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歷史 探訪

당진군 유물 분포표

吾心竹--오심죽-- 2010. 3. 1. 13:53
당진군 유물 분포표| 답사
김헌식 조회 35 | 09.09.01 11:29 http://cafe.daum.net/npnet/GxfJ/6

가까운 동네이니 참고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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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문화유적 목록

1. 당진읍

1) 아후산성(衙後山城)
당진읍 읍내리 당진군청 뒤 야산, 구 경찰서 뒷산, 북문밖까지 연결된 1500여년 전 백제시대 산성으로 보존하고 복원해야한다.


2) 읍내리 고인돌(지석묘)
당진읍 읍내리 야산 군청 뒷산에 있는 청동기시대(서기전 10세기경~서기전 400년경)족장의 무덤, 북방식, 남방식 아닌 지석(굄돌)이 없는 변형식 고인돌(1979. 3. 31. 충남대 박물관장 윤무병 박사 현장 조사 고증)로 1972년 4월 필자가 발견한 것으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조속히 보호시설을 해야 한다.


3) 당진읍성
당진읍 읍내리 산 21-1 임야외 25필지 조선 세종22년(1440년)에 축조한 행정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겸비한 읍성으로 둘레 914.5m, 높이 2.4m, 성문 3개소, 옹성 시설, 여장(女墻) 468개, 우물 2개소, 성내는 동문리, 서문리, 남문리, 북문리 등의 행정리가 있고 주민들이 성안에 거주했었다. 해미읍성처럼 5~10개년 계획에 의해 조속히 복원해야한다.


4) 태성(台城 : 우두산성)
당진읍 우두리 태성마을 거북산 919-2 임야외 6필지 정상부에 있는 백제시대 토성으로 추정되며 둘레 약 320m, 높이(밖)약 7m, 누차 현지 답사후 필자가 명명함.


5) 가성(加城)산성
당진읍 우두리 가성산 135-2 임야외 9필지에 있는 테뫼식산성으로 토성이다. 둘레 438m, 높이 약 1.5m~8m, 성벽 상부 폭 약 1.5m. 현지 답사


6) 태성(泰城)산성
당진읍 행정리 태성산 산 102 임야외 6필지에 있는 토성. 둘레 327m. 현지 답사


7) 당진현 객사(客舍)
당진읍 읍내리 현 천주교 교회자리, 이미 「망신관(望宸館)」 현판이 전 경로당에 보존돼 있었음.


8) 사근사터
당진읍 구룡리 산 98 임야외 6필, 사근절마을 입구로 부터 약 700여m 지점 북쪽 사면에 있다.


9) 사기소리 요지(窯址)
당진읍 사기소리 254 답외 7필. 조선시대 가마있던 터.


10) 성당사터
당진읍 사기소리 산 191-1 임야 외 3필. 이배산 성당마을에 있는데 조선시대에 창설됐다가 폐사된 것으로 본다.


11) 사기소리 고분군(古墳群)
당진읍 사기소리 안사기소 산 32-2. 임야외 26필. 고려사대 조성된 석축묘로 추정.


12) 수청리 고분군
당진읍 수청리 산 60-1 임야외 12필. 장방형 석축분으로 시대는 미상이다.


13) 용연리 고분군
당진읍 용연리 2리 320-6 임야외 13필 용연리 저수지 옆 동쪽 250m북쪽 소규모 골짜기 소재. 시대 미상.


14) 입한재(立限齋)
당진읍 원당리 144 대(垈)외 7필. 조선 중기의 대학자. 시인. 문장가인 구봉 송익필(1534~1599)선생의 사당으로 이 입한재 위에 묘소와 묘비(우암 송시열 지음)가 있다.

조속히 진입로 확장, 주차장 확보, 입한재 중건 등 당진의 자랑스런 인물로 추앙하고 선양해야 한다.


15) 탑동 석탑. 석등. 불상 부재물(附材物)
당진읍 채운리(탑동) 466-3 전(田)외 10필 일대 잘 보존하고 조립해야 함.


16) 당진 북창터
당진읍 우두리 태성마을에 있다.


17) 채운포 석교명(石橋銘)
당진읍 채운2리 512 탑동 1688년(조선 숙종 14) 또는 1689년 세운 채운교 석교(돌다리)시설하고 그 내용을 적은 기념비로 전해오나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불분명하다.


2. 합덕읍

1) 합덕제(合德堤)
합덕읍 성동리 532 답 외 98필. 합덕방죽, 합덕지, 연호, 연제, 연지, 합덕제언 등으로 부름. 축조시기- 백제 후기 위덕왕 또는 무왕 재임시 축조한 것으로 추정. 필자가 이미 1995년에 조속히 이 연호의 복원을 주장했는데 이제서야 복원계획으로 추진한다 함.


2) 덕산창
합덕읍 합덕리 구합덕 창말에 있었던 조창터. 옛날 덕산현 관할지역이라 덕산창으로 호칭되며 합덕리 276번지에 위치한 것으로 건물터 추정지 발견.


3) 동구재(東丘城)
합덕읍 합덕리(구합덕)창말 뒷산 즉 꽃동산에 있는 성터로 동굿재, 등굿재로 불려온 토성이다. 본래 구합덕 천주교 성당 소유였으나 그후 1950년대에 서야중고 유재하 이사장의 소유라 함.


4) 성동리산성(테뫼산성)
합덕읍 성동리 테미산에 있는데 성재산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축조한 백제시대 산성, 둘레 473m, 높이 2~5m내외.

 
5) 성동산성
합덕읍 도곡리와 소소리 경계 둔군봉에 있는 토성 후백제 견훤의 축조설과 조선 후기 축조설 있다.
1892년 홍주목사 표봉석과 동학혁명 당시 5위장군 표구석이 증축하여 동학군을 방어했다는 설이 있다.

둘레 500m 현존한다 하나 불분명하다.(한국문화유적 총람)


6) 테미산성(당산성 : 소소리 산성)
합덕읍 소소리 회티북산 76 임야외 7필지(순성면 본리 경계의 테미산(테뫼산) 또는 당산 정상부) 산정식 산성으로 둘레 493m, 폭 약 2m(추정), 높이 9.5m(외벽)~약1m(내벽), 외견상 토성이나 석성이다.


7) 독포(獨浦 : 독개)나루
합덕읍 신흥리 352-206 천(川)외 3필지 삽교천~아산 궁평장 왕래 나루터.


8) 신리 공소
합덕읍 신리 63-4 답 외 3 신리공소건물은 병인박해(1866) 당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 주교가 살았던 주교관(공소) 건물로 지난 2008년 7월 14일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됨. 공소 앞에는 순교복자기념비가 있다.


9) 구합덕성당
합덕읍 합덕리 275. 1890년 퀴를리에 신부가 양촌으로 파견돼 사목활동중 1899년 현위치에 성당 신축 준공하여 성당을 이전함. 1906년 크램프 주임신부 부임해 1907년 매괴학교 설립.

1908년 6월 개교식 거행. 현존건물은 1929년 10월 폐랭신부에 의해 지은 것. 1960년 합덕본당 분할.


10) 합덕리 지석묘(고인돌)
합덕읍 합덕리(서야중고교 북쪽 구릉) 산 14임야 외 14필지 소재. 총 3기의 남방식 지석묘이다. 필자가 1972년 4월 당진읍 읍내리 지석묘 발견 이후 충남역사문화원 연구원에 의해 2003년경 발견한 것이다.
3. 고대면

1) 막무덤
고대면 대촌리 소재. 백제 부흥(독립)운동 당시인 663년 8월 27일(음)~9월 1일(음) 아산만의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당 수군 180척 7000군사와 일본 수군의 1000척 27000군사중 400척 소실되고 1만여명 전사하여 장항만 대촌리해변에 떠밀린 시체를 매장한 무덤. 당의 유인궤 사령관의 명령으로 해변에 떠밀린 시체 거두어 조제(弔祭 : 위령제)지내고 매장했음. 필자 누차 답사·안내·홍보함.

