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도자기 종류 - 타날문 토기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2:35

   타날문 토기
콘텐츠에 대한 질문이나 내용 수정, 기사 투고 등 직접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으로 이동합니다.  
     
 한자  打捺文 土器
 영어음역  tanalmun togi
 영어의미역  pottery with stamped design
 이칭/별칭  김해식 토기(金海式 土器)
 분야  역사/전통시대, 문화유산/유형유산
 유형  유물/기명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고재원  
   유사검색어
 성격   토기
 제작시기/일시   탐라시대 전기
 제작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재질   토제
 문양   타날문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출토된 철기 시대의 타날문이 시문된 토기.

[개설]
타날문 토기라는 용어는 해남 군곡리 조개무지 발굴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보고서에서는 철기 시대 토기를 크게 경질 무문 토기와 타날문 토기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타날문 토기는 색상이나 태토에 따라 회색 연질 토기·흑색 연질 토기·적갈색 연질 토기·회청색 경질 토기 등 다양하게 세분된다.

[특징]
제주도에서 타날문 토기는 적어도 1세기 이후에는 등장한다. 외도동 유적·화순리 유적·곽지리 유적 등에서 탐라 시대 전기의 재지계 적갈색 경질 토기와 함께 외지계인 타날문 토기가 공반하여 출토되고 있다. 타날문 토기는 새로운 토기 제조 기술, 즉 도박(陶拍)에 의해 타날문이 시문된 특징 외에도 회전판 및 굴가마(登窯) 등이 채용되어 제작된 특징이 있다.

[의의와 평가]
타날 기법은 춘천 중도 집다리에서는 경질 무문 토기와 함께 등장하며 그 연대는 2세기로 보고 있다. 중부 지역의 다른 유적에서는 기원 전후로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부 지역의 김해 지내동 독널 무덤에서는 경질 무문 토기와 함께 타날문의 적갈색 연질 독이 발견되어 그 연대는 1세기경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식 와질 토기 중에 타날문이 등장하는 것도 1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타날문 토기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기원 전후에는 등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  이청규, 『제주도 고고학 연구』(학연문화사, 1995)
•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관련항목
     • 곽지리 패총
     • 선사 유물 유적
     • 외도동 유적
     • 철기시대
     • 토기
 

 

 

 

토기는 진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빚어 말린 뒤 불에 구워 낸 것을 말한다. 진흙을 빚어 600∼800℃ 정도의 온도에서 구우면 진흙 속의 광물은 녹지않지만 진흙에는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어느 정도 단단해지면서 그릇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토기의 기원은 서기전 5천년경 신석기시대의 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시작되며 이후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원삼국시대의 연질토기, 타날문토기와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넘어가면서 삼국시대 단단하게 만들어진 경질토기의 모체가 된다. 토기는 이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서민들의 질그릇으로 전통이 이어진다.

   선사시대의 토기는 가마 지붕이 없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웠다. 이때는 굽는 과정에서 충분한 산소공급이 이루어지는 산화염(酸化焰)으로 구웠기에 진흙 속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흔히 적갈색을 띄고 있다.

 

<토기를 만드는 3가지 방법>

   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 method)·서리기법(권상법;卷上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고 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며, 덧무늬토기도 일부 발견된다. 토기는 주로 저장용과 조리용으로 이용되었는데, 신석기 시대의 정착생활 및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빗살무늬토기는 전국적으로 발견되지만, 토기에 표현된 기하학적 무늬를 기준으로 중서부·남부·동북지역별로 구분되기도 한다.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가장 큰 특징은 빗살무늬가 토기 표면에 보이며, 대체적으로 계란과 같이 밑부분이 뾰족한 형태(尖底)를 취하고 있다.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보이는데 , 문양의 구성요소는 점과 선이며, 곡선보다는 직선이 많다.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는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가늘게 돋게 하여 주둥이와 몸통부분에 무늬를 표시한 토기이다. 남해안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며 북쪽으로는 양양 오산리까지 분포하는데 빗살무늬토기보다 빠른 시기의 것이다. 한편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에는 주둥이 밑에 한가닥 덧띠를 붙인 덧무늬토기가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난다.

신석기 시대 대표적인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적으로 다양한 토기가 제작되었으며, 중국토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민무늬토기(無紋土器)는 그릇에 아무런 무늬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나, 주둥이에 구멍무늬나 짧은 빗금무늬가 표현된 토기, 가지무늬 토기도 여기에 포함되며 실제로는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제작된 토기를 지칭한다.여러종류의 민무늬 토기

   민무늬토기에는 서북지방의 팽이형토기, 공귀리형토기, 미송리형토기, 동북지방의 구멍무늬토기, 꼭지손잡이토기, 붉은간토기, 서남부지방의 송국리형토기 등이 있다. 중부이남에서는 위 지역의 영향을 받다 변형 팽이형토기,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후기에는 검은간토기, 쇠뿔잡이토기, 덧띠토기 등이 새롭게 제작된다.

   민무늬토기는 진흙에 모래알이 섞인 바탕 흙으로 대략 800∼900℃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밑이 평평한 평저이고 간 혹 밑이 좁은 것도 있으며 주둥이는 빗살무늬토기처럼 직립해서 넓게 벌어진 것도 있으나 목의 형상의 뚜렷이 구분되는 것들이 많다. 몸통에는 단지형, 쇠불형 등의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것이 많고, 기종은 화분형단지·장경호·단경호·독·작은 단지 등이 있다.  

   민무늬토기 중에서 팽이형토기는 밑부분이 작고 몸통(胴部)이 부푼 팽이처럼 생긴 토기로 2∼3줄의 짧은 사선(斜線)이 그어진 2겹의 주둥이가 특징이다.

