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흥망성쇠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7:03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흥망성쇠

 

 

1.'옹관고분사회'의 성립과 발전

 

영산강유역이 4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고 본 것이 이제까지 사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축적되어 감에 따라 이러한 생각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실상을 주로 고분의 분포상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로 떠오른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 지역은 철기문화가 보급됨에 따라 지석묘사회 단계 이래 유지해온 높은 생산력과 인구밀도를 바탕으로 하여 서서히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가더니 마침내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여지기에 이르렀다. 타지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옹관고분이라는 묘제가 영산강유역에 산재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옹관고분은 대규모 봉분에 U자형 전용 옹관을 매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서, 그 분포 지역은 무안·함평·영광·광주·해남·강진·화순·담양 등지에까지 걸치고 있고, 그 존속 기간은 대체로 3세기 중후반부터 2∼3세기의 기간 동안에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의 지배층이 옹관고분을 공통 묘제로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데, 이는 이 지역 일대가 단일한 정치권(政治圈)으로 묶여져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이렇듯 옹관고분을 지배층의 공통 묘제로 쓰던 영산강유역의 고대사회를 '옹관고분사회'라 부르기도 한다.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는 영산강의 큰 지류인 삼포강을 따라 연접해 있는 영암 시종면 일대와 나주 반남면 일대였다. 이 일대에는 대형 옹관고분이 밀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종면의 성틀봉토성과 반남면의 자미산성 등의 방어시설이 확인되고 있어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의 입지처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 시종면 일대의 옹관고분은 대체로 3세기∼5세기 전반에 조영된 것으로 편년되고 있는 반면에 반남을 기점으로 하여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그 중심지를 삼포강 하류의 시종면 일대에서 상류의 반남면 일대로 옮겨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면을 고려하여 여기에서는 시종면 일대를 전기 중심지로, 반남면 일대를 후기 중심지로 구분하기로 한다.


먼저 전기 중심지인 시종면 일대의 고고학적 흔적을 살펴보자. 시종면 일대에는 늦어도 3세기 후반 경으로 편년되는 대형 옹관고분군이 밀집해 있고, 이 고분군 근처에 성틀봉토성이 축조되어 있다.(1) 고분군은 삼포강 하류의 연변을 따라 내동리·와우리·옥야리·신연리·금지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데,(2) 이중 내동리 고분군이 규모와 밀집도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성틀봉토성은 내동리 고분군에서 지근한 거리에 있는 나지막한 산의 정상 주위를 돌아가면서 테를 두른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정상부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함인지 둘레를 수직으로 깎아 내려 몇 개의 단층을 이루게 한 계단식의 형태로 축조되었다. 대형 옹관고분의 축조 의도가 죽은 이의 권위를 강조하여 살아있는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한다면, 토성의 축조 의도는 지배층이 조직력을 강화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분군과 축성의 존재는 고대 정치조직체의 존재를 반영하는 유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삼포강 하류에 위치한 시종면 일대에는 내동리를 중심으로 완만한 구릉평야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러한 평야의 존재는 국가체 유지를 위한 경제적 토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분군 및 축성의 존재와 더불어 주목되는 바이다. 시종면 일대에는 이 3가지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3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국가체를 이끌어간 정치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옹관고분의 밀집도와 규모로 볼 때, 이 정치세력은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 일대에 분포하고 있던 옹관고분사회를 아울러서 동일한 고분문화를 바탕으로 한 단일의 정치권(政治圈)을 영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서(晋書)』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다음의 기사를 통해서 이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이에 장화(張華)를 '지절 도독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持節 都督幽州 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으로 삼아 전출하였다. 신구(新舊)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케와 중국이 그를 따랐다.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유주(幽州)와의 거리가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내부(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케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3)