2) 당진포 해창터(海倉址)
고대면 당진포리 해운창(海運倉)이 있었던 지점으로 현재 당진포2리 305번지 이재득씨댁(남. 69세) 소유 밭이라 하나 300평도 안되어 믿기 어렵고 현지 답사한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재득씨 소유 밭과 강래현씨 집터 전체로 판단된다.

「호서읍지」에 동고(東庫)6간, 집물고(什物庫) 5간으로 나와 있다. 필자 누차 답사·기고.

3) 용샘(곰쇠샘)
고대면 당진포3리 559-2 전(田)외 2필. 조선시대 이문경(李聞慶 : 성은 이씨 문경은 경상도 지명으로 문경현감을 역임했다 함)집 하인이었다 하는데 물길을 잘 아는 지혜가 있어 그가 판 우물로 7년대한에도 물이 용출했다 함. 필자 누차 답사.

4) 온동저수지
고대면 당진포3리 892에 있는데 1920년대 후반 일본인 스스끼(鈴木善八)가 용샘에서 용출하는 다량의 물을 보고 저수하여 간척사업을 함.
그후 1931년 유래목의 바다 막아 50여㏊의 간척지 조성 논을 만듦. 토지는 일본인 다나까(田中壽次郞)가 관리하고, 1979년 삽교천 방조제 준공 후 삽교호 관개에 의해 2개의 방죽 중 큰 방죽만 남아있다. 필자 수차 답사.

5) 영랑사
고대면 진관리 259. 대웅전과 부도가 있다. 필자 누차 답사·기고.

6) 성당사
고대면 진관리 1275. 필자 수차 답사.

7) 원진관 회화나무 1
진관리 239-1. 진관1리 새마을회관 뒷편 소재. 수령 300년. 높이 20m, 둘레 5.2m. 밑둥둘레-7.8m. 관리자 이태호. 필자 수차 답사.

8) 원진관 회화나무 2
진관리 240 즉 진관1리 새마을회관 뒤 나이 300년. 높이 20m. 둘레 4.5m. 밑둥둘레 7.8m. 관리인 김용욱

9) 항곡리 모감주나무
항곡리 504 문기용씨 집 앞 소재. 수령 500년. 둘레 1.5m. 높이 13m

10) 성산리 산성
고대면 성산리와 석문면 통정리 경계 테미산(높이 79m) 정상부 소재 토성 177-3외 63필지 임야. 둘레 약 210m. 높이(외벽) 약 5m. 백제시대 테뫼식 산성. 필자 수차 답사.

11) 당진포진성(鎭城)
고대면 당진포리 산 64-3 포곡식 토석(土石) 혼축성, 1415년(중종9) 축조. 둘레 420m. 성벽높이 2.7m. 수군만호 주둔의 진성, 필자와 손인권씨 등의 주선으로 대호지면 적서리~석문면 삼봉리 도로공사 진성 파괴 예방, 해창터널 공사 권고, 필자 누차 답사.

12) 고산사터
고대면 당진포리 산 184(절안마을-고산봉 남서기슭)소재 조선 초기~말기 존속 절터로 사역(寺域)은 거의 밭으로 경작되고 민가와 민묘(民墓)가 있다. 고산사 부도는 보존·관리가 관심사이다. 필자 수차 답사.

13) 속사리 토성
고대면 성산1리 속사리에 있는 평지성 마한시대나 백제 초기 토성으로 추정. 그곳 거주하는 이병직 교감이 발견했으나 아직 전문가의 고증 못 받음. 필자 수차 답사.


14) 국사봉산성
정미면 봉생리와 고대면 항곡리 경계 국사봉에 있는 둘레 약 90m. 필자 수차 답사.

15) 옥현리성
고대면 옥현리와 정미면 천의리 경계 「성고개」에 있다. 길이 약 50m. 필자 현지 답사 후 명명.

4. 석문면

1) 난지도수(難知島戍)터
석문면 난지도리(대난지도) 말막금 135 전(田)외 10필지. 전해오는 말에 객사가 있었다 하나 난지도수가 있었던 터로 추정. 「대동지지」에 당진포만호의 병사를 나누어 파견·방어한 기록있다.

 난지분교터에서 하마비(下馬碑)가 발견 석문중학교에 보존돼 있어 상관 관계로 추정.

2) 소난지도 의병총 (생략)

3) 장고항석성
석문면 장고항리 산 101-16 임야 외 14필지(영방죽 남쪽 낮은 야산에 위치) 둘레 270여m. 성벽 약 2m, 3m 협축 석성 추정·석문방조제 공사로 성 전부 파괴. 필자 현지 답사.

4) 초락도 해운암터
석문면 초락도리(7종외 16필지) 절께에 있다. 200~300평 규모 불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훼손됐고 느티나무 2주가 있고 초락도 기도원이 세워져 있다.

필자의 고향으로 안내게시판 세워 방문자의 이해를 도와야 한다.

5) 보덕사
석문면 삼화리 226-27.(생략) 필자는 누차 현지 답사함.

6) 초락도리 구석기유물 산포지(散布地)
석문면 초락도리 산 72-1 임야의 8필지가 구석기시대 유물조사에서 뗀석기(타제석기)를 확인했다 함. 한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알림(1997년)

7) 웅포성(곰개성)
석문면 삼봉리 차돌백이 마을 산 55 임야외 41필지(성넘어마을까지 연결된 일직선형 토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목장성으로서 그 기능을 했으리라 본다.

문헌에 「맹곶목장」이 보이므로 이 일직선형 성터는 목장에서 말키우기 위한 맹곶목장 목장성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누차 현지 답사후 논문에 소개함.

8) 초락도 패총(조개더미)
석문면 초락도리 아침매기 옛 해변에 있다. 1990년대 필자가 충북대 이융조 교수를 현장으로 초청하여 확인했으나 아직 발굴조사 못함. 석문중학교 신양웅 교장도 서울대 고 김원용 교수 초청 현지 안내했음.

5. 대호지면

1) 충장사
대호지면 도이 1리 273 충장사 아래 남주현씨 주택 원채 기와집은 군내 제2 고 건축물이므로 보존이 잘 되어야 함.(기타 생략) 필자는 횟수 알 수 없이 무수히 답사·안내 홍보했음.

2) 두산리 야철지
두산리 쇠정골 산 36-1 임야 외 1필 두산리 하두마을 → 약 800m → 쇠정골 → 예전 무쇠점이 있었다 함.

3) 이시경 충신 정려 (약산사)
송전리 창말 369-1 사당 외 2필지(이하 생략) 필자는 누차 답사·안내함.

4) 이양원 묘소
송전리 61-23.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이양원 묘소(이하 생략) 필자는 누차 답사·안내함.

5) 장정리 요지(窯址)
장정리 332 대지 외 3필 장정리 진마루에서 조금리와 두산리 분기점 도로 북쪽에 위치 민가 뒤편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 되는 주변 100평의 야산 하단에 위치.

6) 문원사
적서리 대촌 410 차천로 선생 사우(이하 생략) 필자는 누차 답사·참관·안내·홍보함.

7) 창의사
조금리 169 대호지 4·4독립운동 참가자 570여명의 위패 봉안 사우(이하 생략) 필자는 누차 답사후 매년 기념식에 참가하고 있음.

8) 만리성
마중리 대조리~정미면 승산리~천의리까지 연장된 일직선형 토성, 이인화 박사(면천초교)의 제보로 함께 현장 답사함.

6. 정미면

1) 대운산리 유적
대운산리 96-17 임야 외 10필지. 2002년 (재)충청문화재 연구원에서 서산~당진간 도로 확·포장 공사 구간에서 확인된 유적 백제시대 횡구식 석곽묘 7기 등 조사

2) 이안눌 신도비
사관리 비석말 산 24-3 임야. 필자 누차 답사후 도지정 문화재 지정 요청

3) 이안눌 묘소와 묘비
전과 같음(이하 생략) 필자 누차 답사함.

4) 하성리성(성산성)
하상리 군댕이 마을 중심 평지성으로 동·서·남·북의 성문터 흔적 있음.
1989년 9월 필자 답사후 수차 답사.