   구멍무늬토기(孔列紋土器)는 주둥이(口脣) 바로 아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무늬를 가로로 배치한 깊은 바리형토기 (深鉢形土器)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민무늬토기 시대의 전기와 중기를 대표한다.

 

 

   붉은간토기(紅陶)는 태토를 사용하여 성형한 후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갈아 소성함으로써 붉은 색의광택이 나는 토기로 단도마연토기·홍도 등으로 불린다.

   검은간토기(黑陶)는 표면에 흑연, 망간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갈아 광택이 있는 검은색으로 긴 목이 달린 목항아리가 많은데 민무늬토기 후기의 유형이다.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유행한다.

 

 

 

 

출처...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1349605&articleid=96 (71k)

 

 

 

신석기 토기

점렬무늬 토기, 겹아가리 토기
(북촌리 출토토기)

신석기 후기를 대표하는 토기들이 발견.
남해안 지역 토기 문화를 반영.

북촌리 바위 그늘유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신석기 후기를 대표하는 토기들이 발견되었는데, 대체로 남해안 지역 토기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으로는 點列무늬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口緣部에 2~4열의 점렬무늬가 누르기 혹은 갑인수법으로 장식된 것으로 월령리 한들굴, 사계리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점렬무늬는 그 모양에 따라 삼각점렬, 원형점렬, 그리고 기타점렬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삼각점렬무늬는 조각칼처럼 끝 부분이 삼각형을 이루는 施文貝(무늬를 새기는 도구)를 비스듬히 눌러 만든 것으로, 이 중에는 다시 시문구를 세로로로 하여 누른 것과 가로로 하여 누른 것, 그리고 삼각점렬무늬 자체가 정연하지 못하고 들쭉날쭉한 것이 있다.
원형점렬무늬는 둥근 막대 모양의 시문구를 수직으로 눌러 시문한 것이 기본이나, 이를 비스듬히 눌러 자체가 타원형으로 변형된 예도 있다. 삼각과 원형점렬무늬 이 외에 눌러 찍힌 무늬 모양이 일정하지 않거나 살짝 훑듯이 찍어낸 점렬무늬 토기편도 있다.
이와 같은 압인점렬무늬는 동해안 지방에서 신석기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유행하던 형식이나, 그 지방 토기의 바닥이 거의 전부 편평한 것과는 달리 북촌리 토기는 둥근 형태를 갖고 있다. 또한 점렬이 2~3줄 있는 예는 보이나, 북촌리 토기처럼 정연한 삼각형 혹은 원형점렬은 보이지 않는다.

북촌리에서는 겹아가리(二重口緣)토기도 발견되는데 전체 기형은 전형적인 우리 나라 신석기 시대 토기의 砲彈型, 半卵型을 이루면서 구연부가 이중으로 된 겹아가리 형식이다. 이런 형식의 토기는 부산 동삼동, 금곡동, 암남동과 김해 수가리, 범방리와 양산 신암리, 거제 산달도 등의 경남 해안 지방과 전남 흑산도 유적 등 지금까지 남해안과 도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토기이다.

이 외에도 빗살무늬 토기 퇴화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短斜線무늬, 斜格子무늬, 조갯날무늬 토기 등도 발견되었다.


토기는 진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빚어 말린 뒤 불에 구워 낸 것을 말한다. 진흙을 빚어 600∼800℃ 정도의 온도에서 구우면 진흙 속의 광물은 녹지않지만 진흙에는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어느 정도 단단해지면서 그릇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토기의 기원은 서기전 5천년경 신석기시대의 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시작되며 이후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민무늬토기, 원삼국시대의 연질토기, 타날문토기와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넘어가면서 삼국시대 단단하게 만들어진 경질토기의 모체가 된다. 토기는 이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서민들의 질그릇으로 전통이 이어진다.

선사시대의 토기는 가마 지붕이 없는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웠다. 이때는 굽는 과정에서 충분한 산소공급이 이루어지는 산화염(酸化焰)으로 구웠기에 진흙 속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흔히 적갈색을 띄고 있다.

<토기를 만드는 3가지 방법>

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 method)·서리기법(권상법;卷上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고 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며, 덧무늬토기도 일부 발견된다. 토기는 주로 저장용과 조리용으로 이용되었는데, 신석기 시대의 정착생활 및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빗살무늬토기는 전국적으로 발견되지만, 토기에 표현된 기하학적 무늬를 기준으로 중서부·남부·동북지역별로 구분되기도 한다.

빗살무늬토기(櫛紋土器)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가장 큰 특징은 빗살무늬가 토기 표면에 보이며, 대체적으로 계란과 같이 밑부분이 뾰족한 형태(尖底)를 취하고 있다.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보이는데 , 문양의 구성요소는 점과 선이며, 곡선보다는 직선이 많다.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는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가늘게 돋게 하여 주둥이와 몸통부분에 무늬를 표시한 토기이다. 남해안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며 북쪽으로는 양양 오산리까지 분포하는데 빗살무늬토기보다 빠른 시기의 것이다. 한편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에는 주둥이 밑에 한가닥 덧띠를 붙인 덧무늬토기가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난다.


청동기 철기시대 토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적으로 다양한 토기가 제작되었으며, 중국토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민무늬토기(無紋土器)는 그릇에 아무런 무늬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나, 주둥이에 구멍무늬나 짧은 빗금무늬가 표현된 토기, 가지무늬 토기도 여기에 포함되며 실제로는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제작된 토기를 지칭한다.

민무늬토기에는 서북지방의 팽이형토기, 공귀리형토기, 미송리형토기, 동북지방의 구멍무늬토기, 꼭지손잡이토기, 붉은간토기, 서남부지방의 송국리형토기 등이 있다. 중부이남에서는 위 지역의 영향을 받다 변형 팽이형토기,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후기에는 검은간토기, 쇠뿔잡이토기, 덧띠토기 등이 새롭게 제작된다.

