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해동역사(海東繹史) 교빙지(交聘志) 해도(海道)

吾心竹--오심죽-- 2010. 2. 6. 20:40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0권
 교빙지(交聘志) 8
해도(海道)


살펴보건대 육조(六朝) 시대 때에는 백제와 신라가 모두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조공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바다를 건너서 남조(南朝)와 통교하였다. 요사렴(姚思廉)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때부터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온 동쪽의 사신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가 있다.” 하였고, 호삼성(胡三省)은 말하기를, “진나라 때에는 건강(建康)에서 대강(大江)으로 나가 바다에 도달한 다음 요각(料角)을 돌아 등주(登州)의 큰 바다에 이르렀다.” 하였다. 대개 남조가 고구려와 통교할 때 이 길을 경유하였으니, 후위(後魏)의 정광(正光) 초기 때 광주부(光州府)가 바다에서 소량(蕭梁)이 제수한 고구려의 사신들을 붙잡은 것 등이 이것이다.
당나라 때에는 신라와 발해 등 여러 나라도 모두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였는데, 신라는 지금의 남양(南陽) 덕물도(德勿島)와 풍천(豐川)의 초도(椒島)가 모두 중국과 왕래하는 문호였고, 발해의 경우는 서경(西京)의 압록부(鴨淥府)에서 배를 띄워 등주에 도달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송악(松嶽)에 도읍하였으므로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띄워 등주에 도달하였다. 송나라 사신이 올 적에는 대부분 해서(海西)의 옹진(甕津) 등지를 경유하여 왔으니, 순화(淳化) 연간에 진정(陳靖)이 옹진의 포구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온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희령(煕寧) 연간에 이르러서는 거란(契丹)을 멀리 돌아가고자 하여 명주(明州)를 경유하는 것으로 길을 고쳤으니, 노윤적(路允迪)과 양응성(楊應誠) 등이 올 적에도 역시 명주에서 나주(羅州)의 흑산도(黑山島)에 도착한 다음 서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와 예성강으로 들어왔다. 연해의 여러 섬에는 맞이하고 전송하는 관소(館所)를 줄지어 세웠는데, 지금까지도 남은 터가 있으니, 만경(萬頃)의 군산정(群山亭), 해미(海美)의 안흥정(安興亭), 인천(仁川)의 경원정(慶源亭)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원나라 때에는 제주(濟州)에 총관부(摠管府)를 세우고 주(州)의 서쪽 명월포(明月浦)에 수참(水站) 30곳을 세워 압록강 해구(海口)에까지 이르렀다.
명나라 초기에는 금릉(金陵)에 도읍하였으므로 고려 및 조선에서는 해도를 경유하여 갔고, 연경(燕京)으로 도읍을 옮김에 이르러서는 육로로 갔는데, 태종(太宗) 기축년(1409, 태종9)부터 육로로 가기 시작하였다. 광해군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이르러서는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길이 막힘으로 인해 다시 등주의 해로로 갔다.
○ 고구려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사역(使譯)이 항상 통하였다. 《남제서(南齊書)》
○ 양(梁)나라 고해(高諧)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주사(周捨)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묻자, 주사가 말하기를, “밤에는 별을 바라보고 낮에는 해를 재어서 가라.” 하였다. 《담수(談藪)》
○ 당나라 정관(貞觀) 16년(642)에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모의하여 당항성(棠項城)을 빼앗아 신라 사람들이 조공하러 들어오는 길을 끊었다. 《구당서(舊唐書)》 ○ 삼가 살펴보건대 당항성은 지금의 안산군(安山郡)으로, 이 당시에 신라의 공도(貢道)가 경기의 서해(西海)를 경유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지(地志)에 상세히 나온다.
○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다로 나아가 대사도(大謝島), 구흠도(龜歆島), 어도(淤島), 오호도(烏湖島)를 지나는 데 300리,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서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鎭)까지 가는 데 200리,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 청니포(靑泥浦), 도화포(桃花浦), 행화포(杏花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 오골강(烏骨江)까지가 800리이다.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오목도(烏牧島), 패강구(貝江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大同江)이다.-, 초도(椒島) -삼가 살펴보건대 초도는 지금의 풍천부(豐川府)에 있다. 부에서 서남쪽으로 25리 되는 곳에 있는 광석산(廣石山) 아래에 당나라 관소(館所)의 옛터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중국의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서 왕래하던 곳이라고 한다.- 를 지나면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도달한다.
또 진왕석교(秦王石橋),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 -삼가 살펴보건대 덕물도(德勿島)로, 지금 남양(南陽)의 바다에 있다. 지지(地志)에 상세히 나온다.- 를 경유하여 1000리를 가면 압록강과 당은포(唐恩浦)에 이르고, 이어 동남쪽으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王城)에 도달한다. 《신당서(新唐書)》 ○ 삼가 살펴보건대 당은포는 지금의 남양부(南陽府)의 바다 포구이다. 신라의 왕성은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지지의 신라 조에 상세히 나온다.
천보(天寶) 초에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로 하여금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어린 임금을 책봉하여 세우게 하였는데, 위요가 나이가 많아서 가기를 몹시 꺼렸다. 일찍이 신라에 갔다 온 어떤 나그네가 있었으므로 그를 찾아가 신라로 가는 길을 묻자, 나그네가 말하기를, “영휘(永徽) 연간에 신라와 일본이 모두 통호(通好)하자,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아울러 보답하였다. 사신이 신라에 도달한 다음 바닷길을 따라서 장차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하던 도중에 큰 바람을 만나 파도가 크게 일어나 수십 일 동안을 그치지 않았다. 파도를 따라 표류해 정처 없이 가던 중에 홀연히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져서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날은 막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함께 간 몇 척의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배를 매어 두고 약 100여 인이 해안으로 상륙하였는데, 해안은 높이가 2, 3십 길[丈]이나 되었다. 저 멀리 집들이 있는 곳이 바라보이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달려갔다. 그러자 키가 큰 사람이 나왔는데, 신장이 2길이나 되었으며, 몸에는 의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고,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나라 사람들을 보고는 몹시 기뻐하더니 당나라 사람들을 에워싸고 성안으로 들어간 다음 돌로 문을 막고 나갔다. 잠시 뒤에 그들의 종족 100여 명이 서로 연이어 와서 당나라 사람 가운데 살이 찐 50여 인을 골라내 모두 삶은 다음 서로 뜯어 먹었고, 잘 익은 술까지 내어 마시면서 함께 잔치를 벌여 즐겼다. 밤이 깊어서 모두 술에 취하자 여러 사람들이 그 틈을 타서 도망쳐 나와 바닷가에 도착한 다음 모두 배를 타고는 새벽녘에 배를 띄웠다. 이에 겨우 사신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
○ 귀숭경(歸崇敬)이 대력(大曆) 초에 창부 낭중(倉部郞中)에 제수되어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런데 바다에서 파도가 쳐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자 뭇사람들이 모두 놀라 배 한 척에 귀숭경을 실어 보내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귀숭경이 말하기를,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는데, 어찌 차마 나 혼자서만 구제될 수 있겠는가.” 하니, 잠시 뒤에 바람이 그쳤다. 《신당서》
○ 원의방(元義方)이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 계림주(鷄林洲)에서 출발해 오다가 해도(海島) 가에 도착하니 흐르는 샘물이 있었다. 이에 뱃사람들이 모두 물을 길어서 담았는데, 잠시 뒤에 홀연히 작은 뱀이 샘 안에서 나왔다. 그러자 뱃사람이 대뜸 용이 노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배를 띄워 채 몇 리도 오기 전에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치더니 3일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나서 멀리 해안가에 성읍(城邑)이 보이기에 물어보니 바로 내주(萊州)였다. 《국사보(國史補)》
○ 발해의 서경(西京) 압록부(鴨淥府)는 조공하는 길이다.
○ 압록강구(鴨淥江口)에서 배를 타고 100여 리를 간 다음, 이어 작은 배를 타고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에 도착하여 발해의 경내에 도달하게 된다. 《이상 모두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압록부는 지금의 강계부(江界府) 강 북쪽에 있으며, 박작구는 지금 의주의 진도(津渡)이다. 이 당시에 거란(契丹)이 서쪽에 있었으므로 발해에서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이 압록부에서 배를 띄워 박작구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와 등주(登州)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 송나라 순화(淳化) 4년(993, 성종12)에 진정(陳靖)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진정 등이 등주(登州)의 동모(東牟)에서 팔각해구(八角海口)로 나아가다가 고려의 사신 백사유(白思柔)가 탄 해선(海船) 및 고려의 뱃사공을 만났다. 이에 즉시 그 배로 올라가 지강도(芝岡島)에서 순풍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갔다. 이틀을 항해하여 옹진구(甕津口)에 도착해서 육지로 올라가 160리를 가서야 고려의 경내에 도착하였는데, 해주(海州)이다. 《송사(宋史)》
여상 단(呂相端)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는데, 바다를 지나면서 축문(祝文)을 올리기를, “돌아오는 날 걱정이 없으면 마땅히 금으로 쓴 《유마경(維摩經)》으로 사례하겠다.” 하였다. 그런데 돌아올 때 파도가 갑자기 쳐서 결국 《유마경》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음악 소리가 배 아래에서 나기 시작했는데, 음조가 맑고 뛰어나 인간 세상의 음악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유마경》은 물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최백이(崔伯易)가 예부(禮部)에 있을 적에 고려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의 고사(故事)를 찾아보다가 마침내 신공(申公)의 고사를 얻었으므로 양강국(楊康國), 전협(錢勰) 등이 모두 이 《유마경》을 베껴 가지고 갔다. 풍직(豐稷)이 장전(掌牋) 양표(楊表)를 위하여 말하기를, “동해 바다는 용왕(龍王)의 보배를 보관해 두는 장소이다. 짙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서려 있어, 비록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역시 큰 파도가 일어난다. 사신으로 가는 사람이 나무 상자 안에 누워 있으면 비록 배가 흔들리더라도 몸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음식물을 먹으면 모두 토하여 오직 약간의 장물만 마실 수 있다. 배 앞에는 집채만 한 큰 거북이 나타나는데, 두 눈이 큰 촛불과 같아서 그 빛이 모래밭을 비추므로 뱃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길을 찾으니, 이 거북을 보면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손공담포(孫公談圃)》 ○ 《옥호청화(玉壺淸話)》에 “여단(呂端)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다가 파도를 만나서 돛대가 부서지고 키가 부러졌다. 이에 뱃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태연스레 글을 읽었는데, 마치 재각(齋閣)에 앉아 있는 듯하였다.” 하였다.
○ 왕자비 관문(王子飛觀文)이 바다를 건너서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갔다. 그는 매번 파도를 만나 위태로울 때면 불서(佛書)를 잘라서 바다에 던지곤 했는데, 이상한 괴물들이 출몰하면서 앞 다투어 탈취해 갔다. 그러나 도서(道書)를 잘라 넣으면 돌아보지도 않았다. 《문견후록(聞見後錄)》
○ 대제(待制) 사도(査道)가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날이 저물어 어느 산에 정박하여 머물다가 모래밭을 바라다보니 붉은 치마를 입고 양쪽 어깨를 드러낸 채 머리는 산발을 한 어떤 여인이 있었는데, 팔꿈치 뒤에는 희미하게 붉은 지느러미가 나 있었다. 이에 사도가 뱃사람에게 명하여 상앗대로 물속으로 밀어 넣어 부인의 몸이 손상되지 않게 하였다. 부인이 물을 만나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여 보다가 몸을 돌려 사도를 바라보고 손을 들어 절하면서 감사해하고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을 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뱃사람이 말하기를, “제가 바닷가에 살지만 이런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도가 말하기를, “이것은 인어(人魚)이다. 능히 사람과 더불어 간통하는데, 물고기이면서 사람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하였다. 《견이기(甄異記)》 ○ 《규거지(睽車志)》에, “사명(四明) 사람 정방걸(鄭邦傑)이 고려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배를 타고 가다가 깃발이 번쩍번쩍 빛나는 가운데 양쪽 뱃전에 수십 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귀화선(鬼划船)이라 하였다.” 하였다.
