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는 우리 고대사의 핵심”
기사입력 2005-07-06 18:21 최종수정 2005-07-06 18:21
인천시 계양구 계양산성에서 최근 ‘한반도 최고(最古) 목간(木簡) 확인’이라는 빛나는 고고학적 성과를 올린 선문대 고고연구소 이형구 소장은 한성백제 연구를 필생의 화두로 삼고 있는 ‘외로운 고고학 연구가’이다.
지난달 27일 ‘인천 계양산성 동문지 내 집수정 출토 목간 보존처리 결과 보고’에서 확인된 ‘5각 목간’의 존재는 학계와 언론의 관심을 촉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매장 연대를 4세기로 추정하고 있어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굴된 목간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목간의 5각 면에는 먹빛도 생생한 1700년 전의 명문이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바로 ‘논어’의 주요 구절이었다. 5각 목간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논어집’이기도 했다. 종이가 귀했던 당시 백제인들은 이미 2∼3세기 무렵에 나무에다 글을 써 높은 학문의 경지에 다가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아직 미명인 한성백제 연구의 여명을 밝히려 든 것은 1981년 대만대학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이다.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약 500년 동안 한강 유역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한성백제는 그에게 너무나 가슴뭉클한 존재였다. 서울 풍납토성을 도성으로, 몽촌산성을 보조성으로, 한강 어구인 계양산성을 군사적 요충으로 삼아 북으로는 황해도, 남으로는 호남 지역까지 세력을 떨쳤던 한성백제는 주변국들에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친 강력한 고대 국가였다.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이 교수는 1996년 선문대에 역사학과를 신설해 학생들을 이끌고 처음으로 풍납토성의 지표 및 실측 조사에 들어갔다. 그는 이듬해 이곳에서 백제 왕성 유적을 발견, 백제 시조 온조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하남위례성이 바로 풍납토성임을 밝히는 연구 성과를 내놓는다. 백제는 이렇게 풍납토성을 거쳐 공주와 부여로 도읍을 옮겨갔던 것이다.
그는 융성했던 한성백제의 유적이 국토 재개발로 파손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아직 개발의 삽질이 미치지 못한 계양산성과 강화를 주목한다. 이 교수는 대학원장이 되어 몸이 더 바빠졌음에도 학사일정이 없을 때는 이곳에서 살다시피 한다. 이 교수는 “1, 2차 발굴조사에서 계양산성의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와 당시 높은 문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 화살촉과 창끝, 철제칼, 토기, 목간 등 유물이 발굴된 것은 계양구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1.2㎞에 이르는 성벽 중 서벽과 동벽의 20m가량의 발굴 조사에서 이 같은 성과가 나온 만큼 나머지 지역을 체계적으로 조사해 보면 의외로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동문과 성벽, 집수정, 병영 터 등을 복원하면 이 지역의 위대한 문화유산 하나가 탄생될 것 ”이라며 “풍납토성이 사적이 된 것처럼, 이제 계양산성도 국가 차원에서 사적으로 지정하는 문제를 본격 논의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정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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