민무늬토기는 진흙에 모래알이 섞인 바탕 흙으로 대략 800∼900℃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밑이 평평한 평저이고 간 혹 밑이 좁은 것도 있으며 주둥이는 빗살무늬토기처럼 직립해서 넓게 벌어진 것도 있으나 목의 형상의 뚜렷이 구분되는 것들이 많다. 몸통에는 단지형, 쇠불형 등의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것이 많고, 기종은 화분형단지·장경호·단경호·독·작은 단지 등이 있다.

민무늬토기 중에서 팽이형토기는 밑부분이 작고 몸통(胴部)이 부푼 팽이처럼 생긴 토기로 2∼3줄의 짧은 사선(斜線)이 그어진 2겹의 주둥이가 특징이다.

구멍무늬토기(孔列紋土器)는 주둥이(口脣) 바로 아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무늬를 가로로 배치한 깊은 바리형토기 (深鉢形土器)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민무늬토기 시대의 전기와 중기를 대표한다.

붉은간토기(紅陶)는 태토를 사용하여 성형한 후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갈아 소성함으로써 붉은 색의광택이 나는 토기로 단도마연토기·홍도 등으로 불린다.

검은간토기(黑陶)는 표면에 흑연, 망간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갈아 광택이 있는 검은색으로 긴 목이 달린 목항아리가 많은데 민무늬토기 후기의 유형이다.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유행한다.


 

 

빗살무늬 토기(신석기)

민무늬토기(청동기)

 

 

 

.토기의 제작 방법
(1) 수날법(手捏法) : 진흙을 손으로 빚어서 만드는 방법이다. 비교적 작은 그릇을 만들 때에 사용된다.
(2) 윤적법(輪積法) : 흙으로 테[輪]를 만들어 쌓아 올라가는 방법으로 대형 토기를 만들 때 쓴다.
(3) 권상법(捲上法) : 흙띠[粘土帶]를 길게 만들어 밑에서부터 감아올라가는 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 되었다.
(4) 틀뜨기 : 다른 그릇의 내벽에 흙을 바르고 건조된 다음에 떼어내는 방법이다.
(5) 녹로 사용법 : 녹로의 회전을 이용하여 그 위에 올려 놓은 흙을 손으로 늘여서 일정한 형태를 만드는 방법

                         으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김해식 토기에서 사용되었다.

※ 토기의 문양은 성형상 필요에서 내는 문양과 장식적인 문양이 있다.

1. 수날법
 토기를 점토덩이에서 곧장 손으로 빚어내는 기법이다. 
토기의 제작기법 중 가장 간편한 것이지만 제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5∼10cm정도의 소형토기나 크기가 작은 이형토기, 그리고 파수와 같이 일부분을 제작하는 경우에만 한정해서 사용되었다.
기형에 따라 한 번의 과정으로 기형을 완성시키는 경우와 부분별로 제작한 후 각 부분을 붙여서 완성시키는 경우가 있다. 

2. 卷上法·積輪法
이 기법은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부터 삼국시대 이후 물레가 사용된 시기의 토기까지 사용된 가장 일반적인 제작기법이다. 
권상법은 [엿가락]모양의 점토띠를 나선형으로 쌓아 올라가면서 성형하는 기법으로, 토기 제작시 점토띠를 쌓아 올리면서 내외면에서 손가락으로 꾹꾹눌러주기 때문에 [벨트(belt)]모양이 되어 기벽을 이루게 된다. 권상법에 의한 토기성형은 모두 벨트모양의 점토대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①제작자의 의도대로 기벽의 두께를 조절하기가 용이하고, 
②제작과정에서 기벽의 두께가 보다 고르게 유지되며, 
③점토대의 접합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잇점 때문이다. 

적윤법은 점토띠 또는 점토대를 말아 둥근 도너츠형으로 제작한 후 겹겹이 쌓아 성형한 것이다. 경질무문토기, 경질찰문토기에서는 수날법(소형토기, 이형토기)과 분할성형법(대부토기, 옹형토기)에 의해 형성된 토기를 제외한 모든 토기에 이 기법이 사용되었고, 
타날문토기에서도 기형을 정형(2단계 성형)하기 전에 대략적인 기형을 성형(1단계 성형)하는데 이용되었다. 

3. 分割成形法
이 기법은 한 번의 제작공정으로는 토기 전체를 성형하기 곤란한 대형토기(호형토기, 옹형토기)에 사용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적윤법에 해당되는데 토기에 잔존하는 흔적을 살펴볼 때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기법 : 토기의 한 부분을 권상법이나 적윤법으로 성형한 후 어느 정도 건조되었을 때 그 위에 일정한 높이까지 권상법, 적윤법으로 쌓고 다시 어느 정도 건조시키는 반복과정을 통해 기형을 성형 한다.

2.기법 : 토기를 부분별로 권상법이나 적윤법으로 성형한 후 어느 정도 건조되었을 때 각각 붙여서 기 형을 완성시키는 기법이다. 이 기법을 
사용한 토기는 접합부분의 너비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접합된 부분에 심한 굴곡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3.기법 : 1, 2 기법에서는 각 부분을 권상법, 적윤법으로 쌓아 성형한 반면 Ⅲ기법은 점토대를 손바닥 으로 꾹꾹 누르거나 땅바닥에 쳐서 점토판을 만든 다음 둥글게 말아서 쌓아 올라가는 기법이다. 대체로 1, 2 기법에서 쓰이는 점토대의 폭 보다도 좁다.