○ 희령(煕寧) 7년(1074, 문종28)에 고려가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해 와서 말하기를, “거란을 멀리 피하여 가고자 하니, 길을 바꾸어 명주(明州)를 경유해 가게 해 주소서.” 하니, 따라 주었다. 《송사》
○ 명주의 정해(定海)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 만에 큰 바다로 들어가고, 또다시 5일을 가면 흑산도(黑山島)에 도착하여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흑산도에서 여러 섬을 지나면 암초 사이를 배회하게 되는데, 배가 몹시 빠르게 가 7일 만에 예성강(禮成江)에 도달한다. 예성강은 두 산 사이에 있는데, 마치 돌 협곡과 같으며 물살이 빠르게 흐른다. 이것이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으로 몹시 험악하다. 또다시 3일을 가면 강안(江岸)에 도착한다. 그곳에 관소(館所)가 있는데, 이를 벽란정(碧瀾亭)이라 한다. 사신들이 이곳을 경유해 육지로 오른 다음 꼬불꼬불한 산골짜기를 따라 40여 리를 가면 바로 그 나라의 도성에 이른다고 한다. 《상동》
○ 옛날에 고려 사람들이 오면서 대부분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경유하였는데, 등주와 내주에서 양변(梁汴)까지는 산하(山河)가 가로막고 있어서 거리가 매우 멀다. 오늘날에는 삼한(三韓)의 사신들이 곧장 사명(四明)으로 오는데, 해도(海道)가 아득하고 중간에는 많은 섬들이 가로막고 있으며, 암초에 부딪히면 배가 부서지고 대양(大洋) -바다가 깊고 끝없이 넓은 것을 양(洋)이라 한다.- 에 들어가면 배가 전복된다. 그런 데다가 또 흑풍(黑風)과 해동(海動)의 변고가 있는데, 이를 만나면 천지가 깜깜해지고 파도가 하늘로 솟구치므로 뱃사람들이 꼬불꼬불 돌아서 이를 피해 간다. 급수문(急水門)을 나서서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면 비로소 ‘평안하게 왔다.’고 하는데, 수십 일을 가지 않으면 도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남북으로 오갈 적에 만약 순풍을 만나면 험난한 곳을 평지처럼 지날 수가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
원풍(元豐) 원년(1078, 문종32)에 비로소 안도(安燾)를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빙문(聘問)하게 하였다. 명주(明州)에서 두 척의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하나는 ‘능허안제치원(凌虛安濟致遠)’이라 하고,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라고 하였으며, 모두 신주(神舟)라고 이름을 붙였다.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횡단하여 동쪽으로 갔다. 《송사》
○ 중서성(中書省)이 올린 차자(箚子)에, “이미 칙지(勅旨)를 내려서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배에 대해 제1선에는 ‘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神舟)’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제2선에는 ‘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이상의 성지(聖旨)에 의거하여 편액(扁額)을 의당 어서원(御書院)으로 하여금 법대로 한 장씩을 써서 속히 들이게 하고, 이를 속히 명주로 보내어 교부해 주고, 본주에서 비액(碑額)을 만들 적에 칙첩(勅牒)에 있는 바대로 안배하여 달게 하되, 안도 등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소서.” 하였다. 《희령일력(煕寧日曆)》
○ 원풍 초에 후경(厚卿) 안도(安燾)와 화숙(和叔) 진륙(陳陸) 두 학사(學士)가 삼한에 사신으로 갔는데, 바다를 건너는 배 속에 불경(佛經)과 지나가는 곳에서 끌어 모은 패경(敗經)의 권축(卷軸)을 안치하여 바다에 흩뿌리는 데 대비하였다. 바다로 나아간 지 이틀 만에 바람의 기세가 몹시 험악하여 파도가 갑작스럽게 일어나 앞뒤의 배가 서로 멀어지게 되었는데, 바다 신(神)과 갖가지 괴물이 뱃전을 부여잡고 올라와 불경과 패경의 권축을 요구하는 의사를 보였다. 이에 먼저 권축을 주었는데, 계속해서 오는 자가 많았다. 《춘저기문(春渚紀聞)》
○ 선화(宣和) 4년(1122, 예종17)에 노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을 파견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명주에서 배를 띄워 정해현, 초보산(招寶山) -이곳에서부터 해구(海口)로 나가게 된다.-, 칠리산(七里山), 호두산(虎頭山) -정해에서의 거리가 20리이다.-, 교문(蛟門) -호두산에서부터 20리이다.-, 송백만(松柏灣), 노포(蘆浦), 부희두백봉(浮稀頭白峯), 착액문(窄額門), 석사안(石師顔), 심가문(沈家門) -창국현(昌國縣)에 속한다.-, 매잠(梅岑) -이곳부터 대양(大洋)으로 나간다.-, 적문(赤門), 해려초(海驢焦), 봉래산(蓬萊山) -섬은 창국현의 경내에 속한다.-, 반양초(半洋焦), 백수양(白水洋), 황수양(黃水洋) -바로 모래밭이 삐져 나온 곳이다. 중국에서 고구려로 갈 적에 오직 명주에서 가는 길만이 이곳을 경유한다. 만약 등주(登州)의 판교(板橋)에서 건너가면 이곳을 피해 갈 수 있다.-, 흑수양(黑水洋) -바로 북해양(北海洋)이다.-, 협계산(夾界山) -중국과 오랑캐가 이곳을 경계로 하여 나누어진다.-, 오서(五嶼), 배도(排島), 백산(白山), 흑산(黑山), 대월서(大月嶼), 소월서(小月嶼), 난산도(闌山島), 백의도(白衣島), 궤섬(跪苫), 춘초섬(春草苫), 빈랑초(檳榔焦), 보살섬(菩薩苫), 죽도(竹島), 고섬섬(苦苫苫), 군산도(群山島) -객관(客館)이 있는데, 군산정(群山亭)이라 한다.-, 관서(官嶼), 횡서(橫嶼), 자운섬(紫雲苫), 부용창산(富用倉山)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다.-, 홍주산(洪州山), 동원산(東源山), 아자섬(鵶子苫), 마도(馬島) -객관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 한다.-, 구두산(九頭山), 당인도(唐人島), 쌍녀초(雙女焦), 대청서(大靑嶼), 화상도(和尙島), 우심서(牛心嶼), 계심서(鷄心嶼), 섭공서(聶公嶼), 소청서(小靑嶼), 자연도(紫燕島) -바로 광주(廣州)이다. 객관이 있는데, 경원정(慶源亭)이라 한다.-, 급수문(急水門), 합굴(蛤窟), 분수령(分水嶺), 용골포(龍骨浦), 예성항(禮成港) -객관이 있는데, 벽란정(碧瀾亭)이라 한다.- 을 거쳤는데, 이곳에서부터는 육로를 따라서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이해 5월 28일에 바다로 나가 순풍을 만나 6월 6일에 이르러 군산도에 도착하였다.
돌아올 적에는 순천관(順天館)에서 출발하여 합굴(蛤窟), 자연도(紫燕島), 소청서(小靑嶼), 화상도(和尙島), 대청서(大靑嶼), 쌍녀초(雙女焦), 당인도(唐人島), 구두산(九頭山), 마도(馬島), 알자섬(軋子苫), 횡서(橫嶼), 군산도(群山島), 고섬섬(苦苫苫), 죽도(竹島), 월서(月嶼), 흑산(黑山), 백산(白山), 오서(五嶼), 협계산(夾界山), 사미(沙尾), 동서산(東胥山), 서서산(西胥山), 낭항산(浪港山), 담두(潭頭), 소주양(蘇州洋), 율항(栗港), 교문(蛟門),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다. 7월 13일 갑자에 순천관을 출발하여 8월 27일 병오에 정해현에 도착하였으니, 고려를 떠나서 명주의 경내에 도착하기까지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고려도경(高麗圖經)》 ○ 예문지(藝文志)의 중국문 조(中國文條)에 상세히 나온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바닷길은 어려움이 대단하였습니다. 일엽편주로 험난한 바다를 건넌 것은 오직 종묘사직의 복이 파신(波神)을 순종시킨 데 힘입은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었겠습니까. 큰 바다는 돛에 의지하여 건너가는데, 풍랑을 만났더라면 다른 나라로 표류해 가서 생사가 순식간에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 세 가지 위험한 것이 있으니, 치풍(癡風)과 흑풍(黑風)과 해동(海動)이 그것입니다. 치풍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울부짖으면서 그치지 않으므로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고, 흑풍이 일어나면 노한 태풍이 수시로 불며 하늘이 깜깜해져 밤낮을 분간할 수가 없으며, 해동이 일어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큰 바다 가운데에서 이런 상황을 만나면 죽음을 면하는 자가 드뭅니다.
또 파도가 한번 칠 때마다 배를 수십여 리나 밀어내니, 몇 길밖에 안 되는 배로 파도 사이에 떠 있는 것은 터럭끝이 말의 몸에 붙어 있는 정도도 못 됩니다. 그러므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배 크기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안전을 제일로 삼습니다. 그러나 만약 위험한 상황을 만나면 지성(至誠)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하고 슬프게 애원하면 감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사신이 갈 적에 두 번째 배가 황수양(黃水洋) 한 가운데에 이르러 세 개의 키가 다 부러졌습니다. 그때 마침 신(臣)이 그 가운데 있었는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과 머리를 깎고 슬프게 애원하였더니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습니다. 복주(福州)의 연서신(演嶼神) 역시 기일(期日)에 앞서 이적(異蹟)을 나타냈었으므로, 이날 배가 비록 위태로웠으나 다른 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꾸고 난 뒤에 다시 전같이 기울며 흔들렸고, 5일 밤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 도착하였습니다. 상륙할 때에 이르러서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초췌해져서 거의 산 사람의 기색이 없었으니,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바닷길이 험난하지 않다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고서 후한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어도 표류하거나 익사하여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었으니, 단지 나라의 위령(威靈)을 믿고 충신(忠信)에 의지하면 틀림없이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점을 서술하여 뒷사람들을 격려하는 바입니다. 지난번에 간 사신의 행차는, 갈 적에는 남풍(南風)을 이용하여 갔고, 돌아올 적에는 북풍(北風)을 이용하여 왔습니다. 《상동》
○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고려로 사신을 보낼 적에 일찍이 유사(有司)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2척의 신주(神舟)를 건조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 황제께서 제위를 계승하신 뒤에는 부황(父皇)을 앙모하는 효심이 지극하였다. 고려인들에게 은혜를 더 베푼 것은 실로 희령(煕寧)과 원풍(元豐) 연간의 치적(治績)을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
숭녕(崇寧)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주 사신을 보내어 위무하였는바, 은혜가 융숭하고 예가 후하였다. 또 유사에게 조명을 내려 다시 2척의 배를 건조하게 하였는데, 그 규모를 확대하고 명칭을 더 늘렸다. 하나는 ‘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이고, 하나는 ‘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인데, 높기가 산악 같고, 물결 위에 떠서 움직이면 비단 돛과 익조(鷁鳥) 뱃머리가 교룡과 이무기를 굴복시켜, 휘황한 사신의 모습이 이적(夷狄)에게 위엄을 보이는 것으로는 고금에 으뜸이다. 따라서 고려인들이 조서(詔書)를 맞이하던 날 온 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면서 환호하고 감탄한 것은 당연하다. 《상동》
○ 예전의 전례로는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적마다 언제나 출발하는 날짜에 앞서 복건(福建)과 양절(兩浙)의 감사에게 위촉해 객주(客舟)를 모집하여 고용하게 하였다. 또 명주(明州)로 하여금 장식(裝飾)을 하게 하여 대략 신주(神舟)와 같이 꾸미게 하는데, 규모는 갖추었으나 신주보다는 작다. 그 길이는 10여 길[丈]이고, 깊이는 3길, 너비는 2길 5자(尺)이며, 2000곡(斛)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
그 구조는, 다 자란 커다란 박달나무 통나무를 겹쳐 쌓아서 만들되 위는 저울대같이 평평하고 아래는 칼날같이 기울어지게 만드는데, 물결을 헤치고 갈 수 있어서 좋다. 그 가운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앞의 한 선창에서는 황판(艎板)을 놓지 않고 바닥에만 화덕과 물독을 놓는데, 그곳은 바로 두 돛대의 사이에 해당된다. 그 아래는 바로 무기를 넣어두는 시렁이다. 그다음의 한 선창은 4개의 방으로 꾸몄다. 또 그 뒤의 한 선창은 ‘교옥(㢗屋)’이라고 하는데, 높이가 1길 남짓 되고 사면의 벽에 창문이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가옥의 구조와 같으며, 위에는 난간이 만들어져 있어 채색 그림이 화려하며, 휘장을 달아 장식을 더하였다. 이곳에는 사신의 관속(官屬)들이 각자 계급의 서열에 따라 나누어서 거처한다. 위에는 대나무로 만든 뜸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포개 쌓아 두었다가 비를 만나면 촘촘하게 펼쳐서 덮개를 덮는다. 그러나 뱃사공들은 교옥을 높게 만드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는데, 이는 그것이 바람을 막는 것보다는 그대로 두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뱃머리의 양쪽 곁 기둥 가운데에 수레바퀴가 있고 그 위에 등(藤)으로 꼰 동아줄을 매었는데, 그 굵기는 서까래만하고, 그 길이는 500자이다. 그 아래에는 닻돌을 달아매었는데, 돌 양쪽 곁에는 2개의 나무 갈고리가 끼고 있다. 배가 큰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산에 근접해서 정박하게 되면, 닻을 풀어 물 바닥에 닿게 하는데, 뱃줄 따위를 묶어놓은 것과 같아 배가 가지 않는다. 만약 풍랑이 심해지면 유정(游矴)을 보태는데, 그 작용은 큰 닻과 같으며, 닻의 양쪽 곁에 있다. 배가 갈 때가 되면 바퀴를 감아서 거두어들인다. 뒤에는 정타(正柁)가 있는데, 크고 작은 두 종류로 되어 있어서 물의 깊이에 따라 바꾸어서 쓴다. 교옥 뒤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꽂은 두 개의 노가 있다. 이를 삼부타(三副柁)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직 큰 바다에 들어갔을 경우에만 쓴다.
