제명으로써 국왕의 인을 취하여 왕에게 주었다. 계유에 왕이 패노올의 사관에 갈제 의위를 갖추고 드디어 수녕궁에 행차하여 조서를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 [전고려국왕 왕거에게 유시라노라 전일에 경이 세자 원에게 수위하기를  표청하므로 이로 써 원에게 조하여 가서 왕작을 잇게 하고 국사는 그대로 경의 훈도를 듣도록 명하였더니 이제 듣건대 리정한 뒤로 자못 전천하여 처결이 마땅함을 잃어 중심이 의구한다 하니 대개 나이 아직 장성하지 못하고 경련이 적으므로 능히 짐의 친임한 뜻을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에게 조하여 전과 같이 국정을 통리케 하고 또 원에게 조하여 궐정에 입시하여 하여금 일을 명습케 하노라]고 하였다. 패노올의 온 것이 10일이나 되었지만 국인은 이 조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갑수에 좌부승지 권영과 우사의 조간과 총랑 김태현과 전사간 김호로 하여금 선법을 주재케 하였다. 기묘에 패노올이 돌아가거늘 대장군 강순의 딸로써 처를 삼아주었다. 갑신에 명순궁에 이어하였다. 9월 병신에 원이 평장 활활출과 좌승 합산을 보내와 입으로 성지를 선포하여 이르기를 [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왕이 홀로 처하여 무료할 것이라 하여 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사하고 또 우리들로 하여금 힘께 국사를 의논하라 하였나이다]고 하였다. 중원후 온과 대장군 김천석을 원에 보내어 복위한 것을 사하고 표에 이르기를 [이에 선조로부터 진력하였고 또 성제 당하여 충성을 다하였더니 전자(낭)에 농이129)가 문득 조락되므로 인하여 장차 후(노쇠의 뜻)주가 보전하기 어려움을 생각하여 슬픈 정이 지극하고 우기가 화를 손상하였나이다 다행이 유□자가 있어 이미 관하였고 바야흐로 처음 공주에게 장가들었으니 어찌 잔년의 중부를 아껴서 일찌기 글을 올리지 아니하리까 하고자 하는 바를 좇으라는 윤허를 얻었으니 다시 신양130)에 추은함을 느꼈아온데 이제 신의 아들 원에게 조하여 천정에 입시케 하고 신으로 하여금 전과 같이 국정을 통리케 하니 이에 □서의 유시한 것을 보매 가히 가훈의 무량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일찌기 이로써 신을 책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예와 같이  국사를 지키게 하시었나이다] 라고 하였다. 정해로 우상부를 삼고 오인영으로 군부판서를 삼고 유욱로 부지밀직사사를 삼고 홍선 황원길로 삼사좌우사를 삼고 홍자한으로 밀직사지신사를 삼고 이영주로 군부판서 응양군상장군을 삼고 김순 송진로 좌우승지를 삼고 류거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동 10월 갑수에 윤선으로 서북면도지휘사를 삼았다. 을해에 심주 달로화적 도리대가 사람을 보내어 마 1필과 양 30두를 바치어 복위를 축하하였다. 경진에 백정궁에 이어하였다. 11월 갑신 삭에 장군 이백초를 원에 보내어 탐라의 우육을 바쳤다. 병수에 활활출이 돌아가거늘 왕이 선의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임진에 친히 소재도장을 외원에 설하였다. 무신에 재추가 왕을 향연하였다. 경수에 김혼으로 첨의중찬을 삼아 잉하여 치사케 하고 송분으로 첨의부랑 찬성사 판감찰사사를 삼고 한희유로 찬성사 판판도사사를 삼고 원관으로 지밀직사사 판도판서를 김변로 동지밀직사사를 설경성 김부윤 김순로 모두 밀직사사를 삼고 장석으로 좌승지를 삼았다. 12월 병진에 송분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무오에 이죄이하를 유사하였다. 행성이 장군 송방영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기사에 김심으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계유에 좌사간을 추적을 하옥하였다. 갑수에 혜성이 남방에 나타났다. 경진에 관제를 복구하였다.

을해 25년 춘 정월 임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외원에 행차하여 장경도장을 설하였다. 정유에 만호 인후와 김흔과 밀직 원경 등이 자의로 군사를 발하여 만호 한희유 상장군 이영주를 잡아서 모반을 한다고 무고하거늘 무수에 왕이 좌승 합산으로 더불어 희유 등을 흥국사에서 국문하니 영주는 무복하고 희유는 마침내 불복하였다. 계묘에 세조의 기일이므로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인후 김흔 원경이 희유의 불복으로 원에 가서 제에게 소하려 하니 왕이 그것을 만류하였으나 좇지 아니하였다. 2월 무오에 합산이 돌아갔다 원이 한희유 이영주를 해도에 류배하였다. 무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임오 삭에 서북면에 도지휘사 윤선과 밀직부사 민종유를 파면시켰다. 을유에 김부윤으로 서북면 도지휘사를 삼았다. 병수에 우사간 김태정을 순마소에 하옥하였다. 경인에 지도첨의사사 최유엄을 원에 보내어 황자 탄생을 축하하였다. 임진에 왕이 동교에서 사냥하고 드디어 수강궁에 행차하여 날마다 연악을 일삼아 창기에게 은 팔근을 사하고 또 두 은병으로써 과녁을 삼아 쏘아서 마치는 자에게 사하였다. 하 4월 신해 삭에 원이 공부상서 야선첩목아와 한림대제 고여단를 보내왔는데 조에 이르기를 [근일 봉사자가 회주하기를 본국의 배신 조인규 등의 소행이 불법함과 및 일이 전제를 준수하지 아니하여 마땅히 정□해야 할 것이 있다 하였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인규 등의 죄는 이미 중서성에 래하여 경중을 헤아려 결단해 보내게 하였다 이제부터 비롯하여 경은 그 수국의 규모를 준수하여 더욱 외천의 계를 근수토록 힘쓸지어다 무릇 관에 있는 자는 각각 그 일에 근면하여 광찬에 협력하고 전비를 밟아서 스스로 형헌을 범하지 말지며  □황131)과 사서는 각각 그 업에 안정할 것이다 □정할 바 사의는 후단에조열하노니 일은 선조가 이미 정한 관부 및 수의한 인원은 변갱하지 말고 중간에 자의로 스스로 변경한 것이 있거던 곧 개정을 할 것이요 일은 명관의 유죄는 모름지기 사정의 본말을 구비하여 문주할 것이요 문득 살육을 행하지 말 것이며 일은 봉사의 주설에 본국의 신서로써 일찌기 세자가 해도에 유□시킨 것과 및 단몰한 인수에는 죄가 없이 장종된 것이 있다 하니 왕국은 분련하여 심록하여 개정해야 할 것은 곧 개정토록 하라]고 하였다. 임자에 한희유와 이영주를 소환하였다. 정사에 판삼사사 정인경을 원에 보내어 인후의 무망을 변명하였다. 기미에 원이 탑해와 활활불화를 보내와 한희유 이영주 원경 및 판밀직 유자 도평의록사 송지□을  붙들어 데리고 돌아갔다. 5월 신사 삭에 장군 백효주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병수에 인후 이□ 원□ 정□ 원경 허평이 파면되었다. 정해에 판삼사사 정인경을 원에 보내어 사은하니 표에 이르기를 사화132)가 이르매(□지-래지) 문득 9원133)의 명륜(밝은 조서)이 전해지고 제덕이 패연하매 문득 일방의 감주가 되었나이다 기성을 살피매 송구한 느낌이 더욱 깊읍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다행히 천재의 조봉에 양조의 □우를 외람되이 입었나이다 백성은 못이 길어 고기가 유영하는 것과 같아서 오래 □린에 목욕하였고 나라는 나무가 늙어 좀이 나는 곳과 같아서 스스로 허물과 뉘우친(우회)을 부르게 되었나이다 액수가 다시 량덕에 겹쳤으며 예언이 일찌기 단총134)에 미쳤나이다 비록 산해와 같은 관용이라 하여도 오히려 뇌정과 같은 일로를 두려워하나이다 어찌 창궁보다도 먼 곳에서 사정을 곡진하게 살피시와 적자의 무지로 하여금 도리어 애육을 입게 될 줄을 알았아오리까 이미 법언을 나열하여 계를 내리시니 인하여 한호135)를 베풀어 써 하반를 세척케 하셨나이다. 자손에게 전하는 보훈이 정령하매 거국의 환성이 양일하나이다 이것은 대저 탕의 창미를 법받고 순의 호생을 체득함을 만나(우) 적은 것을 사랑하는 인을 가하시고 황예136)를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와 무□한 것이 혹시나 억울하게 될까 두려워 하여 차라리 떳떳치 못한데 실수하려 하심이외다 신이 감히 공경히 신료들을 거느리고 직무를 닦아(술) 거의 천심에 응부라고 길이 □속을 편히 하여 써 정성을 피력하와 성수의 연장을 축원하지 아니하오리까]라고 하였다. 계사에 이죄이하를 유사하였다. 경자에 안평공주의 대상로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추 7월 을미에 장군 김유로 경상 전라 양광 3도의 채방사를 삼았다. 정미에 밀직사 유□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8월 기유 삭에 일식하였다. 정사에 수강궁에 이어하였다. 병인에 밀직사사 류비가 도망하였다. 9월 기묘 삭에 대장군 민보를 원에 보내어 □를 바쳤다. 병수에 감찰사 채우를 해도에 유배하였다. 기해에 송#(빈)으로 감수국사를 안향으로 수국사를 민지로 동수국사를 삼고 차신과 최유□ 류비 오인영 유복화 홍선를 파면하였다. 병오에 허평의 집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갑자에 원이 활이길사를 보내어 정동행중서성 평장사를 삼고 야율희일로 좌승을 삼았는데 그때에 합산이 돌아가서 아뢰기를 [왕이 능히 그 중인을 복어하지 못하니 조정이 마땅히 관을 보내어 함께 다스려야 한다]하므로 제가 이를 좇은 것이다. 병인 에 왕이 정동성에서 시사하였다. 이달에 행성을 증치한 것으로 써 표를 올려 진정하기를 [소방의 누세로 근왕하는 공이 무릇 80여년으로 해마다 직공을 닦았고 신이 일찌기 세자로써 입부하여 제실에 연혼함을 얻어 드디어 □□가 되었으니 실로 지은을 느끼거니와 소국으로 하여금 조풍을 바꾸지 않고 길이 후직을 닦도록 함이 소망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 경진에 지도첨의사사 송#(빈)이 퇴관하기를 빌었다. 을유에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온천에 행차하였다. 12월 무신 삭에 장군 이백초를 원에 인삼과 □육을 바쳤다. 갑인에 찬성사 정인경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경자 16년 춘 정월 신묘에 원이 활활불화를 보내와 황후를 책봉한 조서를 반포하였다. 이달에 홍자번으로 판중군사를 삼았다. 2월 경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수에 이□궁에 행차하였다. 오인영으로 지밀직사사 전리판서를 유복화로 동지밀직사사 판도판서를 홍선으로 밀직부사를 삼았다. 3월 경진에 왕이 병환이 있어 제안궁에 이어하였다. 경인에 수영궁에 이어하였다. 하 4월 경수에 동지밀직사사 #(벽)경성을 원에 보내어 황태후상을 조하였다. 무오에 왕이 원에 행차하여 조상하였다. 이달에 민훤으로 도첨의참리를 이첩로 지도첨의사사를 삼았다. 5월 신축에 승 천고란 사람이 있어 괴어를 와구의 배에 주서하여 혜숙사 석탑밑에 묻어놓고 조금 있다가 스스로 파서 말하기를 [이 거북이 심히 신이하다]하여 써 중인을 현혹케하거늘 활리길사가 잡아서 장형하고 또 동경 유수 나윤이 금리를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요술을 믿으므로 행성에 가두었다. 임인에 상장군 고세를 원에 보내어 동녀를 바쳤다. 6월 임자에 왕이 상도에 이르러 제를 직(종의 정자)전서 알현하고 잉하여 방물을 바치니 제가 크게 지손연137)을 설하는데 지손은 화언에 [안색]이란 말로서 연회에 나아가는 자는 의관을 다 일색으로 하는 것이다 제가 왕에게 명하여 시연케 하였는데 왕은 제왕과 부마의 좌차에서 제사로 총□이 특이하였다. 무진에 왕이 양 200두와 주 200□로 써 제께  상수하고 기사에 또 궐에 나아가 부두연138)을 설하였는데 제가 고려가를 부르라 명하거늘 왕이 대장군 송방영 송영 등으로 쌍연곡139)을 부르게 하였는데 전왕(충선왕)은 단판140)을 잡고 왕은 기무하여 수를 올리니 제가 후로 더불어 기뻐하였다. 계유에 왕이 태후빈전에 제하였다. 추 7월 갑수 삭에 제가 사람을 시켜 왕에게 래하기를 [무릇 말할 바가 있거든 곧 문주하라] 하였다. 을해에 왕이 궐에 나아가서 동녀 2인과 엄견 3인을 바치고 또 동녀 1인으로써 승상 완택에게 보내었다. 정축에 왕이 시연하니 제가 황태자의 천추절141)이므로 인후와 김흔 등을 사하였다. 신사에 제가 우승상 완택에게 명하여 지를 전하여 이르기를 [고려국왕의 주한 바 풍속 백사는 하여금 구속에 따를 것을 허한다]고 하였다. 임오에 제가 왕에게 궁실와 해청과 요자 및 금□ 2구를 사하고 계미에 또 왕의 종신에게 김가표 리 각 330필과 궁검 각 30 □ 20을 사하였다. 을유에 황후가 왕에게 의 삼습을 사하였다. 임진에 왕이 상도를 출발하였다. 무수에 우중찬 송#(빈)에게 추성찬화안사공신의 호를 사하였다. 신축에 벽영임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송화로 밀직부사를 삼고 곽□로 군박판서를 삼고 송방영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8월 무오에 상락공 김방경이 졸하였다. 계해에 부지밀직사사 홍자한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김연수로 밀직부사를 삼았다. 윤월 경진에 왕이 김교에 이르러 송분에게 범장을 사하였다. 신사에 왕이 원으로부터 이르렀다. 을유에 제안궁에 이어하였다. 병수에 활리길사가 왕을 향연하였다. 정해에 한희유 이영주 류비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왕이 입조하여 곡직을 변하였기 때문에 희유를 놓아 돌려보낸 것이다. 경자에 오기로 밀직사 지신사 지감찰사사를 삼았다. 9월 임인 삭에 장군 민구를 원에 보내어 요를 바쳤다. 갑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평양공현이 졸하였다. 신미에 이자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승휴가 졸하였다. 정유에 왕이 활리길사로 더불어 서교에서 사냥하였다. 이달에 활리길사가 본국 노비의 법을 개혁코자 하거늘 왕이 표를 올리기를 [단총이 겸청하셔 말(언) 내림이 륜과 같고 대호(큰호령)가 이미 펴지니 세가 반한142)할 길 없아오나 오히려 신명에 기대를 두어 능히 재소하기를 마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무릇 우리 강토에 속한 것은 실로 타속이 아니온데 양(양민)이라 천(천민)이라 하는 것이 무슨 증과 애의 힘이 치우침이 있아오리까 그 신중히 하고 그 중난스럽게 하는 것은 이에 안위가 매었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우리 시조가 후사자손에게 □계하여 이르기를 무릇 이 천류는 그 종자가 분별이 있으니 삼가 이 류로 하여금 종량케 하지 말라 만일 종량을 허하면 뒤에 반드시 사로를 통하게 되어 점점 요직을 구하여 국가를 모란할것이니 만일 이 계훈을 어기면 사직이 위태하리라 하였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소방의 법에는 그 팔세 호적이 천유에 관계되지 아니한 연후에야 이에 협사를 얻게 되며 무릇 천류가 됨은 부나 모가 한편이 천류이면 곧 천인이 되는 것으로 비록 그 본주가 놓아주어 양민이 되더라도 그 소생자손에 있어서는 문득 도로 천민이 되는 것이며 또 그 본주가 계사가 끊어지더라도 또한 동종에 속케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끝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혹 도탈하여 양민이 될가 염려하여 절절하게 기미를 방지하고 조짐을 막아도 또한 많이 틈을 타서 간계를 발하여 혹은 세에 인하고 공에 의탁하여 위복을 천작하고 국가를 모란하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도 있으니 더욱 조훈의 위배하기 어려운 것을 알되 오히려 간정을 막지 못할까 두려워 하나이다 하물며 또 만일 이 법을 고치면 한갖 난사를 다스리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인하여 구장까지 잃어 겨우 유서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원 7년에 소방이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나올떄 선제가 달로화적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떄에 사람의 고장으로 인하여 이 법을 변경코자 하거늘 석논로 봉달하매 정의가 명단하여 국속을 좇도록 하니 여러 간인이 엿보는 뜻을 끊게 되어 금일에 이르렀나이다 이제 성관이 처음으로 이 나라에 임하여 제법한 뜻을 살피지아니하고 반드시 변경코자 하므로 신이 금하에 입근하였을 떄 갖추어 모두 표주하와 엎드려 윤허를 입었는데 이제 성지를 받들매 양천사의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결정을 받게 하니 신은 이미 저와 같은 말씀을 받자왔는데 도리어 이와같은 지가 있으니 비록 깊이 황구하오나 또 그윽히 생각하건대 이미 조상의 풍속은 시비를 묻지 말고 잉구할 것을 허하시었는데 어찌 천류만 반드시 가부를 논하여 써 경신하여야 하겠나이까 아마 □설의 분운으로 인하여 그 융세한 것을 구명코자 하려는 것이므로 □독함을 잊어버리고 우양를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데 높이143) 뜬 해(게일)의 광명을 돌려서 동운의 우악에 젖도록 선명을 좇게 하여 주셔야만 이에 후간이 없게 되리니 물은 군으로 나누어 풍토를 변경하는 영이 해소될 것이며 나라는 길이 보전되어 건곤종시의 은을 누리겠나이다?라고 하였다. 11월 계묘에 활리길사를 수영궁에서 향연하였다. 대장군 이백초를 원에 보내어 인삼과 우육을 바쳤다. 정미에 활리길사가 돌아가거늘 왕이 선의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경신에 찬성사 최유□을 원에 보냈다. 신유에 외원에 행차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병인에 행성이 원외랑 이희실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이달에 왕이 표를 올려 말하기를 ?동엽144)을 따서 □언을 하여도 오히려 봉토의 은혜를 입게 되었고 륜음이 내림이 애심에서 말미암았음에 어찌 태산과 같은 판단에 의하지 아니하오리오 다만 중의에 따라서 다시 □총을 번독하나이다 소국이 대국에 의존함을 생각할 떄 고아가 그 자모를 우러러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가언의 등문은 없고 동하면 문득 허물을 부르거늘 매양 후권을 더하여 써 금곡용하시니 하고자 하는 것을 좇도록 힘쓰게 되나이다 다행히 스스로 목석과 다르(수)오니 어찌 건곤에 감사를 아니하오리까 전일에 망동하는 난신을 금하지 못하여 신은 우성을 명주꼐 밟혀 드리고자 하와 전세에 루세의 충근을 구진하고 인하여 선조를 들어서 아울러 수조의 모훈을 술록한 것입니다 이해에 하성절사인 배신 류□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암도척 평장 등이 대덕 3년 9월 26일에 성지를 주봉하되 성관을 첨설하는 것은 그 국속을 고치라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항구히 두려는 것도 아니라 다만 일이악 인의 사고로써 백성이 소요한다고 들리 듯하므로 장차 왕으로 더불어 작반하여 진안케 한 것이다 왕이 이제 짐의 뜻을 알지 못하거든 가히 문초으로써 구실하여 아뢴 연후에 답을 내려 짐의 뜻을 밝게 알도록 하겠다고 하니 신이 공손히 이말을 들으매 기쁨이 갱생한 것과 같습니다 륜음 내리는 것이 때를 어기지 아니하리라 하여 일야로 그 사신 오기를 기다렸고 신도 또한 천정에 조근한지 해가 오래 되어 련첨하기를 이기지 못하와 이에 금춘에 입조하기를 간청하여 성자의 윤허를 복몽하고 □사하여 길에 올라 이미 궐정에 부하여 전추의 구진한 바를 주달하기 위와 같았으나 다만 명령있는 것만을 듣고 밟은 조서를 내릴 뜻은 승봉치 못하였읍니다 대덕 4년 7월 초8일에 구전한 성지를 복몽하온 바 또한 전추의 명령과 같으니 신이 일찌기 청천의 보기 어려운 것을 영하다가 백일을 가까이 보게 되어 바야흐로 기뻐하였으며 길이 담담145)의 노래를 읊고 여러번 염염의 주음을 더럽혔읍니다 오랫동안 은혜를 □□(경)에 탐하매 문득 귀기가 절박하여 본래 받고자 하는 것이 새서인데 또한 유대하기가 어려웠읍니다 비정의 절원을 이루지 못하니 마치 좋은 꿈을 회고하는 것과 같아서 공연히 차원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재진의 금성을 이어 드리우(수)사 곧 1봉의 륜음을 내리시면 백세 운래146)의 보를 삼아서 길이 서로 전하여 3한 초매(창세)의 공을 면면히 떨어뜨리지 아니할 것이며 모든 정성이 비는 바에 만수가 무기하리라]라 하고 또 중서성에 이서하기를 [소방이 인비를 두텁게 입어 혈유(잔민)를 보전함을 얻었읍니다 지난 여름의 친조하할 때에 성지를 복몽하와 본국의 원경 등 9인으로써 다 나에게 위임한 것을 각하도 함께 명지한 바인데 9인이 이제에 이르도록 무고히 연유되어 하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니 어찌 위명함이 이토록 많으리오 오직 첨조하여 돌려보내기를 독촉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구예를 비추어 보건대 자래로 구양147)은 종류가 각각 달라서 만일 양인이 노비에 가간한 자가 있더라도 그 소생한 아녀는 함께 노비가 되는 것이오 만일 본주가 방허하여  양민이 되더라도 소생한 아녀는 문득 도로 천인이 되는 것이라 작 지원 8년에 본국 달노화적 □문아 본국의 체례를 고치고저 정봉한 일이 있었으나 지원 9년 정월 초8일에 이르러 성의 연사(속관) 주승이 행중서성의 답을 해도성에 부쳐서 상의하고 고려왕의 말에 좇아서 본속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이로써 본국의 구양공사는 다만 본속의 구례에 의하여 리단되어 도금토록 일찌기 개례하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정동성관이 있어 본속 체례를 고치고자 하므로 이를 위하여 이미 금년 6월에 친히 상도에 나아가 표를 올려 문주한 바 대덕 4년 7월 초8일에 도성이 당직의 원인관원을 불러 성회 주과한 사내의 1건으로 노비를 관장하는 것은 본국의 체례에 의하여 행하라는 성지이었으니 침전(침비)하라고 하였다 이어 달리 하는 것이니 어떻게 활리길사로 더불어 매양 말이 귀 일치 않고 각각 달라 일종의 취사를 달리 하는 것이니 어떻게 주달하여야 할 것인가 성지를 받들었는 바 동간에 왕이 장차 사람을 보낸다 하는데 귀측에서는 무슨 좋은 론의가 그 동안에 있었는지 그것은 그것이고 왕의 주달한 말씀은 그에 의하여 하라 하시므로 흠전한다는 계청조험의 일인 바 이 조회를 대조해 보면 전자 도성의 성회와 조금 같지 아니한 것이 있으므로 이제 관원을 보내어 다시 표를 가지고 나아가 진정토록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도성은 잘 주달하여 구예에 의하여 습속을 살펴 시행토록 하라 만일 준허를 입지(몽) 못하여 반드시 구례를 변개하여야 한다면 이미 전년의 것으로서 성혼되어 출생된 아녀는 구예에 의하여 주좌케 하는 이외에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모든 노비는 가간에 양인을 초점하여 섞어서 부부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쟁경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일일 듯하다 그러나 이는 도성에 계품하여 자세히 조하여 의정하여야 할 일인 것이니 명문으로 회시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한희유로 도첨의시랑 찬성사 판군박사사를 김지숙으로 도첨의찬성사 판감찰사사를 최유엄으로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를 김부윤으로 지밀직사사 전리판서를 삼았다. 이영주로 밀직부사 군박판서를 황원길 윤만비로 3사 좌우사를 삼고 유□로 군박판서를 삼았다. 12월 갑수에 부지밀직사사 이영주를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무인에 평주온천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원이 백안홀독불화를 보내어 향 15근과 필단 20필 견 300필 초 864정으로써 장경을 전독하였다. 병신에 송화로 서북면도지휘사를 삼았다. 을해에 왕이 백안홀독불화로 더불어 묘련사에 행차하여 장경을 전독하였다. 경자에 자운사에 행차하여 장경을 전독하였다.


