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1

교열공 민오(閔悟)와 아들 여흥부원군 공목공 민효증(閔孝曾) 묘소 탐방...직산 성산~입장 한림봉

吾心竹--오심죽-- 2012. 11. 15. 19:47

< 여흥민씨, 교열공 민오(閔悟)와 아들 여흥부원군 공목공 민효증(閔孝曾)의 묘소 탐방...직산 성산~입장 한림봉 > 

 

* 직산 민익현 가옥...문화재자료 제290호...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

 

 

 

 

 

* 교동공려조합장 민재기 송덕비...1939년(소화14년 건립) // 

 

 

 

 

* 교동공려조합장 민재기 송덕비...1939년(소화14년 건립)...민익현의 부친 // 

1945년 해방을 겪으며 서있다.  동네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가 동네의 유지이자 부자인 민재기를 이용하여 재산을 많이 수탈하였다고 함.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1945년 8월15일 해방후 직산현 관아와 주변에 벚꽃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해방을 맞이하여 직산읍민들이 이를 톱과 도끼로 베어내고 찍어 없애버렸다 한다.

그러나 민재기는 비록 친일을 하였지만 공과를 따져 그의 공이 더 많아 교동 동네에 그의 송덕비를 그대로 두었다고도 전한다.

민재기의 성품은 과묵하고 조용하였다고 전하며 친일을 한 것은 일제의 종용과 압박에 의해서 였다고 하며 많은 재산을 일제에 뺏앗겼다고도 한다.

이 송덕비는 그의 집 동쪽 길옆에 있던 것을 6.25전쟁 전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설치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민익현은 이유야 어찌됐든 아버지의 친일행위에 깊이 반성하며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였다고 하며,

1970년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였고, 성거읍 모전리 사회복지법인 익선원을 설립하여 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현재는 아들 민태호가 익선원을 맡아 사회봉사활동을 열심히 잘하고 있다.

 

閔載祺

민재기

1886~1948

천안

1911.5 직산공립학교 학무위원

1919.2 천안군 참사

1920.5 천안번영회 부회장,

       6월 직산청년구락부 회장

1923 백제상사(주) 회장

1926 천안미곡상조합 조합장

1931 천안군 직산소방서 組頭

1934 직산면 군서공려조합장

1936 성환금융조합장,도회의원

 

 

 

 

 

 

 

 

 

 

 

 

 

 

 

 

 

 

 

 

 

* 민효증의 묘소...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성산 성불사 입구 //

 

14世祖,공목공파(恭穆公派)시조, 민효증의 묘소...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성산 성불사 입구 //
자(字)는 희정(希正), 시호(諡號)는 공목(恭穆), 찬성사 민유의(閔由誼) 중현조에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찬성사 민호례(閔好禮)이다. 찬성사 민오(閔悟)의 세아들 중 막내이다. 만효창(閔孝昌) 사용공파(司勇公派)파조가 큰 형. 민효순(閔孝舜) 현감공파(縣監公派)파조가 둘째 작은 형이 된다. <출처...다음 블로그, 하얀그림움>

 

 

[간략정보]...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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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자    
1448(세종 30)∼1513(중종 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삼(希參). 유의(由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례(好禮)이고, 아버지는 오(悟)이며, 어머니는 봉안국(奉安國)의 딸이다.
1476년(성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경연전경(經筵典經), 1479년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1487년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489년 장령이 되었다.
다음해 박숭질(朴崇質)의 간원(諫院) 임용이 불가함을 적극 주장하다가 도리어 해임되고, 1491년 야인을 토벌할 때 서북면 도원수 이극균(李克均)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493년 사간·집의를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1497년(연산군 3) 상소문 10개항을 올려 경연의 필요성과 간언을 중히 여길 것, 사(邪)·정(正)을 밝힐 것, 절검(節儉)에 힘쓰고 애민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501년 형조참의, 이듬해 공조참판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할 때 함경도내의 사창(社倉) 설치로 민폐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1504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로 재임중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춘추관당상을 지냈다. 1506년 지의금부사와 좌·우참찬에 이르고, 같은 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여평군(驪平君)에 봉하여졌다.
1507년(중종 2)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성품이 강개하고 청백하여 언사가 매우 격하였으며 만년에는 조급하고 관용심이 없었다. 연산군 때에는 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로 있으면서 영선의 일을 많이 벌였고 연산군의 명에 잘 복종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참고문헌]『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여평부원군 시 공목공 민효증 지묘, 배 철원최씨 지묘 //

 

 

 

 

 

 

 

 

 

 

 

 

 

 

 

* 증 영의정 행 예문검열 민오 신도비...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행 무공랑 선공감역 부사과 민인 지묘 //

 

 

 

* 여흥민공 익현 지묘...민익현의 묘소...한림봉 서쪽 능선에 위치함 //

 

* 민오의 부인...증 정경부인 하음봉씨지묘...우측에 민오의 묘소가 있다 //

 

 

 

 

* 증 영의정 행 예문검열 민공 오 지묘...정경부인 하음봉씨의 묘는 서쪽 50m  지점에 있다 //

여흥민씨 입장면 종중은 석담.참판공파 종중으로 13세 오(悟)자 한림공이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 한림봉에 영정이 날려 자리 잡은 후

공목공-지애공으로 이어지는 후손 중에서 석담.참판공 자손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 증 영의정 행 예문검열 민공 오 지묘...정경부인 하음봉씨의 묘는 서쪽 50m  지점에 있다 //

 

 

 

 

 

 

 

 

 

 

 

 

 

 

 

 

 

 

 

 

 

 

 

 

 

 

 

 

 

 

 

 

* 입장 한림봉 유래 :

한림봉은 1899년 간행된 직산현지에 현 동쪽 25리에 있다. 민오의 묘소가 한림봉 아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직산현 고지도 및 문헌에 직산현과 안성현의 경계를 이루며,

한림봉 윗봉우리를 신례산, 최고봉은 부소산이며 백두대간 금북정맥이다. 예전 신례사란 사찰이 있다고 전함.

고려말 대학자 직산군 백문보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말년에 입장 양대리의 전장을 정리하여 떠났다.

백문보가 29세 때 1331년 한림원 검열이 되고,

34세 1336년 충숙왕 때 원나라에 갔다가 왕의 명으로 시문을 잘지어 한림원학사의 벼슬이 내려졌다.

백문보가 살았던 고향의 산이라하여 한림봉으로 산이름이 정했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여흥민씨 한림 민복이 살아서 한림봉이라고 산이름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 백문보(1303~1374, 호 담암, 동재...직산군-稷山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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