渤 海

발해의 동방기지 콕샤로프카성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48

발해의 동방기지 콕샤로프카 성

2008년 10월 17일(금) 오전 02:53


    발해의 영토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발해의 서쪽영토에 대해서는 20세기까지 요동반도와 우리나라의 서북지역(평안도)을 제외하였지만, 현재에는 한반도 북부를 모두 포함시키는 것이 일관된  견해이다. 다만 발해의 서쪽영토에 요동반도를 포함시킬 수 있을것이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사료의 해석이나 유적발굴이 이루어 지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북쪽 영토역시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흑룡강성으로 보는 주장도 있지만, 송화강을 북쪽 한계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이처럼 발해의 영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은 1차적으로 사료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2차적으로 발해영토와 관련한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및 출토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발해의 동쪽 경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발해의 동쪽 경계에 대해 우수리강 유역으로 보고있지만 러시아측에서는 발해의 동쪽경계에 대해 한카호(흥개호)  안쪽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8년 9월 국립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연해주 중북구 콕샤로프카 마을에서 발굴된 대형 발해관련 유적은 이러한 양쪽 주장에 대해, 우리의 주장이 보다 보편타당하다는 상당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면 연해주 중북부 추구예프카 지구 콕샤로프카 마을에 있는 4개 성 중 하나인 ‘콕샤로프카-1’ 평지성을 발굴 조사한 결과 온돌 시설을 갖춘 대규모 건물지와 다수의 발해 유물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연해주에서 확인된 발해 유적 가운데 마리야노프카 성과 함께 가장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유적은 우수리강과 그 지류인 콕샤로프카강을 끼고 있는 성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북벽 405m, 동벽 650m, 남벽 250m, 서벽 340m로 성벽 총길이 1,645m, 전체 면적 16만㎡라고하며, 성곽의 면적이나 규모면에서 볼 때 중형급 정도로 판단된다. 그러나 성벽 내부에 쌓은 석재와 그 안팎은 흙으로 쌓은 수법등을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성벽과 북문, 서문, 성 내부 문화층 등 유적의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한 편이다 .

 과거 콕샤로프카 성 인근인 마리야노프카 성에서도 발해관련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지만, 그곳이 발해의 유적지임을 입증할 층분한 자료가 발굴되지는 못하였다. 한마디로 문화적 영향등에 의해서도 전달되거나 형성될 수 있을 정도의 유적지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 학계는 연해주 중북부 지역을 발해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흥개호 남동쪽으로 한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콕샤로프카-1 성 규모의 도시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라면, 당시 발해외에는 다른 소수민족이나 세력을
특히 발굴된 유물과 온돌 구조가 고구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이 지역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영토임을 강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모래와 점토를 한층한층 쌓아 대지를 1m 이상 돋게하여 그 위에 건물을 세운 점은 고구려와 발해의 전형적인 토축기법이다.
'ㄱ'자로 꺾어 건물 밖으로 굴뚝을 빼내는 구조 역시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인 집안 동대자(東臺子)에서 출토된 온돌 구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국립문화재 연구소에 설명이다.

 또 발해의 도읍지나 궁성과 같은 매우 중요한 곳에만 발견되는, '曲(곡)' 또는 '由(유)'자형을 이루는 온돌 구조가 발견되었다는 점 역시 이곳이 발해의 영토일 뿐더러,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곳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판석을 초석으로 사용한 것이나 대규모 담장 시설과 상당한 양의 기와가 발견된 점등을 종합해 볼 때, 콕샤로프카 성은 단순한 군사요새가 아니라 연해주 방면을 총 관장하는 행정중심지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적갈색 띠고리 손잡이가 달린 토기(대상파수호ㆍ帶狀把手壺), 주둥이가 안쪽으로 오므려진 항아리 모양 토기(내만구연호ㆍ內彎口緣壺) 등은 형태 뿐 아니라 제작기법도 고구려의 것을 따르고 있다

 또 보통 청자보다 굽이 넓은 해무리굽 청자는 9세기 무렵 중국 저장성 월주요(越州窯)에서 나온 것으로 완도의 청해진 유적에서도 다수 출토돼 당시 발해의 폭넓은 국제 교류를 짐작케 한다.



아울러 사람을 새긴 토기편과 도가니에 금을 녹여 물건을 제작한 금도가니 등 당시의 수준 높은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도 발굴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3년간 러시아와 공동으로 연해주 고고유적 조사 사업을 실시하면서 지표조사를 통해 이곳이 발해 유적임을 확인하고 올해 첫 발굴에 들어갔다. 콕샤로프카-1 성에 대한 집중 발굴은 물론, 연해주 서북지역에 대한 지표 조사도 병행함으로써 발해의 정체성 규명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물론 발해의 동쪽 경계가 최소한 연해주 중북부까지 확장됐음을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연구소는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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