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천안삼거리 능수버들...1941년판 “半島山河”

吾心竹--오심죽-- 2013. 2. 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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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판 “半島山河

천안삼거리 능수버들

 

천안삼거리와 관련된 문헌자료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던 터에 1941년 京城 三千里社가 출판한 “半島山河”에 천안삼거리 능수버들 글을 찾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향토사를 연구하는 임명순선생이 발굴했다. 글은 시인 수필가 노자영(1898~1940) 황해도 장연 사람 작품이다.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이라면 우리는 매우 아름다운 서정적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고전적 색채가 짙은 세거리 가두에 몇 천 년을 묵은 듯한 능수버들이 멋대로 늘어져 흐느적 거린다면 이 얼마나 시적 감상을 자아내기에 족할 것이냐? 마치 성녀(聖女)가 흑발을 풀어 헤치고 엎디어 기도나 하는 듯한 풍경은 상상만 하여도 우리의 몽상과 낭만적 기분을 채우기에 넉넉하다.

 

천안삼거리 능수나 버들은 제멋에 겨워서 축늘어 졌구나 흥

에화라 지화자 나 돌아간다 흥 유정님 두고 나돌아 간다 흥

 

이 노래는 가장 조선사람에게 많이 회자(膾炙)된 노래로써 천안삼거리의 풍경을 잘 나타내인 노래이다. 나도 이 민요에 적지 않게 취하고 따라서 천안삼거리에 커다란 동경을 가졌었다.

 

십여년전 오랜 옛날이다. 나는 천안능수버들 아래서 하루의 명상이라도 하여보고 싶은 마음에 경성(京城)서 차를 타고 천안행을 하였다. 나는 차중에서 천안삼거리의 풍치를 맘에 그리며 수십주의 능수버들이 땅에 척척 느러저 구름 물결같이 흐느적 거리고 그 속으로 미풍조차 신의 호흡인 듯이 성스러우리라고 연상하였다. 그러나 천안역에 나리어 삼거리를 물어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슴에 그리던 어여쁜 공상이 하느바람에 구름 허여지듯이 어디로 가버린 듯 하였다만은 어여쁜 민요를 남은 천안삼거리가 이렇게 자최조차 없을리는 만무하였다. 그래서 다시 좀 나이 늑수구려한 노인에게 물었더니 소위 옛날의 삼거리는 한 오리쯤 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다시 호기심을 가지고 경부선을 옆에 끼고 도보로 큰길을 따라 한 오리쯤 내려갔다. 과연 거기는 조그마한 세거리가 있었다.

초가집이 두서너채 있고 그 중에는 술집까지 있다. 쓸쓸한 거리가 아니냐? 십주 수십주로 연상하였던 능수버들은 모두 그리던 꿈의 파편이요 다못 버드나무 한그루가 노쇠한 몸을 겨우 지탱하고 봄바람에 삐꺽삐꺽 비명을 칠뿐이다. 그나마 본가지는 많이 부러지고 곁가지만이 춘풍을 받아 세사같은 줄기가 땅에 몇가닥 느러졌다.

 

아 세월이 가고 산하가 변한다. 하지만 조선인의 입에 많이 오르나리던 능수버들이 모두 자최조차 없어지고 지금은 단하나의 버들이 그나마 노쇠한 놈을 겨우 거누고 있단 말인가? 지금 내가 삼거리 민요를 읊어 본다면 천안삼거리 능수나 버들은 바람에 갈리고 우로에 젖어서 자최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흥 이렇게 부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공상을 깨친 것도 섭섭하지만은 옛날의 싱싱튼 능수버들이 한나무 한나무 죽어 버리고 이젠 단 한나무가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운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여간 비극이 아니다.

 

이곳 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으로부터 오육십년 전만해도 세거리의 능수버들이 솟발같이 서서 그 수백 수천의 싱싱한 가지가 멋대로 느러저 흐느적거리던 그 장관이란 실로 미의 극치로써 천의(天衣)가 바람에 퍼득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천안삼거리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정과 애상의 로망스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작자 : 노자영(盧子泳, 1899~1940)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日本大學(니혼대학) 수학(1925)

“신인문학” 간행(1934)

조선일보사 출판 “조광(朝光)” 편집(1935)

소설, 수필, 시 작품 다수

※ 제공 : 천안역사문화연구실

 

 

 

 

 

 

 

1941년판 “半島山河

천안삼거리 전설

 

천안읍지(天安邑誌)를 뒤져보면 눈물나는 천안삼거리와 능수버들의 “로만스”가 적혀있다.

 

지금으로부터 이백여년전이다. 경북 안동읍에 김씨가 있어서 그의 아들로 을동이가 있었고 동시에 그의 형이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그의 형의 아들 갑동을 집에 데려다가 가치 교육하였었다. 이 갑동과 을동은 사촌간이나 형제이상으로 의(誼)가 좋고 동시에 오순도순하게 공부도 잘하였었다.