또 배의 가운데 부분의 양쪽 옆에 큰 대나무를 묶어 자루를 만들어서 물결을 막는데, 그것을 장치하는 법은, 물이 자루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경중(輕重)의 도수를 삼는다. 그리고 수붕(水棚)이 대나무 자루 위에 있다.
배마다 열 개의 노(艣)가 있어서 산 사이를 헤치고 항구로 들어가거나 밀물을 따라 갑문(閘門)을 지나는 데는 다 노를 저어서 가는데, 이때 뱃사공들이 발을 구르고 소리를 외치면서 대단히 힘을 쓴다. 그러나 배가 가는 것은 끝내 바람을 타고 가는 것만큼 빠르지는 못하다.
대장(大檣)은 높이가 10길이고 두장(頭檣)은 높이가 8길이다. 바람이 바르게 불면 돛 50폭을 펼치고, 좀 치우쳐서 불면 움직이는 뜸을 써서 좌우에 날개같이 펼쳐서 풍세(風勢)를 잡아준다. 대장의 꼭대기에는 또 작은 돛 10폭을 다는데, 그것을 ‘야호범(野狐颿)’이라고 하며, 바람이 멎었을 때 그것을 쓴다.
바람에는 8면이 있는데, 오직 맞바람이 불어올 때만 갈 수가 없다. 장대를 세워 새의 깃으로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는데, 그것을 ‘오량(五兩)’이라고 한다. 대체로 맞바람을 얻기는 어렵기 때문에, 돛을 사용하는 것이 사람의 뜻에 따라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는 움직이는 뜸을 사용하는 것만 못하다.
바다에서의 항해는 깊은 곳은 두렵지 않고 다만 얕은 곳에 처박히는 것이 두렵다. 배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밀물이 빠지면 기울어 쓰러져서 구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항상 노끈으로 납추를 드리워서 재어 본다.
배마다 뱃사공과 수부(水夫)가 60인가량 되는데, 오직 수령(首領)이 해도(海道)를 잘 알고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잘 헤아려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 것만 믿을 뿐이다. 그러므로 창졸간의 어려움이 생겨도 앞과 뒤가 한사람같이 서로 호응하면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주(神舟)의 길이, 너비, 높이, 크기와 집물 기구, 인원수 등은 모두 객주(客舟)보다 3배나 된다. 《상동》
○ 바닷물은 맛이 몹시 짜고 써서 입에 댈 수 없다. 그러므로 무릇 배가 큰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면 반드시 물독[水櫃]을 갖추어서 샘물을 많이 비축해 마실 것에 대비한다. 대체로 큰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바람은 그리 심하게 걱정하지 않고, 물이 있고 없음으로 생사가 판가름난다. 중국 사람들이 서쪽에서부터 큰 바다를 횡단하여 오는 데 여러 날이 걸리므로, 고려 사람들은 샘물이 반드시 다 떨어졌으리라 짐작하고서 큰 독에다 물을 싣고 배를 저어와 맞이한다. 이에 각각 차와 쌀로 갚아 준다. 《상동》
○ 앞서 원풍(元豐) 연간에 상절(上節)의 사신 송밀(宋密)이 자연도(紫燕島)에서 죽었는데, 그 뒤부터는 사신이 오면 반드시 제물사(濟物寺)에서 불승(佛僧)에게 공양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상절이 차례에 따라 무덤 아래에 둘러서서 배례(拜禮)하였다. 지난번에 어명을 받들고 그곳에 가서도 역시 전례에 따랐다. 비록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은의(恩義)는 이치상 물론 마땅한 것이겠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 이국땅에 가면 멀리 고향을 생각하게 되는 법이므로, 갑자기 객사한 사람의 무덤을 보고서 옷깃을 적시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체로 이역 땅에 사신으로 가는 데 있어서는 요동(遼東) 지역이 가장 어려운바, 바다가 막혀 있어서 오만 가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온전히 사명(使命)을 끝마치고 조정에 복명(復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본래 왕의 위령(威靈)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교룡과 조개의 뱃속에 장사 지내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니, 어찌 부처가 보호해 줄 수가 있겠는가. 《상동》
○ 노윤적(路允迪)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풍랑을 만났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탄 배는 모두 물에 빠지고, 노윤적이 탄 배만은 신령이 돛대에 내려 보호하였으므로 아무 탈이 없었다. 사신 갔다가 돌아와서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자, 특별히 신묘(神廟)를 지어 주고 ‘제순(濟順)’이라는 묘호(廟號)를 하사하였다. 《동서양고(東西洋考)》 ○ 《금대기문(金臺紀聞)》에, “천비(天妃)가 그 신이니, 여자 세 사람이다. 송나라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에 사신을 보냈는데, 중간에서 풍랑을 만났으나 이 신의 도움으로 인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사신으로 갔던 노윤적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자, 비로소 그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하였다.
○ 공필(公弼) 노윤적(路允迪)이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갔는데, 배를 타고 가던 중 바다 가운데에서 갑자기 흑산(黑山)이 파도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산꼭대기에는 광채가 있어서 마치 두 해가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것과 같았다. 이에 관리들이 크게 놀라자, 뱃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큰 거북이 나와서 노는 것으로, 두 개의 해와 같은 것은 그 거북의 두 눈입니다. 빨리 세 가지의 희생(犧牲)을 갖추어서 제사 지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필이 축사(祝辭)를 부르라고 하고는 관속을 거느리고 분향(焚香)하고 재배(再拜)한 다음 희생을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없어졌다. 《우간(寓簡)》
○ 신이 듣건대, 바다는 온갖 물의 모체(母體)여서 천지와 더불어 똑같이 극한이 없기 때문에, 그 양(量)은 천지를 측량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고 합니다.
밀물과 썰물의 왕래로 말하면, 시기에 맞춰 어긋나지 않아서 천지간의 지극한 미더움이 됩니다. 옛사람들이 일찍이 이에 대해 논하였는바,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해추(海鰌)가 굴에 들고나는 도수(度數)’라고 하였고, 불가(佛家)의 책에서는 ‘신룡보(神龍寶)의 변화’라고 하였고, 두숙몽(竇叔蒙)의 《해교지(海嶠志)》에서는 ‘물이 달의 차고 기울고 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고, 노조(盧肇)의 해조부(海潮賦)에서는 ‘해가 바다에 출입하면서 충격을 주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고,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서는 ‘물은 천지의 혈맥(血脈)이어서 기운의 진퇴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다 억설을 내세우고 편견을 고집하는 것으로, 생각은 그럴듯하나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하늘은 물을 싸고 있고 물은 땅을 받들고 있는데, 일원(一元)의 기운이 태공(太空) 안에서 오르내립니다. 땅은 물의 힘을 받아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또 원기(元氣)의 오르내림과 더불어 서로 내려갔다올라갔다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이는 역시 배 안에 앉아 있는 자가 배가 움직이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야흐로 기운이 올라가고 땅이 가라앉을 때에는 바닷물이 넘쳐 올라서 밀물이 되고, 기운이 내려가고 땅이 뜰 때에는 바닷물이 줄어 내려가서 썰물이 됩니다.
하루의 12시를 헤아려 보면, 자시(子時)에서 사시(巳時)까지는 그 기운이 양(陽)인데, 양의 기운은 또 그 나름대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낮에 움직입니다. 오시(午時)에서 해시(亥時)까지는 그 기운이 음(陰)인데, 음의 기운은 또 그 나름대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밤에 움직입니다. 하루낮 하룻밤은 음양의 기운을 합치면 도합 두 번 오르고 두 번 내립니다. 그래서 하루 사이에 밀물과 썰물이 다 두 차례씩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과 밤의 시간은 해에 달려 있고 오르내림의 수효는 달에 응하는 법입니다. 달이 자방(子方)에 오면 양기가 비로소 오르고, 달이 오방(午方)에 오면 음기가 비로소 오르기 때문에 밤의 밀물 때는 달은 다 자방에 오고, 낮의 밀물 때는 달은 다 오방에 옵니다. 또 해의 운행은 느리고 달의 운행은 빠른데, 빠른 것을 가지고 느린 것에 응하므로 매번 29도 반을 지나게 될 때 달의 운행이 따라잡게 되니, 해와 달의 운행이 합치되는 것을 ‘합삭(合朔)’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매달 초하루의 밤 밀물 때에는 해 역시 자방(子方)에 오고, 매달 초하루의 낮 밀물 때에는 해 역시 오방에 옵니다.
또 낮은, 하늘 위에서 말하면, 천체(天體)는 서쪽으로 돌아가고 해와 달은 동쪽으로 운행합니다. 초하루 이후에는 달이 빠르게 가는 것이 점점 동쪽으로 기울어지다가 오시(午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는데, 밀물 역시 그것에 호응합니다. 낮에는 느리기 때문에 낮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이가 생겨 밤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하루에는 오시이고, 2일에는 오시 말(末)이고, 3일에는 미시(未時)이고, 4일에는 미시 말이고, 5일에는 신시(申時)이고, 6일에는 신시 말이고, 7일에는 유시(酉時)이고, 8일은 유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밤은, 바다 아래에서 말하면, 천체는 동쪽으로 굴러가고 해와 달은 서쪽으로 운행합니다. 초하루 이후에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서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다가 자시(子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는데, 밀물 역시 그것에 호응합니다. 밤에는 느리기 때문에 밤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이가 생겨 낮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하루에는 자시(子時)이고, 2일에는 자시 말이고, 3일에는 축시(丑時)이고, 4일에는 축시 말이고, 5일에는 인시(寅時)이고, 6일에는 인시 말이고, 7일에는 묘시(卯時)이고 8일에는 묘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데다가 철에는 차례에 따른 변화가 있고 기운에는 성하고 쇠함이 있어서, 밀물이 밀려오는 것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커지거나 작아집니다. 묘(卯)와 유(酉)의 달이 되면 음양이 교대하는데, 기운이 음양의 교대로 인해서 세차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밀물의 기세가 나머지 달들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초하루와 보름 후가 되면 천지가 변화하는데, 기운이 천지의 변화로 인해서 세차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밀물의 기세가 나머지 날들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와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말려보면, 밀물이 들 때가 되면 털이 다 일어섭니다. 이것이 어찌 기운에 감응하여 동류(同類)끼리 호응하는 이치에 따라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결이 흘러서 소용돌이치는 것, 모래와 흙이 엉기는 것, 산과 돌이 치솟는 것으로 말하면 또 각각 그 형세가 있는 법입니다.
바다 가운데 땅으로 촌락을 이룰 수 있는 지역을 주(洲)라고 하는데, 십주(十洲) 따위가 그것입니다. 이 주보다 작으나 역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을 도(島)라고 하는데, 삼도(三島) 따위가 그것입니다. 이 도보다 작으면 서(嶼)라고 하고, 서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으면 섬(苫)이라 하고, 섬과 서 같으면서도 순전히 돌로 되어 있으면 초(焦)라고 합니다.
