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洲先生 遺稿 卷之一(용주선생 유고 권1)
<望慰禮城-망 위례성>---용주 조경(龍洲 趙絅,1586~1669) 詩 //
歲暮湖關外(세모호관외)---섣달그믐 호서관아 밖
天寒慰禮城(천한위례성)---직산위례성은 추워서 쌀쌀하네
興亡渾似夢(흥망혼사몽)---흥망성쇠는 꿈결같이 혼미한데
蠻觸竟何成(만촉경하성)---사소한 싸움은 무었을 이루었던고
喬木鴉啼亂(교목아제란)---교목에 까마귀만 어지럽게 울어대고
荒堂鬼燐明(황당귀린명)---무너진 온조왕묘엔 도깨비불만 밝구료
悠悠臨逝水(유유임서수)---유유히 흘러가는 물길을 보노라니
長嘯一書生(장소일서생)---서생의 긴 한숨 소리만 보태는구료
(주) 1.호관(湖關)-직산현관아...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 호서지방 경계 첫마을의 문)
2. 위례성(慰禮城)-직산현 성거산과 서운산의 중간에 있으며, 천안시 직산읍의 백제시대 이름임.
3. 황당(荒堂)-직산 온조왕묘. 세종11년(1429년) 세우고, 정유재란시 왜군에 의해 소실됨(1597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판정리에 있었으며,
-조선 세종대왕의 왕명으로 봄,가을 향축을 내려서 온조대왕의 제례를 봉행함.
<<< 吾心竹...拙譯...2010.11.8 >>>
***천안 직산 부소산 위례성...부소령 비 //
***천안 성거산(右城山, 579m) 금북정맥(호서정맥)에서 바라본 직산 하남위례성 //
***1872년 직산현 고지도...백제 위례성 //
***천안 성거산에서 본...서울(한성) 200리 삼각산이 보이고...///
***성거산에서 바라본 慰禮古城 //
***직산현 관아...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호서지방 경계 첫 마을의 문 //
***비류, 온조가 올랐던 한산 부아악(용인 부아산, 용인대 뒷산) //
***백제초도 직산 부소산(459m)...금북(호서)정맥 //
***백제초도 부소산 위례성 출토유물-2010년 5월...타날문토기, 우각파수호, 삼족토기 등 //
***성거산에서 본 천안...오룡쟁주형...왕자산의 모습과 천안시가지 //
용주 조경(龍洲 趙絅,1586~1669)
포천이 고향인 용주龍洲 조경趙絅선생은 1586년(선조19) 10월 6일 한양 숭교방(崇敎坊) 흥덕동(興德洞, 현 명륜동)에서 한양조씨 한평부원군 6대손인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휘 翼男)과 어머니 문화(文化) 유씨(柳氏)와의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 주봉(柱峯)이다.
-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 급제
- 호당(湖堂)을 거쳐 문형(文衡)과 열경(列卿)의 지위에 오름
- 호란(胡亂) 후의 피폐한 민심을 수습하고 해이한 이도(吏道)를 쇄신
- 효종 현종조에서 여러 차례 월봉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
- 좌천, 강등, 하옥되면서까지 임금이 싫어해도 바른 길로 직간하기를 좋아하여 조정에
용납되지 않아서 벼슬하기 40여 년에 조정에 선 것은 겨우 8년 여에 불과
- 포천의 사찬(私撰) 군읍지인 최초의 견성지(堅城誌) 편찬에 참여
- 용주집 5권과 일본 견문록인 동사록을 남김
- 사후에 청백리에 선정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포천의 용연서원, 춘천의 문암서원,
흥해의 곡강서원에 배향되셨음.
13세살 때 어머니 문화 유씨를 여의고, 15세부터 계모 진천(鎭川) 송씨(宋氏) 슬하레서 자랐다. 24세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가르침을 받고, 1612(27세) 사마시 급제하여 성균관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인 1613(28세) 아버지가 거창에서 별세하자 포천으로 장례모시고, 유복자 동생 구가 출생하였다. 찬성공께서 돌아가시기 전 우환 중에 홍시를 찾았으나 구해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조용주는 일평생 감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용주공의 양위분의 제사에는 지금까지 감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1616(31세) 부친상 3년간의 여막(廬幕)생활을 마치고 성균관에 복학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폭정에 동조하여, 국사가 어지러워지자 이이첨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여러 번 직언(直言)을 하였음에도 듣지 아니함으로 할 수 없이 그와의 연(緣)을 끊고 과거도 안 볼 결심으로 성균관을 나와 거창(居昌)에 은거 하였다.