5) 자모산성
산성리 자모산 113 임야. 둘레-약250m, 높이-5m(밖)~1m(안), 두께-2m, 필자 2회 현장 답사.


6) 안국사지·안국사지 석불·석탑
수당리 소재(산 102-1)(생략) 필자는 수십차 답사·안내·홍보, 군 통해 복원예산 100억 요청했었음.

7) 안국산 봉수
수당리 안국산에 안국 봉수대 유적있음. 필자 현장 답사, 봉화산 봉수대와 안국산 봉수대문제 의문 미해결.

8) 천의 똑대기터(뱃터)
천의 2리 133-6 답 외 15필지. 필자 현장 답사.

9) 천의리 요지(가마터)
천의 2리 151-1 대지 외 3필지

10) 대호지 4·4독립운동기념탑
천의리 243-2 대지(垈地) 필자 누차 답사. 「대호지」3자 누락되어 있음.



7. 면천면


1) 민백준 현감 청덕휼민선정비
사기소리 승전목(45-3답 소재, 면천에서 구룡리, 서산 방면으로 가는 70호선에서 지방도로 따라 약 4.5㎞가면 우측에 마애비가 있다.)
비석은 전면에 「縣監閔侯百準淸德恤民善政碑」라 씌여있음.
이인화 박사(면천초교)가 발견한 것으로 조속히 도지정 문화재로 하고 당진군수는 그 보호시설을 철저히 해야한다.

2) 성산리 산성
면천면 성산리 88 외 6필지. 면천나무고개 북측에 있다. 몽산성이 있는 산정식 토축(土築)산성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400m, 높이(외벽)약 5m, 내벽높이 약 1m, 성벽 폭 1.5m정도, 필자 수차 현장 답사함.

3) 성상리 고분군
성상리 산 48 임야 외 20필. 면천향교에서 몽산성 방향으로 약 400m가면 남향사면 중단부 구릉상 벌채한 곳에 있다. 10여기가 있으나 도굴된 것으로 추정.

4) 몽산성(蒙山城 : 피성 避城)
면천면 성상리 몽산(295m)등 5개 봉우리와 능선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토석혼축(土石混築)산성. 둘레 약 5㎞, 높이 1~2m, 문터 폭 3~7m, 백제부흥(독립)운동 당시인 서기 662년 12월 풍왕과 복신은 왕성(王城)을 주류성에서 피성(몽산성)으로 옮겼다가 다음해 2월 신라가 백제의 사평성(신평면 운정리 신평현성)등 4개성을 공략하고 2000여명 죽이자 다시 주류성(홍성군 장곡면 소재)으로 귀환함(일본서기).
지난 1995~97년 상명여대 박물관팀 학술조사 결과 백제시대 성곽으로 판명, 당진군은 안내판 건립, 5~10개년 복원공사 계획 수립 추진 긴요.


5) 면천읍성
성상리 821-6 외 9필지. 평지성으로서 석성이다. 10개년 복원계획이 수립되어 곧 공사가 착공될 예정이다. 필자는 누차 답사와 병행 당진군 통해 충남도 내포문화권 특정지역개발 계획에 500억 반영요청함.

6) 면천향교
건립시기는 1413년(태종13) 전후로 추정되며 변화 알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1716년(숙종42) 「학교등록(謄錄)」3월 7일자 기사(대성전 서벽과 신문수리사실 예조에 보고한 사실)이다.
필자 수차 답사.

7) 면천여단
면천면 성상리 산 156 임야 외 6필지. 「충청도읍지」 「면천군조에는 군의 북쪽 3리」로 기록돼 있다.
표지석을 세워야 한다.

8) 풍락루(豊樂樓)와 조종관(朝宗館)현판
많은 사람들이 「풍악루」라고 잘못쓰고 있는데 「풍락루」로 바로 써야 한다.
모두 면천초등학교에 보존중이며 조종관은 면천초등학교가 이전되면 원위치에 복원(건립)해야 할 것이다. 필자 수차 소장처 방문.

9) 군자정(君子亭)
「군자정기(君子亭記)」를 통독하여 역사 기록을 제대로 남겨야 한다. 필자 28년전 부터 답사 수십차.

10) 성상리 비석군(碑石群)
모두 8기의 선정비(善政碑)로서 1기는 관찰사 심의신 영세불망비이고 그외 7기는 면천군수의 선정비이다.
풍화작용으로 마멸이 심한데 이제는 선정비 뒤나 옆 적절한 위치에 원문과 번역문을 모두 거의 반영구적인 아연판이나 동판으로 누구나 읽고 뜻을 이해할 수 있게 군수는 조치해야 할 것이다. 필자 누차 현장 답사.

11) 면천사직단
성상리 서문밖 1011 전(田)외 8필지 「충청도읍지」면천군편에 면천군 서쪽 2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면천중학교 부근으로 추정되며 표지석을 세워야 한다.

12) 성상리 은행나무(2주)
충남도지정 기념물 제82호(1990. 5. 24지정)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장군의 딸이 심었다고 전해온다.
수령 1000년, 높이 27m, 둘레 6m, 필자 28년전 부터 누차 답사.

13) 성상리 회화나무
성상리 771-1 소재. 수령 250년, 수고 20m, 둘레 4.3m 관리 잘하고 향토유적으로라도 지정해야 함. 필자 수차 답사.

14) 안샘(화정 花井)
성상리 780 답 외 3필 고려개국공신 복지겸 장군 두견주와 관련 전설있음.
필자 누차 답사 신문지상에 소개.

15) 영탑사
성하리 560 소재, 고려시대 사찰. 경내의 대웅보전, 약사여래불, 7층석탑, 영탑사 금동삼존불(보물 제409호-1964.9.5 지정)등이 있다. 필자 28년전 부터 수십차 답사. 서적·신문지상에 소개.

16) 영탑사 의두암(依斗岩)
영탑사 7층석탑에서 300m거리 연화봉 소재. 전면에 依斗岩. 전면 좌측에 人道 正一××이라 음각함. 음각한 자는 김윤식(金允植 : 1835~1922)으로 그는 병조판서·외무대신·중주원의장 등을 역임했으나 1887년(고종 24)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 대원군 집권모의하다 미움사서 양유리 앵두샘마을과 영탑사에 유배되어 5년반동안 살았는데 영탑사 아랫마을 절골(현 최정환씨 가옥)에 집을 짓고 귀양살이할 때 음각한 것으로 依(의)는 북두칠성, 북은 임금을 상징한다고 한다.
필자 누차 답사 「당진군지」인물편 등 집필 소개.

17) 밀양박씨 묘역
송학1리 황새울 산 9-1 임야의 2필 효자 박효건, 박희전, 박희란 등 6기

18) 송학리 냉정골 고분군(古墳群)
백제시대 고분무리


19) 율사리 밤절 절터
율사리 698-1 전(田)외 5필. 조선시대 오봉산 남동쪽

20) 자개리 고분군
자개리 산 33-2 임야외 34필. 시대 불분명한 고분무리로 남산봉 남향 경사진 곳. 구릉의 중단·하단부에 있다.
대부분 석실분(石室墳)으로 추정함.

21) 자개리 유적 1
자개리 514-5 임야외 17필. 청동기시대(B.C 10세기~B.C 4세기) 선사유적.
2003년(재)충청문화재연구원에서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 발굴 확인, 청동기 시대 주거지 41기, 동시대소형 수혈유구(움집 남은 유적) 2기, 석곽묘 2기, 시대 미상 구상 유적(溝狀 遺蹟: 도랑모양 자취) 1기 확인. 주거지(집자리)는 수혈식(움집형태) 주거지로 장방형, 방형(4각형), 원형(둥근모양)등이다. 필자 3차 현장 답사.

22) 자개리 유적 2
자개리 457-17 임야외 11필. 위와같이 역시 2003년 당진 ~ 대전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 발굴로 확인.
청동기시대 주거지 22기, 원형·방형 수혈유구 4기, 석곽묘 10기, 조선시대 수혈유구 2기, 구상유구 2기 등 40여기 유구 확인. 필자 3차 현장 답사.