신축 이십칠년 춘 정월 갑진에 왕이 원의 사신으로 더불어 흥왕사에 행차하여 장경을 전독하였다. 병진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묘련사에 행차하여 황제를 위하여 축리148)하고 제로의 행성이하관도 모두 정월 삭망에 행향하니 축리는 대개 원조의 예이었다. 기미에 안서왕 아난달이 사신을 보내어 동녀를 구하거늘 한손수의 딸을 가게 하였다. 임술에 왕이 선제의 기일이므로 묘련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갑자에 야율희일이 왕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을축에 왕이 행성관리와 군신을 거느리고 묘련사에 행차하니 제의 성갑일149)을 위하여 축수함이었다. 기사에 야율희일이 왕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경오에 왕이 전왕의 공주 탄일이므로 수녕궁에서 잔치하였다. 이월 계유에 탈탈대왕이 사람을 보내와 해청150) 이핵를 바치고 인하여 동녀를 구하였다. 정축에 야율희일이 문묘에 배알하고 제생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경진에 황태후의 기일이므로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서흥후 전을 보내어 원에 입시케 하였다. 경자에 왕이 불예(병환)하였다. 삼월 임인에 노□수의 집에 이어하였다. 원이 행성평장 활리길사가 능히 인민들을 화집치 못함으로써 이를 파면하니 활리길사가 관속을 거느리고 돌아갔다. 중랑장 박홍은 통사(통역)로서 활리길사의 심복이 되어 위엄을 빌리고 은혜를 팔아 뇌물을 많이 받더니 활리길사를 따라 원에 가서 국가의 풍속을 변하도록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계묘에 이백초가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왕에게 저폐 일만정을 사하거늘 사신을 보내어 표사하였다. 원이 탐라(제주)에 군민만호부를 설치하였다. 하 사월 신미에 첨의참리 김변이 졸하였다. 기축에 원이 산동 동서도선위사 탑찰아와 형부상서 왕태형을 보내어 조하기를 「향자에 그대 나라가 스스로 불안을 지음(작)으로 평장정사 활리길사 등을 보낸 것은 림시로 왕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게 하여 써 진알하려 함이었고 오래 그곳에서 유임시키코자 함이 아니었으므로 이제 모두 명하여 귀조케 한 것이다. 그러나 활리길사 등이 말하는 바로는 그대 나라에서 예를 벗어나고 벌을 함부로 하며 관리가 많아 민폐가 되는 여러가지 일이 있다 하므로 중서성에서 따로이 공문의 이첩이 있을 것이다 보내온 표문에 조종의 구법을 변경치 않을 것을 빌었는 바 짐이 생각컨대 선조 때에 본국(고려) 관호가 조정의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은 이미 일찌기 개정하였으니 왕도 이때에 곧 마땅히 이것을 류추하여 일이 만일 의리에 해로우면 고치는 것도 또한 무엇이 어려우랴 이제 탑찰아 등을 보내어 조를 가지고 가서 유시케 하노니 왕은 힘써 루조의 복육151)하는 은혜를 생각(사)하고 종국(고려)의 생영을 생각(념)할 것이다 위복152)과 여탈이 마땅히 자기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니 사체에 미편함이 있거나 민정에 미안한 것이 있거던 잘 살펴서 도모할 것이며 너희 군료들도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바르게 하여 각각 자기 직무를 근수할지어다 감히 전비를 도습하여 불법을 전자하는 자가 있으면 왕은 비록 너희들을 용납할지라도 짐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성(중서성)의 이첩한 사리에 의거하여 정리개혁이 이미 정하여졌거던 관원을 차출하여 가는 사신과 함께 와서 아뢰도록 하라」하였고 중서성의 이자에는 말하기를 「왕의 근자의 표주에 성(행성)관을 증치함이 백성을 불안케 한다는 것과 및 조풍을 고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등사는 이미 반강한 조서가 있어 관을 시켜 본국에 가져가게 하였으니 개독할 것이오 활리길사 등관의 구언한 바 국중의 불편한 여러가지 일은 사목을 록연한 것이 앞에 있고 도성이 론의한 구량153)의 일은 또한 본국의 구속으로써 말을 하니 이것은 오히려 말할 수 있으나 왕국으로서 천자의 전정의 예를 쓰는데 이르러서는 이미 신복한 처음에 곧 마땅히 론난되었어야 할 것인데 옛날에는 혹 살피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자금으로는 마땅히 곧 고쳐야 할 것이오 그 나머지 민막으로서 가히 제거하여야 할 것이라던지 사폐로서 고쳐야 할 것은 마땅히 조지에서 왕을 유시한 뜻을 체득하여 일일이 의정하고 인하여 가는 사신으로 하여금 다 알도록 하고 왕은 수행을 마치거던 자세히 이첩을 보내와 아뢰는 데에 빙거가 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록연사일에는 「활리길사 등의 말에 대덕삼년154) 십월에 행성을 설치한 이래로 별로 전량을 출납한 것은 없고 다만 구량공사를 보고하였을 뿐이니 마땅히 통행체례에 의하여 귀단할 것이며 또 대덕 삼년 십일월 십오일과 대덕 사년 이월 십오일에 국왕의 이차 대회를 목도하였는 바 또한 세번 정편155)을 들어 산호156)만세를 부름이 한결같이 천자의 의제와 같으니 이러한 찬월한 일이 있었고 또 본국의 형벌이 알맞지 아니하여 사람이 고발하면 무슨 공사든지 증좌를 묻지 않고 다만 원고에만 빙거하여 세번 물어 불지(초) 아니하면 물을 것 없이 해도에 류배시키고 사를 만나도 모두 방환시키지 않으니 형옥의 광람함은 이 한일만 보아도 나머지를 다 볼 수 있으며 또 본국 왕경 안팎의 제사 아문과 주현 총 삼백오십팔처에 설관한 것이 대소가 사천삼백오십오원이나 되니 백성을 정치157)하는 데에(각삭어민) 심히 용람한 것이며 그 위에 부역이 잦고 겹쳐 조금이라도 앞서 하지 않으면 결박하여 잔학하게 하니 고통을 참고 원한을 머금고도 신원할 수가 없도다 성곽 주현이 헛되이 그 이름만 있어 백성은 적고 관리가 많은데 관민관과 안렴관이 반년에 일차씩 교대하매 본처 백성으로 하여금 우마와 로비 등물을 스스로 마련하여 신구관원을 송영케 하니 도로에 왕래가 잦음이 베짜는 것과 같아(여직) 농사를 방해하고 물건을 해치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도다 또 본래 세운 참적(역)이 매처에 삼사십호나 되었는데 근년에는 공문 이첩의 문빙 유무를 불문하고 모두 일마(역마)를 타며 왕의 근시같은 자가 나가게 되면 곧 이삼십필을 일으키고 여지는 고하를 헤아려 각각 등차를 두며 겸하여 소관하는 관사들이 여러 방법으로 과요158)하니 이로인하여 (역호가) 도산되어 셋에 하나 꼴로 남았으나 그 수를 보충치 않으니 심히 감당159)(생수)하기가 어려운데 이르렀고 또 본국에는 수십년을 지내도 일찍 부역을 가하지 않아서 그 타에 비하면 우휼함이 심히 컸었는데 근자에 권신의 소행이 불법한 까닭에 백성이 곤폐케 되었는 바 그 나머지 사리는 일일이 진거키 어렵도다」라고 하였다. 오월 갑진에 야율희일이 돌아갔는데 희일이 국왕에게 백성 다스리는 술을 깨우쳐 주고 재보에게는 우국의 일을 책하였다 일찌기 국학의 전우가 좁고 추하여 심히 반궁160)의 제도를 잃었음으로 왕에게 말하였던 바 드디어 문묘를 새롭게 하여 유풍을 진작하였다. 병오에 내외의 관직을 합하고 덜었으며 그 관명이 상국과 같은 것은 모두 고쳤다. 경술에 지도첨의사사민훤을 원에 보내어 보탑실영공주의 개가할 것을 청하니 표에 이르기를 「부상161)은 땅이 궁벽하나 오히려 제녀가 일찍 강가하였나이나 농이162)(제녀의 미칭)의 행차가 더디니 어찌 방인들의 한가지 사모함을 아뢰지 않으오리까 생각컨대 아국이 금일에 존재함을 얻은 것은 왕희가 일찌기 선조 때에 강가한 연유이온데 초목처럼 우거진(위유)163) 보음이 문득 거두어지매 그 중운의 부새함을 탄식하였더니 고운164) 방화(완련)가 이어(계) 이르매 마침내 난새치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 어찌 구소165)에 잠깐 돌아가서는 드디어 사년이나 머무르게 될 줄을 기하였아오리까 오랫동안 우의를 진술코자 하였으나 혹 신총166)에 거슬릴가 두려워 하였나이다 만약 항려167)가 화합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반드시 아손을 보기가 어려우며 차마 청춘으로 하여금 헛되이 늙게 하여 공연히 교월로 하여금 문득 부끄럽게 하오리까 사람의 말로는 가히 할 수가 없으나 일을 꾀함은 천명에 달린 것입니다 신은 생각컨대 그 배필을 고쳐 구함은 가림(간)이 제심에 있으니 천심이 곧 이 제심이요 제명이 또한 천명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탐라총관부를 파하여 본국에 예속시키고 만호부를 설치할 것을 청하는 표에 말하기를 「땅이 만약 적국에 린접하면 방비를 빈틈이 없이 할 것이오 하늘은 반드시 낮은 것을 듣는 것이니 요청할 것은 마땅히 들리(문)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조도의 힘을 의지하여 후회의 싹을 없앨까 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이 적은(최이) 탐라는 왜국에 접근하여 있으니 간인들이 문득 오고 문득 감으로 혹시나 사정이 누설될가 두려워 하여 술졸로 하여금 경계를 엄히 하고 장비를 가다듬게 하여 엿봄을 허용치 아니할 것입니다 이에 소재의 군관에게 일러 장수가 되게 하고 마땅히 선령을 가하여써 위엄을 펼 것입니다 전자에 신이 건의하려 한 바 군민도지휘사사를 설립하는 것은 상국이 일찍 이 명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한갖 본국의 구례에 무릇 대관이 변경에 출진하는 자에게는 지휘사의 이름을 띠게 하는 것이므로 이 이름에 선명(선조)과 호부를 가수함을 합포진변사와 같이 하고자 하였을 뿐이었나이다 지금 중서성자를 받자온바 주청하여 탐라군민총관부를 설립하려 하니 사세가 크게 틀림이 있고 일이 본래의 소망이 아니오니 혹시나 편리함을 좆을 것을 허하여 고집하지 말고 그저 시설하는 바에 실수(실)가 없게 하시와 탐라총관부를 파하시고 이전대로 본국에 예속시켜 만호부를 개치케 하여 합포진변의 일과 같이 하되 다만 두목인원에게 선명과 호부168)를 반강하여 위엄을 더하여 진압케 하시면 비컨대 털이 껍질 있음과 같아서 그 부칠 바를 얻을 것이오 또 팔이 손가락을 씀과 같아서 움직임이 마땅치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홀자알 등이 전민을 탈점한 것을 모두 본주인에게 돌려 주어 써 원왕을 풀게 할 것을 청하는 표에 말하기를 「천지는 도량이 넉넉하여 형극을 겸용하오나 병앵(병과 항아리)은 그릇이 좁아서 치수169)를 분별하기를 요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은 마침 소국의 쇠위함을 만나니 더욱 성조의 긍휼을 받자왔는데 근자에 화가 와각170)에 얽혀 주인을 짓는 삽살개에 견딜 수 없고 송사는 서아171)를 처결하매 사람172)을 의지하는 새를 차마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불인의인지조) 오히려 거괴를 잡아 후인을 경계할 것이오 모두 여당으로 하여금 본래(원)에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본국 난신의 괴수 홀자알 등의 지은 바 간계는 이미 명백하와 한갖 그 국가를(본국) 요란케 하여 하늘을 속이고자 함이니 또한 죄가 죽여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호생의 덕을 힘입어 머리(수령)를 획보하였으되 아직 족함을 알지 못하고 인하여 조지를 받아 본국에 있는 전원과 노비(장획)를 수취코자 하나이다 또 일찍 교부(분부)하여 본국에 돌아가게하신 강수 등도 역시 배회하며 돌아오지 않고 지금에 이르니 의리에 심히 어긋나므로 이 일은 모름지기 신문하여야 할 바입니다 홀자알 등과 같은 자는 본시 단신으로 이곳에 왔으니 일찌기 어찌 한 물건인들 가짐이 있아오리까 지금 가진 바 자산은 다 빼앗고(침어) 뇌물 받은 것이며 소유한 전민도 많이 강제로 삼키고(탄) 세력으로 빼앗은 것이오매 그 중에는 또한 신이 준 것도 있는 바 역시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거짓 고하였기 때문에 준 것이오며 금흔의 전민과 같은 것도 또한 그에 버금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찌 이미 그 나라를 버리고 갔는데 그대로 그 전지를 먹으며(식) 또 그 백성을 취하는 자가 있아오리까 하물며 그 피탈된 백성의 원왕이 적지않으니 또한 차마 볼 바가 아닌 것입니다 이를 가히 참을 수 있으면 무엇으로써 악을 징계하며 무엇으로써 선을 권하리까 간적으로 하여금 모사케 함은 또한 성세의 싫어하는 바이오니 복망컨대 폐하는 새지 않는 그물을 펴고 무사의 문을 열어 그 홀자알 등의 소점한 전민을 공도로 추명하기를 허하시와 평민의 원왕이 맺쳐 있지 않게 하시며 드디어 마땅히 줄 것은 주고 가히 돌릴 것은 돌려서 다시 배회하면서 돌아가지 않는 무리로 하여금 교부에 관한 엄한 령을 어기지 말게 하면 곧 이미 성택을 입어 조고의 유풍을 보전케 될 것이며 또 황위에 의지하여 다시 군신의 분을 바르게 할 것이니 그 감축함을 어찌 가히 부선하겠나이까」라고 하였다. 중서성 이자에 대략 말하기를 「정동성이 경상 전라도 진변만호부의 예에 의하여 탐라에도 만호부를 설립하고자 하는 일은 성지를 받들어 가히 소청한데 의할 것이라」하였고 그 공주의 개가를 청하는 표문은 민훤이 감히 올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무진에 노승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상도 안동지계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록과 조작이 혹 맞아 죽은 것이 있으며 우박 1개를 수인이 능히 들지 못하였다. 6월 계사에 전민변정사를 두었다. 추 7월 병오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홀지의 각번과 재추의 방고 중방이 날(일)을 번갈아 왕을 향연하였다. 시랑찬성사 한희유 찬성사 최유엄 동지밀직사사 송화 김태현 밀직부사 김연수 지신사 오기 좌승지 송방영 등에게 명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일을 의론하여 아뢰게 하였다. 찬성사로 치사한 임익이 졸하였다. 을축에 밀직부사 김태현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찬성사로 치사한 이덕손이 졸하였다. 8월 기사에 행성에 명하여 한희유 송분을 장(형)케 하였다. 무인에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신사에 중추연을 수강궁에서 설하였다. 임오에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병술에 찬성사로 치사한 최수황이 졸하였다. 무자에 강남상객이 왕을 수강궁에서 향연하였다. 기축에 왕이 환궁코자 하니 모든 폐행(총애 받는 자)이 진언하기를 「전월에 야록이 성내에 들어왔고 이제 또 혜성이 나타나니 마땅히 교에 머물러 재를 가실 것입니다」고 하였다 무릇 왕이 출유하면 폐행들이 더욱 방자케 됨으로 짐짓 재이 피할것을 칭탁하고 왕에게 유련하기를 근함이 이와 같았다. 을미에 왕이 수강궁으로부터 장선의 집에 입어하였다. 혜성이 상태173)에 나타나서 천시원174)으로 들어갔다. 병신에 원의 중서성 이문에 말하기를 「대장군 김천석이 간사하고 흉회(사곡)하여 왕의 부자를 이간하니 마땅히 향리로 방환케 하라」고 하였다. 동계에는 정월로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이달에까지 이르렀다. 9월 정유 삭에 외원에 행차하여 성변기양법회를 설하였다. 기해에 경상도 안렴 주인원으로 그 도의 권농사를 겸하게 하였다. 계묘에 혜성이 천시원에 나타나고 천구175)가 땅에 떨어졌다. 을사에 김장수가 원으로부터 돌아와서 제가 장차 북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신에 상호군 고세를 원에 보내어 조정할 것을 청하였다. 랑장 최연이 원으로부터 돌아와서 제가 이미 북정을 정지하였다고 말하니 재추들이 기뻐하여 백금 삼근을 주었다. 친히 용화회176)를 광명사에서 설하였다. 정사에 대호군 민보를 원에 보내어 요(새매)를 바쳤다. 동 10월 갑술에 제안궁에 이어하였다. 을유에 왕이 원에 갈새 은천에 이르니 고세가 돌아와 말하기를 제가 조하기를 입조치 말라 하였다 하므로 드디어 해주에 행차하였다. 11월 경자에 왕이 해주로부터 제안궁에 입어하였다. 무오에 상호군 강순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고 행성에서도 랑장 임선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경신에 왕이 남경에서 사냥하였다. 12월 병인 삭에 호군 최연을 원에 보내어 요를 바치고 사재군 정량은 소유(우양유를 다려 만든 기름)를 바치고 상호군 이백초는 인삼을 바쳤다. 임오에 남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임인 28년 춘 정월 임인에 외원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김연수가 원으로부터 돌아와서 진왕감마자의 훙거를 보고하였다. 무신에 전민변정도감에 명하여 활리길사가 결단한 바 노비로 량민이 된 자를 취적하여 본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임자에 중찬 홍자번에게 상아장을 사하였다. 신유에 밀직사 전승이 갑자기 졸하였다. 2월 을축 삭에 찬성사 류비를 원에 보내어 진왕의 상사를 조하였다. 계유에 수강궁에 행차하여 백좌도장을 설하였다. 무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설공검이 졸하였다. 경인에 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사하였다. 신묘에 광명사에 행차하여 용화회를 설하였다. 3월 을사에 묘련사에 행차하여 진왕을 위하여 추복하였다. 경술에 중찬으로 치사한 염승익이 관을 버리고 승이 되었다. 을묘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원이 종전군만호 발도를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하 4월 신미에 원이 별첩목아 등을 보내와 사경 승을 징발하였다. 계유에 최응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임인에 승 1천명을 수녕궁에서 공양하고 드디어 수강궁이 행차하였다. 계묘에 시부로써 친히 조광한 등 7인을 시취하고 각각 백금 3근과 마 1필을 사하니 광한 등은 전시문생이 되었음으로 이 사가 있었다. 병오에 황원길로 지도첨의사사를 왕유소로 밀직부사를 삼고 또 유소의 부 연으로 지도첨의사사를 삼아 치사케 하였다. 전중시사 김영좌가 해남관별감 김연의 백성을 침어(탈)하는 것을 논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폄하여 봉양부사가 되었다. 기유에 김연수로 전법판서를 삼고 조간으로 좌간의우승지를 삼고 박전으로 감찰대부를 삼고 신여계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6월 계해 삭에 일식하는데 비가 내리어 보이지 않았다. 병인에 환궁하였다. 왕이 수강궁에 행차하였을 때에 재추와 장군방 홀적 내방고 내료가 윤번으로 날마다 설연하더니 후에 상례가 되었다. 을해에 첨의참리 민지와 지밀직사사 김태현에게 명하여 급제 20인을 모아 하성절표 상승상국서 축성수불소로써 시하였던 바 백인수 복기 권운 김지 등이 연하여 합격하였으므로 모두 문한서령을 제수하였다. 김원상이 건백하여 국학박사를 시험하여 육경에 능통한 자에게는 질을 높일 것을 청하거늘 조간 정선 방우선 설초 등에 명하여 시험케 하였더니 응시자가 겨우 일이경만 통하는 고로 모두 서용되지 못하였다. 경진에 종실 순과 기로 함께 수성을 삼고 한희유에 가자하여 중대광을 삼고 곽응으로 감찰대부를 삼고 박전으로 전리판서를 삼고 고세로 삼사우사를 삼고 김문연으로 군부판서를 삼고 김□로 사관수찬관지내지에 보하고 김원상으로 비서윤 지감찰사사를 삼았다. 신묘에 중찬으로 치사한 김혼으로 첨의시랑찬성사를 삼았다. 추 7월 을미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송분으로 도첨의중찬을 삼고 거신으로 시랑찬성사를 삼고 유욱로 참리를 삼고 조간으로 밀직부사우상시를 삼고 왕유소로 좌상시를 삼고 강순으로 군부판서를 삼았다. 기유에 대장군 진량필을 원에 보내어 동녀를 바쳤다. 신해에 고세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세가 일찌기 (왕의) 입조를 청하려 원에 갔었던 바 마침 제가 기휘하는바 있음으로 주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병인에 고세로 밀직부사를 삼고 강순으로 삼사우사를 삼았다. 8월 임술 삭에 시랑찬성사로 치사한 채모가 졸하였다. 갑자에 지밀직사사 권영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경오에 행성이 왕을 향연하였다. 계미에 오기로 감찰대부를 삼았다. 갑신에 왕이 수비를 나려 지우공으로 권지우부승지를 삼았다. 을유에 원이 백도패라를 보내와 요(요양)심(심양)의 인물을 분간하였다. 병신에 찬성사 김혼이 왕을 향연하였다. 9월 정미에 제안궁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을축에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안평공주의 영당을 묘련사에 지었다. 을해에 밀직제학 정윤의로 서북면 도순문사를 삼았다. 신사에 한희유로 첨의중찬을 삼고 오기로 지도첨의사사를 김문연으로 감찰대부를 삼았다. 정해에 수강궁으로부터 제안궁에 입어하였다. 11월 임진에 수녕궁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동지밀직사사 유보로 합포(창원)에 출진케 하였다. 병진에 진량필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의 친조 하정하기를 명하였다. 정사에 안서왕 아난달이 사신을 보내와 해청(매)과 김가을 바쳤다. 기미에 안서왕의 사신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12월 경신 삭에 왕이 원에 갈새 제안공 숙을 명하여 정동성의 일을 림시로 서리하게 하였다. 임오에 찬성사 유비가 백도패라와 함께 원에 갔다. 이 해에 요양성이 제에게 주하여 정동과 요양을 병합하여 1성을 만들어 사를 동경(요양)에 옮기기를 청하니 왕이 상표하기를 「말을 비록 교하게 꾸미나 천(제)청에 미치면 반드시 밝아질 것이오 일이 만약 크게 어그러지면 어찌 풍문이라 하여 두려워 하지 아니하오리까 감히 애유(슬픈 하소연)를 높이 올리오니 바라건대 용납하옵소서 생각컨대 소방은 저 완민(일본을 가리킨 것)에 접하여 선조때에 있어서 이 행성을 세웠으니 마땅히 무위를 떨쳐 바다를 건너고 신료를 첨설할 것이며 뒤미쳐 문덕을 닦아서 무간177)함이 문득 구례와 같이하여 제도는 상작을 거쳐야 하며 다스림은 구안토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요양성이 상사에 이첩하여 요양 정동 양성을 혁파하고 합하여 일성을 삼아 동경에 둔다는 것이 들리는 듯하온 바 신이 그윽히 생각컨대 동경에서 왕경에 이르기까지가 일천오백여리요 왕경에서 합포까지가 일천사백여리인 바 만약 합포의 해외에 문득 조그만한(징파) 경계할 일(군사)이 있으면 보고 왕래할 틈이 천리라도 오히려 멀거늘 하물며 삼천리 밖이오리까 이것이 명분만 구하는 자에게는 혹 편할지 모르나 이것이 조정을 유익하게 하는 량계는 아니오니 어찌 섬인(간사한 사람)의 경솔한 의논을 좇아 갑자기 성조의 가모를 어기오리까 그러나 스스로 생각컨대 괵덕178)이 많이 박하오매 요인(요의 인덕)의 깊은 무휼에 용납되지 못할가 두려워 하나이다 그러므로 장차 진문하기를 급히 하려 하오나 다만 분비할 수가 없음을 한탄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태양같은 밝음을 돌리시와 원지의 폐를 고려하시고 능히 전전을 따라 편벽된 말을 들이(납)지 마옵소서 신은 삼가 마땅히 더욱 순을 떠바치는(대순) 정성을 굳건히 하여 배나 천수를 빌 것이오며 혹시나 정묘179)의 공적을 이루시면 조금이나마 황위를 도울가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또 중서성에 올린 서에 이르기를 「살펴 알았는 바(조득) 소방은 가장 변원의 중지에 속하여 아직 내부하지 않은 일본국과 인근하여 있나이다 지원 십팔년에 대군이 바다를 건너 정진한 뒤로부터 지원 이십년에 이르러 세조황제의 성지를 흠봉하여 당직에게 행정동성사를 위부하여 변방의 관령을 위진케 하였나이다 현재 경상도 합포 등처와 및 전라도 양처에 진변만호부를 설치하였고 본국의 군관과 군인을 뽑아서 지금 합포 가덕 동래 울주 죽림(고성) 거제 각산(진주)내례량(순천) 등소에 애구를 파수하려 가서 있게 하였고 및 탐라 등처에도 지계를 나누어 봉확을 세우고 선병을 암장하여 일야로 간망하고 순회하여 오로지 일본국 적군을 방비하였는데 관장(구당)한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찍 절차를 잃지 아니하였으며 일찌기 일본적인을 잡아서 성원에 이자하여 문주케 하였나이다 이제 요양행성관원이 요양행성과 및 본국정동행성을 혁파할 것을 요구하고 다시 요양부의 재성에 합병하여 행성을 고쳐 세울 것을 요망하고 도성에 이자하여 정탈케 함을 알게 되었읍니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면 본국의 합포 등처의 변방지방은 요양부와 상거하기 지리가 급히 멀고 탐라는 또 합포 등처에 비하여 심히 요원하니 혹시나 변방에서 품계하여야 할 긴급한 공사가 있으면 왕반이 지체되어 간절히 그릇됨이 있을까 두렵읍니다 리해에 관계됨이 심각한 것이오니 지금에 만약 계품하지 않으면 혹 도성이 편부를 알지 못할가 염려됩니다 만약에 요양행성 건의에 의준하여 본성을 합병하면 진실로 미편할 것이오니 다시 겸하여 본성은 곧 세조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세운 것임을 살피소서 만약 준자함을 빌어 다만 당직으로 하여금 본래대로 정동성의 일을 행하게 하여 오로지 동방의 극변에서 내부하지 않는 일본을 위진할 변방의 관리를 맡기는 것이 (일을) 그르치지 아니할 듯합니다 변관의 사무임으로 이에 의거하여 자품을 행하는 것이오니 복망컨대 도성은 살펴 정탈180)을 상정하여 아뢰어(문주) 시행토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계묘 이십구년 춘 정월 경인 삭에 왕이 원에 있었다. 이월 신사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한강이 졸하였다. 정해에 원이 겁리마적 월아홀도를 보내 관소(백색생견) 십오표리와 □경리아견 3백필 황향 십오근 초(지폐) 육백십오정 이십오양을 가져와 장경을 전독하였다. 삼월 갑오에 백관이 의장을 갖추어 어향을 받들고 장경을 전독하였다. 하 사월 정해에 우박이 내렸다. 오월 정미에 왕이 원으로부터 이르렀다. 계축에 재추가 왕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윤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한재로 우제하였다. 경신에 양루후봉에 거동하여 격구희를 관람하였다. 경오에 큰 비가 내렸다.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국학학정 김문정이 선성십철181)의 상과 문묘제기를 가지고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신사에 한희유로 첨의우중찬을 삼고 송분으로 좌중찬을 삼았다. 육월 을미에 행성이 왕을 향연하였다. 병신에 도첨의찬성사로 치사한 김부윤이 졸하였다. 기해에 전후의 전시 급제들이 왕을 향연하였다. 기유에 흥안도호부 부사 김서지를 파면하였다. 왕의 행희인 봉지련은 본부의 기생(기)인데 읍리 배도가 일찌기 서지에게 감정이 있어 봉지련에게 청탁하여 왕께 호소(소)하였더니 드디어 서지를 파면하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계축에 서북면 안집사 김견을 벼락쳤다. 추 7월 정사 삭에 대호군 민보를 원에 보내어 요골(매의 일종)을 바쳤다. 임술에 중찬 송분에게 악낭공의 작을 사하고 비서윤 오연으로 권지우부승지를 삼았다. 갑자에 박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을축에 원이 단사관 첩목아불화와 한림 이학사를 보내왔는데 중서성이 주하여 성지를 받들어 재상 최유엄 한희유 유비로 하여금 사신으로 더불어 석주와 및 아들 천보 천경 천기를 수착하여 부경(경은 연경)케 할제 첩목아불화는 그 사자를 안남부에 보내어 김세 등 사인을 체포하니 이에 앞서 김세가 석주를 중서성에 고소하였으므로 지금 석주가 김세로 하여금 대변시키려는 까닭에 이들을 붙잡은 것이다. 병인에 김태현이 새로 급제한 사람을 거느리고 수녕궁에 나아가 상알하거늘 사연하였다. 경진에 제안궁에 이어하였다. 신사에 행성이 호군 이한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원충갑 등 오십인과 홍자번 윤만비 등 삼십인이 글로써 오기의 죄를 열기(수)하여 첩목아불화와 이학사에게 고하였다. 팔월 병술에 우중찬 한희유 전찬성 최유엄을 보내어 석주와 아들 천보 천경 천기를 데리고 원에 가게 하였다. 기축에 밀직부사 송방영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경인에 치사한 판도판서 최□을 불러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들도 또한 장차 오기를 사신에게 고하려 한다 하니 그런 일이 있느냐 아직 천천히 하라」하되 □이 불종하였다. 을사에 홍자번 원충갑이 제재상으로 더불어 삼군을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고 오기를 잡아 호군 최숙천을 보내 원에 압송하였다. 구월 갑자에 홍자번으로 도첨의좌중찬을 삼으니 다시 좌182)를 높임(상)이었다. 을축에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왕이 원에 가서 전왕의 환국함을 저지하기를 청하려 하고 또 공주로써 서흥후 전에게 개가시키고자 하였다. 동 십월 계사에 원이 병부상서 탈탈첩목아를 보내와 오기를 체포하려 하니 대개 오기가 이미 경에 간 것을 알지 못함이었다. 을미에 왕이 서경에 이르니 제가 입조함을 불허하므로 이에 돌아왔다. 임자에 외원에 행차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도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채인규가 졸하였다. 십이월 기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유에 원이 형부상서 탑찰아와 한림직학사 왕약을 보내왔다 약이 왕에게 이르기를 「천지사이에 지친한 자는 부자요 지중한 자는 군신이외다 저 소인들은 스스로 이할 줄만 아는 것이니 어찌 즐겨 왕의 국가의 본원(지)를 위하리까」라고 하니 왕이 감읍하고 사례하기를 「신이 노모(쇠)하여 섬사(소인의 말)를 듣고 믿었으므로 이에 이르렀으니 이제 명을 들은지라 원컨대 표문을 올려 스스로 잘못을 씻겠나이다」하고 또 전왕의 환국을 청하며 그 소인의 당여도 모두 사신의 다스리는 대로 좇겠다고 하니 이에 송린 및 오기의 형제인 삼사우윤 천 승지 연 정랑 형 소윤 련 매서 중랑장 조심 등을 잡아 행성에 가두었다. 임신에 한희유로 도첨의 우중찬 판전이사사를 삼고 김혼으로 시랑 찬성사 판군부사사를 삼고 안향으로 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를 삼고 최유엄 유비로 함께 찬성사를 삼고 민훤으로 참리를 민지로 판밀직사사를 정해로 밀직사사를 삼고 이혼 권영으로 모두 지밀직사사를 김태현 김심으로 동지밀직사사를 김연수 김문연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홍선으로 판도판서를 삼고 곽응으로 감찰대부를 삼고 이진으로 전법판서를 삼고 박전으로 우상시를 삼고 고세 강순으로 삼사좌 우사를 삼았다. 무인에 밀직부사 김연수 대호군 야선단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고 또 제안공 숙을 보내 전왕을 돌려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표에 이르기를 건곤(천지)의 덕이 흡족하니 하황183)도 또한 합하여 일가가 되었고 부자의 천성이 보존되니 은애를 어찌 양지에서 잊을 수가 있으리까 감히 비온(포)를 진술하여 우러러 단총(성총)을 더럽힐까 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다행히 조세의 충근함을 인연으로 하여 선조의 리강184)하심을 입어 바야흐로 처음 아들을 얻었으매 지극한 사랑이 어찌 수주185)에 그치오리까 성인 됨에 미쳐서 할애하여 한궐(원)에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미 여러번 제측에서 손자를 낳았고 또 일찍 일변186)에서 공주를 배우로(상주)187)하였나이다 기쁨이 극하매 일이 어긋나고 정이 소원하매 간사가 들어오게 되었나이다 부수188)에 함부로 좇음으로써 강189)에서 문득 타가 생기게 되었으며 만약 능히 그 면기함을 분별하였더라면 옥190)이 어찌 돌(석)이 되오리까 불명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가히 책할것은 신에게 있아오며 간당이 복죄하게 되니 악언이 뜻을 옮겼던 것을 알겠나이다 금은 이에 반본되어 처음같이 환복되었는데 마침 천사가 바야흐로 옴을 만나 신의 애충정을 모두 살펴 분발케하니 숙취에서 깨어난 것 같이 반성하게 되어 더욱 예권이 더 가하여짐에 놀랐나이다 하물며 소방은 오래동안 농이191)의 그늘에 의하여 능히 포상192)의 업을 보존하였나이다 석인(제국대장공주를 가리킨 것)의 부생하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가부의 족히 의빙할만한 것을 생각하게 되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전에 미혹하였음을 애긍히 여기시고 신의 뒤에 깨달음이 늦춰지지 아니함을 생각하시와 칙하여 사자 왕장으로 하여금 공주를 모시고 나라에 돌아와서 효를 다하고 백성을 어루만지게 하면 신은 구보를 얻어서 앉아 만년의 우의를 해소시키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이 오로지 양춘의 화육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십이월 갑오에 김원상 김□로 밀직좌우승지를 삼고 김자흥 김□로 좌우부승지를 삼았다 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술에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중서성이 이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동성이 본국에 저장한 바 병량을 가지고 행성관리의 록봉으로 충당지급코자 함으로 도성이 호부에 보내어 의논한 바 고려의 전량은 다만 동국의 지용에만 쓰도록 되었다」고 하였다.