무릇 선박의 운행에 있어서 해문(海門)을 나가면 하늘과 땅이 잠겨 버려 위아래가 하나같이 푸르고, 곁에는 구름이나 먼지가 없습니다. 천지가 갤 때를 만나면 밝은 해가 하늘 복판에 뜨고, 뜬구름이 사방으로 들어가 버려, 황홀하기가 마치 육허(六虛)의 밖에서 노니는 듯하여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바람과 파도가 간간이 일어나고 우레와 비로 캄캄해지며 교룡과 이무기가 출몰하고 신령한 물건이 변화를 일으킬 때에 이르러서는, 심장이 떨리고 간담이 떨어져서 말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산의 형태와 밀물의 징후뿐입니다.
또 고려로 가는 해도(海道)는 옛날에도 지금과 같았는바, 옛날부터 전해지는 것을 상고해 보면 지금은 혹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지금 기재한 것이 혹 옛날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그것이 본래부터 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선박이 항해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비바람의 향배를 보고 조절하는 것으로, 바람이 서쪽에서 끌어당길 때에는 동쪽에 있는 주도(洲島)들은 볼 수가 없고, 남쪽과 북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제 밀물의 징후에 대한 대개를 이미 앞에서 상세하게 논하였는바, 삼가 신주(神舟)가 경과한 도주(島洲)와 섬서(苫嶼)를 그림으로 그려 열거합니다. 《고려도경》
○ 양응침(楊應忱) -삼가 살펴보건대 침(忱)은 본디 성(誠)으로 되어 있다.- 이 무신년(1128, 인종6)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건염(建炎) 2년이다.- 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는 9월 계미일에 삼한(三韓)을 출발해서 무자일에 명주(明州)의 창국현(昌國縣)에 도착하였는바, 겨우 6일이 걸렸을 뿐이다. 《문헌통고》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명주(明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8일 만에 우리나라의 경내인 흑산(黑山)에 들어오고, 또 7일 만에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왔다. 서긍(徐兢)이 나올 적에는 5월 16일에 명주를 출발하여 28일에 매잠(梅岑)에서 대양으로 나와 순풍을 만나 6월 6일에 우리나라 만경(萬頃)의 군산도(群山島)에 도착하였으며, 돌아갈 적에는 7월 13일에 순천관(順天館)을 출발하여 8월 27일에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는바, 바닷길이 무릇 42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양응성(楊應誠)이 돌아갈 적에는 9월 계미일에 벽란도(碧瀾渡)를 출발하여 무자일에 명주의 창국현(昌國縣)에 도착하였는바, 겨우 6일밖에 안 걸렸고, 우리나라의 정몽주(鄭夢周)가 중국에 조회하러 갈 적에는 남경(南京) 8000리 길은 90일의 일정이었다. 《제주지(濟州志)》에는 원(元)나라에 조회할 적에 명월포(明月浦)에서 배를 출발하여 7일 동안 밤낮을 가서 서쪽 해안에 올라갔다고 실려 있다.
무릇 뱃길의 빠르고 느림은 오로지 바람이 순조로운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 섬과 암초가 어지러이 있어서 이를 빙 돌아서 피해 갈 경우에는 비록 지척의 거리라도 혹 수십 리를 돌아가야 하는 탓에 걸핏하면 하루나 이틀이 걸리게 되는바, 각자 취해 가는 길이 각각 다르므로 바다를 건너는 날수가 다른 것이다.
○ 원(元)나라 지원(至元) 5년(1268, 원종9)에 어떤 사람이 상서(上書)하여 고려의 경내인 흑산에서 바닷길로 송나라의 경계까지 가는 길이 몹시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왕국창(王國昌)을 파견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왕국창이 바다를 항해하여 천리를 갔는데 파도가 솟구치자 따라왔던 자가 두려워하면서 왕국창에게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그런데도 왕국창은 조금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천자의 위명(威命)을 받들고 와서 일을 마치지도 못한 채 갑자기 돌아가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흑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원사(元史)》
○ 30년(1293, 충렬왕19)에 조서를 내려서 연해에 수역(水驛)을 세우게 하였는데, 탐라(耽羅)에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양촌(陽村)의 해구(海口)를 포함해서 모두 30곳이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의 수역 30곳 가운데 한 곳은 지금 영암(靈巖)의 추자도(楸子島)로, 수참(水站)의 옛터가 남아 있다. 그 나머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 명나라 천계(天啓) 원년(1621, 광해군13) 8월에 조선에서 조공하러 오는 길을 고쳐 바닷길로 등주(登州)에 이르러 곧바로 경사(京師)에 도착할 수 있게 하였다. 《명사(明史)》
○ 숭정(崇禎) 2년(1629, 인조7)이다. 이보다 앞서 요동(遼東)을 통해 오는 길이 끊어져 조선에서 조공하러 오는 사신이 등주와 내주(萊州)를 통해 오는 길을 취해 온 지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원숭환(袁崇煥)이 독사(督師)가 되면서부터는 조공하는 길을 각화도(覺華島)로 고쳐 위험을 무릅쓰고 빙 돌아서 오게 하니, 조선에서 여러 차례나 종전대로 고쳐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호조 판서 정두원(鄭斗源)이 등주의 해로로 와서 등래 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에게 이문(移文)을 보내 주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손원화가 관인(官人)을 시켜 함께 경사로 가게 하고는 상소하여 아뢰었다. 그러자 황제가 각화도를 경유하는 항로는 이미 내려진 명령인데 이 길을 고치려는 것은 자신들만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상동》
살펴보건대 《괴원등록(槐院謄錄)》을 보면, 광해조(光海朝) 신유년(1621, 광해군13) 이후로는 조공하는 해로가 선천(宣川)의 선사포(宣沙浦)에서 배를 출발하였는데, -혹은 함종(咸從)에서 출발하기도 하였는데, 함종은 안주(安州)에 있다.- 철산(鐵山)의 가도(椵島)까지는 60리이다. -정묘호란(丁卯胡亂) 이후로 증산(甑山)의 석다산(石多山)에서 배를 출발하였는데, 300리를 가면 가도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거우도(車牛島)까지는 140리이고, 녹도(鹿島)까지는 500리이고, -여기서부터는 요동의 경내에 속한다.- 여기에서 석성도(石城島)까지는 600리이고, 여기에서 장산도(長山島)까지는 300리이고, 여기에서 광록도(廣鹿島)까지는 300리이고, 여기에서 삼산도(三山島)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내주에서 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까지는 280리이고, 여기에서 평도(平島)까지는 200리이고, 여기에서 황성도(皇城島)까지는 1000리이고, 여기에서 타기도(鼉磯島) -《일통지》에는 등주(登州)에 속한다고 하였다.- 까지는 200리이고, 여기에서 묘도(廟島)까지는 200리이고, 여기에서 등주까지는 80리이다. 이상은 해로로, 총 3760리이다. 등주에서 육로를 따라 내주(萊州)와 청주(靑州)를 거쳐 경사(京師)에 이르는 길이 1300리로, 육로는 총 1900리이다.
인조 7년(1629)에 이르러 가도(椵島)의 장수 모문룡(毛文龍)과 영원(寧遠)의 도독(都督) 원숭환(袁崇煥)이 조공하는 길을 바꾸기를 건의하여 평도에서 길을 나누어 가게 하였는데, 평도에서 여순구(旅順口)까지가 40리이고, 여기에서 철산취(鐵山觜)까지가 40리이고, 여기에서 양도(羊島)까지가 80리이고, 여기에서 쌍도(雙島)까지가 40리이고, 여기에서 남신구(南汛口)까지가 500리이고, 여기에서 북신구(北汛口)까지가 170리이고, 여기에서 각화도(覺華島)까지가 1000리이고, 여기에서 영원위(寧遠衛)까지가 10리이며, 그다음부터는 육지로 올라가 북경에 도달하는데, 해로는 총 4160리이고 육로는 총 911리이다.
각화도를 경유하는 길로 고친 뒤에는 해로가 등주를 경유하는 것보다 더 먼 데다가 지나가게 되는 철산취 일대는 대양이 하늘에 닿아 섬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암초가 많아서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 배신(陪臣) 가운데 다섯이나 물에 빠져 죽었으며, 중국에서 보내 준 부험(符驗) 및 표문(表文)과 자문(咨文), 방물(方物) 등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에 숭정(崇禎) 5년(1632, 인조10) 임신에 이르러서 다시 등주를 경유하는 길로 가게 해 주기를 주청하였다.


[주D-001]소량(蕭梁) : 남조(南朝)의 양(梁)나라를 가리킨다. 양나라 황실의 성씨가 소씨(蕭氏)이다.
[주D-002]기축년 : 원문에는 ‘乙丑’으로 되어 있는데, 태종 때에는 을축년이 없으므로 ‘己丑’으로 바로잡아서 번역하였다. 태종 9년에 권영균(權永均)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받든 선유(宣諭)에, “그대가 다시 올 적에는 해상(海上)을 경유하지 말고 육로로 오라.” 하였다.《국역증보문헌비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4, 제174권 교빙고1 201쪽》
[주D-003]오호도(烏湖島) : 《신당서》 권43 하에는 오호도 앞에 말도(末島)가 있다.
[주D-004]압록강 : 한강(漢江)을 잘못 표기한 듯하다.
[주D-005]팔각해구(八角海口) : 원문에는 ‘入角海口’로 되어 있는데, 《송사》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즉시 그 배로 올라가 : 원문에는 ‘卽登岸’으로 되어 있는데, 《송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흑풍(黑風)과 해동(海動) : 흑풍은 태풍을 말하고, 해동은 바다에 지진이 일어나서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주D-008]끌어 모은 : 원문에는 ‘收取’로 되어 있는데, 《춘저기문》 권2에 의거하여 ‘收聚’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계속해서 오는 자가 많았다 : 원문에는 ‘繼來象’으로 되어 있는데, 《춘저기문》에 의거하여 ‘繼來者衆’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알자섬(軋子苫) : 아자섬(鵶子苫)을 가리킨다.
[주D-011]치풍(癡風)과 흑풍(黑風)과 해동(海動) : 치풍은 음력 7, 8월에 부는 동북풍이고, 흑풍은 태풍이고, 해동은 지진으로 인해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주D-012]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 : 원문에는 ‘鼎新刊涉懷遠康濟神舟’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4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옛 제도를 혁신하여 항해에 편리하게 해서 먼 고장을 회유(回遊)할 수 있게 편안히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이다.
[주D-013]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 : 원문에는 ‘順流安逸通濟神舟’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흐름에 따라 편안하게 두루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이다.
[주D-014]황판(艎板) : 뱃전에 까는 나무판자를 말한다.
[주D-015]유정(游矴) : 보조로 쓰는 닻을 말한다.
[주D-016]오량(五兩) : 초(楚) 지방의 방언으로, 닭털을 장대 끝에 매어 풍향을 알아보는 기구이다.
[주D-017]사신이 오면 : 원문에는 ‘使生’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18에 의거하여 ‘使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8]산해경(山海經)에서는 …… 하였고 : 《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로, 지금 전해지는 것은 모두 18권이며, 내용이 기괴하여 신화 내지는 소설의 성격을 띤 책이다. 해추(海鰌)에 관한 것은 지금 전해지는 《산해경》에는 보이지 않고,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註)에 보인다. 《수경주》에 따르면, 해추는 길이가 수천 리나 되고 해저(海底)에서 혈거(穴居)하며, 굴로 들어가면 바닷물이 밀물이 되고 굴에서 나오면 썰물이 되는데, 해추가 굴을 드나드는 데에는 일정한 절도가 있기 때문에 조수에 시간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주D-019]신룡보(神龍寶) : 신이(神異)한 용의 도력(道力)이라는 뜻이다.
[주D-020]육허(六虛) :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의 극한을 포괄하는 우주의 공간을 말한다.