23) 삼웅리 유적
삼웅리 유적은 2003년 (재)충청문화재연구원의 당진 ~ 대전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 발굴시 확인. 석곽묘 6기 발견.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이다.
필자 3차 현장 답사.

24) 김응근(金應根)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죽동 1리 댓골 603 전(田) 마을회관 앞 길 건너편 소재. 1860년(철종 11)에 세운 선정비 김응근(1793 ~ 1863)호 의석, 시호 청헌, 본관 안동. 영의정 흥근의 형. 좌의정 홍근의 아우.
1857년(철종8). 충청도 관찰사 역임후 공조 ·형조판서 역임. 조속히 면천면 성상리 군자정 앞으로 이동하고 그 이동내용을 기록해야 한다. 필자 현장 3차 답사.

25) 이×애민선정비( 李×愛民善政碑)
죽동1리 댓골 303 전(田). 1706년(숙종32)에 세움. 당진 ~ 면천 방면 좌측 언덕위에 있는데 김인섭(전 면천면장)씨의 제보로 필자가 확인하였고 최영근 사진작가가 엎어진 것 바로 세웠으며 「당진의 금석문」에 수록했다. 필자 현장 4차 답사.

8. 순성면

1) 광천리 유물산포지(散布地) 1·2
광천리 349-1 임야외 66필 및 859전(田)외 139필 원삼국시대 연질(軟質)토기조각이 다수 확인되고 있으며(859 전 田외)에서는 원삼국시대 타날문 토기조각과 연질토기조각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2) 백석리 유물 산포지
백석리 산 93 임야외 115필로 청동기시대 밭지역에서 방추차와 연질(軟質)토기조각, 경질(硬質)토기조각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3) 백석리 요지(窯址 - 가마터)
원백석 마을 동쪽 약 600m정도 소재 조선시대 요지로(사기장골·점촌)백자 가마터 추정, 출토 유물은 백자조각이다.

4) 봉소리 선돌(立石)
봉소리 1109 전(田)외 3필, 봉소2리 마을 입구 소재, 청동기시대(약 3000년전~약2400년전) 선돌로 높이 130㎝, 두께 45㎝, 둘레 136㎝ 규모이다.
선돌은 오늘날의 기념비와 같은 것이다.

5) 봉소리 석기 출토지
봉소리 296-4 외 96필, 표고 50m, 능선 평탄한 구릉지 소재 청동기시대 돌칼(石劍)조각과 돌화살촉, 유구석부(홈이 있는 돌도끼)등이 출토되었다.

6) 홍주 북창터
중방리(북창마을) 112외 북창초등학교~신평간 도로 북창교 직전 우측 주변으로 추정함.

7) 시인 윤곤강 묘소
갈산리에 묘소가 있는데 공은 순성면 갈산리와 당진읍 읍내리에서 거주했으므로 그 시비를 규모있게 세우고 기념사업도 전개해야 할 시인이다.


9. 우강면

1) 관음사 돌미륵
송산리 은골 산 70-2 임야소재. 순성면 중방리와 송산리 경계에 있는 수부산(77.8m) 당산암 건물안에 모셔져 있는데 민간기복 신앙형태인 바위돌을 미륵으로 모신 형태.

2) 송산리 유물 산포지(散布地)3
솔뫼성지(김대건 신부 탄생지) 북동쪽 낮은 구릉소재. 청동기시대(약3000년전~약2400년전) 무문토기조각의 출토가 확인되었는데 취락 형성에 적합한 입지이다.


이밖에도 송산리 유물산포지 1 <508-20 전(田)외 145필 원삼국시대 연질토기조각 출토지>, 동 유물산포지 2 <163-39 전(田)외 107필 백제시대 백제토기조각 출토지>, 동 유물산포지4<솔뫼성지 북동쪽 감리교회 주위 구릉지에 연질토기조각 출토지 등이 있다.>

3) 강문 부리포(富里浦)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창조(漕倉條)에 보이는 범근내포(氾斤乃浦)로 지칭하는 문헌도 있으나 필자가 누차 비교 답사 결과 이 포구는 일제강점기 정기여객선 또는 소들강문평야(예당평야)에서 착취한 벼를 일제가 강제반출해 가던 항구였다.


어쨌던 1910년대 부터 1960년대 까지 인천항을 왕래하던 정기여객선이 매일 운항하던 항구이므로 그 유적의 보존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재는 뱃터(선착장)와 옛 건물들이 여러 동(棟)있으므로 잘 보존해야 한다.

4) 원치리 토성
원치리 412 전(田)외 51필(성재 또는 성밀으로 부름) 원재마을 동쪽 구릉소재, 본래 해안성으로서 거의 일직선형 상곽이며 성의 길이 약 1000m이며 성안·성벽 주변에서 토기조각, 어골문 기와조각, 청자조각 등이 출토되며 필자는 수차 현지 답사함.

5) 창리 토성
창리 창말(114대 垈 외 65필) 소재. 우강면 사무소에서 강문리 부리포행 도로 창리 끝부분 우측 소재. 현재 동북쪽 성벽 약 2m 폭 언덕이 30여m 보이나 파괴돼 있다. 조선시대 축조한 성으로 추정되며 필자는 1995년 10월 이후 누차 현장 답사함.

6) 유치흥(兪致興) 불망비(不忘碑)등
5기
우강면 창리 1구 원동에는 유치흥 시혜(施惠)불망비, 영세(永世)불망비 각 1기, 유진태(兪鎭泰) 송덕비 1기, 유한팔(兪漢八) 유허비(遺墟碑)1기 등이 있는데 필자는 2차 답사한바 잘 보존되기를 요망함.


10. 신평면

1) 한원사(韓原祠)와 이만유장군유품 거산1리 도암 510소재. 1899년(광무3) 건립한 이만유장군 사당이며 유품은 지방문화재 제84호로 지정 보존 유의.

2) 문정사(文定祠)
도성리 관절 소재. 홍문관 부재학 이성언(1380~?)의 사우로 필자 2회 현지 답사.

3) 도성리 패총 1, 2
도성리 266-2 전(田)외 4필, 도성리 290대 垈외 7필에 있었던 조개더미 유적.

4) 오봉제
상오리 청금마을 492-11 임야
소재, 1933년 상오리와 송악면 봉교리, 청금리, 신평면 상오리 소재 오봉제 저수지 준공 오봉제수리조합건설기념비로 나옴. 비문은 탁본과 동시 안내문도 세울 것.

5) 신당리 유물상포지 1,2
신당리 산 93-1 임야외 68필. 신당리 개언덕마을에 청동기시대 유물 무문토기편, 연질토기편 등이 출토된 곳.

6) 신평현성(운정리 산성)
운정리 산 79-3 임야외 2필 삽교호 옆 백제토성으로 추정되는 산성. 둘레 550m , 성벽 높이 7m(밖), 2m(안), 성벽 폭 상단부 3m, 기저부 5m, 기와조각(선조문·격자문)과 토기조각(무문·격자문·승석문)등이 출토됨. 성안 남서쪽에 사공바위(남근석 모양)가 있고 10여년전 성안 서남쪽에서 「함통(咸通) 11년 강×대사(康×大寺)」양각 명문 기와 출토로 이미 신라 경문왕 10년(서기 870년)에 「강○대사」란 사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일본서기」에 이 신평현성 기록이 있다.


즉 백제부흥(독립)운동 당시인 서기 662년 2월 2일(음)신라인이 백제의 남부 4주(사평·거열·거홀·덕안 등 4성)에 방화하고 수천명의 백제인들을 살해한 것으로 이 성이 본래 사평성(沙平城 - 신평의 옛이름이 사평)이라고 박성흥 선생(예산, 덕산 읍내, 작고)이 그의 저서와 논문에서 주장함.

7) 운정리 돌미륵
운정리 탑재 미륵댕이 마을소재. 남근석 형태로 높이 217㎝, 두께 70㎝, 얼굴크기 92㎝, 상호(相好)와 의습(衣襲)의 윤곽은 불확실함.