4. 回轉臺의 사용
토기의 제작에 일찍부터 회전의 개념이 있어 왔지만 일정한 회전축을 가진 발달된 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회전대와 물레(도차)를 사용하면서 부터이다. 회전대(turn-table)는 회전축의 구조가 발달되지 못한 것이어서 받침의 무게가 가볍고 탄력이 없기 때문에 회전을 위해서는 잦은 손동작이 필요하게 된다.

토기에서 회전대를 사용하는 경우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① 구연부를 성형할 때 회전대를 사용하여 정형 또는 정면하는 방법으로 경질무문토기, 경질찰문토기, 타날문토기에서 사용된다. 
② 회전대의 느린 회전운동을 이용하여 권상, 분할성형법으로 토기를 성형한 후 다시 회전시키면서 기벽의 두께를 조절한다. 경질찰문토기에서 사용되었다.
③ 회전대에서 권상법이나 분할성형법으로 토기의 대략적인 기형을 성형(1단계 성형)한 후 다시 회전 시키면서 타날하여 토기를 정형하는 방법으로 타날문토기에 사용된 방법이다. 

이와 같은 회전대를 사용하여 제작된 토기는 대개 구연부의 내외면에 가늘고 고운 수평의 擦痕이 남아 있다. 그러나 회전대를 사용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체부는 빗질 등의 정면수법을 사용하거나 타날기법을 사용하여 기벽을 다듬었다. 물레가 사용된 이후에도 대형토기 등은 물레를 천천히 회전시키면서 권상법이나 적윤법, 분할성형법으로 성형한 후 타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물레가 회전대의 역할을 한 것이다.

5. 물레의 사용
회전대와 달리 물레[陶車:potter's wheel]는 회전축이 발달되고 받침의 무게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탄력이 있어 빠른 속도의 회전을 지속 시켜준다. 물레에 의한 토기의 제작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받침의 중앙에 점토덩이를 놓고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토기를 빚어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성형된 토기는 성형시 기면에 닿는 손끝에 의해 토기 내면에 나선형의 굴곡이 생기고, 물레에서 토기를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역시 저부 밑바닥에 나선형의 가는 무늬가 생겨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토기의 회전자국은 시계의 방향과 같은 방향이다. 즉 물레가 회전하는 방향은 시계의 반대방향이 된다. 근래에도 도자기제작소에서 물레를 사용할 때 왼발로 물레를 끌어당기거나 오른발로 차면서 회전시키는데 역시 시계의 반대방향이 된다.

② 먼저 물레 위에 원형판의 점토판을 놓고 가장자리를 따라서 권상법이나 적윤법으로 기벽을 쌓아서 대략적인 기형을 성형하고 나서 다시 물레를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정형하는 방법이다.

6. 打捺技法
타날기법은 기벽을 보강하고 기형을 정형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법이다. 타날을 위한 도구는 나무를 깍거나 흙을 빚어만든 방망이와 받침모루로 이루어진다. 방망이는 기벽을 두드리는 도구로서 토기성형시 기벽에 방망이가 접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드리는 면에 꼰실이나 새끼를 감거나 또는 문양을 새겼기 때문에 토기의 기면에는 繩文이나 格子文, 平行打捺文 등이 생겨난다. 이러한 문양은 토기의 제작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토기제작자의 숙련도에 따라 문양의 배열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져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도 한다. 
받침모루는 방망이로 기벽을 두드릴 때 토기 내면에서 받쳐주는 도구로서 둥근 자갈을 이용하거나 손잡이가 달린 점토 또는 나무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였다. 토기를 제작할 때 받침모루를 대고 타날하는 경우 토기의 내면에 오목한 흔적이 남거나 또는 받침모루를 대고 타날하는 경우 토기의 내면에 오목한 흔적이 남거나 받침모루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기벽에 찍히게 된다.

흙은 물을 섞으면 빚어지는 可塑性과 불에 구으면 굳어지는 固化性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화성암이 풍화된 것이기 때문에 화성암의 주성분인 규산(硅酸, silica)과 알루미나(alumina)가 꼭 들어 있다. 이 규산이 고온에 녹아서 유리질화하기 때문에 도자기에 방수성이 생기는 것이고, 또 흙 속의 철분은 발색의 원인이 되고 있다.

산화염(酸化焰) : 공기 중의 산소가 태토의 철분과 결합하여 제이산화철로 되어 토기의 빛깔은 적갈색을 띤다.
환원염(還元焰) : 태토 속의 철분에서 산소가 빠져 나가 제일산화철로 변해 토기색은 회청색이 된다.

◆ 태토 속에 섞여 있는 유기질 탄화물은 불에 구워지는 과정에서 모두 타 없어지지만, 화도가 낮거나 굽는 시간이 짧으면 숯가루가 태토 속에 남아 있는 결과가 되어 토기의 색이 회흑색 계통으로 되고, 특히 토기를 깨트려 그 단면, 즉 기벽의 단면을 보면 불이 닿은 벽의 내외 표면은 회색이지만, 벽의 중심부는 탄화물이 덜 타서 색은 검은 회흑색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태토의 입자는 작고 불순물이 없을수록 가소성은 크지만, 입자가 너무 곱거나 태토 속에 수분이 너무 많으면 끈적거리고 너무 연해서 그릇을 빚어올리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태토로 만든 토기를 구으면 표면에 있는 수분이 빨리 말라 없어지지만, 안쪽은 수분이 남아 있고 그 수분은 태토 입자가 곱기 때문에 밖으로 스며나오기 힘들어 기벽의 수축률이 고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그릇에 금, 즉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 지나친 가소성을 줄이고 구을 때의 균열을 막기위해서는 , 태토에 적당량의 모래, 석립, 조개가루 또는 토기가루 등을 섞는다. 
이것은 태토의 입자를 크게 해서 연도를 낮추고 수분 증발을 빠르게 하는 동시 수축률을 균일화하려는 것이며, 이렇게 태토에 이물질(주로 광물질)을 섞는 것을 태토조절(胎土調節, tempering)이라고 말한다.