[주D-021]6월 6일 : 원문에는 ‘六日六日’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9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각화도(覺華島) : 요령성(遼寧省) 흥성현(興城縣)에서 12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 이름으로, 현재의 이름은 국화도(菊花島)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0권
 교빙지(交聘志) 8
공도(貢道)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에는 삼한(三韓)의 여러 나라가 모두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두 군(郡)에 나아가 조공을 바치고 중국에 직접 통하지는 않았다. 진(晉)나라 때부터 육조(六朝) 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북조(北朝)와 국경이 접하여 있었으므로 육로(陸路)를 경유하여 통빙(通聘)하였으며, 신라와 백제 등 여러 나라는 모두 해로(海路)를 통하여 통빙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바다를 건너서 송(宋)나라를 섬겼다. 요(遼)나라 통화(統和) 연간에 이르러서는 요나라 사람들이 압록강(鴨綠江) 내외에 있던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교통로를 열었으며, 고려 역시 용주성(龍州城)과 철주성(鐵州城) 등을 쌓았다. 이로부터 육로를 통하여 요나라와 통교하였는바, 지금 의주(義州)의 진도(津渡)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금(金)나라 대정(大定) 11년(1171, 명종1)에 고려의 왕 왕호(王晧)가 나라를 선양(禪讓)하였다는 내용으로 와서 주문(奏文)을 올리니, 파속로(婆速路)에 조서를 내려서 받지 말게 하였다. 《금사(金史)》 ○ 삼가 살펴보건대 파속로는 당(唐)나라 때의 박작구(泊汋口)로, 지금 의주의 진도(津渡)이다. 요나라부터 금나라 때 이르기까지 의주를 경유하여 통빙하였음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 15년(1175, 명종5)에 고려가 아뢰기를,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켜 의주를 통해 가는 길이 막혔으니, 정주(定州)를 경유해 갈라로(曷懶路)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정주는 지금의 함경도 정평부(定平府)이고,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咸興府)이다. 그 당시에 의주로가 막혔으므로 북관(北關)을 경유하여 금나라와 교통한 것이다.
○ 명나라 홍무(洪武) 7년(1374, 공민왕23)에 고려가 사신 주의(周誼)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치면서 육로로 공도(貢道)를 삼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정료위(定遼衛)를 경유하게 하고 바다를 건너지 말게 하였다. 《명사(明史)》
○ 조선의 공도(貢道)는 압록강을 경유하여 요양(遼陽)과 광녕(廣寧)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경사(京師)에 도착한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연산관(連山關)은 도사(都司)가 있는 성에서 동남쪽으로 18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조선에서 조공하러 들어오는 길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봉천(奉天)의 남쪽에서 조선참도(朝鮮站道)에 이르러서 60리를 가면 십리하참(十里河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70리를 가면 영수사참(迎水寺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70리를 가면 낭자산참(浪子山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50리를 가면 첨수참(甜水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40리를 가면 연산관참(連山關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50리를 가면 통원보참(通遠堡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60리를 가면 설리참(雪裏站)에 이르고, 여기에서 40리를 가면 봉황성참(鳳凰城站)에 이른다. 이곳에서 바깥으로는 조선의 경계이다.” 하였다.
○ 경태(景泰) 연간에 조선에서 조공하러 들어오는 길이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에 의해 막히는 것을 괴롭게 여겨 압록강을 경유하는 것으로 길을 바꾸어 주기를 요청하자, 부(部)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주침(周忱)이 말하기를, “조선의 옛 공도가 아골관(鴉鶻關)에서 요양을 경유하여 광녕을 지나 전둔위(前屯衛)를 통과한 다음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오게 하여 3, 4개의 큰 성(城)과 수(戍)를 우회하게 한 것은, 조종(祖宗)들께서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압록강을 경유하여 전둔위와 산해관으로 곧장 들어오게 한다면, 길이 지나치게 빨라서 아마도 뒷날에 걱정을 끼칠 듯하니, 따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여, 정지되었다. 《전거을기(田居乙記)》 ○ 《명사》에, “성화(成化) 연간에 조선에서 들어오는 공도는 예전에는 아골관을 경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경유하도록 해 주기를 요청하자, 상서(尙書)가 장차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유대하(劉大夏)가 말하기를, ‘압록강을 경유하면 길이 빠르다는 것을 조종들께서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도리어 몇 개의 큰 진(鎭)을 우회하여 들어오게 한 것은 아마도 은미한 뜻이 있는 듯하니, 허락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여, 이에 중지되었다. 조선국의 사신이 홍려시(鴻臚寺)의 관소에 있을 때 유대하의 동향인인 장생(張生)을 만나자, 안부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유 산동(劉山東)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이다.’ 하였는바, 그가 외국에서 중시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 성화(成化) 17년(1481, 성종12)에 봉황산성(鳳凰山城)을 축조하고 조선에서 조공하러 들어오는 공도로 삼았다. 《명사》
○ 만력(萬曆) 47년(1619, 광해군11) 11월에 병부(兵部)에서 복주(覆奏)하여 조선에서 조공하러 들어오는 공도에 방수군(防守軍)을 늘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진강(鎭江) 등지에 조서를 내려 군사를 더 설치하게 하였다. 《상동》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0권
 교빙지(交聘志) 8
부(附) 사행(師行)의 해로(海路)

○ 한(漢)나라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를 토벌하였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제(齊)에서 발해(渤海)에 배를 띄워 열구(列口)에 이르렀다. 《사기(史記)》
양복이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하는 것은 대개 청주(靑州)와 내주(萊州)의 이북과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의 이남 지역이 모두 바닷가 지역이기 때문에 그 해도(海道)를 발해라고 한 것이지, 발해군(渤海郡)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다. 반고(班固)의 지(志)에서 ‘열구현(列口縣)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 지역이 열수(列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통감음주(通鑑音註)》 ○ 살펴보건대, 열수는 지금의 한수(漢水)이다.
○ 《사기》를 보면, 소진(蘇秦)이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유세(遊說)하기를, “일찍이 태산(泰山)을 넘고 청하(淸河)를 건너고 발해를 건넌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발해는 창주(滄洲)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발해는 천진위(天津衛)의 바다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기》의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워 왕검(王儉)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왕검은 성(城)의 이름이니, 요동에 있는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지리의 호칭에 대해서 정확하게 주석을 낸 호신지(胡身之)가 ‘양복이 제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워서 조선을 토벌하였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양복이 제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하는 곳의 발해는 대개 청주와 내주의 이북과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의 이남 지역으로, 모두 바닷가의 지역인바, 그곳을 통틀어서 발해라고 하는 것이지, 발해군(渤海郡)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 견해는 같은 시대의 왕백후(王伯厚)의 견해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석지여론(釋地餘論)》
○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바다와 대산(岱山) 사이에 청주가 있다.” 하였는데, 그 전(傳)에, “동북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남쪽으로는 대산에 이른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소진이 제나라 선왕에게 유세하면서 ‘북쪽으로는 발해가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지금의 성산(成山)에서부터 낙안(樂安)에 이르는 지역이 이 지역이다. 그러므로 동북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부터 해가 비치는 곳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청주이니, 빠지는 지역이 많게 된다. 동쪽에 해당되는 지역만을 말해본다면, 참으로 낭야(琅琊)와 조선이 모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 봉래(蓬萊)는 등주부(登州府)의 치소(治所)이다. 바다는 부성(府城)에서 북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요동(遼東)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새로 해구(海口)가 열리면서부터는 동북쪽으로 요동의 금주위(金州衛) 남쪽에 있는 여순구(旅順口)까지가 300리나 된다. 그러나 근처에 사문도(沙門島), 타기도(砣磯島), 철산도(鐵山島) 등 여러 섬이 있어 배를 정박해 바람을 피할 수가 있어서 한 척의 배로 가기에도 역시 그다지 험하지는 않다.
《한서(漢書)》에,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워 조선을 쳤다.” 하였고,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 “옛 대인성(大人城)이 등주의 황현(黃縣)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요동을 정벌할 적에 이 성을 쌓았는데, 군량을 운반하는 배가 이곳으로부터 들어왔다. 지금 신라와 백제가 왕래할 적에는 항상 이곳을 경유한다.” 하였다. 대개 황하(黃河)는 동한(東漢) 이후로 1000승(乘)의 군사들이 이곳을 통하여 바다로 들어갔으므로, 당나라 때에는 도이(島夷)의 공선(貢船)들이 발해의 남쪽 해안을 따라서 바다로 들어간 것이다. 《이상 모두 우공추지(禹貢錐指)》
○ 위(魏)나라 경초(景初) 연간에 대방 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과 낙랑 2군(郡)을 평정하게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 영양왕23)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패수(浿水)로 들어갔다. 《수서(隋書)》
○ 당나라 정관(貞觀) 18년(644, 보장왕3)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소예(蕭銳)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바다 한가운데 있는 옛 대인성은 서쪽으로는 황현(黃縣)에서 23리가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까지 470리입니다. 섬 안에 샘물이 많고 산과 섬이 잇닿아 있어서 군량을 저장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22년(648, 보장왕7)에 설만철(薛萬徹)이 바닷길로 가서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항해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갔다. 《구당서(舊唐書)》
○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책부원귀》
오호진(烏胡鎭)은 마땅히 바다의 오호도(烏胡島)에 두어야 한다. 《통감음주(通鑑音註)》
○ 오호도는 등주의 북쪽 바다 가운데 250리 되는 곳에 있다. 섬에는 두 개의 망루(望樓)가 있는데, 모두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쌓은 것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현경(顯慶) 5년(660, 의자왕20)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하였다. 성산(成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웅진(熊津)의 강어귀에 이르렀다. 《구당서》 ○ 살펴보건대 성산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자허부(子虛賦)에, “제동(齊東)은 큰 바다의 가에 있어서 성산에 가서 유람할 수가 있고, 지부산(之罘山)에서 사냥할 수가 있으며, 가을에는 청구(靑邱)에서 사냥할 수가 있다.” 하였고, 설종(薛綜)이 손권(孫權)에게 간하기를, “요동은 큰 강과 드넓은 바다가 있으며 성산(成山)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개 청주나 내주의 바닷길로 해서 요동으로 가자면 반드시 성산을 경유해야만 합니다.” 하였고, 《대명일통지》에는, “성산은 등주의 문등현(文登縣)에서 남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다. 산동 쪽에서 10리 되는 곳에 소석산(召石山)이 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고자 하였던 곳이다.” 하였고,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성산에서 출발해 인천(仁川)의 덕적도(德積島)에 이르렀다가 백강(白江)으로 들어왔다.” 하였다.
○ 명나라 만력(萬曆) 28년(1600, 선조33)에 요계 총독(遼薊摠督) 형개(邢玠)가 상주하기를, “대병(大兵)이 외국에 있는데, 그 군량은 혹 산동(山東)이나 천진(天津)에서 취할 수가 있습니다. 요동은 조선과 가까워서 육로로 통할 수가 있으나, 산동과 천진은 반드시 바다를 건너와야만 합니다. 천진의 경우에는 대고해구(大估海口)로부터 바다로 나가 서남쪽으로 돌아서 산동, 해풍(海豐), 청주(靑州), 내주(萊州)를 경유하여 등주(登州)에 도달하고, 등주에서 여순(旅順), 여순에서 조선의 의주(義州)의 미곶(彌串) 등지에 도달할 수 있어서 화물을 운송하는 길이 산동과 같습니다. 그런데 병사들은 전라도와 경상도 두 도에 주둔하고 있는바, 그곳까지의 거리가 2000리나 되니, 또다시 조선에서 전운(轉運)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에 조선의 해도(海道)를 살펴보니, 미곶에서 광량(廣梁)에 도달하고, 광량에서 강화(江華)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강화는 왕경(王京)의 서쪽에 있으면서 한강(漢江)에 접하고 있습니다. 한번 왕경의 동남쪽으로 들어가고 나면 충청도와 경상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연해(沿海)의 요지(要地)는 요동 북평(北平)의 양산(洋山)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곳에서 1300여 리를 가면 조선과의 경계인 압록강이다. 《귀은집(歸恩集)》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중국에서 군사들이 나오는 길은 모두 요동으로부터 육로로 나왔는데, 반드시 군사를 나누어 바다를 건너서 곧장 중심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팽오(彭吳)가 예(濊)와 맥(貊)을 뚫고 양복(楊僕)이 발해에 배를 띄운 데에서 비롯되었다.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서 살수(薩水) 이남의 낙랑(樂浪)의 옛 땅을 회복하고 위(魏)나라가 요동왕(遼東王) 웅(雄)을 토벌하면서는 육로로 나왔다가 다시 전예(田豫)로 하여금 청주(靑州)의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 후위(後魏)가 백제를 침공하면서도 역시 바다를 경유하였다. 수(隋)나라 때에는 네 차례 고구려에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주라후(周羅㬋)와 내호아(來護兒)가 별도로 전함을 거느리고 나와 육군과 만나기를 기약했었다. 당(唐)나라 정관(貞觀)과 현경(顯慶) 연간에는 장량(張亮), 소열(蘇烈), 유인궤(劉仁軌), 손인사(孫仁師)가 모두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와서 뜻을 이루었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무술년(1598, 선조31)에는 진린(陳璘)과 등자룡(鄧子龍)이 절강성(浙江省), 직례(直隸), 사천(四川), 광주(廣州)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당진(唐津)에 정박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전역(戰役)으로 말하면, 진(晉)나라 때 백제가 일찍이 바다를 건너서 북쪽으로 가 요서(遼西)의 진평군(晉平郡)을 침략하였으며, 또 제(齊)와 노(魯)를 침략하였다.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고종(高宗) 임진년(1232, 고종19)에 정응경(鄭應卿)이 전함과 수군을 거느리고 용주포(龍洲浦)에서 출발하여 몽고(蒙古)의 군사와 만났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인묘(仁廟) 경진년(1640, 인조18)에 임경업(林慶業)과 이완(李浣)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와 의주(義州)의 바닷가에서 만났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쪽과 남쪽의 바다에서 등주와 내주 등 여러 주로 갈 경우, 순풍을 만나면 6, 7일이 지나지 않아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사신이 왕래하거나 군사가 출동하여 정벌할 경우에는 대부분 해로를 따라 갔다. 오늘날에 국가의 방비를 튼튼하게 하기를 계획하는 자는 산골짜기의 요해지에만 방비 시설을 갖출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방비하는 데 더욱더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주D-001]누선장군(樓船將軍) : 누선장군은 중국 고대 군직(軍職)의 하나로, 후대에는 무제(武帝) 때의 유명한 장군인 양복(楊僕)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주D-002]제(齊)에서 …… 띄워 : 원문에는 ‘從齊王渤海’로 되어 있는데, 《사기》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의거하여 ‘從齊浮渤海’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제(齊)는 지금의 산동(山東) 지방으로, 한(漢)나라의 수군이 이곳에서 출항하여 발해만을 횡단해 왕검성(王儉城)으로 향하였다는 뜻이다.