옆의 돌에는 「선덕 삼년 무신 이월일 석×(宣德 三年 二月 日 石×)」란 명문이 음각돼 있어 조선 세종 10년 즉 서기 1428년 (명 선종 3년)에 세운것으로 보며 채웅석 교수(가톨릭대)와 오윤희 교수(한서대)는 이것은 「돌미륵」이 아니고 「매향비(埋香碑)」로 보고 있다.


11. 송악면

1) 의병장 정주원 장군 묘역
가학리 (당재)에 정장군의 묘소가 있다. 정주원(鄭周源:1868~1925)은 본관이 연일, 호는 송운 고대면 용두리 출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1907년 8월 경기도 안성시 이죽면 죽산리에 있다가 30여명의 지방의병을 이끌고 양지·양성 2개군을 순회하며 동지 150여명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을 지휘 1907. 8. 25 안성 의병회의에는 의병장 7명, 의병 1만명이 집결했었다.


의병회의 끝난 8월 29일에는 그들 의병규모는 무려 900여명에 도달했는데 정장군은 그들을 3개부대로 나눠 그중 1개부대는 정장군이 직접 지휘하고 경기도 수원군 수하방면에 출동, 그해 11월에는 충청도 당진, 면천, 서산군, 경기도 부천군 등 2개도 각 군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7월 19일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29일 교수형 선고, 그뒤 종신형 감형, 3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옥고치루고 석방, 귀향함. 그후 1925. 1. 22(음) 평택군 오성면 숙성리에서 작고 장례후 현 가학리로 이장함. 필자에 의해 묘소 정화공사와 숭의비 건립 제막식 거행,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당진군에서는 겨우 도로표지판과 현지 안내판만 설치했는데 앞으로 조속한 기간내에 정장군 묘역일대를 애국선열지역으로 고시하고 진입로 개설과 주차장을 시설하여 항일의병장의 참된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신암사
가교리 550소재. 1200년대 창건된 사찰로 신암사금동불좌상은 보물 987호로 지정돼 있다. 기타는 생략함.

3) 구문로 신도비
가교2리 작은절골 소재. 1926년 건립, 흑면장군으로 익찬공신.

4) 구예신도비
가교1리 절골 소재. 1926년 건립. 중대광판전의사 일원 정승. 묘비는 기대승이 지었다. 신도비는 20세손 연창이 짓고 글씨는 권중하가 썼다.

) 능성구씨 송덕비각
가교1리 삽다리 소재, 구한서송덕비, 구익서 기념비, 구연창 자선비 등이 있다.

6) 광명리 유물산포지(散布地)
광명리 산 76-2 임야외 110필 가운데말 동쪽 구릉소재. 무문토기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시기는 청동기시대이다.

7) 안민학신도비
고대 2리 방터 산 33-1 임야외 2필. 호 풍애인데 이이, 정철, 이지함, 성혼, 고경명 등과 교유함. 사헌부 감찰 지방 각 현감 역임후 임진란에 소모사되어 군량의 수송 맡았으나 질병으로 못 나가고 군량과 병력을 유성룡에게 돌리게 하여 사도시첨정 임명했으나 사퇴함. 비서원승, 장예원장 안종화가 비문을 짓고 글씨는 구양순의 집서이다.

8) 한음 영당(漢陰影堂)
금곡지 원저울 산 50 소재. 한음 이덕형(1561~1613) 영의정의 영정을 모신 사당

9) 안섬 당집
송악면 내도리 155-5 임야 60. 안섬풍어제를 지내는 당산. 정상에 있는데 풍어제는 약 400년전부터 내도리 주민들이 거행하는 최대 행사이다.

10) 본당리 미륵당
본당리 360-2 전(田)외 7필, 1945년경부터 있었던 당집으로 마을주민들이 치성드린다.

11) 봉교리 유물산포지(散布地)
봉교리 산 25 임야외 72필. 방아머리마을 800m거리 구릉 소재, 백제시대 연질·경질 토기조각, 무문토기조각 등이 출토됨.

12) 필경사
부곡리 2구 251-12 소재. 시인·소설가·극작가인 심훈(1901~1936)선생이 설계하여 짓고, 거주하면서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곳으로 도지정 기념물 제107호(1997. 12. 23)이다.

13) 오사(梧寺)터
오곡리 355 전田외 2필. 고려시대 절터로 약 400~500평 논밭에 기와조각·자기조각이 출토되고 있음.

14) 월곡리 은행나무
월곡리 91번지 김관영씨 가보(家寶)로 매년 정초에 제사 지냄. 수령 500여년, 높이 25m, 둘레 6m의 도나무이다.

15) 전대리 유물산포지
전대저수지 북동쪽 붓골마을 뒷산 즉 전대리 643-12 임야외 120필 소재.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조각이 출토된 곳.

16) 중흥리 절터
중흥리 송악산 동남쪽 342-1 전田외 7필 소재. 절터는 400~500여평으로 고려시대~조선시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터는 100여평 내외로 기와·토기·자기조각 등이 다수 출토된 곳.

17) 송악산성
중흥리 송악산 정상부에 남북으로 장타원형의 산정식 석조 성곽으로 둘레 약 270m, 높이 2.5m, 문터는 길이 5.5m, 폭 3.2m, 높이 1.5m 정도. 황해가 한눈에 들어와 당진군과 경기도 해안선, 황해의 수평선이 멋지게 보이는 산성으로 현재도 일부가 파괴되어 있다.
조속히 당진군은 안내판과 경고판을 세워 더 이상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

18) 당성(唐城)
정곡리 배울마을에 있는 석성(石城)으로 축성년대는 불분명하나 백제부흥(독립)운동이 실패하자 서기 663년 9월 25일(음) 백제 유민과 일본군(백제지원군) 5500명이 일본군선을 이 성앞 배울에서 출항했는데 이 성곽을 「데레성」이라 했다.(고 박성흥 학설-예산군 덕산면 읍내리 거주) 필자는 2회 현지 답사함.


19) 석포리성
석포리에 있는 토성으로서 그 규모는 미상이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무테」지점이 이곳이라 역시 고 박성흥 학설이다. 필자 현지 답사.



12. 송산면

1) 성구미 풍어제
가곡리 성구미 포구 마을 큰 당산과 작은 당산에서는 풍어제를 지냈는데 그 당산은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2) 성구미 포구
가곡리 성구미(226-6 대垈외 5필) 포구로서 어선의 기항지로 선착장은 잘 보존할 가치가 있다.

3) 가곡리 유물 산포지
가곡리 성구미 마을(26-16 답 외 49필) 소재 청동기시대 무문토기·경질토기조각을 지난 1992년 고려대에서 조사한 바 있다.

4) 당산리 절터
당산리 175-4 대垈외 11필. 조선시대의 절터로서 사역寺域은 약 400~500평으로 추정되며 기와·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5) 오도항
아마도 50여세 이상의 인사들이 알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지난 2007년 1월 2차에 걸쳐 당진뉴스에 신년특집기획으로 「옛 당진항 오도」란 제목으로 연재한 것을 열람하기 바란다.
1960년대 초까지도 인천항과의 정기여객선이 왕래했던 당진의 외항이었다. 당산 3리 큰 오도(오섬)에 부두 즉 선착장이 있었다.


인천항과의 정기 여객선이 매일 왕래했고 당진군에서는 1932~34년까지 당진항 부두(계선장)공사가 준공되어 1935년 이른바 「당진축항築港준공기념비」가 세워졌다.


현재 기념비는 오도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옛 계선장(선착장)자리 등 전성기의 오도 유적을 보존하고 자세한 안내문을 게시해야 하겠다.

6) 창택산성
도문리 창택산 즉 옥녀봉, 봉화산으로 불려지며 해발 약 60m의 낮은산에 있고 토성으로 둘레 90여m, 높이 1.8m, 하단 폭 6m, 상단폭 2m정도이다. 또한 창택산에는 면천군 창택산 봉수가 있어 서쪽의 「고산봉수」와 아산만 건너 경기도 양성의 「괴대길곶 봉수」와 연결되었었다.(여지도서) 현재는 새로 복원된 봉수대와 정자가 이 산위에 있다. 필자는 1차 현장 답사한바 있다.