갑진 삼십년 춘 정월 계축 삭에 왕이 제안공의 집에 있었는데 병환(불예)으로 조하를 쉬었다. 갑인에 혜성이 규(성좌)에 나타났다. 도첨의찬성사로 치사한 오윤부가 졸하였다. 계해에 다시 주군의 합병한 것을 분리하고 진주 라주 명주 인주 영광 밀성 판관과 조강 하원의 구당과 라주도의 관역사를 파하였다. 병인에 탑찰아와 왕약이 오연 등 십인을 해도에 류배시키고 송린을 석방하였다. 경오에 탑찰아와 왕약이 돌아갔다. 밀직부사 김심을 원에 보내어 사신을 보내와 오기의 무리를 다스린 것을 표사하고 또 전왕을 돌려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표에 이르기를 「호미의 간당이 일조에 소제(소지)되고 학명193)의 간성이 천리의 하늘에 들리게 되었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외람되히 보잘것 없는 몸이(최자) 황복에 부쳐있으매 오직 충순한 천성을 가지고 덕을 힘입고 영화를 누려 왔는데 뜻밖에도 기폐하는 무리가 위를 빌리고 폭학함을 마음대로 하더니 거괴는 상사를 향하여 일찌기 가버렸으나 여종은 이 땅에 머물러 아직 있더니 이번에 탑찰아상서와 왕학사가 명을 받들고 멀리 와 신과 더불어 의논하여 이에 구수하여 죄를 살펴 경중에 따라 형을 정함에 당하여 공정으로 마음을 하고 신명으로 일을 결정하였나이다 이성(이사)이 내임하매 이에 만국의 흠모를 알겠고 수월이 차지 못하여 이미 삼한의 다스림을 얻어 군신이 모두 바르게 되고 부자가 또한 화합하나이다 오직 이 어진 사신을 다행히 만남은 오로지 이 성황의 자호하심이로소이다 인하여 생각컨대 전세에 멀리 하정을 상주한 것은 정성194)을 오래 어기었기 때문인 바 광음을 헤아리며 발 고이고 기다리오니 원컨대 가사를 다스릴(극가)195) 사자에 칙하사 빨리 평온히 돌아오도록 하시고 또한 의실196)의 짝으로 하여금 함께 와서 서로 만나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병자에 이지저로 도첨의찬성사를 민훤으로 자의도첨의찬성사를 정해로 판삼사사를 이혼으로 판밀직사사를 권영으로 밀직사사를 김심으로 지밀직사사를 고세로 동지밀직사사를 박전으로 밀직부사를 김원상으로 지신사를 홍경으로 우승지를 삼았다. 정축에 묘련사에 행차하여 제수를 축하였다. 임오에 안우기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이월 신묘에 원이 도고달 야선첩목아를 보내와 성형의 조를 반포하였다. 병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는데 이날에 탑찰아와 왕약의 말에 조정에서 명확한 금령이 없다 함으로 써 다시 황포와 황산을 썼다. 을사에 내료인 전호군 송균이 송방영에게 당여하여 전왕을 저훼하므로 써 순군에 가두었다. 삼월 경신에 이현 신궁이 낙성되니 왕이 행차하여 이를 보고 대연하고 호작관에게 백금을 일인에게 일근씩을 사하고 공도에게도 주식을 사하였다. 신미에 송균의 석방을 명하니 재추들이 불긍하므로 □사로 하여금 균을 불러 궁문에 이르게 하여 이를 석방하였다. 정축에 원이 병부상서 백백과 유학사를 보내와 송균 송방영 등을 행성에서 국문하였다. 하 사월 임오에 백백이 장차 돌아가는데 백관이 송방영 등에게 죄하기를 청하니 백백이 이에 왕과 의론하고 대호군 야선단과 중랑장 김장으로 하여금 방영 등을 원에 압송케 하였다. 계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병술에 왕이 술을 수녕궁에 베풀어 꽃을 구경하고 무자일에도 또한 이와 같이하였다. 을미에 내고에 령하여 수녕궁에서 잔치하였다.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 병신에 전중찬 한희유 찬성사 최유엄 유비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유엄과 비는 중서성에 나아가 전왕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한 표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인에 한희유로 자의도첨의중찬을 삼았다. 정미에 원이 참지정사 홀연 한림직학사 임원을 보내왔는데 이때에 오기 석천보는 원에서 옥에 갇혔으나 또 그 도당이 간기를 방자히 하여 외기하는 바가 없으므로 이인을 보내 이를 진알케 한 것이다. 오월 임자 삭에 일식하였다. 병진에 홀연과 임원을 량루에서 향연하고 격구희를 관람하였다. 기묘에 찬성사 안향이 건의하여 국학의 섬학전(장학기금)을 설치하였다. 6월 을유에 국학의 대성전이 이룩되었다. 병술에 왕이 국학에 나아가니 홀연 임원이 따라갔는데 7관제생197)이 관복을 갖추고 길에서 영알하여 가요를 바치거늘 왕이 대성전에 들어가 알성하고 밀직사 이혼에게 명하여 입학송을 짓고 임원에게는 애일잠198)를 짓게 하여 제생에게 보였다. 병신에 안서왕 아난달이 사자를 보내와 엄인(환자)을 구하였다. 추 7월 정사에 내료 송균이 금강산도를 싸가지고 원에 가니 재추가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이를 정지하매 균이 말하기를 왕의 명이 있다 하고 드디어 가버렸다. 계해에 수녕궁에서 잔치하였다. 경오에 한희유로 첨의우중찬을 삼고 송린으로 지신사를 삼았다. 기묘에 강남 승 소경이 오거늘 승지 안우기를 보내어 교에서 맞이하였는데 경은 스스로 철산이라 호하였다. 8월 갑신에 중찬 한희유를 원에 보내어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정해에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예복을 갖추어 소경을 수녕궁에 맞이하여 선을 설하는 것을 들었다. 갑인에 송방영 송린 등이 원으로부터 돌아오거늘 왕이 각각 의복을 사하였다. 병신에 명하여 금년 과거를 정지케하였다. 정유에 지밀직사사 고세를 심양에 보내어 인물을 추쇄하더니 내료 김유 고여주가 가만히 글로써 전왕에 진달하다가 일이 발각되매 왕이 노하여 이를 곤장때려(장) 순군에 하옥시켰다. 구월 갑술에 요양행성의 참정 김선이 고세와 함께 왔다. 동 십월에 원이 오기 석천보 형제를 안서에 장류하였다. 십일월에 환자 이숙이 어향을 받들고 오거늘 왕이 영빈관에 출영하고 수녕궁에서 잔치하였다. 을해에 혜성이 허위(성명)사이에 나타났다. 십이월 갑진에 동지밀직사사 송방영을 원에 보내 하정하였다.