 

그러나 을동은 얼굴이 잘 생기고 풍채도 좋아서 각처에서 혼인신청이 많았으나 그 형인 갑동은 별로 혼처가 없었다. 이러는 중에 을동은 천안 이진사의 딸과 결혼하게 되여 장가를 가게되고 갑동은 그때 마침 과거령(科擧令)이 나려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게 되였다. 그러나 비극과 로만스는 여기서 빚어지고 천안삼거리의 애타는 민요도 여기서 나타나게 되였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가경으로 들어가게 된다. 갑동은 과거보려, 을동은 장가들려 다가치 안동을 떠나서 도중에서 이틀밤이나 자고 천안에 당도하게 되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갑동과 을동은 서로 나누어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더구나 을동은 여기서 그날 밤을 자고 십오리쯤 되는 처가로 가서 성례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된 것이다. 갑동과 을동은 어려서부터 가치 자라고, 또는 한 이부자리에서 가치 자고 가치 일어나는 등 기거를 가치하고 고락을 가치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서로 떠나는 그들의 마음은 적지않게 섭섭하였었다. 그래서 그날 밤도 그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밤이 깊어가는 줄도 아지 못하고 지내다가 부지중에 잠이 들게 되었다.

 

갑동은 자다가 머리가 이상하여 깨여보니 자기의 머리엔 상투가 틀려있고 을동은 간곳이 없었다. 갑동은 ①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자기의 옷속을 뒤져보니 한 장의 편지가 있었다. 떼여 본즉 그것은 을동의 편지로 자기는 동생의 신분으로 형님을 두고 먼저 장가 갈 수가 없으니 형님이 대신 가고 자기는 과가를 보러 간다고 과거 보따리조차 없어졌었다.

 

갑동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딴 방에서 주무시는 자기 삼촌에게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 삼촌은 화가 나서 안동으로 그만 가고 갑동만 혼자 남게 되었으니 그 사세(事勢)가 난처한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갑동은 을동의 부탁으로 보든지 또는 이진사집 사정으로 보든지 자기가 대신 장가를 가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그러나 후행없는 신랑이 혼자 갈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사정을 옆방에서 자고 있던 전라감사의 아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소년은 쾌히 허락하고 그가 후행을 서주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갑동은 이진사 집으로 가서 자기가 을동인체하고 성례를 하였다. 밤이 되어 갑동과 이감사(李監司)의 아들은 근 삼경이 지나도록 술을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술에 취하여 곤히 잠이든 이소년(李少年)을 신부방으로 집어 넣고 갑동은 슬적 몸을 빼여 천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소년(李少年)은 자다가 깨여 보니, 자기가 신방에 있고, 더구나 신부와 가치 한자리에 누운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②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어찌할바를 몰랐으나 일이 이렇게 된지라 양반의 처지에 남의 처녀와 한자리에 잤으니 그 처녀와 일생을 가치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였다. 천안에서 묵던 이감사(李監司)도 이 말을 듣고 이것도 역시 인연이라하여 그 아들과 이진사의 딸과 ③천정배필(天定配匹)을 삼았다. 그리고 갑동은 감사의 딸과 결혼하여 역시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 동안에 서울로 갔던 을동은 훌륭히 과거에 뽑히게 되고, 그 천품(天品)의 인격과 재예(才藝)를 사랑하는, 과거에 참여했던 시관(試官)은 을동에게 자기 딸을 주어 사위를 삼게 되었다. 이 얼마나한 경사인가?

 

그후 갑동과 을동과 이소년(李少年)은 천안에 모이어 천안은 그들에게 있어서 운명과 출세의 땅이라고하여 기념으로 천안삼거리에 버드나무 하나씩 심으게 되었던 것이다.

 

갑동은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심으고, 을동은 서울로 오는 길목에 심으고, 이소년(李少年)은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심어서 세 버드나무가 솟발처럼 서게 되었다.

그 후 세 사람의 심은 버드나무는 자라고 크고 가지가 무성하여 그 ④천사만조(千絲萬條)로 실실이 느러진 능수버들이 바람에 휘날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세 사람의 고은 “로만스‘와 능수버들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고 나리는 동안에 어느듯 민요가 되고 또는 그 민요가 전 조선사람들의 입에 오르 나리게 된 것이다.

 

 

 

※ 1941년 三千里社 출판 “半島山河”중 천안삼거리 능수버들

 

※ ①망지소조(罔知所措) :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모름.

※ ②대경실색(大驚失色) : 몹시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함.

※ ③천정배필(天定配匹) : 하늘이 맺어준 배필.

※ ④천사만조(千絲萬條) : 천개의 실, 일만 가지처럼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

 

 

※ 작자 : 노자영(盧子泳, 1899~1940)

호(号) : 춘성(春城)

황해도 장연 송화군(추정)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양재학교 교사

日本大學(니혼대학) 수학(1925)

“신인문학” 간행(1934)

조선일보사 출판 “조광(朝光)” 편집(1935)

소설, 수필, 시 작품 다수

산문에서 소녀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

 

 

※ 제공 : 천안역사문화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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