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1

평택 소사벌~성환 홍경벌...안성천유역 탐방-1

吾心竹--오심죽-- 2012. 3. 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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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溫祚)의 왕도(王都)이었음은 근거(根據)가 충분(充分)할 뿐 아니라, 더욱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건치연혁(建置沿革)에 「本百濟 南漢山城 始祖 溫祚王 十三年 自慰禮城 移都之 (下略) 」이라 하였나니 여상(如上)의 사기(史記)를 종합(綜合)하여 보면 온조왕(溫祚王)의 구도(舊都)이였던 것은 확실(確實)하지만은 하남(河南)이라는 하(河)의 위치(位置)가 금(今)의 한강(漢江)을 운(云)하였던 것인지? 또는 거성(距城) 2리 북(二里 北)에 있는 안성천(安城川)이 석일(昔日)에 있어서 하(河)이였던 것인지 확증(確證)키 난(難)하나 안성천(安城川)의 유역(流域)이 상당(相當)히 광활(廣闊)함을 볼진대 이시(伊時)의 하(河)이었는지? 또한 의문(疑問)인 바 성근지(城近地)의 촌명(村名)이 기로(耆老), 시랑(侍郞), 남창(南倉) 등 명칭(名稱)을 가졌고, 또는

근고(近古)에 있어서 채광(採鑛) 중에 지하(地下) 20여장(二十餘丈)에서 주즙(舟楫)의 파편부(破片部)를 다수(多數)히 발견(發見)하였음을 보면 현재(現在)의 육지(陸地)가 혹(或)은 기시(其時)의 강하(江河)인 듯한 의문(疑問)도 생(生)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사실(事實)이 종종(種種)있나니 필자(筆者)는 우월(偶越)하나 직산 위례성(稷山 慰禮城) 이 백제(百濟)의 왕도(王都)이였던 것이 무의(無疑)하다고 주장(主張)하고 싶다. 끝

 

 

직산 위례성 주즙...동아일보 1927.8.29.hwp

 

<출처-동아일보 1927년 8월27일 순회탐방...직산 하남위례성 기사>

 

 

 

 * 1894년 청일전쟁 성환전투도...안성천 수계 //

 

* 거먹다리 : 흑교(黑橋). 군두보(群頭洑)에 놓인 다리.  소나무로 놓았는데 썩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불로 조금 태웠다.
* 군두보(왜몰보) : 문화촌 서쪽에 있는 보. 평택군 팽성읍 북쪽 평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안성천을 막아서 보를 만들었는데 깊이가 두 길이 넘고 고종 31년(1894)에 일본 송기(松崎)대위가 일개 중대를 이끌고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이 보에서 몰살 되었다 한다.
* 망건다리 : 맹간교(盲看橋)다리. 망군(亡軍). 망근다리. 평택과 경계에 있는 큰다리. 

정유재란때 왜군이 명나라 우리 군에게 대패한 곳. 

* 복병(伏兵)재 : 복병티. 뱃봉재라고도 하는데 홍경리 앞에 있는 낮은 재(고개).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수 참정(參政) 양등산(梁登山) 부총(副總)  해성(解生)이 이곳에서 숨어 있다가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한다.
* 한우물 : 대정리(大井里) 홍경리 동쪽에 있는 마을 우물이 있는데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한다.

* 망전보(望戰) : 문열보 위쪽에 있는 보. 청일전쟁때 이 보에서 일본군이 청군 에게 망했다 해서 불러진 이름이라 한다.