을사 삼십일년 춘 이월 무인에 정해로 도첨의찬성사를 삼고 왕유소로 지도첨의사사를 권영으로 판밀직사사를 김태현으로 밀직사사를 삼고 신여계로 밀직부사를 삼았다. 경진에 홀연의 병이 위독하매 그를 위하여 약을 드리는 자가 있었던 바 홀연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는 간신이 국명을 잡고 부자가 서로 도모하는 까닭에 제가 나를 보내와 감시케 한 것이니 내가 만약 약을 마시고 죽으면 어찌 후언이 없으오리 하물며 사생은 명이 있는 것이니 비록 량약인들 어찌하리요」하고 마침내 마시지 않고 졸하였다. 임오에 이숙으로 평창군을 삼았다. 병술에 임원이 돌아왔다. 정해에 호군 정공을 원에 보내어 동녀를 바쳤다. 경인에 연등회를 정지하였다. 을미에 한희유로 판평양부사를 김문연으로 부사를 삼았다. 삼월 을축에 홍자번으로 경흥군 자의도평의사사를 삼고 한희유로 도첨의중찬을 삼았다. 병인에 원이 탈자알를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무진에 안우기에게 명하여 감시를 맡아 선비를 취하게 하였던 바 이때에 유사 강경용이 집에서 교수하여 그 무리 십인이 이 시험에 합격되니 내알에 가갈199)의 소리가 밤새도록 불절하였다 종실 익양후의 집이 그 옆에 있었는데 어느날 후가 입견하니 왕이 민간의 일을 묻는지라 후가 인하여 이일을 사뢰니 왕이 말하기를 「이 로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으나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써 성공에 이르게 하니 어찌 적은 도움이라 하리요」하고 관리에게 명하여 곡식을 싣고 그집에 가서 사하였다. 갑술에 왕유소를 원에 보내어 동녀 십인을 바쳤다. 하 사월 계미에 원이 돌열을 보내와 장경을 전독하였다. 병술에 상화연을 수녕궁에 설하였다. 갑오에 장경도장을 수녕궁에 설하였다. 임인에 성변으로 인하여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오월 병오에 광명사에 행차하여 장경을 전독하였다. 기유에 경덕재200)생 장천윤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축에 묘각 묘련 이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장경을 전독하였다. 계해에 숙창원비가 왕을 항연하였다. 정묘에 삼번홀적이 왕을 향연하였다. 육월 경진에 도첨의찬성사 정해가 졸하였다. 갑신에 상호군 민보를 원에 보내어 매를 바쳤다. 신축에 한희유 김혼으로 도첨의좌우중찬을 삼고 왕유소로 찬성사를 삼고 권영으로 지도첨의사사를 안우기로 밀직부사를 삼고 오연으로 좌부승지를 삼았다. 추 칠월 신해에 내고가 왕을 이현신궁에서 향연하였다. 계해에 영제창이 왕을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갑자에 상호군 진량필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제가 왕의 친조 하정을 명하였다. 기사에 권영으로 도첨의참리를 삼고 김태현으로 지도첨의사사를 고세로 밀직사를 삼고 송방영으로 지밀직사사를 한신으로 동지밀직사사를 김□로 밀직부사를 삼았다. 갑술에 원이 황태자를 책하였으므로 교저 등을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팔월 임오에 찬성사 왕유소를 원에 보내어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기축에 묘련사에 행차하여 제를 위하여 수를 빌었다. 갑오에 설영임으로 도첨의사사를 삼고 고세로 판밀직사사를 김문연으로 밀직사를 삼고 박전으로 지밀직사사를 조문간으로 동지밀직사사를 삼았다. 구월 무오에 안서왕 아난달이 사자를 보내와 금을 바치고 또 좌우에 뇌물을 주어 동녀를 구하였는데 그 사자는 부인이었다. 동 십월 정축에 승지 최숭이 왕을 권하여 수강궁에 행차케 하였는데 숭은 일찌기 교위 김시열의 딸을 바쳐 사랑을 얻게 하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총애를 누렸다. 갑신에 내료 조적이 왕을 향연하였다. 정해에 수강궁으로부터 숙창원비의 제택으로 환어하였다. 갑오에 성변으로 써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신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십일월 을사에 뢰진이 있었다. 병오에 재추들이 왕이 입근(입조)하므로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임자에 내고가 수녕궁에서 향연하였다. 갑인에 전왕 홍비의 제택에 이어하였다. 무오에 왕이 원에 가는데 손인 광평공 강릉후 및 한희유 왕유소 고세 김문연 한신 송방영 송린 홍자번 최유엄 유비 김심 김연수 등이 따라갔다. 경오에 우중찬 김혼에게 명하여 행성사를 권서케 하였다. 신미에 우승지 최숭이 파면되었다. 그때에 승지 한사람이 이미 경상도 기은의 명을 받았는데 숭이 대신 하기를 구하여 스스로 구전을 썼(서)으며 또 초노 박연이 따라가게 되었는데 숭이 사람에게 백금 삼근을 받고 고쳤더니 연이 헌사에 고발한것이었다. 십이월 계유에 제안공 숙이 원에 갔다. 왕이 숙의 손녀로써 황후에게 바치고자 하였으므로 숙이 가게 된 것이다. 기축에 도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정인경이 졸하였다. 경인에 원이 홀도불화를 보내와 사경승을 구하므로 승 백명을 선발하여 보냈다. 계사에 왕이 요양에 이르니 조인규가 원으로부터 방환되어 길에서 알견하거늘 왕이 제지로써 곧 판도첨의사사를 제수하였다. 전왕이 왕을 계주에서 맞이하거늘 경에(연경-대도) 이르러 전왕의 제택에 사관하였다.