7) 작문재 토성
유곡리 산 77 임야외 5필. 최무웅 박사(건국대 명예교수)의 제보로 1984년 함께 현장 답사 후 3회나 답사했고 해발 45m 「작문재」란 야산에 있고 「터진목」 「마장터」라고도 부르는 일직선형 토성이다.


필자는 「면천현읍지」에 기록된 「창택목장」의 목장성(牧場城)으로 단정하고 싶으며 바로 「마장터」란 뜻과 일치한다. 성 길이 760m이다.

8) 부곡리토성
부곡리(芙谷里) 성넘어마을에 있는 토성으로 지난 1997. 1. 19 이인화 박사(면천초교 교사)의 제보로 함께 현장을 답사했다.


이 성 역시 앞에서 소개한 「만리성」처럼 일직선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둘레(길이)는 약 200m정도이나 높이와 폭은 미상이다. 현장 보존 위한 안내문과 경고문 설치가 시급하다.

9) 도문리 회화나무
도문리 151 홍곤유 교장댁 소재. 충청남도 나무로 수령 약 500년, 높이 25m, 둘레 5.5m 천연기념물로 지정·관리했으면 좋겠다.

10) 동악서원터
명산리(서원포)산 36 임야외 4필 소재. 명산리 마을회관 뒷편 산 정상에 있는데 인조때 문신 이안눌의 아호(동악)를 따서 「동악서원」이라 했다.


1706년(숙종 32)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 동악서원은 당진군 유일의 서원이었다.
동악 이안눌(1571~1637)은 호 동악, 대과 급제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 좌찬성에 올랐던 인물로 당진군 유일의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됐고 시호는 문혜이며 묘소와 신도비가 정미면 사관리에 있다.


시를 잘 지어 「조선의 이태백」으로 칭송되었다.
필자는 그간 누차 답사와 안내를 했고 지난 2000년 내포지역 특정사업으로 군 경유 충남도에 그 복원사업에산 1억원을 요구한바 있다.


당진군수는 조속한 기간내에 당진군 유일의 이 동악서원 복원을 성취시키고 신도비도 빨리 도지정 문화재가 되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다.

11) 의병장 최구현 묘소
부곡리에 있으며 최구현(1866~1906)장군은 옛 면천군 매염리(현 송산면 매곡리) 출신으로 무과 급제후 훈련원 봉사, 군부 참서관으로 근무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송악면 기지시에 창의도소 설치, 창의문 각지역에 게시하자 당진·서산군에서 370명의 의병이 자진 집결하자 창의영도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지휘하고 관내 순회, 1906. 4. 17(음) 면천성(읍성)을 공격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해산당하였다.


그해 4월 23일 소난지도에 도착하여 서산·홍성지역 의병등과 제휴하여 의병은 120여명으로 증가했으나 7월 5일(음) 새벽 관군과 일본수비대 200~300명이 나뭇배로 위장한 3척이 기습하여 최장군이 현지에서 체포·구금되어 그들의 모진 고문 끝에 12월 23일(금) 순국했다.


그후 장손(충묵)에 의해 묘지석이 발굴되고 필자에 의해 수차 당진뉴스 기사 단보 등으로 널리 홍보되고 정부에 의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최장군에게 추서되었다.
당진군 역시 최의병장 선양사업을 제대로 추진해야 한다. <끝>

 

홍 석 표 / 편집위원장. 당진군문화유적보호위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사) 내포문화 연구원 원장

 

 

당진군 문화유적 100개소 보존대책(1)
당진군수와 14만 군민의 보호의식은?
홍 석 표 / (사)내포문화연구원장
2009년 01월 05일 (월) 14:04:54 당진신문 webmaster@ijdnews.co.kr

   
▲ 석문면 초락도리 구석기시대 유물 산포지
「당진군 향토유적 보호조례 제14조(보존관리)」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향토유적을 보존관리 할 때에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준수하여야 한다.


1.향토유적은 변경되지 않도록 보존 관리하여야 한다. 2.군수는 향토유적의 지정에 대한 안내판, 보호구역의 설정사항 및 보호구역내의 금지행위 등에 대한 경고판을 설치 하여야 한다. 3.안내판 및 경고판은 별지 제3호, 제4호 서식에 의한다. 4.향토유적의 주변 건축 및 토지이용에 대한 개발 계획 수립시 군수는 유적 보존문제를 사전 검토 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이 당진군은 대한민국 문화재 보호법,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시행규칙,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보호조례 동 시행규칙, 동 보호조례 등에 근거하여 「당진군 향토유적 보호조례」를 제정 공포하고 현재까지 문화유적을 보호하여 오고 있다.


그런데 현재 당진군 전지역의 변모하는 상태는 즉 상전벽해(桑田碧海)로 하루가 멀게 가속도적으로 급변하고 있다.
몇천년·몇백년전 농경시대의 모습은 시시각각으로 바뀌어 가히 지각변동이 급격히 일어나고 있다. 10여년전 100개도 안되었던 공장이 현재는 무려 961개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7월 28일 부터 9월 1일까지 당진신문(당시 당진뉴스) 창간 제19주년 기념 특집으로 「당진의 문화유산 파괴하나? 보존하나?」란 제목으로 「시급히 보존하여야 할 문화유적 목록을 소개한다」는 부제(副題)를 달아 무려 149개소의 문화유적 목록을 제시하고 그 소재지의 지번(地番), 지목(地目), 필지(筆地)까지 상세하게 명시하여 그 내용을 소개한바 있다.


또한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행정당국과 군민의 관심과 경각심을 환기시키고자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당진군수! 당진군민! 문화군수! 문화군민인가?」라는 중제목도 큰 활자로 제시한바 있었다.

현재 당진군은 석문산업단지, 합덕산업단지, 송산산업단지, 환황해경제자유구역지정, 대덕·수청지구 개발, 부곡공단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는 각종 공장부지와 아파트대지 등으로 정말 수많은 문화유산(특히 문화유적)이 마구 파괴되고 있는 상황이다.


당진군도 수만년전 부터 현재까지(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려 창조·건설한 귀중한 문화유적이 군내 각지에서 파괴되어 가고 있다. 파괴는 아주 용이하지만 그 보존과 복원은 몇십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진읍성은 1440년(세종 22년)에 축조하였고 면천읍성은 1439년에 쌓았었는데 그 당진읍성은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는 상태이다.
면천읍성은 상당부분 남아 있고 그 복원 10개년계획 까지 발표·착수하고 있으나 당진읍성은 아는 군민도 매우 적겠지만 아무 관심조차 없으며 더구나 복원 논의는 꿈도 꾸지 않는 현실이다.


필자는 10여년전 충청남도에서 내포(內浦)문화권 특정지역 10개년계획 접수 당시 행정 당국을 통하여 당진·면천읍성 복원 10개년 예산으로 우선 500억원씩 각각 충남도에 요구한바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면천읍성 복원 예산은 55억5466만7천원이 계상되었고 당진읍성 복원예산은 단 1원도 서 있지 않았다.


수만년전~수백년전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귀중한 문화유적이 365일 매일같이 파괴되어 가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2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 수만명이 관군(정부군) 수천명을 격파한 승전목(勝戰谷:면천면 사기소리)이 창고 건축허가(실제는 채석장) 되었다 하므로 그 역사적 중요성을 대서특필 하였었다.