* 쇠무덤이 : 쇠를 생산하고 남은 것을 쌓았던 더미가 있었는데 현재는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 부지로 매립되었다고 한다
* 골밭 : 기와장이 많이 나오며 부자가 살았다고 전해지며 행인의 편의를 보아 주었던 원(院)터가 있었다고도 한다. 도하리.
* 궁들 : 궁평(宮坪), 망건다리들 이라고도 하며 안궁리 둘레에 있는 큰 들. 조선조 말 궁중에서 추수해 가는 궁답이 많았다. 망건다리는 신가리 부근에 있다. 본래 이름은 맹간교이다.
* 가룡 : 궁말 서쪽에 있는 마을.
* 궁리내장보(宮里內腸洑) : 궁말 안쪽에 있는 보.
* 궁말 : 궁리(宮里) 궁들에 있는 마을.
* 아교(阿橋) : 애고다리. 궁말에 있는 다리. 다리가 좁고 길어서 처음 건너는 사람은 겁이나서 저절로 애고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 지질캥이 : 지족향(知足鄕). 지족향리 수향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때 재상들이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또한 백제때 지족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예전에 관이 있던 터라고도 한다. 지명에 옥이 있었다는 옥터 자리와 향교가 있었다는 향교 자리가 초등학교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관터였던 것은 분명 한 것 같다
* 자무실 : 잠실. 지질캥이 동쪽에 있는 마을. 세종때 잠실을 두고 농민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였으며 많이 길렀다고 한다.
* 점촌 : 무대 위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다.
* 무내 : 수천(水川)이라고도 하고 신천(新川) 몰내라 부르며 학정천이 옆이 된다.
* 성재 : 지질캥이에 있는데 성이 있었다고도 하고 성주가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 용정골 :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샘이 이 골에 있다.
* 새우대 : 농사를 지어도 김장 새우젓 값도 못나오는 천수답 이었다고 한다.
<출처...천안시 성환읍 안성천유역 지명유래 >

 

 

*청망이들=현지에서 불리는 지명에서 청일전쟁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청망이들은 성환 안궁리 일대 넓은 평야지대를 일컫는 말이다. 청망이들의 ‘청망(淸亡)’은 청나라 군대가 망한 곳이란 뜻이다. 안성천을 건너던 옛 다리(현 안성교)를 ‘망근다리’라고 부르는 데 일부에선‘망군(亡軍)다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여긴다. 여기서 망군은 물론 청군을 뜻한다.

성환 복모리에는 몰왜보(沒倭洑)로 불리는 둑이 있다. 왜군(일본군)이 이 둑에서 많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안성천을 건너면서 마츠자끼 대위 등 전사자가 속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엔 청군이 승리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와관련 당시 러시아외교관이었던 제노네 볼피첼리가 지은 『구한말 러시아 외교관의 눈으로 본 청일전쟁』(유영분 옮김, 2009년)의 “코키야마 중위는 선봉대를 지원하러 진격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20명의 병사와 함께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마침 그곳이 깊은 지점이어서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아산·성환전투=실제적인 전투는 성환에서 치러졌다. 청 패잔병 일부는 최초 주둔지였던 아산 백석포로 도주해 일본군이 추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군은 예치차오(葉志超)제독이 총지휘를 했으나 그는 병력 1000명을 데리고 공주로 이동해 있었다. 성환전투는 네스청(攝士成)이 약 3000명 청군을 지휘해 치렀다.

당시 청군 주력은 평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을 위에서 내려와 물리칠 생각이었다. 일본군은 아산의 청병을 치고 빨리 돌아와 평양의 청군에 대비해야 했다.

성환전투는 어둠 속에 벌어졌다. 6월 초 아산 백석포에 상륙한 청군은 곧 남하할 일본군을 성환에서 대적하기로 했다. 아산에서 싸울 경우 퇴로가 바다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7월 26일 오전 성환으로 이동한 청군은 월봉산(해발 83m·한솔현대아파트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약 4km 전방의 안성천에 나가 일본군을 맞았다.

1929년 발행 일본어판 『아산군지』(2008년 번역 발행)에 따르면 전체 청병력은 4000여 명으로 그 중 1000명을 천안으로 이동시켰고(예치차오가 공주로 이동시킨 병력을 말함), 성환전투에 투입된 청병력은 총 3000명이었다. 주력은 성환에 배치하고, 병사 1000명과 포병은 우헐리(현재 성환면 우신리)에, 초병 80명을 직산에 두고 방어진지 공사를 하고 일본군의 남하를 기다렸다.