병오 삼십이년 춘 정월 임인 삭에 왕이 원에 있었다. 신유에 하교하기를 201)「전에 이르되 로인을 길러 선언을 빈(걸)다 하였고 본조의 제도에도 또한 로인에게 사설함이 있는지라 이제 이 제도를 좆아 202)삼노오경의 향연을 열고자 하오니 년 팔구십의 자는 소재의 관이 이름을 기록하여 신개할 것이며 관은 조를 주어 기르(양)게 하라」고 하였다. 윤월 기축에 호군 김취기가 비판203)을 싸가지고 왕소로부터 왔는데 진량필로 밀직부사를 삼고 노영수와 채종린으로 좌우승지를 삼고 박려로 우부승지를 삼았다. 삼월 신미 삭에 일식하였다. 추 칠월 기묘에 행성이 총랑 곽원진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한재로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 신사에 도첨의좌중찬 한희유가 원에서 졸하였다. 팔월 기해에 지도첨의사사 김태현을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신축에 도첨의찬성사로 치사한 조윤통이 사하였다. 신해에 전왕(충의왕)의 비 홍씨가 졸하였다. 구월 갑신에 도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안향이 졸하였다. 동 십일월 갑오에 승지 최숭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이해에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이 전왕을 왕께 참소하고 또 황후 및 좌승상 아홀태 평장 팔도마신에게 참소하여 전왕을 축발204)시키고 서흥후 전으로 보탑실련공주에게 이어 장가들도록(계상)하고자 하거늘 최유엄 등이 중서성에 나아가 유소의 악역함을 논하니 성관이 유소 등을 잡아 가두는지라 고세 김문연 진량필이 왕께 환국을 권하니 왕은 불가타하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전왕이 사람을 길에 보내어 나를 가로막고 붙들어(요) 강에 빠뜨리려 한다 하니 내가 비록 늙었으나 홀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리요」하는지라 세 등이 중서성에 상서하여 유소의 죄를 극론하며 왕을 받들고 환국하기를 청하니 성관이 써 (황제께) 아뢰어 왕의 돌아갈 것을 재촉하거늘 왕은 하는 수가 없어 이에 약을 마시고 리질을 발케 하여 여름으로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기동치 못하였다는 공주는 유소 등이 피소됨을 듣고 심히 노하여 문연을 불러 장형하고 또 사람을 시켜 문을 지키게 하여 무릇 고장에 서명한 자는 왕소에 출입함을 금하니 이에 여러 종신들은 다 이산되고 다만 비서승 이조년과 내수 최진 이인이 모시고 있었다