[주D-003]열구(列口) : 열구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江華), 한강(漢江) 어귀, 대동강 하류 유역인 황해도 은율(殷栗), 요동의 요하(遼河) 유역이라는 등 학계의 설이 분분하다.
[주D-004]호신지(胡身之) : 신지는 송나라 호삼성(胡三省)의 자로, 호삼성은 《통감음주(通鑑音註)》와 《자치통감석문변오(資治通鑑釋文辨誤)》를 지었다.
[주D-005]왕백후(王伯厚) : 백후는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자로, 왕응린은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을 지었다.
[주D-006]낭야(琅琊) : 산동성(山東省) 제성현(諸城縣) 동남쪽 지역을 말한다.
[주D-007]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08]제동(齊東)은 …… 있어서 : 원문에는 ‘齊東陏距海’로 되어 있는데, 《문선(文選)》 권7 자허부(子虛賦)에 의거하여 ‘齊東陼距海’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팽오(彭吳)가 …… 뚫고 : 이 내용은 《한서》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 이병도(李丙燾)는, “《한서》의 ‘팽오천예맥조선(彭吳穿濊貊朝鮮)’을 《사기》 평준서(平準書)와 대조하여 보면, ‘팽오가멸조선(彭吳賈滅朝鮮)’이라 하여 천(穿) 자가 가(賈)로 되고 예(濊) 자가 멸(滅)로 되어 있다. 이는 《사기》의 원문이 어느 때 사오(寫誤) 혹은 판오(板誤)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86쪽》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0권
 교빙지(交聘志) 8
부(附) 왜(倭)와 통하는 해로(海路)

○ 낙랑(樂浪)의 바다에는 왜인들이 있어서 10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해마다 와서 알현한다. 《한서》
○ 왜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섬에 의지하여 거주하며, 모두 100여 국이다.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자 사역(使譯)을 보내어 한(漢)나라에 통빙(通聘)한 나라가 30여 국이었는데, 모두 왕을 칭하였으며, 대대로 왕위를 전하였다. 그 가운데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살고 있는데, 낙랑군(樂浪郡) 변경에서 1만 2000리 되는 거리에 있다. 그 나라의 서북쪽 경계인 구야한국(狗耶韓國)까지는 거리가 7000여 리인데, 대개 회계(會稽)와 동야(東冶)의 동쪽에 있으며, 주애(朱厓)와 담이(儋耳)에 서로 가깝다. 《후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야마대는 《후한서》의 주(注)와 《위지(魏志)》에는 야마퇴(耶摩堆)로 되어 있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야마대국은 바로 대화국(大和國)이다.” 하였다. 옛날에는 대양덕국(大養德國)이라고 칭하였으니, 이른바 왜노국(倭奴國)이다. 야마대는 대화(大和)의 화훈(和訓)이다. 신무천황(神武天皇)에서부터 광인천황(光仁天皇)에 이르기까지 대화국에 도읍하였다.
○ 왜인은 대방(帶方)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살고 있다. 대방군에서 왜로 가자면 해안을 따라 해로(海路)로 가는데, 한국(韓國)을 거친 다음 조금 남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가면 북안(北岸)인 구야한국(狗耶韓國)에 도달하는데, 여기까지가 7000여 리이다.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달하며, 또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일지국(一支國)에 도달한다. 《삼국지》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漢)나라 초기에 왜는 낙랑에 속하였고, 건안(建安) 연간에는 대방에 속하였다. 구야한국은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이다. 대마국은 지금의 대마도(對馬島)이며, 일지국은 지금의 일기도(一歧島)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왜와 통할 때는 이 두 섬을 경유한다.
○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수로와 육로로 3000리 떨어져 있으며, 큰 바다 가운데 섬에 의지해 살아간다. 대방에서 왜국에 이르자면 바닷가를 따라서 해로로 가 조선국을 거쳐 7000여 리를 가면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게 된다. 또다시 남쪽으로 1000여 리를 가 한해(瀚海)라는 바다 하나를 건너면 일지국(一支國)에 이르게 된다. 또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말로국(末盧國)이라 하는 나라에 이르고, 또다시 동남쪽 육로로 500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르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노국(奴國)에 이르고, 또다시 동쪽으로 100리를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르고, 또다시 남쪽 수로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이르고, 또다시 남쪽 수로로 10일을 가고 육로로 한 달을 가면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이르는데, 이곳이 바로 왜왕이 도읍해 있는 곳이다. 《북사(北史)》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왜왕 무(武)가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올린 표문(表文)에, “신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들을 모두 거느리고 중국에 귀의합니다. 그런데 가는 길이 백제를 경유해야 하므로 배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왜는 한나라 때부터 사신을 보내 중국과 통하였으며, 진(晉)나라와 송나라를 거치면서 대대로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중국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우리나라를 거쳐 갔는바, 다른 나라인데도 길이 막히지 않았던 것은 대개 백제와 더불어 서로 잘 지냈기 때문이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흠명천황(欽明天皇)이 비로소 강남(江南)과 통교하여 마침내 다시는 우리나라를 경유해 가지 않게 되었다.
○ 발해 용원부(龍原府)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 《신당서》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일본일사(日本逸史)》를 보면, 발해의 사신이 타고 가는 배는 대부분 하이국(蝦夷國) 및 출우(出羽), 능등(能登)의 지역에 정박하였는데, 일본은 발해의 배가 지름길로 빨리 오는 것을 싫어하여 축자도(筑紫道)의 태재부(太宰府)를 경유하게 하였다. 그 뒤에 또 능등에 정박하자 일본인들이 약속을 어긴 것을 따졌으나, 끝내 금지시키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능등에 정관(亭館)을 지어서 접대하였다. -일본과 통교(通交)한 시말(始末)에 자세히 나온다.- 발해의 용원(龍原)은 지금의 경성부(鏡城府)이고, 하이국과 출우, 능등 등지는 우리나라의 함경북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지역으로, 당시에 사신들이 탄 배가 동북쪽의 바다를 지나서 일본에 오간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 일본의 살마주(薩摩州) 북쪽은 비후(肥後)이고, 또 그 북쪽은 비전(肥前)이다. 비전의 서쪽 바닷가는 평호(平戶)이고, 평호의 서쪽은 오도(五島)이다. -평도(平道)는 70리이고, 살마주까지는 1500리이고, 비전까지는 430리이고, 평호까지는 250리이다.- 그 북쪽은 다예(多藝), 이기(伊岐) -대마도의 바닷가까지는 500리이고, 가로와 세로 폭이 모두 70리이다.-, 대마도 -가로가 300리이고, 그 서북쪽 깊숙한 곳이 퇴사범(堆沙凡), 산곡(山谷), 살사내(撒思乃), 지육마(知六磨), 이야(你也)이다.- 이며, 그 서북쪽으로 가면 고려에 이르는데, 고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마도를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야만 한다. -각 섬의 사람들은 모두 퇴사범, 살사내, 산곡 등 세 곳의 깊숙한 곳에 이르러서 바다로 나가 고려의 칙실다(則失多)에 이르는데, 순풍을 타면 하루에 갈 수 있다. 거리는 500리쯤 된다.
일찍이 듣건대 송나라 이전에는 일본이 들어와 조공하면서 신라로부터 산동(山東)에 이르렀다고 한다. 만약 지금 쳐들어온다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할 것이다. 다만 등주와 내주의 바다는 위험스런 암초와 숨어 있는 모래벌판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주 능숙한 뱃사람이 아니면 배가 반드시 난파당하고 말 것인데, 어떻게 적을 맞아 싸우고 추격할 수 있겠는가. 《도서편(圖書編)》
○ 일본의 살마주(薩摩州)는 절강(浙江)과 마주 대하고 있으며, 대마도는 조선과 마주 대하고 있다. 대마도에서 부산까지는 약 500리로, 바람이 순조로울 경우에는 하루면 도착할 수가 있다. 대마도에서 일기도(一歧島)까지는 600리이고, 일기도에서 호옥도(護屋島)까지는 900리이다. 호옥도는 바로 관백(關伯)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곳으로, 바람이 순조로울 경우에는 4, 5일이면 영파(寧波)에 도착할 수가 있고, 6, 7일이면 천진(天津)에 도착할 수가 있고, 8일이면 등주와 내주에 도착할 수가 있다. 다만 등주와 내주 등지는 바다에 암초가 많아서 항해하기에 불편하다.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섭창하집(葉蒼霞集)》에, “일본은 그 지역이 북쪽으로는 조선에 걸쳐 있고 남쪽으로는 절강(浙江)과 민(閔) 지방에서 끝난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갈 적에는 대마도에서 바다로 나가 2, 3일 정도면 도달하고, 민과 절강 지방은 순풍이 불 경우에는 한 달가량이면 도달한다.” 하였다.
○ 왜는 조선과 더불어 5개의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격해 있는데, 거리가 4000리이다. 만약 크고 작은 신풍(汛風)을 만날 경우에는 5, 6일이면 도달할 수가 있다. 부산에서 큰 바다 하나를 건너면 바로 대마도이고, 대마도에서 동쪽으로 큰 바다 하나를 건너면 바로 일기도인데, 하루면 건널 수가 있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평호도(平戶島)까지의 거리는 일기도까지보다 조금 가까운데, 풍랑이 몹시 사납다. 서쪽으로 풍기(豐崎)까지는 육로로 이틀 길이며, 배로 갈 경우 바람이 순조로우면 하루면 가고 노를 저어 갈 경우 이틀이 걸린다. 풍기에서 서쪽 바다까지는 단 반나절 동안만 바람을 받으면 갈 수 있다. 일기도에서 바다 하나를 건너면 장산대관시(長山大關市)에 도착하는데, 바로 장문주(長門洲)의 하관(下關)이다. 또 바다 하나를 건너 연안을 따라 가면 대관시(大關市)가 나오는데, 바로 주방주(周方洲)의 하관이다. 또 바다 하나를 건너면 바로 이예주(伊預州)의 장기(長崎)로, 여기에서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가면 대진성(大津城)에 도착한다. 《일본기(日本紀)》
○ 왜국의 풍속에 청명절(淸明節) 이후부터 5월까지를 대신(大汛)이라 하고, 중양절(重陽節) 이후부터 10월까지를 소신(小汛)이라 하는데, 조선과 중국을 노략질할 때는 반드시 이 시기를 타서 한다. 《상동》
왜인들은 동해의 가운데, 신라국의 동남쪽에 사는데, 풍토는 신라, 백제와 비슷하다. 산동의 문등현(文登縣) 성산위(成山衛)에서 바다를 건너 포로하(匏蘆河)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로 들어가서 신라로 들어가면 일본의 오른팔이 끊어지게 된다.