◆ 그릇의 굽이나 다리〔高臺, 臺脚 또는 圈足〕를 달 때에는, 다리에 붙일 기신의 바닥에 X자로 자국을 파돌려서 다리와의 접착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리에는 원형·삼각형·사각형의 구멍이 뚫리는 것이 신라토기의 특징인데, 이 경우 구멍을 도려낸 자국은 매우 날카로와 쇠칼 같은 것으로 단숨에 뚫은 듯한 일기가성(一氣呵成)의 솜씨로서, 이것이 신라토기의 진가 감별의 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다리에 뚫린 구멍[投槍]은 신라의 독창은 아니고 동서양의 고대토기에 널리 사용된 것으로, 그것은 기벽의 균열이나 이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설명되지만, 그와 함께 장식과 무게를 덜기도 중요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 토기를 가마에 넣고 처음 24시간은 장작과 솔잎있는 가지를 화구 가까이에 놓고 약하게 태워 나간다. 이때는 불은 거의 보이지 않고, 불의 온도도 100℃ 정도로서 흰 연기만이 가마 속을 뒤덮는데, 이것은 태토 속에 있는 수분을 서서히 증발시켜 급한 가열, 즉 급한 기벽의 유리화로 인한 균열과 가스화(gas化)를 막기 위한 것이다. 다음 24시간은 본격적인 소성으로, 장작을 터널의 장축 방향대로 세로 던져 불길이 깊숙이 뻗어 들어갈 수 있게 하고, 화력도 1000℃ 이상으로 상승케 한다. 이때 터널벽에 있는 화창의 마개를 빼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도가니까지 뻘겋게 달아오르고 있는데, 이때부터 막불이라 해서 열을 내리고 가마 속에 흑연(黑煙)을 채우기 위해 화구 가득히 솔잎을 틀어 막고 화창으로 부터도 계속 던져 넣은 다음 , 화창과 아궁이를 흙으로 밀폐해서 시커먼 연기의 분출을 막아 버린다. 이 막불은 불완전연소시켜 그을음(탄소)을 내고, 그 그을음이 토기의 미세한 기공에 스며들어 신라토기 특유의 암회색을 띠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탄소착색법은 신라시대에도 실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태토의 철분이 산화염으로 회청색을 내게 되지만, 신라토기 특유의 회청·암청색 또는 소위 유흑색을 내기 위해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탄소착색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막불이 24시간 지나가면 굴뚝에서는 맑고 새파란 연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이로써 3야4일의 소성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가마의 문은 열지 않은 채, 그대로 다시 이틀 밤낮의 냉각시간을 둔 뒤에 아궁이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팔을 집어 넣어 재를 한줌 꺼내 본다. 이것은 소성의 성공 여부를 알아보는 방법이며, 이때 재가 많이 잡히면 결과는 불량이고 숯가루가 많으면 성공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숯가루가 많다는 것은 막불 단계에서 불완전연소가 잘된 증거이고, 불완전연소가 잘 되었다는 것은 뜸이 잘 들어 색이 잘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A : 도자기 종류

답변자 : ohs8310172000     l    2006-07-28 21:05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도자기의 종류를 자세하고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1.토 기(土器)

60만년전 구석기시대에 인간이 불을 다루기 시작하게 되면서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흙이 가열에 의하여 굳어지는 것을 알게되고 이윽고 인간이 제조한 최초의 도구로서 토기가 생긴 것이다. 이들은 사용용도에 따라 식량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일상용 토기와 원시신앙에 따른 의식용토기로 구분되어지고 있다.
학술적으로 토기는 도자기중 사기(沙器)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분류가 되며 조토기(粗土企)정토기(精土器)로 구분 되어진다.즉 조토기(natural earthenware)는 정제되지 않은 점토로 만들진 것을 말하며, 정토기( fine earthenware)는 정선된 점토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조토기는 흡수율이 15%이상이고.정토기는 흡수율이 10~15%정도이며 각기 철분이 3%이상 함유되어 있다.

 

빗살무늬토기
(櫛文土器)

신석기시대의 토기로서 노천에서 약 600~700°C로 구워져 만들어 졌으며 표면에 빗과 같은 도구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 넣었고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렵,수렵인의 토기였으므로 강기슭이나 해변에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BC 4,000~BC 1,000)

 

 

민무늬토기
(無文土器)

청동기시대의 토기로서 유문토기에 반대되는 무문토기라고 하는데 기원전 1,000년경 예백민족이 거주하던 요녕(遼寧)지방의 독특한 청동기를 사용하는 농경민이 한반도로 이주해와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의 출현으로 빗살무늬토기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형태의 민무늬토기가 등장하게 되며 초기 철기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어 진다.이들은 수혈가마(竪穴窯)에서 700~800°C로 구워 만들어졌으며 기형(器形)은 목달린형,반원형,우각형(牛角形),손잡이형 등 다양하고 표면에 채색을한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와 흑도(黑陶)가 유행하였다.(BC1,000)

 

 

김해식토기

선사시대 민무늬토기와 신라토기의 과도기에 해당되는 토기를 말하며 기면에 돗자리무늬,창살무늬같은 인문(印文)이 새겨져있다. (BC 1세기~ AD 3세기) 김해읍 회현리 조개무지(貝塚)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김해식토기란 명칭이 씌여지고 있고 원삼국토기라고도 불리워 진다. 단가마의 일종인 승염요(昇焰窯)에서 800~1000°C로 구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야토기