안성천 전투는 7월 29일 오전 3시20분 시작해 30분만에 청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때 마츠자키 대위와 나팔수가 전사한다. 오전 6시 일본군이 월봉산 진지를 공격했다. 양쪽에서 포위된 청군은 오전 6시30분 요새를 버리고 도망했다. 오시마(大島)소장은 천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청군을 추격했고 다케다 중좌는 아산으로 진격했다. 당시 일본군의 총병력은 4000~5000명이었다.(일본측 자료는 병력 수를 줄여 3000명으로 기록했다) 패배한 청군은 공주로 집결해 청주·충주·춘천 등을 거쳐 평양까지 한달이상 걸려 이동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청군은 5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장교 6명과 병사 82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천안시지』(1997년)는 “성환에서 평택에 이르는 들판에는 몇년 전까지도 들일을 할 때 백골이 무수히 나왔다”고 적고 있다.

*소사평(素沙坪)의 악연=소사장(素沙場)은 일본군이 청군과 안성천을 사이에 두고 주둔한 평택의 지역 이름이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황씨는 “소사평은 성환·평택·안성에 걸친 넓은 평야지대를 총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청일전쟁터가 된 소사평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 부산에서 올라오던 왜군들이 이곳에서 명나라 군대에게 참패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명군이 처음으로 소사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사평은 400년 간격으로 중국과 일본이 승패를 주고 받은 곳이다. 정유재란 때는 왜군이 서울쪽이 아니라 천안쪽에서 올라 왔고, 청일전쟁 때는 중국이 성환쪽에 있었고 일본군은 위에서 내려왔다.

< 출처-유적·유물로 본 내고장역사 ⑥ 아산·성환이 겪은 청일전쟁 [중앙일보] 입력 2010.10.01 >

 

 

소사벌전투, 일본군 일방적 승리

경복궁 쿠데타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양력 7월25일 아산만 입구 풍도를 지나가던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였다. 청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 풍도해전으로 청의 북양함대는 군함1척이 격침되고 병사들과 보급품을 수송하던 영군선박이 침몰하면서 1200명의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일본은 풍도해전이 청나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기 원하는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풍도해전으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작전계획에 따라 오오시마가 이끄는 일본여단 4000명을 삼남대로를 따라 평택(진위)과 성환으로 급파하였다. 청나라도 인천항으로 상륙하였던 부대와, 아산의 백석포와 평택의 군물(문)포로 상륙하여 성환과 아산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합류시켜 일본과의 일전에 대비하였다.

평택일대에 주둔한 청·일 양군은 진지구축에 들어갔다. 척후를 유천3동 군두포에 두었던 청군은 망근다리 부근에 망루(망군대)를 세우고 적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삼남대로를 따라 남하하여 소사벌 일대에 진을 친 일본군도 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1894년 7월28일 저녁 청·일 양군은 소사벌과 성환부근의 홍경평에서 격돌하였다. 싸움은 밤을 새워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으며 총성과 대포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야간에 전투가 전개되면서 당시만 해도 간석지와 황무지, 웅덩이가 대부분이었던 소사벌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일들도 발생하였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해 헤매던 일본군이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왜몰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도 이때였다. 일본군이 빠져 죽을 때 열 대 여섯 살쯤 되는 북치기 소년은 죽어가면서도 북을 치는 임무를 그치지 않아 일제강점기 성환 홍경마을 입구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소사벌과 홍경평 일대에서 전개되었던 싸움은 사전준비가 철저하였던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역사에는 '성환전투'라고 기록된 일련의 전투에서 청군은 5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군은 단 68명만 잃었을 뿐이다. <출처-김해규 장연환의 평택역사산책-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 청일전쟁 일본군...충혼비...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안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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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위례성 주즙...동아일보 1927.8.2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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