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1

직산 하남위례성...일명, 위례산성, 위례산 설명 정리

吾心竹--오심죽-- 2011. 7. 8. 14:55

* 직산 하남위례성...일명, 위례산성, 위례산 설명 정리 //

 

 

 

천안 부소산 직산 하남위례성...일명 위례산,.hwp

 

  

▢ 위례성(慰禮城, 523m...일명-위례산성)

 

○ 위치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동남구 북면 운용리

○ 위례성 : 직산의 옛 이름

위례성(백제, BC18)~사산현(고구려, 475년)~직산현(고려초, 940년)

위례 의미 : 왕성, 큰성(大城), 울타리(울짱,울)+담장,담(다물)=위례

○ 시대 : 백제~신라~고려시대

○ 유물 : 삼족토기, 타날문토기(두드림토기), 파수호편, 기와 등

○ 역사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직산현지(1899년)

 

위례성 지금은 없고, 옛 터가 성거산 북쪽 5리에 있다.

<여지지>에 소위 <성거산에 있다>라고 쓴 것은 두렵건대

잘못된 것이다. 둘레는 2,690척이요, 높이 8척이며,

그 안에 우물 1개가 있고 또 비석 받침이 있다 - 직산현지 //

 

(慰禮城今無 舊址在聖居山北五里 輿地誌 所謂在聖居山者恐誤 周二千六百九十尺 高八尺 內有一井 又有碑趺) - 稷山縣誌 //

 

▢ 직산현 관아 동쪽 20리에 있으며, 백제건국 첫도읍지 하남위례성

(河南慰禮城)이라고 전해진다.

 

백두대간 금북정맥 서운산(좌성산)~엽전재~부소산~부소령~위례성~우물목~성거산(우성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위례성을 중심으로 좌우로 좌성산(서운산)~우성산(성거산)이 익성(翼城)으로 있다.

 

직산 백제시대(BC18~BC5,13년) 하남위례성을 상징하는 진산(鎭山)이며, 숭산(崇山)으로 바로옆 천안 부소산(459.1m) 부소령(부수문이)이 접하며

<부소산 위례성>이 옳은 표현이며, 최근에는 산의 명칭이 세분화되어 <위례산>이라 불린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부여(사비)의 낙화암, 고란사의 부소산과 같은 이름이며, 백제의 첫도읍지 직산 부소산 위례성이다.

위례산성 정상에 올라서 사방을 살펴보면,

 

북쪽으로 고구려 졸본을 떠난 소서노, 비류, 온조왕 일행이 도읍을 정하기 위해서 올랐던 한산(용인)의 부아산(負兒山), 수원의 광교산, 안양의 수리산, 과천 관악산, 청계산, 서울의 삼각산(북한산) 백운대, 도봉산 자운봉, 신선대 능선이 쾌청한 날에는 손에 잡힐 듯 잘 보인다.

동쪽으로 안성의 칠장산, 진천의 만뢰산 태령산, 목천의 작성산,

남쪽으로 오창, 청주의 상당산성 그리고

서쪽으로 천안, 직산, 성환, 평택, 안성의 소사벌판과 안성천유역, 서해 아산만, 삽교천과 예산 당진의 가야산 능선이 한 눈에 조망된다.

 

서해 삽교천, 아산만~당진~평택~양성~진위~오산~안성일대에서도

위례성은 서운산과 성거산의 중심에 좌청룡~우백호인양 버티고 있다.

 

서해의 어염과 내륙의 물류을 잇던 천험,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한

위례성은 고대 백가제해 해양강국, 22개 담로국을 지배했던

약 700년 백제(BC18~660년)의 첫도읍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산이며,

직산백제 위례성의 등대와 같은 이정표적 랜드마크였다.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 위례고>에서 직산 백제위례성이 백제초도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현재 주류사학계에서는 이를 따르는 추세이다.

 

1989년~1995년까지 3차례 서울대학교 임효재교수팀이 발굴한 유물중에서 삼족토기, 타날문 토기, 불에 탄 숯의 방사성동위원소 연대 측정으로 백제시대 축성한 산성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2009~2010년 천안시와 충남역사문화원이 2차에 걸쳐 발굴한 유적, 유물에 따르면 통일신라가 처음으로 돌로 축조(석축)하고,

고려때 흙으로(토축) 개축하여 시대를 바꿔가며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출토 유물중에는 백제토기와 기와편 등이 다수 발견됨으로써 백제초기 시대의 유물발굴에는 실패하여 많은 의문점을 남겨두고 있다.