정미 삼십삼년 춘 정월 병인 삭에 왕이 원에 있었다. 계유에 원의 성종이 붕하였다. 병자에 중서성 어사대가 유학사를 보내와 옥수를 심단하였다. 이월 무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병술에 랑장 강□을 원에 보내어 조205)을 고하였다. 신묘에 전왕이 동지밀직사사 김문연 상호군 김유를 보내와 밤에 순군부에 들어가서 비판을 선시하고 최유엄으로 도첨의중찬 판전리감찰사사를 삼고 유비로 도첨의찬성사 판군부사사를 삼고 이혼으로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를 삼고 김심으로 도첨의참리 판삼사사를 삼고 허평으로 판밀직사사를 김연수 김태현으로 지밀직사사를 김문연으로 동지밀직사사를 윤요 오한경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박승공 나윤재로 삼사좌우사를 삼고 조인규로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을 삼고 인후로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을 삼고 김흔으로 자의도첨의사사 찬성사를 고세로 자의밀직사사 도첨의참리를 김원상으로 자의밀직사사 밀직부사를 진량필로 자의밀직사사 동지밀직을 최충소로 판도판서 권수찬성사를 홍선으로 상호군권수첨리를 삼고 민종유로 전법판서 권수판밀직사사를 삼고 박전지로 판비서사사 권수밀직부사를 허유전으로 감찰대부권수동지밀직사사를 삼고 정지연으로 좌상시 권수동지밀직사사를 삼고 조간으로 우상시 권수밀직부사를 삼고 이연송으로 판례빈사사 권수밀직부사를 박선으로 군박판서권수밀직부사를 삼고 이산으로 판사재사사 권수밀직부사를 이진으로 판□위사사 권수밀직부사를 조서 김흥으로 좌우승지를 삼고 야선단 홍승서로 좌우부승지를 삼고 그 나머지 제수한 자도 팔십여인이나 되었다. 전왕이 태자의 지를 받들어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및 그 당의 악한 자를 잡아서 저택에 가두고 왕을 경수사에 옮기니 이로부터 왕은 팔장만 끼고 (공수) 국정은 전왕에게 돌아갔다. 하 4월 갑진에 서흥후 전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이 복주하였다. 이달에 원이 왕을 칙하여 환국케하고 인하여 행성을 주관(서)하여 써 진무케하였다. 오월 임신에 원이 평장 철륵첩목아와 학사 곽관을 보내와 진무하였다. 정축에 왕이 원으로부터 와 숙창원비의 집에 입어하였다. 을유에 리현궁에 행차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신묘에 내고가 왕을 향연하였다. 이달에 전왕이 우승상 답자한으로 더불어 정책하여 황질 회녕왕을 맞아 황제위에 나아가게 하니 이가 무종이다. 육월 을미에 용산별감 노유가 왕을 향연하였다. 갑진에 밀직부사 조서를 원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였다. 병오에 전왕이 좌승지 김지겸을 보내와 계하기를 「조성도감관 환신를 시켜 병선군을 거느리고 내영윤 강순과 호군 이주로 더불어 역사를 감독케 하여 시가의 양방에 장랑 2백간을 영조케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기유에 동지밀직사사진량필을 원에 보내어 동녀를 바쳤다. 계축에 원제가 즉위하였으므로 요을고두를 보내와 사를 반포하였다. 추 칠월 신미에 상호군 이무를 원에 보내어 골(매)을 바쳤다. 을해에 전리 군부가 다시 선법을 정하였는데 이에 앞서 전왕이 멀리 이사에 명하여 문무의 선발을 분장케 하고 「그 첨의와 밀직의 결원이 있거던 반드시 꼭 나에게 치품하라」하므로 왕이 이사의 주를 듣지 않고자 하거늘 승지 등이 강청하기를 「이는 전왕의 명이오니 가히 드지 아니치 못할 것이외다」하니 왕은 비록 마음에 맞지 않으나 또한 거부하지 못할 것이므로 다만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무자에 혜성이 미(성명)에 나타났다. 원이 황태자를 책봉하고 사신을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팔월 신해에 원이 전왕의 종신인 지감찰사사 최실을 보내와 왕에게 책명을 가하여 이르기를 「아~그대 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 개부의동3사 대위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 왕거는 마음 가짐이 직량하고 품질이 정순하여 일찌기 잘 선인의 가유를 이어 오래동안 왕궁에 복로하였도다 몸은 국서(세조의 서)로서 삼가 빈일(동방)의 지방에 거하고 아들은 즉 황생으로서 다시 승룡206)의 선에 참여하였도다 축관207)으로 양조의 권애함을 입었고 분묘묘208)로 백사의 전함을 이었도다 드디어 우규(우승상)의 계위에 올랐으니 영광은 상대(성명)의 상(기상)에 응하였도다 이에 거듭 총수를 반사하니 더욱 충근에 힘쓸 것이다 동하면 오직 일덕(순1의 덕)을 품(회)고 거하면 반드시 정인을 쫓을 것이다 조종이 세세로 한의 번보209)를 칭하여 삼한의 악토를 보존하고 부자가 함께 주의 사도210)가 되어 청풍을 만고에 전파하였도다 가히 순성수정 추충선력 정원보절공신 개부의동삼사 대위 정동행중서성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을 특가할 것이다 더욱 총명을 복응하여 써 복기를 도울(개)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이 (최)실에게 의1습과 은 삼근을 사하였다. 정사에 중찬 최유엄을 원에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였다. 전법판서 이진이 전왕에게 상서하거늘 왕이 가납하고 정당문학을 초수하였다. 구월 계유에 전왕이 도평의사에 명하여 「녀자로 나이 십육세 이하 십삼세 이상은 함부로 시집가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신문을 한 뒤에 시집가기를 허하고 위반하는 자는 죄주라」고 하였다. 동 십월 병오에 판밀직사사 김연수를 원에 보내어 책명을 사하였다. 정미에 삼번홀적이 왕을 향연하였다. 임자에 원이 환자 및 전주 이언충을 보내와 동녀를 선택하였다. 경신에 내고가 왕을 향연하였다. 십일월 갑자에 안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묘에 수종한 공신들이 왕을 향연할새 평장 철륵첩목아와 곽관도 또한 연회에 참여하여 화수211)를 설하도록 청하여 그것을 관람하였다. 을해에 왕이 불예(병환)하였다. 임오에 동지밀직사사 진량필을 원에 보내어 동녀 팔인을 바쳤다. 병술에 도첨의찬성사 이혼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전왕의 명으로써 직사관 윤기를 보내어 선대의 실록 일백팔십오책을 받들고 원에 가게 하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불가히여겨 말하기를 「조종의 실록은 타국에 내보내는 것이 마땅치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무자에 도첨의참리 김심을 원에 보내어 동녀 십팔인을 바쳤다. 십이월 병신에 전왕이 전 승지 오연과 그 제 련을 해도에 장류하였다. 전왕이 상국의 제에 의하여 군과 민을 정하고자 하거늘 최유엄이 논박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무신 34년 춘 정월 정해에 동지밀직사사 조서를 원에 보내어 황태자의 탄일을 축하하였다. 이월 계사에 크게 지진하였다. 신축에 원이 「지대」라고 개원하고 허선을 보내와 조를 반포하였다. 갑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더니 그 익일에 시신이 잔을 올려 수를 빌거늘(상수) 왕이 술을 권하여 말하기를 「이날 관등은 나의 마지막 일이나 경등은 사양말아야 한다」하니 시신들이 모두 다 잔을 비웠다. 병진에 원이 조하여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을 가봉하였다. 정사에 중찬최유엄이 원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사하였다. 삼월 경신에 이현궁에 행차하여 소재도장을 설하였다. 임술에 원이 제주 달노화적을 보내왔다. 하 사월 계사에 원이 환자 철륵을 보내어 향을 내려주고 황태후의 명으로써 동녀를 뽑았는데 철륵은 본국 용궁현 사람이었다. 병신에 왕이 숙창원비로 더불어 봉국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왕이 진봉산에 사냥하였다. 경자에 강양공 자가 졸하였다. 경술에 상화연을 수녕궁에서 설하였다. 계축에 평양군 조인규가 졸하였다. 5월 병인에 왕이 불예하매 김문연의 집에 이어하였다. 무진에 비를 빌었다. 무인에 지밀직사사 박선이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제가 전왕을 정책한 공으로써 심양왕에 봉하였다. 갑신에 원구212)에서 비를 빌었다. 병술에 이혼 최균 김원구가 승지 권준으로 더불어 심양왕의 정한 바 관제와 비판을 가지고 원으로부터 돌아오니 계자를 뛰(초)고 차서를 넘은 자는 모두 근행과 권세로서 세신과 구관은 모두 한직에 물러섰다. 육월 기축에 원이 사신을 보내어 제왕과 부마가 사사로히 역마차자(공문)를 발급하는 것을 금하였다. 신축에 심양왕이 정한 바 관제를 반포하였다. 추 칠월 병인에 왕의 병이 위독하매 예빈윤 한련을 보내어 심양왕에게 보고하였다. 기사에 왕이 신효사에서 훙하거늘 이날 밤에 숙비의 집에 빈하였다 유훈에 이르기를 「불곡213)이 천지 조종의 도움을 받들어 외람히 왕위에 처함이 지금에 35년인지라 그 사이에 국운이 다간하여 백성이 생업을 편안히 하지 못하였으며 사녕이 아울러 나오고 충량은 스스로 물러가니 이것이 모두 부덕의 소치로 마음에 심히 부끄럽도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형년이 73이나 되었도다 지금 깊은 병을 만나 누순이 되어도 낫지 않도다 다만 한번 이라도 심양왕 보기를 생각하여 일찌기 글을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였더니 대기214)가 문득 이르니 어찌 서로 기다림을 용납(용)하리요 아-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것은 리의 고연한 것이며 부가 전하고 자가 받음은 이제가 아니요 옛적부터 그러한 것이다 조종의 기업과 방국의 기무를 일절 심양왕에게 위부하노니 오직 너희 신료들은 각각 너희 직책을 지키고 왕의 오기를 기다려 나의 유훈을 전하여 유실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은 재위가 35년이오 수가 73이다 왕은 성품이 관후하여 희노를 기색에 나타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지향하여 글을 읽어 대의를 알았으며 일찌기 대사성 김구 제주 이송진 등으로 더불어 창화(시를짓고 화답함)하여 용루집이 있어 세상에 행하였다 10월에 경능에 장사하였으며 충선왕 2년에 원이 익를 충렬이라 사하고 공민왕 6년에 경효를 가하였다. 사신이 찬하여 가로되 「충렬왕대에 있어서 안으로는 권신이 정사를 천단하고 밖으로는 강적이 래침하니 일국의 사람들이 학정에 죽지 않으면 반드시 봉적(병과)에 멸케 되어 화난이 극하였다 일조에 상천이 화를 뉘우쳐서 권신을 죽이고 상국에 귀부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공주를 리강215)한 바 공주가 이르매 부노들이 기뻐하여 서로 경하하기를 「백년이나 봉적의 나머지에 다시 태평의 시기를 볼 줄이야 알았으랴」고 하였다 왕은 또 다시 경사에 조근하여 동방의 폐해를 부주하니 제가 냉큼 유윤216)하고 관군을 소환하매 동방의 백성이 편안케 되었다 이제야말로 정히 왕은 가히 하염이(유위) 있을 때인데 어찌하여 교만한 마음이 문득 생겨 유렵을 즐겨 하고 응방(매 키우는 곳)을 광치하여 악소인인 이정배를 시켜 주군을 침폭하고 연락에 빠져 용루에 창화하고 승 조영 등으로 하여금 좌우에 가까이 하게 하니 공주와 세자가 말하여도 듣지 않았고 재신 대성이 이를 논하여도 좆지 아니하였다. 그 만년에 이르러서는 좌우의 참소를 너무 많이 들어 그 적자를 폐하고 그 질을 세우고자 함에 이르렀으니 그가 동궁에 있을 때에 비록 전고를 밝게 익히고 독서하여 대의를 알았다 하나 과연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 처음은 있지 아니함이 없으나 능히 끝을 여물게 함은 드물다고 한 것은 충렬왕을 두고 이름이 아니랴」라고 하였다.



 

 

 


1) 권감=임시로 감무한다는 뜻. 권지 권섭과 동의임.


2) 계행=길을 열어 먼저 간다는 뜻. 시경 소아 6월편에 「원융십승 이선계행」이라 하였음.


3) 초공=선두 초자와 동의어인데 배 젓는 사공이다. 자휘에 「선택미왈초 금인위고사위초공」이라 하였음.


4) 참쇠 마질=상복의 이름으로 3년상에 입는 상복에 끝을 깁지 아니한 것을 참쇠라 하고 끝을 기운 것은 제쇠라 하고 머리와 허리에 띠는 삼(마)띠를 수질 요질이라함. 좌전 양공 17년조에「안영?쇠참 저질대 장  관리식?거기의로 침점침초」라 하였음.


5) 리강=제녀를 신하에게 하가시킴을 말함. 서경 요전의 「제왈 아기시재 녀우시 관궐형우이녀 리강이녀우규 빈우우」의 전에 「강하 순위필부 능이의리하제녀지심」이라 하였음.


6) 개체=몽고 풍속의 변발을 말함이니 몽고어로는 겁구아라함. 고려사 제2책 789혈 (주1) 참조


7) 달로화적=Darughachi란 몽고어로 진수자 단사관 또는 지방관청의 장관을 말함.


8) 소유=사헌부 사정의 일종임.


9) 궤유=선물 주는 것. 효무기에 「인문기능사물급불사 경궤유지」라 하였음


10) 정사색=고려 때의 관청. 도교에서 행하는 의식의 하나인 하늘 땅 별에 대한 초찰를 맡아보았다. 고종 45년(1258년)에 내시의 근실한 사람을 뽑아 관원을 삼고 그 관청을 내시정사색이라 하였음.


11) 류유=유방의 형식으로 죄를 관대히 다스림을 말한 것이니 여기에서는 유사를 뜻한 것임. 서경 순전「류유오형」의 공전에 「유 관야 이류방지법 관오형」이라 하였음.


12) 선전소식=고려의 제도에 조정에서 지방에 징구할 때에는 선지를 내려보는 것인데 충렬왕때에 이르러 소사에 일일히 선지를 내리는 것이 번거롭달하여 승선으로 하여금 왕지를 받들어 그 지미에 서명케 하여 지방에 내려보내도록 하였는 바 이를 선전소식이라 하였음. 고려사 권123 이분희전 부 습전 참조.


13) 독로화=Tuluge란 몽고어로 원래 인질(볼모)를 의미하는 말이니 고려에서는 인질로 보낸 왕자와 고관의 자제를 가리키는 일이 많았다.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게 되자 원은 인질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고종시에 왕족 3인과 대관의 자제 10여인이 원에 갔고 원종시에는 세자 심과 고관의 자제 28명이 갔고 충렬왕시에는 독로화를 구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도합 25명을 보내었으나 려 원 관계가 친밀해 짐을 따라 독로화 제도는 완화되었음.


14) 선화 가갈=과거의 급제자를 포장하는 의식이니 선화의 화는 탐화연의 화를 가리킨 것이며 가갈은 열장유가의 모습을 말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니 포은집(하) 하이수재등제환향의 시에도 「여?청가갈 차개동광휘 협도인여직 련안마사비운운」이라 하였음.


14) 칠우제=상제명인데 장사후 빈궁에 찰사하는 것을 우라함. 석명 석상제에 「기환제우빈궁 위우락안신 사환우 차야」의 주에 「천자구 제후오 사삼」이라 하였음.


15) 성갑일=성은 제의 미칭이요, 갑일은 택정한 축제일을 말함이니 송서 예지(4)에 「예운 공공씨지패구주 기자구룡왈후토 능평구토 고토이위사 주이갑일제지 용일지시야」라 하였음


16) 봉역=역서, 봉조는 천시를 잘안다 하여 봉자를 관하였음. 좌전 소공 17년 조 「소지립야 봉황적지 고기우조 위조사이조명 봉조씨 역정야」의 주에 「봉지천시 고이명역정지관」이라 하였음.


17) 수삭=정삭을 받음. 천자가 이동에 래세의 역을 제후에게 반포하면 제후가 받아서 조묘에 수장하였다가 매월 삭일에 묘에 고하고 받아서 행정함. 곡양전 「천자이삭정 고우제후 제후납지이녜묘 매월삭일 고묘수지」라 하였음.


18) 대화=천지 음양의 기가 크게 조화함을 말함. 역 건괘에 「각정성명 보합대화 내리정」이라 하였음.


19) 전정=전정은 농관의 장이니 여기의 전정이라 함은 고대 전정을 둔 본의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해할 것임. 좌전 소공 29년조 「직 전정야」의 소에 「주어운 선왕불적천무 호문공간왈 민지대사재농 시고직위대관 연칙 백곡 직위기장 수이직명위농관지장 정 장야 직시전관지장」이라 하였음.


20) 번선=번국의 소임이라는 뜻. 본서 제2책 9혈(주1) 참조.


21) 평질지공=춘시의 농작을 차서있게 행함을 말한 것임. 본서 제2책 287혈「주5」참조.


22) 남무=전답을 말함. 본서 제2책 723혈 (주4) 참조.


23) 동수=동쪽의 변방. 후한서 동이전에 「예맥솔복 동수(수) 소사」라 보임


24) 생권군=휴식군이란 뜻. 설문「권 권야 권 파야」의 단주에 「인신위휴식지칭」이라 하였음.


25) 초=지폐와 같음. 일지록 정사, 초에 「초법지흥인어전대 송이은위폐이환전지중 내립차법 당헌종지비전 즉여금지회표야」라 하였음.


26) 빙긍=조심한다는 뜻. 「여리박빙」의 뜻과 같음. 본서 제2책 501혈(주2) 참조.


27) 응방=매의 사육과 매사냥을 맡은 관청.


28) 과부처녀추고별감=과부와 처녀를 조사하는 기관. 고려사 백관지(2) 제사도감각색조 「과부처녀추고별감」의 주에 「충렬왕2년 개위귀부군행빙별감」이라 하였음.


29) 차자색=차자색은 포마차자색의 략칭으로서 역마배급의 문빙을 발급하는 기관. 고려사 백관지(2) 제사도감각색조「포마차자색」의 주에 「충렬왕2년치」라 하였음.


30) 반오=반은 계족의 류요 오는 구류임.


31) 반전=로비. 본서 제2책 819혈 (주1) 참조.


32) 과기=임기만료시 경대의 시기. 사기 제세가 「과시이왕급과이대」의 주에 「과시이왕 급과이대」라 하였음.


33) 재궁=천자의 관. 후한서 명제기「봉안재궁」의 주에 「사고왈 이재목위관 위천자지제, 고역칭재궁」이라 하였음.


34) 협제=조선을 모두 태조의 묘에 제하는 것을 협제라함. 천자 제후 3년상이 필하면 도조 및 고조 이하의 친묘의 사주를 모두 태조의 묘에 올려서 성대히 제사하는것을 협제라함. 례기 왕제에 「천자 제후지상필 합선군지주어조묘이제지 위지협 후인이위상」이라 하였음.


35) 무고=무당(여무)이 사술로서 사람을 미혹시키고 방자(저주)하는 것. 연문석의에「여능이무강신 집좌도이혹인위고」라 하였음.


36) 겁령구=고려시에 몽고의 공주를 따라온 사속인인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제국공주를 따라온 인후 홀자알 장순용 삼가등 인데 이들중 고려에 귀화하여 장군 직을 받고 이름을 고려식으로 고친 이도 있었다. 


37) 면신=부인의 분만 즉 출산의 뜻.


38) 구우일모=극소수를 형용하는 것으로 아홉마리 소에 털하나란 말. 사마천 보임안서에「가령 복복법 수주 약구우망일모」라 하였음.


39) 기인=고려초기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데려다 볼모(인질)로 삼는 한편에 그 출신지방에 관한 고문의 역할도 겸하게 하였다.


40) 해동청=응의 1종. 이명기에「등주해안유조여골 자고려비도해안 명해동청 격물최첩 선금천조 비시선풍 직상천제」라 하였음.