중국 진대(晋代)의 명제상 장화가 유주자사로 좌천되어 변방정책을 혁신적으로 추진하자. 이제까지 내부하지 않던 '동이 마한의 신민제국' 20여국이 282년에(4)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해서 조공을 바쳐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미제국'은 그 앞에 마한이 관칭(冠稱)되어 있고, 산과 바다로 불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서남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그중에서 특히 영산강유역을 지칭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미제국은 바로 그 즈음에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 일대에서 대두된 것으로 파악되는 '옹관고분사회'에 대응되는 바라 할 것인데, 이는 시종면 일대에 옹관고분군과 토성을 축조한 세력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즉, 3∼4세기 단계의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 지방의 고대사회는 시종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20여국이 일종의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옹관고분사회'는 5세기 중후반 이후에 중심지를 시종면에서 반남면 일대로 옮겨감과 함께, 여러 가지 중요한 발전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후기 중심지인 반남면 일대에는 옹관고분의 규모가 초대형화되어 갔고 그 부장품도 薄葬의 경향에서 화려한 厚葬의 경향으로 변하였으며, 성곽도 시종의 성틀봉토성에 비해 반남의 자미산성의 규모가 훨씬 대규모적인 양상을 띤다. 이러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와 함께 반남면 일대로 중심지를 옮겨가면서 그의 영도권을 더욱 강화해 갔으리라는 추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산강유역에는 3세기 후반에 '왕관고분사회'가 독자적인 고대사회로서 성립된 이래 중심지를 시종면에서 반남면으로 옮겨 가면서 6세기 전반까지 유지·발전되어 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백제의 영산강유역 지배

 

'옹관고분사회'가 후기 중심지로 옮겨가면서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던 5세기 후반의 바로 그 시점에, 백제 계통의 횡혈식석실분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이라는 외래의 고분이 주로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현상으로서 그 의미를 다각도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러한 현상을 '옹관고분사회'가 백제 및 왜와 적극적인 문화 교류를 했던 흔적으로 일단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보기에는 문제점이 있다. '옹관고분사회'가 백제 및 왜와 적극적 교류를 전개해갔다고 한다면 그 중심지의 맹주세력이 이를 주도했을 터이므로, 시종 및 반남지역에서 먼저 이러한 외래 고분의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들 외래 고분들은 중심부를 피해 주로 주변부에서만 나타나고 있고, 중심부에서는 오히려 토착 묘제인 옹관고분이 더욱 강화 발전되어간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어, 단순한 교류의 흔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외래 고분의 규모가 토착 옹관고분의 그것에 상당하는 것이어서, 단순한 문화요소의 유입 정도로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래 고분의 출현 현상은 곧, 백제나 왜 등의 외세가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부터 서서히 영향력을 침투해 들어오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5세기 중후반 당시에 백제와 왜는 중국 남조사회의 풍부한 물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양 교역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대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자연히 해상 교역권의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영산강유역은 교역 루트의 중요 거점으로 각광받고 있었을 터였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백제와 왜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선점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가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백제 계통의 횡혈식석실분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동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두 외세의 영향력 침투 경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으리라 본다.


그런데 그 경쟁의 결과는 백제의 승리로 귀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반 이후 영산강유역에는 토착의 옹관고분와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은 완전 소멸되어 버리고, 오직 백제 계통의 횡혈식석실분만이 영산강유역 전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백제가 6세기 중반 이후에 왜 세력의 침투 시도를 분쇄하고 토착세력을 압도하여 영산강유역을 완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6세기 중반이란 시기는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538년 이후의 이른 바 '사비시대'로서, 이 시대에 백제는 5방제(方制)라는 지방제도를 새로이 정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5) 5방제란 전국을 중방과 동방·서방·남방·북방의 5방으로 5대분하고, 그 각 방을 다시 수개의 군으로 나누어 편제한 지방제도를 말하는데, 이러한 5방제의 성립은 전남 지역에 대한 편제를 완료한 시점에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방은 전북 지역을, 북방은 부여 이북의 충청도 지역을, 남방은 전남 지역을, 서방은 서해안 지역을, 동방은 부여 이동의 충청도 지역을 대상으로 편제한 광역 행정단위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전남 지방은 6세기 중반 이후에 남방으로 편제되어, 백제의 완전한 지배 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강봉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