이제 기축년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14만 당진군민과 당진군 행정 당국·의회에 대하여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깊은 관심과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당진군 문화유적 100개소의 보존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반드시 보존해야할 문화유적 100개소

1.당진읍

1)아후산성(衙後山城:당진읍 읍내리)
당진군청 뒤 야산(동·서·북쪽) 구 경찰서 뒷산, 북문밖까지 모두 연결된 1500여년전 백제시대 산성으로 지난 1979. 3. 31 충남대 윤무병 박물관장 초청 현장 고증 확인

2)읍내리 고인돌(지석묘:당진읍 읍내리) 당진군청 뒷산 소재 청동기시대(서기전 10세기경~서기전 400년경)족장의 무덤으로 변형식 고인돌(1979. 3. 31 충남대 윤무병 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 부관장 현장 고증:1972년 4월 필자 발견)

3)당진읍성(읍내리 산21-1 임야 외 25필지) 세종 22년(1440년)에 축조한 행정적기능과 군사적 기능 겸비한 읍성. 둘레 914.5m, 높이 2.4m, 성문 3개소, 옹성시설, 여장(女墻) 468개, 우물 2개소, 성내에 동문리, 서문리, 남문리, 복문리 등 행정구역이 있었고 주민들이 성안에 거주했었다. 해미읍성 처럼 5~10개년 복원계획에 의해 복원해야 함

4)태성(台城:우두산성-우두리 태성마을) 거북산 919-2 임야 외 6필지 정상부 소재, 백제시대 토성 추정, 1979년 4월 필자가 발견, 성곽 명칭 명명. 둘레 약 320m, 높이(밖) 약 7m, 누차 현지 답사

5)가성(加城)산성(우두리 가성산 135-2 임야 외 9필지)
테뫼식 산성, 둘레 438m, 높이 약 1.5~1.8m, 성벽 상부폭 약 1.5m

6)사근사터(구룡리 산 98 임야 외 6필)

7)사기소리 요지(窯地:사기소리 254 답 외 7필 조선시대 가마터)

8)사기소리 고분군(古墳群:사기소리 안 사기소 산 32-2 임야 외 26필) 고려시대 고분 추정

9)수청리 고분군(수청리 산 60-1 임야 외 12필) 장방형 석축분

10)입한재(당진읍 원당리 144 대지 외 7필)
조선 중기 대학자·시인·문장가 구봉 송익필(1534~1599)선생 사당으로 위에 묘소와 묘비(우암 송시열 지음)가 있다.
조속히 진입로 확장, 주차장 시설, 입한재 중건 등 당진의 자랑스런 인물로 추앙·선양 기념사업 전개 요망

11)탑동 석탑·석등·불상 부재물(附材物:당진읍 채운리(탑동) 466-3 전 외 10필)

12)당진 북창터(당진읍 우두리 태성마을)

13)채운포 석교명(石橋銘:채운2리 512 탑동고개)
1688년(조선 숙종 14) 또는 1689년 세운 채운교 돌다리 시설 기념비

14)당진향교(읍내리 향교골) 조선 태종 1년 개창 추정

2. 합덕읍

1)합덕제(성동리 532 답 외 98필)
합덕지(池), 합덕제언(堤堰), 연호, 연제, 연지, 하호, 합덕방죽 등으로 호칭.
1995년 「합덕방죽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란 논문 발표(국내 최초로 합덕농민운동-실제는 합덕민란-내용 발굴 홍보) 당시. 조속한 연호의 복원 주장 이후 10여년 지난 2008년 복원 위한 기구 발족 환영

2)동구재(東丘城: 합덕리 창말 뒷산 꽃동산)
성터로 동굿재, 등굿재 등으로 불러옴. 필자는 그간 소들성(牛坪城)으로 명명해 오다가 고일산(高一山)씨의 증언에 의해 성 이름을 확인함

3)성동리산성(테뫼산성 : 성동리 테미산)
백제시대 산성. 둘레 473m, 높이 2~5m 내외

4)성동산성(도곡리와 소소리 경계 둔군봉)
합덕산업단지 개발로 파괴 우려

5)테뫼산성(당산성 : 소소리산성-소소리 회티 북쪽산 76 임야 외 7필지와 순성면 본리 경계 테미산 정상부)
테뫼식 산성으로 당진군 성터 중 가장 완연한 모습

6)독포(獨浦: 독개) 나루터(신흥리 352-206 천(千) 외 3필지)
삽교천 건너 아산시 궁평장터 왕래 나루터

7)신리성지(신리 63-4 답 외 3)

8)구합덕 성당(합덕리 275)

9)합덕리 고인돌(지석묘 : 합덕리 산 14 임야 외 14필지)
모두 3기의 남방식 지석묘

3. 고대면

1)막무덤(대촌2리 구억말)
백제독립(부흥)운동 당시인 663년 8월 27일~28일(음) 웅포앞 백강(백촌강) 해전 당시 백제 독립군·일본구원군 1만여 명 대부분 전사자 묘소(박성흥 학설)

2)당진포 해창터(당진포2리 305 이재득 소유 밭 등 부근 일대)

3)용샘(곰쇠샘 : 당진포3리 559-2 전 외 2필지)

4)개정(蓋井: 대촌2리 안개물 소재)
당진군 최대 천연우물, 수량(水量) 최대

5)영랑사(진관리 259) 부도 1기

6)성당사(진관리 1275)

7)회화 나무 1(진관리 239-1)

8)회화 나무 2(진관리 230)

9)모감주 나무(항곡리 504 문기용씨댁 앞)

10)성산리산성(성산리·통정리 경계 테미산 위)

11)당진포진성(鎭城: 당진포리 산 64-3 해창 성재산 위)

12)고산사 터(당진포리 산 184 절안마을)
고산사 부도 보존

13)속사리 토성(성산1리 속사리)

14)국사봉산성(정미 봉생리와 항곡리 경계 국사봉)

15)옥현리성(정미 천의리와 옥현리 경계 성고개)
필자 명명

4. 석문면

1)소난지도 의병총(난지도 2리 소난지도 소재)
내용생략

2)초락도 해운암터(초락도리 절께)
초락도 기도원 느티나무, 불당 터 건재

3)보덕사(삼화리 226-27)

4)구석기 유물 산포지(散布地: 초락도리 산 72-1 임야 외 8필지)
1997년 한남대 유물조사시 타제 석기 확인

5)웅포성(곰개성 : 삼봉리 차돌배기 산 55 임야 외 41필지)
옛 맹곶목장 목장성으로 추정(필자)

6)초락도 패총(초락도리 아침매기 옛 해변)
이융조 교수, 고 김원용 교수 초청 고증

반드시 보존해야할 문화유적 100개소


5. 대호지면

1) 충장사(도이1리 273 남유·남이흥
충신 정려, 모충관(유물관), 묘소 있음
2) 두산리 야철지(두산리 쇠정골 산 36-1 임야 외 1필지)
3) 이시경 충신 정려, 문헌묘(廟) (송전리 창말 369-1 사당 외 2필지)
4) 이양원 묘소(송전리 61-23) 임진란 당시 영의정
5) 문원사(적서리 대촌 410) 차천로 선생 사우
6) 창의사(조금리 169) 대호지 4.4 독립운동 참가자 570여 명 위패 봉안 사우
7) 만리성(마중리·대조리·승산·천의리) 필자와 이인화 박사 공동답사

6. 정미면

1) 대운산리 유적(대운산리 96-17 임야 외 10필지)  백제시대 석곽묘 7기 조사
2) 이안눌 신도비(사관리 비석마을 산 24-3 임야)
3) 이안눌 묘소·묘비(사관리)
4) 자모산성(산성리 자모산 위 113 임야)
5) 안국사지 석불·석탑(수당리 산 102-1)(보물 100호·101호)
6) 안국산 봉수(안국산 정상)
7) 천의 뱃터(천의2리 133-6 답 외 15필지) 옛 인천 왕래 정기여객선 선착장