41) 고신=금일의 사령서와 같음.


42) 조연=전송연. 조는 제명으로서 출행할 때에 로신에게 지내는 제사.


43) 좌계=그릇된 계책. 품자전에「인지수족 개편어우이 좌이벽고 사지부정자왈좌도 위지피조자왈 좌천 모지혹실자왈좌계 개이기유손어좌이」라 하였음.


44) 달단=Tartar 몽고족을 말함.


45) 유아=여기에 유아라 함은 원에 항복한 송 공제 ?을 가리킨 것임.


46) 총재=주대 육관의 장으로서 천자를 보좌하고 백관을 통어하는 역인데 후세의 리부상서에 해당한다. 서경 주관「총재 장방치 통백관 균사해」라 하였음.


47) 내올타=올타(Ordo)는 몽고어로 전막의 뜻인데 내올타는 궐내의 전막을 가리킨 것임.


48) 탈탈화손=몽고어 교통요지의 역전관의 뜻.


49) 음전=전송하는 술을 마시다. 옛적에 원행할 때에 도조신에 제사하여 그 안전을 빌고 제필후에 그 곁에서 술을 마시고 전송한다. 시경 패풍「출숙우제 음전우녜」의 집전에「음전자 고지행자 필유조도지제 제필 거자송지 음어기측이후행」이라 하였음.


50) 북경=여기에 보이는 북경은 내몽고의 객나심군에 있었음. 지금의 평천인 듯.


51) 조송=음전과 같음 (주1) 참조.


52) 필도적=몽고어 Bicikci의 별음. 서기란 뜻.


53) 대궤=복신의 공궤를 말함이니 맹자 만장편 「개자시 복 무궤야」의 조기주에「대 천관주사령자… 대불지궤래운운」이라 하였음.


54) 동문=동일한 문자를 쓴다는 뜻으로 천하의 통일을 말한 것이니 예기 중용편에 ?금천하 차동궤 서동문?이라 하였음.


55) 동작=봄의 농작이란 뜻. 서경 요전 ?인빈출일 평질동작?의 전에 ?세기어동이시취경, 위지동작?이라 하였음.


56) 서성=가을에 만물이 성숙한다는 뜻. 서경 요전 ?인전납일 평질서성?의 채전에 ?추월 물성지시 소당성취지시?라 하였음.


57) 별감=여기에 보이는 별감은 전민변정에 관한 것이니 고려사 백궁지(2) 제가도감 각색편의 ?전민변정도감?조 참조.


58) 탕목읍=탕목의 비용을 제공하는 특수한 채읍을 말함. 주대로부터 천자가 제후에게 채읍을 주어서 그 읍의 수입으로써 탕목의 비용에 충당하여 재계자결의 용에 비하였다. 후세에 황후 공주에게도 그 제도가 있었던 바 대개 그들의 사용에 충당하는 토지를 말함. 예기 왕제에 ?천자제후개유탕목지읍?이라 하였음.


59) 홍정=조신의 조복에 따른 홍색의 피대.


60) 이리간=Irgen이란 몽고어로 취락이란 뜻인데 고려시에 응방에 속한 부락을 말함인 듯.


61) 회회=회흘과 같음. 회골 혹 외올아라고도 씀 모두 즉금의 ?Uighur?족의 조선으로서 몽고 ?투루키스탄?방면에 활약하는 토이기계의 부족.


62) 교방=경사에 관설로 된 여락(기)의 예속처. 또는 강습 거주처 본서 제1책 171혈(주1)참조.


63) 주기=주인 국가에서 내린 인부. 본서 제1책 181혈 (주1)참조.


64) 사화=과거에 등과한 사람에게 꽃을 주는 것을 ?어사화?라고 함.


65) 항시=한재 국상 등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저자를 옮기고 거리에서 저자를 보게 하게 하는 것. 본서 제2책 309혈 (주1)참조.


66) 황패=황지에 쓴 제서인데 홍패 백패와 함께 등과한 사람에게 주는 제서임. 그 예로서 품관을 얻으면 황지로 된 제서를 써서 가묘에 제고하고 그것을 소각하는 예가 있었음. 수동일기에 ?분황지례 자송대이연?이라 하였음.


67) 관자=전령이란 의미인데 서간 차자 등과 동의임. 당서 이봉길전에 ?기당유팔인 이전령자우팔인  고호팔관십육자 유소청구 선뢰관자 후달봉길 무부득소욕?이라 하였음.


68) 수달단=흑룡?송화강 류역에서 수초를 따라다니며 사는 달단의 종. 신원사 지리지(2) 참조.


69) 오노관리=오노관리는 오랍제와 같은 것으로 해석됨. 원사어해 권8 오랍제조에 ?사역참인야 권구십구작올자적 전차마자?라 하였음.


70) 합필적발도아=합필적은 천호의 익명이요 발도아는 용사의 뜻임. 원사어해 참조.


71) 자관 차부=문독, 자문의 뜻.


72) 령대=망기의 대. 시경 령대편의 정현전에 ?천자유령대자 소이관침상제기지요상야 문왕 수명이작읍간풍 입령대?라 하였음.


73) 의상=혼천의를 말함. 고자에 천형을 각하여 일월성진의 운행을 관측하는 데에 쓰는 기계인데 금일의 지구의와 같은 것임. 서경 순전에 ?재거기옥형 이제칠정 거기옥형 왕자정천문지기 한세이래 위지혼천의?라 하였음.


74) 비만=비추만속 즉 꼴과 곡식을 속히 나른다는 뜻. 한서 주부언전 ?사천하비추만속?의 주에 ?운재추속 령기질지?라 하였음.


75) 성황=요해지에 쌓은 성곽의 참호 또는 서낭신을 말함. 북제서 모용엄전에 ?성중유신사일소 속호성황신 공사매유기도?라 하였음.


76) 선명=천자의 조칙을 말한 것이니 진서 하증전에 ?선명견사?라 하였음.


77) 승비=승직을 주는 비준. 즉 지금의 사령서. 훈몽자회에 ?상사이공사 제간하하사지문미왈비 군주용주서고 우왈주비?라 하였음.


78) 본명일=간지가 탄생한 일자의 그것과 같은 날을 말함.


79) 기사년동귀운운=원종 10년 기사에 림연이 폐주를 천행한 사건을 말함.


80) 구재=고려시대 최충이 개설한 사숙의 학반으로 구재명은 악성 대중 성명 경업 조도 솔성 진덕 대화 대빙이다.


81) 우난재=7월 5일에 봉행하는 불가의 재례 안우난경에 「목련모망 생#귀중 불언 수십방중승지력 지7월 15일 구백과오미 이저분중 공양십방대덕」이라 하였음.


82) 거수 = 손을 들어 춤춘다는 뜻. 시경 주남 관#서 ?부지수지무지 족지#지야?의 소에 「부자각지거수이무신 동이족#지운운?이라 하였음.


83) 육경 = 역, 시, 서, 춘추, 예, 악(악경은 없어진지 오래임)의 육경을 말함. 육학, 육운, 육적이라고도 함.


84) 사년은종공신 = 동왕 사년에 왕의 입원하던 때의 일을 말한 것임.


85) 장획 = 노비를 말함. 본서 제이책 육칠구#(주이)참조.


86) 백결 = 결은 전세의 파, 속, 부, 결의 결인바 ?백부위일결?로 일결이 금일의 약 이십두락에 해당함. 문헌비고 문종조에 ?고려 문종 이십삼년 정량전보수급전세 기보법 륙촌위일분척 십분위일척 육척위 일보 전일결 방삼십삼보 기세법 이십부 출미칠합오작 적지일결 미칠승오합 이십결 미일석?이라 하였음.


87) 각 = 도고의 뜻인데 도거리 맡아 파는 것. 즉 지금의 도가와 같음.


88) 구요 = 일, 월, 화, 수, 목, 금, 토의 칠요에 계도 나# 이성을 합하여 계구요라 함.


89) 십일요 = 전주 구요에 기패에 합해서 십일요라 함. 본서 제이책 삼사구혈 참조.


90) 취우 = 륜간 또는 잡간함을 말한 것이니 예기 전례상 ?부유금수무례 고부자취우?의 주에 ?취유공야? 녹빈일우?이라 하였음.


91) 합단 = 원태조의 제 합적온의 오세손인데 호륜패이 지방을 관령하고 있으면서 제왕 내안과 함께 반하여 자주 남하입관하고 또한 고려에도 침입하다가 뒤에 원군에게 패하여 해중에 투살되었다.


92) 괵 = 원래 전장에서 죽인자의 귀를 베어 전공을 논상한 것인 바, 목베는 것도 괵이라고 하였음. 이아석주의 ?괵, 할이야?주에 ?위수이양조문 새천만야 괵이 절비이천만계?라 하였음.


93) 부정 = 제후가 왕실에 내조하지 않는다는 뜻. 하자가 상자를 섬김에는 모두 정중에서 일을 행하므로 섬기지 아니하는 것을 부정이라 함. 좌전 은공 십년조에 ?이왕명토부정?이라 하였음.


94) 후도 = 제후의 법도. 본서 제이책 일구구혈(주삼)참조


95) 금탕 = 견고한 성지. 금성탕지의 략. 후한서 광무기론 ?금탕실험 차서공도?의 주에 ?금이유견 탕취기열?이라 하였음.


96) 구묘 = 천자 칠묘와 같이 천자의 조종의 묘를 말함인데 태조 문세실 무세실 삼소 삼목의 주구묘에서 나온 것임. 삼재도회 궁실 구묘에 ?차주구묘 이문무친속종요 이유공덕 당종불가요 매당립세실이개백세부천 흥태조동세실자 부훼지명야 자시지후 목요자장문세실 소요자장무세실?이라 하였음.


97) 은감 = 은국의 감계. 전대의 실패를 보아 나의 감계를 삼는다는 말. 시경 대아 탕에 ?은감불원 재하후지세?라 하였음.


98) 항형 = 서로가 사양하지 않고 대항함을 말함. 사기 육가전의 ?욕이구구지월 흥천자항형 화차급신의?주에 ?색은왈안 최호운 항 대야 형 차#상횡목 항형 언양형상대거 솔부상피하야?라고 하였음.


99) 제항 = 제산항해를 말한 것으로서 산해를 거쳐 내조한다는 뜻임.


100)제 = 후회 막급의 의미. 본서 제일책 삼사구혈 참조.


101) 국존 = 일국의 존자 즉 국사를 말함. 유덕한 불승으로 덕 행 지를 구비한 자. 무량수경 ?기명왈존자 료본제?의 주에 ?부영운 유덕가존고 왈존자?라 하였음.


102) 미행 = 존귀한 자가 남몰래 출입하는 것. 사기 진시황기 주에 ?단기출입 약징천지소위고 왈징행?이라 하였음.


103) 삼소 = 삼소는 삼소와 같은 것으로서 삼소의 소는 지덕(지력)의 소복을 뜻하는 풍수설에서 나온 것이나 고려에는 삼소 즉 좌소 우소 북소가 있는데 여기에 궁궐을 세우면 국조가 연장한다는 소위 연기사상에서 나온 것임. 김상기저 고려시대사 십삼혈 및 사백혈 참조.


104) 승수 = 승은 피륙을 짜는 날(경)을 세는 단위인데 우리 나라의 포의 조세를 분별하는 것으로예하면 십승포를 열새 이십승을 스무새라 함.


105)접허=접는접해(가재미가 많은 동해를 가리킴)로서 접허는 동국 즉 고려를 말힌 것임.본서 제2책 799혈 (주3)참조


106)명폐=명은 ?의 서전에 생장하였다는 서초 명협을 가리킨 것이며 폐는 폐하의 폐로서 명폐는 황제의 거소를 가리킨 것임.


107)룡어,?호=임금의 붕거한 것을 말함이니 본서 제1책 ?4혈(주1) 참조.


108)계=계는 ?의 아들 이름. 서경 익? [계 고고이읍]의 전에 [계 ?자야]라 하였음.


109)문모=?의 문왕의 아들 ?요 무왕의 모 태?인데 화국의 녀. 현부인으로 이름이 높으므로 문모의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음. 시경 ?? ?음 [적우부모]의 전 및 ?녀전 참조.


110)국전=본책 147혈 (주 1) 참조.


111)외공=외국으로부터 오는 공물.여기에서는 지방으로부토 상납하는 공물을 말함인 듯. 령반시에 [외공입중원 만리?대?]라 하였음.


112)남반=내료직에 □하는 반열. 본서 제2책 87혈 (주1) 참조.


113)대상=복상. 13상월에 제하는 것을 소상이라 하고 25상월에 제하는 것을 대상이라 함. 의례 사?례에 [기이소상왈 ?상사비사 우기이대상왈 마차대상 중월이운운]이라 하였음.


114)금내육관=비서 사#(관) 한림 ?문각 어서 동문원의 관원을 가리킴.


115)사능=관사로서의 재능. □□서,명황□론에 [조집이계 □교사능야]라 하였음.


116)우란분□=범어 Ullambana. □전당시 목□□이 지□에 떨어진 어머니를 □□하기 위하여 □7월15일 백가지 음식을 차려 대중에게 공□한데서 백□이라고도 함. [□□]이라 번역함. 본서 제2책 79혈 (주1) 참조.


117)납□=혼례의 육례중 일례인데 납□의 뜻이니 혼례에 □□을 쓰기 때문이다. 의례하 [납□일속]의 주에 [납□위혼례납□야]라 하였음.


118)연비=공양하는 불가의식의 일종이니 □씨통감에 [당 헌종유중사 영불골 왕공사서 유연향저정공양자 유갈산선시자]라 하였음.


119)장빙=빙을 □□한다는 말인데 고자에 겨울에 장빙하였다기 여름에 내어 쓰는 것. 일정한 직위가 없으면 그것을 쓰지 못한다. 구당서예의지에 [계동장빙 중춘계빙]이라 하였음.


120)분상=타지에서 부모의 상을 듣고 달려와 상을 복하는 것. 예기 분상에 [재외 문기친속지상이귀야 분자저기침야]라 하였음.


121)저폐=지폐,저권,초표인데 지금의 지폐와 같음.


122)전장=장경을 전독하여 추복하는 법회.


123)성복=초상에 상복을 입는 의식. 상례에 대□후에 복인이 각각 친소에 따라 복제의 옷을 입는 것을 말함. 예기 분상에 [어3곡 유□발조성□ 3일성복]이라 하였음.


124)북진=본서 제 2책 697혈 (주3) 참조.


125)간국=중심인물이 되어 일을 처리하는 기량. 촉지 양의전평에 [이엄이간국달 위정이용략임]이라 하였음.


126)#(수)유=우양유를 다려서 유를 만든 것임.


127)궁려=천막 전장인데 흉노 등 북방족의 거주하는 천막임. 사기 흉노전에 [흉노부자 동궁려이와]라 하였음.


128)□□지□=□□은 눈을 부라리는 모양인데 눈 부라림을 당한 것과 같은 □소한 □□을 말함. 사기 □□전에 [일□지□필□ □□지□필□]라 하였음.


129)농이=왕거를 가리킨 것으로 여기서는 제국대장공주를 말한 것임. 시경 소남 하피농의장 [하□승□ □여□이 평왕지□ □후지자]의 □전에 [왕□여□후지자 □색□성운운]이라 하였음.□


130)□□=□신□성(수)의 □이니 □신을 수□한다는 뜻임. 진서 최□전에 [□일 □하 가이□□무위 □신□수운운]이라 하였음.


131)□황=승려와 도사의 □이니 승려는□의를 입고 도사는 황□을 씀으로써이다. 법□□림에 [□조□황 □□명교]라 하였고 □중□상□정서에 [고자사민 주□지하 □육민]이라 하였음.


132)사화=사신을 말함. 시경 소□ 황황자화장서에 [황황자화 군도신야]라 하였음.