무릇 신라, 백제, 일본은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백성과 물산이 풍부하고 금과 은이 남아도는데, 민(閩)과 광주(廣州) 지방의 당과(糖菓), 청의(靑衣), 마갈(麻葛), 사라(絲羅), 단견(段絹) 및 사천(四川)과 광주(廣州) 지방의 약재(藥材), 동(銅)으로 만든 솥, 세발 솥, 냄비 등을 좋아한다. 또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 매번 조선과 약속하여 일찍이 6월 사이에 내주(萊州) 정해현(定海縣)의 낙가산(落迦山)에 올라가서는 관음보살(觀音菩薩)에게 굿을 하고 제사 지내어 명복을 빈다.
만약 변경 바다의 금법(禁法)을 늦추어서 장사꾼들이 무역할 수 있게 하고, 이어 세금을 적게 거두어서 그들이 오도록 하며, 값을 고르게 해서 분쟁을 종식시키고, 성신(誠信)을 도타이해서 그들의 뜻을 굳게 해 준다면, 동해의 이익을 다 차지하고 변방의 보루가 텅 비게 할 수가 있어, 위로는 국가의 재정을 보탤 수가 있고 아래로는 동해의 세금을 줄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몇 년만 시행하면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이 익숙해져서 같은 무리들을 끌어들여 복여위(福餘衛)까지도 시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복여위는 요동(遼東)과 계문(薊門)의 관문인데, 육로로는 멀어서 통할 수가 없다. 오직 성산(成山)에서 곧바로 신라에 도달한 다음 다시 예맥(濊貊)과 옥저(沃沮)에 도달하여야만 규제할 수가 있는데, 시장과 선박의 이익을 취할 수가 있어서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히지 않아도 되고 신라와 백제에 형세를 의지하여 병졸이 정예롭고 강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에 구애되어서 일찌감치 도모하지 않는 것인가? 《황명세법록(皇明世法錄)》
살펴보건대 일본에 사신으로 간 데 대한 고사를 보면, 부산(釜山)의 영가대(永嘉臺) 아래에서 배를 띄우면 대마주(對馬州)의 좌수나포(佐須奈浦)까지가 480리이고, 여기에서 악포(鰐浦)까지가 30리이고, 대포(大浦), 풍포(豐浦), 화천포(和泉浦), 서박포(西泊浦)까지가 50리이고, 금포(琴浦), 방포(芳浦), 압뢰포(鴨瀨浦)까지가 150리이고, 대마도부중포(對馬島府中浦)까지가 70리이고, 비전주(肥前州) 일기도(一歧島)의 풍목포(風木浦)까지가 480리이고, 축전주(筑前州)의 남도(藍島)까지가 350리이고, -패가대(霸家臺)가 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유람한 곳이다. 또 냉천진(冷泉津) 칠리탄(七里灘)이 있는데, 박제상(朴堤上)이 죽은 곳이다.- 남박(南泊)까지가 180리이고, 장문주(長門州)의 적간관(赤間關)까지가 60리이다. 대마도에서 적간관까지 가는 동안에 3개의 큰 바다가 있는데, 파도가 몹시 험하다. 적간관에서 향포(向浦)까지가 180리이고, 주방주(周防州)의 실우(室隅)까지가 120리이고, 상관(上關)까지가 50리이고, 진화(津和)까지가 120리이고, 안예주(安藝州)의 겸예(鎌刈)까지가 90리이고, 비후주(備後州)의 충해(忠海)까지가 100리이고, 도포(鞱浦) -반대사(盤臺寺)가 있다.- 까지가 100리이고, 하진(下津)까지가 200리이고, 일비(日比)까지가 40리이고, 비전주(備前州) 우창(牛窓)까지가 60리이고, 번마주(幡摩州)의 실진(室津)까지가 100리이다. 일기도 동쪽으로부터 거치는 여러 섬은 모두 벌거숭이 섬으로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실진 이후부터 비로소 사람이 산다.
실진에서 명석(明石)까지가 130리이고, -해와 달이 뜨는 것이 보인다.- 섭진주(攝津州)의 병고(兵庫) -왕기(王畿) 안에 있는 지역이다.- 까지가 50리이고, 대판성(大坂城)까지가 130리이고, 하내주(河內州)의 평방(平方)까지가 50리이고, 산성주(山城州)의 정포(碇浦)까지가 40리이다. 이상은 수로(水路)로 총 3290리이다.
육지로 올라가서는 정포에서 서경(西京)까지가 30리로, 이곳이 바로 왜황(倭皇)이 살고 있는 곳이다. 서경에서 강호(江戶)까지가 1280리로, 바로 관백(關白)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상은 육로로 총 1310리이다.
대개 적간관 이후부터는 모두 해안을 따라서 가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서남쪽 해안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풍랑이 일면 뱃길이 몹시 험난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더 위험하다. 만약 일기도에서 축전주까지 포구 하나를 건너서 장문주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가 산음도(山陰道), 산양도(山陽道) 등을 거치면 왜국의 서경에 곧바로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반드시 향포, 충해, 우창, 실진 등을 향해 길을 가 바다를 건너서 빙 돌아서 가는 것은 그 뜻을 알 만하다.
또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동쪽과 남쪽 두 바다는 왜선이 출몰하지 않는 곳이 없는데, 가장 관계 깊은 문호(門戶)를 든다면 오도(五島)와 대마도(對馬島)이다. 대개 서해도(西海道)의 살마주(薩摩州), 비전주(備前州) 등 9주는 우리나라의 영남(嶺南), 호남(湖南)의 남쪽 가와 마주 대하고 있는데, 오도에서 동남풍을 타고 세 섬에 이르러서 묵고 선산도(仙山島)를 지나면 곧장 고금도(古今島)나 가리포(加梨浦) -모두 강진(康津)에 있다.- 등지에 도달한다. 대마도로부터 동북풍을 타면 연화도(蓮花島)와 욕지도(欲智島) 두 섬 사이에 이르러서 묵고 곧장 남해의 미조항(彌助項)이나 순천(順天)의 방답(防踏) 등지에 이르며, 추자도(楸子島)가 또 서해로 왕래하는 길에 있으니, 이것이 전라도로 침범해 들어오는 익숙한 길이다.
또 대마도로부터 부산까지는 정동풍(正東風)을 타면 바람 한번만 받으면 도착하는데, 동래(東萊)의 다대포(多大浦), 몰운대(沒雲臺), 초량항(草梁項) 및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의 앞바다 등지가 모두 적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며, 이것이 또 영남의 연해로 침입해 들어오는 지름길이다. 가덕도 앞바다로부터 순천(順天), 흥양(興陽) 등지로 나가는데, 이것은 또 경상도를 경유하여 전라도로 들어가는 요로(要路)이다. 그러므로 만력(萬曆) 연간에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중국에서 왜적을 막는 데 대해 의논하면서 모두 조선의 전라도와 경상도를 지키는 것으로 목덜미를 틀어잡고 등을 잡아채는 계책을 삼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려 때에는 문종(文宗) 이후로 왜구(倭寇)들이 비로소 심해졌으나 영남의 연해를 침입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 충선왕(忠宣王) 때에 이르러서는 호남의 군산도(群山島), 추자도 등지를 범하기까지 하였고, 충정왕(忠定王) 때에는 경기의 삼목도(三木島), 자연도(紫燕島) 등지 -모두 인천(仁川)에 있다.- 를 침범하기까지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해서(海西)의 봉산(鳳山)과 관서(關西)의 선천(宣川)까지 침입하여 서해와 남해 연안을 침입해 오지 않는 해가 없었으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구주(九州)의 왜였다. -우리 태조 무인년(1398, 태조7)에 일본의 왕이 상서(上書)하기를, “지난번에 명령을 어긴 구주의 소추(小醜)들은 이미 복죄(伏罪)되었으며, 이 뒤로는 마땅히 군사를 파견하여 해도(海島)에 사는 왜구의 잔당들을 모두 섬멸함으로써 왕래하는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하고 양국의 우호를 맺겠습니다.” 하였다.
비전주(肥前州)는 또 우리나라의 제주(濟州)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어서 비전주에서 곧장 제주로 향해 갈 경우에는 매우 가깝다. 그런데 평수길(平秀吉)이 무술년(1598, 선조31)에 전란을 일으키면서 비전주에 새로 궁궐을 짓고서도 끝내 감히 곧장 제주로 건너가지 못하였던 것은 바닷길이 몹시 험해서였다. 전후로 군사들이 출동하면서는 모두 대마도로부터 나와 거제도(巨濟島)와 남해도(南海島)의 남쪽 해안을 따라 나왔다. 그러므로 이순신(李舜臣)이 통영(統營)을 지키고 있자 왜적들이 끝내 바다로 해서 서쪽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지(魏志)》에 “대방(帶方)에서 왜로 가자면 해안을 따라 내려와서 한국(韓國)을 거친 다음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간다.” 하였으니, 예로부터 왜국과 통함에 있어서는 모두 이 길을 거쳤던 것이다.
동쪽과 북쪽의 두 해안이 예로부터 변방의 걱정이 적었던 것은, 수로가 험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상륙한 뒤에도 몹시 험준했기 때문이다. 은기주(隱岐州)는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며, 육오주(陸奧州)는 또 우리나라 북방의 슬해(瑟海)와 겨우 400리 떨어져 있다. 고려 말기에 동북(東北) 경계를 침범해 온 왜구들이 모두 패몰(敗沒)하였는데, 이는 은기주나 육오주의 왜구들이 곧장 동해를 건너온 것이 아니라 바로 오도(五島)와 대마도의 왜구들이 영남의 해로를 따라 나온 것이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왜구들이 모두 영해(寧海)의 축산도(丑山島)를 경유해서 원주(原州)와 춘천(春川)을 거쳐 철원(鐵原)으로 침입해 들어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왜구들이 중국을 침입함에 있어서 절강(浙江), 직례(直隸), 민(閩), 광주(廣州), 등주(登州), 내주(萊州), 천진(天津)은 모두 해안으로 오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라도 한 도는 중국의 소주(蘇州), 상주(常州)와 서로 마주 대하고 있다. 만약 왜구들이 등주, 내주, 천진을 침범하고자 하면 동북풍을 타고 이 모퉁이를 빙 돌아야 하며, 또다시 동남풍이 불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큰 바다로 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흑풍(黑風)과 파도가 수시로 일어나 뜻대로 가기가 어렵다. 이에 만약 우리나라를 경유하지 않을 경우에는 등주, 내주, 천진을 침범하기가 실로 쉽지 않다.
또 우리나라는 계주(薊州), 보주(保州), 산동(山東)과는 단지 서남쪽으로 바다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육로가 없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낙동강(洛東江), 한강(漢江), 임진강(臨津江), 청천강(淸川江), 대정강(大定江), 대동강(大同江), 압록강(鴨淥江) 등 여러 강은 모두 서쪽과 북쪽의 바다와 통해 있다. 육로로 갈 경우에는 단지 요좌(遼左) 한 길이 있어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데, 수로로 갈 경우에는 7개의 길이 있어서 천진이나 산동 등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지난날에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침범해 왔을 적에는 뜻이 중국을 침범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도 절강, 직례, 민, 광주로 가는 길을 버려두고 먼저 우리나라를 도모한 것은, 이런 사정을 상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교활한 왜노로 하여금 끝내 제 뜻대로 중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 것은 역시 우리나라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왜적을 방어하는 계책을 세움에 있어서는 모두 우리나라를 경리(經理)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심지어 ‘관백(關白)이 조선을 도모한 것은 실로 중국을 도모한 것’이라고까지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성조(聖朝)에서 왜적들과 강화한 뒤로는 견마(犬馬)와 피폐(皮幣)로 그들의 욕심을 채워 주어서 수백 년 이래로 변방의 화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악독한 마음을 돌리지 않고 사나운 심성으로 항상 침범하기를 도모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수로가 경유하는 길을 대충 서술하였으니, 바다를 방비하는 계책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주D-001]동야(東冶) : 원문에는 ‘東治’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주애(朱厓)와 담이(儋耳) : 모두 지금의 해남도(海南島)에 있었던 고대 국가이다.