1623(38세) 인조반정 후 초야(草野)의 지조(志操)와 재주가 있는 학사들을 발탁할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高敞) 현감과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으나, 1624(39세)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공주(公州)까지 갔다. 환도후 형조좌랑을 거쳐 목천현감에 부임하였다. 1626(41세)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 제수 받고, 다음해에 사서(司書)로 있을 때 금(金)나라 군사가 침입(胡亂)하여 호패법(戶牌法)으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문학 김육(金堉)과 더불어 이를 폐지할 것을 상소하여 호패법(號牌法)을 폐지하게 되었으며.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세자는 육지에서 군사를 무마케 하였는데 이때 용주는 세자를 모셨다. 1629(44세)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황해도 지방의 민정(民情)을 살폈으며, 1634(49세) 사간(司諫)을 배수하고 정온(鄭蘊)의 무죄를 상소하였으며, 다음해 50세 때 집의(執義), 문천군수(文川郡守), 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호남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가 서정을 살폈다. 1636(51세)년에는 좌의정(左議政) 홍서봉(洪瑞鳳)이 이대하(李大廈)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비리(非理) 등에 대하여 상소하였으며, 병자호란으로 호적(胡賊)이 한양까지 침입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했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하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을 독려하였고,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日本)에 청병(請兵)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자 상소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637(52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가 볼모로 끌려가고 환궁 뒤에 조정에서는 청(淸)과의 화친에 반대한 조경(趙絅)과 정온(鄭蘊) 등 척화10신(斥和十臣)에 대한 논죄(論罪)가 있었으나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의 계주(啓奏)로 무사하게 되었다.
1643(58세) 홍문관 전한(典翰) 재임 중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임명받으나, 일본 통신사행은 1413년 1차를 시작으로 이번이 13차의 사행을 다녀왔다. 사행(使行)의 목적은 조선 측은 우호유지와 청조(淸朝)의 견제, 국정의 탐색인 것에 반해, 일본 측은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탄신 축하와 일광묘(日光廟)의 증축이었다. 통신사행(通信使行) 인원 477명은 4월 27일 부산을 출발, 11월 8일 귀국하였는데. 일인(日人)들은 크게 환대(歡待)하며 온갖 기교와 음탕한 희롱을 베풀어 환심을 사려 했으나, 공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고 관청에서도 선물공세를 폈으나 모두 물리쳐 일인들이 그 결백에 탄복하였다고 하며, 특히 일왕(日王)과 도구가와 정권(德川政權)은 공의 탁월한 학문과 시문(詩文)에 감동하였으며, 공은 기행문인 유명한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사학자 오다끼 기요꼬(大瀧晴子)가 조선통신사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특이하게 청백(淸白)했던 용주선생에 대한 인상과 행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84년 가을 공의 11세손 학윤(學允)씨의 초청을 받고 3박 4일간 문간공 묘소와 별묘, 그리고 용연서원(龍淵書院) 등을 참배한바 있다고 전한다.
한편 양주동선생의 동사록(東槎錄) 해제를 보면
이 동사록의 저자는 조경(趙絅 1586 선조 19 -1669 현종 10), 용주龍洲는 그의 호요, 본관은 한양, 윤근수尹根壽의 문인門人이다. 그는 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문과를 단념, 거창居昌에 물러가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과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지내고 1626년(인조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교리校理,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고, 독서사가讀書賜暇를 한 후, 1630년 이조좌랑吏曹佐郞, 1632년 이조 정랑正郞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했으며, 이듬해 사간司諫으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병(淸兵)을 격퇴하자고 상소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그 뒤 응교應敎, 집의執義등을 지냈다.
1643년(인조 21)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 왔는데 이 동사록은 그 도중에 지은 시문詩文들을 엮은 것이다. 일본에 다녀와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김제군수金堤郡守,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으며 이듬해 형조 참판參判, 대제학大提學, 1647년에 형조 판서判書로 이도쇄신吏道刷新에 힘썼으며 1648년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1650년(효종 1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 처벌요구로 의주 백마성白馬城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포천에 은퇴했다. 그 후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현종 10년 영의정에 추서되었고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라고 적고 있다.
용주공은 1644(59세) 형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김제 군수를 거쳐 전주부윤으로 나아갔다. 이때 용주는 홀로 된 계수와 어린 조카(松泉公, 威明 12살)와 차마 떨어질 수 없어 조정에 청하여 허락을 받고 함께 임지로 갔으나 이때 평소 공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든 판관(判官)이 딸린 식구가 많다는 것을 방백(方伯, 觀察使)에게 일러 바쳐 구설(口舌)을 피해 부임한지 18일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다음해인 60세에 대사간, 대사헌에 제수 받고, 그 다음해인 1646(61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참판, 이조참판, 도승지,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배수 받고 사양소(辭讓疏)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형조판서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고. 예조판서 겸 내의제조재성청당상(內醫提調裁省廳堂上),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관리등용의 공정을 기해 명망(名望)을 얻었다.