7. 면천면

1) 민백준 현감 청덕휼민 선정비(사기소리 승전목 45-3) 이인화 박사 발견 보호각 건립 시급
2) 성상리 고분군(성상리 산 48 임야 외 20필지)
3) 몽산성(피성:避城: 성상리 몽산 등 5개 봉우리와 능선 에워싼 포곡식 산성, 662년 백제 부흥(독립) 운동 당시 풍왕·복신이 주류성에서 이곳 피성으로 옮겼다가 주류성으로 귀환 함)
4) 면천읍성(성상리 821-6 외 9필지) 면천읍성 복원 10개년 계획에 의거 공사 추진 예정
5) 면천향교(성상리 동문밖)
6) 군자정(성상리) 군자지 가운데 있다
7) 면천 은행나무(성상리 면천초교 교정) 충남도 지정 기념물 제82호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의 딸이 심었다고함. 수령 1100년 2주
8) 영탑사(성하리) 금동삼존불은 보물 제 409호 지정. 영선사·외무대신 김윤식이 유배생활 한 곳
9)의두암(依斗岩 : 성하리 연화봉) 병조판서·중추원 의장 김윤식(1835~1922)이 귀양살이 도중 연화봉에 음각 한것
10) 자개리 유적 1(자개리 514-5 임 야 외 17필지) 청동기 시대의 유적
11) 자개리 유적 2(자개리 457-17 임야 외 11필지)
12) 충정사(죽동리) 고려 명장 인당 장군 사우

8. 순성면

1) 봉소리 선돌(立石: 봉소리 1109 전 외 3필지) 청동기 시대(약 3000년전~약2400년전) 선돌로 당진군 현존 유일
2) 홍주 북창터(중방리 112 외 남원천 천변)
3) 시인 윤곤강 묘소(갈산리)

9. 우강면

1) 송산리 유물산포지 1~3 (송산리 508-20 전 외 145 필지, 163-39 전외 107필지, 솔뫼성지 북동 구릉)
2) 부리포(강문리 사발포) 정기 여객선 선착장 겸 일제강점기 소들강문(예당평야) 수확 벼반출 항구
3) 원치리 토성(원치리 412 전 외 51 필지)
4) 창리토성(창리 창말 114 대 외 65 필)

   
신평면 운정리 돌미륵과 매향비(우측)

10. 신평면

1)오페르트 정박지(매산리 행담도) 1868년(고종5) 4월 17일(음) 독일상인 오페르트는 행담도에 기선 차이나호(1000톤급) 정박하고 이튿 날 그레타호 이용 남연군묘 도굴 시도 실패 퇴거
2) 한원사와 이만유 유품(거산1리 510)
3) 문정사(도성리 관절) 홍문관 부제학 이성언 사우
4) 도성리 패총 1, 2(도성리 266-2 전 외 4필지, 도성리 290대 외 7필지)
5) 오봉제(상오리 청금마을 492-11 임야) 1933년 신평면 상오리·송악면 봉교·청금리 연결 저수지 준공
6) 신당리 유물산포지(신당리 산 93- 1 임야 외 68필지)
7) 신평현성(운정리 산성 : 운정리 산 79-3 임야 외 2필지) 백제시대 성터, 성안에 사공바위 (남근석 모양), 명문기와(咸通 11년-서기 870년-신라 경문왕10) 출토. 백제 부흥(독립)운동 당시의 사평성(沙平城)
8) 운정리 돌 미륵(운정리 탑재 미륵댕이 마을) 미륵 옆 돌에 명문음각(1428년-세종10년). 채웅석 교수(카톨릭대)와 오윤희 명예교수(한서대)는 그 돌에는 매향비(埋香碑) 비문이 음각돼 있다고 주장함

11. 송악면

1) 의병장 정주원 장군 묘역(가학리 당재) 을사늑약에 항거 경기도 안성에서 한때 의병 900여 명 지휘한 의병장
2) 신암사(가교리 550) 금동불좌상(보물 987호)
3) 광명리 유물산포지(광명리 산 76-2 임야 외 110필지)
4) 안민학 묘역(고대2리 방터) 다른 묘소와 안민학 신도비 등
5) 안섬 당집(내도리 155-5 임야 60)
6) 봉교리 유물산포지(봉교리 산 25임야 외 72필지)
7) 필경사(부곡리 2구 251-12) 심훈의 필경사, 묘소
8) 쌍매당(이첨) 묘소, 사우(오곡리)여말 선초의 문신·문장가
9) 중흥리 절터(중흥리 342-1 전 외 7필지) 절터 400~500여 평
10) 송악산성(송악산 정상부) 송악면의 대표적 성곽

12. 송산면

1) 성구미 포구(가곡리 226-6 대(垈) 외 5필지)
2) 오도항(당산3리 오도) 옛 당진항, 1935년 세운 당진축항준공 기념비가 오도회관 앞에 있다
3) 창택산성(도문리 창택산 옥녀봉)
4) 작문재 토성(유곡리 산 77 임야 외 5필지) 옛 창택곶 목장의 목장성으로 추 정(필자)
5) 덕수이씨 세장지(世葬地) (도문리 능안) 이의무 목사 이하 이기(영의정) 이행(좌의정) 등 묘소. 신도비 묘 비
6) 삼월리 회화나무(삼월리 이강화댁 앞) 이행이 심었다는 선비나무. 충남 천연기념물 지정
7) 동악서원터(명산리) 청백리·예조판서. 시인 동악 이안눌의 서원이 있던 터. 조속히 복원할 군내 유일의 서원있던 터
8) 의병장 최구현 묘소(부곡리) 을사늑약 반대 투쟁 나선 370명 의병지휘 의병장

   
고산사 부도(고대면 당진포리 고산사터)

당진읍성과 면천읍성
홍 석 표 / (사)내포문화연구원 원장
2008년 09월 29일 (월) 13:52:06 당진신문 webmaster@ijdnews.co.kr

 

   

당진군민 특히 당진읍 읍내리 주민들에게 당진읍성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다.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진읍성은 1440년(세종22)에 축조되었으며 면천읍성은 1439년(세종21)에 축조되었다.


면천읍성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당진읍성은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할것이다. 이유는 당진읍성은 전혀 눈에 띄지 않고 면천읍성은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당진읍성 존재조차 몰랐다가 1970년대에 겨우 문헌을 통해 알았고 그 성돌 몇개를 보고서야 확증을 갖게 되었었다.

읍성은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 2가지 기능이 있다. 당진·면천읍성 모두 석성(石城) 즉 돌로 쌓은 성곽이다.
당진읍성은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보이는데 둘레 2,809자(尺), 높이 9자, 성문 3개소, 옹성이 있었고, 여장 468개, 성안 우물 3개, 해자(垓子)는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진읍성은 현재 확인되는 북벽은 2.1m이고 북벽의 동쪽 끝 야산 정상부엔 성벽기단 및 석축부 석재(石材)일부가 확인되고 있다. 북벽은 전 농협중앙회 당진군 지부 부근에서 동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당진군청 부근에서 남벽으로 연결되어 전 당진경찰서 부근에서 서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면천읍성은 문종실록에 둘레 3,225자(尺), 높이 11자, 적대(敵臺) 7개소, 성문 3개소, 여장 56, 우물 3, 해자는 판곳도 있고 파지 않은 곳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진읍성은 언제 어떤 이유로 파괴되었는지 아무리 물어보고 찾아봐도 그 의문점은 풀리지 않고 있다.


똑같은 읍성인데 당진읍성은 형적조차(?) 거의 없으니 없다고 할 것이고, 면천읍성은 아직도 뚜렷이 일부라도 있으니 당연히 있다고 할 것이다.
7년전 내포문화권 특정지역 개발사업계획 관계로 필자는 당진군청을 경유하여 충남도청에 두 읍성 복원예산(10개년 계획) 각각 500억원을 요청하였고, 합덕방죽(합덕제:연호) 복원예산 300억원을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당진읍성은 단 1원도 복원예산이 반영되지 않고 면천읍성만 복원예산이 반영되어 지난해에는 무려 200억원 이상(10개년 계획)의 예산이 확정되어 있다.
인근의 해미읍성이나 전남의 낙안읍성을 보면서 언제 당진읍성과 면천읍성이 복원되어 560여년전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볼수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10년간 전국 시·군·구 역사탐방을 70차 이상, 해외 역사기행도 6차나 누벼왔지만 내 고향 당진군 처럼 문화유적이 거의 전무한 곳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 군민은 조상들이 창조했던 문화유산을 하루 빨리 복원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 실천에 앞장서야 할것이다. 더구나 당진군은 여러 산업단지 조성과 아파트 건립, 당진항 건설 등 개발로 문화유적이 파괴되기 쉬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