신라 영내에서 만들어진 회색경질토기(灰色硬質土器)를 말하며 고신라토기는 경상도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낙동강 중심으로 동안(東岸)지방의 토기를 신라토기, 서안(西岸)지방의 토기를 가야토기라고 불리워지면서 서로 다른 지역군을 형성하고 있다.(AD 1~6세기)
낙동강 하류에는 사철(沙鐵)이 많이 산출되어 AD1세기부터  철기를 만들게 되어 이지역에서 철기문화를 이룩하였으므로 1세기부터를 초기철기시대라고 보고 있으며(金廷鶴,한국의 미),이는 철을 녹일 수 있는 고온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었기에 금속성에 가까운 경도를 가진 단단한 도질토기(陶質土器)를 만들 수가 있게 되었고, 이즈음  돌림판이나 물레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신라토기는 3세기의 초기단계를 거쳐 4세기 중엽에 이르러 본격적인 신라토기시기로 보고 있으며 기형은 민무늬회도(灰陶)와 굽다리접시(高杯)등이 있다.

 

 

백제토기

백제의 토기는 신라토기가 경질(硬質)인데 비해 연질(軟質),와질(瓦質)계의 토기가 주류인 점이 특징이며, 위치하던 수도지역과 기간에 의해 한성시대(서울,371~475),웅진시대(공주,475~538),사비시대(부여,538-660)로 구분하고 있다.
한성시대의 토기는 이지역 일대에서 출토된 회색토기 및 고구려식 손잡이가 달린 갈색토기,돗자리무늬토기등이 특징이고 이들은 점차 백제 특유의 평저기(平底器),세발토기(三足土器),그릇받침(器台),원추형굽항아리로 발전되며 6세기 웅진시대에 이르러 보다 더 발전되어 회청색경질토기가 늘어나고 여러기술을 갖춘 완전한 백제토기로 정립한다.
한때 중국 화남지방의 자극을 받어 화려한 표면장식기법이 등장하며 귀족생활의 일면과 불교의 성행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토기들이 있다.

 

 

고구려토기

고구려토기는  흑색연질토기와 흑색경질토기가 있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납유약이 시유된 황갈유(黃褐釉)토기가 있다.
대부분 부장용품이며  항아리종류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기형은 아가리가 넓고 밖으로 벌어지며 밑은 편평하고 어깨에는 네 개의 귀가 달린 것이 주류이다.
무늬는 어깨부분에 간단한 물결무늬,톱니무늬,노끈무늬를 음각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고구려건국과 관계가 깊은 압록강 유역(전기)과 평양근교(후기)에서 출토되고 있으며.고구려 후기 출토품인 평양근교 토기들은 고구려 특색을 지닌 것들로서 대접,항아리,사발,대야,병,골호,벼루등 생활용품들이 다양하다.

 

 

통일신라토기

횡혈식(橫穴式) 석실고분 축조기에서 신라말까지 사용한 토기를 말한다.(7세기초~10세기전반)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는 다리에 굵은 돌기선이 있고 사각형이나 둥근 구멍이 두 개 혹은 네 개가 대칭으로 뚫려진 것들이 있다.그리고 뚜껑이 있는 합(有蓋盒)이 다량 출토되는데 뚜껑에는 보주형(寶珠形) 또는 둥근 꼭지가 있으며 기면의 무늬는 음각을 하거나 압인(壓印)한 고리점무늬(圈點文)와 반고리점무늬를 볼 수 있다.
출토품중 화장골호(火葬骨壺) 불교식으로 화장한 다음 그 재를 담는 용기인데 대부분 굽이 낮고 보주형과 배형(杯形)의 꼭지가 달린 반구형의 뚜껑으로 덮혀있고 무늬는 타압(打押),압날(押捺)한 인화문(印化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생활용기로서는 안압지출토품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 정선된 흙을 사용하였으며 소성온도가 높은 흑회색의 석기질을 이루고 있고 무늬는 음각문,인화문,민무늬등 이며 기형은 굽다리접시,항아리,병,등잔,벼루등이다.

 






2.청자(靑瓷)

태토(胎土:도자기의 몸체를 이루는 점토)와 유약(釉藥)에 철분(鐵分) 함유되어 있어 환원소성(還元燒成)에 의해 청녹색을 띠는 기물을 말한다.
청자는 최초로 중국의 육조(六朝)시대부터 만들어져 송대(宋代)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는 중국의 송(宋)으로부터 도입되었으며 오월국 멸망후(978년) 국내로 유입한 월주요의 도공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게 되며 청자의 발색은 11세기말 중국의 양식을 탈피하고 고려의 독자적인 비색(翡色)청자의 완성을 보게되면서 12세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다. 비색청자와 함께 우리고유의 상감기법은 한민족의 독특한 귀족적이고 격조높은 경지에 까지 이르게된다.

 

녹청자

9~10세기 무렵의 초기청자를 말하며 토기제조기법인 타조법(打造法)으로 제작하여 기벽이 얇고 태토에 잡물이 많아 유면에 요철이 있다.

 

 

순청자

12세기 전반기 청자로서 상감이나 채색에 의한 장식이 없은 청자로서 민무늬청자,음각(陰刻)청자,양각(陽刻)청자,투각(透刻)청자,상형(象形)청자가 있다.이무렵 순청자의 유면은 식은테(유면상의 잔금:氷裂)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감청자

태토에 음각으로 무늬나 그림을 파고 그 자리에 백토나 흑토로 메꾼후 철분이 함유된 유약으로 발라 환원소성을 하여 기면의 투명한 유약을 통하여 상감무늬가 보이게 만든 청자를 말한다.
상감기법(象嵌技法)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독자적인 문양기법으로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법이다. 12세기 중엽에서 1231년 원나라 침공무렵까지 기법이 세련되고 정교하여 상감청자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무렵의 청자는 식은테(유면상의 잔금:氷裂)가 기면 전체에 분포되는 것이 일반화 되고있다.
고려인들이 가장 즐긴 상감무늬로는 운학(雲鶴)무늬,들국화무늬,포류수금(蒲柳水禽)무늬등이 있다.