1649(64세)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맏으셨고. 1650(65세) 청(淸)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으며. 이때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과천에서 별세하였다. 이때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간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을 다시는 조정에 서용하지 않는다는 영불서용(永不敍用) 조건으로 귀양살이에서 풀어주라”는 황제의 허락을 전해왔다.
1651(66세) 백마산성 유배에서 풀려나 2년 후인 1653(68세) 봉친(奉親)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로 나갔다가 1655(70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다음해인 71세 때 효종이 여러 차례 월봉(月俸)과 물자를 하사(下賜)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다.
1659(74세)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여 효종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었고, 1661(76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 받고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이때 윤선도(尹善道)를 변호(辯護)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렸고. 옥책문(玉冊文)을 지을 것을 하명 받았다.
고산 윤선도가 73세 때인 1659년이던 기해년(己亥年)에 10년 재위의 효종이 승하 하여 장사를 치르면서 산릉(山陵)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격화되면서 예학자로서 윤선도의 학설은 남인계열의 중심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서인들 주장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가 죽어서 자의대비가 3년 복을 입었으니 효종은 인조의 차자(次子)이므로 기년의 복을 입으면 된다고 결정했다.
이에 윤선도는 종통(宗統)을 부인했다고 송시열을 비난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린다. 윤선도 주장의 핵심은 서인들이 '비주이종(卑主二宗)'의 잘못을 저질러 나라의 예(禮)를 완전히 무너지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즉 임금에 오른 효종이 종통(宗統)을 잇는 것이므로 효종의 상사에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지 기년(朞年)의 복을 입음은 종통을 두 개로 갈리게 하는 죄를 짓고 만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이게' 했다는 윤선도의 주장은 송시열 계열과 대립하던 미수 허목 등의 중심논리를 제공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윤선도의 주장은 그가 평안도 끝의 삼수(三水)로 귀양 가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효종이 붕어(崩御)하자 풍수(風水)에 밝았던 윤선도에게 간산(看山:묘자리 선정)의 일이 맡겨졌다. 윤선도는 수원(지금의 사도세자 묘소)에 길지가 있음을 말하고 그곳으로 장지를 정하자고 했으나 송시열 일파는 그것도 반대하며 다른 곳으로 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의 권력남용은 극도에 이른다. 역사에 없는 악한 일이 벌어졌으니, 윤선도의 복제설에 대한 상소문을 정원에서 임금께 올리지도 않고 불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소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그에게 벌을 내리면 되지, 그것을 불태우는 일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패악한 권력에 맞서 윤선도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1660년(현종1) 74세의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 가게 되고 그 다음 해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이배되려 했으나 취소되고 더 무겁게 가시울타리를 씌우는 위리안치 형에 이른다. 그 이유는 남인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올랐던 용주선생이 윤고산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작 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서다.
서인과 남인이 복제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에, 송시열 일파와 맞서 탁월한 예론(禮論)으로 그들을 압박했던 남인 사학자(四學者)가 있었으니, '비주이종'의 이론을 세운 이들은 미수 허목의 평생 동지이자 학우였던 용주 조경(龍洲 趙絅)을 비롯하여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미수 허목(眉叟 許穆), 백호 윤휴(白湖 尹鑴)가 바로 그들인데 학문으로나 정치적 영향으로도 그 네 분이 남인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용주 조경은 윤선도를 비호하다 삭탈관작을 당했으나 언제나 윤선도가 옳다고 주장한 학자였고, 미수 허목은 우의정에 오른 학자였으나 뒷날 윤선도의 '신도비명'을 지어 그의 일생을 찬양하였다. 또한 77세의 윤선도가 삼수에서 귀양 살던 현종 3년 남파 홍우원(南坡 洪宇遠 : 1605-1687)은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금고(禁固)를 당하는 화를 맞기도 하지만 뒤에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도 하였다.
용주 조경이 윤선도를 평했다는 말이 허목의 신도비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선 시기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인물을 내려 보내 목숨을 걸고 예의를 지키게 하여 한 세상에 경종을 울려주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바로 윤선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윤선도의 일생은 바로 조경의 이 한 마디에 모두 정리되었다.
현종 6년 79세의 윤선도는 평안도의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거기서 3년을 보낸 뒤, 81세의 윤선도는 임금의 특명으로 마침내 귀양살이가 풀렸다. 81의 노령으로 8년에 이르는 긴긴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 윤 고산은 다시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우국충정을 달래며 살았다.
가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며 노년의 안온한 삶을 보냈다. '五友歌'를 부르며?漁父四時詞?도 읊고,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을 읊조리면서 부용동 생활에 만족하였다.