[주D-003]한해(瀚海) : 원문에는 ‘翰海’로 되어 있는데, 《북사(北史)》 권90 왜열전(倭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10일 : 원문에는 ‘十里’로 되어 있는데, 《북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축자도(筑紫道) : 축자는 구주(九洲)의 별칭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0권
 교빙지(交聘志) 8
표류(漂流)

○ 신라 사람이 바다에 표류하여서 귀국(鬼國)에 도착하였는데, 귀국 사람들이 그들을 잡고서 말하기를, “너는 우리와 함께 겨[糠]를 3자[尺] 높이로 쌓겠는가, 아니면 너의 코를 1길[丈] 길이로 늘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겨를 쌓겠다고 하였는데, 쌓지 못하였다. 그러자 귀국 사람이 그의 코를 뽑아서 코끼리의 코와 같게 만들었다. 《유양잡조(酉陽雜俎)》
○ 능주 자사(陵州刺史) 주우(周遇)가 청사(靑社)의 바다에서 민(閩)으로 돌아오다가 태풍을 만나 5일 동안 밤낮을 표류하여, 몇천 리나 떠내려갔는지를 모른 채 모두 여섯 나라를 거쳤다. 첫 번째는 구국(狗國)으로, 같은 배에 탔던 신라(新羅)의 나그네가 말하기를, “이곳은 구국이다.” 하였다. 그곳에서 머뭇거리고 있노라니 과연 벌거벗은 사람이 개를 끌어안고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배를 바라보고는 놀라서 달아났다. 또 유규국(流虯國)을 지났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아주 작았으며, 모두 한결같이 마포(麻布)를 입고 있었고 예의가 있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음식물을 가지고 와서 쇠못과 맞바꾸기를 요구하였다. 신라의 나그네 역시 그들의 말을 반쯤 알아들었는데, 그들이 신라의 나그네를 보내어 속히 지나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표류해 온 중국 사람이 있을 경우 재앙이 있을까 염려한다.’ 하였다. 《영표이록(嶺表異錄)》
○ 등주(登州)에 사는 장사꾼인 마행여(馬行餘)가 바다를 돌아서 윤산(崙山)으로 가려고 하다가 동려(桐廬)를 지날 때 마침 서풍이 불어서 신라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임금이 마행여가 중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는 빈례(賓禮)로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해마다 유학(儒學)을 익히는 자가 있어서 중국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그들이 과거에 급제하고서 금의환향하면 내가 반드시 녹봉을 후하게 주었다. 이에 공자(孔子)의 도(道)가 오랑캐 땅과 중국 땅에 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고는, 인하여 마행여와 더불어서 경적(經籍)에 대해 논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행여가 자리를 피하면서 말하기를, “용렬하고 누추한 장사치가 몸은 비록 중국 땅에 오래 살았지만 농사짓는 법이나 배웠을 뿐 시서(詩書)의 뜻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시서를 익히고 예율(禮律)을 밝히는 것은 사대부들이나 하는 일이지, 소인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고는, 끝내 사양하면서 배를 타고 부상(扶桑) 땅을 떠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신라의 임금이 의아해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중국 사람들이 모두 다 학문을 잘할 것으로 생각하였지, 학문을 모르는 속인(俗人)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마행여가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의식(衣食)만 탐하다가 우매해져서 학문의 도를 알지 못하여 외국 오랑캐에게 모욕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하물며 영철(英哲)들이겠는가. 《운계우의(雲溪友議)》
○ 가우(嘉祐) 연간에 곤산현(崑山縣) 상해(上海)에 돛대가 부러진 배 한 척이 바람에 표류하여 해안에 도착하였다. 배 안에는 30여 인이 타고 있었는데 옷차림새가 당(唐)나라 사람 같았으며, 붉은 가죽의 각대(角帶)를 띠고 검은 베로 만든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보고는 모두 통곡하였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에 시험 삼아 그들에게 글씨를 써 보게 하였으나, 역시 읽을 수가 없었다. 길을 갈 때에는 서로 줄을 지어서 가 마치 기러기가 줄지어 가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 그들이 글 하나를 내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바로 당나라 천수(天授) 연간에 둔라도수령 배융부위(屯羅島首領陪戎副尉)에 제수한 것이었다. 또 글 하나가 있었는데, 고려에 올리는 표문으로 역시 둔라도(屯羅島)라고 칭하였으며, 모두 한자(漢字)로 썼으니, 대개 고려에 신하로 복속한 동이(東夷)였다. 배 안에는 여러 가지 곡식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직 연밥만 한 삼씨[麻子]를 소주(蘇州) 사람들이 심었는데, 첫해에는 연밥만하더니 다음 해에는 조금 작아졌고, 몇 년 뒤에는 중국의 삼씨만해졌다.
그 당시에 찬선대부(贊善大夫) 한정언(韓正彦)이 곤산현 지사(崑山縣知事)로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다 먹고 나자 그들은 손으로 머리를 받들고 말이 땅에 엎드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는데, 마치 기뻐서 감사해하는 뜻 같았다. 한정언이 사람을 시켜서 배의 돛대를 고쳐 주게 하였는데, 돛대를 예전대로 선목(船木)의 위에다가 꽂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인(工人)이 회전축(回轉軸)을 만들어서 일으키고 쓰러뜨리는 법을 가르쳐 주니, 그 사람들이 또 기뻐하면서 손으로 머리를 받들고는 말이 땅에 엎드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몽계필담(夢溪筆談)》 ○ 삼가 살펴보건대 둔라(屯羅)는 지금의 탐라(耽羅)이다.
○ 금(金)나라 천회(天會) 9년(1131, 인종9)에 고려 사람 10인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태풍에 배가 표류하여 해안에 도착한 것을 갈소관(曷蘇館) 사람들이 잡았는데, 조서를 내려서 그 나라에 송환하게 하였다. 《금사》
○ 원(元)나라 때의 일사(逸士) 송원(宋元)은 자가 자허(子虛)인데, 바다로 들어가 죽도(竹島)로 향해 가던 중 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지면서 큰 파도를 따라 표류하다가 고려에 도착하여 고려의 여러 산을 둘러보았다. 《원시선(元詩選)》
○ 후지원(後至元) 원년(1335, 충숙왕4)에 일본의 상인 100여 인이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고려에 도착하였는데, 고려 사람들이 그들의 재물을 빼앗고 표문을 올려 그들을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기를 청하니, 철목아탑지(鐵木兒塔識)가 안 된다고 하였다. 《원사》
○ 명나라 홍무(洪武) 원년(1368, 공민왕17)에 표류해 온 고려국 사람을 송환하였다. 《명산장삼향기(名山藏三享記)》
○ 만력(萬曆) 17년(1589, 선조22) 11월에 조선의 배신(陪臣) 기잠(奇岑) 등이 주본(奏本)을 올려 아뢰기를, “올 6월에 대유구국(大琉球國)의 배가 바람에 표류하여 해안에 도착하였기에 그 배에 타고 있던 남녀를 모두 경사(京師)로 해송(解送)하였으니, 공문을 주어 돌려보내 주소서.” 하므로, 그 말에 따랐다. 《명사》
○ 무릇 표류해 온 조선 사람들이 회동관(會同館)에 도착하면 즉시 해당 통사(通事)와 서반(序班)이 통역을 하여 분명하게 알아낸 다음 날마다 땔감과 쌀을 충분하게 주고, 병부(兵部)의 위관(委官)이 연도(沿道)에까지 호송하여 요동진순아문(遼東鎭巡衙門)에 회부한다. 그러면 별도로 관원을 뽑아 본국으로 돌려보내되 국왕에게 통보하여 알린다. 해당국의 사신이 관소에 머무르고 있을 경우에는 즉시 데려가도록 하되, 일체의 물품과 상(賞)은 응당 지급하여 준다.
○ 차관(差官)이 조선국에서 표류해 온 이인(夷人)을 반송(伴送)하는 것에 대해서 가정(嘉靖) 27년(1548, 명종3)에 제본(題本)을 올려서 준허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부에서 기한을 정한 다음 경사(京師)로 돌아온 날짜를 따져 날짜를 어겼는가를 조사하되, 1년 이상을 어긴 자에 대해서는 무관(武官)은 각 위(衛)에 조용(調用)하고, 문관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않는다. 연도에서 사단을 일으키거나 백성들을 침해한 자에 대해서는 그곳의 관사에서 순무(巡撫)나 순안(巡按)에게 통보하고, 순무나 순안이 이를 본부에 전달하면 본부에서 잡아다가 조사해서 치죄(治罪)한다.
○ 또 표류해 온 조선국 사람이 경사에 도착하면 땔감과 쌀을 지급해 주는 이외에 각자에게 무명옷 1벌, 가죽신 1켤레를 지급하되, 여름철에는 목면포의(木綿布衣) 2벌로 바꾸어 지급한다. 또 조선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은 옷과 양식을 적당히 헤아려 지급해서 돌려보내게 한다. 《이상 모두 대명회전》
○ 왕광겸(王光謙)은 온주부(溫州府)의 제생(諸生)이다. 집이 가난하여 해외를 오가면서 무역하는 사람의 집에 부쳐 살았는데, 바다를 오가면서 장사하는 자들이 이익을 크게 남기는 것을 보고는 왕광겸 역시 그들을 따라 함께 갔다. 도중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서 표류하다가 모르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산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곳에 정박하였다.
어느 날 빈 골짜기의 석굴(石窟)로 들어갔다가 곁에 풀이 있어서 그 뿌리를 캐어서 먹었더니, 기갈이 갑자기 그치고 정신이 상쾌해졌다. 식자(識者)가 말하기를, “그것은 인삼(人蔘)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산에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니 홀연히 작은 배 수십 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산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배를 정박하고 와서 캐물은 다음 중국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배에 태워서 데리고 갔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의 해변을 순시하는 배들이었다.
그 사실을 조정에 아뢰니, 조선의 왕이 그들을 불러서 만나 보았다. 왕이 왕광겸에게 묻자, 왕광겸이 생원(生員)이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뗏목을 타고 온 것인가?” 하고는, 인하여 부해(浮海)라는 제목으로 왕광겸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이에 왕광겸이 붓을 들어서 지어 올리기를,
오랫동안 생업을 경영하다가 / 久困經生業
사신처럼 뗏목을 타고 왔다네 / 乘槎學使星
거친 풍랑 만나지 않았더라면 / 不因風浪險
어떻게 이 왕정에 도착했으랴 / 那得到王庭
하니, 왕이 칭찬하면서 예에 맞게 잘 접대하였다. 왕광겸이 일찍이 왕을 만나 보면서 여러 차례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배를 마련해서 왕광겸 및 여러 사람들을 요동으로 실어다 주었는데, 왕이 몹시 후하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왕광겸이 조선에 있을 적에는 그곳의 여러 신료들이 시를 짓는 성대한 모임을 가질 때마다 그를 초청하였으며, 중국으로 떠나올 때는 선물을 자못 많이 주었다. 왕광겸이 집에 도착해서 헤아려 보고는 5년이나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견문록(見聞錄)》
○ 육소(陸蘇)는 자가 망래(望來)이고, 강음(江陰) 사람이다. 갑신년에 국란(國亂)을 만나서 7일 밤낮을 애통해하며 울부짖다가 마침내 두건과 옷을 찢고 붓과 벼루를 불태워 버렸다. 그런 다음 온 집안사람들을 거느리고 배로 옮겨 가 살면서 다시는 육지에 오르지 않겠다고 맹서하였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모두 배 안에서 치렀다. 그러다가 일찍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고려국에 도달하였는데, 그곳에서 고려의 시인(詩人)인 국리(國釐) 등 10여 명의 선비들과 더불어 한 달 남짓 시를 읊다가 돌아왔다. 《유계외전(留溪外傳)》


[주D-001]청사(靑社) : 청주(靑州)를 가리킨다.
[주D-002]갈소관(曷蘇館) : 여진족의 부락 이름으로, 요양(遼陽)의 남쪽에 있다. 금나라 때에는 이곳에 갈소관로(曷蘇館路)를 설치하였다.
[주D-003]기잠(奇岑) : 기령(奇苓)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주D-004]응당 지급하여 준다 : 원문에는 ‘應時’로 되어 있는데, 《대명회전(大明會典)》 권108에 의거하여 ‘應付’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