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천안 목천토성(남화토성)

吾心竹--오심죽-- 2012. 2. 3. 14:55

한국의 산성(71) - 백제 목천토성(天安 木川土城) 한국의 성(城)/문화

2006/07/1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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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성(71) - 백제 목천토성(天安 木川土城, 충남 천원)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산 1-1 번지
시   대 : 삼국시대(백제로 추정)
발굴연도 및 발굴기관 : 1983. 12, 1984. 3 충남대학교 박물관

 

 


이 유적은 독립기념관 건립시 그 부지내에서 발견되어 발굴조사된 토성지로 흑성산(해발519m ) 남동기슭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말단 언저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조사는 성벽의 존재와 그 성격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과 성안의 유적을 발견하기 위한 탐색조사 작업으로 나누어서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은 판축기법(版築技法)에 의하여 축조된 성벽임이 판명되었다. 성벽의 너비는 5-9m이고 높이는 현재 제일 잘 남아 있는 곳에서 2-7m 정도였다. 그리고 성벽의 내외면은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성안에 대한 탐색조사에서는 주목할 만한 유구의 확인은 없었고 단지 토기, 와편을 포함한 토층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유물로는 토기편과 와편이 주로 출토되었는데 토기편들 중에는 목부분에 특징 있는 단선의 물결무늬가 새겨진 대형의 항아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유적의 연대를 추측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토성지는 판축의 기법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의 판축기법이 적용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일단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적이 위치한 목천(木川)에 대목악군(大木岳郡)이 설치되었던 사실과 이 대목악군이 삼국후기 백제와 신라의 점령지대였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중에서도 6세기 후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된다.  
한편, 이 목천토성은 우리나라 고유의 성곽형식인 산성과 비교할 때, 그 입지조건에서 특이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이 목천토성은 백제시대에 있어서 읍성(邑城)의 기원 형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적이라 하겠다.  
이 목천토성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는 토성의 성체가 순수한 판축기법에 의하여 축조된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판축시공에 있어서의 기술적 과정이 부분적으로나마 해명됨으로써 우리나라 고대 축성제도를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목천토성은 고대 축성법에 도입된 판축공법으로 구릉 위에 축조하였는데, 당시 잔존 부분은 북·서변에 걸쳐 길이가 약 190m에 달하였으며 복원한 전장(全長)은 약 450m에 달한다. 이 토성은 성체의 축조과정이 약 3.8m의 길이로 구분되었으며 그것을 공사단위로 정하여 순차로 시공하고 있다.

 이러한 분단식의 공법에 관해서는 중국에서는 1976년에 실시된 정주(鄭州) 상대성지(商代城址)의 발굴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으며 그때 조사된 매단의 길이는 약 3.8m로 보고되고 있다. 목천토성의 기저부 폭은 5.6m인데 그 내·외벽면 아래에 평행하게 석열(石列)이 나타났다. 길이가 0.3-0.5m 정도의 잡석을 2층으로 쌓았으며 이 석열의 전체 높이는 0.3m 미만인데 간단하게 1층으로 배열한 곳도 있다. 목주(木柱)들은 이 석열 사이에 위치하여 3.8m의 간격으로 세워졌으며 이와 같은 배치관계는 내·외벽면 아래에서 똑같이 발견되었다. 이 석열은 체성 기저부의 내·외벽 통과선을 할정하기 위한 기준선으로서의 역할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석열이 빈약하기 때문에 구조적인 기능에 대하여는 과히 기대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토사(土砂)가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구실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성체 통과선의 지면은 수평을 유지하도록 평탄하게 다듬어서한 구간(3.8m)안에 시설된 석열은 반드시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이 판축토루에는 가설용 목주가 사용되었는데, 이 목주는 매 단마다 접속되는 벽면에 1개씩 세워졌으며 현재 단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볼 때 그 높이는 1m 내외이며, 직경은 