 

위례성 가까운 곳에 충북 진천의 삼용리 초기백제 타날문토기(기원전후를 대표하던 토기) 굽던 가마터와 진천 석장리 초기철기 유적, 청주의 신봉동 고분군의 타날문토기 등이 남아 있어 <직산 위례성>의 유물, 유적의 비교연구와 백제초도사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를 제공한다.

 

위례산성 내부에 용샘(용정-龍井)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곳엔 백제의 전설이 전해지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라 서해바다와 한강, 금강을 이 용샘을 통하여 용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유롭게 들락거렸다고 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의 한성공격으로 치열하게 싸울 때에도 용샘을 통하여 서해바다~한강으로 들락거렸고, 도읍을 공주 금강유역으로 옮긴 후에도 고구려, 신라의 잦은 침입으로 위례성 일대가 삼국의 각축장으로 변하면서 백제왕은 금강~용샘으로 들락거리며 전투를 지휘하고, 군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백제 왕실에서 용(龍)으로 변장하여 아침에 사라지고, 지쳐서 해질녘에 지쳐 돌아오는 백제의 왕을 의심하여 왕의 처남은 용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인 제비를 미끼 삼아서 백제왕이 용으로 변하여 출입하는 곳에 낚시를 던져 놓았는데 용으로 변장하고 전장에서 싸우다 지쳐 돌아오는 왕은 배고픔에 이를 먹고 낚시에 걸려 죽었는데 왕이 낚시에 걸려 죽은 곳에서 썪은 냄새가 진동하였는데 그곳의 이름을 구린내가 많이 난다고하여 구린내(동천-銅川...공주시 유구면 동천리> 라고 한다. >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위례성 동쪽으로 흐르는 500리 물길은 천안 북면~병천(아우내)~청주~공주의 금강(곰강-웅천-고마나루)~부여의 백마강과 연결되고, 서쪽으로 흐르는 100리 물길은 입장~안성천 유역 <일명, 인천(仁川)=아산 인주천(仁州川)>으로 분기하며 흐르며 서해바다에서 합류한다.

온조의 형 비류가 세운 미추홀(아산 인주) 밀두리와도 연결된다.

위례산성 서쪽으로 금성사(錦城寺)란 절이 있고,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에서는 매년 위례산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데 백제 온조왕을 추모하는 제문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입장 시장리엔 구시랑골(백제시대 9명의 시랑이 살았다함), 범우례 등의 백제시대 지명이 전하고, 동쪽에는 장생이(위례성 아랫마을)엔 백제온조왕시대 장터가 이곳에 섰다하며, 북면 군단이엔 백제시대 군대가 주둔하였고, 부소산 아래 깊은골(深谷)엔 백제 온조대왕이 맨처음 이곳에서 머물며 정사를 살폈다하고, 곡간리(曲干)는 백제의 군량미를 이곳에 곳간처럼 저장하였다 한다. 또한 목천 유왕골엔 백제 온조대왕이 머물며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였고, 이곳에 왕이 머물렀다하여 유왕골(留王谷)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또한 위례성 남쪽 산능선엔 수 백여개의 적석(돌무덤) 유적이 남아 있어 관방유적 혹은 위례성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좀 더 세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목천관아(목천초교 터) 용회당에서 동사강목을 완성한 순암 안정복선생은 대록지에 목천은 온조왕의 남전(南甸-왕성의 남쪽 터)이라 하였다.

 

2010년 9월17일 공주~부여 일대에서 개막된 1,400년전 대백제의 부활이란 주제로 <2010 세계대백제전>의 혼불 채화가 백제 개국공신 하남백 조성(직산조씨), 환성군 전섭(천안전씨), 마려(목천마씨)의 문중(門中)과 천안시장, 일반 시민들이 참석하여 천안 직산 위례성 정상에서 그 혼불 채화가 되었다.

 

천안시 위례성~서울시 풍납토성~부여 천등산에서 채화된 백제 혼불은 세계 대백제전의 개막을 알리었으며 이것은,

백제의 첫 도읍지~백제의 2번째 도읍지~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에서

혼불을 채화하였다는데 그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다.

 

 

                                                   2011. 7. 8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

 

 오심죽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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