133)구원=구중궁궐의 뜻. 천자의 궁궐을 말함.


134)단총=임금의 총명을 말함이니 서경 주□[단총명 작원후 작민부모]의 전에 [인성총명 측위대군 이위중민부모]라 하였음.


135)한호=험□을 □산시키는 큰 호령의 뜻이니 주역 환봉 구오의 □사 [환한기대호]의 [인우험□ □□이노 칙한종체출 호이유□험□야....능행호령 이산험□자야]라 하였음.


136)황농=황□한 □사란 말로 즉 고려가 스스로 겸손하여 자기 나라를 낮추어 말한 것임. 설원 □문에 [토지황□ 유로실현]이라 하였음


137)지손= 원대 친왕과 공신에게 주는 관복. 철경록 지손연복에 [원제 내연제신 개사지손의 위 일색의야]라 하였음.


138)부두연=부두주로 설한 잔치. 부두주는 취하기 쉬운 술. 백거역 기최사군시에 [일합두주 홍료사옥□]라 하였음.


139)쌍연곡=고려가사의 일종. 현 고려사악지.


140)단판=악기명으로 박자를 취하는 백판임.


141)천추절=황후 또는 황태자의 생일절. 육부성어 예부 [천추령절]의 주해에 [황후 황태자탄일 칭천추절 재고시 왕작역칭지 금불상]이라 하였음.


142)반한=환발한 소령을 철회하는 뜻이니 땀이 한 번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왕자의 호령에 비한 것임.한서 유향전에 [환한기대호 언호령여한 한출이불반자야 금출선언 불능유시이반 시반한야]라 하였음.


143)게일과 동운=게는 고거의 뜻으로 게일은 높이 뜬 해를 말한 것이니 로선 송등선지사관귀전당시에 [왕공여제덕 소소일월게]라 하였으며 동운은 우설을 내리는 구름을 말하는 것이니 시경 소아 신남출장 [상천동운 우설분분]의 소에 [성왕시 재상천 동기기운 정어동월우하 차설분분연다이적야]라 하였고 서경남기에 [설운일동운]이라 하였음.


144)전동위희운운=□성왕과 숙□에 관한 고사이니 본서 제 1책 52혈 (주5) 참조.


145)장금 담담지가 루염염지음=이는 천자가 제후를 취연하는 노래한 시경 소? 담로음 [담담로사 비양불희 염염야음 불취무귀]에서 나온 것으로서 군은을 신하를 이슬에 젖은 초불에 비하고 염염은 안한의 뜻으로서 안한히 밤술에 취하는 것을 읊은 것이다.


146)운래= 운잉(자손) 래손(원손지자)의 략칭으로서 자손의  뜻으로 해석됨.


147)구량=구구(노비)와 량민의 략칭인 듯.


148)축리=신에게 제왕의 복을 비는 것을 말함. 본서 제이책 삼팔칠혈(주일)참조.


149)성갑일=본책 15혈(주2) 참조.


150)해청=해청은 해동청으로서 응(매)의 이름. 본책 35혈(주1)참조.


151)복육=천지가 만물을 덮어 키운다는 말로 상국의 은혜를 뜻함. 복재지혜와 같음. 본서제2책 499혈(주5)참조.


152)위복=임금이라야 위와 복을 오로지 한다는 뜻. 본서 제2책 471혈(주3) 참조.


153)구량=본책 191혈(주3) 참조.


154)대덕3년=원 성종의 연호(1297~1307).


155)정편=제후의 조회를 받을 때에 행하는 의식의 일종으로 미리 정한 방법에 의하여 암호로 사용하는 채찍을 말함. 선화견사 전집하에 「월삭조제후 정편3하향 문무양반제」라 하였음.


156)산호=신민이 만세를 부르고 천자를 축하함을 말함. 사물기원 조정주조부 산호에 「후인이호만세위산호자 기사개기어한무제시 안전한무제본기왈 원봉 원년 정월등고숭 어사승속재묘방 리졸함문호 만세자삼 흘금삼호이위식이호산호야」라 하였음.


157)각삭=인면을 조각함에 있어 먼저 비는 할 수 있는대로 크게 하고 목은 할 수 있는대로 적게 하여야 하는 것이니 비를 적게 깎아놓으면 나중에 크게 할 수가 없는 것이며 목을 크게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그것을 적게 다듬을 수가 있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요컨대 일을 할 때에 각각 격에 맞도록 헤아려서 마련하여야 한다는 뜻임. 한비자의 세림하편에 「각삭지도 비막여대 목막여소 비대가소 소불가대야 목소가대 대불가소야 거사역연 위기불가복자야 칙사□패야」라 하였음.


158)과요=나누어 가진다, 분배 분할한다, 토색질 한다는 뜻임. 복혜전서 서정부 액외잡변에 「유시관무염지이엄금리서과요 칙소민면방 기서기호」라 하였음.


159)생수=견디기 어렵다, 받기 어렵다는 뜻이니 통속편 경우생수에 「원전장 견처심다 여운관인 매주천설황 교백성생수 사신도외두소요 교백성참적생수 합관제문 대저즉난위의이」라 하였음.


160)반궁=제후의 학교를 의미함. 본서 제이책 일삼칠혈(주팔) 참조.


161)부상=부상은 중국의 동방에 있는 고 국명인 바(일본의 칭호로도 쓰임)여기에서는 동국의 뜻으로서 고려를 말함. 남사이맥전에 「부상국 재중국지동 기토다부상목 고이위명 부상엽사동초생여위 국인식지」라 하였음.


162)농이=본책 일칠칠혈(주일) 참조.


163)위유=초목이 성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말함. 광운에 위유은 초목화모라 하고 좌사 촉도부주에 「선왈 위유 화선호모」라 하였음.


164)완련=친애하는 것을 말함. 후한서 주우전찬주에 「완련 유친애야」라 하였음.


165)구소=구천과 동의어인데 즉 구중 궁궐을 말함. 왕유 조조시에 「구천여합개궁전」이라 하였음.


166)신총=천총. 임금의 총문을 말함. 본서 제일책 일일칠혈(주육) 참조.


167)항려=부처. 배우자를 말함. 좌전성공십일년조 「기불능비기항려이망지」의 소에 「항려자 언시상적지필우」라 하였음.


168)호부=동으로 만든 호형의 부절. 한문제가 군국의 수상에게 주어 발병하는 신부를 말함. 사기 효문제 「초여군국수상 위동호부」의 주에 「집해왈 동호부 제일지제오 국가당발병 유사자 지군합부 부합내청수지운운」이라 하였음.


169)치수= 치은 저울 눈. 수는 무게의 단위이니 극소한 것을 말함. 예기에 「분국여치수」라 하였음.


170)와각=와우지각 즉 달팽이의 뿔인데 극히 미소한 것들의 다툼을 비유한 것임. 장자 칙양편에 「유국어와지좌각자왈촉씨 유국어와지우각자 왈만씨 시상여쟁지이전운운」이라 하였음.


171)송석서아=선량과 폭악을 판결한다는 뜻. 시경 소남 행로장은 소공(석)이 청송하는 것을 노래한 것이니 동장에 수위서무아(서아는 강폭한 것을 비유한 것) 하이천아용(중략) 수위녀(여)무가 하이속(속은 소의 뜻)아송 수속아송 역불종녀」의 소에 「종불기예 이수차강폭지남」이라 하였음.


172)불인의인지조=사람에게 의지하는 궁조를 참아 해하지 않는다는 뜻. 온정균상상공계에 「궁조입회 미구타소 기금요수 갱탁하지」라 하였음.


173)상태=명과 수를 받은 별의 이름이니 진서 천문지에 「서근문창이성왈 상태운운」이라 하였음.


174)천시원=성좌의 명칭. 본서 제이책 일오혈(주이) 참조.


175)천구=성명이니 사기 천관서에 「천구 장여대분성 유성 기하지지류구 소타급염지 여화광 염염충천」이라 하였으며 그 주에 「성유미 방유단혜 하유여구형자 역태백지정」이라 하였음.


176)용화회=미륵의 하생을 상징하는 법회이니 형초세시기에 「사월팔일 제사각설재 이오향수욕불 작용화회 이위미륵 하생지징」이라 하였음.


177)무간=간(순) 우(적)를 쥐고 추는 춤이니 본서 제일책 사사오혈(주사) 참조.


178)호다량덕=호는 주대의 소국명이요 량덕은 박덕 비덕을 말함. 호에 량덕이 많다는 말은 즉 고려가 박덕하다는 뜻을 말함. 좌전 장자 삼십이년조「호다량덕 기하토지능득」의 주에 「량 박덕야」라 하였음.


179)정묘=순이 삼묘를 경략한 것을 말함. 본서 제일책 사사오혈(주사) 참조.


180)정탈=가부를 결정한다, 그대로 허하느냐 않느냐를 정한다는 말. 황조정치학문답에 「정 준기여차야 탈 불준여차야」라 하였음.


181)선성십철=공자와 그 고제십인. 공자를 선부 선니 선성이라고 하나니 월령 광의에 「오월사일선성탄 선성생로양공이십이년경자」라 하였고 십철은 론어 선진편에 「자왈종아어진채자 개불급문야 덕행 안연 민자건 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사

181)선성십철=공자와 그 고제십인. 공자를 선부 선니 선성이라고 하나니 월령 광의에 「오월사일선성탄 선성생로양공이십이년경자」라 하였고 십철은 론어 선진편에 「자왈종아어진채자 개불급문야 덕행 안연 민자건 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사

염유 계로 문학 자유 자하」라 하였음.


182)상좌=재래로 좌를 상으로 하였으나 원제에 따라 우를 상위로 하였다가 이제 다시 좌를 상위로 한 것임.


183)하황=먼 지방을 말함인데 왕기외위의 전· 후· 수· 요· 황의 오지성중에 황복이 최원의 지라 하였음. 진서 문제기에 「인풍흥어중하 유택포어하황」이라 하였음.


184)리강=황녀가 신하에게 가함을 말함. 본책 삼혈(주삼) 참조.


185)수주=수주는 수후지주의 약칭이니 수후에게 도움 받은 대사가 후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바친 주인데 천하의 지보를 말함. 회남자 현명훈「수후지주」의 주에 수후 한동지국 희성제후야 수후견대사장단 이약전지 후사어강중 함대주이보지 인왈 수후지주 개명월야」라 하였음.


186)일변=천자의 궁금에 가까운 곳이니 즉 조정을 말함. 본서 제일책 이사구혈(주사) 참조.


187)상주=공주의 배우자인데 천자의 녀를 처로 맞이함을 말함.


188)부수=부수지소 즉 티끌이 피부에 붙어 때(구)가 되는 것과 같이 참소하는 말이 자주 들리면 정이 상한다는 뜻. 론어 안연편「침윤지찬 부수지소」의 소에 「찬인지언 여수지침윤 점이괴물 피부수□ 점성구예」라 하였음.


189)강홀유타=강은 양자강이요 타는 그의 지류의 명인데 이는 서로 간극이 생긴 것을 비유하여 말한 것임. 시경 소남강유범장에 「강유타(정전에 「문산도강동별위타」)지자귀 불아과 불아과 기소야가」라 하였으며 해시서에 「문왕지시 강타지간 유적불이기잉비수 잉우로이불원 적역자회야」라 하였음.


190)옥하위석=잘 분별만 한다면 옥이 어찌 석이 되겠느냐라는 뜻임. 구박자에 「진위전도 옥석혼효 동광락어상동 균용장어훼복」이라 하였음.


191)농이=본책 일칠칠혈(주일)참조.


192)포상=포는 본의 뜻이요 상은 뿌리가 많은 나무이니 포상은 견고하다는 의미임. 주역 부괘효사구오 「계우포상」의 소에 포본야 범물계우상지포본 칙뢰고야」라 하였음.


193)학명지간 천리문천=학은 심원한 택변에서 울어도 소리가 멀리 들린다는 뜻이니 본서 제이책 사구칠혈(주일)참조


194)정성=혼정신성의 약인 바 부모를 섬기는 도리로 저녁에는 침구를 정하고 아침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 예기 곡예상에「범위인자지예 동온이하청 혼정이신성」이라 하였음.


195)극가지사=가사를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사자라는 뜻. 주역 둔괘 효사 구이 「납부길자극가」의 소에 「납부임내리중 간료 기임 즉시자손 능극하가사운운」이라 하였음.


196)의실=화목한 가정의 뜻으로 시경 소아 상체장「의이실가」의 략칭임.


197)칠관제생=칠관은 예종때에 설치된 국학의 칠재. 본서 제이책 칠이구혈(주일) 참조.


198)애일잠=일광을 아끼는 잠언. (1)공부하는데 잠시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 대대예 로자입사에 「군자 애일이학 급시이행」이라 하였고, (2)부모를 효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론어 리인에 「부모지년 불가불지야1칙이희1칙이구 어애일지성 자유불능이자」라 하였음.


199)가갈=가지즉 큰 소리로 사람의 왕래를 금지하는 것.


200)경덕재=예종이 국자감에 설치한 7재의 하나이니 경덕재는 시경전문의 재임.


201)전왈양로걸언=전은 예기 문왕세자편「범제 여양노걸언」의 정주에 「양노인지현자 인종걸미언가행자야」라 하여 현노를 길러 선언을 구한다는 뜻이라 하였음.


202)삼노오경=자래로 제설이 구구하여 일정치 아니하니 혹은 삼노와 오경은 각각 한사람으로서 년노하고 경험이 많은 치사자라 하고 혹은 삼로를 삼인 오경을 오인이라 하고 경자는 수의 오라는 설도 있음. 요컨대 삼노오경은 국가적으로 존대하는 현노를 가리킨 것이니 예기의 악기편에 「식삼노오경어대학」이라 하였음.


203)비판=재상이 군신의 주장에 의사를 가하는 것. 자치통감 당현종기 「장구령 비장수규주」의 호주에 「비 금인위지비판」이라 하였음.


204)축발=단발 동의어임. 곡량전 애공 십삼년조 주에 「축 단야」라 하였고, 서언고사 석교류 축발에 「하승피체종교」라 하였음.


205)고조=출곡의 통고. 즉 곡물의 매출을 원에 통고한 것.


206)승룡=룡과 같은 좋은 여서를 얻는 것을 말함. 동한의 환언의 녀가 황헌 이응이란 이인의 좋은 사위를 맞이한 고사를 말함. 초국선현전에 「황헌 이응 구취태위환언녀 시위환숙원량여구승룡 언득서여룡야」라 하고 서언고사옹서류에 「여서귀성 일승룡」이라 하였음.


207)축관=생관을 짓는 것. 즉 서의 거실을 말함. 맹자에 「제관어생이실」이라 하니 순이 제요의 이녀를 취한 고사에 의함.


208)분묘=모토를 나눔을 말함. 본서제일책 이십일혈(주일) 참조.


209)번보=제실을 수호하는 자, 즉 제후를 말함. 사기삼 왕세가에 「왕세위한번보 보국치민가불경여」라고 하였음.


210)사도=주대 육관의 일. 천지춘하추동 중의 지관. 한대 삼공의 일로 서경 주관에 「사도장방교 부오전 요조민」이라 하였음.


211)화수=많은  등화를 수지에 달아매는 것. 전원의 조회부에 「화등약호화수 치백지지황황」이라 하였음.


212)원구=환구라고도 함. 본서 제일책 일0일혈(주사) 참조.


213)불곡=국왕이 스스로를 비칭하는 말. 본서 제일책 107혈(주1)참조.


214)대기=대기는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큰 기한 즉 사기의 뜻으로 쓴 것인 듯함.


215)리강=본책 3혈(주3) 참조.


216)유윤=허락(윤허)한다, 승락한다는 말. 서경 우서순전 및 대우모에 자주 보이는 말로 송사 조보전에 「경득유윤」이란 말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