0.15m 정도의 원목(圓木)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검토되었다. 서벽의 외부벽면에는 목주를 세우기 위해 풍화암반층 판 구멍이 확인되었는데, 그 구멍의 크기는 직경이 38㎝이고, 깊이는 약 25㎝이었다. 이 목주가 판축토를 가로막기 위하여 사용된 협판(夾板)을 고정하기 위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공사에 필요한 발판의 가설용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는 구명하지 못하였으나 가설물(架設物)을 받치기 위한 기둥이었다고 생각된다. 목천토성에서는 곤안(棍眼)이나 승안(繩眼)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벽면에 협판 흔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목천토성에서는 성기(城基)의 지형선택에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평탄한 지면에 의지하여 기저부를 설정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성 기저부의 부분이 경사면에 걸친 것으로서, 말하자면 계단식의 지형에 기저부를 두고 있는 경우가 있다. 즉 성체의 외벽은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내벽은 그 위의 평탄한 곳에 축조되어 있는 것이다. 계단식의 지형을 택할 경우 높게 축조되어야 할 외벽면에 비교하여 내벽면은 상대적으로 낮은 벽고(壁高)로 족하게 되므로 노동력이 훨씬 감축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방법은 평지도성을 축조했던 중국에서는 없었던 것으로서 한국에서 새로 개발된 축성공법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토성의 성체는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 상반부의 원형을 알 수가 없다. 판축벽면이 잔존한 것은 겨우 1.3m 내외인데 이 벽면의 경사도는 85˚가량이고 부분에 따라서는 수직에 가까운 곳도 있다. 중국에서는 이 경사도를 사수(斜收) 또는 수분(收分)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조법식(영조법식)』에는 성벽의 높이를 40척으로 정할 경우 기저부의 폭은 50척이 되고 상부의 폭은 30척으로 축조한다고 하고 있어 그 경사도는 약 76˚로 계산된다. 이 『영조법식』에 수록된 축성의 제도를 근거로 하여 목천토성의 성체 높이를 검토할 경우 그 기저부의 폭은 5.6m로 이에 대한 성고는 4.48m로 복원할 수 있다. 계단식의 지형을 이용한 곳에서 조사된 바로 외벽과 내벽의 기저면은 그 사이에 3.7m에 달하는 차고(差高)가 있으며 여기에 다시 내벽의 벽고를 계산하게 된다면 성체의 전체 높이는 4m 이상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판축에 사용된 토질은 구획된 분단마다 일정치가 않았다. 가장 정교하게 시공된 구간에서는 화강암의 풍화암반층에서 채토된 담황갈색 사질토(砂質土)와 적갈색 점질토(粘質土)인 산토를 사용해서 대체로 교차로 축성되었으며 한 층의 두께는 2-3㎝의 얇은 층도 있으나 8-10㎝ 정도로 다져진 층이 제일 많았고 그 이상으로 두껍게 퇴적된 층도 없지 않았다. 그 이외에 갈색점질토를 다량으로 사용한 분단도 있으며 시공에 정조(精粗)의 차이는 있으나 원칙적으로는 판축공법을 적용한 축성법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외벽의 하부벽면에 대한 보강시설(補强施設)이 6개소에서 확인되었다. 그 중 2개소는 석벽을 축조하였고, 그리고 3개소는 석괴(石塊)와 와편(瓦片)을 혼용하였으며, 그 외 1개소는 와편만을 사용하였다.

 그 중 석벽에 의한 보강시설은 그 일단이 목주의 위치에 맞추어 축조되었다. 이는 석벽에 의한 보강시설이 목주가 아직 부식되기 이전에 시공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석괴와 와편을 혼용하였거나 와편만을 사용한 보강시설은 축조기술이 미치지 못하여 매우 엉성하였으며 와편도 어골문(魚骨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공사시기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편들은 경부(頸部)에 단선파상문(單線波狀文)이 있는 대형 옹기(甕器)의 파편들이 가장 많았으며, 두텁게 외반된 구연부(口緣部)를 가진 연질토기의 파편들이 많은 편이었다. 
 

 

참고문헌 木川土城(尹武炳, 忠南大博物館·獨立記念館建立推進委員會, 1984)  
http://www.cheonan.go.kr/cheonan/pride_4.asp?no=313&page=36&keyfield=&keyword=&b_md=200 

http://myhome.hanafos.com/%7Eodorata/yujuk/paikje/mokchun/mokchu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