 

 

진사청자

진사(辰砂)로 태토표면에 무늬를 그리거나 다른 무늬의 일부에 점을 찍은다음 청자유를 입혀 구워낸 청자를 말한다.진사채란 산화제2동(CuO)이 환원되어 산화제1동(Cu2O)이 되고 동1가이온이나 동콜로이드로 될 때 나타나는 붉은색을 말한다. 진사채의 개발은 12세기 전반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최초로 사용하게된 것으로 중국보다 1세기가 앞서 있고,15세기부터 고려에서 본격적으로 쓰여진다.
진사로 만든 그릇을 진홍사기(眞紅沙器),선홍사기(鮮紅沙器),주점사기(走点沙器)라고도 하며 공작석(孔雀石)으로 만들어진다.

 

 

철화청자

청자태토표면에 철사(鐵沙)안료로 그림을 그린 다음 청자유를 입혀서 구워낸 청자를 말한다.  11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며 산화소성된 황갈색계와 환원소성시킨 회청색계의 두가지가 있다.

 

 

철채청자

태토표면전체에 철채를 바르고 청자유로 시유하여 구워낸 그릇들을  말하며 12세기 전반부터 쓰여진다.철채청자기법으로는 세가지로 구분되는데 다음과같다.
1)민무늬 철채유청자 2)오목새김(陰刻) 철채유청자  3)퇴화무늬(堆花紋)철채유청자

 

 

퇴화청자

백토 또는 흑토로 태토표면에 점이나 무늬를 도드라지게 찍거나 그려넣은후 청자유를 입혀 구워낸 청자이다.퇴화(堆花)기법은11세기후반 중국의 자주요(磁州窯)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기법으로 초기청자부터 쓰여지면서 여러종류의 청자에 이용되어지고 있다. 예로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퇴화맞귀병(靑瓷堆花雙耳甁)을 들 수가 있다.

 

 

철유청자

청자태토에 철분이 다량 함유한 유약을 두껍게 입혀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유약의 두께에 따라 적갈색,흑갈색,진록색등 다양한 색상이 나타나며 유면에 잘은 반점과 같은 결정이 피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일본말로는 덴모구(天目)이라고 하며 고려시대 12세기 무렵에 이용되어지면서 당시 서민들의 일용잡기로 쓰여졌고 높은 소성온도에서 구워져 경질이므로 짤 깨어지지도 않는다.

 

3.분청사기
  (粉靑沙器)

분청사기(粉靑沙器)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인 말이며, 말 그대로 청자와 같은 태토에 백토로 분장(태토에 귀얄로 백토를 바르거나 백토에 덤벙 담가내어 흰색으로 분장)을 한 후 각가지 기법으로 무늬를 넣고 투명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기물을 말한다.
청자의 쇠퇴기인 고려말에 시작되어 조선시대 전기인 15~16세기에 전성기를 이루며 임진왜란 전후를 기해 백자가 등장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상감문분청사기

태토에 음각으로 무늬를 만들고 백토나 흑토를 넣고 유약을 입혀 구워낸 것을 말하는데 고려상감기법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분청상감기법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1420년대이후에 조선적인 무늬로 신선하게 전개된다.
이들 문양은 연당초무늬,연꽃무늬,버드나무무늬,모란당초무늬,모란무늬,초화무늬,갈대무늬,물고기무늬,어룡무늬,파도무늬,돌림무늬등이 있으며 도식화되거나 변형되어 새로운 무늬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인화문분청사기

무늬를 새긴 도장으로 성형된 무른 태토에 찍은 후 패인 부분에 백토를 바르고 긁어 내는 기법으로서 일종의 상감기법으로 볼 수있으며 상감청자에 비해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손쉽게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인화기법(印花技法)이다.
15세기초에 발생된 인화분청의 전성기는 세조연간이며 성종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어 임란 이전에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특히 인화분청그릇중에는 관사이름,생산지이름,도공이름을 압인하거나 상감기법으로 새긴 것들이 많다.

 

 

박지문분청사기

태토 전체나 일부에 백토로 분장한 다음 음각으로 무늬를 넣고 백토가 남아있는 무늬 이외의 배경을 긁어내어 무늬의 백색과 태토색이 대조되게하는 기법으로 만든 분청을 말한다. 박지기법(剝地技法)은 중국의 자주요의 기법과 연관되는 점도 있으나 면상감기법(面象嵌技法)에서 고안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때 세련된 모습을 보이며 모란문,모란당초문,연꽃문,잎무늬,물고기문등 생동감 넘치는 활달한 무늬들이 분청사기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선각문분청사기

태토의 기면에 백토로 분장을 한후 음각(陰刻)으로 선조(線彫)하여 유약을 입혀 구워낸 분청사기로서 태토의 회백색이 무늬선으로 나타난다. 선각기법(線刻技法)은 주로 박지기법(剝地技法)과 함께 사용되어지고 있다.

