渤 海

동북아를 재패한 발해의 무왕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5:43

 

 

동북아를 재패한 발해의 무왕

 옛 고구려의 무장으로서 발해를 세운 발해 고왕(高王)대조영, 그는 고구려의 개척정신과 자주정신을 계승하여 발해가 동북아로 뻗어나갈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발해의 갈길은 멀었고, 건국초기에 겪어야 할 대 통합의 과제도 쌓여 있었다.
 719년 고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는 생년월이 정확하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고왕과 함께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며 발해 건국에 이바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2대 무왕으로 등극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동방전체를 중국의 질서로 편입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을 꺽고, 발해의 자주독립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무왕은 발해의 자주독립을 선포하는 의미로 인안(仁安)이라는 국가연호를 지정하고 기초적인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여 도둑과 자사 수령등의 책임자를 두었다.

 이렇듯 발해가 건국초기부터 동북아를 실효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구려라는 역사적 토대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 유목민족들은 발해의 급성장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발해의 동쪽방향,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던 흑수말갈은 당나라나 돌궐과 직접 교역하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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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서기 726년에
흑수말갈이 발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당나라에게 사신을 파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 현종역시 발해에 대한 견제책을 찾고 있던중 흑수말갈의 교섭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당 현종은 즉시 흑수말갈의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고 장사(長史)라는 관리를 두어 발해를 압박해 나갔다.
무왕 역시 이러한 당나라의 움직임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
지금 당나라와 공모하여 우리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다"

무왕의 선택은 분명하였다.  무왕은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공모하여 앞뒤에서 공격받을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선제공격을 통하여 발해의 자주독립과 백성, 그리고 영토를 수호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무왕은 우선 친아우 대문예 및 그의 장인 임아(任雅)와 함께 흑수말갈을 치고, 그 땅을 복속시켰다.

 배후에 위험요소를 제거한 무왕의 다음목표는 당나라였다. 선대왕대부터 아니, 그 오래전 고구려시대때부터 끝없이 독립과 자존 그리고 평화를 침해해온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시기가 온 것이다.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당나라 공격의 총책임을 맡겼다. 그런데 동생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공격할때와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무왕의 당나라 공격계획을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1만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입니다.
지난날 고구려의 전성기에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왕은 대문예에게 당나라 공격을 지시하였다. 대문예는 할 수없이 병사들을 이끌고 국경까지 갔지만, 다시한번 공격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무왕은 노하여 사촌 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문예를 대신하게 하고 문예는 불러다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병사들을 버리고 당나라로 망명하여 버렸다. 무왕은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사형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당현종은 오히려 좌효위장군으로 삼는등 옹호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무왕에게는 대문예를  영남으로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즉 당나라는 발해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약해졌기도 했지만, 발해의 힘 역시 그만큼 강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면에서 볼 때 대문예의 판단은 매우 비관적이고, 국제정세및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나라가 대문예를 계속 비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안 무왕은, 더이상 당나라에 대한 공격을 미룰 수 없었다. 당나라가 그를 이용하여 발해의 갈등과 분열을 획책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무왕은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한편 신라에는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는 이유를 들어 당나라의 요구를 완만하게 거부하였다.


발해의 당 공격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않지만, 육지로는 마도산(馬都山) 쪽을, 해상으로는 등주를 공략하였던 것으로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왕의 전략을 이렇하였을 것이다.
대문예는 비록 별절 매국노이긴 하였지만, 그의 지적의 전혀 그릇된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의 엄청난 숫적 열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주로 공격하는 척 하며, 당나라의 주력병력을 유인하였을 것이다.

 그 사이 비밀리에 양성한 해군을 이끌고 장문휴장군으로 하여금 등주를 공격하여, 당나라의 허리라인을 끊는다는 성동격서 작전을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당나릐 주력을 마도산 인근에서 잡고있는 동안, 장문휴 장군은 산동반도 일대에 상륙하여, 등주 자사
 
(刺使)인 위준(韋俊)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732년 등주상륙작전으로 성공으로 인해, 당나라는 영원히 발해를 침공할 야욕을 꺽어야 했다. 또한 축적된 해상원정을 통해 발해는 동해와 서해를 장악할 수 있었으며,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육상로 까지 개척하여 동방의 대국으로 성장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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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운명을 건 천문령 전투
대조영 - 발해를 세우다.