한편 용주선생은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중 동사록(東傞錄)은 1643년 그가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을 때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화루선설(畵樓船說), 답도춘서(答道春書), 일본국임도춘원서(日本國林道春原書), 중답임도춘서(重答林道春書), 임도춘원서(林道春原書), 관백설(關白說), 제일본성씨록(題日本姓氏錄), 왜국삼도설(倭國三都說) 및 시(詩) 55수가 실려 있으며, 그 외에 용주선생 유고(遺稿)가 전하는데 이들 문집을 보면, 용주공의 많은 탁월한 특질을 볼 수 있다.
용주선생은 첫째 관인으로서의 합리성(合理性)이다. 신흥 청조(淸朝)의 강압이 인조조에 가하여져 왕조가 위난의 와중에서 용주선생은 대외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의 외교책을 헌언(獻言)한 국제감각은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수발(秀拔)한 판단력은 우리의 귀감이 되며. 또한 통신사행 부사로서의 방일에 있어서는 일본천황과 도구가와정권의 법제적 층서(層序)에 관하여 "관백비국왕(關白非國王)"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였으며, 또 덕천정권의 언무(偃武)의 설명에 대하여도 소년까지도 대검(帶劍)을 하는 습성으로 보아 정권의 본질을 무위(武威)로 하고 있다는 그의 판단과
둘째는 학식인으로서의 심오성(深奧性)이다. 동사록 화방누선설(畵舫樓船說)에서 선비(船備)를 설명하면서 인생론에 언급한 바 있고. 타지정자(0之正者), 남북순기주(南北順其宙), 심지정자(心之正者), 좌우봉기원(左右逢其原), 반시칙주불안의(反是則舟不安矣), 신불수의(身不修矣), 즉 학리學理와 처생관處生觀의 통일을 볼 수 있다.
또 일본의 최고 유학자인 하야시(林羅山)와의 학술, 시문의 응수(應酬)는 저명한 바 있지만 하야시 문집에 의하면 용주선생으로 부터의 교시(敎示)와 격려에 하야시는 감격하였다고 하였다. 동사록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사행중(使行中) 풍물을 읊은 시문(詩文)에는 도처에 유연한 감각과 풍부한 문학적(文學的) 교양이 넘쳐 있어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학식인 으로서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셋째 인간으로서의 지순성(至純性)이다. 용주선생은 판서와 중추(中樞)에 영진하면서도 전지(田地), 저택(邸宅)의 증식을 탐하지 않고 청렴결백한 태도는 우리의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또 방일(訪日)에 있어서도 여정(旅程)의 각 역참(驛站)에서 공찬(供饌)을 끝내 거절하여 일본인들을 두렵게 하였고. 특히 감명이 깊은 것은 계모(繼母)인 어머니 병환의 개호(介護)를 위하여 인조의 소환까지도 사퇴하고 그 침두(枕頭)에서 국정에 관한 십조문(十條文)의 상소를 올린 효도의 실천은. 인간으로서의 공(公)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여러 현상에서 용주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에 드문 존재이었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선생께서는 1666(81세) 66년간 지성으로 모셨던 계모 진천 송씨의 상(喪)을 당하였고, 3년 뒤인 1669(84세) 현종 10년 2월 5일 파란만장한 80평생을 마감하니 조정에서는 2일간 휴정(休廷)하였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용주 조경은
“청문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에 청나라에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뒤에는 청(淸)에서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 포천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나이 80세에 상(喪)을 당하였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잘 수행하였다.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는데 이때 나이 84세로 졸(卒)하였다. 조경의 문장(文章)은 고상하면서도 기운이 넘쳐 고문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일 때문에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림을 받아 간사(奸邪)하다고까지 지목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간사스럽고 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1676(숙종 2)년 3월 6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10월 4일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고 1695(숙종 21)년 7월 11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용주선생은 포천인으로서는 처음 견성지(堅城誌)를 착수 하였고. 1984년에 건립된 사당은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264번지에 있으며, 사당 내에 봉안된 영정(影幀)은 1657년 73세에 그린 상반신 상으로 가로42cm 세로66cm로서 350여 년 전의 선생의 모습을 잘 나타낸 영정이다.
묘는 조경선생과 부인 안동 김씨의 합장묘로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1-1번지 신평리 함바위에 있다. 묘 앞에는 증(贈) 영의정 행(行) 판중추부사 겸 이조판서 대제학 문간공(文簡公) 용주선생(龍洲先生) 한양 조경(趙絅)지묘, 증(贈) 정경부인 안동 김씨 부좌(祔左)의 묘비명이 있다. 묘에서 약2km 떨어진 마을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는 평생지기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찬(撰), 조종석 서로 되어 있으며, 포천 용연서원을 비롯하여, 흥해 곡강서원, 춘천 문암서원 등에 봉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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