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 歷史 探訪-2

고구려의 산성 축성 방법...직산 사산성

吾心竹--오심죽-- 2010. 11. 16. 19:14

고구려의 산성 축성 방법

파워 ethnos44
2008.08.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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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산성 축성 방법

 

고구려 산성은 중국과는 달리 매우 견고하게 쌓았기 때문에 현재도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신형식 박사와 서길수 박사의 글을 주로 참조한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기초 작업이다. 특히 고로봉식 산성은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도를 높였다. 지반이 약한 경우 토압이 3N/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보통지반의 토압인 10~20N/제곱미터가 되도록 보강공사를 했다.

 

지반이 아주 약한 경우 성벽이 통과할 구간의 하단부의 지반을 완전히 들어내고 직경 약 30센티미터, 길이 5~6미터의 통나무를 1~1.5미터 간격으로 놓았다. 그 위에 다시 이보다 더 굵은, 직경이 약 50센티미터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모양으로 약 4미터 간격으로 세로방향으로 놓았으며 그 위에 자갈과 모래, 흙을 넣고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므로 축조에 공은 많이 들어가지만 성벽은 매우 견고했다.

 

높은 성벽 축조땐 굽도리로 계단식 기단부 축성

 

성벽의 기초 부분은 큰 돌로 밑받침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 20~60센티미터. 높이 15~40센티미터 정도이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 하단 부는 굽도리 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되었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미터나 된다.

 

굽도리(원래 방 안 벽의 아랫도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성벽의 아랫도리. 북한에서는 축대라고 한다)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특수 공법을 도입했다.

 

박작성 입구, 천혜의 요충인 박작성을 기어코 함락시키지 못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① 기단은 큰 돌 : 맨 아래 기단은 큰 돌로 받쳤다. 땅을 파고 기초를 한 뒤 먼저 큰 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 만들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백암성의 경우 기초 돌은 윗부분에 쌓은 돌보다 3배 이상 크다.

 

② 굽도리부분 들여쌓기 : 굽도리 부분은 들여쌓았는데(퇴물려쌓기) 이는 튼튼한 굽도리를 위한 공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다. 특히 치성에서는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③ 굽도리 부분 내쌓기 : 들여쌓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서 쌓는 것에 반해 내쌓기는 성벽 밑에 굽도리를 마치 네모난 상자로 받쳐 놓은 것처럼 내쌓는 것을 말한다. 심양 근방에 있는 석대자산성의 치에서 이러한 축성법을 볼 수 있다.

 

④ 그랭이 공법 : 성벽을 쌓으면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는 돌을 바위가 생긴 대로 쪼아내어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이 그레질이다.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공법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정확하게 접합시키면 상하가 밀착되어 매우 안전한 것으로 고구려의 축성법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그랭이 공법에 대해서는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2)」(국정브리핑, 2005.5.7)을 참조하기 바란다.

 

둘째는 완벽한 겉 쌓기와 속 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겉 쌓기란 돌로 성벽을 쌓을 때 바깥 면을 말하며 외면 쌓기(한 면만 겉 쌓기)와 양면 쌓기(양면 모두 겉 쌓기)를 한다. 겉 쌓기는 작고 잘 다음은 돌로 하므로 마치 메주를 쌓은 것처럼 가지런하고 빈틈이 없다. 특히 강냉이 알 같은 쐐기꼴 돌을 사용하는 것이 고구려 산성 축조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에 놓으며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정한다.

 

백암성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백암성은 남쪽의 안시성 및 요동성과 함께 고구려 서북방 방어의 요충으로 남쪽 성벽은 수십 미터의 가파른 절벽으로 돼 있고 그 아래 유명한 태자하가 흐른다. 고구려 산성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겉 쌓기의 기본공법은 벽돌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로 ‘6합쌓기’를 했다. 6합이란 벽돌을 쌓는데 같은 줄 양 옆에 2개를 놓고 윗줄과 아랫줄 2개는 반씩 물리게 쌓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건물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채용하는데 이와 갚은 6합 쌓기는 밖으로 튀어나오는 치성과 체성을 이을 때 서로 엇갈려 물리기 때문에 잘 연결된다. 여기서 치성은 성이 밖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하여 성벽 안에 속 쌓기를 한 돌도 큰 힘을 받도록 했다. 이렇게 쌓은 성벽은 비록 일부 성벽 돌이 자연히 뽑아지거나 성 밑에서 돌을 뽑아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은 신라와 백제에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처음에 거의 산봉식산성이었는데 백제의 경우 산봉식산성의 단점과 고로봉산성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미 축조된 산봉식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산성을 결합하여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의 사산성,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견지산성, 경기도 화성시의 당성 등이 그런 예이다.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고로봉식산성을 건설했는데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 경기도 여주군 파사성(매초성) 등이 그것들이다.

 

고구려의 성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柵城)으로 되어 있다. 평지성의 경우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안학궁이 있다. 대표적인 평지성으로 하고성은 오녀산성이 험준한 절벽에 있으므로 그 보완적 의미가 있다. 고구려 산성은 200여 개가 되므로 이곳에서는 일일이 상술하지 않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혈투기간에 가장 크게 활약한 천리장성과 압록강 하구의 산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천리장성 위치도, 요하 동편에 구축된 천리장성은 북으로 부여성(농안 일대)으로부터 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으로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했지만 연개소문이 처음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해 중요한 산성을 보완 개축한 것이다.

출처
[기타]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