 

 

철화문분청사기

회흑색의 저질 태토위에 귀얄로 백토분장을 한 뒤 철사로 자유분방하게 빠른운필로 문양을 넣고 얇게 시유를 하여 산화로 구워낸 것을 말한다. 이 분청은 계룡산록 동학사에서만 번조되고 다른 곳에서 번조된 예가 없으므로 계룡산분청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분청사기이다.
특히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일획의 능숙한 필치로 구사되어 현대감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귀얄문분청사기

귀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백토를 태토위에 분장한 다음 아무런 무늬도 넣지 않고 귀얄의 백토 붓자국만 보이게 만든 분청이다.
주로 여러개를 포개어 구워내어 대량 생산한 막사기에 많이 있다.
이 기법은 분청사기의 쇠퇴과정에서 많이 사용되어졌고 백자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에 분포되어 나타난다.

 

 

분장문분청사기

백토니(白土泥)에 전체를 담구었다가 꺼내는 방법으로 기물 전면에 백토를 입히는 기법으로 만든 분청을 말한다. 담금 또는 덤벙 분청사기라고도 한다.
대부분 굽과 굽위 언저리에는 백토를 씌우지 않고 태토색과의 대비효과를 이용한 것으로서 전라도지방에 편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4.백자(白瓷)

철분이 거의 없고 곱게 수비된 백자 태토로 성형하고 투명유를 입혀 구워낸 흰색자기를 말한다.
최초로 중국에서 백자를 만들었으며 철분이 완전히 제거된 카올린(kaolin)이라고 불리는 고령토(高嶺土)를 이용하여 제작되며 이는 코발트안료인 청화(靑畵)와 함께 발전하면서 오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5세기초 백자를 만들게 되며 성리학의 유교사회를 이룩한 조선시대에 간소하고 결백하며 청초함의 상징인 백자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원료의 조성 및 소성과정에  따라 다양한 백색도가 나타나는데 시대적으로는 15세기엔 유백색 계통이며 16세기 설백색, 17세기 회백색, 18~19세기에는 코발트청색을 많이쓰는 관계로 청백색이 되는 수가 많다. 특히 조선백자는 부드러운 선조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 선이 너그럽고 둥그런데 특징이 있고 문양은 회화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순백자

백자태토 표면에 아무런 문양을 넣지 않은 것으로서 불순물이 거의 없는 태토에 유약을 엷게 입힌 자기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가마에서 분청사기와 함께 구워져 만들어 졌으나 세종(1424)때 이르러 순백자의 양산체계를 갖추게 된다.
14세기말 연질의 고려백자와 중국의 송과 원나라의 경질백자기법을 융합해서 조선특유의 백자가 생겨난 것이다. 특히 유교정책과 더불어 조선중기에는 백자의 전성기를 맞는다.

 

 

상감백자

백자 태토의 기면에 무늬를 음각하여 흑토로 메꾸어 넣고 투명유를 입혀 구워낸 백자를 말한다. 고려상감법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15세기부터 나타나지만 15세기후반에는 청화백자에 밀려 명맥을 잊지 못하게 된다.

 

 

청화백자

백자 태토로 성형하여 초벌과정을 거친뒤 표면에 산화코발트(靑畵)의 안료로 문양을 그려넣고 투명유를 입혀서 재벌구이(1300~1350°C)를 한  백자를 말한다.  당시의 청화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개발된 것으로서 아라비아 상인을 거쳐 중국을 통해 조선에 수입되고 있었다.  세종말경부터 수입된 청료로 청화백자를 만들게 되고 세조9년(1463)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도 자체개발한 토청(土靑)으로 청화백자를 만들게 되었으나 극소수에 미친다.
세종.세조연간에는 공예의장화된 도식적인 무늬가 기물전체를 덮는 경향이 두드러져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우리의 것이 거의 구별이 안 되었으나 세조말과 성종대에이르러 회화적인 무늬가 나타나면서 시원한 한국적인 여백을 만들어 낸다.  조선중기에는 시대적인 난국을 맞게되어 중국으로부터 청화를 수입할 수 없게 되며 청화의 사용이 힘들게 되자 난초를 주로한 초화무늬가 간결하게 한쪽부위에 조금씩 그려져 청화소비를 절약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무렵 청화의 값이 금값과도 같을 정도로 고가였으므로 청화백자의 사용을
 서민들에게 금지시키는 국법까지 정하였다고 한다.
18세기 중엽은 조선시대 문예부흥기로서 청화백자에도 전성기를 맞게된다. 이무렵 세필로 된 산수화와 용문등이 나타나며 후기에는 대량생산과 더불어 무늬가 더욱 더 다양하여지고 청화백자의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진사백자

 초벌구이한 백자의 태토의 표면에 산화동(辰沙彩)으로 문양을 넣고 투명유를 입혀 소성하면 산화동이 산화제1동으로 환원되면서 무늬가 붉은 색으로 나타나는 백자를 말한다.
조선조 후기(18~19세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 졌으며 무늬는 연꽃 및 승려와 같은 불교적인 내용이 많이 있어 당시 불교의 진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철화백자

초벌구이한 백자의 태토에 철채(鐵彩)로 무늬를 넣고 투명유로 입혀 소성하여 다갈색으로 무늬를 표현한 백자를 말한다.
철채로서 석간주(石間주)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석간주무늬백자라고도 하며 광해군실록에 의하면 청홍아리기(靑紅阿里器)라고도 한다.
15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 진다. 17세기 중엽에는 사실적인 포도무늬가 세련스럽게 나타나며 초화,용무늬 등과 반추상화한 무늬가 발달하여 한국적인  정취의 해학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흑유백자

백자 태토에 철분이 8~10% 들어 있는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을 말하는데 철이 녹아 광택있는 흑갈색 또는 암갈색을 띠게 된다.
일본에서는 덴모구(天目)라고 하며 특히 요변천목(窯變天目)을 귀중히 여기고 있다.
전국에 걸쳐 초기 백자나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나타난다.

 

 

  오현승 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