고구려 부흥의 염원

 서기 668년  음력 10월 보장왕은 당나라 장수 이적에게 백기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당연합의 평양성 포위에 따른 것으로, 고구려가 완벽하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670년 안시성이 무너짐으로 인해, 요동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고구려 부흥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672년까지 고구려 부흥운동은 대체적으로 실패하게 되고, 옛 고구려 장군과 부흥세력 그리고 백성들은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모진 고난과 극복하기 힘든 역경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도저히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바로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구려인이라는 의견과 말갈인이란 의견이 각기 있지만, 유득공이 저서인 발해고에 다음과 같이 나왔다.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은 성이 대씨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대씨가 대정씨에서 나왔고, 배달족에 대씨가 있게 된 것은 대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조영의 발해부 출신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대조영을 초기부터 도운 걸사비우(乞四比羽)역시 말갈인이었던 점으로 보아, 대조영의 출신지역과 활동무대는  말갈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갈인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고구려 와 전혀 다른민족이 아니라, 고구려내에 유목생활을 하면서 고구려인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부족이었다. 현대의 시점으로 보자면 같은나라 국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말갈인들과 고구려인들은 깊은 유대감과 애국심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은 새나라 탄생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연합전선의 주축세력이 대조영과 걸사비우였던 것이다. 

다시 옛 고구려 땅으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중상은 대조영을 비롯한 집안 식솔과 함께, 영주 (營州)지방으로 옮겨가 '사리'라는 작은 벼슬을 하며 살았다.

 '사리'란 부락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말인데, 아마도 거란은 영주지방에서 유랑하던 고구려인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걸걸중상에게 이같은 벼슬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영주지방은 대체로 요하강 서쪽에서 북경 동쪽 사이의 땅을 말한다.


  서기 696년 영주지방을 중심으로 점점 세력을 키우던 거란족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그 사위 손만영(孫萬榮)을 중심으로 영주를 함락시키고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까지 다소 소극적으로 고구려 부흥을 꿈꾸던 대조영 일행에게 이사건은 매우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더욱이 거란족이 영주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상, 당나라의 대규모 토벌군이 곧 올 것은 분명하였다.
 따라서 대조영일행은 당나라와 거란족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해 발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오루하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즉 걸걸중상은 당나라군의 대규모 침공에 준비해 옛 고구려의 유민과 무장출신들을 규합하여, 철저하게 수비태세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 천문령 전투

 
 696년 이진충에 이어 손만영은 거란황제에 올랐지만, 당나라의 대규모 공세에 의외로 쉽사리 무너지고 말았다. 또  건란국 건설의 주동인물이었던 이해고 (李楷固)역시, 당나라에 포로로 잡힌 후 귀하하였다. 하지만 이미 요하강 상류지역에서 상당을 세력을 쌓은 대조영은 그리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상대였다. 특히 대조영이 이끈 주력군대가 여전히 당나라에 여전히 항쟁을 멈추지 않고 있던 고구려인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따라서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여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를 당당하게 거부 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할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었던 원대한 포부에 비해 당나라의 회유책은 너무도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는 무력으로 대조영의 세력을 진압할 것을 결정하고 (698~699)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 (李楷固)를  옥검위대장군으로 삼아  총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 쯤 걸걸중상은 이미 사망하였는데,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였는지 아니면 전투로 인한 전사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인이 무엇이든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던 걸걸중상을 잃은 것은 대조영과 고구려인들에게 크나큰 손실이었다. 또한 걸사비우역시 말갈족을 이끌고 이해고의 부대와 일전을 벌였지만,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초기 당나라의 대공세에 크게 위축되었던 대조영은 흩어진 고구려군과 말갈족 등을 다시 규합하여 나갔다.

 그리고 당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좀더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걸사바우에게 대승을 거둔 당나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대조영의 유인책에 쉽사리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본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천문령(天門嶺)에 먼저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한 대조영은 더이상 물러서지 않고 총 반격을 하였다.  전쟁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은 전술상 대단히 유리한 이점을 차지하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방은 오랜 추격으로 인해 상당히 지쳐 있는 상대였다. 
 이 전투에 대해 발해고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해고가 그를 뒤쫓아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크게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대조영은 이 한번의 대승으로 인해, 고구려 땅 전체를 영토적으로 점령하려던 당나라의 야욕을 완벽하게 꺽었으며, 이후 대조영은 발해고에 의하면 사방 오천리에 달하는 광할한 영토를 개척하여 나갔다. 

 ****

 고구려의 멸망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제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일부에는 고구려의 역사를 너무 단정적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수천년간 이어 온 우리민족의 다른 역사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주장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냥 지나치거나 끊어 버려서는 우리역사가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질 못할 것이다 .

 누군가에 의해 그 역사가 계승되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는 그 자체의 단절이 아니라, 발해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발해는 고려에 의해 통합되었고 고려는 조선으로 조선은 현재 우리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즉 우리가 있는 한 역사는 이어져 갈 것이겠지만, 지나치게 과거의 영화에만 집착한다면 역사의 발전을 이루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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